수원140515b-(창세기1)5강 - 이 근호 목사
수원140515b-(창세기1)5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수원140515b-(창세기1)5강 - 이 근호 목사
창세기1장에서 하나님께서 7일 만에 창조했다는 것은, 왜 8일이 아니고 왜 9일이 아니고 왜 7일이냐, 이건 장차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창조 분의 사역, 그 분의 하실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지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애초부터 그런 게 없습니다. 애초부터 시간과 공간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한 건데, 예수님 본인은 시간과 공간이 필요 없어요. 왜? 처음이고 나중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처음과 나중이 이렇게 같이 만나게 돼요. 만나게 되면 이런 게 있잖아요. 빳빳한 종이가 있잖아요. 탄력성이 아주 강한 종이를 돌돌 말아보는 거예요. 돌돌 말아버리면 둥그렇게 되지요. 그리고 손을 딱 떼면 휙 하고 금방 다시 풀리지요. 말려있는 것을 탁 풀면 처음이고 나중이 되는 겁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만나서 탁 풀면 창세기, 요한계시록이 펼쳐지고 모으게 되면 그리스도 하신 일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시간입니다. 처음이고 나중인 모든 시간은 우리 주님한테는 시간이 필요 없고 주님이 펼치는 그 세계를 위해서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세상을 늘 출현시키는 이 작용 자가 관여하게 되면 시간과 플러스 묵시가 같이 섞여서 역사를 진행시키지요. 사람들한테는 눈에 보이는 것은 뭐냐 하면, 시간이니까 시간을 가지고 나와 결부하게 되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역사’라고 합니다.
시간은 그냥 시간이지만, 내가 시간 속에 내 나름대로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건 뭐냐 하면, 역사가 돼요. 그러면 처음의 나가 누구냐 하면, 처음의 나가 아담입니다. 주님의 시간이 아담이 출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주님 위주의 시간이 아담과 이렇게 결합되면 아담 나름대로의 뭐가 생깁니까? 아담의 역사가 생기겠지요. 그게 바로 인류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
인류의 역사가 뭐로 되어있는가 하면, 아담 플러스 하와로 되어있어요. 아담 +하와, 아담 플러스 하와로 되어있다 말이죠. 그런데 아담은 뭐냐 하면 죽음이에요. 흙이고. 하와는 뭡니까? 이름이 생명이고. 죽음과 생명이 결합된 체 역사를 만드는 겁니다. 이 생명은 여자의 후손의 이름으로 진행하고 이 죽음은 뱀의 후손의 이름으로 진행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니가 인간의 역사는 무슨 일들이 사건들이 연결, 연결될 것인데 그 사건은 질적으로 둘 중에 하나다. 질적으로는 뭐냐 하면, 뱀의 후손을 드러내는 점과 여자의 후손을 드러내는 점이 한데모인 그런 사건, 사건들의 중첩, 그게 우리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 이야기했지만 여러분, 장갑 한 짝만 삽니까? 장갑을 두 짝 사야 되겠습니까? 두 짝 사야 되지요. 항상 어떤 사건을 해석할 때는 좋은 사건이 아니에요. 사건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요렇게 되고, 마귀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된다 하고, 마귀의 일과 하나님의 결합된 사건이 계속 항상 모든 사건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무슨 사건이냐 하면, 말씀의 역사, 말씀의 사건, 말씀의 진행 전개과정,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은 겁니다.
성경해석의 원리가 이미 장착이 되어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풀린 거예요. 뭐냐 하면, 정과 반, 옳은 분과 거기에 반대되는 것, 둘 다 풀어내면 성경해석이 되는 겁니다. 옳은 것 반대. 인간이 보기에 옳은 것은 옳은 게 아닙니다. 인간보기에 반대는 나쁜 게 아니에요. 인간은 아예 반대에 들어가 버려요. 반대에 들어가 버리고 우리의 하나님 이름께서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른 일을 두 개를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온 게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아벨이 되고 이쪽의 반대는 가인이 되겠지요.
그런데 아벨은 그냥 자살해 죽는 것이 아니고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요.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잖아요. 그럼 이쪽이 뭐냐 하면, 죽임을 당할 때, 이게 생명이고 생명이라고 느껴지는 이것은 죽일 때 이게 뭐냐 하면, 저주가 되고 영원한 죽음이 되는 겁니다. 인류의 역사라 하는 것은 항상 생명과 저주, 생명과 심판, 같이 이것이 출현되도록 주께서 작용하는 겁니다.
창조라 하는 것은 터인데, 그 터 위에서 작용이 되어버리면 항상 그 터 위에 군데, 군데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사건은 출현이고 그 출현을 일으킨 어떤 작용 자가 계시고 그 작용 자는 아까 창세기4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죠.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께서 일을 일으키고 일으킨 현상은 뭐냐, 어떤 사건이 터지면 사건은 반드시 둘 중에 하나다 말이죠. 한 쪽은 죽음이고, 다른 한 쪽은 생명이고. 반드시 두 개다 포함된 그러한 대립되는 성질을 드러내면서 사건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창세기5장에 보면, 내가 이 인간들이 육신이 됨으로 내가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다시는 있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창세기5장에 보면, 아담의 후손들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해놓고 에녹에 와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죽음을 보지 않고 에녹과 함께 동행을 했기 때문에 그냥 데려가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생명과 사망, 그리고 축복과 저주, 그것이 같이 동반해서 같이 일어나는 사건들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했던 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제가 토스트 이야기했지요. 식빵 이야기했습니다. 식빵이 이리 있는데, 식빵을 얇게 썰어보는 거예요. 단면들이 나오지요. 상상할 수 있겠지요. 관통하는 게 같이 A는 A끼리, B는 B끼리 같이 연결되겠지요. 요 끊어진 단면들, 하나의 사건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갈 때 예를 들면, 진도에 배 침몰한 사건이 날 때, 그 속에서 신자와 불신자가 따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로 사건을 통해서 구분되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사가 쫓겨나왔다. 이것도 사건이잖아요. 또 애가 몸이 아프다. 이것도 사건이지요. 사건 속에서 계속 생명에 속한 사람과 여자의 후손에 속한 사람과 뱀의 후손에 속한 사람과 구분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작용을 해주시는 겁니다.
마태복음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시고 일을 나서시면서 하는 말씀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내 권능을 가지고 전도하게 될 때, 너희들의 평화를, 복음을 전할 때, 거부하거든 먼지를 떨어버려라, 그리고 하신 말씀이 11장에 들어가면 이 시대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하게 심판받을 것이다, 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은 이유가 뭐지요?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멸망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보낸다는 것은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게 아니고 오히려 악함을 더 노출시키는 그런 계기로서 12제자를 파견한 겁니다. 일종의 약을 올리는 거예요.
복음전해서 안 받아들이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하게 저주받는다는 것을 비로소 노출시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그걸 ‘확인’이라 해요. 확인. 그걸 확인하는 거예요. 확인 작업이 되겠지요. 12제자가 한 전도는 다른 게 아니고 확인 작업이었습니다. 죽었니? 살았니? 건드려보는 거예요. 전도 참 쉽지요? 욕심 안내면 돼요. 이건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나시고 소위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감추시니 옳소이다. 참 잘하셨습니다.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 아버지 일 잘하셨습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뒤의 말이 뭐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개나 줘버려라.” 똥개한테나 다 줘버려라. 그러니까 니가 짊어질 이유가 없다. 나한테 책임을 묻습니까? 어떤 책임 추궁을 합니까? 건드려 보라는데 그냥. 죽었니? 살았니? 시체야, 살았니? 건드려보라는 거예요. 이게 뭐가 힘들어요?
자, 이 시간에 할 것은 터에서 뭐로 채워지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터에서 채워지는데 있어서 인간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인간은 조연이에요. 조연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서 조연이 또 등장해요. 누구냐? 뱀, 사단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 창조가 인간위주가 아니지요. 감독은 따로 있고, 큐 사인 떨어져야 돼요. 메가폰(확성기) 딱 준비해가지고 “자, 자, 준비하시고. 조명 놓고, 큐 들어갑니다.” “자, 뱀, 사단!” “에덴 투” “자, 아담! 아니 좀 참았다가. 하와! 선악과 따먹어! 옳지. 따먹는 자세 좋고. 옳지, 그림 나오네. 남편 꼬셔야지. 좋았어.” 이리 되는 거예요. 따먹어야 돼요. 한 3일 참으면 4일째는 괜찮아요? 3일째 안 따먹을 거 버티면 4일째는 따먹을 마음이 싹 가시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백화점에 옷이 좋은 거 있는데 한 3일 봤으면 4일째는 안사고 싶어요? 아니면 더 사고 싶어요? “주여, 3일 참았습니다. 제 신앙으로서는 3일 참았으면 많이 참은 거니까 4일째 사더라도 사치했나니, 육신의 정욕을 찾나니 그런 잔소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일이나 참았는데. 저도 양심이 있지 그냥 사지 않았습니다. 많이 견디고 했으니까 봐주세요.” 이리 하잖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안사면 안산만큼 욕망이 증폭돼요. 계속 쌓이게 돼요. 쌓이게 되면 안에 스프링이 있어요. 스프링이 있어가지고 폭발적으로 사게 되어있습니다. 카드 확 긁어버립니다. 5일째 가다가는 내가 우울증 걸리겠어. 쏴버려야 돼요. 주께서 좋은 옷을 걸어놓은 것은 우리보고 사라고 걸어놓은 겁니다. 아이고, 오늘 또 위험한 말 나온다. 또. “아이고, 니가 참아 봤자지. 일주일 봐줬다고 착한 줄 알아?” 결국은 살 걸 가지고. 우리는 조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거에요.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싶어서 노리는 게 아니고 죄가 지으라고 다가오게 되어있어요. 우리 코앞에 들이 내미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감독의 큐 사인 없이는 그런 죄가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참아도 평생 동안 죄를 안 지을 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죄를 지으라고 만든 몸이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이제부터는 상당히 난해한 예를 하겠습니다.
창세기2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뭐냐 하면, 흙으로 몸을 만드시고 몸에다가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그 전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했어요. 창세기1장 27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창세기2장의 요 이야기를 우리가 모른다고 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라고만 딱 들으면 이 몸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리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 존재 전체, 이 덩어리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리 된다 말이죠. 1장을 보게 되면.
그런데 2장을 보니까 만든 작업 순서가 나오지요. 흙에서 몸이 되고 생기를 집어넣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존재도 아니고 덩어리도 아니고 뭐냐 하면, 우리에게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 형상됨이 우러나오도록 사골이 우러나오듯이 우리가 사골이라면. 이 표현이 적당하네요. 제가 해도.
우리가 인간이라면 우리 인간의 삶에서 뭐가 나온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러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12시간 푹 골까요. 평생을 살면서 우러나오도록 하는 겁니다. 시누이하고 올케하고 싸우면서 형상이 튀어나오게 하고 아버지, 엄마 싸우면서 형상 우러나오게 되어있고 모든 매사가 형상이 우러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우리가 2장을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전체가 형상 맞지요? 잘 간수하겠습니다.” 자꾸 형상을 간수하려고 해요. 그게 바로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했기 때문에 “간수 똑바로 해! 그 형상을 빛내고 광택 내! 그러면 그게 성화과정이고 그게 거룩이고 그런 사람이 구원받는다.” 이게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맞지요?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본받아야지.” 이리하잖아요. 이게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이게 칼빈신학이에요. 청교도신학이고. 청교도신학은 제가 부산강의에서 했기 때문에 음성강의 다 되어있어요. 보시면 청교도 조직신학 1시간20분만에 다 해버렸어요.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흙에서 몸, 생기지요. 방향표가 흙에서 몸, 몸에서 생기잖아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인간을 죄 짓게 만들어가지고 생기에서 몸으로 몸에서 흙으로 되돌아가면서 여기서 과정을 통해서 우러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저항할 수 없어요.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말릴 수가 없어요. 지금 인생사는 게 이 과정입니다. 생기에서 몸으로, 몸에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생기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떠나버리니까 뭐가 생겨요? 몸이 뭐가 돼요? 몸이 육신이 되어버려요. 창세기6장에 보면 뭡니까? 내가, 사람이 육신이 됨으로 뭐가 함께 있지 않겠다. 육신이 될 경우에는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않잖아요. 여기에 보세요. 처음에는 몸을 만들어놨는데 몸이 뭐로 변했습니까? 몸이 죄로 말미암아 몸이 아니고 육신으로 변한 거예요.
육신이 돼서 육신의 끝이 뭡니까? 결국 흙으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 육신이라면 구원은 끝났네. 구원이 안 되겠네요. 아, 요거 참 어렵네요. 창조에서 창조를 무 창조로, 창조를 원형으로 돌리면서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게 되는데, 그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는 그 모든 작업이 바로 무슨 작업이냐 하면, 구원 작업이 되는 겁니다.
구원 작업은 창조보다 더 월등해요. 구원 작업은 창조를 근거로 해서 배경으로 해서 구원의 추가적인 요소가 들어오면서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창조의 완성은 뭐다? 구원이라는 말이 합당한 말이 맞아요. 지금 교회에서 하는 거와는 다르지만. 성경에서 창조의 완성이 구원이라는 말이 합당합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창조가 있어야 된다. 십자가를 위해서 창세기1장이 있어야 된다. 그 말도 합당한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해놓고 이 창조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창조를 무효로 돌리는 작업을 구약 내내 해주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걸 원형으로 돌릴 때, 그 돌리는 작용 자가 있어야 되지요. 작용하는 분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언약이고 언약 이전에 있었던 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약속’이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주어진 것이고, 언약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약속은 이미 하나의 프로젝트고 프로젝트를 역사 속에서 현실화 시킬 때 그걸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 12시에 만나자.” 이건 약속이고 만나기 위해서 커피숍에 나서는 요 모든 행위는 언약이고, 그 나설 때 하나님의 이름이 나서는 거예요.
하나님은 언약을 약속하셨고 자기 약속인 언약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역사 속에 실천해서 이 땅에 투입된 분이 여호와이름이고, 여호와이름이 다른 말로 하면 주가 되고, 그래서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홀로 언약을 다 이루어내신 홀로 약속을 다 이루어내셔서 창조를 구원으로 완성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 그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가 재료가 됩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뭐가 돼요? 재료가 되고 도구가 되고 그게 하나의 자재가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생기가 떠나고 육신이 되고 육신의 흙으로 돌아가면서 누가 첨부가 되는가,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첨부되게 되면, 돌아가더라도 구원받아요. 이렇게 흠이 되더라도 구원받아요. 그렇게 나를 죽이시는 분이 하나님의 언약이신 여호와 하나님,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죽이심을 고백할 때, 그 사람은 주 안에 있는 사람이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이 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실수했었습니다.” 라든지 “안 그래야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당연히 했어야 될 조치였습니다. 하나의 영화스토리 전개를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뱀, 마귀, 이단, 적그리스도, 다 필요한 소품들이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애들이 태권도로 떠드는 것도 소품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도 필요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할 일은 간단하지요. 살 때까지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돼요. 왜냐 하면, 그렇게 하시는 분이 누구시다? 우리 주님이 하신다는 고백을 내뱉으면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형상이 노출되고 계속 우러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사골이니까. 내가 우러나오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려내시는데 주님이 십자가로 우려내시고 우리는 그 동반해서 우리의 죄가 우러나고. 죄와 십자가의 은혜가 늘 만남이 형상이란 작용 자에 의한 작업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우리는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 인생은 창세기1장, 2장에서 떠난 적이 없지요. 3장에서 떠난 적이 없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말씀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요한계시록 안에서 우리는 절대로 떠난 적이 없어요. 모든 것이 요 스케줄 안에서만 이루어져요. 멀리 갈 것도 없어요. 성경 안에서 놀면 됩니다. 성경 안에 일이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지금 머리카락이 허옇게 쉬었는데 저도 염색했는데 우리는 확인만 할 뿐이에요. 권사님도 확인하면서 “아이고, 흙 다 되었네.” 확인만 해주면 돼요. 확인. 성도의 삶은 확인 작업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늙었다.” 하면 안 되고요. “주께서 늙게 하셨기 때문에 저는 늙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늙은 역할을 맡은 거예요.
창세기2장, 3장에 우리는 옛날이야기로 배웠지, 성경 볼 때에 “아이고, 창세기 옛날 구닥다리 이야기”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현재진행형이에요. 애가 태어났잖아요. 창세기2장의 저촉을 받습니다. 또 산부인과에서 애가 태어나면 또 창세기2장. 선악과,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자로 태어난 거예요. 이미 우리 자식이 있으면 자녀가 이미 선악과 따먹었어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가 신이에요. 애들 치고 신이 아닌 애가 없어요. 모두가 자기가 절대자에요. 추사랑(추성훈의 딸)도 마찬가지고. 모든 애들이 자기밖에 몰라요.
치매 걸린 노인네들도 뭘 할 줄 아는가 하면, 요양사가 오게 되면 인물로 계급을 따지게 되어있어요. 치매 걸려도. 이쁜 요양사, 못난 요양사 구분할 줄 압니다. 저 애들요, 귀신같아요. 못난 선생님과 예쁜 선생님 구분할 줄 알아요. 주일학교 선생님들, 애들은 뭐로 구분하느냐, 못난 선생님과 예쁜 선생님으로 구분합니다. 성질 좀 나빠도 이쁘기만 하면 돼요. 왜 그러느냐, 뭘 따먹었어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만 한, 칸트는 그걸 가지고 미적 공통성이라 했어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보면, 미적 공통성, 미적으로 인간은 동일하다. 미적으로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웃사랑을 해야 된다. 왜? 너나 나나 똑같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아름답게. 아름답게 행동하게 되면 누구도 감동한다? 이게 칸트의 윤리에 나옵니다. 이건 언제 부산강의에서 칸트 할 때 하겠지만. 인간은 먹음직도 보암직도 이게 선악과가 이렇게 탐스러워요. 여기에 대해서는 아담도 마찬가지고 하와도 마찬가지고 그 뒤에 아벨 태어나고, 가인 태어났으면 마찬가지 또 따먹고 또 따먹고 이쁜데 따먹지요. 이쁘니까 따먹는 거예요. 이쁘니까. 못생겼으면 따먹지도 않아요. 꽃이 못생긴 꽃은 보지도 않아요. 예쁜 꽃 같으면 카메라 들이대고 같이 찍고 난리 나잖아요.
사람이 자기가 서글퍼질 때 더욱더 이쁜 걸 찾게 돼있습니다. 이게 보충논리인데요. 항상 인간의 모든 행동은 미흡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라캉의 철학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행동을 주시하라, 원리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반듯이 빼먹은 것을 마저 채우는 식으로 행동하게 돼있어요. 그게 신학적으로 증명이 됐는데요. 그 말이 신학적으로 인간은 지금까지 교회사에서는 모든 신학은 요 한가지로 끝납니다. 뭐냐 하면 회복신학. 대표적인 것이 통일교에요. 통일교는 회복교회입니다. 통일교만 회복교회가 아니고 지방교회 워치만리도 회복교회. 그리고 감리교의 생태신학도 만물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회복된다고 이야기했어요. 회복 못해서 환장한 거예요.
인간이 이방인 적인 타고난 본성이 뭐냐 하면, 이미 자기가 “이 정도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자기 기준 자기가 정해서. 이건 조연이 마치 주인공이라. 조연이. 지가 전지현도 아니고 김 수현도 아닌 게 자기가 주인공도 아닌 게 자기가 주인공 노릇을 다해요. 해가지고 자기가 주님보고 지시해요. “주님이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 사람 복 줘야 되고요. 유병언도 암에 걸려 죽어야 되고요.” 자기가 현실에서 자기가 지휘감독 다해버려요. 그게 안 되잖아요. 안되니까 다른 걸로 보충하는 거예요. 다른 걸로. “에이, 유 병언 장남 잡히지도 않고. 에이 더러워서 술 한 잔 먹어야겠다.” 술 한 잔 먹는 이유가 뭐예요? 세상에 장남이 안 잡히니까 꿀떡! 화가 나가지고 때워요. 내가 미는 대통령 후보가 안됐을 때는 무엇으로 때워요? 술로 때우는 거예요. 오늘도 술 이야기하는데 참석 안하셨네요. 다 듣고 계실 거예요.
반드시 인간은 자기가 세상을 관장해야 되고 자기가 챙겨놓은 상상을 매일같이 아침에 눈만 뜨면 상상해요. “오늘은 요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굳혀 놓고 그게 안 되잖아요. 술로 먹던지 다른 걸로 취미생활 하던지 골프 치던지 하여간 스트레스 풀고 어느 정도 균형 맞혔다 싶으면 “회복되었네.” 하고 잠자리에 들잖아요. 이게 인간의 행동입니다. 아주 제대로 봤지요. 회복했을 때 그게 뭐냐 하면, 회복된 수준을 뭐라고 하느냐 ‘아름다움’이에요. 칸트에 의하면 아름다움. 성경으로 하면 먹음직, 보암직도 한. 그러니까 자기가 자신 보기에 ‘그래, 이만하면 내가 살만한 가치를 내가 보유하고 있다고, 이만하면 내 자신에 대해서 내가 점수 쳐줄 수 있어.’ 하고 서로 자기 절대화에 빠지면서 오늘도 평안히 잠자리에 드시는 시간.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와요? 어딜 나와요? 주님의 형상이 나온다고요? 우러나오지 않아요. 바로 우리 육신이 이런 거예요. 다시 말합니다. 아직도 선악과는 진행 중입니다. 우리는 먹음직, 보암직,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 그것이 목표가 되고 마음대로 잘 안 되니까 회복을 외치면서 회복될만한 취미생활로 매우는 식으로 땜질하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내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 언약의 영이 오게 되면, 그런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죄가 되면 그 죄가 있는 곳에 그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과 자비도 함께 일어나는 현장으로서 이 시장 터에서 우리를 지금도 활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주의 증인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세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데 우리는 성경 몇 장 읽고 다시 세상으로 눈 돌립니다. 주여, 이제는 세상에서 말씀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수원140515b-(창세기1)5강-이 근호 목사.hwp (25.0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