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야고보서)1
(3)01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야고보서)1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 야고보서(1) ]
십자가마을 수련회 / 2001,8,13-16 경남 양산
강의(이근호) / 정리(구득영)
◈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어 !!
이 야고보서 전체를 읽어보면, "뭔가 이 세상은 사라져야 한다" 라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보면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라고 하는데 말이다. 만약 이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부한 자들이 통곡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공한 자들이니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면, 오히려 자기가 모은 그 재산이 자기를 멸망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마음을, 죽을 때까지 끌어 모으는 것만을 유지했던 사람이, 비록 이 세상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마음을 버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교회자체도 같이 사라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교회의 형식이나 제도 등도 말이다.
(약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약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 흩어져 있는 !!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12지파의 경우에, 그들을 형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 개념 속에 집합적으로 모이고 단체를 형성하는 의도가 들어있는가? 그것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흩어져 있는' 라고 함으로서, 각처 각처에서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그것은 야고보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인데, 고린도전후서나 디모데전후서도 말이다. 교회 조직이나 형식에 대해서 말이다. 디모데전후서를 봐도, '장로 된 자에게' 라고 하지, "장로를 세워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런 이런 자가 아니면 세울 수가 없다" 라는 것인데, 어차피 봉사의 직분이니 말이다.
교회제도나 형식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이 그 시대의 전부인데, 일곱 집사를 세운 것이 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영구직도 아니고, 즉 항존직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는 항존직이라는 말을 신학교에 와서 처음 들었는데,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항존직이냐는 것이다. 어디 공무원이 항존직인가? 철밥통이지 말이다.
◈ '항존직' 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항존직이라는 것이 자체가 이미 눈에 보이는 것에 영원한 것을 담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습성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느 인간이 항존직에 해당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성을 부과함으로서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교회가 영원하다는 것을, 그렇게 교회의 직분에 영원한 방을 하나 보여줌으로서, 즉 "당신은 이제 눈에 보이는 영원한 것을 잡았으니, 걱정 마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정치적 의도가 심하게 깔려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그렇게 형식의 영원함 속에 진리의 영원함이 묻혀있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런데 목사직의 성격을 가지고 자기 조직의 영원성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성경을 언급할 자격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가 신학교에 가서 특강을 하면서 신학생을 만날 때마다 느낌이 무엇인고 하니, "저분들이 무엇을 추구하는가?" 라는 것인데, 과연 진리가 무엇이며 복음이 무엇인지, 그것을 추구하느냐는 말이다. 그게 아니면 자기의 직장을 항존직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의 기술과 기능을 익히기 위해서 신학교에 다니느냐는 것이다. 마치 기술학원에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 언어의 직공이 되어라 ??
그런데 교수까지도 "언어의 직공이 되어라" 라고 하는데, 직공이 무슨 말인가? 언어의 직공이 되어서 어디에 사용하려고 말이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이 되어라" 라고 하는데, 신학교에는 "직공이 되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니가 예수님을 아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전부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말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다음과 같은 광고가 있는데, 즉 엄마가 무슨 말을 하니까 딸이 엄마를 보고서 한다는 말이 "엄마, 뭘 더 바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면 된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왜 목사라는 항존직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예수님이면 된 것이지 말이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공부하면서 그 취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배워서 목회에 성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부서져도 괜찮다는 것을, 그것을 알아야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사라져도 괜찮다는 것을 말이다. 의식과 형식이 없어져도 말이다.
◈ 오죽하면 '그리스도의 몸'이겠는가?
그래서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더러워졌는데, 그래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자꾸만 형식 속에 자기를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형식으로 자기를 위장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그것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해체를 시킨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리스도의 몸이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하면 하나가 다수가 되고 다수가 하나가 되느냐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것이다. 즉 "너희의 몸을 한번 봐라. 그래도 믿지 못하겠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몸을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손을 보면, 우리 손가락은 다섯 개이지만 뭉치면 하나라는 말이다. 몸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우리 몸에 지체가 아무리 여러 개가 있어도, 그것은 전부가 한 뿌리에서 나왔으니 한 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각자의 몸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교회를 어떤 형식과 제도로서 하면 올바른 교회가 되겠는가?" 라고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한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어떤 다양한 형식과 제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말이다.
◈ 단합대회를 하라 ??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힘써 지켜라" 라고 했는데, 그것은 모여서 단합대회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런 것을 하든 하지 않든 하나가 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이 세상의 각양 각색의 변화에 대해서 놀라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교회에 나오다가 다른 교회에 가더라도, 그런 것으로 인해서 놀라거나 화내지 말라는 것이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제대로 된 실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영원한 것인데, 그런데 그 영원한 것을 두고 또 다른 영원한 것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정말 영원한 것이 우리 속에 있다고 하면, 굳이 그것이 말고 다른 것을 걸치면서 영원하다고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영원한 것을 만들어서 걸치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신앙인의 모습이냐는 것이다.
◈ 아저씨, 이젠 안 됩니다 !!
그러니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는, 자기 주위에 늘려있는 좋아 보이는 것들은 모두 다 끌어 모으는데, 그래서 영원히 자기 안에 올가미를 걸어서 가두어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자식을 낳으면 영원히 자기 자식인 줄 알고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어떠한가? 결코 그렇지 않은데,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젊었을 때는 다운타운에 가서 맥주를 마시면서 같이 어울리면서 놀았지만, 주말만 되면 그야말로 자기 세상이라는 것이다. 마치 자기 땅처럼 그곳을 점령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곳에 가서 같이 어울리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입구에서부터 웨이터에게 "아저씨, 여기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만 가세요" 라고 하면서 쫓아낸다는 것이다. 이제는 후배들이 그곳의 주인이 되어서 점령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은 떠날 줄을 알아야 하는데, 그 때를 말이다. 즉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를 하다가, 때가 되면 '졸업'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도 그 낭만이 그리워서 캠퍼스를 머뭇거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때가 되면 조용히 떠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후배에게 물려주고 말이다. 그것은 목회도 마찬가지인데,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떠날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마치 흘러가는 강물처럼 !!
모든 것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 흘러가는 물이 모여서 강을 이룬다는 것이다. 교회는 목사 자신의 것이 아닌데, 또한 그들의 것이 아니라, 떠나가는 군중들의 모임이 곧 교회라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가 땅을 바쳐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냐고 한다면, 영원한 것을, 즉 영생을 얻었으면 되었지 또 무엇을 바라느냐는 것이다. 세상에 시달리면서, 목사를 하면서, 그러면서 무엇을 얻었는고 하니, 자기가 추구하는 교회가 영원한 것이 아님을 말이다.
바로 그러한 것을 알라고, 하나님께서는 되도 않은 인간들과 충돌하게 만들고, 쓸데없는 것과 싸우게 만들고, 그래서 돌아서면 "내가 왜 그렇게 싸웠을까? 왜 호기를 부렸을까? 아무 것도 아닌데 말이야" 라고 하면서, 바로 그런 것들을 익히고 배우면서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신다는 것이다.
◈ 너희가 과연 신앙인가?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인데, 이 야고보서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다 끄집어내어서, 그것과 진리를 비교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성경도 그러하지만 말이다. 다른 성경은 성도라면 가져야 될 진리를 구체화시키는 반면에, 이 야고보서는 이미 진리가 구체화된 가운데서, 다른 것들이 여기 저기서 튀어나올 때 과연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한지, 즉 "너희가 과연 신앙인가? 이런 모습이 있어야 신앙인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행함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야, 행해라!" 라고 했는가? 아들을 바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에 맞추어서 "예,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이삭을 바친 것과 율법을 대신했느냐는 것이다. 야고보서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점인데, 기생 라합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천 번을 하고 나서 구원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마귀도 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마귀도 아는데, 물론 마귀가 아는 믿음은 지식이지만 말이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었는데, 기생 라합을 거짓말까지 하면서 자기 나라를 팔아먹으면서 보여주었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 믿음은,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거기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행함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행함이, 물론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바치라는 것도 아니고, 기생 라합처럼 거짓말을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교회에 부자가 왔을 때는 환영하고, 가난한 사람이 왔을 때는 배척할 때, 그런 행함도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이 보여준 것이냐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따지는 것이 야고보서라는 것이다.
◈ 하나님, 제가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
결정적인 것은 야고보서 마지막인 5장에 보면, 어떤 노동자가 일을 열심히 했는데 주인이 그만 월급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은 그것을 가지고 사치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노동자가 만약에 신앙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하시겠는가? "내가 오늘밤에 주인의 영혼을 데리고 가고, 돈은 너에게 나누어줄게" 라고 하시겠는가? 과연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약 5: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약 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그런데 사람이 시험에 들었다가 빠져 나올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순수하게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자기만의 방법을 꼬불쳐 놓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제발 이렇게 좀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재정이 위기라고 하면, 물론 개척교회는 항상 위기인데 말이다. 그래서 불가능성에 도전하게 되는데, 물론 부교역자 시절에는 그런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월급만 꼬박꼬박 받아서 챙기면 되니 말이다. 그러니 당회장이 보면 참으로 철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튼 위기가 닥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안이 있는데, 재벌2세가 이사를 오면 제일 좋고 말이다. 꿈속에서 주께서 나타나서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는데, "앞으로 잘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그동안 허랑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를 돕고 싶습니다. 여기 현금 3억과, 앞으로 십일조를 매달 천 만원씩 하겠습니다. 별 것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너무 좋아서 "아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도 그만 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재벌 2세가 오기는 왔는데, 그만 왕창 다 망하고 왔다는 것이다. 빚만 가득 짊어지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없는 살림인데, 완전히 거들 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야말로 복을 받은 목사인데, 왜냐하면 돈은 아니지만 영생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 수련회도 거의 마무를 해가면서, 지금 제가 여러분의 희망을 너무 꺾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돈이 있을 때는 교회에 나오지 않다가 구조조정을 당하고 나서야 나오고 하니, 그야말로 교회재정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배부른 자가 왜 교회에 나오는고 하니, 그것은 건성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 목회는 과연 누구의 일인가?
우리가 이러한 것에 시험에 드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잊어버려서 그러한데, 남이 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상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낙담하고, 왜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다. 목회가 누구의 일인가? 그게 목사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일을 누가 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시는데, 그분이 담당자이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예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왜 우리가 간섭하느냐는 말이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흔히 빌립보서 2장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분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된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우리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우리 속에 행하시는 분의 소원을 담아서, 우리로 하여금 그 소원을 이루도록 일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소원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그분이 이루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요한일서에 보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지만 그 앞에 뭐라고 되어있는가?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사랑인데, 먹든지 마시든지 사랑으로 하라는 것이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아직도 여러분이 이 '사랑하라' 라는 것에 대해서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사랑은 윤리와 도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일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랑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그리고 자기 영혼에 흠집이 없는 골라서 하는 행동은 전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이냐는 말이다. 그리고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다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보고 "당신을 사랑해" 라고 하면서, 언제나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품위에 대해서 손상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고 말이다. 그런 것을 먼저 챙기면서 이야기를 하니, 그게 무슨 사랑이냐는 것이다.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아, 내가 또 교만했어 !!
그리고 이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하라"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그렇게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라고 하면, "그러면 무례히 행하면 지옥에 갑니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도, 항상 그런 것이 우리 마음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야, 나는 지금까지 사랑을 제대로 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여기 성경말씀을 보니 내가 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구나. 내가 또 교만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웃에게 쌀을 나누어주면서 참으로 선한 일을 한다고 여겼는데,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해주고 반대급부로서 내가 선하다는 것을 챙기는, 그런 것은 전혀 사랑이 아니구나. 오히려 교만이었어" 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좀 깨달으라는 말이다.
◈ 성령께서 떠밀었습니다 !!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가 지하철을 타려고 서있는데 그만 아이가 철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뛰어내려가서 그 아이를 무사히 구했는데,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신문기자가 거기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사진을 한잔 찍자고 하면서 인터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실례합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목숨을 내놓고 그렇게 아이를 구하셨습니까?" 라고 하면, 그 목사는 뭐라고 해야하겠는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떠밀었습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기자가 "혹시 목사님이세요?" 라고 하면, 그만 도망을 가면 되고 말이다(ㅋㅋ).
성령께서 그 목사만 떠민 것이 아니라 아이도 떠밀었는데, 그리고 기관사도 떠밀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필이면 그때 아이가 떨어지고 또 기차가 들어오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가 봉사를 하는 것도 예수님이 주신 힘으로 하는 것인데, 그래야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된다는 것이다.
◈ 야고보서를 지켜서 구원을 받는 사람은 없어 !!
이것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야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반대급부를 계산하고 하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수준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고보서를 지켜서 구원을 받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러한 것들에게 대해서, 즉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애착과 믿음이 오히려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를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영원성을 구체화하려는 시도에는 무엇도 포함이 되는고 하니, 아름다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 만들기도 여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후배들을 위한 것이니, 우리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항상 물러나고 인계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 학생들과 함께 하는 교사의 경우에 !!
젊은 아이들과 같이 지내는 자들의 위험성이 무엇인고 하니, 주로 교사들이 그러한데 말이다. 자기가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려고 하면 그들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학생들의 문화도 모르면서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자기의 세계를 포기하고 그들의 세계에 들어갈 때, 그들은 교사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너는 학생이니 나에게 배워라" 라고 한다면, 그들이 괴리감을 느끼게 되어서 아무리 잘 가르쳐도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데, 동료의식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사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물론 나빠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도 학생시절에 가졌던 그 낭만과 수수함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순수함이 남는다는 그 자체는 나쁘다는 말이다. 다른 것으로 순수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 그것으로 여전히 순수하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방학 때마다 연수를 받는데, 연수를 받게 되면 그 순간에는 자기가 교육을 받기 때문에, 그 순간만은 어린 학생들의 순수함을 잊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들만의 세계, 아니면 더 높은 세계로 환원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연수를 받고 다시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만, 자기 직장에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생활이 결코 쉬운 게 아닌데, 그리고 매일같이 같은 것을 하니까 지겹다는 것이다.
◈ 과연 영원한 신의 직장이 있는가?
의사도 경우에도 보면, 매일같이 보는 환자가 그 환자인데, 그래서 의사는 인터넷으로 새로운 것을 찾아서 공부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의사의 본업인데, TV에 나와서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니 말고 말이다. 자기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그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연애에 바쁘고, 하고 나서는 바람을 피는데 바쁘고 말이다. 그게 아니면 골프에 바쁘고 말이다.
물론 골프는 굳이 연구할 필요도 없고, 그냥 즐기면 되는데, 하지만 전문직은 새로운 정보를 계속해서 공부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면허증이 있어도 돌팔이라는 말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받아도 새로운 책을 구입해서 논문을 쓰고 연구하는데 다시 투자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결코 전문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판사의 경우에는 하루 업무시간에 16시간이 넘는다고 하는, 그 판결문도 읽어보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페이지가 넘는 판결문을 읽는 것도 힘이 드는데, 그것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보통 고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검사도 그렇고, 물론 폼은 좀 잡지만 완전히 깡패와 같은 생활이라는 말이다.
치과의사의 경우에는, 목 디스크가 많다고 하는데, 하루종일 머리를 숙이고서 환자의 입 속을 들여다봐서 말이다. 물론 와이프는 신이 나는데, 신랑이 벌어다주는 것을 가지고 쇼핑이나 돌아다니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버는 것만 보지 말고, 그런 전문직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치과가 너무 비싸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로 정신과 의사는 거기에 비해서 조금은 더 편하다고 하는데, 환자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설령 환자가 "나는 대통령이야" 라고 해도, 그것을 듣고 나서 "예, 맞습니다" 라고 하고는, 간호사를 불러서 그냥 약만 처방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듣는 것도 고역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냄새가 나는 입 속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편하다는 말이다.
한 때는 안과의사가 최고로 인기가 좋았다고 하는데, 물론 지금도 성적이 제일 좋아야만 안과의사가 된다고 하는데 말이다. 라식수술과 같이 의료보험이 안 되는 것들이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것은 치과의사나 한의사도 거의 같다는 것이다.
◈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어 !!
그러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 것을 잡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원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 것은 고이 보내드리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떠나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떠나도 괜찮을 만큼 영원한 영생을, 그 귀한 것을 간직하게 되는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야고보서의 전체를 설명하고 있는데, 다시 정리하면, 먼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교회의 형식이나 제도도 말이다. 그래서 그 어떤 영원한 것을 붙잡아야 하는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가지고 교회부흥에 써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를 가지고 이 땅에서 어떤 성공한 인간이 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보내라' 라는 것이다.
◈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0절에 보면,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꽃은 풀과 같이 사라지는데, 그래서 "나는 풀은 좋지 않아도 꽃은 좋아"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약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그런 풀의 꽃과 같이, 그렇게 허무한 것에서 올라오는 것이라고 하면, 여기서 인생을 풀의 꽃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런 인생의 영광은 그야말로 순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육체가 사라질 때, "이것은 놓치지 싫어" 라고 해도, 그것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라지는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면 무엇을 추구하면 되는가? 흔들리지 않는 것, 변함이 없는 것, 움직임이 없는 것인데, 그래서 17절에 보면,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래서 야고보서가 상당히 어려운데, 여기 6절에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여기에 바다가 있고 또 육지가 있다고 하면, 바다에는 파도가 치고 말이다.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그러면 이렇게 물결이 일면 여기가 어떻게 되는가? 모래가 쌓이게 되는데, 그러면 이 모래는 어디서 왔는가? 파도가 치는 바다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움직임에 의해서 밀려온 것을 가지고 우리가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러한 것은 우리 마음속의 욕심에서 나오는 하나의 환상이나 낭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란 말이다.
◈ 동양철학의 경우에는, 음과 양으로 !!
그런데 동양철학은 이 부질없는 것을 가지고 대치되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즉 음과 양으로 말이다.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은 그 기초가 무엇인고 하니, 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즉 어느 것이 더 선하고, 어느 것이 더 나쁘냐는 말이다. 그 어떤 개념이라도 항상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철학은, 동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구성원들이 동일한 선악체제를 가지고 있을 때, 질서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법이 있어서 그것을 자발적으로 지킨다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즉 "이것은 선하고, 이것은 악하다" 라는 개념과 가장 일치가 되는 쪽으로 법이 만들어지면, 그 법은 가장 이상적인 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인데, 즉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을 윤리라고 본다는 말이다. 반면에 도덕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인데, 그것이 윤리와 도덕의 차이점이라는 말이다. 윤리는 항상 변할 수 있는데, 상황에 따라서 말이다. 하지만 도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윤리와 도덕은 달라 !!
'조셉 플레츠' 라는 사람이 상황윤리를 주장하니, 무식한 보수주의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상황윤리를 엉터리라고 하는데, 하지만 윤리와 도덕을 구별하지 못해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윤리는 변할 수 있는데, 왜 그런가? 진정한 도덕을 위해서, 진정한 선을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런 도덕도 인간에게서 나왔지만 말이다.
그래서 동양철학에서는 이런 물질에 의미를 두는데, 즉 순간 순간 밀려오는 것도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것을 예측해서 음양으로 8괘를 만들어서,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들을, 즉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그렇게 음과 양의 관계를 통해서 변화자체를 인정함으로서,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변화하는 것, 그 자체가 진리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통치되는 이 세상은 처음부터 진리였고, 또한 끝까지 진리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라는 것이다.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서 골로새서 1장을 보겠는데, 누가 15절과 16절을 읽어보세요.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음양은 없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 !!
분명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는데, 우리가 강의를 하든, 장사를 하든, 직장을 다니든 간에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세상은 누구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말인가? 그분이 도대체 누구인가? 먼저 나신 자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바로 그분을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창조된 것이란 말이다. 이것은 결코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변화되지 않는 것만 증거하면 되는데, 무엇이 어렵고 힘이 드느냐는 말이다. 변하는 교회를 증거하지 말고 말이다. 사도바울도 이것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음양을 논하고 있는데, "이근호 목사는 신학이 너무 극단적이다.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데 말이야"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균형이 무엇인가? 음과 양이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양쪽의 여지가 전혀 없는, 변화의 여지가 없는 단 하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세계는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는데, 그런 예수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당연히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무엇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가 한 파트로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고 나서 생활이 더 나아졌는지, 아들을 낳았는지, 그런 것을 물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비판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고 해야하는데, "이근호 목사는 너무 극단적이고 궤변이다" 라고 하지 말고 말이다. 이게 무슨 궤변인가?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믿음만 있는 게 아니라 행함도 있어야지" 라고 하는데, 지금 상대방을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공격을 해도 하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증거하는 자기 믿음을 믿어라" 라고 했는가? 그런 자기 믿음이라고 하면 자기 행함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물론 이 세상에 이단도 있고 삼단도 있고 오단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그것을 보면 이해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
누가 요한복음 17장 절을 읽어보세요.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에 먼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라고 한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주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만 발휘된다는 것이다.
강원도의 어느 할머니가 밥을 짓는데 피어오르는 그 연기는 무엇인가? 물리학에서는 그것이 중력의 법칙을 적용된다고 하겠지만, 하지만 성경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공중에 나는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 아들이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뿐 !!
요한복음 3장 35절과 36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진노가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의사나 판사와 결혼하면, 물론 그것이 영원하면 참 좋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사와 결혼해도 되는데, 왜냐하면 신자와 결혼하겠다는 것은 상대방을 배려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더라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가겠다는, 그런 자기 편리를 위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 종교생활을 보다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불신자와 결혼을 할 수 있는데, 누구와 결혼을 하던 간에 영생이 아니라면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있음을 알라는 말이다. 그러니 중립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것을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예수님에게 모두 다 있는 것인데, 혹시 이것을 신비주의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런 신비주의는 괜찮다는 말이다. 누가 쥐고 있는지를 모르겠다고 하는 신비주의가 골치 아프지 말이다.
◈ 바알 종교의 경우에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동양철학에서는 모든 변화를 현실로 보는데, 현실 속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니라, 변화자체가 현실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죽었다가 태어나고, 태어났다가 또 죽는 것이 바알 종교인데, 지금 제가 우상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준비를 하는데 말이다. 우상의 실체는 무엇인고 하니, 변화하는 것 자체를 수용한다는 것이다.
바알종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바알종교는 부활의 종교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가을에는 추수를 하게 되고, 그리고 겨울이 되면 모두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봄이 되면 왜 다시 싹이 올라오느냐는 것이다. 죽었다고 여겼는데 말이다. 그것은 생명에 원천이 있다는 것인데, 그게 곧 땅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우리 인간도 땅으로 가게 되는데, 즉 생명의 원천으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밀도 다시 태어나고 보리도 다시 태어나고, 모든 것이 다 다시 태어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계절이라는 것이 모든 만물에게 생명력을 주는데, 그러면 그 생명력은 곧 사랑이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의 통치자에게 그런 생명력을 부여하게 되면, 그 통치지가 하나님의 지혜를 부여받아서, 우리나라는, 우리국가는 부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국가를 보면 "신이시여, 우리 여왕을 도우소서!" 라고 하는데, 즉 "여왕이여, 영원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조찬기도회도 역시 그러한데, 지도자가 예수를 믿어서 복음을 전하는데 지장이 없게 해달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무엇인가? 지도자가 잘 되고 국가가 잘 되게 해달라는 말이다.
◈ 하지만, 국가는 곧 우상 !!
하지만 이 국가는 다니엘서에 보면 무엇인가? 그게 곧 우상이라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이 나오는데, 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해서 나중에 바다와 땅이 모두 다 누구의 통치를 받는가? 짐승의 통치를 받는데, 그것이 바로 현 세상이란 것이다. 즉 악의 권세자 속에 포함된다는 말이다.
중요하기에 조금만 더 하겠는데, 그러니 우상이란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 실체가 드러났지만,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왜 쫓겨났는가? 그들이 우상을 섬겨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의 우상숭배가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나중에 바벨론이란 국가형태에 가보니까, 국가라는 실체를, 그것을 사람들이 우상시하더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국가를 우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국가를 하나님의 종으로서, 악을 제거하는 역할을 해야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다니엘서 4장을 봐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 뭐라고 하는가? "왕이시여, 하나님이 왕에게 이런 영광을 준 것은 선을 행하라고 준 것인데, 왜 왕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왕을 짐승이 되게 하셔서, 왕은 짐승처럼 풀을 먹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왕이 그 말을 듣고 나서 회개를 했는가? 그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자기를 위해서 금신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금신상을 말이다. 우리는 그것이 그 당시 느부갓네살 왕인 개인을 의미하는 금신상인 줄로 알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추상적인 국가가 곧 금신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이 신상이 의미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2장에서 다니엘을 왕의 꿈을 해석하면서 하는 이야기인데, 즉 신상의 머리는 금이고 그 밑에는 은과 놋과 철과 진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국가는 다 바벨론과 한 통속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시간이 흘러도, 그래서 다른 국가들이 계속해서 나와도, 그것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바벨론의 연장선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니엘이 이야기하기를, 하늘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신상을 치는데, 그래서 그것을 무너뜨리고 그 돌멩이가 태산을 이루면, 그것이 바로 성도들이 갈 수 있는 하늘나라인데, 그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않는데,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바로 인자라는 말이다. 즉 인자의 나라라는 것이다.
(단 2: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단 2: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단 2:33)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 2: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단 2: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그래서 중세신학에서는 다니엘서를 금기시했는데, 왜냐하면 지금 자기들의 신학에 의하면 이 중세의 카톨릭 나라가 곧 천년왕국이고 하나님 나라인데, 그런데 다니엘서에 의하면 바벨론이고 우상이라는 것이다. 또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짐승의 나라이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깨어지고 국가가 그만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가혹한 이단종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이제 정리하면 !!
이제 첫 번째 강의를 정리하겠는데, 모든 우상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변화의 원천은 모르기에 이쪽과 저쪽의 균형 맞추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최선이고, 또한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이다. 즉 너무 지나치지도 말고, 모자라지도 말고 말이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뭐라고 하는가? 들에 핀 꽃과 같이, 즉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모르느냐는 것이다. 강의 중에도 했지만, 1장 17절에 보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온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땅에는 없다는 말인데, 한번이 아니라 항상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위의 것을 가졌어" 라고 하면 또 사라지고 마는데, 그러니 항상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10분만 쉬겠습니다.
2014,5,8 정리함.
==============================================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
영국 국가
신이여 자비로운 우리 여왕을 구하소서//
존귀한 여왕으로 오래 살게 하소서/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그녀에게 승리와/
행복과 영광을 주시고/
오랫동안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오 주 우리 하느님이여 일어나사/
여왕의 적들을 흩으시고/
그들을 패망하게 하소서/
그들의 책략을 깨뜨리시고/
악랄한 흉계를 헛되게 하소서/
우리의 소망을 당신께 두나이다/
하느님이여 우리 모두를 구하소서//
당신이 비축해둔 좋은 선물을/
기쁘게 부어주소서/
그녀가 오랫동안 다스리게 하소서/
법을 잘 수호해주시고/
늘 우리에게/
마음과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도록 하시며/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