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먹이의 믿음
젖먹이의 믿음믿음의 출발이 공동체인가? 예수님인가?지난 주에 겨자씨라는 아주 작은 미약하고 나약하고 풍채없는 무시할만한 믿음이 베드로의 엘리야를 위해 모세를 위해 예수님을 위해 아파트 세 채를 쏘는 큰 믿음보다 훨씬 믿을만하다고 배웠습니다.인간의 믿음은 늘 집(가정, 가족, 국가, 조직, 공동체, 울타리, 성전, 교회, 캐슬 [성관 castle, 城館] )을 겨냥합니다. 그 속에 인간의 모든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역사)있습니다. 믿음(행위)은 곧 창조성이요, 인간의 모든 창조 모방 행위는 모든 믿음의 표출은 조직, 단합된 공동체를 꿈꿉니다.(가인의 족보의 특징 창 4:16 17 이후 영웅출현) 그래서 교회가 썩지 않고 쭉쭉 뻗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따끔한 충고를 하는 겁니다. 너무나 교회를 사랑하는 나머지 울면서 말이죠. 끝내주는 믿음의 영웅들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은 정작 그런 공동체 형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너무나 연약하기 짝이 없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무가치하게 보이는 아벨의 족보처럼 육의 죽음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벨의 족보가 예수님의 길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겁니다. 죽었더라 죽었더라(창 5:1 하나님의 형상 대로(그리스도를 말합니다))인간이 믿음을 만들어내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육의 확장입니다. 자기를 확장하고 곧 너와 나의 이웃의 확장, 국가의 확장, 인간의 확장 곧 부활의 영역까지 확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슬로건을 내밀며 실상은 자기 확장을 목적으로 합니다.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은 정작 자꾸 자꾸만 육체의 죽음을 말씀하시며 죽어야 할 것을, 인자가 들림을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대화가 하나님 나라 확장이 아니라 인자가 어떻게 죽느냐를 두고 대화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기대거는 것과 소망인 것은, 주의 나라가 임하는 천국의 확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망과 희망에 찬물을 끼언 듯 모든 인간의 믿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할 것을, 어떤 인간의 믿음도 동의치 않는 마치 베드로처럼 절대로 가시면 안된다고 막는 그런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자기(예수)의 확장이 아니라 자기부인입니다.(마 16:24)(눅 9:23)(눅 14:27)그래서 큰 믿음, 효과적이고 능력이 넘치는, 풍채가 있고 뭔가 화끈하고 사람들을 사로잡기 딱 좋은 그런 믿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에게게 나 안해 나 안해 저런 믿음 가질 바에 차라리 안가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무시할만한 겨자씨 믿음을 예수님은 제시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모든 믿음을 거짓으로 몰아버리는 겁니다.그러면서 정작 귀신도 못쫏아내면서 큰 믿음 소유, 시시하지 않는 눈에 확 띄는 산같은 믿음 소유로 갈망하는 육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음을 영이신 예수님이 지적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인간의 믿음을 막고, 인간의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을 막습니다. 서로 가로 막고 씨름합니다. 통과하는 쪽이 승리합니다. (얍복강가의 씨름처럼-창 32:24)예수님의 한 몸은 인간의 교회를 거부하고, 인간의 교회는 예수님의 한 몸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둘 다 부술려고 십자가로 몰고 갑니다. 다 뿌셔 뿌셔 뿌셔 뿌셔버리고 다시 일어나는 몸이 진짜입니다.(성전을 헐라 - 요 2:19)우리 인간은 스스로 믿음의 세계에 뛰어들어 양적으로 질적으로 나름대로 가꾸고 배우고 딱고 기름칠 하고 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를 다들 가지면서 믿음 생활한다고 자부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그런 양적이고 질적인 위대한 믿음들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제시하며 인간의 믿음은 예수님 믿음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인정하기 싫은 겁니다. 믿게 됨으로 확신이 와야 하는데 예수님은 자기부인을 제시합니다. 확정되고 확신이 있어야 믿음을 더 믿음 답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믿음에 대한 견해인데 그래야 구원을 따내는 것인데, 예수님은 반대로 믿음이야 말로 자기부인이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죽게 되었구나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을 대면 하였으니 나는 죽었구나(샬롬)(롬 7:24)(사 6:5)(눅 5:8). 요나의 표적 뿐이다는 겁니다.우리가 전에 배운 출애굽 후에 여호와께서 일부러 원망할 곳으로 인도하니, 이스라엘은 죽을 맛입니다. 원망 안하고픈데 원망할 뻔한 곳으로만 몰고가시니(민 21:5)(민 14:22) 참아도 참을 수 없는 도저히 믿고파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곳으로만 몰고감에 믿음이라는 가능성을 포기하도록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원망 안하는 믿음을 가지고픈데 원망하도록 물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만 척박한 곳에 몰고가니 나 안해 나 안해 라고 나 올 수밖에 없는 육체의 본성을 돌출 시킨다는 겁니다.(신 8장)( 가족나눔터 83번글 <없는 곳에서 세워진 교회> 라는 글을 중심으로 앞 뒤 글 81, 84 번글을 보시면 됩니다)그래서 겨자씨가 필요한 겁니다. 모세의 영웅적인 믿음으로 원망에서 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눈 여겨 보도 않는 꼬챙이가 모세를 이끌어가고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겁니다. 꼭 누구든지 아무든지 무시할만한 귀히여기지도 않는 무가치한 꼬챙이 지팡이로 생명의 길을 제시하는 겁니다. 꼬챙이가 제시하는, 지팡이가 제시하는, 겨자씨가 제시하는 믿음을 누가 가지고 싶겠습니까?, 초라한 말라 비틀어진 헐벗은 나무인 죄수의 괴수를 처형하는 사형 틀로 쓰기에 딱인 저주의 십자가를 누가 짊어지고 가겠습니까? 눈에 비일라 말라 카는데. 보일 듯 말듯한 믿음으로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눈에 띄여야 남에게 자랑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니겠습니까? 내세울 것 없는 믿음인데 누가 가지겠습니까?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갈뿐입니다.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자기의 믿음을 있는데로 마음껏, 럭셔리하게, 모두 다 표출 합니다.(막 9:30-32)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오늘은 변화산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3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심으로 겨자씨 믿음은 변화산 사건과 연관해서 결론을 짖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공부할까 합니다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자기나름대로의 소견을 소신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저마다 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면 구원을 위해서라면 예수님에게 책망 받는 것도 마다 않고 꾹 참고(출애굽 광야에서처럼) 그 날을 위해 고대하며 예수님에게 한 개라도 더 배울려고 따라다닙니다. 저마다 다 한 신앙 하는 믿음의 고수가 되길 소망하면서 말이죠.그래서 길가는 중에 제자들끼리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천국에서 과연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 라는 쟁론이 벌어진 겁니다.(마 18:1-6)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막 9:33-37) (눅 9:46-48)제자들은 그만큼 자기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에 관심과 모든 믿음을 걸고 목숨마저도 내 던질 각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중입니다. 그만큼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을 믿기에, 믿기에 지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순교할 자세입니다.그러니 그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이 땅에서는 선지자처럼 개죽음을 당해도 하늘에서는 영광된 믿음의 영웅이 될것이라는 부푼 소망을 가지고 뿅하고 구름을 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잘낫죠 너무 너무 잘 난 나머지 옆의 제자가 한 자리 하는 꼴을 못 봅니다. 영광이란 결국 혼자의 몫이어야 믿음이 믿음다울테니 말이죠.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마다 성경적 직분을 교회개혁의 조건으로 내세워 주창하면서 사실상 누가 누가 크냐라는 경쟁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주인인 목사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이지요. 서로 낮아지기 경쟁이 아니라 서로 높아지기 위해 충성 봉사 개혁 섬김을 목숨걸고 다 바치라는 강요로 몰고갑니다. 목사는 목사답게 장로는 장로답게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넘지 않게 자기 영역에서 맡은 바대로 진실되게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아름다운 교회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조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은사로 주신 직분이니 주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조건아닙니까? 주의 사자인 목사에게 함부로 대들지 못하도록 올바른 직분론이야 말로 극히 상식적인 기본사항입니다. 그래야 하극상은 없겠죠.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직분론을 말씀 하신 적 없습니다. 조직이 조직 다워야 한다면 반드시 위계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더욱더 신경써야할 공동체로써 질서가 바르게 잡혀야 할 것은 당연한 것인데! 예수님은 지금 그런 조직, 공동체 관심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 할 역할을 통해 조직을 발전해야할 입장에서 퇴보한다면 그것은 조직으로써의 생명이 사라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연한 상식을 깹니다. 오히려 더 낫설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제시합니다.즉 어린 아이를 제자들 앞에 들이내미시는 겁니다. 지금 제자들은 심각하게 서로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겠다고 더 크고자 더 큰 믿음과 더 큰 사명감과 더 바른 개혁, 더 올바른 직분, 더 큰 은사, 더 큰 남보다 더나은 사랑에 자신을 불태울 준비태세가 되어있는데? 작고 어리석은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더 중요한 단어 빠졌죠 돌이켜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꿈도 꾸지 말라 하십니다.만약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안되고 천국 가면 어떻게 될까요?이러는거 아니야! 그 천국 이제 못쓰는 겁니다. 썩어가고 있는 겁니다. 끔찍이가 오든 깜찍이가 오든 그 천국 이제 못쓰는 겁니다. 아 그러면 지금 얼라들은 다 어린이니까 다 들어가겠네요. 천만해요 지금 어린아이의 방향성이 지금 어린아이입니까? 어른입니까? 어떤 어린아이도 어린아이를 지향하며 살지 않습니다. 네에 요즘 아이들은 그만큼 순수함이 떨어지죠? 아닙니다 그 말이 아니라 순수함과 다릅니다. 4-6살 어린이가 돌이켜 젖먹이로 돌이키질 않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미운 4,5,6,살 아닙니까. 어린아이와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른스럽다는 말 아닌가요? 그러니 어린이처럼 순수하지 못해서 요즘 아이들도 아이 같지 않다는 말 아닌가요? 아니요 제가 말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안되면 결단코 천국에 못갑니다. 순수라는 말 제발 기억 속에 지워버리세요 순수랑 전혀 관련 없는 말씀입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인간은 날 때부터 그 생각이 악하기에 늘 높아지고자 합니다.(시 51:5) 낮은 자 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믿음 또한 항상 높음을 지향하는 망상 헛된 꿈을 지향하며 삽니다. 그런데 돌이키는 자이신 예수님이 낮추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낮추신 것처럼 말이죠. 다윗을 우리야를 통해 확 홀라당 다 벗기고 꾹꾹 눌러 다 낮추시는 겁니다.어린아이처럼 낮아지지 않으면 천국은 무용지물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조건입니까? 구원의 조건이란 없습니다. 조건이라면 내 쪽에서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낮아질 가능성이 애초에 없는 불가능한 겁니다. 조건 자체가 높음을 자기가능성을 늘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아니라 그냥 낮추는 겁니다.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어린아이처럼 낮추실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교회란 어린아이 곧 낮아진 자가 예수님과 하나 될 몸이요 그 낮아진 자의 머리가 예수님 곧 낮추실려고 꾹꾹 누르는 자가 머리가 되어 이 둘이 한 몸을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광야교회 뿐입니다. 여기에 무슨 직분이 어떻고 질서가 어떻고, 위계질서가 어떻고, 은사가 어떻고, 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입니다. 은사란 어디까지나 낮추시는 자에 의해 낮아짐으로 섬기는 마음을 자기 스스로 터득한게 아니라 외부(낮추시는 자)에서 주어진 마음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그렇기에 은사는 결코 자기 확신, 자기 확장, 자기를 위하여, 자기 유익을 위하여가 아니라 반대로 자기부인, 자기부정,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으로 갑니다. 교회에서 세뇌당한 달란트 라는 은사가 꼭 그 반대로 믿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알려준 그 반대로 믿는지 그것도 아마 아무나 못하는 은사인가 봅니다. 그들만의 달란트인가 봅니다.어린아이란 무시 당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세계에서는 아웃사이더(왕따)입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지금 직분론이 어쩌고 저쩌고, 개혁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구원의 확신이 어쩌고 저쩌고 이런 것 어린아이에게는 전혀 관심밖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어린아이란 왕따당하는 존재입니다. 애들은 가 애들은 가라. 뭐 하나 해결할 능력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이는 아이일 뿐인데? 바로 이런 어린아이의 무가치함을 오히려 예수님은 앞장 내세우는 겁니다. 즉 영접은 자기보다 높은 대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보다 높기는커녕 아주 밑바닥인 천한 신분을 가진 자를 영접하라는 것은 쉽게 내키지 않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행위)이란 항상 조건적입니다. 영접함으로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효과가 자기 유익으로 와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하나 영접한다고 무슨 자기에게 오는 효과가 있겠습니까? 뭐 하긴 요즘 교인들은 하도 연기력이 뛰어나서 그것마저도 다 행할려고 달려들지만요.(막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 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막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앞장 세우는 것에 끝나지 않고 직접 어린아이 같이 되십니다. 얼마나 무시를 당하는지 이루 말도 못할 정도로 무시와 멸시와 수모를 당합니다. 마치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되는 것은 이런거란다 라고 본을 보이시듯 말이죠.(사 53장)(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또 그 시대나 오늘이나 믿음 좋다는 자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마리아인, 강도, 세리, 창녀, 문둥병자, 가난한자, 병자, 개같은 이방인 등을 영접하십니다. 하늘의 왕인 신분을 가진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도 무시받고 버림받은자로 여겨지는 자들을 직접 찾아오셔서 구석 구석 찾아다니며 영접하시는 겁니다. 그들과 어울리면 같이 왕따 당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데 말이죠.오죽하면 엘리야인 세례요한이 보라 제발 좀 봐라 세상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라고 찬양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외침 때문에 마음껏 자유롭게 욕먹고 무시받고 멸시받았습니까? 똑같이 엘리야인 예수님도 어쩜 그리 똑같이 같은 길로 마음껏 가시는지(마 17:12), 우리는 그저 남아서 같이 갈 생각 없이 천국 때려치우고 교회하자 라고 하는 겁니다. 그만큼 교회가 이생의 자랑(요일 2:16) 입니다. 탐욕을 부추기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만이 자기를 누락, 자기 부인을 합니다. (요 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창기와 세리가 의인이 아니라, 긍휼을 받고, 첫째 맏이는 그 긍휼을 거부한자임. 누가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었는가요? 맏이 장자? 탕자?)그저 불쌍해서 값없이 조건없이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것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일 생각은 없고, 위계질서와 참 교회직분 은사 소유자 만이 참개혁이요 자기따나 복음을 위해서 라는 조건으로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자가 오는 것을 금하며 막고 있는 겁니다. 광야교회는 인간의 손으로 세우는 교회를 다 거부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를 꿈꾸며 자기 믿음을 불태워도 말이죠.(눅 9: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눅 9: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믿음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부터가 그러합니다. 족보도 우리가 선 듯 막 자랑할 만한 족보가 아닙니다. 족보를 타고 내려오면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로 거리끼게 하는 족보입니다. 전혀 창녀가 될 필요가 없는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남편으로 삼고, 우리야의 죽음을 배경으로 하는 족보요, 처녀가 임신을 한 족보입니다. 임금을 삼을려고 따라오니 도망치시는 예수님이요, 큰 믿음으로 같이 물 위에서 출발하고픈 믿음의 고수를 꿈꾸는데 확 빠뜨리시므로 우리의 믿음을 다 손 놓게 만듭니다. 귀신을 기가막히게 쫏아내는 큰 믿음을 소유하고픈데 눈에 비일까 말까한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겨자씨 믿음을 제시하지를 않나! 커다란 믿음으로 천국에서 한 영웅 하고픈데 청소부가 된 성인 성인이 된 청소부 그런 멋뜨러진 성인군자의 대열 속에 들어가고픈데 엉뚱하게 돌이켜 얼라들 같이 안되면 결코 절대로 기필코 천국 못간다고 하니, 예수님의 메시지는 늘 일관성이 있으나 문제는 우리가 전혀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첫째 맏이처럼 탕자에게 베푸는 아버지의 긍휼에 법 법 법대로 하자. 그런 긍휼 싫타는 겁니다. 손에 칼을 잡아도 최신식 무기를 잡아도 될까말까인데? 무슨 수로 악한 영과 싸우냐고요? 오히려 그런 칼 총 무기를 주기는커녕 꼬챙이 겨자씨 젖먹이 이런 말도 안되는 것들로만 천국을 이루시겠다고 하니 우리가 도저히 믿지를 못하는 겁니다. 지금 교회는 서로가 살인코자 칼부림해야 자기 주장을 펼치는 배가 불러 터진 높은자들로만 가득차있지 어린아이는 어디하나 찾아볼수 없습니다. 또 그것을 지적하고자 올바른 직분 은사로 교회 수준을 높여 개혁되어야 교회답다는 주장과 그런 열성이 현대인에게 먹혀들지, 누가 젖먹이로 이루어진 광야교회를 눈여겨보겠습니까? 어린아이 요거 요거 안먹힙니다.곧 겨자씨 꼬챙이 젖먹이 어린아이와 천국을 예수님은 일치화 시켜서 천국이 결단코 인간의 손에 잡히질 않고, 인간의 믿음에 감잡힐 정도로 천국이 공개되질 않고 은밀하게 비밀스럽게 천국이 자기 백성을 분리시켜 자석이 철가루를 돌가루 속에서 뽑아내듯 가려내고 가려내어서 천국의 활동 앞에 모든 것을 손 놓고 끌려다닐 뿐입니다. 그것이 광야교회(철가루)입니다.자석(천국)이 얼마나 위대하냐를 보여주기 위해 물 속에 다 빠뜨려도 단 한명도 소외 시키지 않고 다 건져주시고, 불뱀에게 다 물려죽도록 하셔서 자기 백성 단 한명도 안빠뜨리고 다시 고치십니다. 유격 유격. 다 광야 속으로 양들을 몰고 가셔서 자기 양과 늑대를 돌가루 철가루 구분하듯이 가려내시는 겁니다. 이것이 자석(예수님)의 낮아짐입니다.최종적으로 젖먹이 겨자씨 꼬챙이 어린아이 비천한 여인 천하고 미련한자 이 모든 것이 십자가 속에 담겨져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천국과 일치 시키십니다. 십자가 빠진 천국은 다 거짓(유대인의 천국, 오늘날 현대교회의 천국)됨을 증거하심으로 그 천국의 문을 열고자 십자가에서 숨어있는 원수의 정체를 폭로시킵니다. 법대로 하자, 구원의 확신, 올바른 개혁주의, 한결같이 정작 사람들이 믿을만한 구석이 있는 것들은 원수들이 다 사로잡아 장악하여 있고, 오히려 천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어린아이에게는 천국을 보너스로 주시고, 아무나 못들어 오도록 아무도 찾지 않는 저주의 십자가 속에 천국을 비밀스럽게 패쓰워드 걸어 놓으셨습니다.오늘날 교회에서 증거되는 설교들이 예수님의 증거와 일치 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성경은 독선적으로 혼자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큰 사람 큰 믿음이 되어라 라는 교회 구호 속을 비집고 침투하여 자기의 잃어버린 양을 구출해 내고 있습니다. 어디서요? 하나님의 원수인 교회 속에서 자기 양을 탈출 시키고 있습니다. 무엇으로요? 그 큰 교회 권력에 맞서서 싸울수 있습니까? 위대한 개혁정신에 맞서서 누가 자기 백성을 빼낼수 있는 겁니까? 그러니 당연히 저들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소원이 어린양 예수님의 목숨을 위협합니다.간단합니다.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원수들에게 내어줌으로 그 피 값으로 값을 치르고 빼내오신 겁니다. 무수히 교회에서 외치는 믿음과 전혀 일치되지 않는 딱 한 분의 믿음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겨자씨 믿음으로 사랑을 펼치시는 겁니다.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마 18: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이 어린아이와 같은 예수님을 우리의 대단한 믿음은 연자 맷돌을 예수님의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고 참수 시킨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 주로 오시기 위해 원수들에게 내어주는 바 되는 겁니다. 이 실족케 하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잃어버린 자기 양을 건지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젖먹이를 통해 전쟁을, 열심을 다 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런 가치 없는 우리를 위해 지옥 속으로 뛰어드는 저 무모스럽게 보이는 십자가의 사랑만이 소자(작은 자)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겁니다. 천국은 대자(큰 자)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소자(작은 자)들만의 새세계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누가 젖먹이 보다 강한 자 있겠습니까? 어미의 사랑을 마음껏 빠는 저 젖먹이가 천국을 꽉 채우는 겁니다.이런 낮은자 세상 어디있겠습니까?(시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예수님! 우리의 눈은 어두워서 낮아지신 예수님을,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질 못하고 도리어 귀히 여기지 않고 침을 뱉고 채찍질을 가했으며 뺨을 내리쳤습니다. 그래놓고도 우리는 무슨 염치가 있어서 늘 구원의 욕망을 가지고 오늘도 보일려고 눈 도장찍을려고 교회에 옵니다. 그런 교회라면 부써뜨려주시고, 주님과 독대면하여서 십자가를 왜 지셔야 했는지, 왜 내 대신 십자가의 저주를 받았는지 그 이유를 남이 알려줘서가 아니라 주님으로 부터 직접 들을수 있게 우리 귀를 열어 주시고 날 낮추시려고 직접 찾아오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