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72강, 73강) 누가 불상하냐, 신앙인 140501
유튜브(72강, 73강) 누가 불상하냐, 신앙인 140501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72강
73강
유일자(IP:116.♡.234.248)
14-05-07 07:50
72강-YouTube강의(누가 불상하냐)140501-이 근호 목사
72강 제목은 “누가 불상하냐.”입니다. 요즘 사회에 불상한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나타났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우울해하고 뉴스에 나오는거 보면, 아이들이 진도바다에 빠졌다고 ‘참 안됐다.’ 위로도 해주고, 그 사람들보고 아직 어린애들인데 ‘참 불쌍하다.’ 하는데 그 불상하다는 말은 결국 ‘난 다행이다.’ 자기의 속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후, 나는 천만 다행이다. 우리 애는 참 천만다행이다. 살아줘서 고맙다.’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영원히 불상하지 않으려면 영원히 안 죽어야 되는데 남이 죽는걸 보고 ‘참 안됐다. 불상하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본인도 언젠가는 불상한 존재로 죽게 됩니다.
그럴 때 이렇게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불상한 존재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우리가 가져봐야 됩니다. 안 불상한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모두가 불상합니다. 다 병들고, 늙고, 고생하고 일률적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행복한 사람이 없고,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더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정의를 내려 봅시다.
사람이 남이 불상하고, 자기가 불상할 때, 어떤 경우에 자기나, 남들이 불상하다고 생각하느냐하면, 자기의 소박한 소원대로, 뜻대로 안 될 때 참 불상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 힘들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하고 힘들 때,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지죠. 내가 뭐할라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지..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지.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한평생 고생만 하다 죽는게 아닌지.. 희망, 희망은 언급하지만 결국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 오늘도 고생하고, 내일되면 내일도 고생하고 이러다가 한 인생 고생으로 소비한다면, 그 마지막 모습을 내가 앞당겨서 쳐다보게 될 때, 남 불상하다는 생각보다도 참 내 처지가 안타까울 정도로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인생 말고 다른 인생으로 바꿔 타기도 뭐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불상하다고 여길 때에 종교를 갖게 됩니다. 전능한 신을 찾든가, 부처를 찾든지 찾으면서 찾는 이유가 있죠. 불상한 나를 어여삐 여겨서 불상하지 않는 환경이 되게 해 달라, 좀 자신있게 살게 해 달라 그렇게 부탁들을 합니다.
하나님한테 부탁할 수 있는 무슨 권한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부탁과 이런 것을 원하면서 이렇게 근거를 잡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우리를 불상이 여기신다면서요? 성경에 보니까. 그러니까 불상한 사람 접니다. 하나님은 불상이 여길 준비가 돼있고 제가 봐도 불상하니까, 그 불상함을 저한테 적용시켜 주시옵소서.’라고 이야기하죠.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니까, 그 있는 사랑을 아끼지 마시고 불상한 저에게 퍼부어 주시면 저희들은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할 수 있는 참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사실은 없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지어낸 하나님이고, 조작된 하나님이고,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 진짜 하나님은 누가복음23장 28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사람들이 진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보고 느낌이 뭐냐하면, 울었습니다. 왜 울었겠습니까? 너무 불상해서 울었고,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서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을 때, 불상한 자기 처지가 기쁨으로 달라지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을 찾았는데 막상 그런 인간들에게 등장한 하나님은 그들이 기댈만한 하나님이 아니고, 오히려 불상한 그들마저 ‘아이고 불상해라’ 하고 울정도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얼마나 한심스런 모습으로 나타났겠습니까?
그 다음 이야기, 예수님을 보고 너무 측은하고 가련해서 울고 있는 그 예수님, 거기서만 멈추지 마시고 예수님을 보고 동정해서 울고 있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보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동정 한다는 것은, 그 사람보다 내 형편이 아직은 낫다. 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울음으로서 당신을 위로해 드리겠다는 그런 뜻으로 우는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가 위로해야 되고, 누가 위로 받아야 될지를 너희들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불상한 나를 위로해주는 하나님으로 너희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데 하지만 그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너희들이 상상한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사람 속에 나타난 적이 있는데 그 하나님은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자기보다 처지가 더 못한 처지에 있다고 동정을 받을 정도로 더욱더 처져버린 불상한 존재로서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보면서 누구도 ‘저분은 바로 우리가 기다렸던 그 하나님이 맞다’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결국 그들은 평생 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처지에 있는 겁니다.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모른다, 그게 어떻게 울 일입니까? 주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날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내가 보기엔 너희들이 참 가련한 존재다. 불상한 존재고 종말을 생각해 볼 때 안타깝구나.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을 하고 그 말씀 속에 들어갈려면, 맞습니다. 주님이 당했던 거보다 우리가 더 심하게 당해도 쌉니다. 당연히 더 심한 저주를 받아야 되지요. 라고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주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는 겁니다.
어떤 애가 있는데,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내 애를 생각해 볼 때, 그 집 애가 얼마나 불상하겠느냐, 해서 눈물 흘리거든요. 근데 이 땅에 오신 진짜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자녀 죽었다고 울지 말고, 누구 자녀 죽었다고 우는 너 자신이 그들보다 못지않다는 겁니다. 너희도 저주와 지옥 불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니가 깨닫지 못하니 내가 보기엔 더 한심하구나.” 이런 식으로 주님께서는 오히려 지적을 합니다.
사람보고 동정한다는 말은,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이고 나는 다행스럽다. 나는 괜찮다.’라는 생각이 우선 ‘나는 살았구나. 아이구 큰일 날 뻔했네.’라는 자기 안심에 도취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자기 사정 말고, 남의 사정에 눈 돌리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가. 시편130편 3~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 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호와여 주께서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죄 없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여 누가 감히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서고 누가 주님과 합류해서 천국의 삶을 살겠습니까?
죄가 있는 이상 오직 주어지는 것은, 주님의 저주밖에 없으니 나 자신의 신세가 이렇습니다. 그런데 4절에 그러나 하지만, 사유하심이 주님의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오니, 이 뜻은 뭐냐하면, 주님께서 용서하실 사람에게 어떤 생각을 갖게 하냐하면, 주여, 주께서 늘 감찰하시고, 감시하고 있으니 주님 앞에 의롭다 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시는 이유가 주님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고 생각케 하는 이유가, 주님의 용서는 오직 그분의 고유권한으로만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를 아울러 알기 위해서 이렇게 작업을 해 오시는 겁니다.
용서가 먼저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자기가 주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작업도 병행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찬양과, 경배를 오직 주님께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시편130편 3~4절의 말씀입니다. 이런 자만이 불상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만이 주님보시기에 살았고 오히려 축하해주고, 격려해줄 대상이 되는 겁니다.
누가 불상한 사람입니까? 바로 이러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해서, 주님의 용서가 천하보다 귀한 것을 알지 못하는 그 자들이 아무리 울어도 이 세상의 가장 불상한 무리입니다.
유일자(IP:116.♡.234.248)
14-05-07 07:51
73강-YouTube강의(신앙인)140501-이 근호 목사
신앙인이냐, 아니냐 하는 “신앙인의 기준”에 대해서 언급 하겠습니다. 신앙인의 기준을 보통 사람이 어디서 정립하느냐 하면, 교회에 출석하면서 목사님들이나, 오래 믿은 사람들에게 묻죠. ‘신앙인 맞습니까?’ 그렇게 묻는 것은 교회가 이렇게 이야기 했거든요. 신앙인만 천국가고 불신자는 지옥 갑니다.
그 소릴 듣는 순간 우리가 분류를 하게 됩니다. 아, 이 세상에는 신앙인과 불신앙 인이 있는데, 분류를 하는 거 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나를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는 그 문제가 생각돼서 ‘목사님 신앙인이 어떤 자며, 제가 그 신앙인에 속한 거 맞죠?’ 라고 묻는 것은, 그렇게 신앙인을 분류하시는 기준이라든지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요, 내 사적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 기어이 가고야 말리라 하는, 자기 야망이 먼저 작용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물론 사람인 이상 다 그런 욕심이 있게 마련인데, 그 욕심 있는 사람 중에 또 누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 열두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우리보다 특별나게 잘난 분들이 아니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적인 면을 그대로 다 보여주고 지내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제자들을 보면서 우리의 대변자라 생각하시고 우리를 대변해서 헛된 소리하는 제자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해답을 주셨는가, 그걸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 대답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해답입니다.
마태복음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다음에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인자가 누구냐, 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그 묻는 취지가 뭐냐 하면, 제가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께요.
그 묻는 취지는 사람들 머리에서 아이디어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하나의 개념 하나를 던지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 개념이 뭐냐 하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이 아이디어는 그전에 제자들 머리에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꾹 참고 예수님만이 고이 간직했던 새로운 단체가 교회입니다.
제가 왜 이 말 하냐 하면, 요즘은 ‘교회가자, 나 교회 간다, 교회 다닌다, 교회 등록되었다.’하는 말을 아주 너무 쉽게 빈번하게 자주해요. 마치 절에 간다, 절에 등록했다. 하는 것처럼 쉽게 이해가 되고 아, 절에 간다는 것은 불자구나 하고 우리가 이해가 되듯이 요새 교회 간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교회는 교회 다니고 등록한다고 해서 교회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순서가 있어요. 그 순서가 뭐냐,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배우면서 예수님께서 교회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 낸 것이 아니고, 인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먼저 끄집어냈거든요? 인자가 누구냐를 알지 못하면 주께서 세운교회에 합류된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교회 오시렵니까? 이래 묻는 것이 아니 예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라고 주께서는 물으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이렇게 하죠. 예수님이 누구시냐고 물으면 답변하지.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하는데 이게 쉽게 답변할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길가는 사람보고 제가 묻습니다. ‘아저씨, 돌고래를 사랑하십니까? 하고 난데없이 이런 질문하면, 아저씨가 이 사람 미친 사람 아냐? 이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또는 아저씨, 아저씨는 구더기가 며칠 동안 구더기가 되는 줄 아십니까? 이런 질문을 길 가는 사람에게 물으면, 아마 욕먹거나 미친 사람 소리 들을 겁니다.
왜냐하면 돌고래나, 구더기 이야기는 특수한 장소에서 특수하게 이야기할 문제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 제가 질문 다시 하죠. ‘아저씨, 요즘 대통령이 정치 잘하고 있습니까?’ 그런 문제는 사람들이 아이고, 제가 보기에는 뭐 어떻고, 저떻고 이야기 할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라고 이걸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소중한 분입니까? 그렇지 않죠? 아저씨 돈 벌고 쉽죠? 이거는 누구한테나 의미 있는 질문이예요.
사람이 고생하는게 돈 없어서 고생하는데, 그리고 열심히 일한는게 돈 벌려고 하는데 아저씨, 돈 버는 방법 알려 드릴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에이, 사기꾼아 하면서도 들어나 봅시다 이래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저씨, 예수님이 누구신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러면 ‘저는 궁금하지 않은데요. 저는 절에 다니는데요.’ 하고 퉁명스럽게 반응이 나타나는게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통과 못한다면 교회 30년, 40년 다녀도 교회 다닐 뿐이지 천국백성 아닙니다. 먼저 물음 자체가 “제자들아,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드냐.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은 질문자체가 예수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 하는 이 말은, 너희들은 너 자신에 대해서는 어떠한 신경도 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산다는 것은, 이제는 나에게 대해 신경 쓰고 산다는 그 생활은 끝났다는 그 의미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인자가 누구냐고 물으시는 주님이 이미 몽땅 다 가져간 겁니다. 내 인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 이예요. 딱히 챙길게 없습니다. 내 얘가 어떻게 되고, 내 남편이 어떻게 되고 그걸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인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단지 그 정도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인자된 내가 너희 인생을 몽땅 다 가져가도 너는 거기에 대해서 순순히 다 내 줄 거지? 이렇게 묻는 질문이예요. 저 이웃집 아저씨가 누구냐 그런 차원의 질문이 아니라니깐요. 영화배우 누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이 아니고 인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너를 다 가져갈 거야. 그걸 염두에 두고 하시는 질문입니다. 내가 너의 것을 몽땅 다 가져가도 너는 거기다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거지. 그런 인자가 인자라고 생각하고, 너는 인자에 대해서 관심 갖고 있느냐, 그렇게 물으시는 물음이다 이 말이죠.
교회는 나중 문제기 때문에 교회 등록하고 그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냐는 거예요. 제자들도 우선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태어나면서부터 생겨먹은 것이 오직 나만 중요해요. 사는게 가장 급선무고 그 다음은 나중문제입니다. 내가 아프고, 울고, 불고하는 것이 제일 우선 문제지 남이 울고, 불고하는 것은 나중문제라 말이죠. 내가 우선이고, 하나님도 뒷전이예요. 나부터 중요하죠. 따라서 인간에게 인자가 누구냐 하는 정답을 기대하는 주님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는 뭔가 잘못된 질문을 한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엉뚱한 질문을 하신 거예요.
만약에, 누가 저에게 묻기를 ‘저 아저씨, 내가 어떤지 관심 둡니까?’ 하면 제가 말하기를, ‘나한테 관심두기도 바쁜데 당신에게 왜 관심을 둬요. 저리가세요.’ 라고 하는게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런 소리를 해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이걸 보니까 우리는 흉내 낼 수 있지만 막상 현장에서 이런 정답을 말할 때 이거는 사람의 능력을 능가한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이런 고백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니가 복 받았구나. 이걸 니가 알게 한 것은 니가 똑똑하구나, 니가 실력이 있구나, 그동안 잘 배웠구나 이 말씀 하신 것이 아니고 너로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니 자신이 아니요, 니 부모가 아니요, 니가 배운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야 니가 그런 고백 한 것이, 니 실력도 아니고 니 수준도 아니고, 니 능력도 아니다. 베드로야 니 능력 아니지.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그 위에 교회를 세울게. 그 위에, 그 위에, 그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울게. 이게 바로 베드로와 합류해서 한 몸, 한 교회, 한 소망된 진짜 신앙입니다.
신앙인은 출발점이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 없는 우리가 어느 날 성령이 와서 나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한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런 성령이 임함으로부터 교회는 시작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출발도 성령이고, 모든 마무리와, 관리도 성령님이 다 해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힘으로 우리는 교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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