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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교회구성 140509강의디모데전서

교회구성 140509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김창길(IP:180.♡.197.209)

14-06-07 21:37

서울 의존교회140509a (교회구성)―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3장 1절을 보면‘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지난 시간에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대목을 제가 설명하면서 그때는 성경 말씀과 그리고 여자 라는게 실제로 있잖아요. 남자있고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와 남자는 내가 되고 싶다고 골라잡을 입장이 안 되죠. 아들로 태어났으면 남자이고 딸로 태어났으면 여자가 되는 거잖아요. 이미 태어난 것, 장기 알 같은 이미 태어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고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이미 남자, 여자가 확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거기 하나님의 말씀이 추가적으로 입혀지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라 하는 것은 창세기 사건과 연관이 있구나, 남자라고 하는 것이 창세기 3장과 관련이 있구나, 그래서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내가 여기 산다는 것,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금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여기 있고 내가 말씀 지킬 거야 하는 말이 성립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제 취지를 이해하셔야 되는데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죽어서 좋은 가려면, 천국가려면 말씀을 한번 지켜볼까 하는 이런 입장이 인간은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 하면 내가 남자인데 내가 여자로 다시 태어나면 어떨까? 라고 마음은 먹을 수 있어도 우리가 여자로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내 마음대로 결정되는 문제에요? 아니잖아요. 내 마음대로 결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그러면 내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렇게 한 거야? 할 때 성경은 하나님, 내가 했어 라고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요청할 필요가 없지요. 제 취지를 이해 못 하시는 것 같은데 하나의 예를 들면 집이 외로워서 강아지 두 마리 키우겠다면 시장에서 강아지 두 마리 사면되잖아요. 그러면 우리 둘이 살다가 새로 강아지 두 마리 오게 되면 식구가 네 식구 되는 것 맞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거든요. 강아지 두 마리하고 남편하고 이렇게 사는데 임신이 되어 버렸어요. 임신이 되어 버리면 그 뒤에 애 하나 생겼잖아요. 그러면 그 집에는 강아지 두 마리하고 부모하고 애 까지 다섯 명 됐잖아요.

그러면 태어난 애가 하는 말이 ‘엄마, 저 내가 사지도 않은 강아지가 왜 저기 두 마리 있지?’라고 물으면 엄마가 뭐라 합니까? 너 태어나기 전부터 이 강아지 있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에요. 내가 인간이 될까, 말까? 내가 남자가 될까, 말까? 여자로 태어나면 어떨까?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생각할 수는 있는데 그런 결정 이전에 누가 계시다는 말입니까? 결정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계시잖아요. 새삼스럽게 내가 하나님을 믿을까 말까? 하는 자체가 성립이 됩니까? 안됩니까?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이집에 아기로 태어났으니까 이제부터 강아지를 키워볼까 말까? 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미 태어나기 전에 강아지 두 마리 놀고 있는데 온 천지를 다 난장판으로 다 만들고 있는데 자기 까지 태어나서 같이 난장판 되고 있다 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나는 하나님 믿어야지 하는 말 자체가 하나님 믿겠다, 섬기겠다, 하는 것이 내가 선택 이전의 문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우리 집에 어르신네가 있는데 어르신네가 아무리 봐도 우리 아버지 같으니까 이제부터 아버지라고 불러줘 라고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라고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늙은 아줌마 있는데 엄마라고 불러줘? 이렇게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말이죠. 그 분들이 내가 있기 전에 먼저 있었잖아요.

그래서 교회가고 하나님 믿고 하는 것을 자랑질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랑할 문제가 아니고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도대체 내가 여기 왜 있지 라고 따지고 들자면 필히 등장해야 될 인물이 누구입니까? 나를 있게 만든 하나님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있다 없다는 문제를 떠나서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고 도대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제대로 된 하나님일까? 그런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이죠.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이 문제이지 하나님 한번 믿어봐? 그러면 안 믿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안 믿으면 자기가 왜 있는지 이유를 알고 자기가 왜 죽는지 이유를 압니까? 사람이 태어난 것도 모르지만 왜 죽는지도 모르잖아요. 죽는 이유도 모르고 태어난 이유도 모르면서 그 안에 산다는 것은 그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형광등 켰다가 한 순간에 탁 나가는 수가 있잖아요. 갑자기 깜깜해 졌죠. 밤에 형광등 나갈 때 어떻습니까? 밤은 원래 어두웠어요. 형광등 켜 놓고 밤이 안 어둡다고 우기시면 곤란합니다. 형광등이 밤이 어두운 것처럼 우리가 60평생 70평생 80평생 살다가 형광등 꺼지듯이 한꺼번에 딱 나가버리게 되면 원래 이 세상은 죽이도록 되어 있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은 죽는 사람들만이 잠시 등장 했던 연극 무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극이 끝난 후에 각설이 혼자 남아 있을 때 모든 것 사라지는 겁니다.

연극이 끝난 후에 모든 것이 사라질 때 그러면 사라지면 우리는 같이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 관객만 남아서 옛날에 저 사람이 그렇게 살아 있었지 그것만 있을 뿐인데 마치 내가 당연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어떤 억지이냐 하면 밤은 훤해야 된다는 억지 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 세상은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 게 있잖아요. 이거 우리가 정한 거예요? 전도서에 보세요. 태어날 때가 있으면 무슨 때가 있다? 죽을 때가 있다. 우리가 이것을 의논해서 우리가 만들어 낸 세상이 아닙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우리가 만들어 낸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세상이 아니라면 이 세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거예요? 몰라도 돼! 라는 말은 죽을 때도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없어요.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기에 내가 왜 죽느냐? 그 문제가 왔을 때 이것은 평소에 살아 있을 때 여러 번 자기한테 했어야 될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세상이 왜 있습니까? 이것을 모르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도 죽은 거 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가 죽었다고 치고 관속에 들어가서 흙으로 묻고 있어 보세요. 세상에 배가 뒤집어지던 빠지던 자기 하고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관계없잖아요. 왜냐 하면 자기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한테 뒤에 욕설을 해도 ‘이씨 누가 욕설을 해?’ 하고 나간다는 자체가 이미 아직 덜 죽었네?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죽었다 쳐 보세요. 욕을 하던 내 자산을 다 가져가던 도둑질 하던 세상이 뒤집어지던 화산이 터지던 이미 죽은 자한테는 그게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 쪽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미 내가 죽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미 죽은 자로 있을 때 나의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진도 배가 빠진 게 나의 관심사입니까? 북한의 핵문제가 나의 관심사가 되겠어요? 나의 관심사는 하나뿐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죽어야 될 우리를 왜 만들었습니까? 주님이여! 세상은 이렇게 이런 식으로 만들어 주셨습니까? 저를 만드신 분은 왜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고 왜 저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우리가 죽었다고 치고 질문은 바로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인간을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는 그 질문이라 말이죠.

일단 죽었다 치고 그 질문을 하면서 성경을 보게 되면 비로소 성경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성경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제가 강의를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방금 이야기한 것을 요약을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어서 내가 새삼스럽게 성경 지키고 하나님 믿고 주제를 떨고 뭔가 하는 모습을 보여도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는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그렇게 성경은 내가 여기 있고 나 유리하고 이익대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내가 죽었다고 쳤을 때 왜 나는 죽어야 되는 인간이 왜 여기 존재가 하고 있느냐? 그렇게 되면 내 위주가 아니고 누구위주입니까? 나를 여기 있게 하신 그분 입장이고 그분 안목이고 그분 생각에서 성경을,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하니까 내 입장에서 어떻게 궁지렁 궁지렁 하는데 내가 우선이 아니고 먼저 계신분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분 입장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왜 있는가? 그것은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여러분, 축구장에 공 하나가 있어요. 그 놓인 이유가 뭡니까? 뭘 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까? 축구 게임을 하기 위해서 있는 거죠. 그러면 축구 선수가 축구공 가지고 글러브 가지고 던지고 주고받고 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아, 이거 재미있네 하고 던지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게 되면 그것은 축구가 아니라 야구가 되겠지요? 하나님은 말씀 게임이 있어요.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 자체적으로 목적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주 되심이거든요. 그런데 주 되심을 위해서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그 말씀 가지고 다른 게임을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잖아요. 성경 말씀은 우리 위주가 아니고 우리 보다 먼저 계신 분, 우리를 창조하신 분, 말씀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주 됨을 위해서 말씀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한테 이익되고 나의 육망을 이루기 위해서 죽고 난뒤에 좋은데 가려고 이 말씀 한번 지켜볼까? 이렇게 하면 주님과 같은 게임이 아니고 다른 게임이 된다 이 말입니다.

주님은 축구를 원하는데 우리는 게임을 모르니까 말씀가지고 야구를 하고 있는 샘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야구하면 됐지 뭐 있냐? 야구 하세요. 야구하면 좋은데 문제는 축구하는 그 나라에 못 간다는 거예요. 축구하는 나라는 무슨 나라입니까? 천국이거든요. 실컷 말씀가지고 장난질하고 하세요. 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고 게임, 그게 원칙 언약인데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체가 천국이거든요. 약속을 알아서 천국 가는데 이 땅에서는 약속이 아니고 자기 욕망과 야심을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 버린다면 이것은 주님 우선이 아니고 누구 우선입니까? 나 재미있는 대로 살았다! 왜? 내 인생 나 재미나게 살 거야!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내 인생 내건데 내 몸 내건데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데 니가 왜?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 당신은 누가 만드셨죠? 그건 몰라! 그건 모르지!

그것을 모른다는 말은 그러면 당신이 지금 그런 식으로 산다는 것은 나중에 심판 날에 옳을지 그를지 본인도 모르겠다 말이에요. 모르지요. 그러면 당신이 왜 태어 난지도 모르고 왜 죽는지도 모르고 결국은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은 매일 매일이 ‘아이 몰라!’ ‘아이, 몰라’를 계속 연속해서 이어져 가는 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집의 가훈은 몰라! 알 수가 없어! 이거예요.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천국의 계획과 법칙을 성경에 담아서 미리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천국의 법칙과 성경 내용은 오늘날 kbs 9시 뉴스나 mbc 뉴스에서 이 성경이야기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안 나온다는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은 다른 게임을 원하고 다른 소식을 듣고자 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출애굽, 바로 다른 게임을 하는 그 현실에서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약속을 원하는 그 현실로 탈출하는 것이 출애굽이잖아요. 애굽에서 나오는 것, 그게 구원입니다.

세상이 너무나 대조되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가지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너희가 정말 발견해야 될 표적이 있다면 그것은 요나의 표적이다. 죽어야 산다.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 들어가야 산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들었잖아요. 그리고 나 있는 곳에 와야만 너희가 생명이 있고 너 있는 곳에는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나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왜냐 하면 내가 곧 생명이니,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예수님,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지금은 올수 없다’ 이 말은 지금은 너희들이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끝났네! 끝났죠.

하지만 너희들이 처소를 마련하면 내가 다시 오겠다, 그 다시 온다는 게 뭐냐 하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그때에 성령이 오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갈 수 없는 그곳이 오히려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내가 가고자 해도 갈 수 없는 그 나라를 목숨 바친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요구한다고 탐색한다고 발견될 나라도 아니고 발견도 안 돼! 갈 수도 없어! 죽어도 안돼! 그런데 돼! 왜? 성령이 오심으로서 우리는 거기에 휩싸이게 될 때에 그리고 우리는 아무 것도 하는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천국 게임에 축복 게임에 이미 다루어 졌다는 것, 그것은 내가 하는 게임이 아니고 내가 하면 야구만 할 텐데 진짜 하나님의 천국 게임은 주님이 알아서 하는 게임에 우리가 말려 들어서 주님과 더불어서 그동안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가 그랬던 거예요. 강도로 살면서 인간 말종으로 살았지만 주님 만나고 난 뒤에 강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무시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짐승만도 못하다고 자기를 자책하고 실망할지는 모르지만 성령이 오니까 우리는 내가 나 있음 자체가 나의 계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자기 인생에 대해서 비난하고 자기 인생을 미워하고 저주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날때부터 소경되어야 된다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이게 나를 위해서 벌리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나 좋으라고 벌리는 게임이 아니다 말입니다.

나 혼자만의 인생이 아니고 이것은 이미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통째로 다루고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알고 있습니다. 마치 어느 신혼부부가 신혼집을 마련해서 들어가서 사는데 한 3년간 사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해요. 나중에 보니까 그 집에 이미 누가 살고 있었어요. 자기가 집주인이 아니고 집주인이 따로 있었고 자기는 산다고 살았어요. 실제 있는 일이 아니고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나중에 보니 주님이 그 집의 주인으로 이미 접수를 했어요. 결혼도 주님이 주선해서 알아서 만나도록 했어요.

소급해서 보니까 모든 것이 주님이 자기의 말씀대로 하기 위한 자기 게임이에요. 그것이 바로 남자는 아담이어야 하고 여자는 하와이어야 된다고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진짜 자리를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와 짝을 맞춰주는 겁니다. 네가 아담이고 네가 하와라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내가 그 전에는 내가 말씀을 지키려고 했는데 말씀을 지키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말씀의 일부로 다루어 졌다는 거예요. 말씀을 지켜서 복을 받는게 아니고 이미 말씀화된 것 자체가 이미 복 속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분명히 악하고 음란한 세대지만 이미 성령을 받고 보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 대마저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였어요. 우리는 이 세대가 굉장히 원망스럽고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세대라 해서 자기의 신앙을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해서 원망 투로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는 신앙 잘한다고 해서 구원 시켜 주는 게 아니거든요. 신앙생활 잘한다고 구원받는게 아니다. 이 말이죠. 우리는 항상 나부터 먼저 되니까 그것을 몰랐는데 먼저 계셔서 떠 밀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와서 성령 받고 난 뒤에 발견하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것부터 은혜가 아니고 그 전 태어나기 전부터 은혜였고 창세전부터 은혜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한 존재였다는 거죠. 내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한 존재였다는 거죠. 내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고 약속한 대로 태어난 거예요.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지만 모태로부터 택정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태정도가 아니고 창세전부터 택정했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말씀을 봐야 되는 이유는 우리가 결부되어 있는 말씀을 자꾸 놓쳐 버리고 말씀을 따로 떼어가 어디다 잊어버리고 바로 달랑 자기만 남아있어서 이 남아있는 자기를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자처해서 표현하고 자처해서 스트레스 받는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말씀 이야기하니까 그게 처음부터 붙어있는 말씀인데 새삼스럽게 그 말씀 가지고 자기가 본드 가지고 갖다 붙이려고 하니까 이건 더욱더 힘든 겁니다.

뭘 갖다 붙여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킬 때 지켜지는 게 아닙니다. 지키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자신이 말씀 속에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새삼스럽게 성령을 통해서 발견해야 되는데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을 해석하니까 이것 지켜야지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성령을 받아버리면 이미 그 말씀대로 진척되어 있고 진행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될 뿐이에요. 발걸음을 세신다는 말은 주님하고 장난칠 문제가 아니거든요. 발걸음을 센다는 말은 ‘내가 몇 걸음 걸었게?’ 이렇게 주님하고 장난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 말은 그 말을 듣기 전부터 이미 네 모든 자국, 흔적은 주님이 알아서 이끌어왔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부터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소급해서 전부 다 주님의 손길 하에서 움직였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한 말씀을 내가 성취했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말씀의 풀장에 풍덩 빠진 게 돼요. 덩치는 요만한데 몸뚱이는 요만한데 큰 풀장에 풍덩 빠져버리니까 이것은 한 말씀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데 요한계시록과 성경 전체다 풍덩 같이 빠진 게 돼요.

말씀 지키지 마세요. 괜히 지키면 지켰다고 또 복줄 줄 알고 착각하고 있다 말이죠.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니고 이미 말씀에 빠져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는 겁니다. 모든 게 말씀대로 진척되고 있음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거예요. 세상에 일어나는 바다에 배빠지는 것도 다 말씀대로 된 겁니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된 일이 없어요. 이번에 배 빠지는 것을
통해서 진짜 신앙의 좋은 사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그 좋은 사례를 준 거예요.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 행동에 따라서 잘했다 못했다를 허락하는 세상이 아니고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이미 주어진 세계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극장에 가게 되면 두 살 세 살 된 철없는 어린 애들이 진짜 집에서 말썽꾸러기로 있다가 극장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뛰어노는 애가 있다고 칩시다. 지금 영사기에서 큰 대형 스크린에다 상영을 하잖아요. 화면을 비추잖아요. 배우들이 움직이죠. 그런데 그 애가 무대에 올라가서 헤헤 거리면 그 아이 얼굴에 뭐가 비춥니까? 주인 된 영상의 그림자가 비추겠죠? 그게 말씀이에요. 우리는 뭣도 모르고 내 혼자 까불고 하지만 내 얼굴에 뭐가 비춥니까? 이미 성경 말씀이 다 비추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개구쟁이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하지만 인생 전체가 이미 말씀의 조명발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엄마가 뭐라 합니까? 무대에서 빨리 내려와! 라고 하죠.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제가 지어냈지만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뭐 했다는 내가 무대에 올라 했던 것은 없어지고 오직 말씀만 내 얼굴에, 낯짝에 땡볕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그 얼굴의 햇살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것을 경상도 말로 내 낯짝에 땡볕이라 하는 이용복이 불렀던 노래, 그 얼굴의 햇살이란 노래인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비춰버리면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지 내가 말씀을 지배하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 부인이에요.

자기 부인이라는 것이 절에 가서 만날 자기를 치는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고 관심사가 나는 나를 관심사로 삼을 수 없는 애초부터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내가 말씀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는 질문자체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말씀에 있음을 아는 게 자기 부인입니다.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멀쩡하게 살으세요.

살지만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말씀 중심대로 간다는 것을 알 때 그게 바로 성령 안에서 자기 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이처럼 말씀은 항상 말씀위주로 진행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 전체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구약성경을 쭉 읽어보면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망해요? 안 망해요? 망하지요. 출애굽기 12장에서 애굽에서 분리되면서 이스라엘 나라가 처음 등장합니다. 처음 등장할 때 저 나라 망할 걸 하고 우리가 미리 예상합니까? 우리가 성경을 처음 봤다 지금 창세기 읽었고 출애굽 읽었다 12장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그 뒤에는 모른다고 칩시다. 성경 뒷부분을 모른다고 할 때 아, 이스라엘을 만들었구나! 내가 보니 이스라엘이 곧 망하겠네! 라는 생각이 듭니까? 안 듭니까? 안 들죠. 왜 안 드느냐 하면 그 나라를 누가 만들었어요? 사람이 만든 것 같으면 ‘아이고, 내가 나라를 만들어? 안 돼! 안돼!’ 이렇게 되는데 그 이스라엘 나라를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직접 만들었고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만든 게 아니고 어린 양의 피를 동원해서 만들었잖아요. 하나님이 만든 나라를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된다는 것, 자기가 만든 나라를 자기가 멸망시킨다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으니까 자기가 자기 뺨을 때려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니 다른 나라는 망해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예감을 갖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막상 구약 성경 끝에 가니까 어느 나라가 망합니까? 이스라엘이 망하죠.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한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망해야 될 그러한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그 사실, 하나님이 함께 했던 그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 했다고 자부한다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또는 교회의 완성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그 자들이 망했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었어! 하는 것 말고 다른 요소가 있어야 그게 영원한 교회요 영원한 천국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역시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어! 이것으로 조건이 완료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 이것으로 완료되지 않은 거예요. 우리한테는 ‘성령이 있지롱’ 이것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다른 요소가 있어요. 그 다른 요소가 뭐냐?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망해야 된다는 사실이 생명의 씨앗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저 망해야 됩니다.’하는 사실이 이미 생명의 계시에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보고 네가 남자 5명을 사 겼고 지금은 6번째 남자 사귄다고 이야기한 그것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생명의 계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 5명 사 겼고 6번째 사귀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천국갈 수 있는 요건이 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어떻게 옳게 살아도 그것이 절대로 하나님의 천국에 갈 수 있는 요건이 되지 못한다. 왜? 이스라엘은 망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우리를 대표해서 망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다 망하는 거예요. 그 망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생명의 계시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망해야 한다는 자체가 생명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신앙생활 하는 게 50년 했기 때문에 괜찮겠지 라고 하는데 안 되는 거예요. 50년을 했던 50년을 했던 관계없이 당연히 망해야 될 것이 망한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그것을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스라엘이 어느 나라한테 망했습니까? 바벨론한테 망했죠. 그러면 바벨론 그 다음 나라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합니까? 안 합니까? 역시 망하게 하지요. 그 다음 나라는? 역시 망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멸망의 마지막 멸망은 뭐냐 하면 누구한테 망하는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만든 하나님에게 망한다는 것을 알 때까지가 진정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되는 그 시점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망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명의 씨앗이 되는데 왜냐 하면 바로 진짜 예수님이 누구한테 저주 받느냐 하면 아버지한테 저주받아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현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하나의 스크린 같은 역할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기능에 담겨있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전에 의논한 것이고 그 계획이 인류 역사에 펼쳐지면 그게 인류 역사라는 이름의 스크린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아들이면서도 아버지한테 어떻게 됩니까? 저주, 버림받지요. 이스라엘이 원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아들인데 하나님께 망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예수님마저도 이 땅에서는 아버지로부터 망해야 되고 저주 받아야 된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 주기 위해서 국가 단위로 망함을 보여 주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망한다는 스토리, 테마는 원래 말씀 안에 포함이 되어 있던 거예요. 안 망하기 위해서 살지 마라 말이죠. 인간을 만들어 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놨으니까 사랑하시니까 안 망하게 하시겠지? 아닙니다. 인간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무엇을 집어넣습니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령 죽으리라! 여러분, 어느 부모가 자식을 낳고 자식한테 그렇게 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런 부모는 없을 거예요. 애기 낳고 난 뒤에 여기에 청산가리, 여기는 가성소다, 여기는 질산, 황산, 우라늄, 이런 것을 해 놓고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이렇게 하실 부모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다 치워버리잖아요. 다 치워서 철딱서니 없는 애가 행여나 다칠까봐 미리 험한 것은 다 치워 놓잖아요.

산후조리원에 칼, 망치, 도끼, 이런 것을 놓는 조리원이 어디 있어요? 다 치워버리죠. 그것도 보들보들한 면으로 그것도 분홍색 또는 연한 하늘색으로 예쁜 것, 모빌까지 해서 애들 조기교육 시킨다고 이렇게 하지, 어디서 오함마가 막 돌아가고 전기톱이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정령 따먹으면 죽으리라 한 거예요. 이것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장차 죽으신 것을, 예수님이 죽어야 주가 되거든요. 죽지 않으면 주가 아니에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는 피조물로서 앞서서 창조주가 어떤 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인간이 있는 겁니다.

이제 인간이 태어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 사정 알아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반대로 나가요. 네가 내 사정 알아줘! 언제 네가 내 사정에 대해서 관심이나 있었나? 우리가 언제 주님에 대해서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만날 울면서 세상은 주님을 몰라요. 하면서 만날 우는 사람 봤어요? 반대에요. 왜 주님은 내 사정 몰라주십니까? 만날 교회 가서 새벽 기도 가서 울고불고 하면 왜 우십니까? 하면 주님이 내 사정 모른다고 웁니다. 너는 내 사정아나? 니는 내 사정 관심이나 있었냐 말이죠. 우리 애 소풍가는데 비가와서 안되는데 만날 이러고 있다 말이죠. 그 비가 와서 호남지방에 가뭄이었는데 비가 와서 농사 잘되는 것은 그런 것은 생각이나 했나?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하는 것이 무지이다. 전체를 모르기 때문에 무지거든요.

무지에서 나온 행동이 오늘 행동이 없죠.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에요. 우리가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모르지 우리가 엮여져 있는 모든 관계를 모르잖아요. 그러면서 어떻게 착한 일이라고 우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의 고리의 사항이 몇 가지입니까? 우리는 다 헤아리고 다 알아서 그것을 결정 내립니까? 자기 배만 채우고 자기한테 이익만 되면 무조건 결정 내리잖아요. 그래 놓고 나는 평생 나쁜 짓 한적이 없다고 합니까? 뭐 천심이다? 마음이 하늘같아서 천심이다. 천심은 우리 어머니한테나 하는 말이고 우리어머니가 옛날에 별명이 천심이었어요. 너무 착해서 시어머니 시아버지 다 섬기고 시누이 시동생 다 섬기니까 별명이 천심이라 천심 소리 듣고 천심 되려고 더욱더 일하다 보니까 나중에 골병들었어요. 천심에 이용당해 버렸어요. 천심에 이용당하고 오늘날 천사 같다는 것에 이용당한 거예요. ‘아이고, 우리 송재원씨 천사 같네요!’ 이제는 죽었어요.

제가 3장을 들어가기 전에 객소리를 길게 하는 이유가 교회는 없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 직분 나오잖아요. 여기 사람이 감독의 직분 하는데 감독의 직분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는 거예요. 아까 2장에서 이미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으니까 남자, 여자를 통해서 도대체 남자는 뭐지? 남자는 아담, 여자는 뭐지? 여자는 하와, 아, 이게 말씀과 연계 됐구나! 이렇게 되는데 이 사람의 감독의 직분 하는데 감독의 직분 자체가 없어요. 성경은 이처럼 감독의 직분이라 표현한 사람이 없어요.

이것은 직분부터 있고 그 다음에 그 직분에 부합된 사람에게 나중에 붙는 식이라니까요 3장의 그 취지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디모데전서 3장을 보면서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순한 일을 하여야 한다니까 ‘야, 우리 교회 가운데 진짜 우리 목사님은 감독 같아, 여기 보면 선한 일을 도모하니까’ 이렇게 하는데 교회 자체가 없는데 무슨 감독이 있어요? 사람들은 디모데전서에 감독이 이렇게 나오면 제일먼저 떠 오르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 감독있는 교회되려면 구원받습니까? 꼭 이렇게 나와요. 하나님, 감독이 있거나 혹시 감독이 없거나 하여튼 그런 교회 안다니면 우리가 지옥 갑니까? 꼭 이것을 물어요. 그러니까 관심사가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신세에 관심이 있어요.

자기가 우선이다. 지금 그 이야기하려고 벌써 몇 분 동안 이야기했습니다. 그 긴긴 시간을 인간은 항상 자기가 1번순이고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2번이에요. 2번은 1번을 위해서 존재하거든요. 1번이 어떤 거냐에 따라서 2번은 1번을 섬기 위해서 1번을 도와주기 위해서 2번이 일본말로 시다발이라고 하죠. 그냥 하인으로 섬기 위해서 2번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디모데전서 3장에 감독들 하니까 야, 우리 교회는 제대로 된 성경대로 감독해서 제대로 된 감독 밑에 있는 교인들은 다 천당 가도록 한번 멋진 이상적인 교회 해 보자! 이것은 거의 100이면 100 다 그래요. 감독 없습니다. 왜? 교회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항상 없는 데서 새롭게 출현되는 겁니다. 발생되는 겁니다. 아까 2장에서 남자나 여자라 하는 것은 출현 되는 게 아니고 그냥 태어나는 자체가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이제는 그 차후에 남자라고 하는 것은 아담 같은 존재이고 여자는 하와 같은 존재로서 이미 있는 나의 존재가 말씀과 결부, 연결되어 버려요. 아하, 나라는 존재는 아담의 의미를 갖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데 교회나 감독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미리 들어 있는 게 아니에요. 교회 감독이라 하는 것은 교회나 또는 교회가 없으니까 감독 부르는 거죠.

교회가 있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게 왜냐 하면 내가 먼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제 의존교회가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공부를 어렵게 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나오신 분이 안계시니까 ‘내가 있다!’ ‘있다’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존재라고 하는데 내가 여기 있듯이 ‘교회 있다.’ 제 말은 여기 ‘있다’가 같은 ‘있다’로 쓸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있으면 여기는 교회가 없다가 돼야 되고 교회가 있을 경우에는 나는 뭐가 돼야 되느냐? 반대로 ‘나는 없다’가 돼야 맞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나라가 있습니까? 내가 있습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까? 내가 있습니까? 둘 다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것은 나중에 분리될 가능성이 많아요. 이번에 진도 앞 바다에 배가 빠져서 아이들이 죽었죠. 그 분명히 이런 사람 있을 거예요. 안산에서 자기 자식이 수학여행가다 빠져 죽은 그 부모가 아마 몇 개월 후에 미국으로 이민 갈 가능성이 있어요. 이런 나라 못살겠다고 이민 갈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에요? 미국 이민 갔으니까 미국사람입니까? 미국사람 되겠죠. 그런데 배사고 있기 전에 본인은 안산에 있었죠. 그리고 대한민국도 같이 있었죠. 그런데 그 있음은 둘다 있음은 이게 분리 될 가능성이 있는 있음이 된다 이 말입니다. 언제? 무슨 사고 터지면 분리 될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고 교회도 여기 있다, 이것은 안돼요. 교회 있으면 나는 나 있음을 교회에 반납 버려야 됩니다. 교회 있음만 됐지 교회 있고 나 따로 있으면 자칫하면 이게 분리될 가능성이 있어요. 교회가 주님이 나한테 잘해 주면 믿을 거고 안 해 주면 나는 절에 갈 거야! 이렇게 분리될 가능성이 있어요. 왜? 계속해서 내가 주님 몸 안에 있으면서 나 있음을 따로 챙겨버리면 이것은 제대로 한 몸으로 붙어있는 경우가 아닙니다. 그 경우는 성경에서 인정을 안 해주는 경우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게 적절한 예가 되는데 남자와 여자가 둘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가정이 생기죠. 가정이 생기면 남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그러면 뭐가 있는가?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을 뿐이죠.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는데 그 때에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다 가정이 있다는 돼요. 왜냐 하면 그 남편 있다 아내 있다는 그 있다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가히 먼저 있기 때문에 그 가정에 기능인으로 가정 중에 하나의 역할이 남편 역할이 있기 때문에 남편이 있는 거고 아내가 있는 겁니다. 그냥 가정이 있는데 내가 있어 버리면 그 가정은 파토 나고 깨져 버립니다. 왜냐 하면 나 있는 게 우선이지 가정이 뭐가 우선이냐? 나 결혼 괜히 했어! 결혼해서 나한테 이익 된 게 뭐가 있어? 이렇게 되거든요.

‘내가 결혼해서 이익 본 게 없다!’ 이게 여자 할 소리가 할 소리지만 아내가 할 소리는 아니죠. 남편이 나는 당신과 결혼해서 이익 본거 없다! 이것은 남자가 할 소리이지 남편할 소리는 아니죠.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성경에서 남편과 아내는 합하여 한 몸이라 하고 그것이 바로 교회에요.

교회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누구 존재만 있습니까? 그리스도만 있어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냥 다 같이 그리스도만 사는 거예요. 나만 그런 게 아니고 교회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교회 안에 모든 사람은 ‘내가 너를’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것을 섬겨야 되지 것이지’ 내가 너를 섬기는 게 아닙니다. 내가 목사님을 섬기는 게 아닙니다. 목사가 교인을 섬기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것으로 목사, 주님의 것으로 성도가 서로를 섬기는 겁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내가 교회에 있다는 것은 내가 남자나 여자는 돼요.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되는데 그러나 디모데전서 3장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교회 있다는 말을 못해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내 교회 있다는 말을 못해요. 주님의 교회가 있는 거예요. 주님의 교회에 내가 속해 있지 내 교회에 주님이 속해 것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40509b (교회구성)―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디모데전서 3장 8절을 보면 감독 나오고 그 다음에 집사 나오죠. 술에 인박이지 아니고 하고 더러운 일을 탐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하니까 술은 먹어도 되는데 인만 안 박이면 된다고 아주 빠져 나갈 구멍은 아주 많아요. 건물이 허술하니까 …….

집사 감독이라 하는 이것이 2장에서는 사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아담과 하와는 뒤에 붙지만 3장에서는 직분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사람은 누가 들어갈지는 미지수에요. 내가 감독이라고 나설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왜냐 하면 감독 자체가, 아니 교회 자체가 없는데서 발생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감독될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없는데서 나와야 그게 감독돼요. 나 감독하고 싶어요! 손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감독 직분만 나오는 게 아니고 감독 직분과 더불어서 맞춘 사람도 같이 집사 직분과 더불어서 거기에 맞는 사람도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제 3자가 감독이나 집사를 뽑을 수가 없어요. 그냥 이미 집사인 사람을 추인하고 확인해 줄 뿐이죠. ‘집사하세요!’ ‘난 바빠서’ ‘아이 빼기는?’이런 문제가 아니고 ‘딱 집사네!, 딱 당신이네!’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요? 하나님이 당신을 감독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당신을 집사 만들어 놨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확인해 보는데 술에 인 박이지 않고 구타하지 않고 이것은 하나님이 그런 조치를 했었음을 다 같이 고백하고 인정해 주는 겁니다.

어떤 집사가 등장했을 때 그 집사는 그 집사는 우리 가운데 술에 인 안 박힌 사람 집사할 사람 손 들어보세요!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집사이기 때문에 주께서 술 인안 박히도록 그렇게 했던 사람을 그 교회에 등장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말하거든요. 이 세상 모든 교회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회자체가 한번 만들어 볼까 해서 만들어진 게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교회자체가 한번 만들어 봐? 교회 만들어서 하나님 모셔놓고 영광 돌려봐? 이것은 절에서 돈 있는 보살이 중하나 놓고 장사하는 것밖에 안돼요. 절에서 그렇게 하거든요. 교회도 물론 그렇게 하지만 그래서 감독이라는 감투를 씌우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 안 되느냐 하면 그 이유를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존재문제, 교회 있음과 나 있음이 같은 개념에 같은 차원에 존재가 같이 설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있으면 나는 없어 져야 돼요. 없어 져야 되고 내가 있다면 나는 아무리 해도 교회의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사람끼리 모인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교회되게 하는 힘과 능력이 병행돼야 돼야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인데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왜 헌금 하다가 죽은 이야기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느냐 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 눈에 보기에 사람만 있으면 교회된다고 해서는 그게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 있으면 교회된다면 그런 교회 같으면 이미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벌써 다 했어요. 안되잖아요. 보세요. 그러면 교회에 사람만 있지, 사람 외에 누가 있는데 모르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사람만 보이네 사도 있고 교인 있고 뭐 다른 사람 안 보이는데? 안보이지?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 반 숨기고 왔을 때 베드라가 하는 말이 있어요.

네가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속였다? 성령을 속였다! 더 중요한 말이 있어요. 성령을 속인 이유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성령을 속인 게 아니에요. 누가 속였느냐? 사단이 성령을 속인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사람을 비켜 비켜 봅시다. 해서 저쪽에 보니까 베드로는 누가 있고? 성령이 일하고 아나니아 삽비라 좀 비켜 보니까 거기 배후에 누가 있고? 악마가 있고 결국 교회라는 것은 그저 인간들끼리 모여 회집 정해서 총무 정하고 목사해서 그게 교회가 아니고 반드시 누가 관여해야 되고? 성령이 관여해야 되고 또 누가 거기에서 누가 같은 힘으로 반작용, 누가 거기서 도전장을 내밀어야 되느냐 마귀가 반드시 활동대상이 돼야 돼요.

진짜 교회는 악마의 표적이 돼야 됩니다. 그러면 악마는 사람을 노리겠습니까? 아니면 사람과 성령의 관계를 끊고자 노리겠습니까? 단순히 사람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과 관계를 끊고 주님과 관계를 끊고자 그 이음새, 그 조인트를 사단이 계속해서 공격할 때 이미 공격 대상이 된다는 자체가 이미 교회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공격 대상이 될 때 사단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공격할 일은 없잖아요.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야기했듯이 예수님께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면서 우는 사자하니까 여러분이 동물원에 우는 사자 같은 동물을 생각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적당해요.

산기슭에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본적 있느냐? 그 하이에나가 어느 산에 기거합니까? 킬리만자로 조용필 노래에 나와요. 우는 사자와 같이 먹이를 찾아서 이미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쪼의 말씀이 나왔죠. 나왔으면 그 말씀은 흐지부지되는 말씀이 아니죠. 반드시 그 말씀이 말씀 그대로 그 이후에 현실로 구성이 되는 겁니다.

1. 현실이 있다와 2. 현실이 구성 된다. 1번이 맞습니까? 2번이 맞습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아무 거나 찍어보세요. 2번이 맞아요. 현실은 너와 나와 그리고 성령과 악령 다 같이 구성되는 겁니다. 그 프레젠트의 설계도는 바로 말씀이고 세상은 말씀대로 현실은 구성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만들어져가고 발생하는 겁니다. 결혼식은 둘이 서서 이벤트 만들면 되지만 가정생활은 어떻게 돼요? 계속해서 만들어 가야 되죠. 아내와 남편이 약속해서 아내는 아내 역할, 남편은 남편의 역할을 해야 되죠. 남편이 남자역할을 하고 아내가 여자 역할을 하면 그것은 구성이 안돼요. 왜냐 하면 자기는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가정 자체가 동거지 가정이 될 수가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제가 주례하면서 이야기했지만 다시 하면 이렇습니다. 나 하나 희생해서 당신이 웃을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을 위해서 모든지 할 수 있어! 나 하나 희생해서 당신이 웃을 수 있다면 모든지 할 수 있어! 이거하고 내가 당신하고 결혼해서 무슨 이익인지 모르겠다 이거하고 이야기가 다르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계속 자기 존재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내가 만약에 의존교회에 나왔다면 이 교회가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지? 이러면 그것은 교회 성도가 아니고 그 교회를 자기 것으로 접수하는 양아치에요. 내가 이 교회 접수해봐? 내꺼 만들어 봐? 나 하나 희생해서 교회에 계신 주님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이게 바로 성도잖아요.

그런데 우리교회는 나오지도 않는 사람이 많아요. 가까이 있으면서도 나오지도 않아요. 자기 존재가 있다는 거예요. 사람은 이렇게 내가 여기 존재하고 나 1번, 2번 너 존재하고 그 사람 존재하고, 세 존재가 모이면 교회라잖아요. 이런 교회는 없어요. 이것은 때슬이 라고 해요. 이것은 집합이지 연합이 아니에요. 성령의 연합이 아니라니까요.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 것밖에 안돼요. 어이, 2번 3번 나 알아줘! 2번은 어이 1번 3번 나 알아줘! 3번은 1번 2번 나 알아줘! 이게 뭐에요? 계모임도 아니고 뭡니까?

야, 너 술 인 박이지 않았지? 인 안 박혔어! 술은 먹지만 인은 안 박혔어! 그럼 너 집사 해라! 너는 보니까 구타하지 않고 하니 너는 목사해라! 이 큰 감독해라! 왜? 성경에 나오니까 이렇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감독이나 집사라 하는 것이 감독과 집사를 선출했던 저 사람을 우리가 목사로 청빙합니다. 하고 투표했던 투표자, 나 자신을 위한 목사가 되어 버려요. 그러면 목사가 내 똘마니가 된다니까요. 왜? 내가 당신이 오기를 투표했기 내가 때문에 당신은 이제 내 성격에 맞도록 목회하세요. 이렇게 되어 버려요. 이게 무슨 단체입니까? 이게 주님의 단체입니까? 자기 단체입니까? 자연스럽게 누구 단체 돼요? 자기만을 위한 단체가 되겠죠. 왜? 내가 여기 존재가 우선이니까 내가 이 교회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자기가 존재 안하면 자기가 위안이 없는데 내가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 입맛에 맞는지 늘 감시하고 감찰해야 되고 잔소리하고 투정해야 되고 불만 터뜨리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는 이렇습니다. 제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 하나 희생해서 우리를 살리는 게 교회입니다. 맞아요? 안 맞아요? 맞지요? 주님 하나 희생해서 그러면 희생 안한 사람이 거기에다가 자기주장을 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장 펼칠 수가 없죠. 왜냐 하면 희생도 안한 인간이 그 이야기를 해 버리면 그것은 자기 소유의 집단이 되거든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도 희생하면 되지요. 우리의 희생은 교회의 구성요소가 안돼요. 내가 목사로서 희생해야지 그 자기 희생은 교회의 구성요소가 안됩니다. 교회구성 요소는 예수님의 희생만이 있어야 되고 그것으로 충분하고 더 이상의 희생은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 희생한데다가 내 희생 끼어들면 그것은 주님의 희생과 경쟁관계에 놓여가지고 이것은 나를 섬겨야 될지 주님을 섬겨야 될지 헷갈리게 된다니까요. 어떤 장로가 교회 예배당 짓는데 돈이 모자라서 자기는 자기 집을 팔아서 전세로 옮기고 그 여분의 돈 가지고 교회에 갖다 바쳐보세요. 그 교회가 누구의 교회가 되겠어요? 주님의 교회가 되겠어요? 그 장로의 교회가 되겠어요? 그야말로 그 장로교회, 통합 합동하는 그 장로교회, 그 장로란 사람의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감독될 사람은 그 사람의 입김에 의해서 청빙도 그 사람이 알아서 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주식 지분이 제일 많으니까요. 정몽현이는 삼성 그룹에 힘을 못써요. 왜? 지분이 없어요. 지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이재용, 이건희 회장은 삼성 그룹의 왕초에요. 왜? 자기 지분이 제일 많잖아요. 세상의 모든 존재라는 게 인간이 인간에 의해서 인간의 자기들의 의지와 협동에 의해서 자기들의 열성에 의해서 조직을 만들어 놨으면 그것은 인간 단체잖아요. 인간단체에서 인간이 행세하는 것은 당연한 거죠.

하지만 교회는 뭐냐 이 말이에요. 교회는 뭐냐, 그렇게 인간 단체 교회 같으면 그것은 성령도 없고 성령이 없으면 마귀도 관섭도 안 해요. 왜? 가만히 있어도 자기 세계인데 마귀가 뭐 하러 신경 씁니까? 가만 놔둬도 마귀 단체, 이단인데요. 분명히 디모데전서 보기 전에 사도행전을 생각해 봅시다. 사도행전에 분명히 교회라는 것 앞에 뭐가 붙었습니까? 교회 이전에 누가 와야 돼요? 오순절에 성령 와야 되지요? 그런데 성령 안 오고 교회됩니까? 안 됩니까? 성령 안 온 교회는 없어요. 그런데 요새는 성령대신에 간판, 대한예수교 장로회, 간판만 오면 교회돼요. 간판 있고, 헌금 낼 유력한 사람 있고 신학교 졸업한 안수 받은 목사 있고 장로 몇 있고 장로 부인은 권사니까 권사 있으니까 그만 교회 돼 버려요. 교단에 가입하고, 무슨 성경에 교단이 있어요? 성경은 기독교도 없는데 무슨 교단이 있어요? 그런 거 없습니다.

성경에는 교회만 있어요. 교회 되라도 없어요. 교회 있음 자체가 이미 교회가 완료 됐기 때문에 세상에 교회되다가 없어요. 교회 되다가 있을 수 없어요. 교회 되자 돼버리면 성경에 나온 교회 따로 있고 자기가 만든 교회가 따로 있어서 교회가 두 군데 둘 중에 하나는 사기에요. 엉터리 돼 버려요. 성경에 있는 교회만 교회이고 나머지는 교회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 나오잖아요. 세상에 교회가 일곱군데 밖에 없습니까? 수천군데 있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인정하는 교회는 일곱 교회만 있는 거예요. 주님의 오른 손 한 분 속에 있기 때문에 일곱 교회라고 하지만 사실은 전체교회, 하나의 교회를 말하는 겁니다.

그 일곱 교회 안에 모든 교회가 들어있듯이 여기 말하는 직분이라 하는 것은 특정인에게 직분이 아니고 이 직분에 합당한 사람만 감독이 될 뿐이에요. 일곱 교회 합당한 교회로 인정한 것처럼 따라서 여기 직분이나 집사가 나올 때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존재에 갖다 붙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제가 드리고 있는 겁니다. 직분을 우리 교회에 가져 오자! 저 집사직을 가져오자 할 수는 없어요. 집사는 집사 직분 있고 뽑아서 붙이는 게 아니고 집사직분 될 사람이 자체적으로 등장하게 마련이에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서 왜 집사가 등장하느냐, 이 말씀이 나오니까 말씀에 부합된 사람도 당연히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같이 집사다운 사람이 오게 마련이고 감독이란 말이 있는 이상 감독이 되게 나타날 거예요. 감독이 하나뿐이라는 그런 말이 아니고 감독들이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갖다 쓸 수는 없다 말이에요. 따라서 감리교단에서 감독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감리 교단에서 감독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가 그것을 감독이냐 아니냐, 그것은 감독이라 볼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감리교단이란 성경에 없는 교단에 소속된 감독이기 때문에 감독이 없어요. 그러면 감리교는 한 사람도 없습니까? 있을 수 있어요. 왜냐 하면 감리교 떼어버리고 그것도 혹시 교회라면 혹시 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혹시 그것도 교회라면 교회가 있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님이 세워주는 감독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있을 수가 아니고 있을 것이다가 아니라 반드시 교회 있는 곳에 감독이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사도행전 20장 28절 봅시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어렵지 않습니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았죠. 감독자로 삼았습니까? 안 삼았습니까? 삼았죠. 그럼 어디에 있겠죠. 그게 우리교회의 목사일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왜 우리교회의 목사이어야 됩니까? 우리교회에 목사라고 고집하는 것은 내 교회만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가 말씀에 어긋나요.

성경에 감독이 있다면 있는 줄 알고 받아 드리면 되지, 우리 교회목사가 이 감독이네, 이렇게 우기지 말란 말이죠. 그것은 자기 사조직이죠. 교회라는 이름에 사조직입니다. 그러면 그 감독이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이죠. 거기의 감독은 조건이 뭐냐 하면 일단 성령이 와야 되고 감독의 내용이 뭡니까? 하는 기능이 뭡니까? 하나님의 피를 그 교회에 유지 시키는 겁니다. 어떤 감독이 와서 하나님의 피를 유지하다가 한 15년 하다가 16년째 감독이 하나님의 피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감독이에요? 감독 아니에요? 그것은 감독 아니죠. 왜? 셩령께서 함께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만 증거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감독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사표 내나요? 무슨 사표 받을 사람이 없는데 누구한테 사표를 내요?

어떤 분이 십일조 이야기를 했어요. 아 이 땅에는 십일조 없는 이유가 십일조 받을 사람이 없어요. 왜냐 하면 성경에 보면 말라기에 십일조 받는 사람이 있어요. 누가? 제사장이 받아요. 말라기에는 구약이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제사장이 없어요. 구태여 있다면 본인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본인한테 십일조 내면 되겠네요. 목사는 자기가 십일조 내서 목사 자기가 받으면 되고요. 교회 십일조 받으면 안 돼요. 왜? 목사 자기가 내고 자기가 받고 집사는 자기가 내고 자기가 받으면 되겠네요.

지금은 십일조 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낼 수가 없다니까요.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그리고 십일조 내면 뭐합니까? 제사 지내는 제사장 양 잡으라고 주잖아요. 그런데 요새 십일조는 누구한테 내야 됩니까? 도축 업자한테 줘야 돼요. 양 잡는 사람한테 줘야 돼요. 도축업자 부자 되겠네요. 온 나라 교회 십일조가 거기로 다가니까요. 십일조라 하는 것은 제사장한테 주는 거고 제사장은 자기의 업무가 제사거든요. 양 잡고 소 잡는 거거든요. 따라서 그 사람들이 땅을 갈지 않더라도 따른 사람의 소득의 10분의 1을 받게 되어 있는데 왜냐 하면 그들이 양을 잡고 언약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그 소득을 제공하는 사람의 소득이 그 만큼 풍성해 지는 거예요. 그들이 농사 잘 짓는다고 소득 생기는 게 아니고 제사장들이 언약대로 하게 되면 그 혜택을 밖에 농사짓는 사람에게 혜택을 입어서 잘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그냥 10분의 1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일 큰 사과, 제일 먼저 나오고 제일 질 좋은 첫 소산물을 십일조로, 10분의 1을 드리는 거예요. 양 같은 경우에는 10분의 1로 지내서 하겠지만 그러면 오늘날 제사장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면 예수님 덕분에 됐으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제사장인 동시에 본인이 십일조가 되시는 겁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한테 유일하게 드리는 맏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맏아들입니다. 하나님은 맏아들을 받거든요. 약속에는 돈을 받았지만, 헌금을 받았지만 마지막 때는 새언약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받습니까? 맏아들을 받아요. 중보자의 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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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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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