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74강, 75강) 선물과 뇌물, 능치 못할 일 140515
유튜브(74강, 75강) 선물과 뇌물, 능치 못할 일 140515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74강
75강
유일자(IP:116.♡.234.248)
14-05-19 15:49
74강-YouTube강의(선물과, 뇌물)1405015-이 근호 목사
제목은 ‘선물과, 뇌물’ 입니다. 선물하고 뇌물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생각해 보면, 인간 쪽 에서 출발하게 되면 그것이 은근히 선물을 기대해도 그것은 뇌물의 성향이 강해요. 내가 이것을 받는 다든지, 내가 이것을 준다든지 예를 들면, 내가 이것을 상사한테 뭔가 선물을 줄때, ‘상사님 이건 뇌물입니다.’ 라고 이야기 하면서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상사님 아무 생각마시고 제 성의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는데, 그 선물 받은 상사가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줬을 때는 은근히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화가 나겠죠. 인간에게는 순수하게 선물이라고 여겨도, 결국 인간은 선물을 순수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그걸 항상 뇌물성 있는 입장으로 나중에 시간이 지나가면 그렇게 전환되는 겁니다.
이번엔 반대로 이야기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었다라고 할 때에, 처음에는 ‘아이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지요. 받고 난 뒤엔 하나님께 선물은 받았는데 하나님이 선물주신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내가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닦달내시고, 뻔뻔스런 자라고 욕하겠는가. 라고 우리 쪽에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역시 뇌물성 있는 해석이 돼버립니다.
평소에 우리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어떤 댓가 없이 물건을 주고받을 때에 자기 딴에는 순수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선물 줬다는 그 기억 때문에 순수하게 오래가지를 못하고 반드시 반대극부가 되돌아와야 그 다음에 내가 선물 줄 수 있는 보람을 느끼겠다. 라는 식으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인간성 자체가 이미 망가졌고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헌금을 할 때, 하나님이여, 이거는 은혜 받은 것에 감사해서 아무 댓가 없이 드립니다. 라고 하면서 그 헌금이 어떻게 쓰여지냐를 감시하게 돼있고, 그 헌금이 흘러가는 통로를 주시하게 돼있고, 그것이 자기가 기대한 거와 정반대로 간다면. 그 다음에 또다시 헌금 할 마음은 싹 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선물, 선물을 말하지만 인간 쪽에서는 그 선물을 뇌물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문제성이 우리 인간 속에서 본성적으로 잠재되어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이 선물마저도 우리 쪽에선 뇌물성으로 왜곡돼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선물줄 때, 우리가 선물을 보답해서 어떤 추가적인 행동을 할 때만 영광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관점에서 보시는 선물을 순수하게 그 선물자체로 받아들일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얘기 한 바에 의하면, 아무리 순수하게 하나님이 선물을 줘도 우리는 인간성 자체가 고장났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선물이 아니고, 뇌물로 변질되어서 수용하기 때문에 순수함이 우리에게 나올 수가 없죠. 그러면 선물 줘놓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못받는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바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실 때 그 성령께서 우리를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환경으로 데려 갑니다. 그 환경이 뭐냐?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니가 영적전쟁 안에 놓여 있음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 소유용으로 갖고 있어라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데요,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주체가 되서 우리를 데리고 우리를 어디로 안내하느냐하면, 영적전쟁이 벌어지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게 됩니다.
그럼 영적전쟁이 벌어지는 곳으로 데려가게 되면, 우리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가. 우리는 바로 선물을 뇌물차원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그 정도로 자기 이득만 먼저 고려하고 자기가 편한 것만 먼저 챙기는, 그런 하나님의 원수적인 요소가 있음이 발각당하는 그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전쟁에다가 데려 갑니다.
에베소서4장 7~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것,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전쟁에서 우리대신 영적전쟁을 치러 주시는, 그래서 마귀를 이겨주시는 제3의 인물이 선물 받게 되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분이 누구냐. 바로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전쟁터에 가게 되면, 우리는 무능한 자로 발각이 되고 우리는 어떤 능력을 행할 수 없어요.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어떤 무기도 우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기지 못한 마귀와 죄의 권세를 이기게 하셨다는 그 현장에서 믿음이 생기도록 조치를 해주십니다. 곧, 너 자신을 이제는 믿을 만한 게 못되지? 우리는 ‘예’ 라고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가 영적전쟁 속에 있느냐, 없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가 나서서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자라는 것을 제2, 제3 되풀이 하면서 그걸 깨닫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뭔가 좋은 일 생기면 거기다가 자기 행함을 연결시켜 버려요. 행함의 노선과 연결해가지고 내가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내가 신앙생활 잘했기 때문에 이런 복을 받는다는 자꾸 그런 식으로 연관을 시켜요. 믿음이란 이름으로, 은혜란 이름으로, 행함의 모습으로 자꾸 들이미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전쟁에서 자신이 무능한 자, 못난 자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잘하면 내 힘으로도 될 수가 있는 자기가치, 자기가능성 이런 것을 의지하고 앞장세우는 그런 인간으로 노출되죠. 따라서 그 노출을 통해서 우리가 은연중에 마귀로부터 사로잡힐만한 그런 이유가 나타나 버립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항상 마귀는 우리 편입니다. 내가 내부터 챙기고, 내 자랑거리, 내 자존심을 유지하려고 최후로 붙잡고 있는 것은 뭐냐, 나의 가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마귀가 호응을 해주고 힘을 보태줍니다. 그래 되면, 십자가 예수님 죽으심의 의의는 무가치하게 날라가 버리죠. 그래서 마귀는 복음의 광채를 그런 식으로 흐릿하게 만드는 그 작업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 영적전쟁에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마귀의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기 자신을 찬미하고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황홀해하고, 감탄하면서 우리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자로 발각 당하게 되죠.
자,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의 내용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선물의 내용은 뭐냐. 에베소서8절 아까 읽은 말씀처럼, 그 분이 위에 올라가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 그것은 나의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신 것이 되죠. 은혜로 주신 것이 되게 되면, 이거는 뇌물이 아니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왜, 못난 사람에게, 탕자에게 그냥 무상으로 아버지가 옷을 준비하고 가락지를 준비한 것처럼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그냥 주시는 그 선물. 그 선물이 유지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천국 생활을 우리는 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한번 정리하게 되면, 우리는 항상 뭐든지 내 소유가 되면, 뇌물로 이해를 하게 되지만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면, 이거는 뇌물이 아니고, 우리 소유용이 아니고 주님만 높이라는 선물용, 주님자신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을, 그 선물로 인하여 구원받은 것을, 사랑받은 것을 우리는 다시한번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유일자(IP:116.♡.234.248)
14-05-19 15:51
75강-YouTube강의(능치 못할 일)1405015-이 근호 목사
교회에서 성경을 보면서 대다수의 교인들이 참 근원적으로 오해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죠. 근데 그 능치 못할 일, 거기에 대해서 능치 못할 일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겼는데, 우리는 예수님께 맡긴 능치 못할 일 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내가 지상에서 만들어낸 능치 못할 그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결제 맡으러 들이 댑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는 능치 못할 일이 이렇게 많습니다. 하지만 내가 미진해서 못한 그것을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능치 못할게 없기 때문에 내한테 이 난제, 이 어려운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일도 주께서 해결해 줄 줄로 믿습니다. 고 이야기해요.
그저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그냥 믿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는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가지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 그냥 동심 같은 순수한 믿음, 그런 믿음은 반드시 응답하리라고 주께서 약속을 한 줄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그 약속의 완성체는 십자가입니다. 즉 너는 나와 함께 죽지 아니하면, 너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것을 우리에게 약속을 준거예요. 우리의 시작은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내한테 능력이 너무 모자라서 하나님은 전능 못할 일이 없으니깐 이루어지겠지. 라고 내가 꾸며놓은, 내가 이렇게 생각해놓은 그것이 능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성경에서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줄 수 있는 능치 못할 일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너는 마땅히 죽어야 해. 하는 그 소식입니다.
뭔가 시작과, 끝이 잘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 들죠, 어느 인간치고 하나님을 찾을 때, 자기가 할 수 있다면 찾을 리가 없겠죠. 자기가 해보다, 해보다 안 되니까 하나님 기도하면, 혹시 들어줄까 싶어서 기도하고, 매달리고, 간구하고, 또는 맹세하고, 서원하고, 뇌물 바치고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뇌물 바쳐서 자기 소귀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은근한 노림수를 품고 교회 와서 목회자 시키는 데로 다 할 테니까 이건만은 내한테 해달라는 그런 시도를 하는데, 사실은 인간치고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별다른 사람 없고, 10년, 20년 믿었다고 해서 그 마음 싹 가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 육신이 남아있는 이상은 그 생각이 항상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편할 때는 건성으로 성경보고 기도하다가 답답할 때, 낭패들 때, 절망적일 때는 진짜 나름대로의 진실됨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나름대로의 진실되게 기도한다고해서 응답주는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편할 때나, 한 맺힐 때나 항상 우리가 조작해낸, 우리가 만들어낸 사항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걸 들어줄리가 만무하죠. 다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움으로 깨닫는 바는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다시 그동안 편할 때 말씀이 멀어졌는데, 어려움 가운데서 다시 말씀세계로 발을 들여 넣을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이 답답할 때 하나님을 찾았고 편할 때는 하나님을 버렸어요. 사사기 내용이 그 내용입니다. 배부를 때는 안 찾다가 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달려들고 기도했습니다. 회개하고 금식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오늘날 우리와 다름이 없죠. 다 같이 아담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치 못할 일을 성경 속에서 찾아야 되거든요. 우리보다 선배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능치 못할 일이 어떤 응답을 받았는지 예레미야32장 27~28절에 보면, 능치 못할 일이 어떤 일인지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여호와여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 성을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일 것인즉 그가 취할 것이라.”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능치 못할 일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을 반드시 멸망시키는 일에 대해서 내가 주저하지 않겠다, 그런 차원에서 주께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소서.’ 라고 구원하는데 있어서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믿고, 하나님께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하는 말이 너 같은 인간을 지옥 보내는데 있어서 나는 행할 수만 있다면,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라는 조로 답변을 보내오는 그런 방식이 내게 능치 못할 일이니라.
인간이 능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출발점이 자기예요, 자기가 잘돼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잘 된다 못된다, 라는 걸 누구에게 배웠죠? 그건 현재 우리가 현재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슨 힌트를 얻었냐하면, 이런 것이 잘되는 것이고, 이런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면서 남들로부터 배워왔습니다. 가정에서 배웠고, 교회에서 배워 왔어요.
부자되고 건강하면 잘된 것이고, 가난하고 아프면 못된 것이라고, 그게 실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실패한 것이라면 누가복음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실패한 사람이라고 보면 실패한 사람이고,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강도들도 다 실패한 사람이죠.
우리는 그런 경우가 생길까봐 너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걱정스러워서 걱정이 넘칩니다. 따라서 그런 걱정과, 한 맺힘을 안고 교회 와서 하는 말이 주여,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께 제가 간곡히 기도하오니 제 소원 들어 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뿐만 아니고, 우리의 선배격인 이스라엘백성들도 그런 식으로 여호와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짜 정답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를 기어이 망하게 하겠다. 그것이 너희들이 예상 못한 이 하나님의 진짜 전능하신 능치 못할 일이다,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기분 나쁘십니까? 절망적이십니까? 기분 나쁘고 절망적이다. 라는 그런 생각 갖지 마시고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문제해결은 간단한 거예요. 나 자신 자체가 이미 뭔가 잘못돼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싫어하는 요소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는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대적해야 되고, 하나님을 반대해야 되고 하나님을 공격하는 세력이 마치 나와 한패인 것처럼 나한테 들어와서 다정한 친구처럼 속삭일 때 우리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의 본성대로, 욕망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아올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요구에 부흥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죠.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사랑의 축복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고, 그러면 성도가 어떻게 매달려야 됩니까? 그것은 빌립보서4장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도가 이미 우리에게 12~13절에 알려줬습니다. 뭐라고 되어있냐 하면,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내가 궁핍하게 사는 것도” 주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이걸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나의 능력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그걸 확인하고 수용합시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건 뭐냐하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해서 살아야 되는구나가 아니라, 이런 지경도 주께서는 활용하시는구나, 하는 이런 비결을 알게 되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다시 말해서 이번일은 내 일이 아니고, 나에게 이런 능력을 주시는 주님의 일에 내가 참여되고 활용됨을 당하는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내가 수용해주고 내가 그걸 동의하는 겁니다. 그 능력이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이거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성령 안에서 이런 능력이 우리에게 피어나는 거고 사골 우러나듯이 우러나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주께서 원하는 일이기에 나로 하여금 이런 궁핍과, 풍부와, 어떤 환경이라도 그 환경은 나를 위한 내 몸 살리기 위한 환경이 아니고, 주께서, 거봐! 어떤 지경이라도 주의 복음은 변치 않잖아. 그걸 우리 자신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어서 주께서는 능치 못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능치 못할 능력을 이미 부여 받았기에 우리는 지금 이러한 자유함 속에서 살아가는 그 능력이야말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없는 넘치는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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