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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40509a-히7장26절(복사(카피)) -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히브리서

안양20140509a-히7장26절(복사(카피))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안양20140509a-히7장26절(복사(카피)) - 이 근호 목사

더 해봅시다. 히브리서7장21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보통 우리가 신앙 또는 종교, 교회 이런 것이 하나의 장식품처럼 그렇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내가 중요하고 그 다음에 이 중요한 것을 잘 꾸밀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교회 나오는 것, 예수 믿는 것, 사실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나보다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중요한데, 이 중요한 것을 잘 지켜주기 위한 든든한 분으로 예수님을 이렇게 장식품으로 걸칠 수가 있어요.

예를 들면, 어버이날에 다른 부모는 카네이션을 다 달고 다니는데 자기 부모한테는 카네이션이 없다하면 서운하잖아요. 그래서 자식이 카네이션을 어머니에게 달아주면서 남 따라가는 식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는 이 성경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이 해석이 안 됩니다. 이 말씀이 나한테 카네이션처럼 달리면 안돼요. 장식품이니까 카네이션은. 하나의 나를 꾸미는 장식품 나도 나한테 자식 있다는 그걸 자랑하는 장식품처럼 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제사장이라는 용어 때문에 그래요. 제사장이 카네이션 같으면 이렇게 달면 되는데, 제사장은 이렇게 백성들이 “우리는 제사장하고 친해.” 이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제사장 덕분에 죄 용서받는 효과가 없거든요. 제사장이 그 당시에 장식품이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장식품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지요. 물론 십자가 목걸이하고 있는 것은 이해됩니다만, 예수님 자신을 장식품이라고 여겨버리면 누가 중요한지, 누가 안 중요한지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일단 중요하고 중요한 나를 멋있게 꾸밀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리 되어버린다 말이죠.

우리 집에는 딸이 있다, 라고 할 때, 딸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엄마 본인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내 집에 딸이 있다는 말은 이게 나의 딸이란 뜻이거든요. 저 딸의 엄마가 나란 뜻이 아니고 내 소유의 딸이란 이런 뜻이에요.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믿어지는 예수님이 아니다 말이죠.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그건 장식품이고 카네이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했습니다. 망했는데, 제사장이 장식품이었어요. 제사장이 있음으로서 우리는 다른 나라한테 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고 특히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특별대우를 받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제사장이 있다는 말은 어렵게 말해서 우리에게 언약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말라기에 그게 나와요.

말라기에 보면, 이게 레위언약을 강조하면서 레위지파, 제사장이 있는데, 너희들이 제사를 똑바로 드려야 나라가 복을 받는데 너희들이 제사 못 드려가지고 썩은 거, 흠난 거, 이런 거 드려서 내가 받겠느냐, 그러니까 마지막 때 엘리야를 보내가지고 나를 완전히 새롭게 갱신하겠다, 하는 그런 내용이 말라기 내용입니다. 거기에 보면, 말라기의 제사장 언약을 하겠다는 말은 우리가 잘만하면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언약부터 새로 시작하자. 언약부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마을이 이렇게 있습니다. 마을이 있는데, 마을에 공동우물이 있다고 봅시다. 마을에서 우물이 떨어지면 이 마을은 어떻게 됩니까? 못 살지요. 다 같이 이사 가야 되겠지요. 그것처럼 이 우물, 오아시스라는 소문을 듣고 한 집, 두 집 나오다가 여러 집이 모이게 된다면 그 출발지점이 어디에요? 우물이 오아시스 중심이 되겠지요. 천국 가는 사람은 내가 예수님 촬영해가지고 데코레이션 장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하나, 둘 호출한 사람만이 천국 갑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나는 예수가 필요하다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해요. 그래서 남이 나를 안 알아줘도 괜찮아요. 왜냐 하면, 일단 주님은 나를 알아줬고 호출했기 때문에 그것을 오직 남한테 예수님만 자랑하라,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 먼저 나를 알아봐서 나를 이렇게 호출했고 택하여서 주의 자녀 되게 하셨다. 이것을 자랑하라 이 말이죠. 이게 바로 오아시스부터 말이 시작되는 거예요.

마을 먼저 해놓고 그 다음에 새삼 물 퍼내는 게 아니고 물 없으면 아파트 다 소용없잖아요. 물이 있고 물을 중심으로 한 두 집모이다 보니까 물이 괜찮고 물이 있으니까 토지가 되고 되니까 일가친척 불러다가 “야, 거기 살지 말고 여기 와서 살아.”하니까 그게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서 빌리지가 되는 거죠. 항상 출발점은 생명수가 있는 데서부터 출발하듯이 예수님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했으니까 예수님부터 시작한 그것만이 계속 생명이 유효하고 그렇지 않은 데는 인간들이 가짜로 생명을 조작해내는 그러한 엉터리 교회에요. 엉터리 그리스도 몸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 사람이 구원 받을지 안 받을지는 간단한 문제에요. 예수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우선이던가 아니면 자기가 중요해서 예수를 나중에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지 그것만 따지면 돼요. 방금 이야기한 요걸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구원론이 우선이냐, 그리스도론이 우선이냐, 이렇게 질문하면 딱 돼요.

‘내 구원받는데 어떻게 구원받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님하고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구원받을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주님께서 이 복음을 알라고 주님 쪽에서 먼저 우리한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건 어떻게 아는가, 성령이 와야 알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편이니까, 예수님 입장이니까 항상 모든 출발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게 하시는 게 성령이에요.

‘아! 나는 뜨거워지고 싶다.’ 성령이 와서 “뭘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은 니가 현재 일어나는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다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허락 하에 예수님으로부터 개시된 일이 나에게 파도가 되어서 밀려온 거예요. 우리 애가 갑자기 물에 빠져 죽었다. 하는 것도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라고 그걸 받아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일도 어떻게 돼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원칙에 의해서 범사에 감사하지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주의 뜻이라, 데살로니가전서5장 16~18절이죠. 그러니 청와대에 데모할 게 없지요. 왜? 항상 기뻐하라 했으니까.

성경에서 제사장할 때, “그래, 제사장 있으면 구원받겠다.” 이렇게 하지 말라 말이지요. 구원론으로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거죠. ‘예수님이 왜 제사장을 허락하셨을까?’ 항상 출발을 예수님부터 출발을 하면서 성경을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야 맞습니다.

자, 제사장이 왔다. 아까 처음에 제사장은 장식품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제사장은 제사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사라 하는 것은 그냥 인간들이 모여서 삼육구 게임하는 게 아니잖아요. 삼육구, 삼육구 게임하는 게 아니잖아요. 요새 교회 예배는 게임 같아요. 우리 모였으니까 재미나게 놀다 갑시다. 이리 나오는 거 같아요. 죽음입니다. 모였다 하는 것은 옛날 제사장과 더불어 모였다 하는 것은 제사는 그냥 죽음의 사건을 또다시 반복해서 현장에서 일으키는 거예요.

옛날 구약 때 제사장이 그냥 맹숭, 맹숭하게 와서 장기판이나 들고 와가지고 “우리 장기나 두고 갑시다.” 이렇게 했습니까? 노래방기계가 와가지고 “우리 노래나 부르고 찬양이나 부릅시다.” 이렇게 할까요? 백성들은 소나 염소나 양을 가지고 오고 제사장은 칼 들고 있지요. 그리고 그 이벤트에 그 모임에 주제가 뭐냐, 왜 모였느냐? 우리 대신 또 다시 누가 죽어야 된다는 사실. 우리 대신. 제가 이런 이야기해서 매일 욕 얻어먹는 거예요. “니는 매일 십자가밖에 모르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했던 이야기에요. 했던 이벤트 행사였어요. 모이면 바로 죽음 사건 일으켰고 초대교회도 모이면 이건 예수님의 떡이요, 예수님의 살이요,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었다는 것, 그 죽음 사건을 각인시키고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점검하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 백성들이 교인들이 그걸 원했을까요? 예수님 죽는 얘기 또 듣고 싶어요. 또 듣고 싶어요. 그들이 그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 자식자랑하고 지 자랑하고 그거 하고 싶어서 만나고 남자들은 그냥 혼자 술 마시면 맛이 없으니까 같이 술맛 좋아라고 같이 만나고 그런 식으로 하지요. 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오거든요. 이것은 이스라엘도 교인도 마찬가지예요. 자기의 욕망과 희망을 기도로서 또는 복 받아가지고 손에 쥐기 위해서 온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늘 반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죽음을 늘 이렇게 반복했던 것이 초대교회였고 이스라엘 절기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인간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게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성도는 무심코 세월만 보내라고 성도 만든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그냥 눈 꽉 감고 있다가 죽으라고 그 일하라고 있는 게 아니고 싸움을 해야 돼요. 이 세상 신 악마와 싸우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한 겁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이다 하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있음, 존재, 존재는 존재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사명이 나와야 되고 할 일이 나와야 되고 기능이 나와야 돼요.

자, 존재라 하는 것은 여기 고정돼 있고 실체 물체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싸워야 될 악마는 실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악마는 그냥 활동이고 활동의 기능이에요. 우리가 몸으로 있기 때문에 악마는 천사기 때문에 몸이 없어요. 그냥 능력만 제공하지요. 능력만 제공해가지고 악마의 종들은 실체가 있어요. 사람이다 말이죠. 있지만, 능력을 준 그 악마는 실체가 없는 거예요. 인간적인 신체는 없다 말이죠. 실체는 있긴 있는데 인간적인 신체 이런 모습으로 어떤 세포덩어리 그런 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싸움이 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같은 권수 선수끼리 글러브 끼고 싸우라고 하면 되는데 그 죽은 권투 귀신하고 싸우면 싸움이 되겠습니까? 있어야 때리지요. 형체 없는 귀신하고 형체 있는 인간하고 게임이 됩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싸우라 이 말이거든요. 어떻게 싸울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이게 어려운 문제지요.

에베소서6장10절~12절 이야기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혈과 육에 관한 게 아니라잖아요. 우리는 혈과 육이 있잖아요. 있는데, 혈과 육의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면 기관총도 소용없고 칼도 소용없고 어떻게 해요? 안되지요. 그래서 에베소6장10절에 보니까 그 싸움은 주 안에서 싸운다. 주 안에서.

주님 안에서 싸우라고 명령하신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나서서 싸우겠습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마귀와 싸우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치를 해요. 우리는 이런다고 해서 우리가 주의 사람을 이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제 시작을 해야 되거든요.

자, 제사장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있었지요. 그 제사장이 제사 잘 드리면 이스라엘이 누구를 이겼습니까? 이웃나라 이방민족 이겼지요. 그 이유에 대해서 설교시간에 여러 번 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이겼을까요? 그 쪽에는 언약이 없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습니다. 언약이 있으니까 언약이 있는 쪽이 없는 쪽을 이깁니다.

자, 그러면 이스라엘이 나중에 패배했다. 패배할 경우가 너무 많았거든요. 언약이 있는데 왜 패배했을까요? 언약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블레셋에 언약궤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언약이 있는데 왜 패배했을까요? 아까 원칙이 하나님은 언약편이거든요. 그럼 언약편인데 유일한 나라가 이스라엘이 언약이 있다면,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이겨야 되는데 무조건 이기는 것이 아니고 이방나라한테 오히려 질 때가 더 많아요. 나중에 가나안땅 정착되고 난 뒤에는. 왜 그랬을까요? 결국 언약의 원수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자신이 언약의 원수에요. 이걸 다른 말로 쉽게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

우리의 혈과 육이 싸워야 될 그 적이 마귀가 내 안에 안 들어온 게 아니고 이미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 나를 갖고 놀고 있으니까, 아까 날 파리인가 뭔가 날아왔지요. 일단 우리 집에 들어왔으니까 우리 식구에요? 식구 아니지요. 때려잡아야 되지요. 벌 같은 식구둔적 없지요. 키울 마음도 없고. 개를 싫어하는 사람은요, 그 집안에 개있으면 개 나가라고 해요. 에헤이, 나가라. 주인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개가 와서 같이 앉아있으면 “이거, 뭔데?” “우리 집 식구야.” “식구고 뭐고 개 좀 치우고 이야기하자. 냄새난다. 치우고 이야기하자.” 이리 되겠지요. 같이 있다고 해서 식구 아닙니다. 마귀가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해서 식구 아니에요. 마귀는.

어떻게 되느냐, 나가라고 할 수 있는, 나가라! 의 싸움을 해야 되는 거예요. 마귀가 갖고 올 때는 뭐냐 하면, 마귀는 하늘나라를 못 보게 하는 게 주특기입니다. 목적이에요. 주특기가 바로 목적이에요. 그게 고린도후서4장에 보면, 이 세상신이 복음의 광채를 흐리게만 하면 그들의 목적은 달성한 거예요. 그러면 복음 믿지 마라, 십자가 믿지 마라,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듬뿍 가지고 와요. 해가지고 고뤠? 그렇게 좋은 게 있었어? 요번에 롯데백화점에서 정품으로 80만원짜리 특별세일해가지고 90%세일해서 8만원에 판다니까. 고뤠? 갑자기 거기에 확 빠져가지고 복음이야기 들려오지를 않아요.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가장 쉬운 예는 세상의 광채가지고 복음의 광채를 매우면 돼요. 대체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육신의 정욕이라 했잖아요.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잖아요.

육신의 정욕이라 함은 육신이 있으면 다 생기는 것이고 안목이니까 눈떴으면 다 탐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생의 자랑이라 하는 것은 남들이 우리한테 기대한 게 있으면 우리는 기대에 부흥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게 되어있어요. “인간아, 왜 그렇게 사나?” “가만히 있어 봐! 내가 니 보란 듯이 성공할 거야.” 이게 이생의 자랑이에요. 남이 나를 우습게보기 때문에 남한테 대단한 존재로 비추기 위해서 갑절의 노력을 다하는 그래서 뭐냐,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운 존재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려워 보이지만,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했잖아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라고 낙인찍혔던 이유가 그게 바로 남쪽, 북쪽 두 나라가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애굽나라를 그렇게 흠모한 거예요. 창녀처럼. 심지어 돈 받는 창녀가 아니고 지가 돈 주고 하는 창녀처럼. 그런 식으로 굉장히 흠모한 거예요. 왜 흠모했을까요? 잘 사니까. 그게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요. 욕심. 그런데 그걸 하기 위해서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이 있음이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그들은 절기 지키고 안식일 지키고 마음은 어디가 있고? 마음은 다른 나라 잘사는 나라 가 있으면서도 자기는 여호와가 시키는 대로 언약대로 한다는 거예요.

그럼 목적은 어디 있느냐, ‘이것만 하게 되면 저 사람이 갖고 있는 복을 얻어낼 수 있다.’ 라고 생각할 때, 그게 바로 이스라엘 멸망에 이유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세례요한이 20억 재벌가로 죽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어떻게 됐어요? 사도들이? 세상 적으로 대단한 인물 됐습니까? 정치적, 경제적으로. 경제적으로 복 많이 받아가지고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저리 예수 잘 믿으니까 복 받고 이렇게 모델 케이스가 된 적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상하지요? 12제자가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은 딱 하나에요. 떠나자!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내리자, 그 이야기에요.

주님이 먼저 배버리고 바다로 뛰어내렸기 때문에 주님이 가신 길로 가게 되면 산다는 겁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빌립보서3장에서 내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찌하던지 십자가로 달려간다는 그러니 십자가라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바라볼 유일한 최후의 모델이 십자가에요. 항상 봐야 될 목표지점이 있다면 십자가뿐이에요.

그러니 마귀는 그것을 성도가 보는 줄 알고 못 보도록 그걸 흐릿하게 만들어버린다고요. 흐릿하게 만들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뭡니까? 나는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귀가 하는 술책은 정반대니까 어떻게 해요? 절대로 니는 더 살아야 돼!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모든 게 니는 실패자야. 낙오자야. 니는 인생 헛살았어. 어떤 경우라도 살아남아야 돼! 그걸 계속해서 우리한테 알려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아니야 우리는 죽어야 돼!” 이렇게 됩니까? 그렇게 해야 돼요? 야, 요 마지막 어려운 문제를 내버렸네요. 제가. 그러니까 “마귀가 살아야 돼!” 하니까 우리는 “죽어야 돼!” 이게 정답입니까? 자칫하면 자살할 수가 있어요. 우리의 정답은 뭡니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주의 뜻이지 내 뜻 아니다.” 이게 정답이죠. 마지막 때, 마귀로 갈 뻔 했지요? 큰일 날 뻔 했지요? 마귀가 살아야 된다, 하니까 우리는 반대로 나가면 정답이 아니에요. “죽고 사는 것은 내 소관 아니야.” 이게 정답이라니까요. 이게.

강의 다시 합시다. 히브리서7장21절, 제사장할 때는 이 제사장이 있다 하니까 제사장을 잘 알면 우리가 구원 받겠다 이렇게 시작하겠지요. 그게 잘못이에요. 왜냐 하면, 구원론 중심이기 때문에 안돼요. 제사장이 있으면 구원론 중심으로 가버리면 이것은 카네이션 다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의 장식품처럼 되어버려요. 그런데 제사장을 우리가 이렇게 카네이션으로 달 수 있습니까? 못 달지요. 왜냐 하면, 제사장은 어떤 기능을 하기 때문에? 죽음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제사장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으면 둘 다 살아있으면 “우리 잘해봅시다.” 이리 되는데, 제사장의 할 일은 “아이고, 예쁩니다. 착합니다. 아이고, 위로하세요.” 그거 하는 역할이 아니고 “실례지만 양가지고 왔습니까? 양이나 대고 나는 죽이죠.” 죽음 사건을 반복시키는 게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제사장하는 그것을 나는 유명한 제사장 한다. 이렇게 자랑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 받는 거 아니고 제사장이 하고 있는 그 죽음 이벤트에 거기에 참여해야 되는데 참여하기 전에는 내가 모든 나 위주의 구원론 위주의 모든 것을 다 처리하고 그걸 빼버리고 참여가 돼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마을이 있다면 그 마을은 마을이 있고 우물을 새로 발견해야 돼요? 아니면 우물을 발견하고 나면 한두 집 새로 생기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먼저 마실 물이 먼저 있어야 마을이 될 게 아닙니까? 물 있네. 해서 한두 집이 모이다 보니까 나중에 백 채 되고 이 물이 소문나서 더 올 수 있잖아요. 그것처럼 우리의 생명은 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렇게 데리고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불러줘야 돼요. 왜? 예수님이 우물이니까.

“내가 사는데 무슨 우물이 필요하지?” 이렇게 하면 안돼요. 내가 있는 자리에 예수를 모셔오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게 되면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게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자랑하는 “역시 예수님이 바로 생명수였고, 진짜 진리였고, 생명이었습니다.” 증거 하라고 우리를 호출할 뿐이에요.

그 예수님이 구약 때는 오늘의 본문의 말씀처럼 제사장으로 나타났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 구약 때는 제사장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걸 제사장 언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제사장 언약을 아시는지 다시 복습해 보면, 제사장 언약은 우리가 장식품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 제사장 언약 앞에서 나 자신을 거기다가 뛰어 들어가야지, 내가 언약을 장식품처럼 달고 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제사장 언약은 어떤 사건을 반복한다? 죽음 사건을 반복한다. 죽음 사건을 반복하게 되면 교회 나올 때 복이나 받고 나오려한다든지 어떤 사업이나 어떤 가정문제, 사적인 문제 하다가 제사장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양이나 내세요. 염소나 내세요. 내가 죽일 테니까. 피내는 죽음사건 앞에서 우리가 아는 사적인 모든 것은 부질없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기에 지나지 않는 얄팍한 우리의 종교적인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그러한 작업을 할 때, 우리는 그 때부터 어떤 일을 부여받게 되는데 그 부여받는 일이 뭐냐 하면, 우리는 그냥 늘어지게 세월 지나는 게 아니고 지금도 누구와 싸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하고 싸우지요? 에베소서6장에서. 공중권세 잡은 자와 영적인 싸움을 하지요. 제가 성도란 사람하고 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화제가 그거야 돼요. “성도는 영적인 싸움을 어떻게 했습니까?” 이게 대화가 되어야 되는데 뭐 교회 갔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밖에 안할 때는 도저히 저 분이 세상을 그냥 동양화의 한 폭처럼 즐기는 한적하게 낚시나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치열하게 영적 싸움을 하는 사람인지 상당히 모호하지도 않지만, 저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면 마귀가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싸움이 안 되도록, “니는 내편이야.” 하게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복음의 광채를 흐릿하게 만드는 거죠. 방법이 뭐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훅하게 가가지고 죽음의 이벤트는 생각도 못하게 만든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거기에 훅하고 갈수밖에 없는 것은 육신이 있기 때문에 당연한 거고 육신이 있는 사람의 속성이 뭐냐 하면, 그걸 좋아하는 이유가 육신은 무조건 살아남는 게 땡이니까, 다행스러운 일이니까 물에 안 빠지고 내 아들, 내 딸 살아나오면 자랑스러우니까 무조건 살아야 돼 하는 거죠. 그러면 그 반대가 뭐라 했어요? 그러면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는 무조건 죽어야 됩니까? 무조건 죽는다면 어느 목사처럼 자살하면 그만이지요. 뭐~

세상의 모든 실연과 고통과 마음의 고초를 잊어버리는 방법은 자살이죠. 그럼 자살하면 죽은 자 되네요. 정답은 뭐라 했어요? 마귀가 살려고 할 때, 우리는 마귀 반대로 “죽으면 되지.” 이게 아니라 “살고 죽고 이것은 내 소관 아니다.” 이게 바로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죠. 살고 죽고 내가 신경 쓸 거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6장의 주안에서 싸워라, 그냥 혼자 싸우면 안돼요. 지가 장고입니까? 서부영화에 나오는 각 손가락에 권총 달려가지고 마지막에 승리하는 그런 황야의 무법자도 아니고 말이죠. 황야의 무법자 같이 모양새를 그런 모습을 하는 목사도 가끔 있긴 있어요. 누구라고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일부러 자유자 티를 내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렇게 자유자 티를 내면 마귀가 “어머머, 무서워라” 마귀가 도망갑니까?

사람이 뭔가 티를 내게 되면 티낸 자기를 이게 섬기는 수가 있어요. 갑자기 백화점에 가서 오백만원짜리, 육백만원짜리 옷에다가 오백만원짜리 가방에다가 50만원짜리 명품지갑 들고 나가게 되면 왠지 남을 의식할 수가 많아요. “저 사람이 꼴아보기는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 안 보는데. 지 자아도취에 빠져서 그럴 수 있다 말이죠. 그게 영적인 싸움은 아니거든요.

영적인 싸움은 우리의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남하고 싸우는 게 아니고 우리는 형체 없는 천사와 싸우려면, 사탄이 천사입니다. 우리도 형체를 안 쓰면 되는 거예요. 형체에 대해서. 아까 형체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일부러 남루하게 입으라하는 그런 뜻도 아니고 그냥 내 사는 목적이 어떻게 내가 남한테 영적인 사람이냐, 돋보이게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나, 이러면 신자처럼 보이지?” 그게 목적이 되어버리면 일곱 귀신 달라붙은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제사장 언약이라 하는 것은 항상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라도 지금도 가동되고 있다는 것. 엔진이 모양새가 투박하고 쇳덩어리로 되어있지만 거기 엔진에다가 휘발유 넣어서 해버리면 그 투박성은 엔진도 이쁘장한 자동차 몸체 자체를 시속 100Km 달리게 하잖아요. 활발한 활동력이 중요하지 우리는 하나의 껍데기의 투박한 엔진 몸체에 불과하고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활력을 일으키느냐가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 활력은 바로 우리의 활력이 아니고 제사장 언약의 활력이라는 것이 히브리서7장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활력을 일으키는지 봅시다. 23, 24절,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제사가 반복된다 이 말이에요. 전에 제사는 제사장이 있어서 숫자가 많은 거예요. 많은 숫자의 제사장이 하다가 늙어죽고 하다가 늙어 죽어도 다 모으면 다 집합시키면 숫자가 많잖아요. 이제는 그런 게 아니고 이제는 한 분, 예수님 한 분인데 한 분이라도 활동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이 계속 있으면 영원토록 그것이 엔진의 활동력이 계속되는데 그 계속된 기능이 뭐냐, 제사장 기능입니다.

제사장 기능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지요?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구원 앞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어떻게 구원한다고요? 온전히. 온전히 구원하죠. 이 온전한 구원을 믿지 못하게 되면, 인간은 그 다음부터는 헌금 어떻게 해야 되고, 기도는 몇 분해야 되고, 전도는 몇 명 전도해야 되고, 예배참석은 오전11시에 가야됩니까? 오후2시에 가야 됩니까? 저녁에 가야 됩니까? 성경은 하루에 몇 장? 이런 걸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온전함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안 믿는다는 그 모습이 이렇게 법으로 나와요.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규칙을 세우는 거예요.

인간이 규칙을 만들어버리면 이것은 마귀하고 싸움이 아니고 누구하고 싸움이냐 하면, 나의 완벽함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아~ 이런 우울증환자, 정신병환자들이 소위 복음 안다는 사람 중에서 굉장히 많습니다. 너무 너무 많아요. 그런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계속 사랑하고 자기 점검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까 이제는 복음이고 뭐고 복음 전하는 목사만 받고 이용할 생각을 해요.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을 안 드러내요. 자기 자신을 잘 드러내지를 않아요. 입을 딱 다물고 지켜보기만 하고. 그리고 자기의 우수함을 은근히 장착하고.

이 말은 참 계속해서 적용될 말인데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집안에 애가 둘이 있다고 합시다. 애가 둘이 있는데, 어버이날 되어가지고 큰 딸하고 작은 딸이 있다면 큰 딸은 어버이날 엄마한테 카네이션을 사서 달아드렸습니다. 큰 딸이 진짜 좋은 딸이라고 보고 그런데 둘째 딸은 음흉한 딸이라면 “언니, 꼭 카네이션을 해야 돼? 다른 백합으로 하면 안 돼?” “엄마가 작년부터 원해서 카네이션을 달아드려야 돼!” “그래? 아, 나는 돈이 안 되겠어. 카네이션 비싼데 다른 거 하면 안 될까?” 이리 한다는 자체가 지금 어버이날이 아니고 자기 뽐내는 날이에요.

어버이를 빙자한 지가 이만큼 훌륭한 딸임을 증명하는 날. 그래서 어버이 지나고 이틀 뒤에 오는 자기 생일날 어버이날 잘했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케이크를 더 큰 것으로 받아내고자 하는 그런 음흉한 계략을 갖고 있는 그런 딸. 예수님을 이렇게 잘 섬겼으니까 이 땅에서 남한테 기죽지 않도록 모든 경제적인 생활여건을 보장해 줄 거라고 믿는 그러한 신자도 아니면서 신자라고 가장하는 의외로 너무 많아요. 의외로 너무 너무 많습니다.

이게 저는 뭐냐 하면, 관심사가 다르다고 여기는 겁니다. 관심사가 달라요. 자기가 얼마나 지금 폼 있고 착하고, 성실하고, 거룩하게 생활하느냐, 여기에 갖고 있으면 그건 아주 못된 딸이에요.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무슨 말 실수했잖아요. 일주일동안 후회하고 있는데.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하나 쓴 게 있지요. 구원파가 못하는 것. 그거 상당히 중요한 글이에요. 왜냐 하면, 거기에 제가 뭐라고 썼는가 하면, 회개를 해야 이게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티를 낸다 하니까 그때부터는 죄를 지었는데 내가 깜빡 잊어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고 점에 대해서는 회개 못했기 때문에 구원을 제대로 못할 수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돼요? 안 빠트리고 죄 지은 것은 모조리 다 회개를 하려하니까 이게 얼마나 자기관리에 집중해야 됩니까?

관심사가 오직 자기를 철저하게 관리함으로서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와도 “야, 니 흠이 없네.” 하고 평가 받는데 온 평생의 신경과 정신을 거기다가 다 몰입시키는 거예요. 교회 나와서 인간 하나 버리는 게 쉽게 버리지요. 인간은 교회도 땅이건 그렇게 다 버려놨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인간들 다 버려놨어요. “아이고, 목사님 술 취했는데 회개하지요.” 태어난 자체가 실수에요. 실수, 당신은. 인간은 태어난 자체가 실수에요. 그게. 태어난 게 죄인으로 살라고 태어난 거예요. 죄 보여주라고 태어난 거예요. 태어나고 난 뒤에 자기관리 한다고?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도 방귀 꿉니다.

옛날에 어릴 때는 여자 담임선생님은 화장실도 안가는 줄 알았지요. 너무 순결하고 순수하니까. 진짜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요, 가까이 범접도 못해요. 그냥 멀리 보면 아우라가 빛이 왕~ 왕~ 음악소리가 들리며 빛이 막 나오는 것 같아. 저기서 오게 되면 천사가 걸어오는 것 같아. 하늘색 원피스입고 오게 되면 빛이 막 나는 것 같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있는데, 옛날에는 20대 중반에 그런 사람이 있었고 인터넷 발달로 해서 옛날에는 20대 초반, 10대 중반, 지금은 초등학교 1학년, 유치원 애들한테는 아직까지는 있어요. 진짜 천사가 있는데 유치원만 지나면 알 것 다 알아가지고 이제는 없어요.

결혼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결혼 자체가. 결혼 해놓고 하는 말이 결혼은 해야 되나? 결혼 꼭 해야 돼? 혼자 사는 게 이력이 난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은 이제는 지겨워. 딴방 쓰던지 이래야 돼. 혼자 사는 게 편하다니까요. 결혼해도 안 고쳐져요. 니는 돈만 벌어오고 나는 내 할 일 알아서 하고. 요새 젊은 사람들 그렇다니까요. 딩크족이 그렇다니까요. 진짜 지가 지 손으로 눈을 찌르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세상 전체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지 자기만 편하면 최고라는 거기에 완전히 매여 버렸어요.

결혼이란 뭡니까? 내 하나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게 오히려 반갑다. 이게 결혼이잖아요. 내 희생해서 저 사람이 웃을 수만 있다면 내가 얼마든지 희생하고 고생해 줄게. 이게 결혼이잖아요. 미쳤나? 요새 애들은 미쳤어요? 주례를 그리하면 이젠 겁나. 옛날에는 막 했는데. 주례 선생님 미쳤어요? 그런 사람 어디 있어요? 이런다고요. 그래도 주례는 그리 해요. 제가.

남자가 되었으면 자기가 벌어온 돈 가지고 여자가 행복하다면 그게 남자로서 그대 앞에 작아져도 남자의 행복은 바로 내 몸 살 깎아서 사랑하는 자를 아름답게 하고 더 행복해하는 그것에서 보람을 느껴야지 저 여자를 이용해서 내가 얼마나 더 이익이냐, 이거 따지면 남자가 아니라 했어요. 물론 여자 분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그겁니다. 예수님이 반복하는 게 그거에요. 내가 마귀와 싸울 때는 마귀하고 혈과 육으로 붙어서 싸우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 죽어서 기어이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기어이 뭘 얻었습니까? 밀알이 죽어야 생명을 얻잖아요. 생명은 이 땅에 안 나와요. 그리고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얻을 수도 없어요. 외부에서 생명이 와가지고 그게 하나 죽어야 돼요. 그러니까 마귀가 기어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못 알아보도록 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할 수만 있거든 아버지 뜻대로 그냥 장렬하게 죽으니까 비로소 그 생명이라는 게 있고 생명이 우물이 되어서 그 우물 옆에 생명이 있으니까 한 둘 붙어보니까 그게 그야말로 십자가 마을, 십자가 피만 먹고 사는 마을이 된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자기가 생명을 이미 바친 자라 하는 것을 호명해 준 거예요. 호명해야 나오지요.

그 호명 받은 사람이 누구 자랑하겠습니까? 지 자랑하겠습니까? 자기 관리 하겠어요? 나는 이것도 실수했고요. 저것도 실수했어요. 니는 처음부터 실수했어. 그런 소리하지 말고 어떤 실수를 해도 하나님만 주님만 있으면 온전합니다. 히브리서 7장 24절, 25절 말씀이에요.

누굴 힘입어? 온전하게 된다는 거예요? 자기를 힘입어. 자기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답답해하시는 거예요. 니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힘입으라는 말이죠. 나를 힘입으라는데 자꾸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관리하고, 어떻게 주님 잘 믿는 거예요? 지금 잘 한 거예요? 매일 자기가 자신의 종교적인 능력과 경건함에다가 힘입으려 하니까 좋은 것은 마귀만 좋다고 싱글벙글거리고 자기 종이니까 갖고 놀기가 쉬워요.

원래 점쟁이들이 그런 약한 사람들에게 돈 빼먹는 거 얼마나 쉽습니까? 요거 이야기하고 10분 쉽시다. 지금도 구원파가 우리 유 병언회장을 위해서 돈을 다 바치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일반사람들은 그 심리를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요. 자기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천국을 보고 싶은 거예요. 눈에 보이는 천국은 돈이 필요하거든요. 내가 돈 내는 것에 대해서 유 병언회장이 충분하게 보이는 천국만 만들어준다면 수련원 같은 거 있잖아요. 이상적인 공동체생활. 전 양자가 회장으로 있는 그 수련원. 그것만 해준다면 회장님 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갖다 바칠 테니까.

우리 눈에 띠는 우리 공동체. 이 공동체만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신천지고 그게 박태선이고 그게 바로 한국교회의 장로교고 침례교고 천주교인 거예요. 감리교의 예배당 큰 거 보세요. 다 그게 구원파하고 똑같은 거예요. 같은 이단들이에요. 자기가 낸 것을 자기가 찬양하고 싶은 겁니다. 순교하고 싶은 거예요.

큰 딸이 카네이션 달아줬는데 작은 딸이 카네이션 사왔거든요. 그런데 엄마는 큰 딸이 사온 카네이션만 달고 있으면 작은 딸이 얼마나 섭섭해 하겠습니까? 인증 샷 찍어가지고 큰 딸 보여주고 얼른 바꿔가지고 작은 딸 카네이션 달고 인증 샷하고 그럴 판이라.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서 다시 회수하는 식으로 자기의 영광 받고 싶은 겁니다. 자기관리하지 마세요. 주께서 다 압니다. 우리가 얼마나 허접스러운지.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이 나이가 들면요, 깜빡 깜빡 다 잊어버려요. 죄지은 거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그리고 내가 한 행동이 남한테 얼마나 피해주는가, 옛날 젊을 땐 따지기나 하지 요새는 따지는 것도 귀찮아. 싫어 그만. 횡단보도 그냥 건너가. 거기 아줌마! 하면 미안하오. 이것은 신앙하고 관계없이 육신이 그래요. 육신은 편한 데로 그냥 흘러가게 마련인데. 지난번에 횡단보도 건넜다고 1주일 금식했는데 그 다음에 늙어서 횡단보도 2번하면 14일 금식하다가 늙어 굶어죽는데. 어떻게 한다? 자기를 힘입어라.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음성은 “그러니까 나를 힘입어!” 이미 온전하게 구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40509a-히7장26절(복사(카피)) - 이 근호 목사.hwp (32.5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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