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02a 출애굽기 32장 울산 강의 녹취(한윤범 목사님)
20140502a 출애굽기 32장 울산 강의 녹취(한윤범 목사님)
이름 : 관리자(IP:119.18.90.53)
20140502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행진을 멈추고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2장 할 차례입니다. 19장부터 계속 내려온 이야기인데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을 하다가 멈췄어요. 여기서 중요한 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가서야 멈추게 돼있지요. 그런데 왜 약속의 땅에 가기도 전에 멈춥니까? 휴게소에 들린 거예요? 너무 힘드니까 잠시 휴식하는 겁니까?
그들의 행진이 멈춘 것은 말씀을 받을 자리에서 행진을 멈췄습니다. 그 말은 말씀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가봐야 약속의 땅에 못 간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몸만 가면 되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사람 자체가 바뀌어야 돼야 되는 거거든요. 중간에 들러서 말씀 받고 말씀의 사람이 될 때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사람들이 보통 교회에 찾아오는 걸 보니까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힘들지 않는 상태로 바꾸고 행복은 가운데 들어가기를 바라거든요. 그러면 뭐가 빠졌어요? 하나님의 말씀, 약속, 언약들이 없는 채 고생 되게 했는데 이제 죽어서 편한 곳에 간다고 하잖아요. 이번에 진도의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헌화할 때 주된 멘트가 뭡니까? “이제는 편히 쉬소서.”라고 하잖아요.
말씀이 없이 편히 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준비된 약속 없이 편히 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으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에요? 안 되거든요. 베드로가 따라온다고 할 때 너는 올 수 없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처소가 마련되지 아니하면 못 가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베드로한테 뒤늦게 이야기했다고. 처음부터 이야기했으면 안 따라 갈 수도 있었는데. 목숨 내놔도 못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국이 뭐예요? 죽어도 못 가는 나라에요.
요한복음 13장에. 그러면 죽어도 못 가니까 역시 살아서도 못 가요. 그러니까 아예 못 가는 거예요. 천국은 아예 못 간다는데 교회에서는 간다고 하니까 둘 중에 누구 말이 맞습니까? 하나님 말이 맞고 교회가 사기 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들이 교회에 왜 오느냐? 인생이 너무 고생스러워서. 고생이 쌓이면 한이 되고,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한 정도는 풀어 주리라 생각하고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낙을 보자. 그건 종교잖아요.
인간이 성령 받고 안 받고 간에 모든 인간은 다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데 인간이 상상한다고 그게 천국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구태여 올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와서 새삼스럽게 정보를 제공할 필요 없어요.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잖아요. 힘든 세상 빨리 끝장내고 죽어도 천국 오너라. 이것 개나 소나 다 아는 이야기인데 뭐 때문에 주님께서 수고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는데요. 다니엘에 부활 이야기 나오지요. 에스겔에 부활이야기 나오지요. 죽어서 좋은데 간다고 바리새인들은 믿었고 사두개인들은 안 믿었고. 믿던 안 믿던 중요한 것은 그거에요. 지금은 고생이지만 나중에서는 낙을 본다. 이건 인간의 기본적인 소망이고 희망이잖아요. 희망 품는다고 천국 간다?
이 세상에 희망 안 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럼 애초부터 지옥이라는 것은 없어야 됩니다. 지옥이 없다는 말은 아예 심판을 하지 말아야 돼요. “네가 인간이냐? 조금만 기다려라. 다 보내줄게.” 정말 좋은 하나님이고, 정말 사랑이라는 말을 하려면 차별이 없어야 됩니다. 조금만 고생해. 하지만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천국에 보내야 좋으신 하나님이에요.
만약에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지옥에 보낸다면 천국 가는 사람에게는 좋으신 하나님이지만 지옥 가는 사람은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과 인터뷰할 때, “하나님 좋지요?” 하면, “좋겠냐. 지옥 갈 볼래? 좋은 하나님인지.” 우리가 지옥 가서 영원히 불구덩이에서 고생할 세상에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 말이지요.
우리가 아주 별 볼 일 없는 인간인데 갈굴 게 뭐가 있다고 인간을 갈굽니까?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지옥 보내고. 지는 좋다, 그래.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어느 자녀치고 안 귀한 자녀가 없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놓고 지옥에서 영원히 고생하는 걸 보고 하늘나라에서 “아이고. 내 속이 다 시원하다.” 뭐 그런 심보가 있습니까.
방금 이야기가 에스겔에 나옵니다. 너희들이 벌 받는 걸 보니까 내 속이 다 시원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냥 행진을 목적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기대한 거예요. 그런데 행진 도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바뀌어져요. 말씀대로 사는 세계. 이게 애굽에서 나와야 될 목표로 부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믿고 나한테 이런 이득이 오더라.
이게 교회 처음 나갈 때 우리의 목표였는데, 막상 말씀이 귀하냐? 내가 귀하냐고 할 때 자기보다 말씀이 귀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탈락이에요. 그러면 그쪽에서 진작 이야기하지. 그러면 애초부터 교회에 오지도 않았지. 왜 이제 와서 딴 소리하느냐. 십일조 흩어가 놓고는 가라면 가라는 식으로 교회사업을 그렇게 경영할 수 있단 말이지요.
행진을 멈춘 곳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도착한 걸로 보는 하나님. 오늘 32장을 통해서 왜 그래야 하는지 뭘 바꿔야 되는지 봅시다. 32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금가락지로 우상 만들었다는 것은 우상의 모양새가 끔찍하다, 참하다고 따져 묻는 게 아닙니다. 송아지가 뭐야. 내가 송아지밖에 안 되나 하고 닦달 내는 게 아니에요. “네가 만든 우상이 부처 좀 닮았다. 내가 부처밖에 안 돼?” 이걸 닦달 내시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가락지를 빼고 다이아몬드를 뺐든 간에 자기를 위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교회 오면 우상 숭배자에요. 조상 숭배하고 절에 가고 관계없어요. 시아버지 제사 드렸습니다. 우상 숭배했습니다. 그 문제 아니에요.
우상 숭배는 교회 와서 예수를 찾는데 그 목적이 자기를 위해서 찾으면 왜 안 되느냐 하면, 천국은 자기를 위한 나라가 아니에요. 지금 이 땅에서는 예수 믿으니까 그게 안 들키지요. 신앙 좋다고 칭찬들 하지만 막상 가야 될 그 나라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한테는 그게 허용이 안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울산바닥에서 자기를 위해서 살던 식으로 살다가 못 가지만 천국에 간다면, 제가 예상하기에는 하늘나라에는 부스들이 있어요. 부스 알지요. 청년취업박람회 같이 행사할 때 각 부스 있잖아요. 취업박람회에 중소기업들이 설치한 각 부스에 줄 서 있잖아요. 만약에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되면 천국이 뭐가 되느냐 하면, 전부 자기 자리를 차지해서 온갖 부스들이 다 있을 거예요. 부동산중개소 비슷하게. 하늘나라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자기를 위한 게 허용이 안 된다면 이미 교회에서부터 사람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미리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겠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들어보니 아주 기쁘지요.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마세요.” 하면 이것은 되지도 못할 일을, 목사 자기도 못하면서 남한테 강요하는 게 돼요.
사람은 육신이 있는 한 끝까지 자기를 위해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못 가지 않느냐?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를 위해 사는 우리와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시고 구원받으신 분이 있어요. 그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거든요.
그것을 비교하면서, 나밖에 모르는 자기만 챙기고 자기만 잘 되면 빠져 죽던 말든 관계없어. 우선 나부터 챙기는 그것과 성령께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아버지를 위해서 살았던 주님을 우리 앞에 대조를 시켜서 이쪽 우리는 죄인이 되고, 저분은 그냥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의인 되는 것이, 그러면 예수님만 구원받아요.
대신 가져갔다는 차원에서 의인되는 거예요. 그것은 이웃을 위해서 네 몸을 바치라는 것을 저쪽에서 이미 성사시켰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 볼 때 “혼자 잘났네요.” 이렇게 보면 안 되고 주님이 나한테 가져간 게 뭘까요? 그걸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 가서 자기 면류관도 주님 발 앞에 던집니다.
그것 던지기 위해서 천국 가야 돼요. 자기가 쓴 면류관을 주님 발 앞에 던지면서 천국은 온통 그리스도의 공로, 어린양의 피 공로만 높이는 상황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나를 위해 사는 것을 고쳐라? 못 고칩니다. 고친다는 사람이 아주 수상해요. 그것은 사람이 고쳤다고 우기는 자신을 숭배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에요.
소위 성화됐다는 사람들, 대표적인 사람들이지요. 청교도들, 개혁주의 성화론 그게 문제인 거예요. 하나님 영광을 빙자해서 결국 하나님 잘 믿고 있는 자기를 매일같이 거울을 쳐다보면서 자기 모습에 감탄하는 사람들. 이것은 자기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지 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렵다 이 말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경로를 십자가로 백날 해도 마지막 도착점은 우수한 자기, 그만큼 질적으로 향상된 자기를 보면서 인생의 만족을 느끼는 그런 투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어떤 신상을 섬기는 것을 우상이라고 하는데, 물론 거기는 자기 위해서도 포함되는데, 이것이 마감되는 게 신약에 골로새서에 보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라. 땅의 것을 생각하면 그게 바로 우상숭배니라. 골로새서 3장 5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땅의 것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땅에 누가 있습니까? 본인이 있으니까 타인의 욕망이 나한테 다가와서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을 때 남들이 내 인생에 모델로 등장해서 그걸 따라잡는 즐거움으로 인생을 사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교회에서 누가 기도 두 시간하면, 나는 한 시간하고 있으니까 빠른 시간 내에 한 시간 더 채우고 싶은 모델이 되는 것, 남이 십일조하고 헌금 많이 하니까 나도 저처럼 되어서 인정받아야겠다는 노림수,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헌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어떤 목사님은 저한테 반발하시는 분이 있어요.
“헌금하면서도 진실 된 믿음으로 하는데 그것까지 매도하시면 됩니까?”라고 하는데 참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한 번 시험을 해보면 돼요. 한 달에 만 원하다가 그 다음에 오천 원해도 당당할 것 같으면 저번에 만 원한 것을 자기 잘남에서 한 헌금이 아닌 것을 인정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당당한 게 아니고 죄송함을 금할 수 없어 다음번에 돈 생기면 더 채우겠다고 한다면, 저번에 한 것도 순수하지 못한 헌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은 자기가 믿음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헌금하면 그 다음부터 헌금한 행위 때문에 십자가에서 시선이 돌아가게 돼요. 내가 헌금을 제대로 했나? 너무 인식하지 않았는가? 사정도 모르고 너무 심하게 하지 않았는가? 내가 이렇게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내가 한 행동 때문에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데 두어야 할 관심사가 갑자기 헌금행위에 집중하면 일곱 귀신 달려듭니다.
똑바로 해. 헌금할 때 다림질 했느냐. 온갖 귀신들, 지시들이 다가오거든요. 이러면 돼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면 그 죄인이 헌금을 하든, 강의를 하든 죄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잖아요. 십자가 안다고 그렇게 우겨놓고 막상 어떤 행동에 나서니까 그 행동의 잘, 잘못에 대해서 신경이 바짝 쓰인다는 것은 벌써 십자가에서 눈 돌아간 것이지요.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마귀가 역사하지요. 이 세상에서. 그래서 우상숭배를 안 하는 것은 우상을 안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인간에게는 우상밖에 나올 게 없음을 십자가 앞에서 자인하면서 평생을 그렇게 가시면 그게 바로 우상숭배 안 하는 거예요. 간음을 안 하는 방법은 간통 안 하는 게 간음 안 하는 게 아니고 언제든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질을 갖고 있고 잠재력이 있음을 십자가 앞에서 미리 당겨서 자인하면, 그걸 사랑이라고 하거든요.
사랑은 모든 율법을 이루었느니라. 주님이 주신 사랑 안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묻거나 따지지도 않아요. 이게 완전히 이순재 보험입니다. 백세 보험이라니까. 죽을 때까지 계속 가요. 그런데 사람은 이걸 기억했어도 막상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기억한 걸 잊어버리고 내가 지금 잘 했는가? 만약에 이걸 딴다면, 오른쪽으로 딸까요, 왼쪽으로 딸까요? 주여, 성령께서 오른쪽으로 따게 하셨습니까, 왼쪽으로 역사하셨습니까? 심지어 비빔을 비빌 때도 오른쪽으로 비빌까요, 왼쪽으로 비빌까요? 그걸 기도하고 비비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걸 노이로제 환자라고 합니다.
진짜 교회에 온갖 사람 다 있어요. 기도하고 비비는 사람 있어요. 오늘 잘 비비면 내일은 축복받는다는 의식이 있다니까요. 이걸 터부 또는 징크스. 교회가 미신 양성소 같아. 다 끝난 문제를 가지고 본인이 어떤 행동에 나서니까 갑자기 자기 행동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잘했느니, 못 했느니 따진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을 멈추고 시내산 앞에 세우는 것은, 네가 지향하는 목표하는 네 신세, 젖과 꿀이 흐르는 “역시 나는 행복해도 마땅해.” 하고 그 지점이 자기 행복이라고 여겼는데 이미 그것이 목적지가 아니고 시내산 자체가 목적지로 확정되고 말았어요. 만약에 시내산을 목적지로 수용하지 아니하면 그 다음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물 건너갔습니다.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말씀을 줬고 그전에 십계명 줬지만, 십계명 주니까 그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말씀을 해석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해석하려고 준 책입니까? 해석이 우선이 아니고 행방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인간이라는 신분 자체가 해방될 문제지, 새삼스럽게 해석 제대로 한다고 해방되는 능력이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신천지의 문제가 뭐냐 하면, 해석 제대로 하면 해방된다고 가르치는 거예요. 순서가 해석 제대로 하면 구원받는다는 게 신천지에요. 구원파도 마찬가지고. 저는 이걸 사적 구원이라고 하거든요. 개인구원은 없어요. 집단구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 구원이지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게 없어요.
성령이 개인용으로 온 게 아닙니다. 자기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예를 들어서 제가 비타500 드렸는데 역시 목사님은 저만 비타500 챙기시고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 보니까 저 뒤에 다 있는데. 똑같은 걸. 역시 성격 좋고 신앙생활 잘 하니까 이런 복을 주는구나. 그러면 인간이 잘나고 못나고 상관없이, 누가 성질이 좋으냐, 나쁘냐, 관계없이 구원에 필요한 것들은 똑같이 주는 거예요.
10년 전인가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제가 국민학교 1학년 들어갈 때 학교에서 필통부터 해서 심지어 책받침까지 나라에서 똑같은 걸 줬어요. 그런데 제가 번호가 제일 끝이라서 주는 걸 못 받았어요. 나는 울고불고 땡강 부리고 난리쳤어요. 그래서 엄마가 더 좋은 걸 사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거부했습니다. 똑같은 걸 달라고. 그때부터 이미 복음을 알았는지 몰라. 여러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복음은 똑같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고, 헌금 많이 한다고 더 주는 게 아닙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 더 주고, 석 달 만에 한 번 나오는 사람이나 매주 나오는 사람이나 관계없어요.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볼 때는 차이가 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어요. 인간에게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요소가 들어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8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임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은 학력, 지식, 나이, 일체 묻지 않고 성령이 왔느냐, 성령이 안 왔느냐? 그것으로 끝나버렸어요.
그리고 성령은 사람 차별하는 게 아니고 성령은 십자가에서 온 영이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거든요. 인간은 도토리 키 재기밖에 안 되니까 하나도 없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의도적으로 그들 속에 잠재돼있는 여호와 신을 끄집어내게 해놓고 너희들이 말씀이 임재하기 전에는 그 여호와마저 여호와를 위한 여호와 믿기가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여호와를 믿어온 우상숭배자들의 집단을 끄집어낸 거예요.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살려면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들어야 돼요.
이것이 전에 해본 적이 없는 경험이에요. 이번에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한 번도 사전에 그런 일이 없었던 거예요. 제주도에 배 타고 갈 생각했지 헤엄칠 생각은 안 했어요. 그 배를 버리라니. 마지막 동영상 보세요. 구조 시작한지 40분 지났는데 학생들은 거기서 장난치고 있어요. 배를 버리면 살아요. 성경은 우리에게 네 자신을 버리면 사는 거예요.
애굽이란 배를 버리면 살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코 못 버려요. 왜냐하면 그들이 평생 살아왔던 생활풍습과 관습과 사고방식이 다 애굽에서 왔던 거예요. 애굽은 배에요. 그리고 바다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미쳤습니까? 죽을 길로 가다니. 애굽을 버리면 어떻게 살라고. 사람이 물 없이는 못 산다. 물 있어야 한다. 양식 없으면 못 산다. 양식 있어야 한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물도 없고 양식도 없지요.
그래서 누굴 원망했습니까? 애굽에서 먹던 물과 양식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책임지고 살려내라고 나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다고요? 그런데 물과 양식 없는 곳으로 의도적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건드리면 화나게 돼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건드려놓고 그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까발리는 조치를 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원한 게 아니고 물주는 하나님을 원했고, 양식 풍부하게 주는 그런 하나님, 통장 한 열댓 개 되고 여유분 있고. 그런 하나님을 원했던 거예요. 울산이 그러니까.
그것 얻으려고 교회 온 거예요. 예수 좋다고요? 하나님 안 좋아해요. 뭘 얻으려고? 너무나 내가 좋기 때문에 남한테 뒤지지 않는 인생,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남들처럼은 살아보려고 그 미흡한 것의 보충을 내 능력으로는 안 되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마저 채워주신다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저도 양심을 있는 놈이라서 적당한 헌금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흥정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온 거예요. 목사는 거기에 사기를 치고 있었고. “여러분, 이래서 복 받은 사람 많이 있습니다. 어린애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으세요. 그러면 당신이 모델로 삼은 사람처럼 따라 붙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가 사기 치는 것도 되지만 일반교인들도 그 소리만 들기를 원해요. 어떻게 하면 나도 부자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 몸이 건강하고, 어떻게 하면 내 애가 좋은 대학 가고, 사업 안 망할 수 있고, 가족 화목할 수 있습니까?
그것만 듣기를 원했던 거예요. 그게 전부 자기를 위해서 안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출애굽했다고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절대로 육체는 애굽을 떠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애굽에 살아도 몰랐던 진면목을 앞으로 계속해서 너희를 통해서 애굽을 완전히 다 사골 푹 고아 우려내듯이 얼마나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애굽적인 요소로 물들어 있는지 일구어내는 거예요.
출애굽할 때 죽었던 어린양이 점점 더 인격적으로 실체를 드러내면서 그 죄 때문에 희생하신 분과 항상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들이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구원파의 구원은 구원을 자기가 소지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도님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이것은 개인용으로 소지할 구원이 있느냐는 것으로 구원파, 권신찬이 이야기하는 것이고. 성경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구원에 우리가 참여된 거예요.
구원이 만약에 햄버거라면, 우리는 햄버거라는 덩어리 채 내가 사서 갖고 있는 구원을 생각하는 반면에 주님의 구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햄버거가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양배추 이파리로 가담되었다는 상태가 구원관계에 놓여져 있는 겁니다. 다르잖아요. 구원파는 자기가 소지해야 되지만 구원하신 분이 우리를 소지함으로써 우리는 덩달아 구원이 돼버린 거예요.
이걸 가락교회에서 할 때 장기판으로 했어요. 장기판이 구원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장기알로 가담된 거예요. 바둑판이라면 바둑알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이걸 장(場, field), 어떤 구조에 뒤집어 씌워서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누리고 만끽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신약에서 ‘주 안에서’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없다고 단정지어놓고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게 개인용도의 구원을 소지하지 마시고 아예 내 몸 자체를 자기밖에 모르는 우상 숭배하는 나 자체가 주님에 의해서 활용당할 때 이미 구원관계에 돌입된 거예요.
구원 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쪽으로 가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못 됐나? 어떤 문제 때문에 금식했는데 요즘은 40일 금식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보통 이틀 금식하는데 이틀 금식하고 난 뒤에 뭘 느끼겠어요? 나는 금식했던 존재라는 걸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정도로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모든 진행 과정에서 금식하게 하는 이유가,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금식 가운데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상숭배하면서 바뀌는 게 아니고 구원하신 주님을 다시 새롭게 동행을 느끼면서 사는, 혼자 인생길 가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인간으로 바뀌게 될 때 그 사람이 바로 주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길게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보면 이렇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약속의 땅에 간다고 했는데 막상 시내산에서 멈추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시내산에서 모세가 떠나고 난 뒤에 자기의 본색을 유감없이 발휘했거든요. 자기 딴에 송아지 형상으로 여호와라고 만들어놨잖아요. 성의를 다했는데 자기를 위하여, 자기 구원, 자기 천국, 복된 여생 등을 노리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그 모습을 까발리면서 그 행진이 스톱됐습니다.
여기서 추가적인 요소가 없으면 그들은 약속의 땅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그 추가적인 요소가 뭐냐?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뭘 들고 옵니까? 처음부터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 잡고 홍해 앞에서 할 일도 없는데 십계명 주시면 될 텐데 홍해 건너고 난 뒤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그 전에 언급할 게 있어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무슨 조건으로 나왔습니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말고 어차피 죽음의 사자가 칠 거, 산 양을 끈에 매어 문 앞에 내놓으면 죽음의 사자가 양을 대신 쳐서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내가 잡은 피나, 천사가 잡은 피나 같은 피잖아요. 왜 내가 잡아야 되지요? 제 아이디어 어때요?
형제 같은 양을 내가 잡지 말고 어차피 죽음의 사자가 오니까 그 길목에 제삿밥 내놓듯이 해서 내놓는단 말이지요. “양을 대신 죽이시고 우린 살려주세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죽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3장에 그 이유가 나타나는데 애굽인들의 장자는 다 죽었고 히브리인들은 살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산 게 아니고 사라졌어요. 그 맏아들은 자기 집의 아들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어린양 이용하고, 십자가 이용하고, 예수님 피 이용하면 내가 산다가 아니라 지금까지는 너의 사람이었는데 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어요. 지금 있는 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기 좋으라고 예수 피 믿는 식으로는 구원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 피를 믿는 순간 성령이 와서 믿게 되는 순간 그런 내가 사라지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변화 되어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걸 자꾸 놓치니까 신천지, 구원파들이 돈만 빼먹고 기생을 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가다니!” 그 나가 없어져야 돼요. 이렇게 돼야 돼요.
주님이 나보다 귀한 분이구나. 내가 너무 무리한 걸 요구하는 겁니까? 성경에 있는 그대로에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저가(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위하여’ 전에는 나를 위하여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돼있어요.
그러면 주님을 위해 사는 방법을 우리가 살 수 있어요? 못 살아요. 그게 안 돼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우상숭배자라고. 때려죽어도 나밖에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들은 건 있어서 주를 위해 살고자 하지, 육신은 주의 법을 원하지만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누가 우세입니까? 밀고 당기고 해서 주를 위해 사는 게 맞는데 맞아요.
사람이 이성이 먼저입니까, 감정이 먼저입니까? 감정이 먼저에요. 이성은 나중에 핑계거리고 대는 것뿐이고. 어떤 여자가 좋다. 아니야. 좋아해서는 안 돼. 그렇다고 해서 안 좋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인간의 본성은 죄가 우세해요.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고 성령 받은 사도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고백입니다. 성화론 같은 건 없어요. 그건 목사가 지어낸 것이고. 현실적으로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간에 죄가 항상 선보다 우세합니다.
우리는 선보다 죄 짓는 것이 더 기쁘고 태생이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여러분 스트레스 받을 때 가장 잘 푸는 방법은 죄 지면 돼요. 그것보다 깨끗하게 푸는 방법은 없습니다. 엄마가 아이한테 이 떡을 마음껏 먹어라 하면 잘 안 먹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떡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절대로 먹으면 안 돼. 그러면 아이는 공부하면서도 노리는 게 있어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떡 좀 먹어도 용서해주겠지.”
지금 목표가 죄 짓는데 있어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 올라갑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착한 일 많이 했잖아요. 푸는 건 노래방에서 풀게 돼있어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힘들어 죽어요. 본성은 애굽이잖아요. 거기다 추가해서 십계명 왔지요. 이게 맞을 리가 있습니까? 안 맞아요. 그러니까 십계명이 안 맞아도 지키는 척은 하지요. 그런데 아주 결정적일 때 자기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서 “나는 하나님 싫어.” 이렇게 나오게 돼있어요.
신학 공부한 것, 신앙 생활한 것, 성경 공부한 것, 한 순간에 다 날아가는 순간이 옵니다. 내 자식 바다에 빠지게 되면 이제는 신은 없다. 그때부터 예수는 빠이빠이에요. 그동안 쌓아놓은 구역장 감투에다 온갖 것 다 날아가요. 신문에 안 나온 이야기인데 안산에 어느 집에 딸이 둘 있는데 큰 딸은 미국에서 의사하고 있고 둘째 딸이 단원고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답니다.
그리고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교회에서 엄마와 딸이 봉사 다해요. 그 교회의 자랑거리였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안 나오네. 시체도 못 찾았어요. “주여, 왜 저에게?” 그럼 주님의 응답은 뭡니까? “무슨 일 있었나?” “내 딸 죽였잖아.”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이미 인간 자체에 죽는 요소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결국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인간 자체가 고장 난 거예요.
이건 리콜이 안 돼요. 수리해도 안 되고. 인간 자체가 정상이 아니고 벌써 죽음이라는 암이 확대되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그 집사님이 딸 죽고 난 뒤에 교회 안 다니고 [거짓말이야] 김추자 노래 틀어놓고 한다면, 그분이 그동안 배웠던 성경공부, 들었던 설교, 한방에 다 날아갑니다. 이것은 껍데기에요.
제가 말한 것은, 인간은 육신이지 육신에다 성경공부, 정신적인 교회문화 채워도 한방에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공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과 거래와 흥정 중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 내 것 지켜주시고 내 것 잘 되게 하옵소서.”
그러한 충동적인 우상숭배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사도 바울은 지금 내가 말씀을 아는데 내 속에 다른 힘이 있는데 그 힘은 내가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선을 항상 악이 이겨버려요. 성령 받은 사도가 자신 없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갑자기 희망이 생겨버리잖아요. 이게 기쁜 소식처럼 들리잖아요. 왜 그런지 고린도전서에 보니까 내가 저지른 과거가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구원시키기 위한 주님께서 일부러 만들어낸 과거였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지나간 과거를 우리는 내 과거라고 고집 부렸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감화되게 되면 나의 과거가 주께서 일부러 만들어낸 과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소급해서. 세 살 때 오줌 싼 것부터 해서 모든 걸 소급해서 그렇게 돼요. 강도가 구원받았잖아요. 강도가, “강도질 안 하고 공무원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것 없어요.
그는 강도짓 해야만 했어요. 강도짓해서 사람 몇 명 죽이고 십자가 옆에 달려야 돼요. 주님께서 처형당하기 전에 달리면 안 돼요. 주님과 함께 동기생으로 달려야 돼요. 그리고 주님을 만나야 되고 죽기 전에 눈 떠야 되고 정신 있을 때 고백했어야 되고. 이제 내 결정, 내 자유의지가 아니고 주께서 일부러 조작해낸 거예요.
왜? 어차피 우리는 죽은 놈이니까. 죽은 인간을 다루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고 없는 나를 있게 만드시는 그 놀라운 능력이 이미 과거부터 찾아가서 구원이라는 햄버거 속의 상추 잎사귀 되게 만들어놓으신 거예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사도 바울이 했습니다.
그 밑에 뭐가 깔려있습니까? 나는 내 식대로 하면 우상숭배자로 나는 항상 선이 아니고 악이 나를 우세한 그런 인간이라는 걸 깔고 그걸 다 인정하면서 그러니까 십자가, 그러니까 주의 은혜다. 내 인생은 주께서 만든 인생이지 내가 만든 인생이 아니라고 소급해서 늘 깨닫는 것, 그럴 때 오호라 감사하리로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천국의 삶이 그런 식으로 비춰 나오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