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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0502b 출애굽기 32장 울산 강의 녹취(한윤범 목사님)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40502b 출애굽기 32장 울산 강의 녹취(한윤범 목사님)

이름 : 관리자(IP:119.18.90.53)

20140502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행진을 멈추고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시간에 좀더 난해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행진이 멈추고 난 뒤에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애굽에서 나온 것을 자기 역사에서 순서가 옛날에 애굽에 살았다, 과거. 지금은 광야를 걸어서 시내산에 도착했다, 현재. 시작이 애굽부터 했거든요.

그런데 시내산에서 시작을 바꿉니다. 애굽이란 장소가 시작이 아니고 시내산 자체를 시작으로 보는 겁니다. 시내산을 목적으로 봐요. 시작이 그곳이고 목적도 그곳이고. 십계명 주는 것이 시작이고 십계명의 완성되는 것이 끝이고. 그건 누구 입장이냐 하면, 말씀을 주신 하나님 입장이란 말이죠. 사람의 입장은 애굽에서 몸 있고 살았으니까 가축과 재산, 모든 것을 잘 누릴 수 있는 확장시킬 수 있는 복 받는 그곳에 가서 옛날처럼 다시 사는 게 이스라엘은 또 인간으로서의 목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목적과 이스라엘의 목적이 일치가 되질 않습니다. 일치가 안 되는데 어떻게 동행이 가능하냐? 그 문제를 두 번째 시간에 살펴봅시다. 수평적이란 말은 애굽에서 홍해 건너왔다. 광야, 시내산, 뭔가 미지의 약속의 땅, 그들은 아브라함 언약에 보면 가난안 땅이라고 알고 있죠.

열 족속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시내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을 줌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시작이고 마지막도 말씀의 세계로 돌아가야 된다. 그러면 이쪽은 수평적이고 이것은 수직적이고. 수직을 고집하시는 분과 수평을 고집하는 인간들과 어떻게 동행이 되느냐 말이죠. 동행이 항상 삐걱거리지요. 그 삐걱거림이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사기 1장에 어른들이, 옛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애굽 군대를 물리치고 홍해를 건너게 해서 우리는 이 땅에 왔다. 기적적으로 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라고 하니까 자식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안 봤습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못 믿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해요? 못 봤으면 성지순례 가서 홍해에 가자. 홍해 가면 어떻게 할 건데요? “홍해야, 열려라!” 홍해가 자동문입니까? 열리게. 하나님께서 홍해와 동일한 능력을 행하여 그 능력이 놀랍게도 홍해가 갈라지는 게 아니고 주변에 있던 이방민족들이 갑자기 쳐들어오는 기적을 베풀어버립니다.

홍해가 앞에서의 난감함과 자기보다 강한 적들이 오는 난감함이 둘 다 하나님의 본래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직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평적인 데다가 주입시키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양쪽 다 인간의 능력과 아이디어로서는 대처가 안 되는 식으로 주어집니다. 그걸 ‘표적’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담겨 있는 원칙과 원리를 반복시킨다는 게 표적이에요.

가나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 되는 것이 표적이지요. 그게 이적이 아니고 표적이 되는 이유는, 결혼식에서는 포도주가 필요하지만 예수님 때에는 물 같은 인간이 포도주로 변하는, 천국에 가는, 새 언약이 함유돼있는 존재, 천국 백성 만드는 그때를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일어난 일을, 목적은 따로 있고 그걸 예고편으로 잠시 보여주는 걸 표적이라고 합니다.

내가 보일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말은, 요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잖아요. 요나의 표적을 대전에서 이렇게 강의했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져 넣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죽은 걸로 간주되지요. 요나도 그렇게 알았고. 그런데 요나가 물에 빠졌을 때 죽어야 되는데 안 죽잖아요. 이게 깊은 의미가 있어요.

우리에게 진도 바다는 사람 죽이는 곳이고 안산은 땅이니까 산 곳으로 보잖아요. 울산은 살고 공동묘지에 간 사람은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게 문제성이 있는 인간들의 제한된 한계에요. 잘못된 생각이라고요. 죽어도 산다는 것은 현재 우리 이성과 감각으로는 수용이 안 돼. 주 안에 있으면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아있어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그 증거가, 예수님이 살았어요, 죽었어요? 지금 살았잖아요. 눈에 안 보이지만 살아계시잖아요.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처럼 엘리야도 살아있고 모세도 살아있는 거예요. 변화산에 나타났으니까. 그러니까 교회 와서 살려달라고 하면 안 되고, “죽어도 산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이래야 되지요.

어떻게 하든 월급 더 받아서 살게 하옵소서. 지금 통장 빵구나고 부도나겠습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러지 말고 부도나든, 암에 걸려 죽든 그것이 곧 산다는 것을 제가 알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쉬는 것이고 영원한 상태에 돌입됨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걸 이야기하는데 사사기의 젊은 사람들은 이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아버지나 그렇게 믿고 우리 젊은 사람한테는 안 통합니다.

나는 무지무지하게 긍정적으로 했는데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십니까? 네가 본 긍정이 뭐고? 그건 돈 잘 버는 거잖아요. 돈을 가진 자는 돈으로 망하고, 힘을 가진 사람은 힘으로 망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잖아요. 그 목적이 우리를 힘들게 해요. 목적이 없을 수 없으나 특정 목적을 가진 순간 그때부터 졸지에 그 목적의 종이 돼버려요. 일곱 귀신 다 달려듭니다.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 심지어 굿하란 소리까지 나옵니다. 어떤 목적에 매이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그 목적의 노예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가정을 화목해. 그때부터 목적에서 놀아나는 사람이 돼버려요. 살아야지 하면 마귀의 종이 돼버립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 말씀처럼 죽기를 무서워서 종노릇한다는 말이 그 말이거든요. 얼마나

안산 사람들이 또 한국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했으면 살려내라고 데모를 하겠습니까? 살려내라고, 돌아오라고. 돌아오면 안 돼요. 왜냐하면 천국으로 가야지 왜 지옥으로 되돌아옵니까. 여기에 말씀이 있습니까, 천국이 있습니까? 여기는 자본주의밖에 없는데. 왜 그 아이를 고생 더 시키려고 합니까? 그 순박한 아이를. 괜히 안산에 살아서 더 지옥 백성 만들고. 모든 사람들이 평소에 교회마저도 전혀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통 난 사건이 이번에 배 빠진 사건입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줬어요.

믿기는 개뿔을 믿어? 자기를 위해서 교회 다녔고 우상 숭배자였지 자기 잘되는 게 목적이 아니고 말씀대로 그대로 이뤄진 것에 대해서 감사가 나오면 참 잘하셨습니다. 사람이 언제 마지막 감사가 나오느냐 하면, “주여,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그 순간 진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순간입니다. 다이어트 한다고 약 먹고, 운동하고 요가해도 안 되고, 뱃살 빼려고 했는데 엉뚱한 살이 빠지고, 아무리 해도 안 될 때 마지막 외칠 것은,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하는 게 최고의 좋은 응답이에요.

왜냐하면 죽게 되면 다이어트라는 목적도 같이 날아가잖아요. 그러면 일곱 귀신이 없어져버리지요. 아이가 애 먹일 때 둘이 약 먹고 죽자. 우리 어머니가 젊을 때 그런 이벤트를 벌였어요.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실은 소화제였어요. 소화제로 협박을 했는데. 진짜 믿음 좋은 자식 같으면, “어머니, 이제야 저한테 축복이 임했군요.” 하고 같이 죽자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우상숭배자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하지요. ‘잘못했어요.’가 잘못 된 거예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이게 잘못된 거예요. 결국 일단 살고보자가 항상 우리 삶의 밑에 깔려있으니까 제가 아까 인간은 날 때부터 고장 났어요. 고장 난 것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고장 난 걸 받지 않고 자꾸 고장 났음을 드러낼 뿐이고 드러냄으로써 고장 안 난 분이 누구냐?

그분 덕분에 주 안에서, 주님이라는 보자기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이 세상의 원리는 그런 게 없어요. 각자의 공로가 있어야 공로를 근거로 구원받는 방식이에요. 얼마 전에 끝난 기황후란 드라마 보니까 나오는데 기씨가 황후가 되고 난 뒤에 대승상 탈탈이고 전부 다 한 가락씩 공로가 있어서 같이 영광 받잖아요. 거기에서 출애굽, 해방돼야 됩니다.

뭔가 한 게 있을 때 복을 받는다는 것, 예수 믿는 공로가 있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의 이론이에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으면 치매 걸리면 지옥 갑니다. 언제 구원받았는지 물으면 안 돼요. “아저씨, 언제부터 치매 현상 있었습니까?” 이걸 물어야 돼요. 사람이 어떤 논리를 남한테 적용하기 전에 본인한테 적용시켜야 되거든요.

구원파의 논리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만 구원되기 때문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는 거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은 구원이 없기 때문에 짐승만도 못하니까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논리잖아요. 그러면 그 논리를 적용시키려면 구원파가 여의도에서 시위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유병언이 교주가 아니고 예수가 교주라고 했잖아요.

참 이 사람들이 바보야. 그러면 경찰이 와서 그 사람들은 쏴 죽일 때 그 사람들은 경찰에게 고맙다고 해야 돼요. 왜?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환영받아서 십자가 졌습니까, 밉상받아서 십자가 졌습니까? 주님께서 밉상 받아서 십자가 졌잖아요. 그렇다면 그 길을 가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들이 구원파에 대해서 욕을 할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지요. 그러면 여의도 KBS 앞에서 데모할 때 즐거워서 했습니까?

결국 힘을 어떻게 모으느냐. 이 세대는 힘의 세상이니 우리도 힘을 가지자. 두세 사람은 싫다는 거예요. 수천 명 돼야 어느 정도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빌딩도 있어야 되고 예배당도 커야 되고. 뭔가 힘을 갖기 싶어서 예수를 팔아먹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는 우리에게 힘을 주는 존재라서 예수 믿는다. 그래서 예수님이 교주다. 이런 주장밖에 안 됩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 구원파만의 이야기겠어요?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좋은 게 아니고 예수님이 가져다준다는 그 힘이 나로 하여금 빛내게 한다는 희망과 포부 때문에 사람들은 힘을 얻기 위해서 모여드는 거예요. 여기는 힘도 없고. 그 다음에 우리가 볼 것은, 수평으로 가는 사람들과 수직으로 가는 하나님 사이에 어떻게 동행이 가능한가? 이것만 있으면 돼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이겁니다.

드릴이지요. 드릴의 용도는 구멍을 뚫는 거예요. 꽉 차있는 공간에 구멍을 내면 뻥하고 뚫리지요. 이것은 숫자로 하면 1이 아니고 0이 돼요. 없음이 되지요. 하나님께서 창조 때 원리가 먼저 있고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걸 없는데서 만들었고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게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없는 것을, 그리고 죽은 것을 드릴로 구멍을 뚫는 거예요. 다시 동행하는 방법이 뭐냐?

그들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을 뚫는 겁니다. 그게 어린양의 희생, 피 제사입니다. 잠시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이게 식빵입니다. 식빵이 덩어리거든요. 이걸 나이프로 자르면 얇게 떨어지겠지요. 그런데 식빵 속에 잼이 관통해 있다면, 식빵을 자르면 잼이 지나간 흔적이 나오겠지요.

잼이 4종류라면 네 종류의 잼이 나오겠지요.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식빵이라고 보고 주님께서 계속 동행하시면서 칼로 잘라내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있던 원리와 원칙이 관통하고 있거든요. 이 관통한 것만 끄집어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걸 뽑아내야 성경해석이 돼요. 여긴 동일한 원리가 흐릅니다. 동일한 원리는 아까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주님만의 고유한 목적이 있어요. 그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생긴 자로 하여금 영광과 찬양을 돌리게 하는 목적이 있어요.

그리고 죽은 자를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누가 저렇게 살려냈어요?” “내가.” “감사합니다.” 성도로 하여금 나는 죽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늘 새기는 잼을 항상 이 앞에 남겨두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리원칙, 드릴로 구멍을 뚫어서 집어넣는데 구멍 뚫기 전에는 100% 자기의 수고와 노고입니다. 이 교육관 짓기 위해서 내가 집을 팔아서 전세금 빼고 헌금했습니다. 어떤 장로는 맨날 기도하면서 주차장 넓히는데 돈 바쳤습니다.

어떤 목사는 처음에 교인 20명이었는데 지금은 이천 명 되었습니다. 그동안 새벽기도하고 기도원에서 특별 기도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이걸 노골적으로 이야기 안 해도 뭔가 건드리면 나오게 돼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피아노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피아노 만지는 걸 유독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피아노 바친 사람이에요. 이런 모든 것이 결국 자기 폼 내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한테 헌신한 겁니다. 그게 고장 난 인간의 특징이거든요.

피아노를 바쳤는데 어느 날 도둑맞았을 때 누가 가슴이 뚫리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심드렁하지만 누가 아프겠어요? 구멍 난 것처럼 누가 총알 맞았어요?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비어있는 느낌, 이게 은혜 받은 거예요. 아이를 잘 키워서 딸이 시집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축하한다고 하는데 신랑 아버지는 하루 종일 찡그리고 있고, 신랑 엄마는 화장 예쁘게 해서 활짝 웃고 있고 있을 때 인상 좀 피라고 말하거든요.

뭔가 구멍 난 것처럼. 내가 수고한 것도 없어요. 내 수고가 다 날아간 거예요. 그동안 내가 믿었던 것은 예수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역사를 믿었다. 나의 애씀과 내 공로가 마일리지처럼 쌓여 있는 그것을 교회라는 이름을 빙자해서 차곡차곡 쌓고 있었던 거예요. 지옥 갑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거기에 구멍을 내니까 다메섹에서 사울이 예수를 만날 때 “네가 핍박하던 예수다.”

그게 십자가의 반복. 십자가는 죽은 자도 살려내기 위해서 너는 먼저 죽은 자여야 한다. 따라서 이 구멍이 없을 때 철저하게 이 자리는 내 공로, 내 이름, 내 영광, 내 자존심으로 차 있어라. 그게 평생 그렇게 사는데 성령이 와서 구멍을 팔 때 그 속에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영을 집어넣으면 이 사람은 주 안에서 관통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격이나 관계없어요. 누구나 구원받은 사람은 똑같은 거예요.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 누가 있으며 부하거나 똑똑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못난 자를 택하사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심이라.

방금 이야기한 것은 신약이고 구약은 어떻습니까? 구멍을 파는 것은 언약이라고 하고, 언약은 보따리인데 풀어보면 성부와 성자 사이에 창세전에 이미 결정 난 내용입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결정된 내용들이 언약에 있거든요. 창세전이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나기 전입니다.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선악과 따먹어야만 했던 거예요. 인간이 따먹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왜 사느냐? 죽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왜 죽어야 되느냐? 죽어야 선악과에 심어놓은 취지가 살기 때문에 그래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선악과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잎사귀에 혓바닥대고 독이 올라야 돼요. 누구 하나는 깃발을 들고 해야 돼요. 우리가 울산에서 사는 것은 이렇게 죽는 것이 처음부터 죽어야 되는 거구나. 사람은 다 죽어요. 다 죽으면 천국 가느냐? 그게 아니고 죽을 때 죽음의 의미가 숨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성경과 결부된 죽음이 나에게 현실로 주어졌다고 오는 거예요.

인간은 역사거든요. 인간은 역사를 현실로 보는 겁니다. 현실, 역사에 구멍을 뚫는다는 것은 묵시, 역사를 초월한 창세전의 내용이 역사 속에 담길 때 어떤 경우에는 홍해가 갈라지고 어떤 경우에는 요단강이 멈추고. 인간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가능성과 수고를 총동원해도 안 되는 장벽을 주시는데 그 장벽의 해결은 내 식대로 안 되는 거예요. 사무엘 시대에 금식해서 블레셋을 이겼지요.

사울이 그걸 봤단 말이에요. 보니까 역사가 돼버렸어요. 그 다음에 사무엘이 오지 않을 때 사울이 금식하고 제사 드려서 블레셋을 이겼습니까? 졌잖아요. 전에 이렇게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 그 기도 또 해보세요. 그건 이미 역사가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뜻이 이루어지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걸 간단히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기도를 하게 하셔서 듣지 않음을 알아야지 기도하지도 않고 기도 안 들으니까 안 하는 것은 자기 역사가 들어갔어요. 교묘하게 빠져나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사람은 답답하면 기도하게 돼있고 한 맺히면 하게 돼있어요. 할 때는 꼭 응답되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내 뜻대로 안 되고 주의 뜻대로 되게 하는데 그 뜻이 기도하기 전에는 예상치도 못한 큰 기쁨과 세상으로는 얻을 수 없는 하늘의 은사를 받아야 알 수 있는 큰 만족을 주십니다.

그런 만족이 있을 때 모든 일에 감사가 되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희망사항이 나옵니다. “주여, 이 참에 저를 데려가셔도 저는 동의하겠습니다.” 그런 응답은 자주 받는 게 아닌데 큰 구멍 나야 응답이 와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목적을 없애려고 백날 해봐야 안 됩니다. 잠 안 올 때 양 헤아려봐야 양 오만 마리 세다가 깨거든요. 그래도 양 수는 세야 돼요. 내가 왜 잠을 자려고 하지? 내가 살기 위해서? “그렇지 내가 사는 자체가, 내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욕심이었구나.”라는 걸 알면 그때부터 잠 잘 옵니다.

“오늘밤에 데려가주시길.” 이러면 저절로 잠 잘 와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은 주 안에서 주님 십자가에 동참할 때나 있을 내용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구멍을 뚫고 거기다 말씀을 넣어주게 되면 말씀이 있는 그 자체가 우리가 멀리 안 가도 약속의 땅에 안 가도 이미 목적이 달성된 거예요. 안 가도 광야에서 죽어도 그 사람은 천국 갑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와도 하나님이 구멍을 안 뚫어주면 약속의 땅이 애굽 땅이 돼버려요. 내가 아파트 평수만 넓게 해주신다면 행복하겠습니다. 그래봐야 난방비나 더 들어가지. 아파트 좁을 때는 생각도 못했잖아요. 사람이 한 번 맛을 들이면 인간 버려요. 큰 차타고 다니면 작은 차를 타면 죽고 싶어요. 내가 벤츠 타다가 모닝을 어떻게 타나. 갑자기 좌절감 느낀다고요. 그만큼 인간은 문제가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벤츠를 타시되 주께서 구멍을 내주시면 벤츠 열 대 있어도 괜찮아요. 벤츠 모으는 게 취미라고 할 수 있는데 구멍이 나 있어야 돼요.

내가 벤츠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십자가 때문에 산다고 하도록 성령께서 동행을 해주신다니까요. 이건 우리가 부른다고 오는 게 아니고 동행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가잖아요. 내가 자살해서 죽는 게 아니고 동행하시기 때문에 죽이신다고. 죽이시는 이유를 알면 동행자를 발견이 돼요. 눈치 챌 수가 있어요. 살리려고 죽이시는구나. 죽이려고 죽이는 게 아니고.

그 다음 이야기해봅시다.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지금 하나님과 모세가 장난치는 것 같아요. 아이가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일부러 엄마, 아빠가 짜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보, 저렇게 애를 먹이니까 집 나갈까?” “당신이 나가면 밥은 누가 하고.” 그러면 아이는 순진해서 잘못했다고 나오잖아요.

그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야. 이 백성이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다 죽이겠다고 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그러면 애굽에서 건져낸 취지가 없잖아요. 그러면 백성들 욕하는 게 아니고 그들을 구원해내신 하나님 실력이 모자란다고 실컷 구원해놓고 하나도 안 남겼다면 어지간히 실력 없다고 욕 얻어먹으면 안 되잖아요.” 이 대화의 모습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모습입니다.

지금 구멍을 뚫어놓고, 구멍 뚫는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몸만 나왔고 모든 것은 애굽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거기에 구멍을 뚫어서 수직적으로 말씀의 완성을 심어주지 아니하면 그들은 지금 죽어도 천국은 못 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할 수 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도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할 때 참 궁금한 게 있어요. 그 이야기할 때 제자들은 잠을 잤잖아요.

들은 사람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나오거든요. 누구한테 베껴서 기록했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할 때 제자들 다 잤는데 어떻게 알아서 요한복음 17장에도 기록돼있지요? 하여튼 중요하지 문제니까 넘기고.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안 마셔도 일이 성사되게 하옵소서. 그런데 그 말을 할 때 장난삼아 했습니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는 간절히 기도했지요. 그런데 “역시 안 되겠지요. 내 뜻 접으시고 아버지 뜻대로 실행하시옵소서.”라고 하니까 그 후에 가룟 유다 앞세워서 체포했지요. 그 대목을 보게 되면 뭘 느끼느냐 하면 예수님도 막판에 빼느냐 이 말이지요. 그전에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단 말이지요. 별에서 온 그대도 아는데 주님이 모를 리가 있어요.

이미 결말을 알면 신나게 죽으면 되는데 어떻게 할 수만 있거든 식의 말을 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혼자 연기하는 것처럼 하시는 거예요? 방금 제가 문제를 낸 자체가 문제인 이유가 있어요. 사람은 본인에게는 문제가 없고 내가 앞으로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될 이냐는 것은, 내가 흉내 내고 모방해야 될 모델케이스를 대상으로 설정할 경우가 있어요. 나는 저분과 비스무리하면 구원받는다는 모델이 있다니까.

예를 들어서 이건희 회장이 골프 칠 때 나도 골프 치면 회장이 될 수 있다는 작은 연결고리라도 사람들은 찾고 싶어 하는 거예요. 큰 교회가 있는데 같은 목사라면 저 교회가 부흥된 뭔가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덕지를 찾는 거예요. 그게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 자체는 문제가 없고 문제없으니까 완벽한 주님을 따르면 우리도 주님처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주님 쪽에서 먼저 문제 있는 존재로 우리에게 자기가 시범을 보인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보세요. 자기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드렸잖아요. 그러면 심한 통곡과 간구를 안 하면 구원 안 되는 겁니까? 구원되잖아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할 필요 없다고 하잖아요. 주님께서 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지를 앞장서서 노출시켜요.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는데 주님은 반대로 역으로 너한테 이런 문제가 있다. 어떤 문제? 바로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 뜻을 중시시켜주시고 내 편한대로 할 수 없느냐는 그 뜻이 우리한테 이미 내장돼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날 흉내 낼 생각하지 말고 너의 문제를 끄집어낼 생각이나 하란 말이지요. 주님 예정돼있는데 구원받겠지. 그것은 우리가 어떤 내용을 안다고 자부하고 뭐가 빠졌어요? 심한 통곡과 간구 같은 것이 빠져버렸지요. 그리고 “주님과 나와 짜고 치는 고스톱인데 우리 같은 편이잖아요. 빨리 구원해주소서. 불편한 건 싫으니까 편하게 갑시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신 주님 앞에서 할 소리냐 말이죠.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게 싫고 나는 내 뜻이 우선입니다.”라는 그러한 것을 우리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식하라 이 말입니다. 예수 믿고 뭘 믿고 하지만 역시 나는 나 잘난 것이 최고고, 나 편한 게 최고고, 나의 행복이 마지막 나의 목적입니다. 이걸 감추지 말란 말이지요.

그리고 주께서 “내 뜻대로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간곡히 기도할 때 기도를 뭐로 받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내 편한대로 사는 그것을 아버지 뜻에 굴복해서 접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때려죽여도 못 해요. 따라서 우리는 나만 편하고 나만 구원받으면 장땡이고 예수님이 죽든 말든 아프든 말든 눈물로 통곡하든 말든 나만 헤헤거리며 다 됐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죄인 됨을 예수님의 십자가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파악해야 됩니다. 파악만 하면 됩니까? 아니지요. 실습을 시켜요.

진짜 통곡과 눈물을 쏙 빼놓는 드릴로 구멍 파는 작업이 나옵니다. 나는 이 아이 없으면 죽어버립니다. 하나님이고 교회고 이 아이 때문에 교회 갔지 이 아이 다치고 아프면 하나님 안 믿을 거예요. 눈물과 간구를 할 수밖에 없고 그야말로 새벽기도 나올 수밖에 없고 혼자서 기도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새벽기도하면서 어쩌란 말입니까, 지옥 가란 말입니까? 할 수도 있는 문제란 말입니다.

교회 안 오더라도 집에서 혼자서 눈물로 기도 안 했겠어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고 뭐고 내 편한 게 최고에요. 이게 바로 육신입니다. 육신을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신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장하지 마세요. 포장하지 마세요. 주님한테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이 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디즈니랜드 미키마우스에 이런 게 있어요. 미키마우스가 소풍 간다고 예쁜 옷 입고 가는데 그 쥐를 잡아먹겠다고 못된 고양이가 쫓아옵니다. 뒤에서 이제 잡았다고 물려고 하니까 미키마우스의 알맹이 쏙 빠지고 모자와 옷은 공중에 떠있지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는 우리가 꾸민 것을 공중에 떠있고 육신만 잡아당겨서 너 같은 죄인을 위해서 용서하러왔다고 예수님의 피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에 스냅사진으로 찍는데 찍기까지 우리는 내가 그동안 좋아했던 것, 나의 전부라고 여겼던 것, 내 자존심이라고 했던 것이 구멍 뚫리는 아픔이 십자가의 아픔에 동참하는 그런 일들이 앞으로 수시로 일어나게 될 거예요.

안산에 많은 학생들이 죽었을 때 이근호 목사 말 들으니까 사람은 처음부터 죽게 돼있는데 뭐. 그런데 보니까 내가 아는 누구누구라면 갑자기 이해관계가 되니까 그 아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1등을 안 놓치던 아이인데 이러면서 조금 전까지 자기와 관계없다고 죽든 말든 하다가 자기와 연관되니까 갑자기 흥분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식빵에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의 자존심을 구멍을 뚫어서 거기에 예수님의 피를 관통케 해서 피로써 흰옷 입고 천국 가게 하려고 지금도 동행해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설친다고 구원될 문제가 아니고 기다리기만 하면 날마다 우리 뜻대로 안 되는 난감한 사태가 자꾸만 일어납니다.

그럴 때마다 동행하시는 주님의 솜씨인 줄 알고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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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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