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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복사(카피) 140509강의히브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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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근호(IP:119.18.90.53)

공은주(IP:218.♡.196.154)

14-05-17 16:02

안양20140509a-히7장26절(복사(카피)) - 이 근호 목사

더 해봅시다. 히브리서7장21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보통 우리가 신앙 또는 종교, 교회 이런 것이 하나의 장식품처럼 그렇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내가 중요하고 그 다음에 이 중요한 것을 잘 꾸밀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교회 나오는 것, 예수 믿는 것, 사실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나보다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중요한데, 이 중요한 것을 잘 지켜주기 위한 든든한 분으로 예수님을 이렇게 장식품으로 걸칠 수가 있어요.

예를 들면, 어버이날에 다른 부모는 카네이션을 다 달고 다니는데 자기 부모한테는 카네이션이 없다하면 서운하잖아요. 그래서 자식이 카네이션을 어머니에게 달아주면서 남 따라가는 식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는 이 성경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이 해석이 안 됩니다. 이 말씀이 나한테 카네이션처럼 달리면 안돼요. 장식품이니까 카네이션은. 하나의 나를 꾸미는 장식품 나도 나한테 자식 있다는 그걸 자랑하는 장식품처럼 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제사장이라는 용어 때문에 그래요. 제사장이 카네이션 같으면 이렇게 달면 되는데, 제사장은 이렇게 백성들이 “우리는 제사장하고 친해.” 이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제사장 덕분에 죄 용서받는 효과가 없거든요. 제사장이 그 당시에 장식품이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장식품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지요. 물론 십자가 목걸이하고 있는 것은 이해됩니다만, 예수님 자신을 장식품이라고 여겨버리면 누가 중요한지, 누가 안 중요한지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일단 중요하고 중요한 나를 멋있게 꾸밀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리 되어버린다 말이죠.

우리 집에는 딸이 있다, 라고 할 때, 딸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엄마 본인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내 집에 딸이 있다는 말은 이게 나의 딸이란 뜻이거든요. 저 딸의 엄마가 나란 뜻이 아니고 내 소유의 딸이란 이런 뜻이에요.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믿어지는 예수님이 아니다 말이죠.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그건 장식품이고 카네이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했습니다. 망했는데, 제사장이 장식품이었어요. 제사장이 있음으로서 우리는 다른 나라한테 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고 특히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특별대우를 받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제사장이 있다는 말은 어렵게 말해서 우리에게 언약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말라기에 그게 나와요.

말라기에 보면, 이게 레위언약을 강조하면서 레위지파, 제사장이 있는데, 너희들이 제사를 똑바로 드려야 나라가 복을 받는데 너희들이 제사 못 드려가지고 썩은 거, 흠난 거, 이런 거 드려서 내가 받겠느냐, 그러니까 마지막 때 엘리야를 보내가지고 나를 완전히 새롭게 갱신하겠다, 하는 그런 내용이 말라기 내용입니다. 거기에 보면, 말라기의 제사장 언약을 하겠다는 말은 우리가 잘만하면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언약부터 새로 시작하자. 언약부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마을이 이렇게 있습니다. 마을이 있는데, 마을에 공동우물이 있다고 봅시다. 마을에서 우물이 떨어지면 이 마을은 어떻게 됩니까? 못 살지요. 다 같이 이사 가야 되겠지요. 그것처럼 이 우물, 오아시스라는 소문을 듣고 한 집, 두 집 나오다가 여러 집이 모이게 된다면 그 출발지점이 어디에요? 우물이 오아시스 중심이 되겠지요. 천국 가는 사람은 내가 예수님 촬영해가지고 데코레이션 장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하나, 둘 호출한 사람만이 천국 갑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나는 예수가 필요하다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해요. 그래서 남이 나를 안 알아줘도 괜찮아요. 왜냐 하면, 일단 주님은 나를 알아줬고 호출했기 때문에 그것을 오직 남한테 예수님만 자랑하라,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 먼저 나를 알아봐서 나를 이렇게 호출했고 택하여서 주의 자녀 되게 하셨다. 이것을 자랑하라 이 말이죠. 이게 바로 오아시스부터 말이 시작되는 거예요.

마을 먼저 해놓고 그 다음에 새삼 물 퍼내는 게 아니고 물 없으면 아파트 다 소용없잖아요. 물이 있고 물을 중심으로 한 두 집모이다 보니까 물이 괜찮고 물이 있으니까 토지가 되고 되니까 일가친척 불러다가 “야, 거기 살지 말고 여기 와서 살아.”하니까 그게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서 빌리지가 되는 거죠. 항상 출발점은 생명수가 있는 데서부터 출발하듯이 예수님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했으니까 예수님부터 시작한 그것만이 계속 생명이 유효하고 그렇지 않은 데는 인간들이 가짜로 생명을 조작해내는 그러한 엉터리 교회에요. 엉터리 그리스도 몸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 사람이 구원 받을지 안 받을지는 간단한 문제에요. 예수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우선이던가 아니면 자기가 중요해서 예수를 나중에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지 그것만 따지면 돼요. 방금 이야기한 요걸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구원론이 우선이냐, 그리스도론이 우선이냐, 이렇게 질문하면 딱 돼요.

‘내 구원받는데 어떻게 구원받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님하고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구원받을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주님께서 이 복음을 알라고 주님 쪽에서 먼저 우리한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건 어떻게 아는가, 성령이 와야 알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편이니까, 예수님 입장이니까 항상 모든 출발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게 하시는 게 성령이에요.

‘아! 나는 뜨거워지고 싶다.’ 성령이 와서 “뭘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은 니가 현재 일어나는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다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허락 하에 예수님으로부터 개시된 일이 나에게 파도가 되어서 밀려온 거예요. 우리 애가 갑자기 물에 빠져 죽었다. 하는 것도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라고 그걸 받아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일도 어떻게 돼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원칙에 의해서 범사에 감사하지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주의 뜻이라, 데살로니가전서5장 16~18절이죠. 그러니 청와대에 데모할 게 없지요. 왜? 항상 기뻐하라 했으니까.

성경에서 제사장할 때, “그래, 제사장 있으면 구원받겠다.” 이렇게 하지 말라 말이지요. 구원론으로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거죠. ‘예수님이 왜 제사장을 허락하셨을까?’ 항상 출발을 예수님부터 출발을 하면서 성경을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야 맞습니다.

자, 제사장이 왔다. 아까 처음에 제사장은 장식품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제사장은 제사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사라 하는 것은 그냥 인간들이 모여서 삼육구 게임하는 게 아니잖아요. 삼육구, 삼육구 게임하는 게 아니잖아요. 요새 교회 예배는 게임 같아요. 우리 모였으니까 재미나게 놀다 갑시다. 이리 나오는 거 같아요. 죽음입니다. 모였다 하는 것은 옛날 제사장과 더불어 모였다 하는 것은 제사는 그냥 죽음의 사건을 또다시 반복해서 현장에서 일으키는 거예요.

옛날 구약 때 제사장이 그냥 맹숭, 맹숭하게 와서 장기판이나 들고 와가지고 “우리 장기나 두고 갑시다.” 이렇게 했습니까? 노래방기계가 와가지고 “우리 노래나 부르고 찬양이나 부릅시다.” 이렇게 할까요? 백성들은 소나 염소나 양을 가지고 오고 제사장은 칼 들고 있지요. 그리고 그 이벤트에 그 모임에 주제가 뭐냐, 왜 모였느냐? 우리 대신 또 다시 누가 죽어야 된다는 사실. 우리 대신. 제가 이런 이야기해서 매일 욕 얻어먹는 거예요. “니는 매일 십자가밖에 모르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했던 이야기에요. 했던 이벤트 행사였어요. 모이면 바로 죽음 사건 일으켰고 초대교회도 모이면 이건 예수님의 떡이요, 예수님의 살이요,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었다는 것, 그 죽음 사건을 각인시키고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점검하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 백성들이 교인들이 그걸 원했을까요? 예수님 죽는 얘기 또 듣고 싶어요. 또 듣고 싶어요. 그들이 그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 자식자랑하고 지 자랑하고 그거 하고 싶어서 만나고 남자들은 그냥 혼자 술 마시면 맛이 없으니까 같이 술맛 좋아라고 같이 만나고 그런 식으로 하지요. 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오거든요. 이것은 이스라엘도 교인도 마찬가지예요. 자기의 욕망과 희망을 기도로서 또는 복 받아가지고 손에 쥐기 위해서 온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늘 반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죽음을 늘 이렇게 반복했던 것이 초대교회였고 이스라엘 절기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인간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게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성도는 무심코 세월만 보내라고 성도 만든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그냥 눈 꽉 감고 있다가 죽으라고 그 일하라고 있는 게 아니고 싸움을 해야 돼요. 이 세상 신 악마와 싸우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한 겁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이다 하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있음, 존재, 존재는 존재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사명이 나와야 되고 할 일이 나와야 되고 기능이 나와야 돼요.

자, 존재라 하는 것은 여기 고정돼 있고 실체 물체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싸워야 될 악마는 실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악마는 그냥 활동이고 활동의 기능이에요. 우리가 몸으로 있기 때문에 악마는 천사기 때문에 몸이 없어요. 그냥 능력만 제공하지요. 능력만 제공해가지고 악마의 종들은 실체가 있어요. 사람이다 말이죠. 있지만, 능력을 준 그 악마는 실체가 없는 거예요. 인간적인 신체는 없다 말이죠. 실체는 있긴 있는데 인간적인 신체 이런 모습으로 어떤 세포덩어리 그런 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싸움이 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같은 권수 선수끼리 글러브 끼고 싸우라고 하면 되는데 그 죽은 권투 귀신하고 싸우면 싸움이 되겠습니까? 있어야 때리지요. 형체 없는 귀신하고 형체 있는 인간하고 게임이 됩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싸우라 이 말이거든요. 어떻게 싸울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이게 어려운 문제지요.

에베소서6장10절~12절 이야기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혈과 육에 관한 게 아니라잖아요. 우리는 혈과 육이 있잖아요. 있는데, 혈과 육의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면 기관총도 소용없고 칼도 소용없고 어떻게 해요? 안되지요. 그래서 에베소6장10절에 보니까 그 싸움은 주 안에서 싸운다. 주 안에서.

주님 안에서 싸우라고 명령하신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나서서 싸우겠습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마귀와 싸우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치를 해요. 우리는 이런다고 해서 우리가 주의 사람을 이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제 시작을 해야 되거든요.

자, 제사장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있었지요. 그 제사장이 제사 잘 드리면 이스라엘이 누구를 이겼습니까? 이웃나라 이방민족 이겼지요. 그 이유에 대해서 설교시간에 여러 번 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이겼을까요? 그 쪽에는 언약이 없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습니다. 언약이 있으니까 언약이 있는 쪽이 없는 쪽을 이깁니다.

자, 그러면 이스라엘이 나중에 패배했다. 패배할 경우가 너무 많았거든요. 언약이 있는데 왜 패배했을까요? 언약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블레셋에 언약궤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언약이 있는데 왜 패배했을까요? 아까 원칙이 하나님은 언약편이거든요. 그럼 언약편인데 유일한 나라가 이스라엘이 언약이 있다면,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이겨야 되는데 무조건 이기는 것이 아니고 이방나라한테 오히려 질 때가 더 많아요. 나중에 가나안땅 정착되고 난 뒤에는. 왜 그랬을까요? 결국 언약의 원수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자신이 언약의 원수에요. 이걸 다른 말로 쉽게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

우리의 혈과 육이 싸워야 될 그 적이 마귀가 내 안에 안 들어온 게 아니고 이미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 나를 갖고 놀고 있으니까, 아까 날 파리인가 뭔가 날아왔지요. 일단 우리 집에 들어왔으니까 우리 식구에요? 식구 아니지요. 때려잡아야 되지요. 벌 같은 식구둔적 없지요. 키울 마음도 없고. 개를 싫어하는 사람은요, 그 집안에 개있으면 개 나가라고 해요. 에헤이, 나가라. 주인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개가 와서 같이 앉아있으면 “이거, 뭔데?” “우리 집 식구야.” “식구고 뭐고 개 좀 치우고 이야기하자. 냄새난다. 치우고 이야기하자.” 이리 되겠지요. 같이 있다고 해서 식구 아닙니다. 마귀가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해서 식구 아니에요. 마귀는.

어떻게 되느냐, 나가라고 할 수 있는, 나가라! 의 싸움을 해야 되는 거예요. 마귀가 갖고 올 때는 뭐냐 하면, 마귀는 하늘나라를 못 보게 하는 게 주특기입니다. 목적이에요. 주특기가 바로 목적이에요. 그게 고린도후서4장에 보면, 이 세상신이 복음의 광채를 흐리게만 하면 그들의 목적은 달성한 거예요. 그러면 복음 믿지 마라, 십자가 믿지 마라,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듬뿍 가지고 와요. 해가지고 고뤠? 그렇게 좋은 게 있었어? 요번에 롯데백화점에서 정품으로 80만원짜리 특별세일해가지고 90%세일해서 8만원에 판다니까. 고뤠? 갑자기 거기에 확 빠져가지고 복음이야기 들려오지를 않아요.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가장 쉬운 예는 세상의 광채가지고 복음의 광채를 매우면 돼요. 대체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육신의 정욕이라 했잖아요.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잖아요.

육신의 정욕이라 함은 육신이 있으면 다 생기는 것이고 안목이니까 눈떴으면 다 탐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생의 자랑이라 하는 것은 남들이 우리한테 기대한 게 있으면 우리는 기대에 부흥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게 되어있어요. “인간아, 왜 그렇게 사나?” “가만히 있어 봐! 내가 니 보란 듯이 성공할 거야.” 이게 이생의 자랑이에요. 남이 나를 우습게보기 때문에 남한테 대단한 존재로 비추기 위해서 갑절의 노력을 다하는 그래서 뭐냐,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운 존재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려워 보이지만,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했잖아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라고 낙인찍혔던 이유가 그게 바로 남쪽, 북쪽 두 나라가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애굽나라를 그렇게 흠모한 거예요. 창녀처럼. 심지어 돈 받는 창녀가 아니고 지가 돈 주고 하는 창녀처럼. 그런 식으로 굉장히 흠모한 거예요. 왜 흠모했을까요? 잘 사니까. 그게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요. 욕심. 그런데 그걸 하기 위해서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이 있음이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그들은 절기 지키고 안식일 지키고 마음은 어디가 있고? 마음은 다른 나라 잘사는 나라 가 있으면서도 자기는 여호와가 시키는 대로 언약대로 한다는 거예요.

그럼 목적은 어디 있느냐, ‘이것만 하게 되면 저 사람이 갖고 있는 복을 얻어낼 수 있다.’ 라고 생각할 때, 그게 바로 이스라엘 멸망에 이유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세례요한이 20억 재벌가로 죽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어떻게 됐어요? 사도들이? 세상 적으로 대단한 인물 됐습니까? 정치적, 경제적으로. 경제적으로 복 많이 받아가지고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저리 예수 잘 믿으니까 복 받고 이렇게 모델 케이스가 된 적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상하지요? 12제자가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은 딱 하나에요. 떠나자!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내리자, 그 이야기에요.

주님이 먼저 배버리고 바다로 뛰어내렸기 때문에 주님이 가신 길로 가게 되면 산다는 겁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빌립보서3장에서 내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찌하던지 십자가로 달려간다는 그러니 십자가라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바라볼 유일한 최후의 모델이 십자가에요. 항상 봐야 될 목표지점이 있다면 십자가뿐이에요.

그러니 마귀는 그것을 성도가 보는 줄 알고 못 보도록 그걸 흐릿하게 만들어버린다고요. 흐릿하게 만들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뭡니까? 나는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귀가 하는 술책은 정반대니까 어떻게 해요? 절대로 니는 더 살아야 돼!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모든 게 니는 실패자야. 낙오자야. 니는 인생 헛살았어. 어떤 경우라도 살아남아야 돼! 그걸 계속해서 우리한테 알려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아니야 우리는 죽어야 돼!” 이렇게 됩니까? 그렇게 해야 돼요? 야, 요 마지막 어려운 문제를 내버렸네요. 제가. 그러니까 “마귀가 살아야 돼!” 하니까 우리는 “죽어야 돼!” 이게 정답입니까? 자칫하면 자살할 수가 있어요. 우리의 정답은 뭡니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주의 뜻이지 내 뜻 아니다.” 이게 정답이죠. 마지막 때, 마귀로 갈 뻔 했지요? 큰일 날 뻔 했지요? 마귀가 살아야 된다, 하니까 우리는 반대로 나가면 정답이 아니에요. “죽고 사는 것은 내 소관 아니야.” 이게 정답이라니까요. 이게.

강의 다시 합시다. 히브리서7장21절, 제사장할 때는 이 제사장이 있다 하니까 제사장을 잘 알면 우리가 구원 받겠다 이렇게 시작하겠지요. 그게 잘못이에요. 왜냐 하면, 구원론 중심이기 때문에 안돼요. 제사장이 있으면 구원론 중심으로 가버리면 이것은 카네이션 다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의 장식품처럼 되어버려요. 그런데 제사장을 우리가 이렇게 카네이션으로 달 수 있습니까? 못 달지요. 왜냐 하면, 제사장은 어떤 기능을 하기 때문에? 죽음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제사장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으면 둘 다 살아있으면 “우리 잘해봅시다.” 이리 되는데, 제사장의 할 일은 “아이고, 예쁩니다. 착합니다. 아이고, 위로하세요.” 그거 하는 역할이 아니고 “실례지만 양가지고 왔습니까? 양이나 대고 나는 죽이죠.” 죽음 사건을 반복시키는 게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제사장하는 그것을 나는 유명한 제사장 한다. 이렇게 자랑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 받는 거 아니고 제사장이 하고 있는 그 죽음 이벤트에 거기에 참여해야 되는데 참여하기 전에는 내가 모든 나 위주의 구원론 위주의 모든 것을 다 처리하고 그걸 빼버리고 참여가 돼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마을이 있다면 그 마을은 마을이 있고 우물을 새로 발견해야 돼요? 아니면 우물을 발견하고 나면 한두 집 새로 생기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먼저 마실 물이 먼저 있어야 마을이 될 게 아닙니까? 물 있네. 해서 한두 집이 모이다 보니까 나중에 백 채 되고 이 물이 소문나서 더 올 수 있잖아요. 그것처럼 우리의 생명은 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렇게 데리고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불러줘야 돼요. 왜? 예수님이 우물이니까.

“내가 사는데 무슨 우물이 필요하지?” 이렇게 하면 안돼요. 내가 있는 자리에 예수를 모셔오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게 되면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게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자랑하는 “역시 예수님이 바로 생명수였고, 진짜 진리였고, 생명이었습니다.” 증거 하라고 우리를 호출할 뿐이에요.

그 예수님이 구약 때는 오늘의 본문의 말씀처럼 제사장으로 나타났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 구약 때는 제사장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걸 제사장 언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제사장 언약을 아시는지 다시 복습해 보면, 제사장 언약은 우리가 장식품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 제사장 언약 앞에서 나 자신을 거기다가 뛰어 들어가야지, 내가 언약을 장식품처럼 달고 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제사장 언약은 어떤 사건을 반복한다? 죽음 사건을 반복한다. 죽음 사건을 반복하게 되면 교회 나올 때 복이나 받고 나오려한다든지 어떤 사업이나 어떤 가정문제, 사적인 문제 하다가 제사장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양이나 내세요. 염소나 내세요. 내가 죽일 테니까. 피내는 죽음사건 앞에서 우리가 아는 사적인 모든 것은 부질없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기에 지나지 않는 얄팍한 우리의 종교적인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그러한 작업을 할 때, 우리는 그 때부터 어떤 일을 부여받게 되는데 그 부여받는 일이 뭐냐 하면, 우리는 그냥 늘어지게 세월 지나는 게 아니고 지금도 누구와 싸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하고 싸우지요? 에베소서6장에서. 공중권세 잡은 자와 영적인 싸움을 하지요. 제가 성도란 사람하고 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화제가 그거야 돼요. “성도는 영적인 싸움을 어떻게 했습니까?” 이게 대화가 되어야 되는데 뭐 교회 갔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밖에 안할 때는 도저히 저 분이 세상을 그냥 동양화의 한 폭처럼 즐기는 한적하게 낚시나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치열하게 영적 싸움을 하는 사람인지 상당히 모호하지도 않지만, 저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면 마귀가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싸움이 안 되도록, “니는 내편이야.” 하게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복음의 광채를 흐릿하게 만드는 거죠. 방법이 뭐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훅하게 가가지고 죽음의 이벤트는 생각도 못하게 만든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거기에 훅하고 갈수밖에 없는 것은 육신이 있기 때문에 당연한 거고 육신이 있는 사람의 속성이 뭐냐 하면, 그걸 좋아하는 이유가 육신은 무조건 살아남는 게 땡이니까, 다행스러운 일이니까 물에 안 빠지고 내 아들, 내 딸 살아나오면 자랑스러우니까 무조건 살아야 돼 하는 거죠. 그러면 그 반대가 뭐라 했어요? 그러면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는 무조건 죽어야 됩니까? 무조건 죽는다면 어느 목사처럼 자살하면 그만이지요. 뭐~

세상의 모든 실연과 고통과 마음의 고초를 잊어버리는 방법은 자살이죠. 그럼 자살하면 죽은 자 되네요. 정답은 뭐라 했어요? 마귀가 살려고 할 때, 우리는 마귀 반대로 “죽으면 되지.” 이게 아니라 “살고 죽고 이것은 내 소관 아니다.” 이게 바로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죠. 살고 죽고 내가 신경 쓸 거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6장의 주안에서 싸워라, 그냥 혼자 싸우면 안돼요. 지가 장고입니까? 서부영화에 나오는 각 손가락에 권총 달려가지고 마지막에 승리하는 그런 황야의 무법자도 아니고 말이죠. 황야의 무법자 같이 모양새를 그런 모습을 하는 목사도 가끔 있긴 있어요. 누구라고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일부러 자유자 티를 내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렇게 자유자 티를 내면 마귀가 “어머머, 무서워라” 마귀가 도망갑니까?

사람이 뭔가 티를 내게 되면 티낸 자기를 이게 섬기는 수가 있어요. 갑자기 백화점에 가서 오백만원짜리, 육백만원짜리 옷에다가 오백만원짜리 가방에다가 50만원짜리 명품지갑 들고 나가게 되면 왠지 남을 의식할 수가 많아요. “저 사람이 꼴아보기는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 안 보는데. 지 자아도취에 빠져서 그럴 수 있다 말이죠. 그게 영적인 싸움은 아니거든요.

영적인 싸움은 우리의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남하고 싸우는 게 아니고 우리는 형체 없는 천사와 싸우려면, 사탄이 천사입니다. 우리도 형체를 안 쓰면 되는 거예요. 형체에 대해서. 아까 형체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일부러 남루하게 입으라하는 그런 뜻도 아니고 그냥 내 사는 목적이 어떻게 내가 남한테 영적인 사람이냐, 돋보이게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나, 이러면 신자처럼 보이지?” 그게 목적이 되어버리면 일곱 귀신 달라붙은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제사장 언약이라 하는 것은 항상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라도 지금도 가동되고 있다는 것. 엔진이 모양새가 투박하고 쇳덩어리로 되어있지만 거기 엔진에다가 휘발유 넣어서 해버리면 그 투박성은 엔진도 이쁘장한 자동차 몸체 자체를 시속 100Km 달리게 하잖아요. 활발한 활동력이 중요하지 우리는 하나의 껍데기의 투박한 엔진 몸체에 불과하고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활력을 일으키느냐가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 활력은 바로 우리의 활력이 아니고 제사장 언약의 활력이라는 것이 히브리서7장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활력을 일으키는지 봅시다. 23, 24절,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제사가 반복된다 이 말이에요. 전에 제사는 제사장이 있어서 숫자가 많은 거예요. 많은 숫자의 제사장이 하다가 늙어죽고 하다가 늙어 죽어도 다 모으면 다 집합시키면 숫자가 많잖아요. 이제는 그런 게 아니고 이제는 한 분, 예수님 한 분인데 한 분이라도 활동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이 계속 있으면 영원토록 그것이 엔진의 활동력이 계속되는데 그 계속된 기능이 뭐냐, 제사장 기능입니다.

제사장 기능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지요?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구원 앞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어떻게 구원한다고요? 온전히. 온전히 구원하죠. 이 온전한 구원을 믿지 못하게 되면, 인간은 그 다음부터는 헌금 어떻게 해야 되고, 기도는 몇 분해야 되고, 전도는 몇 명 전도해야 되고, 예배참석은 오전11시에 가야됩니까? 오후2시에 가야 됩니까? 저녁에 가야 됩니까? 성경은 하루에 몇 장? 이런 걸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온전함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안 믿는다는 그 모습이 이렇게 법으로 나와요.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규칙을 세우는 거예요.

인간이 규칙을 만들어버리면 이것은 마귀하고 싸움이 아니고 누구하고 싸움이냐 하면, 나의 완벽함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아~ 이런 우울증환자, 정신병환자들이 소위 복음 안다는 사람 중에서 굉장히 많습니다. 너무 너무 많아요. 그런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계속 사랑하고 자기 점검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까 이제는 복음이고 뭐고 복음 전하는 목사만 받고 이용할 생각을 해요.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을 안 드러내요. 자기 자신을 잘 드러내지를 않아요. 입을 딱 다물고 지켜보기만 하고. 그리고 자기의 우수함을 은근히 장착하고.

이 말은 참 계속해서 적용될 말인데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집안에 애가 둘이 있다고 합시다. 애가 둘이 있는데, 어버이날 되어가지고 큰 딸하고 작은 딸이 있다면 큰 딸은 어버이날 엄마한테 카네이션을 사서 달아드렸습니다. 큰 딸이 진짜 좋은 딸이라고 보고 그런데 둘째 딸은 음흉한 딸이라면 “언니, 꼭 카네이션을 해야 돼? 다른 백합으로 하면 안 돼?” “엄마가 작년부터 원해서 카네이션을 달아드려야 돼!” “그래? 아, 나는 돈이 안 되겠어. 카네이션 비싼데 다른 거 하면 안 될까?” 이리 한다는 자체가 지금 어버이날이 아니고 자기 뽐내는 날이에요.

어버이를 빙자한 지가 이만큼 훌륭한 딸임을 증명하는 날. 그래서 어버이 지나고 이틀 뒤에 오는 자기 생일날 어버이날 잘했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케이크를 더 큰 것으로 받아내고자 하는 그런 음흉한 계략을 갖고 있는 그런 딸. 예수님을 이렇게 잘 섬겼으니까 이 땅에서 남한테 기죽지 않도록 모든 경제적인 생활여건을 보장해 줄 거라고 믿는 그러한 신자도 아니면서 신자라고 가장하는 의외로 너무 많아요. 의외로 너무 너무 많습니다.

이게 저는 뭐냐 하면, 관심사가 다르다고 여기는 겁니다. 관심사가 달라요. 자기가 얼마나 지금 폼 있고 착하고, 성실하고, 거룩하게 생활하느냐, 여기에 갖고 있으면 그건 아주 못된 딸이에요.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무슨 말 실수했잖아요. 일주일동안 후회하고 있는데.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하나 쓴 게 있지요. 구원파가 못하는 것. 그거 상당히 중요한 글이에요. 왜냐 하면, 거기에 제가 뭐라고 썼는가 하면, 회개를 해야 이게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티를 낸다 하니까 그때부터는 죄를 지었는데 내가 깜빡 잊어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고 점에 대해서는 회개 못했기 때문에 구원을 제대로 못할 수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돼요? 안 빠트리고 죄 지은 것은 모조리 다 회개를 하려하니까 이게 얼마나 자기관리에 집중해야 됩니까?

관심사가 오직 자기를 철저하게 관리함으로서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와도 “야, 니 흠이 없네.” 하고 평가 받는데 온 평생의 신경과 정신을 거기다가 다 몰입시키는 거예요. 교회 나와서 인간 하나 버리는 게 쉽게 버리지요. 인간은 교회도 땅이건 그렇게 다 버려놨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인간들 다 버려놨어요. “아이고, 목사님 술 취했는데 회개하지요.” 태어난 자체가 실수에요. 실수, 당신은. 인간은 태어난 자체가 실수에요. 그게. 태어난 게 죄인으로 살라고 태어난 거예요. 죄 보여주라고 태어난 거예요. 태어나고 난 뒤에 자기관리 한다고?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도 방귀 꿉니다.

옛날에 어릴 때는 여자 담임선생님은 화장실도 안가는 줄 알았지요. 너무 순결하고 순수하니까. 진짜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요, 가까이 범접도 못해요. 그냥 멀리 보면 아우라가 빛이 왕~ 왕~ 음악소리가 들리며 빛이 막 나오는 것 같아. 저기서 오게 되면 천사가 걸어오는 것 같아. 하늘색 원피스입고 오게 되면 빛이 막 나는 것 같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있는데, 옛날에는 20대 중반에 그런 사람이 있었고 인터넷 발달로 해서 옛날에는 20대 초반, 10대 중반, 지금은 초등학교 1학년, 유치원 애들한테는 아직까지는 있어요. 진짜 천사가 있는데 유치원만 지나면 알 것 다 알아가지고 이제는 없어요.

결혼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결혼 자체가. 결혼 해놓고 하는 말이 결혼은 해야 되나? 결혼 꼭 해야 돼? 혼자 사는 게 이력이 난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은 이제는 지겨워. 딴방 쓰던지 이래야 돼. 혼자 사는 게 편하다니까요. 결혼해도 안 고쳐져요. 니는 돈만 벌어오고 나는 내 할 일 알아서 하고. 요새 젊은 사람들 그렇다니까요. 딩크족이 그렇다니까요. 진짜 지가 지 손으로 눈을 찌르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세상 전체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지 자기만 편하면 최고라는 거기에 완전히 매여 버렸어요.

결혼이란 뭡니까? 내 하나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게 오히려 반갑다. 이게 결혼이잖아요. 내 희생해서 저 사람이 웃을 수만 있다면 내가 얼마든지 희생하고 고생해 줄게. 이게 결혼이잖아요. 미쳤나? 요새 애들은 미쳤어요? 주례를 그리하면 이젠 겁나. 옛날에는 막 했는데. 주례 선생님 미쳤어요? 그런 사람 어디 있어요? 이런다고요. 그래도 주례는 그리 해요. 제가.

남자가 되었으면 자기가 벌어온 돈 가지고 여자가 행복하다면 그게 남자로서 그대 앞에 작아져도 남자의 행복은 바로 내 몸 살 깎아서 사랑하는 자를 아름답게 하고 더 행복해하는 그것에서 보람을 느껴야지 저 여자를 이용해서 내가 얼마나 더 이익이냐, 이거 따지면 남자가 아니라 했어요. 물론 여자 분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그겁니다. 예수님이 반복하는 게 그거에요. 내가 마귀와 싸울 때는 마귀하고 혈과 육으로 붙어서 싸우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 죽어서 기어이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기어이 뭘 얻었습니까? 밀알이 죽어야 생명을 얻잖아요. 생명은 이 땅에 안 나와요. 그리고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얻을 수도 없어요. 외부에서 생명이 와가지고 그게 하나 죽어야 돼요. 그러니까 마귀가 기어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못 알아보도록 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할 수만 있거든 아버지 뜻대로 그냥 장렬하게 죽으니까 비로소 그 생명이라는 게 있고 생명이 우물이 되어서 그 우물 옆에 생명이 있으니까 한 둘 붙어보니까 그게 그야말로 십자가 마을, 십자가 피만 먹고 사는 마을이 된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자기가 생명을 이미 바친 자라 하는 것을 호명해 준 거예요. 호명해야 나오지요.

그 호명 받은 사람이 누구 자랑하겠습니까? 지 자랑하겠습니까? 자기 관리 하겠어요? 나는 이것도 실수했고요. 저것도 실수했어요. 니는 처음부터 실수했어. 그런 소리하지 말고 어떤 실수를 해도 하나님만 주님만 있으면 온전합니다. 히브리서 7장 24절, 25절 말씀이에요.

누굴 힘입어? 온전하게 된다는 거예요? 자기를 힘입어. 자기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답답해하시는 거예요. 니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힘입으라는 말이죠. 나를 힘입으라는데 자꾸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관리하고, 어떻게 주님 잘 믿는 거예요? 지금 잘 한 거예요? 매일 자기가 자신의 종교적인 능력과 경건함에다가 힘입으려 하니까 좋은 것은 마귀만 좋다고 싱글벙글거리고 자기 종이니까 갖고 놀기가 쉬워요.

원래 점쟁이들이 그런 약한 사람들에게 돈 빼먹는 거 얼마나 쉽습니까? 요거 이야기하고 10분 쉽시다. 지금도 구원파가 우리 유 병언회장을 위해서 돈을 다 바치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일반사람들은 그 심리를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요. 자기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천국을 보고 싶은 거예요. 눈에 보이는 천국은 돈이 필요하거든요. 내가 돈 내는 것에 대해서 유 병언회장이 충분하게 보이는 천국만 만들어준다면 수련원 같은 거 있잖아요. 이상적인 공동체생활. 전 양자가 회장으로 있는 그 수련원. 그것만 해준다면 회장님 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갖다 바칠 테니까.

우리 눈에 띠는 우리 공동체. 이 공동체만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신천지고 그게 박태선이고 그게 바로 한국교회의 장로교고 침례교고 천주교인 거예요. 감리교의 예배당 큰 거 보세요. 다 그게 구원파하고 똑같은 거예요. 같은 이단들이에요. 자기가 낸 것을 자기가 찬양하고 싶은 겁니다. 순교하고 싶은 거예요.

큰 딸이 카네이션 달아줬는데 작은 딸이 카네이션 사왔거든요. 그런데 엄마는 큰 딸이 사온 카네이션만 달고 있으면 작은 딸이 얼마나 섭섭해 하겠습니까? 인증 샷 찍어가지고 큰 딸 보여주고 얼른 바꿔가지고 작은 딸 카네이션 달고 인증 샷하고 그럴 판이라.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서 다시 회수하는 식으로 자기의 영광 받고 싶은 겁니다. 자기관리하지 마세요. 주께서 다 압니다. 우리가 얼마나 허접스러운지.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이 나이가 들면요, 깜빡 깜빡 다 잊어버려요. 죄지은 거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그리고 내가 한 행동이 남한테 얼마나 피해주는가, 옛날 젊을 땐 따지기나 하지 요새는 따지는 것도 귀찮아. 싫어 그만. 횡단보도 그냥 건너가. 거기 아줌마! 하면 미안하오. 이것은 신앙하고 관계없이 육신이 그래요. 육신은 편한 데로 그냥 흘러가게 마련인데. 지난번에 횡단보도 건넜다고 1주일 금식했는데 그 다음에 늙어서 횡단보도 2번하면 14일 금식하다가 늙어 굶어죽는데. 어떻게 한다? 자기를 힘입어라.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음성은 “그러니까 나를 힘입어!” 이미 온전하게 구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8.♡.196.154)

14-05-17 16:02

안양20140509b-히7장26절(복사(카피)) - 이 근호 목사

24절 설명이 많이 필요합니다.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되어있지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에게는 힘이 안 나온다. 인간에게는 힘이 안 나와요. 구원의 힘이 안 나옵니다. 생명도 물론 안 나오고. 왜 그러느냐 하면, 제사장 숫자가 많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제사장이 평소에 제사를 드리고 양을 잡을 때도 이게 무슨 힘이냐 하면, “아이고, 이러다가 나도 죽지.” 이런 죽음의 힘으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옛 언약 그러니까 제사법이죠. 율법이죠. 율법은 결국은 사람으로 하여금 “니는 처음부터 죽은 자였어.”그걸 통고시키고 노출시키는 그런 취지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겁니다. 그 율법을 쥐고 말씀을 쥐고 복 받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이 기대하는 복 자체가 죽음을 취소할 수 있는 복이 아니고 그냥 죽음을 잠시 감추기 위한 데코레이션, 장식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면 여기서 생기는 것이 뭐냐 하면, 여기서 인간이 발생되는 것이 제사 지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닌데 옛날 사람은 그것밖에 못하는 거예요. 여기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무지함’ 사람이 잠시잠간 행복하잖아요. 그게 원래는 인간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날씨 너무 좋았고 오다 보니까 녹음이라든지 초록색 수풀에 그냥 성경공부건 간에 풀잎에 누워서 혼자만 있고 싶은 생각이 잠시, 센나케이 경상도 말로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 그거 하고 싶었어요. 그리 생각할 때, 내가 풀잎에 눕잖아요. 풀 좋다. 하고 눕는데, 이건 하나의 가상이에요. 어디서 할아버지가 와가지고 “아저씨, 지금 어디에 눕습니까?” “뭘 일인데요?” “지금 당신 누운 곳이 농사지어놨는데 내일 팔아가지고 애들 공납금 내려고 하는데 거기에 누우면 상품 못 파는 거 아닙니까?” 라고 할 때, 제가 예를 드는 겁니다. 나는 바깥 경치 좋아 눕고 싶다 할 때, 이게 뭐가 작용했는가 하면 무지지요. 알지 못함. 엮여진 관계 고리를 알지 못함. 인간은 엮여진 관계를 다 알 재주가 없어요.

따라서 자기는 무심코 한 모든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고 죄짓게 만드는 원인제공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죄를 안 지었어요? 죄를 안 진단 말입니까? 죄를 몰라서 죄가 아니지요. 죄인 줄 몰라서. 길에 가면서 담배피우며 갔을 때, 담배피우는 사람이 그 담배연기가 남한테 가는 걸 걱정하겠습니까? 안 합니다. 이게 무지에요. 담배를 피울 때마다 꽁초를 버리게 되면 이것이 환경오염 되는 것을 생각합니까? 그냥 아무데나 버리잖아요. 그걸 줍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뭡니까? 이게 무지지요.

특히 제가 그런 잔소리를 많이 듣고 사는데. 문 좀 살살 닫아라. 저는 살살 닫거든요. 후다닥 쿵닥 걷지 마라. 저는 그걸 알고 조심스럽게 문 열고 닫고 해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잠이 들락 말락 하는 그 순간에서는 작은 소리도 자기 꿈속에서는 큰 괴음으로 해석이 돼요. 이해가 돼요. 본인이 그런 컨디션을 생각 안하고 내가 문을 함부로 닫았다고 잔소리를 해댈 때, 이것도 무지지요.

남편이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가지고 그걸 억지로 참으면서 집에 들어가서 오늘 힘이 들어서 문을 쾅 닫았는데 그걸 보고 있던 아내가 “당신이 문을 그렇게 닫아버리면 고3인 딸이 영어한 문제 못 외우면 떨어지면 당신이 책임질래?” 이리 나온다면 그것도 무지. 내 사정을 남이 모르고 남 사정을 내가 모르게 되어있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똑같은 느낌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거 먹어 봐! 얼마나 맛있는지.” “얼마나 맛있는데?” “아, 이 남자한테 얼마나 좋은지 설명이 안 되네.” 남자한테 얼마나 좋은지 설명이 안 되지요. 그게 B급 광고라니까. “이 참외가 얼마나 맛있는지 설명이 안 되네.” “말하지 마! 내가 먹어보면 알지.” “별로네.” 사람이 죄를 안 짓는다고요? 그 말 하는 사람이 무지의 소치입니다.

제사장을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라고 한 거예요. 니가 제사를 잘 드리면 복을 받는 게 아니고 니는 죽되 다른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농사짓다 죽고 니는 제사하다가 죽는 거예요. 니가 제사하나 전도하나 헌금하나 봉사하나 강의하나 돌아다니며 설교하나 죽게 돼 있어요. 이게 죽어야 죽은 나를 의지하지 말라 말이죠. 죽는 자에게는 죽음의 힘 이외에는 우리를 죽이는 힘 이외에는 다른 힘이 안 나옵니다. 죽을힘을 의지하면 죽게 되니까 니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걸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수많은 제사장들을 차례, 차례 보내놓고 차례, 차례 다 죽여 버렸어요. 주께서. 도미노 게임 있잖아요. 하나 죽고 하나 쳐주면 엎어지고 또 엎어지고. 마지막에 엎어진 게 누굽니까? 예수님이 엎어지잖아요. 세례요한이 죽고 난 뒤에 마지막 엎어진 게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그러면 당황하지 말고 탁! 끝! 모든 게 끝나버렸어요. 그래서 그 시점에서 십자가 죽는 그 시점에서 모든 인간은 제사를 드리나 제사를 안 드리나 헌금을 하나 안 하나 간음 하나 안 하나 인간은 모두 처음부터 죽는 존재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데서 사흘 만에 누가 등장하니까 이제는 죽은 자가 “어? 저 분 살았네.”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왜? 계속 죽어있어야 되니까. 누가 살아났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먼저 살아나신 분이 성령세례를 통해서 탁 쳐줄 때, 뽀로롱~ 하고 깨어나야 돼요.

게임에 이런 게 있어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뒤 돌아볼 때, 움직이지 말고 있어야 돼요. 순례가 와서 어깨를 탁 쳐주게 되면 그 때 까불어야 돼요. 느껴야 돼요. 주께서 탁 쳐줄 때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냥 쳐주는 게 아니고 나를 힘입어 쳐준 자체가 너를 온전함에 되었다는 통보를 해줍니다. 통보는 명령이 아니고 통보는 그냥 통보일 뿐이에요. 너는 이제 논산훈련소 들어와! 그냥 통보하잖아요. 통보 자체가 천국에 들어와! 천국에 들어오는 자격자라는 뜻이에요. 이쪽에서 결제가 났기 때문에 통보해 주는 거예요. 이미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통보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전에 많은 죽음이 있었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여기서 진도 깊이 나아가 봅시다. ‘그러면 이제 구원 받았네. 그럼 됐네. 이제는 복음도 생각하지 말고 살면 되겠네.’ 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시면 구원론문제인데 구원론 문제하면 안되겠지요. 이것은 그리스도론 해야 되겠지요. 예수님이 탁! 치니까 생명을 얻었어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 하면, 23절에 보면, 제사장 숫자가 많다. 그리고 많은 제사장이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지요. 24절에 예수님이 영원히 계시지요. 25절에 보면, 자기를 힘입어서 온전히 구원되지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하면, 25절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힘입어 온전히 구원됐잖아요. 그러면 25절에서 26로 가지 말고 다시 24절과 23절로 가야될 임무를 지닙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이렇게 죽었구나. 아이고, 잘 죽었다. 나하고 관계없지.’ 아니에요. 관계있어요. 이미 구원받았잖아요. 구원받았으면 왜 우리는 우리 힘으로 구원 안 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23절을 가게 합니다.

여러분,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던 이유가 그들에게는 뭐가 특별히 있다고 자부했습니까? 자기 의가 있다고 했지요. 자기 의가 있는데 왜 자기보고 죄인이라고 하느냐 말이죠.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 생활을 해야 돼요. 아주 이상한 이야기가 되지요. 방금 제가 이상한 이야기했지요?

이미 구원 받았으면 끝났는데 왜 해야 되느냐, 구원론 입장이라면 안 해도 돼요. 그러나 성경은 구원론 중심이 아니지요. 구원론 중심은 누가 원하는가 하면,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요. “니 구원받고 싶지? 예수 믿어라.”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이게 구원파에요. 그러나 성경은 구원론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어째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피를 졌는가 하려면 우리는 내가 알아서 죄인입니다, 하고 지가 알아서 하지 말고 바리새인이 했던 그 행동, 그 태도, 그 방식, 마음자세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걸 우리 육신을 가지고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자복하게 하는 놀라운 그러한 고백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놀라운 고백이 나와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리고 이런 고백합니다. 나는 선하고 싶어도 내 안에 다른 법이 있는데 이것이 선한 나를 악으로 이기더라. 이런 놀라운 고백이 나와요. “목사님, 참 훌륭하십니다.” “훌륭한 게 아니에요. 훌륭하고 싶어도 내 마음은 그 훌륭보다 더 악하게 간주하는 그 훌륭하다고 내 자랑하는 그 죄악이 훌륭을 이깁니다.” “그러면 목사님 구원 못 받았나요?” “못 받은 게 아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지신 겁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만 증거 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예수님 욕했고 예수님 반대했던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 생활, 그 구약의 멸망했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 나의 역사로서 체험하고 경험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몰아넣습니다.

그런 근거가 있느냐,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 마태복음4장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공생애 나시기 전에 먼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갔지요. 광야에 왜 갔습니까? 거기에 금광이나 어디 거기서 차 경주대회 하려고 그 넓은데서 뭐하려고 갔습니까? 누굴 만나게 되어있지요? 마귀를 만나지요. 예수님이 왜 마귀를 만나지요.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를 만나면 되지 왜 마귀를 만납니까? 마귀 구원하려고 만납니까? 아니잖아요. 구원 아닌데 왜 만납니까? 우리가 이단도 아닌데 이단 속에 살면서 안 믿는 식구들과 함께 섞여 살면서 왜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그 사람들은 구원받을 생각도 없고 구원 받는 우리를 공격하는데. 왜 같이 이혼도 안하고 같이 살아야 되고 딸 호적에서 파라 소리 안하고 오늘도 밥해주고 교복 다려주고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마귀를 만나야 되겠어요?

예수님이 건져야 될 사람이 지금 어디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마귀한테 사로잡혀 있으니까 하나라도 그걸 건져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대신 카피(복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카피가 되어있어야 예수님이 저주받을 때에 바로 자기가 택한 백성의 저주도 이미 예수님이 저주받음으로 인하여 이게 해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대신죽음’이잖아요. 아주 깔끔하게 요만큼도 남아있지 않고 예수님이 용서해줘도 요 죄는 안 된다는 고 남아있는 죄마저 아예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걸 성령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데리고 그 작업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인자를 비난하고 욕해도 용서를 받을 기회가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은 오는 세계 영원토록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성령입니다. 최종적 작업을 해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 자체가 마지막 때에 오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예수님을 다루었던 그 성령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막장이 뭐라는 것을 경험케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막장이 뭐냐,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이 했던 막장이죠.

베드로가 했던 이야기에요.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나는 예수란 분을 저주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따라 나 따로 입니다. 따로 봐주세요. 예수하고 엮이는 거 나는 싫습니다. 나는 예수하고 무관하며 예수 죽든 말든 나는 살아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막장이에요. 사람이 성폭행하고 사람 때려죽이는 게 마지막이 아니에요. 사람이 살인을 해서 그것이 죄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내가 살인한 것은 내 조실부모가 나를 일찍 버렸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만들었다. 반드시 자기 핑계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궁극적인 막장이 뭡니까? 나는 예수하고 상관없습니다. 나는 내 따로 이고 예수는 따로 입니다.

나는 막장을 이미 예수님의 힘입어서 온전하게 되었음이 믿어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걸 경험케 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이미 나를 구원했고 나의 구주고 나는 주님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로 하여금, 만약에 내가 돌을 맞이한 아이라고 합시다. 바로 돌 잔치하는 아이인데 이런 쟁반에다가 성경 십자가 있고, 실 있고, 청진기 있고, 돈 있고, 나이 육십 넘어가지고 잠시 한 살 먹은 어린애라고 입에 엄마 젖꼭지 놀이기구 물고 잡아라, 잡아라, 하면 우리는 뭘 잡겠습니까? 십자가 잡겠습니까? 돈을 잡지요. 돈을. 의사의 목적이 뭔데? 돈. 아나운서 목적이 돈. 돈이 있으면 오래살 수 있고 돈이 없으면 일찍 죽을 수도 있고. 그 돈을 잡으면서 뭘 보자는 겁니까? 십자가를 보자는 말이죠. 십자가가 뚜렷하게 보이지요.

내가 십자가를 잡은 게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잡아 주심으로서 말미암아 제가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이 바로 내가 잡고자 하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날 때, 가장 십자가가 온전해지는 겁니다. 또 이 말 듣고 또 술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놓고 이 근호 목사 내 핑계대고 가장 나빠질 때, 가장 낮은 단계에 주님이 보이니까 주님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가장 나쁜 짓을 하자, 라는 로마서3장 이야기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 라는 것. 이미 우리는 뭘 해도 회개 안에 놓여있기 때문에 회개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가 계속해서 살고 있습니다. 계속 살면서 그러니 ‘온전히 힘입어’ 하는 것이 나한테는 힘이 안 나오지요.

다시 봅시다. 나한테는 힘이 나온다? 안 나온다? 나한테서는 절대로 구원의 힘이, 내가 정신 차려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나에게는 어떤 힘도 나를 구원하는 힘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직 주님만 힘입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대고 온갖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고실험, 생각해서 하는 모든 실험을 백날 해봤자 그 사고실험은 하나의 가상으로 다 끝나 버리고 실제 삶이 지금 우리에게 주님이 실험하는 실험이니까 따로 상상하지 마세요. 실제 살아가는 자체가 이미 실험하고 있는 중이니까 따로 내가 사고실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5절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라고 되어있지요. 여러분이 어려울 것 같아서 쉽게 하게 되면, 23절, 24절을 거친 사람은 비로소 25절이 어떻게 됩니까? 환하게 밝지요. ‘아, 우리 조상이 그래서 죽었구나! 그래서 그 양반도 죽고, 내가 보기에는 훌륭하던데 훌륭한 그 분도 죽는 이유가 오직 예수님만 보이라고 그렇게 했구나!’ 그걸 다시 한 번 23절로 갔다가 다시 25절로 오니까 기쁘지요. 이걸 매일같이 시킨다고요. 우리로 하여금 하루 일과가 이 생활이에요. 23절에서 시작해서 25절로 끝나는 생활. 매일같이.

예를 들면, 내가 SK팀을 좋아한다. 요번에 SK우승해야 돼. 매일 삼성이 우승하니까 SK우승해야 돼. 해가지고 딱 보니까 세상에 8회 말까지 4:0이라. 오늘 삼성한테 이겼어. 그런데 9회 초에 삼성에서 5점내어서 5:4로 역전되어 버렸네. 그 때 이게 뭐야? 하고 인상 찡그릴 때, 그게 23절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구원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미쳤어. 미쳤어. 내가. 아무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는 것에 대해서 관심사가 프로야고에 쏟다보니까 갑자기 복음의 광채를 놓쳐버린 거예요. ‘아, 일부러 지게 하신거야. 내가 목적 걸고 이것만큼은 돼야 됩니다.’라고 여겼던 그것을 아주 주님께서는 와장창 깨지게 만들어서 니가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일이 매일같이 일으킵니다. 따로 실험하지 마세요. 공부 잘해서 4년제 장학생 했는데 가가 또 이상한 남자를 만나가지고 속을 썩이는데 내가 그 애만큼은 잘될 줄 알았는데 아이고, 또 엄마를 실망시키네. 그러면 뭡니까? 목적이 뭐였어요? 갑자기 목적이 주님이 아니었고 내 마음속에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들통 나면서 23절, 24절, 드디어 25절, “그래도 괜찮아.” 이게 25절이거든요. 딸이 바람피워 이상한 남자만나 살림 차려도 “그래도 괜찮아.” 이리 되는 거예요. 아, 매일같이 그런 일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이것만큼은 안 됩니다.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만큼은 양보 없습니다. 이건 일곱 귀신 다 달려들어요. 그게 마귀의 시험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주님 아닌 것에 목적 두고 목적 깨지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를 이렇게 역사하고 인도해주십니다. 범사에 감사를 안 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에.

26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제사장만이 거룩하지 다른 사람은 거룩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나는 거룩하지 않고 악이 있고, 나는 더럽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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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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