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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행진을 멈추고 140502강의에스겔

행진을 멈추고 140502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한윤범(IP:14.♡.134.60)

14-05-07 10:40

20140502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행진을 멈추고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2장 할 차례입니다. 19장부터 계속 내려온 이야기인데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을 하다가 멈췄어요. 여기서 중요한 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가서야 멈추게 돼있지요. 그런데 왜 약속의 땅에 가기도 전에 멈춥니까? 휴게소에 들린 거예요? 너무 힘드니까 잠시 휴식하는 겁니까?

그들의 행진이 멈춘 것은 말씀을 받을 자리에서 행진을 멈췄습니다. 그 말은 말씀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가봐야 약속의 땅에 못 간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몸만 가면 되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사람 자체가 바뀌어야 돼야 되는 거거든요. 중간에 들러서 말씀 받고 말씀의 사람이 될 때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사람들이 보통 교회에 찾아오는 걸 보니까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힘들지 않는 상태로 바꾸고 행복은 가운데 들어가기를 바라거든요. 그러면 뭐가 빠졌어요? 하나님의 말씀, 약속, 언약들이 없는 채 고생 되게 했는데 이제 죽어서 편한 곳에 간다고 하잖아요.

이번에 진도의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헌화할 때 주된 멘트가 뭡니까? “이제는 편히 쉬소서.”라고 하잖아요. 말씀이 없이 편히 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준비된 약속 없이 편히 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으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에요? 안 되거든요. 베드로가 따라온다고 할 때 너는 올 수 없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처소가 마련되지 아니하면 못 가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베드로한테 뒤늦게 이야기했다고. 처음부터 이야기했으면 안 따라 갈 수도 있었는데. 목숨 내놔도 못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국이 뭐예요? 죽어도 못 가는 나라에요. 요한복음 13장에. 그러면 죽어도 못 가니까 역시 살아서도 못 가요. 그러니까 아예 못 가는 거예요. 천국은 아예 못 간다는데 교회에서는 간다고 하니까 둘 중에 누구 말이 맞습니까? 하나님 말이 맞고 교회가 사기 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들이 교회에 왜 오느냐? 인생이 너무 고생스러워서. 고생이 쌓이면 한이 되고,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한 정도는 풀어 주리라 생각하고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낙을 보자. 그건 종교잖아요. 인간이 성령 받고 안 받고 간에 모든 인간은 다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데 인간이 상상한다고 그게 천국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구태여 올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와서 새삼스럽게 정보를 제공할 필요 없어요.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잖아요. 힘든 세상 빨리 끝장내고 죽어도 천국 오너라. 이것 개나 소나 다 아는 이야기인데 뭐 때문에 주님께서 수고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는데요. 다니엘에 부활 이야기 나오지요. 에스겔에 부활이야기 나오지요. 죽어서 좋은데 간다고 바리새인들은 믿었고 사두개인들은 안 믿었고. 믿던 안 믿던 중요한 것은 그거에요. 지금은 고생이지만 나중에서는 낙을 본다. 이건 인간의 기본적인 소망이고 희망이잖아요.

희망 품는다고 천국 간다? 이 세상에 희망 안 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럼 애초부터 지옥이라는 것은 없어야 됩니다. 지옥이 없다는 말은 아예 심판을 하지 말아야 돼요. “네가 인간이냐? 조금만 기다려라. 다 보내줄게.” 정말 좋은 하나님이고, 정말 사랑이라는 말을 하려면 차별이 없어야 됩니다. 조금만 고생해. 하지만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천국에 보내야 좋으신 하나님이에요. 만약에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지옥에 보낸다면 천국 가는 사람에게는 좋으신 하나님이지만 지옥 가는 사람은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과 인터뷰할 때, “하나님 좋지요?” 하면, “좋겠냐. 지옥 갈 볼래? 좋은 하나님인지.”

우리가 지옥 가서 영원히 불구덩이에서 고생할 세상에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 말이지요. 우리가 아주 별 볼 일 없는 인간인데 갈굴 게 뭐가 있다고 인간을 갈굽니까?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지옥 보내고. 지는 좋다, 그래.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어느 자녀치고 안 귀한 자녀가 없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놓고 지옥에서 영원히 고생하는 걸 보고 하늘나라에서 “아이고. 내 속이 다 시원하다.” 뭐 그런 심보가 있습니까. 방금 이야기가 에스겔에 나옵니다. 너희들이 벌 받는 걸 보니까 내 속이 다 시원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냥 행진을 목적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기대한 거예요. 그런데 행진 도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바뀌어져요. 말씀대로 사는 세계. 이게 애굽에서 나와야 될 목표로 부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믿고 나한테 이런 이득이 오더라. 이게 교회 처음 나갈 때 우리의 목표였는데, 막상 말씀이 귀하냐? 내가 귀하냐고 할 때 자기보다 말씀이 귀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탈락이에요. 그러면 그쪽에서 진작 이야기하지. 그러면 애초부터 교회에 오지도 않았지. 왜 이제 와서 딴 소리하느냐. 십일조 흩어가 놓고는 가라면 가라는 식으로 교회사업을 그렇게 경영할 수 있단 말이지요.

행진을 멈춘 곳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도착한 걸로 보는 하나님. 오늘 32장을 통해서 왜 그래야 하는지 뭘 바꿔야 되는지 봅시다. 32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금가락지로 우상 만들었다는 것은 우상의 모양새가 끔찍하다, 참하다고 따져 묻는 게 아닙니다. 송아지가 뭐야. 내가 송아지밖에 안 되나 하고 닦달 내는 게 아니에요. “네가 만든 우상이 부처 좀 닮았다. 내가 부처밖에 안 돼?” 이걸 닦달 내시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가락지를 빼고 다이아몬드를 뺐든 간에 자기를 위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교회 오면 우상 숭배자에요. 조상 숭배하고 절에 가고 관계없어요. 시아버지 제사 드렸습니다. 우상 숭배했습니다. 그 문제 아니에요.

우상 숭배는 교회 와서 예수를 찾는데 그 목적이 자기를 위해서 찾으면 왜 안 되느냐 하면, 천국은 자기를 위한 나라가 아니에요. 지금 이 땅에서는 예수 믿으니까 그게 안 들키지요. 신앙 좋다고 칭찬들 하지만 막상 가야 될 그 나라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한테는 그게 허용이 안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울산바닥에서 자기를 위해서 살던 식으로 살다가 못 가지만 천국에 간다면, 제가 예상하기에는 하늘나라에는 부스들이 있어요. 부스 알지요. 청년취업박람회 같이 행사할 때 각 부스 있잖아요. 취업박람회에 중소기업들이 설치한 각 부스에 줄 서 있잖아요. 만약에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되면 천국이 뭐가 되느냐 하면, 전부 자기 자리를 차지해서 온갖 부스들이 다 있을 거예요. 부동산중개소 비슷하게.

하늘나라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자기를 위한 게 허용이 안 된다면 이미 교회에서부터 사람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미리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겠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들어보니 아주 기쁘지요.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마세요.” 하면 이것은 되지도 못할 일을, 목사 자기도 못하면서 남한테 강요하는 게 돼요. 사람은 육신이 있는 한 끝까지 자기를 위해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못 가지 않느냐?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를 위해 사는 우리와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시고 구원받으신 분이 있어요. 그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거든요. 그것을 비교하면서, 나밖에 모르는 자기만 챙기고 자기만 잘 되면 빠져 죽던 말든 관계없어. 우선 나부터 챙기는 그것과 성령께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아버지를 위해서 살았던 주님을 우리 앞에 대조를 시켜서 이쪽 우리는 죄인이 되고, 저분은 그냥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의인 되는 것이, 그러면 예수님만 구원받아요. 대신 가져갔다는 차원에서 의인되는 거예요. 그것은 이웃을 위해서 네 몸을 바치라는 것을 저쪽에서 이미 성사시켰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 볼 때 “혼자 잘났네요.” 이렇게 보면 안 되고 주님이 나한테 가져간 게 뭘까요? 그걸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 가서 자기 면류관도 주님 발 앞에 던집니다. 그것 던지기 위해서 천국 가야 돼요. 자기가 쓴 면류관을 주님 발 앞에 던지면서 천국은 온통 그리스도의 공로, 어린양의 피 공로만 높이는 상황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나를 위해 사는 것을 고쳐라? 못 고칩니다. 고친다는 사람이 아주 수상해요. 그것은 사람이 고쳤다고 우기는 자신을 숭배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에요. 소위 성화됐다는 사람들, 대표적인 사람들이지요. 청교도들, 개혁주의 성화론 그게 문제인 거예요. 하나님 영광을 빙자해서 결국 하나님 잘 믿고 있는 자기를 매일같이 거울을 쳐다보면서 자기 모습에 감탄하는 사람들. 이것은 자기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지 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렵다 이 말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경로를 십자가로 백날 해도 마지막 도착점은 우수한 자기, 그만큼 질적으로 향상된 자기를 보면서 인생의 만족을 느끼는 그런 투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어떤 신상을 섬기는 것을 우상이라고 하는데, 물론 거기는 자기 위해서도 포함되는데, 이것이 마감되는 게 신약에 골로새서에 보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라. 땅의 것을 생각하면 그게 바로 우상숭배니라. 골로새서 3장 5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땅의 것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땅에 누가 있습니까? 본인이 있으니까 타인의 욕망이 나한테 다가와서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을 때 남들이 내 인생에 모델로 등장해서 그걸 따라잡는 즐거움으로 인생을 사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교회에서 누가 기도 두 시간하면, 나는 한 시간하고 있으니까 빠른 시간 내에 한 시간 더 채우고 싶은 모델이 되는 것, 남이 십일조하고 헌금 많이 하니까 나도 저처럼 되어서 인정받아야겠다는 노림수,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헌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어떤 목사님은 저한테 반발하시는 분이 있어요. “헌금하면서도 진실 된 믿음으로 하는데 그것까지 매도하시면 됩니까?”라고 하는데 참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한 번 시험을 해보면 돼요. 한 달에 만 원하다가 그 다음에 오천 원해도 당당할 것 같으면 저번에 만 원한 것을 자기 잘남에서 한 헌금이 아닌 것을 인정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당당한 게 아니고 죄송함을 금할 수 없어 다음번에 돈 생기면 더 채우겠다고 한다면, 저번에 한 것도 순수하지 못한 헌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은 자기가 믿음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헌금하면 그 다음부터 헌금한 행위 때문에 십자가에서 시선이 돌아가게 돼요. 내가 헌금을 제대로 했나? 너무 인식하지 않았는가? 사정도 모르고 너무 심하게 하지 않았는가? 내가 이렇게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내가 한 행동 때문에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데 두어야 할 관심사가 갑자기 헌금행위에 집중하면 일곱 귀신 달려듭니다. 똑바로 해. 헌금할 때 다림질 했느냐. 온갖 귀신들, 지시들이 다가오거든요.

이러면 돼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면 그 죄인이 헌금을 하든, 강의를 하든 죄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잖아요. 십자가 안다고 그렇게 우겨놓고 막상 어떤 행동에 나서니까 그 행동의 잘, 잘못에 대해서 신경이 바짝 쓰인다는 것은 벌써 십자가에서 눈 돌아간 것이지요.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마귀가 역사하지요. 이 세상에서.

그래서 우상숭배를 안 하는 것은 우상을 안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인간에게는 우상밖에 나올 게 없음을 십자가 앞에서 자인하면서 평생을 그렇게 가시면 그게 바로 우상숭배 안 하는 거예요. 간음을 안 하는 방법은 간통 안 하는 게 간음 안 하는 게 아니고 언제든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질을 갖고 있고 잠재력이 있음을 십자가 앞에서 미리 당겨서 자인하면, 그걸 사랑이라고 하거든요. 사랑은 모든 율법을 이루었느니라. 주님이 주신 사랑 안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묻거나 따지지도 않아요. 이게 완전히 이순재 보험입니다. 백세 보험이라니까. 죽을 때까지 계속 가요.

그런데 사람은 이걸 기억했어도 막상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기억한 걸 잊어버리고 내가 지금 잘 했는가? 만약에 이걸 딴다면, 오른쪽으로 딸까요, 왼쪽으로 딸까요? 주여, 성령께서 오른쪽으로 따게 하셨습니까, 왼쪽으로 역사하셨습니까? 심지어 비빔을 비빌 때도 오른쪽으로 비빌까요, 왼쪽으로 비빌까요? 그걸 기도하고 비비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걸 노이로제 환자라고 합니다.

진짜 교회에 온갖 사람 다 있어요. 기도하고 비비는 사람 있어요. 오늘 잘 비비면 내일은 축복받는다는 의식이 있다니까요. 이걸 터부 또는 징크스. 교회가 미신 양성소 같아. 다 끝난 문제를 가지고 본인이 어떤 행동에 나서니까 갑자기 자기 행동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잘했느니, 못 했느니 따진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을 멈추고 시내산 앞에 세우는 것은, 네가 지향하는 목표하는 네 신세, 젖과 꿀이 흐르는 “역시 나는 행복해도 마땅해.” 하고 그 지점이 자기 행복이라고 여겼는데 이미 그것이 목적지가 아니고 시내산 자체가 목적지로 확정되고 말았어요. 만약에 시내산을 목적지로 수용하지 아니하면 그 다음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물 건너갔습니다.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말씀을 줬고 그전에 십계명 줬지만, 십계명 주니까 그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말씀을 해석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해석하려고 준 책입니까? 해석이 우선이 아니고 행방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인간이라는 신분 자체가 해방될 문제지, 새삼스럽게 해석 제대로 한다고 해방되는 능력이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신천지의 문제가 뭐냐 하면, 해석 제대로 하면 해방된다고 가르치는 거예요. 순서가 해석 제대로 하면 구원받는다는 게 신천지에요. 구원파도 마찬가지고.

저는 이걸 사적 구원이라고 하거든요. 개인구원은 없어요. 집단구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 구원이지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게 없어요. 성령이 개인용으로 온 게 아닙니다. 자기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예를 들어서 제가 비타500 드렸는데 역시 목사님은 저만 비타500 챙기시고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 보니까 저 뒤에 다 있는데. 똑같은 걸. 역시 성격 좋고 신앙생활 잘 하니까 이런 복을 주는구나. 그러면 인간이 잘나고 못나고 상관없이, 누가 성질이 좋으냐, 나쁘냐, 관계없이 구원에 필요한 것들은 똑같이 주는 거예요.

10년 전인가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제가 국민학교 1학년 들어갈 때 학교에서 필통부터 해서 심지어 책받침까지 나라에서 똑같은 걸 줬어요. 그런데 제가 번호가 제일 끝이라서 주는 걸 못 받았어요. 나는 울고불고 땡강 부리고 난리쳤어요. 그래서 엄마가 더 좋은 걸 사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거부했습니다. 똑같은 걸 달라고. 그때부터 이미 복음을 알았는지 몰라. 여러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복음은 똑같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고, 헌금 많이 한다고 더 주는 게 아닙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 더 주고, 석 달 만에 한 번 나오는 사람이나 매주 나오는 사람이나 관계없어요.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볼 때는 차이가 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어요. 인간에게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요소가 들어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8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임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은 학력, 지식, 나이, 일체 묻지 않고 성령이 왔느냐, 성령이 안 왔느냐? 그것으로 끝나버렸어요. 그리고 성령은 사람 차별하는 게 아니고 성령은 십자가에서 온 영이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거든요. 인간은 도토리 키 재기밖에 안 되니까 하나도 없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의도적으로 그들 속에 잠재돼있는 여호와 신을 끄집어내게 해놓고 너희들이 말씀이 임재하기 전에는 그 여호와마저 여호와를 위한 여호와 믿기가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여호와를 믿어온 우상숭배자들의 집단을 끄집어낸 거예요.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살려면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들어야 돼요. 이것이 전에 해본 적이 없는 경험이에요. 이번에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한 번도 사전에 그런 일이 없었던 거예요. 제주도에 배 타고 갈 생각했지 헤엄칠 생각은 안 했어요. 그 배를 버리라니. 마지막 동영상 보세요. 구조 시작한지 40분 지났는데 학생들은 거기서 장난치고 있어요. 배를 버리면 살아요. 성경은 우리에게 네 자신을 버리면 사는 거예요. 애굽이란 배를 버리면 살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코 못 버려요. 왜냐하면 그들이 평생 살아왔던 생활풍습과 관습과 사고방식이 다 애굽에서 왔던 거예요. 애굽은 배에요. 그리고 바다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미쳤습니까? 죽을 길로 가다니. 애굽을 버리면 어떻게 살라고.

사람이 물 없이는 못 산다. 물 있어야 한다. 양식 없으면 못 산다. 양식 있어야 한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물도 없고 양식도 없지요. 그래서 누굴 원망했습니까? 애굽에서 먹던 물과 양식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책임지고 살려내라고 나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다고요? 그런데 물과 양식 없는 곳으로 의도적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건드리면 화나게 돼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건드려놓고 그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까발리는 조치를 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원한 게 아니고 물주는 하나님을 원했고, 양식 풍부하게 주는 그런 하나님, 통장 한 열댓 개 되고 여유분 있고. 그런 하나님을 원했던 거예요. 울산이 그러니까. 그것 얻으려고 교회 온 거예요. 예수 좋다고요? 하나님 안 좋아해요. 뭘 얻으려고?

너무나 내가 좋기 때문에 남한테 뒤지지 않는 인생,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남들처럼은 살아보려고 그 미흡한 것의 보충을 내 능력으로는 안 되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마저 채워주신다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저도 양심을 있는 놈이라서 적당한 헌금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흥정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온 거예요. 목사는 거기에 사기를 치고 있었고. “여러분, 이래서 복 받은 사람 많이 있습니다. 어린애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으세요. 그러면 당신이 모델로 삼은 사람처럼 따라 붙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가 사기 치는 것도 되지만 일반교인들도 그 소리만 들기를 원해요. 어떻게 하면 나도 부자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 몸이 건강하고, 어떻게 하면 내 애가 좋은 대학 가고, 사업 안 망할 수 있고, 가족 화목할 수 있습니까? 그것만 듣기를 원했던 거예요. 그게 전부 자기를 위해서 안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출애굽했다고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절대로 육체는 애굽을 떠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애굽에 살아도 몰랐던 진면목을 앞으로 계속해서 너희를 통해서 애굽을 완전히 다 사골 푹 고아 우려내듯이 얼마나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애굽적인 요소로 물들어 있는지 일구어내는 거예요. 출애굽할 때 죽었던 어린양이 점점 더 인격적으로 실체를 드러내면서 그 죄 때문에 희생하신 분과 항상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들이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구원파의 구원은 구원을 자기가 소지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도님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이것은 개인용으로 소지할 구원이 있느냐는 것으로 구원파, 권신찬이 이야기하는 것이고. 성경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구원에 우리가 참여된 거예요. 구원이 만약에 햄버거라면, 우리는 햄버거라는 덩어리 채 내가 사서 갖고 있는 구원을 생각하는 반면에 주님의 구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햄버거가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양배추 이파리로 가담되었다는 상태가 구원관계에 놓여져 있는 겁니다. 다르잖아요. 구원파는 자기가 소지해야 되지만 구원하신 분이 우리를 소지함으로써 우리는 덩달아 구원이 돼버린 거예요.

이걸 가락교회에서 할 때 장기판으로 했어요. 장기판이 구원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장기알로 가담된 거예요. 바둑판이라면 바둑알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이걸 장(場, field), 어떤 구조에 뒤집어 씌워서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누리고 만끽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신약에서 ‘주 안에서’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없다고 단정지어놓고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게 개인용도의 구원을 소지하지 마시고 아예 내 몸 자체를 자기밖에 모르는 우상 숭배하는 나 자체가 주님에 의해서 활용당할 때 이미 구원관계에 돌입된 거예요.

구원 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쪽으로 가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못 됐나? 어떤 문제 때문에 금식했는데 요즘은 40일 금식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보통 이틀 금식하는데 이틀 금식하고 난 뒤에 뭘 느끼겠어요? 나는 금식했던 존재라는 걸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정도로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모든 진행 과정에서 금식하게 하는 이유가,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금식 가운데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상숭배하면서 바뀌는 게 아니고 구원하신 주님을 다시 새롭게 동행을 느끼면서 사는, 혼자 인생길 가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인간으로 바뀌게 될 때 그 사람이 바로 주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길게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보면 이렇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약속의 땅에 간다고 했는데 막상 시내산에서 멈추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시내산에서 모세가 떠나고 난 뒤에 자기의 본색을 유감없이 발휘했거든요. 자기 딴에 송아지 형상으로 여호와라고 만들어놨잖아요. 성의를 다했는데 자기를 위하여, 자기 구원, 자기 천국, 복된 여생 등을 노리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그 모습을 까발리면서 그 행진이 스톱됐습니다. 여기서 추가적인 요소가 없으면 그들은 약속의 땅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그 추가적인 요소가 뭐냐?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뭘 들고 옵니까? 처음부터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 잡고 홍해 앞에서 할 일도 없는데 십계명 주시면 될 텐데 홍해 건너고 난 뒤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그 전에 언급할 게 있어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무슨 조건으로 나왔습니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말고 어차피 죽음의 사자가 칠 거, 산 양을 끈에 매어 문 앞에 내놓으면 죽음의 사자가 양을 대신 쳐서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내가 잡은 피나, 천사가 잡은 피나 같은 피잖아요. 왜 내가 잡아야 되지요? 제 아이디어 어때요?

형제 같은 양을 내가 잡지 말고 어차피 죽음의 사자가 오니까 그 길목에 제삿밥 내놓듯이 해서 내놓는단 말이지요. “양을 대신 죽이시고 우린 살려주세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죽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3장에 그 이유가 나타나는데 애굽인들의 장자는 다 죽었고 히브리인들은 살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산 게 아니고 사라졌어요. 그 맏아들은 자기 집의 아들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어린양 이용하고, 십자가 이용하고, 예수님 피 이용하면 내가 산다가 아니라 지금까지는 너의 사람이었는데 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어요. 지금 있는 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기 좋으라고 예수 피 믿는 식으로는 구원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 피를 믿는 순간 성령이 와서 믿게 되는 순간 그런 내가 사라지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변화 되어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걸 자꾸 놓치니까 신천지, 구원파들이 돈만 빼먹고 기생을 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가다니!” 그 나가 없어져야 돼요. 이렇게 돼야 돼요. 주님이 나보다 귀한 분이구나. 내가 너무 무리한 걸 요구하는 겁니까? 성경에 있는 그대로에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저가(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위하여’ 전에는 나를 위하여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돼있어요. 그러면 주님을 위해 사는 방법을 우리가 살 수 있어요? 못 살아요. 그게 안 돼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우상숭배자라고. 때려죽어도 나밖에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들은 건 있어서 주를 위해 살고자 하지, 육신은 주의 법을 원하지만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누가 우세입니까? 밀고 당기고 해서 주를 위해 사는 게 맞는데 맞아요. 사람이 이성이 먼저입니까, 감정이 먼저입니까? 감정이 먼저에요. 이성은 나중에 핑계거리고 대는 것뿐이고. 어떤 여자가 좋다. 아니야. 좋아해서는 안 돼. 그렇다고 해서 안 좋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인간의 본성은 죄가 우세해요.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고 성령 받은 사도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고백입니다. 성화론 같은 건 없어요. 그건 목사가 지어낸 것이고. 현실적으로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간에 죄가 항상 선보다 우세합니다. 우리는 선보다 죄 짓는 것이 더 기쁘고 태생이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여러분 스트레스 받을 때 가장 잘 푸는 방법은 죄 지면 돼요. 그것보다 깨끗하게 푸는 방법은 없습니다. 엄마가 아이한테 이 떡을 마음껏 먹어라 하면 잘 안 먹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떡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절대로 먹으면 안 돼. 그러면 아이는 공부하면서도 노리는 게 있어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떡 좀 먹어도 용서해주겠지.” 지금 목표가 죄 짓는데 있어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 올라갑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착한 일 많이 했잖아요. 푸는 건 노래방에서 풀게 돼있어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힘들어 죽어요. 본성은 애굽이잖아요. 거기다 추가해서 십계명 왔지요. 이게 맞을 리가 있습니까? 안 맞아요. 그러니까 십계명이 안 맞아도 지키는 척은 하지요. 그런데 아주 결정적일 때 자기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서 “나는 하나님 싫어.” 이렇게 나오게 돼있어요. 신학 공부한 것, 신앙 생활한 것, 성경 공부한 것, 한 순간에 다 날아가는 순간이 옵니다. 내 자식 바다에 빠지게 되면 이제는 신은 없다. 그때부터 예수는 빠이빠이에요. 그동안 쌓아놓은 구역장 감투에다 온갖 것 다 날아가요.

신문에 안 나온 이야기인데 안산에 어느 집에 딸이 둘 있는데 큰 딸은 미국에서 의사하고 있고 둘째 딸이 단원고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답니다. 그리고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교회에서 엄마와 딸이 봉사 다해요. 그 교회의 자랑거리였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안 나오네. 시체도 못 찾았어요. “주여, 왜 저에게?” 그럼 주님의 응답은 뭡니까? “무슨 일 있었나?” “내 딸 죽였잖아.”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이미 인간 자체에 죽는 요소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결국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인간 자체가 고장 난 거예요. 이건 리콜이 안 돼요. 수리해도 안 되고. 인간 자체가 정상이 아니고 벌써 죽음이라는 암이 확대되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그 집사님이 딸 죽고 난 뒤에 교회 안 다니고 [거짓말이야] 김추자 노래 틀어놓고 한다면, 그분이 그동안 배웠던 성경공부, 들었던 설교, 한방에 다 날아갑니다. 이것은 껍데기에요. 제가 말한 것은, 인간은 육신이지 육신에다 성경공부, 정신적인 교회문화 채워도 한방에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공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과 거래와 흥정 중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 내 것 지켜주시고 내 것 잘 되게 하옵소서.” 그러한 충동적인 우상숭배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사도 바울은 지금 내가 말씀을 아는데 내 속에 다른 힘이 있는데 그 힘은 내가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선을 항상 악이 이겨버려요. 성령 받은 사도가 자신 없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갑자기 희망이 생겨버리잖아요. 이게 기쁜 소식처럼 들리잖아요.

왜 그런지 고린도전서에 보니까 내가 저지른 과거가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구원시키기 위한 주님께서 일부러 만들어낸 과거였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지나간 과거를 우리는 내 과거라고 고집 부렸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감화되게 되면 나의 과거가 주께서 일부러 만들어낸 과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소급해서. 세 살 때 오줌 싼 것부터 해서 모든 걸 소급해서 그렇게 돼요.

강도가 구원받았잖아요. 강도가, “강도질 안 하고 공무원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것 없어요. 그는 강도짓 해야만 했어요. 강도짓해서 사람 몇 명 죽이고 십자가 옆에 달려야 돼요. 주님께서 처형당하기 전에 달리면 안 돼요. 주님과 함께 동기생으로 달려야 돼요. 그리고 주님을 만나야 되고 죽기 전에 눈 떠야 되고 정신 있을 때 고백했어야 되고. 이제 내 결정, 내 자유의지가 아니고 주께서 일부러 조작해낸 거예요. 왜? 어차피 우리는 죽은 놈이니까. 죽은 인간을 다루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고 없는 나를 있게 만드시는 그 놀라운 능력이 이미 과거부터 찾아가서 구원이라는 햄버거 속의 상추 잎사귀 되게 만들어놓으신 거예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사도 바울이 했습니다. 그 밑에 뭐가 깔려있습니까? 나는 내 식대로 하면 우상숭배자로 나는 항상 선이 아니고 악이 나를 우세한 그런 인간이라는 걸 깔고 그걸 다 인정하면서 그러니까 십자가, 그러니까 주의 은혜다. 내 인생은 주께서 만든 인생이지 내가 만든 인생이 아니라고 소급해서 늘 깨닫는 것, 그럴 때 오호라 감사하리로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천국의 삶이 그런 식으로 비춰 나오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4-05-07 10:41

20140502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행진을 멈추고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시간에 좀더 난해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행진이 멈추고 난 뒤에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애굽에서 나온 것을 자기 역사에서 순서가 옛날에 애굽에 살았다, 과거. 지금은 광야를 걸어서 시내산에 도착했다, 현재.

시작이 애굽부터 했거든요. 그런데 시내산에서 시작을 바꿉니다. 애굽이란 장소가 시작이 아니고 시내산 자체를 시작으로 보는 겁니다. 시내산을 목적으로 봐요. 시작이 그곳이고 목적도 그곳이고. 십계명 주는 것이 시작이고 십계명의 완성되는 것이 끝이고. 그건 누구 입장이냐 하면, 말씀을 주신 하나님 입장이란 말이죠. 사람의 입장은 애굽에서 몸 있고 살았으니까 가축과 재산, 모든 것을 잘 누릴 수 있는 확장시킬 수 있는 복 받는 그곳에 가서 옛날처럼 다시 사는 게 이스라엘은 또 인간으로서의 목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목적과 이스라엘의 목적이 일치가 되질 않습니다. 일치가 안 되는데 어떻게 동행이 가능하냐? 그 문제를 두 번째 시간에 살펴봅시다.

수평적이란 말은 애굽에서 홍해 건너왔다. 광야, 시내산, 뭔가 미지의 약속의 땅, 그들은 아브라함 언약에 보면 가난안 땅이라고 알고 있죠. 열 족속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시내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을 줌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시작이고 마지막도 말씀의 세계로 돌아가야 된다. 그러면 이쪽은 수평적이고 이것은 수직적이고. 수직을 고집하시는 분과 수평을 고집하는 인간들과 어떻게 동행이 되느냐 말이죠. 동행이 항상 삐걱거리지요. 그 삐걱거림이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사기 1장에 어른들이, 옛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애굽 군대를 물리치고 홍해를 건너게 해서 우리는 이 땅에 왔다. 기적적으로 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라고 하니까 자식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안 봤습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못 믿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해요? 못 봤으면 성지순례 가서 홍해에 가자. 홍해 가면 어떻게 할 건데요? “홍해야, 열려라!” 홍해가 자동문입니까? 열리게. 하나님께서 홍해와 동일한 능력을 행하여 그 능력이 놀랍게도 홍해가 갈라지는 게 아니고 주변에 있던 이방민족들이 갑자기 쳐들어오는 기적을 베풀어버립니다. 홍해가 앞에서의 난감함과 자기보다 강한 적들이 오는 난감함이 둘 다 하나님의 본래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직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평적인 데다가 주입시키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양쪽 다 인간의 능력과 아이디어로서는 대처가 안 되는 식으로 주어집니다. 그걸 ‘표적’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담겨 있는 원칙과 원리를 반복시킨다는 게 표적이에요.

가나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 되는 것이 표적이지요. 그게 이적이 아니고 표적이 되는 이유는, 결혼식에서는 포도주가 필요하지만 예수님 때에는 물 같은 인간이 포도주로 변하는, 천국에 가는, 새 언약이 함유돼있는 존재, 천국 백성 만드는 그때를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일어난 일을, 목적은 따로 있고 그걸 예고편으로 잠시 보여주는 걸 표적이라고 합니다. 내가 보일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말은, 요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잖아요.

요나의 표적을 대전에서 이렇게 강의했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져 넣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죽은 걸로 간주되지요. 요나도 그렇게 알았고. 그런데 요나가 물에 빠졌을 때 죽어야 되는데 안 죽잖아요. 이게 깊은 의미가 있어요. 우리에게 진도 바다는 사람 죽이는 곳이고 안산은 땅이니까 산 곳으로 보잖아요. 울산은 살고 공동묘지에 간 사람은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게 문제성이 있는 인간들의 제한된 한계에요. 잘못된 생각이라고요. 죽어도 산다는 것은 현재 우리 이성과 감각으로는 수용이 안 돼.

주 안에 있으면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아있어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그 증거가, 예수님이 살았어요, 죽었어요? 지금 살았잖아요. 눈에 안 보이지만 살아계시잖아요.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처럼 엘리야도 살아있고 모세도 살아있는 거예요. 변화산에 나타났으니까.

그러니까 교회 와서 살려달라고 하면 안 되고, “죽어도 산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이래야 되지요. 어떻게 하든 월급 더 받아서 살게 하옵소서. 지금 통장 빵구나고 부도나겠습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러지 말고 부도나든, 암에 걸려 죽든 그것이 곧 산다는 것을 제가 알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쉬는 것이고 영원한 상태에 돌입됨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걸 이야기하는데 사사기의 젊은 사람들은 이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아버지나 그렇게 믿고 우리 젊은 사람한테는 안 통합니다. 나는 무지무지하게 긍정적으로 했는데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십니까? 네가 본 긍정이 뭐고? 그건 돈 잘 버는 거잖아요. 돈을 가진 자는 돈으로 망하고, 힘을 가진 사람은 힘으로 망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잖아요. 그 목적이 우리를 힘들게 해요. 목적이 없을 수 없으나 특정 목적을 가진 순간 그때부터 졸지에 그 목적의 종이 돼버려요. 일곱 귀신 다 달려듭니다.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 심지어 굿하란 소리까지 나옵니다.

어떤 목적에 매이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그 목적의 노예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가정을 화목해. 그때부터 목적에서 놀아나는 사람이 돼버려요. 살아야지 하면 마귀의 종이 돼버립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 말씀처럼 죽기를 무서워서 종노릇한다는 말이 그 말이거든요.

얼마나 안산 사람들이 또 한국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했으면 살려내라고 데모를 하겠습니까? 살려내라고, 돌아오라고. 돌아오면 안 돼요. 왜냐하면 천국으로 가야지 왜 지옥으로 되돌아옵니까. 여기에 말씀이 있습니까, 천국이 있습니까? 여기는 자본주의밖에 없는데. 왜 그 아이를 고생 더 시키려고 합니까? 그 순박한 아이를. 괜히 안산에 살아서 더 지옥 백성 만들고.

모든 사람들이 평소에 교회마저도 전혀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통 난 사건이 이번에 배 빠진 사건입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줬어요. 믿기는 개뿔을 믿어? 자기를 위해서 교회 다녔고 우상 숭배자였지 자기 잘되는 게 목적이 아니고 말씀대로 그대로 이뤄진 것에 대해서 감사가 나오면 참 잘하셨습니다.

사람이 언제 마지막 감사가 나오느냐 하면, “주여,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그 순간 진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순간입니다. 다이어트 한다고 약 먹고, 운동하고 요가해도 안 되고, 뱃살 빼려고 했는데 엉뚱한 살이 빠지고, 아무리 해도 안 될 때 마지막 외칠 것은,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하는 게 최고의 좋은 응답이에요. 왜냐하면 죽게 되면 다이어트라는 목적도 같이 날아가잖아요. 그러면 일곱 귀신이 없어져버리지요.

아이가 애 먹일 때 둘이 약 먹고 죽자. 우리 어머니가 젊을 때 그런 이벤트를 벌였어요.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실은 소화제였어요. 소화제로 협박을 했는데. 진짜 믿음 좋은 자식 같으면, “어머니, 이제야 저한테 축복이 임했군요.” 하고 같이 죽자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우상숭배자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하지요. ‘잘못했어요.’가 잘못 된 거예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이게 잘못된 거예요.

결국 일단 살고보자가 항상 우리 삶의 밑에 깔려있으니까 제가 아까 인간은 날 때부터 고장 났어요. 고장 난 것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고장 난 걸 받지 않고 자꾸 고장 났음을 드러낼 뿐이고 드러냄으로써 고장 안 난 분이 누구냐? 그분 덕분에 주 안에서, 주님이라는 보자기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이 세상의 원리는 그런 게 없어요. 각자의 공로가 있어야 공로를 근거로 구원받는 방식이에요.

얼마 전에 끝난 기황후란 드라마 보니까 나오는데 기씨가 황후가 되고 난 뒤에 대승상 탈탈이고 전부 다 한 가락씩 공로가 있어서 같이 영광 받잖아요. 거기에서 출애굽, 해방돼야 됩니다. 뭔가 한 게 있을 때 복을 받는다는 것, 예수 믿는 공로가 있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의 이론이에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으면 치매 걸리면 지옥 갑니다. 언제 구원받았는지 물으면 안 돼요. “아저씨, 언제부터 치매 현상 있었습니까?” 이걸 물어야 돼요.

사람이 어떤 논리를 남한테 적용하기 전에 본인한테 적용시켜야 되거든요. 구원파의 논리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만 구원되기 때문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는 거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은 구원이 없기 때문에 짐승만도 못하니까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논리잖아요. 그러면 그 논리를 적용시키려면 구원파가 여의도에서 시위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유병언이 교주가 아니고 예수가 교주라고 했잖아요. 참 이 사람들이 바보야.

그러면 경찰이 와서 그 사람들은 쏴 죽일 때 그 사람들은 경찰에게 고맙다고 해야 돼요. 왜?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환영받아서 십자가 졌습니까, 밉상받아서 십자가 졌습니까? 주님께서 밉상 받아서 십자가 졌잖아요. 그렇다면 그 길을 가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들이 구원파에 대해서 욕을 할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지요. 그러면 여의도 KBS 앞에서 데모할 때 즐거워서 했습니까? 결국 힘을 어떻게 모으느냐. 이 세대는 힘의 세상이니 우리도 힘을 가지자. 두세 사람은 싫다는 거예요. 수천 명 돼야 어느 정도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빌딩도 있어야 되고 예배당도 커야 되고. 뭔가 힘을 갖기 싶어서 예수를 팔아먹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는 우리에게 힘을 주는 존재라서 예수 믿는다. 그래서 예수님이 교주다. 이런 주장밖에 안 됩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 구원파만의 이야기겠어요?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좋은 게 아니고 예수님이 가져다준다는 그 힘이 나로 하여금 빛내게 한다는 희망과 포부 때문에 사람들은 힘을 얻기 위해서 모여드는 거예요. 여기는 힘도 없고.

그 다음에 우리가 볼 것은, 수평으로 가는 사람들과 수직으로 가는 하나님 사이에 어떻게 동행이 가능한가? 이것만 있으면 돼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이겁니다. 드릴이지요. 드릴의 용도는 구멍을 뚫는 거예요. 꽉 차있는 공간에 구멍을 내면 뻥하고 뚫리지요. 이것은 숫자로 하면 1이 아니고 0이 돼요. 없음이 되지요.

하나님께서 창조 때 원리가 먼저 있고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걸 없는데서 만들었고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게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없는 것을, 그리고 죽은 것을 드릴로 구멍을 뚫는 거예요. 다시 동행하는 방법이 뭐냐? 그들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을 뚫는 겁니다. 그게 어린양의 희생, 피 제사입니다.

잠시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이게 식빵입니다. 식빵이 덩어리거든요. 이걸 나이프로 자르면 얇게 떨어지겠지요. 그런데 식빵 속에 잼이 관통해 있다면, 식빵을 자르면 잼이 지나간 흔적이 나오겠지요. 잼이 4종류라면 네 종류의 잼이 나오겠지요.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식빵이라고 보고 주님께서 계속 동행하시면서 칼로 잘라내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있던 원리와 원칙이 관통하고 있거든요. 이 관통한 것만 끄집어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걸 뽑아내야 성경해석이 돼요. 여긴 동일한 원리가 흐릅니다.

동일한 원리는 아까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주님만의 고유한 목적이 있어요. 그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생긴 자로 하여금 영광과 찬양을 돌리게 하는 목적이 있어요. 그리고 죽은 자를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누가 저렇게 살려냈어요?” “내가.” “감사합니다.” 성도로 하여금 나는 죽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늘 새기는 잼을 항상 이 앞에 남겨두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리원칙, 드릴로 구멍을 뚫어서 집어넣는데 구멍 뚫기 전에는 100% 자기의 수고와 노고입니다. 이 교육관 짓기 위해서 내가 집을 팔아서 전세금 빼고 헌금했습니다. 어떤 장로는 맨날 기도하면서 주차장 넓히는데 돈 바쳤습니다. 어떤 목사는 처음에 교인 20명이었는데 지금은 이천 명 되었습니다. 그동안 새벽기도하고 기도원에서 특별 기도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이걸 노골적으로 이야기 안 해도 뭔가 건드리면 나오게 돼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피아노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피아노 만지는 걸 유독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피아노 바친 사람이에요. 이런 모든 것이 결국 자기 폼 내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한테 헌신한 겁니다. 그게 고장 난 인간의 특징이거든요.

피아노를 바쳤는데 어느 날 도둑맞았을 때 누가 가슴이 뚫리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심드렁하지만 누가 아프겠어요? 구멍 난 것처럼 누가 총알 맞았어요?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비어있는 느낌, 이게 은혜 받은 거예요. 아이를 잘 키워서 딸이 시집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축하한다고 하는데 신랑 아버지는 하루 종일 찡그리고 있고, 신랑 엄마는 화장 예쁘게 해서 활짝 웃고 있고 있을 때 인상 좀 피라고 말하거든요. 뭔가 구멍 난 것처럼. 내가 수고한 것도 없어요. 내 수고가 다 날아간 거예요. 그동안 내가 믿었던 것은 예수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역사를 믿었다. 나의 애씀과 내 공로가 마일리지처럼 쌓여 있는 그것을 교회라는 이름을 빙자해서 차곡차곡 쌓고 있었던 거예요. 지옥 갑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거기에 구멍을 내니까 다메섹에서 사울이 예수를 만날 때 “네가 핍박하던 예수다.” 그게 십자가의 반복. 십자가는 죽은 자도 살려내기 위해서 너는 먼저 죽은 자여야 한다. 따라서 이 구멍이 없을 때 철저하게 이 자리는 내 공로, 내 이름, 내 영광, 내 자존심으로 차 있어라. 그게 평생 그렇게 사는데 성령이 와서 구멍을 팔 때 그 속에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영을 집어넣으면 이 사람은 주 안에서 관통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격이나 관계없어요. 누구나 구원받은 사람은 똑같은 거예요.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 누가 있으며 부하거나 똑똑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못난 자를 택하사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심이라.

방금 이야기한 것은 신약이고 구약은 어떻습니까? 구멍을 파는 것은 언약이라고 하고, 언약은 보따리인데 풀어보면 성부와 성자 사이에 창세전에 이미 결정 난 내용입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결정된 내용들이 언약에 있거든요. 창세전이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나기 전입니다.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선악과 따먹어야만 했던 거예요. 인간이 따먹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왜 사느냐? 죽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왜 죽어야 되느냐? 죽어야 선악과에 심어놓은 취지가 살기 때문에 그래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선악과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잎사귀에 혓바닥대고 독이 올라야 돼요. 누구 하나는 깃발을 들고 해야 돼요.

우리가 울산에서 사는 것은 이렇게 죽는 것이 처음부터 죽어야 되는 거구나. 사람은 다 죽어요. 다 죽으면 천국 가느냐? 그게 아니고 죽을 때 죽음의 의미가 숨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성경과 결부된 죽음이 나에게 현실로 주어졌다고 오는 거예요. 인간은 역사거든요.

인간은 역사를 현실로 보는 겁니다. 현실, 역사에 구멍을 뚫는다는 것은 묵시, 역사를 초월한 창세전의 내용이 역사 속에 담길 때 어떤 경우에는 홍해가 갈라지고 어떤 경우에는 요단강이 멈추고. 인간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가능성과 수고를 총동원해도 안 되는 장벽을 주시는데 그 장벽의 해결은 내 식대로 안 되는 거예요.

사무엘 시대에 금식해서 블레셋을 이겼지요. 사울이 그걸 봤단 말이에요. 보니까 역사가 돼버렸어요. 그 다음에 사무엘이 오지 않을 때 사울이 금식하고 제사 드려서 블레셋을 이겼습니까? 졌잖아요. 전에 이렇게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 그 기도 또 해보세요. 그건 이미 역사가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뜻이 이루어지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걸 간단히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기도를 하게 하셔서 듣지 않음을 알아야지 기도하지도 않고 기도 안 들으니까 안 하는 것은 자기 역사가 들어갔어요. 교묘하게 빠져나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사람은 답답하면 기도하게 돼있고 한 맺히면 하게 돼있어요. 할 때는 꼭 응답되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내 뜻대로 안 되고 주의 뜻대로 되게 하는데 그 뜻이 기도하기 전에는 예상치도 못한 큰 기쁨과 세상으로는 얻을 수 없는 하늘의 은사를 받아야 알 수 있는 큰 만족을 주십니다. 그런 만족이 있을 때 모든 일에 감사가 되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희망사항이 나옵니다. “주여, 이 참에 저를 데려가셔도 저는 동의하겠습니다.” 그런 응답은 자주 받는 게 아닌데 큰 구멍 나야 응답이 와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목적을 없애려고 백날 해봐야 안 됩니다. 잠 안 올 때 양 헤아려봐야 양 오만 마리 세다가 깨거든요. 그래도 양 수는 세야 돼요. 내가 왜 잠을 자려고 하지? 내가 살기 위해서? “그렇지 내가 사는 자체가, 내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욕심이었구나.”라는 걸 알면 그때부터 잠 잘 옵니다. “오늘밤에 데려가주시길.” 이러면 저절로 잠 잘 와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은 주 안에서 주님 십자가에 동참할 때나 있을 내용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구멍을 뚫고 거기다 말씀을 넣어주게 되면 말씀이 있는 그 자체가 우리가 멀리 안 가도 약속의 땅에 안 가도 이미 목적이 달성된 거예요. 안 가도 광야에서 죽어도 그 사람은 천국 갑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와도 하나님이 구멍을 안 뚫어주면 약속의 땅이 애굽 땅이 돼버려요. 내가 아파트 평수만 넓게 해주신다면 행복하겠습니다. 그래봐야 난방비나 더 들어가지. 아파트 좁을 때는 생각도 못했잖아요.

사람이 한 번 맛을 들이면 인간 버려요. 큰 차타고 다니면 작은 차를 타면 죽고 싶어요. 내가 벤츠 타다가 모닝을 어떻게 타나. 갑자기 좌절감 느낀다고요. 그만큼 인간은 문제가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벤츠를 타시되 주께서 구멍을 내주시면 벤츠 열 대 있어도 괜찮아요. 벤츠 모으는 게 취미라고 할 수 있는데 구멍이 나 있어야 돼요. 내가 벤츠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십자가 때문에 산다고 하도록 성령께서 동행을 해주신다니까요. 이건 우리가 부른다고 오는 게 아니고 동행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가잖아요. 내가 자살해서 죽는 게 아니고 동행하시기 때문에 죽이신다고. 죽이시는 이유를 알면 동행자를 발견이 돼요. 눈치 챌 수가 있어요. 살리려고 죽이시는구나. 죽이려고 죽이는 게 아니고.

그 다음 이야기해봅시다.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지금 하나님과 모세가 장난치는 것 같아요. 아이가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일부러 엄마, 아빠가 짜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보, 저렇게 애를 먹이니까 집 나갈까?” “당신이 나가면 밥은 누가 하고.” 그러면 아이는 순진해서 잘못했다고 나오잖아요. 그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야. 이 백성이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다 죽이겠다고 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그러면 애굽에서 건져낸 취지가 없잖아요. 그러면 백성들 욕하는 게 아니고 그들을 구원해내신 하나님 실력이 모자란다고 실컷 구원해놓고 하나도 안 남겼다면 어지간히 실력 없다고 욕 얻어먹으면 안 되잖아요.” 이 대화의 모습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모습입니다.

지금 구멍을 뚫어놓고, 구멍 뚫는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몸만 나왔고 모든 것은 애굽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거기에 구멍을 뚫어서 수직적으로 말씀의 완성을 심어주지 아니하면 그들은 지금 죽어도 천국은 못 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할 수 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도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할 때 참 궁금한 게 있어요. 그 이야기할 때 제자들은 잠을 잤잖아요. 들은 사람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나오거든요. 누구한테 베껴서 기록했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할 때 제자들 다 잤는데 어떻게 알아서 요한복음 17장에도 기록돼있지요? 하여튼 중요하지 문제니까 넘기고.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안 마셔도 일이 성사되게 하옵소서. 그런데 그 말을 할 때 장난삼아 했습니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는 간절히 기도했지요. 그런데 “역시 안 되겠지요. 내 뜻 접으시고 아버지 뜻대로 실행하시옵소서.”라고 하니까 그 후에 가룟 유다 앞세워서 체포했지요.

그 대목을 보게 되면 뭘 느끼느냐 하면 예수님도 막판에 빼느냐 이 말이지요. 그전에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단 말이지요. 별에서 온 그대도 아는데 주님이 모를 리가 있어요. 이미 결말을 알면 신나게 죽으면 되는데 어떻게 할 수만 있거든 식의 말을 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혼자 연기하는 것처럼 하시는 거예요?

방금 제가 문제를 낸 자체가 문제인 이유가 있어요. 사람은 본인에게는 문제가 없고 내가 앞으로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될 이냐는 것은, 내가 흉내 내고 모방해야 될 모델케이스를 대상으로 설정할 경우가 있어요. 나는 저분과 비스무리하면 구원받는다는 모델이 있다니까. 예를 들어서 이건희 회장이 골프 칠 때 나도 골프 치면 회장이 될 수 있다는 작은 연결고리라도 사람들은 찾고 싶어 하는 거예요. 큰 교회가 있는데 같은 목사라면 저 교회가 부흥된 뭔가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덕지를 찾는 거예요. 그게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 자체는 문제가 없고 문제없으니까 완벽한 주님을 따르면 우리도 주님처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주님 쪽에서 먼저 문제 있는 존재로 우리에게 자기가 시범을 보인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보세요. 자기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드렸잖아요. 그러면 심한 통곡과 간구를 안 하면 구원 안 되는 겁니까? 구원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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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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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