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이름'과의 관계
[하나님의 형상]과 [이름]과의 관계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부터 나온다. 그러나 뜸 하다가 창세기 5장에 또 나온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세기 5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거론한 것은 죄 짓고 난 이후의 인간세계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가 세상에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고 아담의 형상의 세계가 되었다.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3절) 인간의 형상이 이 지상에 몰고 온 것은 무엇인가?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4절-5절). 아담은 죽었고 또 그 아담의 형상은 입은 자식도 죽었고 그 손자도 결국에는 죽게 되고 …. 그런데 창세기 5장에서의 '형상'에 대한 거론은'이름 짓기'와 더불어 함께 이루어진다.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이름을 지으셨다. 그리고 아담과 마찬가지이다. 자기 모양, 자기 형상대로 자식을 낳고 난 뒤에는 '셋'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물론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이름이 아니라 전 인류에 대한 보편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사람'이라는 대표 명사로서 시작이 된다. 셋의 이름도 사실상 사람이라는 하나님의호칭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형상'과 이름과는 무슨 관련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구약의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에 보답했다. 신약에 와서는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하나님이 준 적이 없다.(사도행전 4:12) 이름이어떤 때 주어지며 그 주어지는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하나님이 아담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름이 있는 것이다. 이름을 제공받은 쪽은 이름을 주신 자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자기 모양대로 자식을 낳고 난 뒤에 셋이라는 이름을 남긴 것도 같은 원칙에 의해서이다. 이름을 준 쪽과 이름을 받은 쪽이 동일한 틀 안에, 같은 운명으로 상호 통하고 있음을 뜻한다. 같은 운명, 같은 기능, 같은 속성 안에 함께 놓여 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의 차이나는 유일무일한 속성이 나열되어 있다. 다른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말씀이 지닌 의미가 보다 선명해진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27절-30절)"정복하라"."다스리라","…주노라"라는 명령들은 곧 인간에 대해서만 특별 대우와 우월성을 보장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순히 지음 받았다는 피조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의 이러한 다스림이 본격적으로 수행하는데 있어 하나님은 아담에게이름 짓기 작업을 위임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이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세기 2:19)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름 짓기를 맡긴 것은 아담에게만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창세기 2장에서의 이름 짓기와 서로 연결시켜 보면 이름을 지어준 주체를 위하여 이름 지음 받은 대상이 지배받도록 하는 원칙을 이 창조세계에 남기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드러난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사람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에의해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합당하게 살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아담은 또 하나의 이름을 짓게 된다. 그 이름은 여자이다. 이 여자라는 이름은 남자을 염두에 둔이름이다. 즉 인간의 대표인 남자를 위한 배필로서 등장된 것이 여자이다. 그래서 여자의 머리는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람에게는 분명 지배하는 머리의 위치가 있지만 특히 여자에게는 분명히 머리가 남자이다. 결코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린도전서 11:3,7). 이러한 서열은 이름 짓기에서 드러난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짓고 거명하므로서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의 대표자는 남자와 여자 중에서 남자가 대표가 된다. 그리고 여자는 그 남자를 위한 존재이다. 선악과를 따 먹어서는 안된다는 계명도 여자에게 직접 준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 직접 주어졌다. 이처럼 이름을지음받은 쪽은 이름을 준 쪽의 역할을 위한 창조된 것이다.그런데 죄를 짓고 난 뒤에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든다.하나님의 창조의 틀이 와해될 입장에 놓여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남자에게 찾아와서 새로운 약속을 말씀하신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 창조 회복의 길을 마련한 것이다. 새로운 창조 사역은 이제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통해서 직접 주어진다. 창세기 3:19에서 아담은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통고받는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 죽음의 통고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생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남자는 자기 아내에게 내려준 그 약속이성취되면 다시 생명이 주어질 것이라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기 아내 이름을 바꾸는데서 드러난다. 여자라는 이름 대신 하와 즉 생명으로 이름으로 바꾸어 부른다. 창세기 3:15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이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그렇다면 생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남자를 위해 반드시 그 약속을 구현되게 된다. 그 약속을 주신 분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하나님 그 분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뒤에생명 나무가 있는 곳에서 추방되게 된다. 이제 생명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살게 된 처지가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생명이라고 붙인 것을 보면, 생명나무와 관련있고그 세계에 계신 분이 직접 아내의 후손으로 등장된다는 점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약속을 주신분이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 생명세계에 계신 분이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후손으로 등장된다면생명은 다시 인간 세계에 투입될 것이라는 아담의 생각이었다. 생명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남자의아닌 여자의 계통으로 출현한다는 것은, 기존의 남자 중심의 인간 세상의 형편이 결국에는 죽음의 반복과 연속으로만 이어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인간의 핏줄은 섕명세계는소용없다는 것이다.하지만 하나님이 던져 주신 약속이 있기에 이 약속에 의해서 창조의 틀과 영광은 다시 회복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아담이 차지했던 그 하나님의 형상 자리에 새로운 이름이 거명되어야 하고 둘째 그 이름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래서 창세기 4:26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불렀더라" 왜 꼭 여호와를 거명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담 이후의 모든 역사는 아담이나 아담의후손이 주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창세기 4:1에다음과 같은 말씀이 등장된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분명 하와와 동침한 것은 아담이다. 그러나아기를 낳고 난 뒤에 여자인 하와가 하는 말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딸이 아니라 구체적인 남자 아기인 아들임을 분명히 기재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아담의 후손들은 "…죽었더라","…죽었더라"만 반복될 뿐이다.(창세기 5:4-31)아담이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종국에는 생명과 무관하게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그 약속이 그 이름을 부르는 이를 통해서 구체화되기를 적용,성취되기를 원하는데서 비롯된다. 실제로 에녹 같은 경우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가인의 노선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죽은 아벨의 대신 주어진 핏줄은 셋의 노선을 통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에 기대를 거는 자들이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창세기 5:22) 노아가구원받은 것도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창세기 6:9) 만약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어떻게되는가? 창세기 6:3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다.여호와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되기 때문이란다. 여기서 육체라는 것은 죄 속에서 만들어진 몸들을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시 원래 만들어 주신 몸이 아니라 다른 몸을 그들은 지닌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영광이 파손된 모습이다. 하나님을 그들을 땅 위에서소멸시킴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하신다. 심판을 통한 새 창조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생겨난 인간은,하나님의 약속의 은총이 담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노아 홍수 심판이후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신 바가 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세기 9:1-7)이 내용은 마치 창세기 1:27-31의 내용을 반복해 놓은 것과 같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땅에 하나님의 형상을 세워놓으시고 그를 통해서 아름답게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싶어하는 그 의도를 홍수 심판 이후에도 반복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성으로 양식을 삼으라고 하셨지만 창세기 9장에서 동물성까지도 음식물로 주어진다. 그 원인은 '피'에 있다. 노아 홍수 이후의 모든 생명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에 준해서 제공된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 유지 보전하는 그은총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새로운 차원의 창조 세계로 이끌고자 하시는 것이다. 동물을 음식으로먹으면서 단순히 먹고 배불리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짐승을 잡을 때마다 피를 가려서 안 먹음으로 심판을 무사히 통과시키신 그 하나님의 은총을 대대로 이 피조세계에 영구히 남겨두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다른 말해서 노아 언약을 통한 영광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피를 땅에 쏟아지게 할 자격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새로 남겨주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투입된 생명은 바로 창세기 3:15의 약속에 근거해서 제공된생명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노아 언약 안에는 여자의 후손으로서 새로이 등장될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창세기 9:26에서 노아가 다음과 같이 찬양 한다."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이 종이 되고" 노아가 보기에 셈의행동과 처신 속에 여호와의 은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은 곧 바로 셈의 후손의 노선을 통해서 살아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셈의 후손이 유지,보존,지탱되는 것은 그 원동력이 셈의생식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여호와의 의해서 살아남은 핏줄, 즉 노아의 후계는하나님의 은총의 환경 안에 놓여있다. 여호와에게 도전하든 순종하든 모두다 은총의 저촉을 받는다. 심판의 기준도 새로운 창조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되지만은총의 주체이신 여호와께서 죽이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예를 들면, 가나안 민족과의 전쟁 같은 것이다. 여호와의 약속과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고 거기에다 기대를 거는 자들은 필히 멸망하도록 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창세기 11:4-5에,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5) 여기서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말씀이 들어 있다. 이미 인간의 이름은 노아 홍수 이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의 핏줄과 이름은 곧 죽음과 저주받아야 될 기능과 속성을 같이짊어지고 있는 이름이다.그런데 그 자기 이름을 선호한다는 것은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고유 민족과 핏줄을 영구히 존속케 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여자의 후손 뿐이다.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출현하는 그 분의 핏줄 이외에 그 어떤 핏줄도 생명하고는 상관없다. 새로이 창조해 나가시는 핏줄은 창세기 12장에 나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1절-3절) 복이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완성을 위하여주어진 것이다. 즉 창조 상태가 완벽할 때 그 완벽할 상태를 팽창시켜 온 우주에 차고 넘치게 하기 위해서 부가하는 힘이 복이다. 그런데 그 복이 아브람을 통해서 부어주시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름이 세계에 첨가되었다.그리고 이 새로운 이름과 기존의 이름 사이에 구별이 생겨난다. 다른 그 어떤 이름으로도 복은오지 않는다. 그러나 단 아브라함의 이름만은 예외이다. 누구든지 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무시하면저주가 주어진다. 이제 새 이름에 의한 새로운 약속의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복의 이름을 지녔다는 것은, 복을 제공할만한 기능과 속성을 구비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약속 장치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약속의 본질에는 누가 들어 있는가? 창세기 15:10과 17-18에 보면,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라고 되어 있다. 제물을 "쪼개 놓았다"는 것은 제물의 속성과 본질 부분을 밝히자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이 완성 될 때 과연 어떤 실상으로 드러날 것인가를 부분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쪼개놓은 부분을 횃불이 지나간다. 불이란 창세기 3:24에서 생명나무를 지키는 천사의 모습을 말한다.즉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는 당사자는 바로 생명나무를 간수하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노선을 따라 생명은 찾아오시도록 된 것이다. 즉 약속을 따라 생명을 들어오신다. 그 약속의씨가 여자의 후손과 연관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능력을 부정하는 자식이출생한다. 기존의 아담 형상을 입은 핏줄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이다. 이것이 할례 언약으로 보여진다. 아브라함의 여호와로부터 택함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이름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창세기 12:9/13:4/21:33) 이삭도 마찬가지이다.(창세기 26:25)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기의 새로운 이름을 창대케 하는 약속의 작용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이름에 준에서 새로운 이름이 이들 선택자에게 입혀지므로서이들과 하나님 이름 사이에는 계약이 체결된다. 상방이 서로 유통될 수 있는 이름을 부르면서 계약이 실현되어 나가는 것이다. 어쨋던 이름이란, 창조의 영광의 틀을 유지,보존 하시고자 하시는하나님의 일관된 창조사역의 증거요 매개체로서 사용하기 위한 조치이다. 창조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따라서 이 몸이 죄로 말미암아 흙으로 환원되고난 뒤에는 그 자리에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 유입이 요구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창세기 15:17에서는 횃불로서 보여지고 있고 출애굽기 3장에서는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보여지고 있으며 출애굽기24:17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불로 나타남이 백성들에게 공개되었고 광야에서 국가 이스라엘을주도해서 이끈 것은 불기둥이었다. 그리고 성막 제단 위의 제물을 붙이는 불의 본질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다(레위기 9:24). 원래 제단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며 동시에복을 받는 장소이기도 하다."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제단에 불이 제물을 소비시킬 때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극복되어 긍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신명기 4장에서는, 형상금지 항목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말하고 있다. 불 자체가 형상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형상도 용납하지 못하도록 소멸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즉 지상에 있는 모든 형상 자체를 소멸하는 분으로 보여지는 분이시다. 또한 모세나 백성들이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때도 불 속에서 대화했다."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신명기 5:24-25).모세만큼은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보았지만(민수기 12:8) 안 죽고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때문이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18-20). 이처럼 불로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브라함 계약과 이스라엘 계약의 중간형상으로 들어가면서 계속 처음 창조의 틀과 관계를유지시켜 나가시는 것이다.하나님의 형상이 불로서 나타나는 것은 후대에도 계속 이어진다. 사사기 13장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 집에 나타난다. 그들은 그 천사의 이름을 묻는다. 그럴 때 '기묘'라는 이름을 던져 준다.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본즉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 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대고 엎드리니라"(17절-20절). '기묘'라는 이름의 이 천사는 제단 위의 불꽃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이 기묘자라는 이름은 이사야 9:6-7에 보면 한 아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시게 되어 있다고 약속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즉 하나님 자신이 기묘자이시다. 마노아는, 하나님을 만났으니 이제 자신들은 죽었다고 낙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노아 아내가 말하기를 번제를 통해서 그 죽음이 극복되었다고 한다.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사사기 13:22-24). 이 번제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되게 하는 자리에 '기묘'라는 사자가 직접을 불을 지폈는데 그런 일이 있고 이후 이 마노아 가정에 생긴 현상은 삼손이라는 이름의 아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번제를 받으시고 그 가정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이러한 마노아 가정의 사건을 이스라엘의 전체 구원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삼손이라는 특정 인물을 출현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삼손은 바로 제단의 제물의 취지와같은 운명의 소유자인 동시에 장차 기묘자로 오실 하나님의 속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이름이 기념되는 공간과 그리고 기묘자라는 낯선 천사의 왕림은, 주의 이름이 인격화되는 조짐을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불이라는 심판의 모습으로 자기 백성 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한아기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주의 이름을 가지고 오실 시점이 약속 안에 미리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에스겔에서 하나님은 불 가운데 계신다. 이는 범죄한 성전에 대한 심판의 징조로서 보인 것이다."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5:4),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 형상 같더라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우편에 섰고 구름은 안 뜰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자에게 명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취하여 가는 베옷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그룹들의 날개 밑에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났더라"(10:1-8) 불 가운데 나타난 천사의 얼굴이 사람의 얼굴로, 천사의 행위가 사람의 손 같은 모습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은(에스겔 1:10/10:8,14)처음 창조 때의 그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8:3에 보면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라고 되어 있다.애초에 "주의 손가락"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인간의 신체의일부를 차용해서 표현하는 것은 인간들의 이해를 쉽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신체를 중심을해서 천지를 창조하고 또 다스리게 했다는 창조의 원래 형틀을 고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 중심되는 하나님의 형상에는 반드시 '이름'이 정해진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내가 이렇게 행함은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에스겔 36:22,32). 다윗 언약이 체결될 이후에 이스라엘의다스림은 선택된 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왕 계열이 확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실 여자의 후손도 다윗 혈통을 따라 나타나실 것이다. 이 말은, 주의 이름이 왕의 위치에서오신다는 것이다."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가복음 11:9-10)누가복음에서는 '예수'라는 아기 이름에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주고 있고 주의 이름과 결부시키고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높은 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1-33,49/참조:13:35/9:48) 사람의 얼굴과 손과 더불어 나타난 불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로 추방당하고 성전은 불에 타 버린다. 이사야 6장에서도 이사야는 성전에서 나온 숯불에 의해서 입에 지짐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곧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한 선포이기 때문에그러하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최후(종말)에 하시는 심판 현상을 둘로 보았다. 하나는 성령의 세례이며 또 다른 하나는 불의 세례이다.(마태복음 3:11) 심판주가 두 개의도구를 가지고 등장하는 이유는, 심판하고 난 뒤에 처음 창조의 틀로서 새창조에 나서려고 하시기 때문이다.기존의 아담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멸시키고 성령을 통해서 온전한 하나님 형상으로 대체하시려는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서 마련되는가? 이미 온전한 불 세례를 받은 아담의 형상속에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가 담기게 된다. 그렇게되면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늘 함유하게 되므로 불의 형상은 인격적으로 하염없이 발산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음과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누가복음12:49-50). 이 본문에서 "내가 받을 세례"를 주목해봐야 한다. 이미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 받은 것이다. 성령 세례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답답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 불세례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요한 1서 5:5-8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또한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세례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두고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는(갈라디아서 3:13) 그 몸이 최후로 보이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이 십자가 형상으로 세상에 대한 심판의 깊이는 다 드러내셨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바른하나님의 형상이 없기에 저주 받아야 당연하다는 점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세례베풀기를 주저하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복음 3:15). 즉 예수님이 먼저 물 세례와 성령세례와 불세례를받아야 하나님 보시기에 의가 완성이 된다.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은 이처럼 하나님의 의가 가득담겨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 형상을 주님이 갖추신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성령의 세례가 주어지게 되면(사도행전 2:38/8:16/참조:고린도전서 6;11)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와 사랑의 의지가 가득 함유된 그런 백성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 사랑과 심판의 정신이 가득 담겨 있는 그런 존재로 출현된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야기가한 그대로이다. 사도행전 2:3에서 오순절날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인간의 신체 구조의 일부의 형태로 등장하면서 또한 불의 모습을 띤다는것은 처음 창조 때의 중간 매체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의 틀을 계속 고수하신 채로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이다. 동시에 그 창조의 틀 안에서 새창조를 시도하여 안식의 완성을실현하시겠다는 목적도 드러내신다.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태의 신체적 형식 표현에 이름이 결부되면서 특별한 인물로 등장된다.신약에 와서 하나님이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뜻이다. 다른 인간들이 이름을 각자 지니고 있는 그런 세계에서 예수님도 나름대로의 인간적 이름을 지녔다. 하지만 사도행전 4:12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의이름만이 구원을 주는 주의 이름이 된다. 다른 이름은 왜 구원의 매개체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원 창조의 기능과 능력이 없는 이름은 무용지물이다.하나님이 새이름을 따로 마련할 정도로 (요한계시록 2:17) 그들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 구실을못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의 깊이를 인식하고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서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인간 세계에 들어오셨다. 만약 예수님의 이름에 기대를 걸고 따른다면 그들의 이름도 하늘 나라 생명 책에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20) 이 생명의 이름에 합당하게 이들은 새로운 형상으로 변화되는데 그 수준은 예수님의 형상 만큼이다."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 때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린도전서 15:45-49).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로새서 1:15/고린도후서 4:4). 전에 창세기 6장에서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하나님의 신께서는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받은 자를 이 하나님의형상을 본받게 하신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로새서 3:10/갈라디아서 4:19). 이 아들의 형상을 입을 자는 이미확정되어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29) 이렇게 형상을 기어이 새 창조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처음 창조의 영광이 유지되기 때문이다.인간의 모든 이름을 부정하고 오직 주의 이름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이 이름이 친히행하셨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제 위치에 다시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주님의 얼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되셨던 주님의 이름이다. "그의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4) 이처럼 아담은 오실 자의표상이었다.(로마서 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