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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4. 4. 25)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4. 4. 25) 1강

이름 : 서경수(IP:118.35.139.25)

광주 강의(2014. 4. 25) 2-1

마가복음 1장 2-3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본인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하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어요. 오늘 강의는 ‘소리’라는 단어만 이해하면 쉽게 풀립니다. 소리가 있다는 말은 관계를 유발시키는 관계 망들이 먼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소리가 한 두 개가 아니지요. 지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나네요. 자동차 경적 울리는 소리도 나고.

다양한 소리가 있는데, 마가복음 1장 3절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다고 했어요. 이것은 이사야 40장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 소리는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그냥 “광야에 세례 요한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왜 소리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혼자 “너는 누구야?” 라고 물을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자주 질문을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왜 이렇게 살지? 무엇을 하면 좋을까?’ 등등. 그런데 성경에서는 “야! 소리?” 이렇게 불러요. 이것은 어떤 역할, 기능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관계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라고 주님이 불렀지만 그것은 별 의미가 없고, 그리스도의 종 된 자리, 주님과의 관계 시스템 속에서 바울은 종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은 본인의 이름인데 이스라엘은 관계 시스템 속에서 주어질 역할을 수행할 기능의 이름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지요. 사래는 사라로 바뀌고.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 시스템 속에 한 점을 점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질문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저를 어디에 쓰실 겁니까?”라고 묻는 것이 정상이란 말이지요.

‘리베로’라는 말을 압니까? 배구 경기에서 수비만 전담하는 선수를 리베로라고 합니다. 경기에서 리베로는 1명입니다. 그런데 리베로가 수비수 이름입니까? 역할이죠. 야구 경기에서 ‘톱타자’가 있는데 이게 그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1번 타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5억 명이 시청을 했답니다. 중국 사람이 도민준을 알아요. 도민준 역할은 탈랜트 김수연이 했어요. 김수연은 실제 자기 부모가 있잖아요. 이것은 의미 없고 도민준으로 불러야 드라마 전체의 의미가 유지되는 겁니다. 도민준에서 김수연으로 빠져나오면 관계 시스템이 날아가는 겁니다.

복음이 뭡니까? 내가 구원 얻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이 복음입니까? 이건 구원파 무리들입니다. 구원파는 권신찬이 세운 종교입니다. 유병언은 권신찬 사위고. 구원파는 자기 구원만 챙기면 되는 겁니다. 자기만 죄 씻음 받으면 그만이에요. 그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소유해서 구원 받습니까? 제자들이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 중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 대답이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너희들도 마셔야 된다.”고 했어요. 쓴 잔을 왜 마십니까? 그것이 바로 관계 시스템 속에서 구원 받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마련하신 구원 시스템 속에 우리는 참여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구약을 잘 모르기에 신약의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간다고 주장하는데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주님이 동행을 했어요. 그래서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을 이기려면 그들 자체의 힘이나 신앙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보이지 않는 왕이 있어야 돼요.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주의 이름이 동행해요. 이름은 실체가 없지요. 이근호란 이름에 무슨 실체가 있습니까? 그래서 ‘주의 이름’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름 뿐인가?’ 이렇게 나와요. 실체가 없으니까. 그래서 주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주의 이름’ 자체는 아무 실체가 없어요. 이름 석자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호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없어요. 주의 이름에 실체와 내용을 담으려면 왜 하나님이 주의 이름을 동행시키는지 알아야 해요. 언약을 이루기 위함인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미래 주실 때 모세가 묻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는 이름이 궁금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이 땅에서 하실 작업의 내용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김 집사님 학교에 급식실을 짓는다고 했는데, 목수와 건설업자들이 가만히 서 있으면 이게 무슨 내용이 있어요? 레미콘이 와야 되고, 철근이 와야 되고, 뭔가 작업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묻지요? “이스라엘 속에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주의 이름이 오셨습니까?”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친구 이름 부르듯이 부르면 된다고 생각해요. 주의 이름은 우리가 부르라고 주신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은 실제로 작업을 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는 먼저 땅을 파고 기초 작업을 하지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 작업을 하려면 나의 이름을 파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이름이 아무 내용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입니까? 있어요. 나의 이름은 나의 전부입니다. 내 이름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까지 이뤄놓은 나의 전부를 대변해 주는 것이 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주님이 언약을 이루기 위한 기초공사를 하시면서 파내십니다.

그 파내는 기계가 뭔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팝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어졌던 상황을 반복시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는 것입니다. 그 죽는 이유는, 내 죄를 내가 사랑하는 자식을 통해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내 손으로 자식을 잡아야 합니다.

이번 진도에서 침몰한 배에 탄 학생이 아버지가 죽이기 위해서 그 아이를 태웠습니까? 아니지요. 자식을 손수 죽이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의 관계 시스템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쓴 잔입니다.

내가 예상한 고난은 쓴 잔이 아닙니다. 내가 예상할 수 없지만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그 일로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는 것을 파내고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의미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 이름은 의미 없는 것이구나.’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없음이 분명히 드러나면서, 의미 없는 나를 주의 이름이 주어져서 하나님께 의미가 있는 존재로 바꾸시는 작업을 실시합니다.

주의 이름 안에 하나님의 언약에 담겨 있습니다. 주의 이름은 실제로 이 땅에서 무슨 작업을 해야 돼요. 그게 언약이죠. 그러면 언약이 완성되면서 나타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요. 그럴 경우에만 이 사람은 언약의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미리 주신 이유를 알겠지요. 이스라엘을 주셨고, 그들 속에 주의 이름이 동행하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탈출했던 애굽과는 달리 약속의 백성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시고, 그 작업의 내용은 언약이며, 언약은 아버지가 손수 아들을 죽임으로 이 땅에서의 모든 죄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고, 죄의 저주를 미리 다 척결하고 해결해 버리는 요소, 그 공간을 제공할 때 우리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것과 신약의 ‘소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주의 이름은 본인이 본인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내가 칠판지우개를 선택해서 잡았다면 다른 것은 지우개가 아닌 거예요. 따라서 이것이 지우개라고 선택한다는 것은 반드시 지우개가 아닌 것과 나란히 관계 시스템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아닌 나라가 반드시 같이 상주해 있어야 해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자꾸 달라지는 것은 아시지요. 이스라엘이라고 해놓고 다 구원 받지 않고 갈렙과 여호수아만 살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제거 당하지요. 이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이 계속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데, 그 작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하면, “이것은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라는 식으로 갈라지는 거예요.

그럼 무엇이 계속 확장되고 번져나가는가 하면, 아닌 것이 샘솟듯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할 물이 계속 나오잖아요. 우리는 영생할 물만 계속 나온다고 생각하잖아요. 무엇이 영생이 아닌지도 병행해서 계속 나와요. 대전 성경공부에 어떤 목사님이 참석했는데 강의 후에 저는 떠나고 남은 분들이 1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집사님은 이근호 목사님 강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합니까?”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는 목사들끼리만 할 이야기인데 일반 교인들에게 왜 이야기를 한 것인지, 그것이 교인들에게 유익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내용이에요.

분명히 이스라엘은 ‘무엇이 아닌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이름, 자기 직업, 자기 체면을 고수하려면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만 자꾸 반복하는 거예요. 아까 사모님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이것을 제가 고치려고 애를 쓰는데 --”라고. 고치려고 하지 마시고 ‘무엇이 아니다.’라고 밀어내면 되는 거예요. “이런 나도 아니야.”라는 식으로.

그런데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이렇게 나오면 이것이 목적이 됩니다. 그러면 이 목적이 온갖 귀신이 다 달려듭니다. 사서 고생해요. 내가 누구냐를 찾는 것은 내가 사는 목적도 의미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룰 일이고,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은 아니야.” 이것만 반복하면 되는 거예요.

장을 담갔으면 뚜껑을 열어 먼지나 불순물이 있는지 보고 그런 것을 떠내면 맛있는 장이 되지요. 불순물을 끄집어내면 되지요. 하나님의 방법이 이것입니다. 무엇이 아닌가를 계속 끄집어내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했어요. 그것을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서 “이미 용서받고 난 뒤에 주께서 우리를 손잡고 다니면서 죄가 무엇인지 알려준다.”고 했어요. 이미 간장입니다. 그런데 불순물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은 끄집어내고, 또 불순물이 생기면 또 끄집어내고 계속 그런 식으로 가는 겁니다.

‘선택’이라고 할 때, 본인이 본인을 선택하면 안 됩니다. ‘주의 이름’이 스스로 주의 이름을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만약 주의 이름이 스스로 선택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수립이 안 돼요. 그러면 예수님은 본인을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이 못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가 아니지요. 어떤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하나님이죠. 그러면 선택은 누가 해야 돼요? 아버지가 해야 되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를 선택했다고 하지 않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결코 나의 일이 아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하실 고백이 아니고 오늘날 예수님과 동행하는 우리가 할 고백인데, 그것이 언약 관계 시스템 속에서 그 고백을 하게 하는 거예요. “나는 ~이 아니요.”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나는 제사장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나는 광야의 소리다.” 제사장들이 세례 요한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냐?”고 했어요.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면, 평소에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살아온 방법이 “나는 이런 자다.”라는 식이었어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치 말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구제를 하면서도 외식을 하고, 기도하면서도 큰 소리로 떠들고, 금식하면서도 금식하는 티를 내지요. 이게 바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에요. 남에게 과시하면서 기죽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이름의 내용을 내가 채우려는 짓이에요.

지금 안산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에서 분향을 하면서도 속으로 “휴, 다행이다. 내 아들이 아니어서.”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아들이 같은 지역의 고등학교 학생인데, 일주일 전에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에 수학여행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모든 것은 타이밍입니다.

원인에 원인을 따지면 끝도 없어요. 남편이 “당신은 이사할 때 왜 하필 아들이 단원고등학교로 가도록 이사했어?” 라고 하면, 아내는 “복덕방 아저씨가 이 집을 소개해 줬어요. 내가 다른 쪽에도 집을 알아보는 건데 너무 성급하게 이쪽으로 이사를 했어. 내 잘못이야.” 남편은 “아니야, 내가 이사를 좀 더 미루는 건데 당신 말을 따른 것이 잘못이었어.” 이런 식입니다.

죽은 원인을 찾는데 정확한 원인을 못 찾아요. 원인을 모르고 산다는 말은 자신들이 자기 이름으로 살 자신감을 상실해 버린 것이지요. 자원 봉사자들이 돼지고기 찌개를 끓여 유족들에게 식사를 제공해도 “안 먹습니다.” 죽을 끓여서 줘도 “먹기 싫습니다.” 무작정 바닷가에서 담요 뒤집어쓰고 계속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구축한 나의 이름의 내용에 구멍이 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름이 상실된 부분을 채울 수가 없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예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알아서 뭘 할 건데요? 그냥 세례 요한처럼 광야의 소리로 살면 되는데, 우리는 소리에 불과한데 그런 생각은 않고 자꾸 나의 고정된 무엇을 가지려 해요.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배고프면 돌이 떡이 되게 해서 먹어라.’ 이것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 이름의 내용은 본인이 채우는데 예수 당신도 그렇게 채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왔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이렇게 나오시니 마귀는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지 않았기에 계속 달라붙어서 속삭입니다. “너는 바르게 살아야 해. 노력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입니까? 바르게 산다는 것이 마귀의 시험이란 말이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이스라엘의 내용을 스스로 채우겠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짓이 큰 나라 애굽을 의지해서 통상을 맺고, 솔로몬 때는 이방 나라 여인을 아내로 맞아 그들의 종교까지 들어와서 나라 곳곳에 산당이 세워지고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내 나라는 내가 지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나라와 더불어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주의 이름이 동행하는 이유는 나누고 분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바탕으로 하지 아니하면 성경이 전혀 해석되지 않습니다. 나의 이름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찾아온 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그 때 우리는 ‘소리’가 될 뿐입니다. 어떤 소리? 주님 때문에 유발된 소리.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인데 진짜 이스라엘 계통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요즘 전통기술자들은 전수자가 없어서 나라에서 월급을 지급해 가면서 전통 기술의 맥을 이으려고 합니다. 이 맥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질문합니다. 세례 요한과 그 시대에 믿음 좋았던 성도의 차이점이 뭡니까? 그 시대에도 분명히 신자가 있었어요. 시므온이나 안나 같은 사람이 있었잖아요. 그들과 세례 요한의 차이점이 뭐예요? 역할이 다르지요. 세례 요한은 직통의 소리입니다. 왕이 오신다고 “길을 비켜라.”하고 외치는 소리지요.

그러면 그 소리는 어디에서 외쳐야 합니까? 광야에서 외쳐야 합니다. 관계 시스템 속에서 갖춰야 할 것들이 하나하나 도착이 됩니다. 목재가 오고, 철근이 오고, 레이콘 차도 오고 그래야 건물을 지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세례 요한에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세례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죽이려는 헤롯도 있어야 하고 다 있는 거예요. 관계 시스템 속에 있단 말이지요. ‘하늘나라가 이미 왔어. 심판 날이 왔어.’라는 요건들로 채워지는 이러한 현실은 복음적 안목으로 볼 때만 보여집니다.

선택에는 A, B, C 여러 가능성들이 있는데, 왜 지금은 B 가능성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그것은 누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가 되었으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선택 당했지요. 선택 당하는 순간 나의 이름은 허무, 의미 없음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 강요받는 현실 속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소급해서 나 중심으로 재편성을 해요. “이럴 순 없어. 이러면 안 돼!” 그러면 누가 선택자가 됩니까? 그동안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그것이 나답다는 거예요. 이것이 무너지면서 복음이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계속 실패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진작 우리는 선택당하고 강요당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선택자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선택에 우리가 지금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수용하면 됩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처럼, 들에 핀 백합처럼. 내일 아궁이에 넣더라도 오늘은 주께서 아름답게 보살피고 계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것인데 오늘 아름답게 키울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키우는지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답게 키워요.

이것이 바로 욥기의 주제입니다. 욥은 자기 이름을 고수합니다. “왜 나에게 이른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주님을 원망했는데, 주님이 주신 것은 관계 시스템이었습니다. “네가 염소 새끼 낳을 때 봤어?” 평소에 욥은 염소와 자신이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고난 받고 아프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왕림에 의해서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관련성이 있어요. 프로야구가 복음과 관련성이 있어요. 내가 전혀 모르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와 내가 관련성이 있습니다. 이 관련성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너나 할 것 없이 선택자에 의해 관련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자가 주어졌을 때 그 실 내용은 뭔가 하면 선택하신 분이 아버지로부터 선택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 내용으로 채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현실을 만드는 겁니다.

모든 것은 확정된 언약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지 마세요. 일어나도록 선택했기에 일어나는 겁니다. 사모님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면 자녀들 때문에 아프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내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선택임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고민하고 짜증내는 것은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선택해서 주어진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살면서 우리는 영원히 죄인이 되는 겁니다.

팟핏이라는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가 8살 때까지 철저한 기독교 분위기에서 살았는데 8살 이후에 기독교를 버렸답니다. 왜 버렸는가 하면,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구원 받지 못한 강도가 있는데 그 강도가 너무 불쌍해서 성경 말씀을 믿지 않기로 했답니다.

똑같은 경우인데, 이것을 통해서 예수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가능성 A, 가능성 B가 있습니다. 이 가능성을 누가 선택했어요?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니까요. 선택 당했기에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 이름을 극복해서 “저에게 이렇게 강제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라고 자기 이름을 넘어서서 주의 이름까지 영역을 확장시키는 반면에, 지옥 갈 인간들은 자기 이름에 매여 있는 거예요.

불신자는 늘 자신이 최종 선택자가 됩니다. 이들은 선악과 따먹은 띠를 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처럼 자신이 최종 결정권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결국은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반칙인데, 왜 반칙인가 하면, 염소가 새끼 낳는 것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없지요? 보세요. 내가 나 되기 위해서 잘라 놓잖아요.

구원 받은 사람은 ‘내 중심의 생각은 잘못이구나.’하고 끌어당겨서 그것이 중심이 아닌 것을 깨닫는데, 불신자는 자꾸 끊어버려요. “염소와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데?” 이런 식이지요. 욥도 하나님의 고난과 내가 무관한 것이라고 여기고 살았단 말이지요. 사고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고 일부러 끊었어요. 사고 없는 나가 내가 선택한 나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선택자가 되고, 자기가 주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의 내용을 채우는 겁니다. 인간은 평생 동안 자기에게 좋다는 것은 다 다져 넣어요. 그 집어넣는 재료는 타인의 욕망이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으로 채워 넣지요. 그러다가 옆구리가 터지는 겁니다.

수학여행 간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요즘 많이 부르는 노래가 김범수의 [보다싶다]입니다. 죽을 만큼 보고 싶은 거예요. 평소에는 그 정도로 보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른 것으로 채우기 바빠서. 변화는 보충을 유발하는데, 인간의 욕망은 항상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결여가 일어나고, 그 결여를 타인의 새로운 욕망으로 보충하는 식으로 자아를 형성하면서 수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우상숭배? 별 것 아닙니다. 내 눈에 나밖에 안 보이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세례 요한과 비교를 해 봐야겠지요.

4절을 봅시다.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3절에서 세례 요한을 ‘소리’라고 했지요. 그러면 소리만 지르면 되는데 왜 세례까지 줍니까? 소리의 내용은 주님의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죠. 그러면 천막치고 살면 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쓴 잔을 자신이 같이 마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몇 명입니까? 12명이죠. 12명 속에 바울이 들어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요.

사도 바울의 사도성은 이스라엘과 연관되어 있어요. 12제자는 전부 유대인들이죠. 신약의 새로운 이스라엘은 현재 유대인에서 이방인들로 채우질 때 그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사도는 누구예요? 12제자가 담당을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이방으로 가는 원리가 끊어졌고,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을 경유해야 연결이 가능합니다. 이 연결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지금 회개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합니다.

여기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는 B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A는 말합니다. “너도 구원 받고 싶으면 나처럼 하면 돼!” 왜냐? 자기는 구원 받았으니까요. ‘너도 나처럼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어.’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주께서 허락하지 않는단 말이지요. 어떤 사람을 본받아서 구원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 요한을 본받아서 구원 받는 방법은 없어요.

베드로, 요한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둘 다 구원이 안 되는 상태에서 틈 사이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피입니다. 피에 의하면 둘 다 원수가 된 거예요. B가 하는 말이 “이방인들, 우리를 닮아야 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를 경유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피를 경유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굽니까? 사도 바울이죠.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율법에 흠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이 피를 건너와서 이방인이게 다가갈 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어떻게 천국을 가!”라고 하면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이 이방인을 볼 때 그냥 형제라고 보지 말고, 예수님의 피를 경유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복음이 복음의 최종판입니다. 베드로도 바울에게 책망 받을 것은 받아야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인간이라도 구원 받은 자라면 항상 십자가 피를 경유해서 상대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볼 때도 피를 경유해서 봐야 하고, 아내가 남편을 볼 때도 피를 경유해서 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타인의 욕망이 날아갑니다. 피 안에서는 의미 없어요. 우리가 원했던 타인의 욕망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나의 내용을 그것으로 채우려했기에 그렇습니다. 여자들이 명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나라 멋쟁이 여인들이 북한, 중국 가방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가방의 용도는 안에 무엇을 넣고 다니는 것인데, 북한 가방은 안 들고 다닙니다. 왜 명품 가방을 듭니까? 타인의 욕망이 내 욕망화 되어 그렇습니다. 내 자신이 십자가 피를 경유하면 주님의 욕망만 있지 타인의 욕망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거예요. “남의 집 자식은 물에 안 빠지고 멀쩡하게 살아 있다. 내 아이도 살아 있어야 하는데 없다. 그 결핍을 무엇으로 채우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피와 상관없이 구원 받기 전의 A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구원이란 홍해를 건너와야 되는 겁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건너와야 천국을 가는데, 건너 온 적도 없는데 천국을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여전히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수시로 우리에게 죽음의 경우를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건너온 사람이기에 그런 것을 겁내지 말라고 한 거예요.

지금 그 작업을 세례 요한이 하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행위는 누구를 향해 하는 겁니까? 온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행하지요. 죄 사함을 위해서 요단강에 가잖아요.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는 주님을 만나 주님의 소리가 되었는데, 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 본적도 없고. 그러면 자기의 위치를 저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되는데, 그러면 저들에게 자기와 같은 털옷을 입일까요? 그것이 세례 요한의 의미입니까? 소리의 의미가 그런 거예요? 아니에요.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주님의 소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죽음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만나볼 수 없음을 자기가 먼저 소리가 된 입장에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반복해서 외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 민중들은 예수님께 가기 전에 소리에 먼저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는 절차를 겪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이 해야 될 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차후에 이것이 똑같이 주어지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제가 관계 시스템을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시스템 속에 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을 소리라고 했다. 그러면 소리만 지르면 되지 왜 세례를 베푸는가?’ 소리를 소리되게 하는 작업은, 사람이 죽음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작업의 일환으로 세례 요한은 소리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심판 날이 임박했다.”

소리의 작업은 물세례를 베푸는 것이고,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먼저 주어졌고, 후에 이방인에게도 성령으로 반복케 하십니다. 내가 죽었는데 주님 은혜로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날 위한 세상이 아님을 알게 되고, 따라서 어지간한 사건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습니다.

A라는 경우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왜 내가 책임을 지려고 합니까? 제가 지금 아주 무책임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닌데 왜 내가 책임지려고 나서느냔 말입니다. 모든 것은 강요당한 것이고 말려 든 거잖아요. 그런데 나가 나서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노림수가 뭡니까? 내 인생의 내용은 나 외에 달리 채울 사람이 없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죽습니까? 대답해 보세요.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에 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되고 ‘이런 것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은 아니지. 저것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은 아니지.’ 하면서 도려내시기 바랍니다. ‘이게 전부는 아니지.’라면서 자꾸 들어내야 돼요.

저것은 나와 상관없다고 하지 마세요. 세상 모든 것은 내가 내 위주로 살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4. 5. 2. 09:5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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