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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수원140417b-(에스겔)3강 -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에스겔

수원140417b-(에스겔)3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수원140417b-(에스겔)3강 - 이 근호 목사

에스겔 이야기입니다. 입에 먹으니 그게 내 입에는 달고 꿀 같더라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뒤에 보면 속에서는 속이 뒤틀리니까 쓰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이유가 나와 있어요. 이유가 뭐냐 7절에 보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완전히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약을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뭐냐 하면, “에스겔아!” “예” “말씀 받았지?” “받았습니다.”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하고 룰루랄라 신나게 가는데 이미 하나님은 알고 있어요. 네 말을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하는 이 방법이 인간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하나님이 익히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이 주의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굳이 에스겔에게 말씀 줘가지고 꼭 안 듣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이것 때문에 그래요. 에스겔이 인자의 대행자기 때문에 그래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앞당겨서 메시아에 가는 고난의 길을 앞당겨서 보여줘야 되거든요.

방금 제가 뭐라 했습니까? 보여준다 했지요.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해요. “하나님은 보여줄게.” 하십니다. 반갑지요. 그 말만 들으면 되게 반가워요.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이 땅에 오신데. 합류한데. 봐야지. 봐야지.” 굉장히 보고 싶어 하는데 막상 품속의 독생자를 나타나게 하셨는데 하나님이라고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게 이사야53장에 흠모할 게 없었거든요. 사람들이 다 외면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사람들이 좋아했잖아요.” “좋아 했었었지요.” 왜? 오병이어를 했으니까. 보리떡5개, 물고기2마리가지고 배불러할 때,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쳤어요. 끝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 얼굴보고 왔습니까? 예수님 누군 줄 알고 따라온 겁니까? 그들이 채울 것을 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은 이미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가 이런 것 같으면 내가 주의 기적,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로 저는 채택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이미 인간들이 자기 쪽에서 먼저 그걸 만들어낸 거예요. “이런 거미 망에 걸리기만 해봐라. 나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확신하겠어.” 하나님이 믿는 조건을 내 쪽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이런 저런 조건을 먼저 제시한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신다면, 이렇게 해주신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제가 확실히 믿겠습니다. 이렇게 해주신다면.” 이렇게 한 거예요.

제가 영화 ‘시선’이란 글을 쓰면서 그런 것을 감안했거든요. 하나님은 흥정하지 않습니다. 사람가지고 흥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거 해주면 살려줄게.” 라든지 “살려 줄 테니 이거 하라.” 흥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그 자체가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죽은 존재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게 제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에스겔3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골짜기에 가니까 바짝 마른 해골이 있었고 그 해골에 대해서 인자 에스겔을 같이 동참을 시킵니다. 묻습니다. “인자야?” “예”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 뼈들이 살겠느냐 하는 질문에 답변에 대해서 에스겔이 답변하지 말고 에스겔이 어떻게 답변해야 된다는 것을 에스겔에게 알게 하는 거예요. 에스겔은 그 답변을 자기가 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넘깁니까? “주께서 하실 겁니다.”하고 넘겼지요.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이 아심을 넘겼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보이던 안 보이던 주님이 보이는 나보다 더 생생하게 계신분이 주님이라는 겁니다. 내가 나의 문제를 넘길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내가 여기 존재함으로서, 그걸 존재한다는 증거가 바로 내가 넘길 분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무엇이다, 가 아니라 누가 나를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주체의 자리에, 주인의 자리에, 주어의 자리에 내가 빠지고 주어의 자리에 긴 공백으로 남겨두고 이 공백의 자리에다가 예수님을 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 때문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살아가는 겁니다. 물어봅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위치를 묻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어의 자리에 있는지, 주님 뒤에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베드로가 제대로 말했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주께서 아십니다. 개척교회하면서 이만큼 어렵고 힘들고 교인이 없고 그리고 이러다간 온 부부가 굶어죽겠다는 것을 뒤에다가 뭐만 붙이면 돼요? 주께서 아십니다, 를 붙이면 된다니까요. 부자 되게 해 달라, 소리 하지 말고, 안산의 애들 한 학년 다 날아가는데 “주께서 익히 아시고 벌이신 일이십니다.” 요 위치만 바꾸면 되는데. 위치만 바꾸면 간단한 문제에요.

에스겔로 하여금 말씀을 먹게 한 이유가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 백성이라는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났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여, 보여주시옵소서.” “인자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 보여주시옵소서.” “지금 내 종들이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보고 믿겠습니다.” “내 종들의 말을 들으라.” 계속 이 고집, 이 둘의 고집이 싸우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25장에 보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벗었을 때에 입을 걸 주었느니라. 우리들이 언제 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예수 믿는 이 작은 어린아이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 복된 자들아, 너희는 양의 자리에 오른편에 가거라. 그런데 지옥 갈 사람이 나타나가지고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그렇게 고생하는데 안 도와줬습니까? 이 소자한테 안 한 것이 곧 나에게 안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여요? 주님의 소자가 있고 형제가 있는데요. 그들 가운데 함께 있는데. 주님은 지금도 성령 받은 성도를 통해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우리로 다 느끼게 하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보지 못한다고 하니까 오히려 소경이 아니게 하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여러분, 12사도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12사도가 전부 다 순교 당했지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로마에 분명히 간다고 언급했을 때, 자기는 편안히 로마에 가는 줄 알았어요. 도중에 폭풍이 일어나서 죽을 뻔한다는 것은 전에 그런 이야기 없었어요. 니가 반드시 로마나라 앞에서 왕 앞에서 네가 서야 된다. 분명히 언급했지 도중에 니가 고생할 것이다. 도중에 니가 폭풍을 만날 것이다. 그런 생각 한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막상 로마 가는데 티켓 끊어 가는 게 아니고 가다가 죄수의 몸으로 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폭풍 맞아 배가 뒤집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폭풍이 왔을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이 걱정하니 말아라, 너는 반드시 로마에 서리라. 염려하지 말라 네 곁에 내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사도바울에게만 이야기하고 같이 배 탄 사람한테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요. 다른 사람한테는. 다른 사람은 주님이 있다는 걸 몰라요. 그런 다른 사람은 누구만 쳐다보겠습니까? 사도바울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조치를 취해가지고 그들이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다 살았지요.

아마 요번에 진도에 배빠지면서 우리는 모르지만, 죽기 전에 니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는 음성을 들을 학생도 있을 것이고 그런 성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배제 못하지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마르다 마리아가 제일 크게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는 살았고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뒤바뀐 사고방식이었습니까? 오빠는 안 죽었고 오빠가 죽었다고 여기는 본인이 죽은 존재였던 거예요.

그래서 입장을 너희입장 생각하지 말고 죽은 오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안 죽었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이미 죽은 존재고 죽은 존재지만,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나에게 적용하지 말고 이미 죽은 나에게 적용시키면, 그 말씀해석이 다 깨끗하게 정리가 돼요. 내가 죽었는데 이 말씀 주셨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말씀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도 살아있지요. 그리고 이삭도 살아있지요. 야곱도 살아있지요. 아브라함 품에 누가 있습니까? 거지 나사로도 살아있지요. 그리고 엘리야, 모세 다 거기 가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 보면, 조상의 선배들이 다 가있다 말이죠.

지금부터 현실 이야기하는데, 현실문제 때문에 우리는 내 중심의 현실을 현실이라 보고 예수님이 있는 중심을 현실로 안 보는 경향 때문에 그러한 혼선이 일어나는 겁니다. 혼동이 일어나가지고 이 현실에 하나님이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현실문제에 대해서 에스겔 본문가지고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렵게 설명하더라도 반가운 것은 우리 송 목사님께서 풀이해준다니까 제가 안심 푹 놓고 하겠습니다. 현실문제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시루떡 아시죠? 시루떡이 있는데, 시루떡이 2층입니다. 1층은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현실로 봐요. 이걸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내가 누군지를 알고부터 발생된 세계, 그걸 현실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는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내가 두 살 때, 한 살 때 기억은 포함되지 않아요. 내가 정신 차리고 내가 누군 줄 아는 그 때부터 계산한 현실, 그러니까 이 현실은 편집된 현실이고 조작된 기억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까 차타고 오는데 나무가 있지요. 혹시 그 나뭇잎이 몇 개인지 헤아려본 적 있습니까? 저 앞에 나무가 있네. 나무 잎사귀 세어본 적 있어요? 없지요. 그럼 나무가 있는지 잎사귀가 있는지 기억 없지요. 왜냐 하면, 내 중심의 현실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보면 가로수 심어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현실을 다 포용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에요. 하나님의 현실을.

가로수 심어놓은 이유를 모르면서도 우리는 현실을 안다고 여기는 우리의 현실. 욥기에 보면, 욥이 하나님에게 말하기를 “왜 착한 저에게 고난을 내리십니까?” 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니가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비가 올 리가 있습니까? 황무지는 채소와 시금치를 키우지 않는데. 우리는 내가 농사를 지었을 때만 비가 와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는 깊은 계곡에 황무지에 비가 온다는 것은 그건 낭비요, 그건 허비처럼 느껴지잖아요. 욥은 그걸 압니까? 모릅니까?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모르지요. 모르면서 뭐라고 우기는가 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저한테 아픔을 주십니까?” 하는 거예요. 욥의 현실은 안 아파야 된다는 현실을 갖춰놓으니까 갑자기 고난이 날아오니까 이 화살은 왜 저한테 꽂힙니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는 말씀이 이런 겁니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네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니가 항상 당황스럽고 모르는 사건만 사태만 일어나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2층에서 찌르고 내려오는 겁니다.

찔러 놓으면 여기 홍해사건, 홍해사건이 모세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지요. 모세가 홍해가 갈라질 걸 미리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모세가 몰랐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뭐라 했는가 하면, 가만히 있어봐! 불평하지 마! 가만히 있어. 모세는 지금 뒤에서 말 타고 애굽 군사 따라옵니다. 가만히 있어. 뭔가 있을 거야. 홍해 갈라졌습니다.

요단강 보세요. 요단강 들어섰을 때에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요단강이 갈라질 걸로 생각했지요. 왜냐 하면, 홍해가 갈라졌기 때문에. 그런데 아무리 지켜봐도 요단강은 어떻습니까? 안 갈라졌지요. 안 갈라졌습니다. 요단강 건너갈 때, 여호수아가 아무리 봐도 안 갈라지지요. 이게 뭐냐 하면, 그 다음에 홍해 침투했지요. 이번에는 뭐가 침투합니까? 바로 요단강 침투 나오지요. 자, 여리고성 봅시다. 여리고성이 강대합니다. 여리고성을 일곱 번째 날에 일곱 바퀴 돌면 무너진다는 그것이 여호수아의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와르르 무너졌어요. 또 침투하지요. 우리가 하나의 현실을 여기서 뭐냐 하면 파열, 찢어짐 또는 깨어짐 또는 불연속성 안 그러면 우리의 계획이 무산됨. 요걸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현실 속에 진짜 현실을 담는 방식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를 되풀이하고 반복시키는 방식,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방식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걸 베드로 식으로 이야기하면 니가 원치 않는 길을 띠 띠고, 띠 띤다는 말은 니가 알아서 간다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가는데 그 강제로 가는 길을 베드로가 안다? 모른다? 모르지요. 베드로가 순교하겠다고 나서도 그건 주의 뜻이 아닙니다. 순교를 하더라도 니가 모르는 방식으로 순교하게 하셔요.

곱게 자다가 또는 베드로가 당구 치다가 죽을 수도 있고. 이것은 예상 밖의 일이에요. 순교한다고 해가지고 그래서 제가 자학하지 말라고 했지요. 자학하거나 재산 바치고 그런 짓하지 말라고 했지요. 아줌마들이 마사지해가지고 “어, 시원하다.” 마사지 받으면서 순교할 수가 있어요. 하여튼 우리가 예상한 10가지 같으면 11번째 예상 못할 방식으로 현실을 우리에게 쏙 쑤셔 넣는 거예요.

쑤셔 넣을 때, 우리는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내가 현실이라고 여겼던 그 현실 바깥에서 나의 현실을 변화시켜 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게 돼요. 제가 어떤 강의에서는 아주 이런 심한 말까지 했어요. 여러분들이 간음한다고 해서 그게 간음죄가 성립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어려운 걸 알아서 송 목사님이 설명해 주셔야 돼요. 왜 간음죄가 간음이 성립이 안 되는가 하면, 간음하면서 이걸 본인이 간음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간음하고 있는 거야. 지금 간통하고 있는 거야. 내 아내 몰래 지금 간통하고 있는 거야.’ 이미 아는 순간 그것은 간통죄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하고 동업을 안 해요. “주여, 제가 간통을 했으니까 제 죄를 회개하옵소서.” 하면 주님께서 “니 무슨 죄 지었어?” “제가 간통합니다.” “니가 간통을 제대로 알고 간통하는 거야. 그거 간통 아니야. 니가 도대체 뭔 줄 알고 니가 니 마음대로 그렇게 간통이라고 규정을 해.” 다윗이 간음을 했잖아요. 간음을 해놓고 자기가 간음이라고 여겨가지고 자기가 간음이라고 자부를 한 거예요. 죄 지었다고 여긴 겁니다.

다윗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를 지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죄가 된 겁니다. 죄를 지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밧세바가 임신한 그 DNA를 조작하려고 했습니다. 자기의 DNA이면서 남편 DNA로 우리아 DNA 로 집어넣으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살인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나단이 와가지고 딱 지적하니까 내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나타나는 거예요. 내가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나는 죄를 지을 때만 죄라고 오인한 거예요. 죄라고 여긴 것이 바로 죄였던 겁니다. 그게 자기의 일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죽음의 위협이 무서워요. “니 죽인다!” 이게 무서워요. 죽음 직전이 무섭지 죽음은 안 무섭다 이 말이죠. 지금 진도의 애가 빠졌을 때에 애는 지금 물이 들어온다는 것이 일상의 일입니다. 누가 무서우냐 하면, 그 엄마가 무서운 거예요. 애는 지금 죽는지 안 죽는지 몰라요. 물이 들어왔을 뿐이고. 죽을 수도 있겠네. 지금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내가 할 게 뭘까? 물을 퍼낼까? 지금 구명조끼입고 뛰어 내릴까? 요 일상의 선택만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무서워해요. 내 자식 죽을까봐.

마귀는 죽음의 위협가지고 위협해요. “니, 죽는다!” 하는 죽는다 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나의 자의식 속에 섞이게 만들어서 협박을 해요. 내가 죽으면 그만인데 우리는 내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요. 아까 이야기한 내가 주어자리에 죽는다고 마귀가 이렇게 조작해 버려요. 주께서 죽이면 괜찮은데 우리는 죽을 때 그리 죽지 않고 내가 죽으니까 무서운 거예요. 내가 죽으니까.

암에 걸리면 무서운 게 아니고 아침에 찬거리 없어서 무서워요. 우리는 남편 월급이 적어서 죽어요. 왜냐 하면, 애 못 키울까봐 죽을까 싶어서. 그러니까 일상이 죽음이고 막상 죽으면 안 무서운데. 늘 마귀가 죽기가 무서워하므로 종들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15절에. 마귀가 항상 “니, 그러면 죽는데이. 죽는데이” 자꾸 죽음 자체를 가지고 협박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우리 인생 속에 아예 DNA처럼 완전 박혀있어요. 육체 속에.

그러니 막상 지하철에 섰는데, 누가 술 먹은 사람이 넘어졌다. 그러면 누구나 거기 있으면요, 계단에 뛰어들어서 사람 구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만약에 멀리 있는 제 아내가 봤다면 아내는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막상 취객을 건져내고 지금 전동차 들어오고 하는 나로서는 내가 해야 될 일만 생각되지 바치면 아프고 아프면 죽어. 이런 생각은 들지를 않아요.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취객해가지고 올리고 왔을 뿐이에요. MBC에서 와가지고 “아이구, 어떻게 그런 귀한 일을?” “그게 무슨 귀한 일? 나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진짜에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 일에 참여하지 않은 제삼자가 볼 때는 상상하거든요. 상상할 때, ‘내가 만약에 저 사람처럼 가면 전동차가 오게 되면 그럼 내 가족은? 식구는? 우리 딸은 아직도 시집 안 갔는데. 안되지, 안되지, 바보같이 뛰어들긴 왜 뛰어들어.’ 이렇게 뭔가 생각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마귀가 준 무서움이 마구 들끓고 난리 나요.

지금 에스겔을 할 때 주의 명령은 뭐냐 하면, 바로 말씀이 니 주인이라는 거예요. 말씀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해요. “너는 해봤자 아무도 니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데도 니가 말씀을 전해야 될 이유가 그들이 현실이 뭔지를 몰라요. 왜? 인자 에스겔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죄가 없어요. 돌 들고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남으로서 어느 인간도 돌 들고 칠 의인은 없다는 것이 판명된 거예요.

사람이 간음을 해도 간음죄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자기가 한 간음죄에 대해서 간음을 하는 현장에서 간통을 하면서도 자기가 반성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순순한 간음죄가 성립이 안돼요. 왜? 내 잘못을 누가 안다? 내가 알면서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이 내가 감당이 안돼서 하는 것이다. “주께서 아시지요? 주님 제가 이거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 줄 아시죠?” 라고 변명을 늘어놓을 여지들이 많아요. 내가 애를 때리면서 “주님이여, 이것은 내가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고 사랑의 매인 것을 주께서 아시지요?” 하면서 자기는 가면 쓰면서 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가 반드시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반성이 뒤에 달려있습니다. “주님이여, 요번 일만 하고 난 뒤에 헌금을 곱빼기로 해드리겠습니다.” “이거하고 난 뒤에 제가 선교하겠습니다.” “요번 일만 허락해 주시면 제가 교회를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일 년 동안 출석 다하겠습니다.” 하면서 그 짓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건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요. 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을 들이밀면서 제가 선을 놓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일이 나쁘다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내가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다른 사람은 모를 거예요. 하지만 저는 요 짓이 나쁘다는 것을 아니까 요 안다는 요 착함만큼은 제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리 나와요. 임 재범씨가 부르는 그 가사에도 나와요. ‘고해’라는 가사에 보면 나와요. 어찌합니까? 있지요. 어떻게 할까요? 뭘? 저 여자만 주신다면 제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바로 조건부 아닙니까?

저 여자만 주신다면, 제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그게 임재범의 노래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하루 눈뜨면 하는 일이 그겁니다. 안산의 애들만 살려준다면 제가 요번에 안산동산교회에 가가지고 헌금하겠습니다. 그동안 일년치 못했던 십일조 우리 애만 살려준다면 한꺼번에 다해드리겠습니다. 주님은 흥정이나 거래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자기 잘난 체를 끝까지 포기 안한다는 것, 인간이 육신이 있는 한 절대로 자기 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앞에 인자되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 죽을 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봐라, 너희들을 대표한 내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은 사실은 이미 너희들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따라서 이 사실이 예수 내 이야기가 아니고 너희들 이야기라고 믿는다면 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왜? 예수님만 높이기 때문에 천국 갈 사람이 맞습니다. 면류관 전부다 벗어서 반납할 사람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예수님만 주라고 찬양할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과 한 통속으로 한 팀의 가족일수가 있는 겁니다.

에스겔이 이렇게 말씀을 먹은 것은 그 사람들이 자꾸 자기가 잘못한 것을 모르니까 새삼스럽게 후차적으로 가서 말씀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고 싶다는 사람에게 에스겔을 보내가지고 인자를 보내가지고 초라한 행세, 알 수 없는 이상한 행세를 하는 그런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에스겔을 미워하도록 만듭니다.

지금은 그 사명을 말씀 받은 우리가 그 사명을 지금 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주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독한지. 매일 반성하는 게 매일 교회 가서 회개하는 게 그게 죄에요. 회개할 것도 없고 반성할 것도 없고 십자가 앞에서 뭘 해도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용서받으면서 감사하게 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성령의 온유와 화평과 자비의 열매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변명, 변명 또 변명, 핑계 또 핑계 24시간 스케줄이 변명과 핑계와 자기 잘남을 움켜쥐는 그런 삶이라는 사실을 육신이 살아가면서 늘 느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셨기에 저희들 십자가 앞에 세웠사오니 십자가의 용서가 유효하게 주님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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