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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140424-마16장1절(요나의 표적)51강 -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140424-마16장1절(요나의 표적)51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대전140424-마16장1절(요나의 표적)51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6장 초반은 별로 어렵지 않은데 중간부터 어려워집니다. 왜 어려워지느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있어요. 언급이 되어있는데, 이 교회이야기 해놓고 고난 이야기한 겁니다. 교회이야기하고 너는 베드로라 하고 내가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울 것이라, 해서 뭔가 교체 의미를 줘요. 이제 이 유대교를 대신하여 이 12지파를 대신할 새로운 12지파가 등장하는 그것을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미리 알려줘 가지고 내가 교회 만들거든 내가 만들었다고 여겨라. 따라서 교회 있음에 있다는 자체가 주님이 계속 활동하는 것으로 그렇게 봐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면 주님은 어디 가느냐, 나는 고난 받고 이 땅에서 죽어야 된다. 그러니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주님이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할 때, 죽고 살아남이 죽기 전의 상황과 동일한 상황이라고 오해를 한 거예요. “아이고, 죽을 뻔했다. 아이고, 식겁했네.” 이렇게 했다는 것은 엎어질 때, 엎어지고 툴툴 털고 일어나면 되잖아요. “아이고, 내가 엎어질 뻔했네. 내가 다칠 뻔했네.” 다치고 넘어진 상황이나 전의 상황이나 동일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동일한 상황이 아닙니다. 완전히 세상이 바뀌어져 있어요. 동일한 상황이 아닙니다. 부활하기 전에는 주님이 제자들과 같이 육체로 함께할 수 있지만, 부활하고 난 뒤에는 주님이 찾아올 경우에만 허락이 되고 제자들이 같이 있고 싶어도 그냥 홀연히 떠나버리면 제자들의 손에 잡히지를 않아요. 왜 그리되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고 살아난 것이 십자가죠. 십자가의 반복성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의 반복성은 십자가 목걸이 걸면 이것은 반복성이 아니고 십자가의 목걸이는 늘 고정적으로 유지되잖아요. 그런데 사건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손에 조작되거나 연출은 되겠지만, 그 사건은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없어요. 동일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아요. 남녀가 연애할 때, 연애의 감정이 결혼하고 난 뒤에는 찾을 길이 없어요. 왜, 이미 한물간 사건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남자가 바람피우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사랑을 알기 때문에 바람을 피우는 거예요. 차라리 사랑을 모르고 그냥 어른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그냥 살면 되는데, 사랑해서 연애를 했기 때문에 결혼하고 난 뒤에는 이미 그 연애감정이 없어지잖아요. 없어진 것을 다시 찾고 싶어. 더 이상 식모하고는 살기 싫어. 옛날 그 사랑했던 사랑, 그게 있어야 살맛이 나는 것 같아. 동일한 사건을 찾는데 그 동일한 사건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동일한 사건은 예수님만이 이룰 수 있는데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거든요.

십자가사건의 반복은 뭐냐 하면, 그냥 사건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대 자체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거예요. 이 세대 자체를 한 바구니에 얹어가지고.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거예요. 십자가 죽기까지의 모든 사건을 품고 그걸 다시 이 땅에서 떨어뜨리고 다시 건지고. 떨어뜨리고 건지고. 성도한테 십자가사건도 반복되지요.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시고 매일같이 죽인 우리를 다시 살려내시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새우튀김 해놓고 한 번 쳐다보면 반짝, 반짝 소리도 바삭, 바삭 나지요. 그런데 아들 주려고 놔던 것이 3시간 지나면 숨다죽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기름으로 확 튀기지요. 다시 바삭 바삭 하잖아요. 성도도 마찬가지거든요. 주님께서 세상에 집어넣었다가 딸 결혼 때문에 신경 많이 쓰게 하다가 다시 십자가 바라보게 하다가 돌아서면 또 ‘아니야, 이건 성사되어야 돼“ 하다가 십자가 보게 하다가 매일 이런 식으로 반복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반복하기 위해서 악한 이 세상을 전부 다 하나로 대조를 시키는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어요. 하나로 시스템을 만들어가지고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요 시스템 속에서 뭐를 끄집어내는가 하면, 주께서는 사탄과의 관련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태복음16장 미리 봅시다.

23절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단아 물러가라,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교회 만들면서 이 교회라는 것이 이 세상의 어떤 단체와 어떻게 대조가 되는지를 대비가 되는지를 그 때 써먹을 하나의 핵심 요소가 돼요. 일종의 컴퓨터 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괜히 베드로보고 이런 욕했다고 베드로보고 화를 내는 게 아니고 베드로에게 똑바로 하라고 책망하고 교육을 시키는 게 아니고 어떤 칩을 만드는 재료로서 베드로가 하는 그러한 반발도 그게 다 필요한 경우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보고 뭐라고 했지요? 사단아! 했지요. 지금 예수님은 제자훈련을 시키는 게 아니에요. 제자훈련은 성립이 안돼요. 다락방 이런 건 안돼요. 훈련을 시켜서 성도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냥 들었다, 놨다, 반복해서 십자가를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새우튀김은 되게 돼있어요. 그냥. 그러니까 훈련할 필요도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지금 훈련받고 있는데 주님이 훈련하고 있는데, 남들이 왜 나서서 훈련을 해요. 그건 지가 스승이라고 자처하게 되는데. 이 세상에 스승은 없습니다. 예수님만 스승이고 아버지는 하나님만 아버지지, 아비고 스승이고 없어요. 진정한 하나님과 스승은 예수님이 친히 스승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보고 사단아 물러가라 하는 것은 앞으로 진척되어야 될 하나님의 작업은 요런 요소, 요런 요소들이 모아져서 요걸 매일같이 반복시킨다 하는 그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16장 봅시다. 16장부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길로 갑니다. 16장은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해서 공관복음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해요. 16장이 마태복음을 둘로 쪼갰다 이리 보는 겁니다. 16장부터 본격적으로 한 번 해보자. 하는 식으로 팔 걷어붙이고 “그래, 내가 죽어야지. 너희들과 한 번 붙어보자.” 이런 식으로 나섰다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스스로 당신이 증명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이야기 논리하면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바리새인들의 현실, 사두개인들의 현실, 이 사람들의 현실이란 속에서 나름대로의 기적이라는 게 있어요.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반드시 인간이 해내지 못할 요소가 개입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그들은 기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홍해가 갈라졌지요, 여리고성 무너졌지요, 요단강 걸었지요. 하나님이 항상 개입하게 되면 예상 밖의 기적이 일어난다. 따라서 기적들을 모으면 하나님의 일에 집대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과거만 그렇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동일하게 똑같이 앞으로 하나님이 오실 때도 과거와 동일한 차원의 놀라운 기적을 동반해서 오신다. 라고 그들은 믿었던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인자가 올 때는 반드시 구름타고 오게 돼있고 그리고 그들의 신학에 의하면 만나에 떡을 내리면서 장차 메시아는 오신다. 라고 그들은 그렇게 규정을 한 겁니다. 떡을 줌으로서 메시아 티를 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모세는 광야에서 떡을 줬는데 당신은 뭘 줄 것이냐, 이렇게 이야기가 나오지요. 어쨌든 간에 그들은 신기한 기적만이 살길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당신은 어떤 기적을 베풀어서 당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해 보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렇다면 요 기적은 이 세대에서 기대하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이걸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통째로 규정해 버리면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이라 하는 것도 악하고 음란한 더러운 요구사항이 되는 겁니다. 이건 더 나아가서 뭐냐 하면, 너 자신이 문제가 있는데, 문제 있는 내가 어떤 요구를 한다는 자체가 그 요구사항도 역시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잘못된 사고방식가지고 질문을 해대는 것은 그 질문자체도 들어보나 마나 잘못된 삐뚤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진리를 바로 겨냥하지 못하고 진리 아닌 것을 겨냥하기 위한 질문을 내놓는 것밖에 안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적은 뭡니까? 왜 나는 너희의 세대에 속하지 않는가, 그것만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내가 왜 그런 너희들을 지적 질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 그 위치만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아무리 반성하고 회개해도 요 세대에 갇혀있기 때문에 갇혀있는 자기가 아무리 반성하고 회개해도 나중에 반성했다는 그 자체가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거든요.

그래서 교회에서 꼭 문제되는 것은 뭐냐 하면, 회개 많이 하는 여자 권사들이나 집사들이 문제를 일으켜요. 워낙 해결을 많이 하니까. 워낙 착하고 바르게 사니까. 도대체 천사야 뭐야? 저 사람이? 이 정도로 될 경지에 이르러버리면 모든 게 불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은 이렇게 합니다. 3절에 보세요.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뭐는 분별 못한다?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니라. 시대의 표적. 천기는 날씨지요. 날씨를 미리 헤아리는 것은 이 갇혀진 이 인간세대에서는 돌고 도는 거예요. 늘 상 그래왔던 겁니다. 과학이죠. 과학이란 반복적인 법칙에 의해서 내놓는 것이 과학적이잖아요.

너희들이 하는 기적의 수준은 뭐냐 하면, 익히 너희들이 이미 예상하고 있는 기적, 마치 날씨 일기 예보하는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 그런데 너희들 이 세대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은 너희들이 파악할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세대를 이야기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세대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이 시대라고 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있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수 없느니라.

요나의 표적이 뭐냐 하면, 이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요나의 일생을 통해서 보여준 표적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빠졌잖아요. 빠졌으니까 이것은 죽음이죠. 요나가 죽었다는 사실은 누가 평가한 거예요? 육지, 땅, 땅에 있는 사람들이 요나가 죽었다고 본 거예요. 요나가 죽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쪽에서(요나 쪽) 보면 요나가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요나가 고기 배속에서 있다가 몇 일만에 나왔습니까? 사흘 만에 다시 육지로 나왔지요. 그러면 여기서 봅시다.

이 땅에서 육지에서, 이 세대에서 바리새인들의 이 세대에서의 죽었다가 살아나면 이것은 그들이 기억하는 기적이 돼요.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보고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잖아요.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기적이지 예수님이 보여주는 진짜 이 세대자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기적은 아니에요. 그 표적은 아니에요. “아이고, 사람이 죽었는데. 살아났데. 아~ 신기해!” 신기하지요. 인간들이 말하는 기적이지요. 그리되면 자기 자신이 문제 있다는 것은 발견할까요? 발견 못할까요? 발견 못해요. “아이고, 우리 가운데 누가 죽었다가 살아났데. 아이고, 나 그 분 한 번 만나고 싶어.” 이렇게 되지,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런 소리는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표적과 기적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군요. 제가 뭘 해도 죄인입니다.“ 라는 식으로 맞닥뜨릴 때, 우리는 진정한 그 기적이 주님의 기적으로 끝나지 않고 확산되어 내 속까지 완전히 확장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죽었다가 살아나면 좋겠다.“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요나는 하나님의 성전과 더불어서 있었습니다. 이걸 가지고 다윗언약이라 해요. 다윗언약은 성전 하나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류가 계속 되어지는 그 약속을 가지고 다윗 약속,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다윗언약 이후에 성전을 지었거든요. 이 성전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계셔가지고 니가 죄를 지었을 때나, 아플 때나, 니가 가뭄 들었을 때나, 전쟁에 패배했을 때, 다 나한테 오게 되면 내가 너희의 소원을 들어주마. 라고 하는 것이 성전을 주신 취지가 되는 겁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뒤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성전만! 성전만! 성전만! 성전만 있으면 그들은 이제 땡잡은 거예요. 왜? 아쉬운 게 없어요. 뭐든지 다, 물에 빠져도 살려주고 성전만 있으면 다 살아나는 거예요. 왜, 거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상주해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요나가 살아난 것이 누구 덕이냐 하면, 요나의 기도 덕분이 아니고 성전 덕분이에요. 요나는 요나 개인의 사정보다도 이 성전 다윗언약을 계속 전파해야 될 막중한 임무를 띤 선지자입니다. 언약이 죽지 않는 한 요나도 죽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성도는 죽지 않습니다. 이것도 제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지 마세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사적인 우리 개인의 능력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줄기차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자체 안에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항상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사는 그 약속이 보장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병언부터 해서 구원파 다 죽여 버려야 돼요. 다 사형시켜 버려야 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다 죽어야 돼요. 그들의 교리대로 해줘야 돼요. 오대양 아직도 못 살아났어요. 그들이 겁을 내는 거예요. 오대양 왜 죽었는지 알아요? 살아난다고 죽었거든요.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과 바꿔치기 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전에는 내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내가 살기 때문에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아난 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너로 인한 인생은 끝장내고 나로 인하여 사는 제2의 인생을 부활의 삶이라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을 살리는 것이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살리는 것이지 내 이름 유지하면서 살려내는 것은 천국이 아니에요. 어느 종교치고 죽었다가 살아난 종교 다 있어요. 그러나 기독교는 그게 아니고 인간은 그냥 계속 죽어줘야 돼요. 내 몸은 죽고 주님의 몸으로서 다시 살아나야 돼요. 주님의 몸으로서. 요나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요나는 죽고 싶어도 안 죽어요. 그 놈의 고기가 피노키오도 아니고. 그리고 성전을 보고 기도하니까 성전의 의미에 의해서 툭하고 배가 실어내는데 세상에 이런 자가용 배가 없어요. 딱 가야될 곳, 지가 해야 될 그 선교지점에다가 연안부두에다가 딱 토해버리는 거예요. 내려 보니까 완전히 배 삯도 주지 않고 차비도 안주고 거저 왔어요. 그게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가 포함된 세대가 바리새인 너희들 세대와 다른 세대라는 겁니다. 이 현실 자체가 다른 현실이에요. 나는 다른 현실이 왔다는 것을 보여줄 그런 표적들을 날렸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한 번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잖아요. 병을 고쳤지요. 그리고 물위를 걸었잖아요. 이 모든 표적이 사람을 좋게 하는 표적입니까? 사람을 부정하는 표적입니까? 사람을 부정하는 표적이에요.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대목이 요한복음 2장입니다. 11월 8일에 결혼식을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마리아에 속한 세대가 뭐냐 하면, 포도주가 있어야 기어이 결혼식은 기쁨으로 끝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리아는 자기가 기대한 목적에 매이는 존재입니다. 이 결혼식은 하여튼 칭찬받는 결혼식하기 위한 결혼식이 되어야 된다.

이 목적에 의해서 예수님을 종으로 부렸지요. “예수여, 포도주 없습니다.” 예수님이 한 소리할 만하지요. “나와 뭔 상관이 있어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나하고. 내가 포도주 만들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 말이에요. “어머니, 그건 양주장이나 할 문제지 내가 포도주 만들려고 이 땅에 왔습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다른 표적, 다시 말해서 나는 내 일이 내가 만든 현실이 따로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해가지고 “어이, 물가지고와!” 물이 포도주로 변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람이 죄인이 의인되어서 천국 가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포도주를 누가 하는가, 포도주는 하나님이 만드셨잖아요. 하나님이 친히 만들 때까지 주님은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거예요. 심지어 물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기어이 포도주 같은 인간을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어이, 마리아 아줌마, 그 분이 물을 대라고 하는데.” “그럼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제야 마리아가 정신을 차렸지요.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할 때 마리아가 알았어요. ‘아하! 예수님이 지금 다른 일을 하시는구나!’ 알고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시켰어요. 하고 갔다가 놓으니까 이게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게 바로 내 때가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내 때가. 바로 내 때가 되면 바로 그런 현상이 나는 거예요.

내 때가 되기 전에 주님의 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그 전에 있던 포도주 떨어진 사건가지고 주님이 본격적으로 하실 때를 묘사하고 표현해 주신 거예요. 문둥병자를 낫게 했잖아요. 낫게 했을 때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병 고치는 줄 알았어요. 마태복음 8장에서 그게 아니고 그의 죄를 내가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병을 고친 거예요. 병을 고친 게 아니고 그의 죄를 담당한 거예요. 따라서 꼭 병나서 고칠 필요 없고 병 없는 체로 죄만 없으면 되는데 왜 자꾸 우리는 암 걸렸는데 기도로 나았다. 이런 시나리오를 쓰느냐 말이죠. 그냥 멀쩡하게 돌아다녀도 죄만 없어지게 되면 고맙습니다, 하면 되는 거예요.

가난한데 부자 되게 해 달라, 그런 스토리 쓰지 마시고 그냥 여러분 니 맘대로 사세요. 니 맘대로 사시다가 죄만 용서받으면 돼요. 죄만 십자가 피로서. 그러면 그 자체가 여러분들은 주의 증인이 되어가지고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도록 이제는 내 인생이 내거라는 게 없지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했으니까. 주께서 이런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잘 났다가 아니라 나는 죄인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 박 옥수나 이런 사람들이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소리를 하지를 못해요. 회개가 없어요. 왜?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당신은 몇일에 구원 받았습니까? 이리 되니까 이제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 되었으니까 죄인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 결국은 뭐예요? 예수 믿는 자랑거리, 내가 의인됐다는 자랑거리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교주가 되고 유일한 충복된 신자가 자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진도에서 사람 죽어도 저들은 곰탕 먹고 커피 마시고 TV본다 하잖아요. 유치장에서. 왜? 자기는 구원받았는데 뭐. 죽든 말든 제일 먼저 뛰어 나오지요. 그들은 교리가 맞는 거예요. 그들의 악마성을 그대로 교리가 다 변명을 해준 거예요. 자기 대신 변명을 해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사형시켜야 된다 했잖아요. 그래 좋다. 니 교인들 다 죽이면 그만이다. 그렇게 살려주지 말고 올려오는 것마다 “구원파십니까?”해서 구원파라면 올라오는 것마다 다 죽이면 되는 거예요. 구원파십니까? 천국행 보내드릴게요. 이리 하면 되는 거예요.

성령 받은 베드로와 12제자는 끝까지 “주여,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나는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보세요. 그리고 베드로는 할례 받은 사람과 같이 식사 못하겠다고 나오잖아요. 그게 뭐냐, 원치 않는 길로 계속가게 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결코 완전하거나 멋있는 사람이거나 죄 안 짓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자기는 자기만 챙기는 그런 두려워하고 별 볼 일없는 사람으로 하면서 중요한 것은 주께서 이끄신다는 거예요.

분명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 낫게 한 게 맞아요. 극구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렇게 할 솜씨가 없고 그런 능력은 나한테 일체 없는데 왜 자꾸 우리가 그 사람을 걷게 했다고 자꾸 하게 되면 우리는 정말 난처합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지금 주께서 했는데 자꾸 우리보고 자기가 믿음 좋아서 했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계속해서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하잖아요. 그걸 가지고 크게 쓰겠습니다. 이게 바로 ‘전도’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안 했어요.

어떤 아저씨가 배에 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강에 빠져서 뛰어 들어가서 건졌어요. “아이고, 착합니다. 의인입니다.” 하니까 “이씨~ 누가 나를 밀었어!” 떠 밀은 거예요. 떠밀리니까 진짜 살려고 하다보니까 건진 거예요. 이게 전도입니다. 이게 전도에요. 뭐가 없다? 목적을 두면 안 됩니다. 뭐든지 목적을 두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우상숭배자가 되고 새로운 교주가 되어버려요. 저 여자만 허락한다면 뭐든지 하겠다는 임 재범처럼 돼버린다니까요.

그런데 목적이 없어야 되는데 계속해서 인간이 육신이 있는 이상 목적이 나오지요. 고맙게도 이게 다 목적이 허무로 끝나게 만드십니다. 항상 주님은 바늘가지고 다니면서 성령께서 풍선의 바늘가지고 폭폭 찔러요. 둥그레 올라오면 펑! 펑! 다하지요. 한 달 전의 목적은 빵구 났습니까? 하여튼 모든 기대는 빵구나요.

그 다음에 저희를 떠나가셨어요. 벌써 이미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대로 두고 보자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거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기적은 바로 구름 타고 와야 돼요. 이것은 마태복음 뒤에 보면 나옵니다. “당신은 구름타고 와야 메시아이지 않느냐”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래, 내가 구름타고 온다.” 기대했다는 듯이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지요. “저거 봐라, 메시아로 자기가 위장한다. 자칭 메시아로 우기잖아.” “메시아로 이렇게 설치잖아. 그러니까 죽여야지.”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들의 말이 이상하지요. 구름타고 온다고 하는데도 아니라는 거예요. 처음부터 니는 무슨 소리해도 니는 가짜라는 겁니다. 그러니 규정을 해놓고 시작하는 거예요.

구름타고 오는 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걸 가지고 ‘재림’이라 하지요. 그럼 재림이 복음입니까? 십자가가 복음입니까? 십자가 복음이에요. 어떤 사람은 십자가는 지나갔고 이제 재림만 기다리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유대인하고 똑같아요. 유대인하고 똑같은 거예요. 누가 오는데? 십자가 지신 분이 오시거든요. 재림이라 하는 것은 내용이 없어요. 십자가,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요한계시록1장7절 말씀처럼. 내용은 십자가가 내용인데 재림은 그것이 오는 그 현상을 재림이라고 하는 거예요.

재림으로 심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심판한다니까요. 피 언약으로 심판하지 “니 재림 아나? 모르나?” “알아요.” “구원해 줄게.” 이런 대화는 없어요. “니 부활 믿나?” “구원해 줄게.” 이런 거 없어요. 십자가 의미를 알아야 돼요. 십자가 의미를 써야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알잖아요. 부활을 알아버리면 똑똑한 사람이고, 재림을 알아버리면 아주 경건한 사람이지, 죄인 되는 건 아니잖아요. 계속해서 죄인 되는 것은 십자가를 반복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니 앞에 십자가가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그 말도 어려워요. 십자가 안 보이는데 뭐. 안 보이잖아요. 시력이 얼마인데 보입니까? 도대체 사도바울 시력이 얼마인데 그 십자가가 보여요? 모든 게 십자가 사건해서 연동해서 움직인다는 것이 나는 보이는데 너희는 왜 안 보이느냐 이 말입니다.

이 현실 자체가 십자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건과 사건들의 덩어리인데 하나의 물결이고 춤이고 춤사위고 하나의 진동이거든요. 모든 게. 애 군대에 가는 것도 전부 다 십자가와 연관되거든요. 아휴, 훌륭한 참된 사나이 되어서 돌아오라고 하는 이런 마음 이런 것. 그러니 모든 게 십자가와 연동된 거예요. 십자가보다 더 귀한 것들을 계속 우리가 생산해 낸다는 것을 십자가와 연동하면서 우리를 다시 깨닫게 하는 이 세상 전체가 있는데 십자가가 나는 보이는데 너희는 안 보이느냐고 묻는 겁니다.

재림은 현상을 두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지신 그 주인공 오는 그 현상을 두고 하는 것이지, 누가 지나갈 때는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 그럼 그 냄새가 재림이고, 그가 누군데? 하면 곤란하지요.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수가 난다, 이런 거요. CF에 나오잖아요.

자, 그 다음에 드디어 바리새인과의 싸움에 들어갑니다. 16장 5절에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째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예수님께서 말을 얼마나 어렵게 하시나 보세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주님은 우리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쉽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진짜 아이구~ 쉽게 한 게 이정도 입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도 제자들도 못 알아듣는데.

누룩이라 하는 것은 원래 빵이나 술이나 이런 거 할 때 넣는 거예요. 누룩은 물체입니다. 물체고 실체거든요. 바리새인은 인물이에요. 인물과 누룩이 결합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기관차의 손톱, 우리는 약간의 비유는 되지만, 흔히 쓰는 말은 아니거든요. 바리새인의 손톱, 바리새인의 손이 있으니까 손톱이 있지요. 바리새인의 눈도 바리새인의 눈이 나오려면 뭐가 되어야 돼요? 바리새인이 밀가루나 떡가루가 되어야 되겠지요. 왜 사람보고 떡이라고 하느냐 말이죠. 니가 바리새인의 먹고 있는 떡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건 이해되지요. 아, 바리새인들이 떡을 먹고 있는데 그 떡이 잘 발효됐는지 누룩을 중국산 쓰지 말고 국산 써라 이 말이구나! 아, 그런 뜻이구나! 이건 이해가 되는데, 왜냐, 누룩은 항상 어떤 물체고 어떤 상품이고 실체니까.

바리새인의 누룩은 직접 연결은 정말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말이죠. 그러니까 누룩이니까 그들은 뭐로 여겼습니까? 하나의 실체니까 떡과 연결했지요. “아, 우리가 떡 가지고 오는 걸 잊어버렸군요. 아이, 바보같이. 맞아, 누룩 하니까 떡이 생각나네. 누룩 떡, 떡 누룩“ 그렇게 제자들이 이야기하니까 예수님께서 하는 소리가 ”믿음이 적은 자들아.“ 갑자기 책망하시면서 예수님 혼자 아시는 이야기를 해놓고 믿음이 없다고 하지요.

믿음이 적은 자들아, 욕할 때 우리는 믿음이 없다고 서운하다 마시고 고맙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아, 이런 식으로 찾아와 주시네.’ 이렇게 잔소리 해주시는 이 자체가 고맙고 잔소리를 늘 해주신다는 게 동행한다는 뜻이잖아요. 8절,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치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주님이여, 우리가 지금 떡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주님을 배곯게 해서 죄송합니다.” 할 때, 떡이야 내가 만들면 만들 수 있잖아. 너희들이 말하는 떡, 너희들이 먹고 내가 먹는 떡, 떡 먹고 산다는 그 떡, 그건 내가 만들면 만들 수 있다, 말이죠. 칠병이어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다, 말이죠.

지금 먹고 배부르고 그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바리새인이 말하는 문제라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바리새인이 하나의 현실, 세대를 이루는 주도권자들이라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6장부터 이제는 개인의 싸움이 아니고 이 세대와 새 세대의 본격적인 드디어 갈등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약간 어려운 거 하겠습니다. 자, 한 번 물어보겠어요. 예수님의 적이 누굽니까? 이건 구약으로서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냐는 말이거든요. 방금 마귀라고 했잖아요. 마귀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그 틈바구니에서 구분 지으면서 틈을 통해서 나와요. 제자들이 뭐가 되느냐 하면, 교회가 되거든요. 바리새인들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고 틈에서 마귀가 사단이 나와요.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할 때에 “사단아, 물러가라. 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들을 철저하게 이용을 해요. 일방적으로 이용을 해요. 예수님이 하시는 십자가 그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 한 쪽은 바리새인, 한 쪽은 제자들을 통해서 그들 양쪽 다 이용을 하셔가지고 서로 서로 대비를 시킬 때에 그 대비시키는, 제자들은 말하기를 “바리새인은 우리 편 아니야.” 바리새인들은 “저 제자들은 우리 편 아니야.” 서로 우리 편 아니라는 그 기준이 있잖아요. “그 기준 자체가 주님 편 아니야.” 이 말입니다.

어딜 함부로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마구잡이로 끌어 당겨. 이것은 용납 안 되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할 때는 그 의도가 뭐예요? 그 충성심이 뭡니까? 주님은 일단 우리 편이라고 가정하고 “누가 우리 스승님을 함부로 막대해. 제가 그냥 있지 않겠습니다.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 내가 있기 때문에. “니가 사단이야. 니가” 사단이 꼭 그런 식으로 주님에게 언급한다 말이죠. 이 베드로가 하는 말처럼 너희들이 그런 마음들 때, 마귀가 그런 소리를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 편” 라고 하는 말이 마귀가 심어준거다 말이죠.

우리가 철야하고 새벽기도 할 때, 주님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안 들겠어요? “주여, 주님편이 이렇게 기도하는데 기도 들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기도는 주께서 하게 하십니다. 왜, 답답하고 컬컬한데 안할 수가 있어요? 지금 상견례 앞두고 기도 안 할 수가 있어요? 결혼식 날 200mm 폭우 떨어지면 손님들 다 안 오는데. 좋은 날씨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잖아요. 결혼식 날 11월 8일 날. 그것도 5시에 비 오면 괜찮아요. 1시에는 안돼요. 결혼식 하는데 비오면 안 되잖아요. 그 다음날 일기예보 때 비 온다 하면, 걱정됩니까? 안 됩니까? 기도한다구요. “주님이여, 주님편이 지금 기도합니다. 날씨 좋게 해주시옵소서.” 하게끔 되어 있어요.

또 서울에 어떤 집사님이 딸 결혼시키는데 세상에 딸이 결혼식하기 전날까지 오빠가 나를 사랑 안하는 것 같다며 삐진 거예요. 오빠는 결혼할 신랑이고. 전화를 안 받았던지 메시지를 씹었던지 했던 모양이라, 그래서 집사님이 속이 터져가지고 결혼 바로 전날까지. 때려 치워! 때려 치워! 하지 마! 했답니다. 하고나니 좋다고 하지요. 그게 속탈 때 그냥 속 탔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주여, 이 목적 그냥 막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생각 들지 않겠어요? 하나님께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묻지 마세요. 기도 하게 하십니다.

기도 하게 하시면서 우리가 마치 주님 편인 양 하면서 우리는 은근히 내가 생각하는 목적만 그냥 웃으면서 탈취하면 된다. 그렇게 하도록 우리는 부축임 받습니다. 바로 이 제자와 바리새인 몽땅 다 주님의 원수입니다. 차이점이 뭐냐, 제자는 원수로 드러나게 하면서 구원하고 바리새인은 원수로 드러나게 하면서 버리고, 제자들은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면서 “그러니까 내가 피를 흘렸지” 하고 “니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지.” 하고 그게 은혜와 사랑으로 다시 입혀주고, 가룟유다는 니 마음대로 자살하던 약을 먹든 니 마음대로 하라, 그냥 니는 니 갈 길로 가거라, 하고 갈 길을 내버려두지요.

그래서 제가 늘 하잖아요. 십자가 석 달 만에 생각나거든 감사하라고. 백일 만에 생각나거든 감사히 여기시고. 일 년 만에 두 번 생각나시거든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냐, 항상 반복적으로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킵니다. 바로 니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안 떠났잖아. 봐. 찾아오잖아. 하지만 날 소유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너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소유 받은 자가 주인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저 개는 침대에 올라옵니까? 안 올라오지요. 허락하면 안돼요. 지가 주인인양 한다고요. 요새는 개를 재우기 위한 명상이 있어요. 하여튼 끔찍합니다.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절에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바리새인의 누룩이라 할 때, 이제는 누룩에다가 뭘 집어넣습니까? 바리새인의 교훈을 집어넣읍시다. 주님도 참 그냥 바리새인의 교훈하면 아무 문제없을 걸 괜히 누룩해가지고 제자들 떡 이야기 만들었지요. 일부러 책망하시려고 이렇게 환경을 만들어버렸어요.

자, 그런데 봅시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 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교훈은 뭐예요? 바리새인의 교훈과 예수님의 교훈은 결국은 대조된다. 그런 뜻입니다. 주의하라 했으니까 그 쪽은 전부 다 틀려먹었다고 간주하라 이 말이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은 이 소리를 듣고 바리새인의 교훈은 뭐든지 왜 틀려야 되느냐를 제자들은 그 기준을 확보해 있어야 되잖아요. 그 기준이 없어요. 다만 언지만 했을 뿐입니다.

결국은 제 말은 뭐냐 하면, 제자들이 어떻게 제자 된다하는 것은 주님 소관이지, 그것 듣고 정신 차리자, 똑바로 하자, 이건 인간들의 소관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백날공부해도 발걸음 세시는 것은 주님이 하시고 이게 믿음인데, 주님께 그냥 맡겨버리세요. 주께서 맡기시면 내 일은 안 이루어지지만 우리를 통한 주님의 일은 차질 없이 다 이루어집니다. 그걸 우리가 하루 종일 찾는 거예요. 내 뜻은 아닌데 주의 뜻은 무엇입니까? 를 찾는 그 즐거움과 재미가 있어야 돼요. 학부형이 와서 애 먹일 때도 그게 주의 뜻인 줄 아시고 허허 웃어버리세요.

심지어 이런 학부형도 있어요. 일부러 선생님 이러면 선생님 약 오르지요. 이런 식으로 이런 투로 아주 건방지게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당신하고 상대할 그런 같은 세대가 아닙니다.’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면 되지 같이 걸어버리면 바리새인의 교훈에 빠진 셈이 돼요. 니 논리가 완전한가, 내 논리가 완전한가, 전도하다가 이런 논리에 빠지면 안돼요. 교훈 삼으면 안 됩니다. 이쪽세대는 그냥 무시해야 될 교회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문제는 기준만 있으면 되는데, 기준을 만들어나갑니다. 주님께서 먼저 기준을 만들어나가지요. 제자들 모아놓고 하는 말이 13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죠. 사람의 아들이니까 자기를 인자라 했다 말이죠. 여기 사람이 나오지요.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니까.

사람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소위 사람이라 여긴 모든 인간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말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왜? 예수님만 사람의 아들이지, 다른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를 사람이라 하니까 인간으로 여기니까 기껏 나온 것이 인간의 존엄성이 나온 거예요. 고귀성이 나온 거예요. 휴머니즘이 나온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진도에서 첫 번째는 주님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건드리고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은 어떤 이는 살리고 어떤 사람은 죽였다는 것이 두 번째는 인간을 두 번 죽이는 것이고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아이들이 누구하고 싸운다던지 누구하고 애들이 죄를 지어서 죽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애들이 죽을죄는 안 지었는데 죽음으로 끝났다는 사실, 인간이 하는 행동과 인간이 죽는 것과 연결고리가 인간에게 납득이 안 된다는 사실.

그 애들이 배안에서 칼 들고 싸웠습니까? 제가 대구 가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만약에 이 세월호에 탔던 400명이 몽땅 그냥 죄수가 아니고 사람 열 대명 죽이고 조폭들이고 성폭행한 놈이고 이러한 인간들 400명해가지고 가다가 죽었다 하면 뭐합니까? 하나님 찬양이에요. 역시 신은 위대하다. 신은 살아있다. 하나님 정의는 살아있다. 그런데 이렇게 안살은 안산 애들은 정의는 죽었다. 신은 없다. 그야말로 목 잘린 하나님이죠. 광주사태. 그 노래 또 나올 수 있어요. 하나님 뭐 하냐 말이에요. 뭐하냐? 주무시느냐? 조시느냐? 뭐하느냐 말이죠.

방정식이 성립이 안돼요. 애가 죽을 짓을 해서 죽은 게 아니잖아요. 그냥 쉬고 있었잖아요. 그걸 죽입니까? 누가? 하나님이. 뭔가 해명을 해보라는 말이에요. 천 번의 기도를 통해서. 그럼 해명이 안 나타나니까 누가 대신 해야 돼요? 안산의 목사들이 해야 될 것 같아요. 목사가 해야 되던지 아니면 참정치연합회 시의원이 하던지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 봤잖아요. 지금 해답 없어요. 해답 없으니까 온 국민이 트라우마에 빠진 거예요. 혼란에 빠진 겁니다. 모든 것은 해답이 있었는데 지금은 해답이 없는 지경을 당하니까 전부 다 정신적으로 패닉 상태(공황상태)에 빠진 거예요.

이 때, 해답을 아는 사람은 “주께서 참 잘하셨습니다.” 하지요. 제가 지난 대전에서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야 “주여, 저를 죽여주옵소서.”라는 그런 참된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교정보다가 그런 강의를 했어요. 자꾸 살려고 하니까 주께 분노와 복수심이 발현이 되는데, 사도바울처럼 “저 같은 인간은 살아도 소용없어요.” 라고 했을 경우에는 지가 살아온 것도 은혜요, 앞으로 살게 된다면 그것도 은혜요, 우리 애가 돌아오는 것도 감사요, 주께 간 것도 주께서 편히 쉬게 하니까 그것도 감사요. 뭐든지 범사에 감사가 되는 거예요. 결혼식에 비와도 감사, 축축 젖어도 감사, 웨딩드레스 홀랑 젖어도 예쁘게 나오고. 모든 것을 감사에 맡길 때, 이번 결혼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전혀 미리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가신 십자가 아무도 눈치 챈 사람 없었습니다. 인간도 아닌 것이 인간 행세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한 참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게 되고 그것이 바로 제자이던데 주께서 인도하니까 천국 갔습니다. 저희들도 인도해 주시고,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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