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4. 25) 2강
광주 강의(2014. 4. 25) 2강
이름 : 서경수(IP:118.35.140.182)
광주 강의(2014. 4. 25) 2-2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5절을 보겠습니다.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아닌데 그에게 세례 받으면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바치면 구원 됩니까? 아니죠.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고 기뻐했지요. 이 부분이 참 난해한데, 아브라함이 언제 예수님을 봤으며, 어디서 받으며, 왜 봐야합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드림으로 신앙이 있음을 인정받았어요. 그러면 됐는데 왜 예수님을 꼭 만나야 됩니까? 신앙 있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것 아닙니까? 이것 외에 또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면 신앙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뜻이고, 미흡하다는 말이잖아요.
미흡하고 모자란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들 바치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아들을 바치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살려주므로 ‘내가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알아요.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인지 아닌지는 기도해서 응답 받으면 믿는 것이고, 응답 못 받으면 안 믿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떤 사건으로 몰아넣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행함으로 구원 되는 것이 아니구나.’를 확실하게 알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만 받고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그들은 구원 받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노인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회개했는데 이틀 후에 죽었다면 구원 받습니까? 세례 받고,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는데, 세례만 받고 예수님 나타나기 전에 늙어 죽었다면 이 사람은 구원 받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시대에 예수님을 만났어요, 못 만났어요? 못 만났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네가 아직 50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했고, 예수님 답변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했어요. 그 때 사람들은 흥분해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지요.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것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시킨 일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시켰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종했는데, 막상 일을 진행하는 가운데 자신이 하는 일이 예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예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바로 연결된다고 보고, 예수님은(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이 자신과 관련이 되었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사람들이 회개를 했는데, 이 회개 자체가 하나님과 바로 연결되지 못하고 이것은 준비 절차에 머문다는 것을 본인들이 알아야 돼요.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합니다. 구약 전체가 세례 요한으로 마감이 된다면 이 전체는 예수님과 관련되어야 하는데,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 사람들이 세례 받는 후에 기다리면 예수님이 오십니까? 안 와요. 예수님은 다른 길로 갔어요. 갈릴리로 가버렸어요. 세례 요한이 세례 주는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로 가셨어요.
예수님은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지 않았어요. 그러면 세례 받은 사람들은 헛일을 한 것이 됩니까?
여기에서 세례가 무엇이며, 회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회개 의미와 예수님 십자가 지신 후의 회개 의미가 대조되면서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세례 받고 회개를 했으면, 그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 돼요. “나는 회개 했다.” 이런 식이 됩니다. 이것은 구원에 도움이 안 돼요. 회개했다고 해서 구원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주님을 기다린다고 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세례 속에 참여해야 됩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세례 받은 사람들이 세례 받을 때 주님이 참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어요. 심지어 세례 요한도 몰랐어요. 그래서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은 개인의 회개, 또는 개인의 세례는 주님에 의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개인의 세례에 참여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셔야 구약적 회개를 우리 속에서 발생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고 회개해도 이것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시면 회개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이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시켜놓고 그 자리를 세례 받는 자의 자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영역으로 접수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 받았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주님이 찾아와서 우리를 구원의 장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그럼 누가 구원 받는가? 예수님만 구원 받아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에 그냥 걸려든 거예요.
구원은 언약의 완성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언약의 완성이 구원입니다. 그럼 인간은 언약에 개입할 수 있습니까? 언약이 있는 지도 몰랐지요. 그러면 우리는 구원과 관계없어요. 구원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성취될 일이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 구원을 이루는데 그 장소를 우리로 삼으면 우리는 구원에 참여된 채로 구원되는 겁니다. 떡을 먹는데 떡을 먹다보니까 콩고물이 붙어있어요. 떡에 묻은 콩고물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떡이 맛있다고 먹는데 콩고물이 같이 묻혀서 먹히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 안에서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의인 되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마귀를 이겼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저주에서 벗어났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겁니다. 율법을 완성하고 저주에서 벗어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떡에 붙은 콩고물이라니까요. 그리스도 몸의 지체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은 생각하지 맙시다.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우리는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가씨에게 “당신은 언제 입대하십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여자는 입대 대상이 아닙니다. 대만의 어떤 아가씨는 호적에 남자로 기록되어 1개월 동안 군 복무를 했다는 해외토픽을 보긴 했습니다만 이것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지요.
구원은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개인 구원은 없어요.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이지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들 불러 모아 세례를 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쳤어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니까 백성들이 몰려와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 받기 위해 찾아온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주님 죽으심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일을 유발시키신 것입니다. 죽음이 무엇이며, 회개가 무엇이며, 세례가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세례 요한을 앞서 보내셔서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세례는 결국 예수님 자기 스케줄이에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죄도 없는 분이 왜 죄를 씻는 세례를 받습니까?”라고.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리고 죄 씻음의 표시인 세례도 당연히 필요치 않은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약적 한계입니다.
세례 요한이 생각할 때, ‘마지막 심판이 가까이 왔으니 죄 지은 사람(개인)은 나에게 와서 죄 씻음 받는 세례를 받아라.’ 이런 마음으로 세례를 준 거예요. “군인들은 두 벌 옷을 갖지 말고, 토색한 것이 있거든 갚아주고” 이게 무슨 관점인가 하면, 신약적 관점이 아닌 구약적 관점이죠.
개인적 심판은 세례 요한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접수하고 나중에 십자가를 믿는가, 안 믿는가? 이것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하간 세례 요한은 오해를 했지만 예수님이 본인의 구원을 위해서 접수할 거란 말이지요. 죄가 없으면서 죄 속에 들어와야 되고, 회개할 것도 없으면서 회개를 위한 세례를 받아야 하고. 이 전부가 예수님이 하실 일이 되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죄도 없는 분이 죄 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으러 오시다니요?)에 예수님 하신 말씀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은 인간들이 완성할 수 없고 예수님이 (구약 율법을)다 이루신 후에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 구원은 아닙니다. 주님의 구원을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 주시려고 주님 세계에 참여된 자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제 구원 받았다.” 이렇게 독자적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자기 세계에 끌어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 심판 이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정립이 되는 겁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여기에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물세례와 같은 방식으로 성령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물 안에 잠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안에 잠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세례 요한까지)의 구원, 즉 회개하고 물세례 받으면 구원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가 무엇인지 회개가 무엇인지 새롭게 드러납니다. 죄를 알고 회개하고 물세례 받아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예수님을 경유하면 성령 안에서 죄가 무엇인지 새롭게 밝혀지는데 이것을 앞당겨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구원 받았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답변해 보세요.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구원에 참여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해요. 이 질문은 내가 나에게 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구원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 이렇게 되어야지, ‘나는 언제 구원 받지?’ 이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종교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착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악하다. 그런데 착해야 될 사람이 악한 일을 하면 남는 것은 종교다.”라고.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착한 사람은 착한 일하면 되고, 악한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 되는데, 착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게 되면 그것을 감추고 미화하기 위해서 신을 찾는다는 거지요. 기독교를 조롱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사람 말이 맞아요.
자기를 구원 대상으로 여기면 이것은 구약적 발상입니다. 이제 구약적 발상에서 떠나야 해요. 내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를 묻지 마시고, 저는 어떤 식으로 구원에 참여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세례 요한은 참여됨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목이 잘려 냉반에 담겼어요.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어요.
스데반 집사는 죽으면서도 돌 던진 사람을 걱정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했어요. 노는 가락이 달라요.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그 중 혹시 성령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뭘 기도했겠습니까? “주여, 제가 죽으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이 저 때문에 슬퍼할 것인데, 믿음 없는 부모님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어요.
세례 요한이 이야기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나의 일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탐내지도 말고, 흉내 내지도 말고, 세례 요한은 구약적 관점에서 쓰여진 것처럼 신약적 관점에서 주께서 성도를 쓰신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적 관점이기 때문에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행할까요?’ 이런 물음은 구약에서나 통할 이야기입니다.
이제 구약적 관점과는 작별을 해야 합니다. 작별하면 구약과 끊어진다고 염려하는 자가 있는데, 염려하지 마세요. 세례 요한의 세례 속에 예수님이 뛰어들면 구약과 신약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보고, 모세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 시대에는 예수님이 살지 않았지만, 그 시대는 자기밖에 몰랐지만 주님 오신 후에는 미리 주의 일에 참여하라고, 어떤 일에 동참할 자가 바로 본인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가 고생을 해도 그것이 나의 고생이 아니고 주님이 특별한 임무를 맡겨주신 거예요.
8절에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되어 있는데, 물세례와 성령 세례의 중간에 빠진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지요. 그런데 십자가를 언급해 놓지 않았어요. 그럼 뭔가? 물세례(이건 구약)와 성령 세례(신약이죠) 사이를 무엇으로 연결합니까? 구약과 신약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연결부분을 예수님 자신의 마당, 자기의 관계 시스템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물세례는 죄, 회개, 심판 이런 것인데, 여기에 예수님이 뛰어들었기에 예수님 가시는 곳에 죄와 심판을 둘둘 감고 있는 거예요. 이것(물세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성령 세례로 끝나는 거예요. 이것이 마가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빠져야 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그러면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 라고 물어요. 우리는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언제 오시는가 하고 기다리는 자체가 마치 자신은 마땅히 구원 받아야 될 자라 여기는 것이 됩니다.
“언제 오십니까?”라고 하는 사람은 영원히 오시지 않고, 이미 만난 사람은 “벌써 오셨네요.”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이미 십자가를 알게 되었기에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계획에 휩쓸려 간다는 것만 매일 느낄 뿐입니다.
9-11절 봅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아버지와 언약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을 만들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이미 예수님은 아들로 확정된 채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아들로써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면 아들이 왔으면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지요. 그래서 인간은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것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만약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 받는다면 이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고 절망적인 소식이지요.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개인 구원이 아님을 확인하면서 내가 구원 받겠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살 수 있다는 점에서 기쁜 소식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주 안에서 보거든요. 그러므로 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 좋으라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잘 되어야 할 텐데’라는 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건강케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이 모두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런 것을 알아야 해요. 이제 모든 것이 아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 좋으라고 되는 일은 없고 아들 위해서 모든 일을 진행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들로 이 땅에 오심으로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 시스템입니다.
나는 없애버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갑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박근혜 정권의 시작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죠. 여기에 오 목사님이 있습니까? 없지요. 나도 없어요. 우리 이름은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 이름은 빼야 마땅하지요. 내 중심으로 생각지 말아야 마땅한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간단하지요? 걱정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는데 걱정하고 있으니까. 사서 고생할 필요 없잖아요. 예수님 중심의 현실이 유일한 현실입니다.
12절 봅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여기서 신학적으로 어려운 대목이 뭔가 하면, 성령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언제 이것을 압니까? 십자가 지시고 오순절 날 성령이 와야 소급해서 이걸 알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의 성령은 그 때 그 당시의 성령이지만 우리가 아는 시점은 성령이 임해야 알게 됩니다.
신혼부부가 결혼식 후에 차를 몰고 신혼여행을 가는데 경찰이 잡아요. “저는 신혼여행 가는데 왜 차를 세웁니까?” “신혼여행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차 뒤에 깡통을 매달고 다니는 것은 도로 교통법 위반입니다.” 그래서 뒤돌아보니까 깡통이 매달려 있어요.
우리의 운명은 내 중심은 없었고 예수님을 위해 내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뒤돌아보면 보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시 보니까 모든 것이 그 때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성령께서 몰아넣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은 문자로 해석해야 할까요, 성령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성령으로 해석해야지요. 성령으로 해석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선택을 철회하는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선택을 철회한다는 것은 나의 목적도 철회하는 거예요. 사람이 목적을 만들면 그 목적 아래 있는 지금의 나가 되고, 거기에 일곱 귀신이 달려들어요. 그래서 목적을 없애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허무해 지고, 허무해 지면서 아들의 목적이 솟구쳐 올라오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활용하시는 주님의 기능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주님의 목적 때문에 있는 것이지 내 목적 때문이 아니란 말이지요. 주님의 의도와 목적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기 싫어도 살아야 돼요. 이것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에 합치된 생각입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 생활을 한다고 유난 털지 말고 그냥 사세요. 그냥 사는 것이 영적 생활이에요.
12절을 봅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보내신지라.”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보내신다는 말은, 성령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그리스도 일에 참여하라고 광야로 몰아내시는 거예요. 성령은 예수님 중심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를 다룰 때는 예수님 중심으로 다루기 때문에 예수님께 행한 그 일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마귀로부터 시험받는 경우를 구원파를 통해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오대양 사건’을 아십니까? 두 번이나 수사를 했는데 결론은 ‘집단 자살’로 판결났습니다. 누군가 약을 먹였는데, 먹을 때 손을 묶었어요. 손이 묶인 채 죽었어요. 그러면 누구 먹였겠어요? 마지막에 죽은 사람이 다 묶은 거예요. 그런데 먼저 죽은 사람도 기꺼이 동의 한 거예요. 왜? 죽어야 천국 가니까. 그리고 죽음 자체가 자신이 믿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구원파는 자기 구원을 자기 선택에 의해서 이룹니다. 이게 사단의 주장입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에게 스스로의 인생을 각자 책임지라고 합니다. 선택을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겁니다. 부처를 믿을까, 예수를 믿을까?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야 내가 구원 받아요. 이게 침례교입니다. 구원파는 ‘기독교 복음 침례회’가 공식 명칭입니다. 침례교의 주장은,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 것만 하시고, 구원은 각자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십자가를 믿는 자는 구원 받고, 안 믿으면 구원 못 받는 거예요.
여기서는 십자가를 믿어도 누가 결정한 거예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이게 사단의 말입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도했고, 그 따먹은 것을 그래도 유지하라고 해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거기에서 구원을 시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은 구원을 시도할 자격조차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모든 사람은 주님이 접수해서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4장 37절에 보면,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고 했고, 38절에는, “너희가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라고 했어요. 구원은 내가 시도하지 않았는데 구원되는 식이 복음이고, 내가 구원 받으려고 애를 써야 구원 된다는 것은 성령 받지 않은, 즉 사단에 속한 자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사단 밑에서 살도록 하십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구약적 안목(개인적으로 내가 죄를 지었다, 사적으로 회개하면 구원 받는다)이 아니고, 신약적으로 구원을 주면서 그 이음새는 오직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기에 구약적으로 우리는 죄가 되고, 신약에서는 의가 되고, 죄인이 의인 되는 것을 십자가 피로 깨끗하게 하시고.
제가 이런 이야기한다고 자녀들 걱정하지 마세요. 자녀들은 주님께 속했기 때문에 부모가 걱정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 자신도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기껏 한 것이 교회 다닌 거예요. 교회 다닌다고 성령 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성령 받고 난 후에는 교회 다닌다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그곳은 친목 단체란 말이지요.
성경에 교회가 나오지요? 그러면 교회는 있어요, 없어요? 교회가 있는데 왜 우리가 ‘더 좋은 교회, 훌륭한 교회’를 생각합니까? 그런 걱정하면 안 됩니다. 이상적인 교회를 생각하는 자체가 이미 사단의 유혹에 말려든 거예요. 성경에 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의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주님이 알아서 교회 만들면 우리는 만들어진 교회에 끌려가면 되지 왜 우리가 나서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려고 합니까?
훌륭한 교회를 내가 구상하고, 그런 교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것은 내가 선택해서 나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사단적 생각입니다. ‘자녀를 사랑으로 대하면 자녀가 감동을 받는다.’고 하는데, 사랑해서 감동받을 자녀 없습니다. 자식이 효도하면 주께서 효도하도록 시킨 것이지, 부모가 교육을 잘해서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여름 수련회 강의한 것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며칠 전에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한석봉은 효자다.’ 불 끄고 시합하는 것은 불공정한 게임입니다. 떡을 자르는 것과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난이도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한석봉은 어머니의 말에 수긍을 했어요. “제가 아직 공부가 부족했습니다.” 아들이 효자라서 이런 말을 한 거예요.
한석봉 어머니가 위대한 것이 아니고 자식이 위대해요. 자식이 잘 되어야 훌륭한 엄마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부모가 교육을 잘 시켜도 자식이 개망나니가 되면 그 엄마는 훌륭한 엄마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들 잘 들으세요. 훌륭한 부모 만드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접수합니다. 이제 나의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울고불고 하는 것은 나의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딸 시집보내면서 하루 종일 인상을 찡그렸어요. 사진을 보니까 그래요. 섭섭하다고. 그렇다고 딸 시집보내면서 웃는 것도 이상해요.
아무튼 성령이 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주님의 세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하신 대로, 주님이 만났던 사단의 세계를 우리는 지금 만나야 돼요. 만나서 사단이 주님께 무슨 짓을 했는지, 예수 믿는 자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야 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될 수 없고, 주님의 십자가 피만이 죄인을 의인되게 한다는 사실을 늘 깨달으면서 살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이 없는데 내 것이라고 우긴 것이 사단의 시험인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저희도 성령 받은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하시는 조치에 감사함으로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5. 21. 08: 3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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