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마을 수련회 / 2001,8,13-16 경남 양산
십자가마을 수련회 / 2001,8,13-16 경남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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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사랑과 윤리 (1) ]
십자가마을 수련회 / 2001,8,13-16 경남 양산
강의(이근호) / 정리(구득영)
* 이번 여름 수련회는 로마서가 그 중심 테마가 되겠는데, 먼저 오늘은 '이웃사랑과 윤리'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여기서 일단 누가복음 10장을 한번 보도록 하자.
(눅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 예수님의 관심 - 네 자신을 아는가?
* 여기서 예수님의 방식은 무엇인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웃사랑에 대해서 물어오면, 이러한 대화를 통해서 이웃사랑 자체가 아니라, 먼저 '네 자신을 아는가?' 라고 다시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혹시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것이(?) 아닌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먼저 그러한 이웃을 묻는 자의 죄를 지적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자기가 먼저 죄인임을 알라는 것이다.
* 성경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개념이 나오면, 우리는 그냥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되는 줄 알지만, 그러나 성경말씀이 도리어 우리 자신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이웃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것을 말할 자격이 되는가?' 라고 말이다.
* 결론은 무엇인가?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즉, 죄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런 것을 모아서 포장을 해도 그것이 사랑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사랑은 은사이다 !! - 사랑은 인간에서 나올 수 없다 !!
* 성경은 이 사랑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데, 그런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사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웃사랑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도 말이다. 원래 참 사랑의 실천자는 하늘에 계신데, 그분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나타날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 대표적인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인데, 이러한 사랑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30절에서 분명히 은사에 넣고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중요한 것은, 그러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신 주체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사실 이것이 복잡한데,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분이 따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에베소서에는 강조점이 '하나' 라는 것이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을 전하는 자, 그리고 교사와 목사 등, 서로가 하는 일이 다양한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 분에 공급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은사를 받아서 발휘하면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랑이라는 은사에 대해 적용시켜서 이야기하자면, 사랑은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말이다.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예를 들어서,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사는 부부가 있다고 하자.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겠는가? 그들의 대화를 잠시 들어보자.
* 아내 : 당신은 왜 저를 이렇게 사랑합니까?
* 남편 : 물론이지. 주님께서 배필로 붙여주셨기에 사랑하지.
* 아내 : 정말 그렇습니까?
* 남편 : 그러면 당신은?
* 아내 : 저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저의 신랑으로 베풀어주셨기에 사랑합니다.
* 남편 : 음, 그래. 그러면 불 끄고 자자. 이리와...
* 이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부부사랑을 통해서 자기들의 감정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물론 결혼을 못한 사람들에게는 약올리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매우 파격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이왕에 사랑이 하나라고 하면 구태여 결혼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내를 통하든지, 남편을 통하든지, 결국은 하나로 모인다고 하면 말이다. 예수님을 남편으로 여기고 말이다.
* 그런데 억지로 결혼을 하면 이 하나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주님을 기쁘게 할까?' 라고 하다가, 결혼을 하고 나면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까?' 라는 것으로 바뀌니 말이다. 물론 요즘에는 이런 여자도 별로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사도바울에 의하면, 이렇게 되어버리면 사랑이 하나로 집중해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만 주고받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단계로 만드시는데, 처음에는 흙을 가지고서 사람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어서 산 사람(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생령이 된지라 !! - 죽을 가능성을 내포 !!
* 그러면 왜 이렇게 두 단계이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질문조차 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것은 바로 죽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이렇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기능성이 있는고 하니, 이렇게 산 사람을 생명나무와 선악과 사이에 두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영생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 사람' 이란 것은, '죽을 사람' 이라는 것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그런 식으로 살아있기는 싫다는 것이다. 한번 살았으면 마음껏 에덴동산에서 뛰어 놀아야지 선악과를 가지고서 그렇게 제한을 가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자유이냐는 것이다. 'NO!' 라는 것이 있으면 자유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간은, '너는 죽을 수도 있어' 라는 것이고, 그러나 인간 쪽에서는 '이왕 살려주셨으니 앞으로 간섭하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생각하는 인간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 아무리 성경을 보고 신학을 공부해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창조했으니 도와주소서' 라고 하면 자기 주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 어떻게 하면 살고, 어떻게 하면 죽습니까?' 라고 자기 삶과 죽음을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산인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병원에 가서 '하나님, 제가 왜 아픕니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나을 텐데'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플 수도 있고, 안 아플 수도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개념 자체부터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라고 했는데, 즉,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서 부딪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루소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고 했는데, 다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산다는 것을 정의하기를, 더불어 사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생명나무와 선악과 사이에 존재하는 것, 바로 그것을 두고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이다.
* 오늘날 교회가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그런 것을 산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말이 되는가? 성경하고 공동체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지 말이다. 오직 말씀 앞에서 살아야만 제대로 산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말이다. 캔디 노래도 모르는가?
* 여기서 누가복음 2장을 한번 보자.
(눅 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 2: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 '안나' 라는 여 선지자가 등장하는데, 과부가 된지 84년이라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항상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 그러니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나 목사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사실은 외로움이 아니라 사명감이 없다는 것이다. 외로운 것은 괜찮지만, 사명감이 없어서 심심(?)하니까 온갖 사고를 다 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불어 운동'을 하고 말이다.
* 조금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나 루소를 언급한 것은, 그런 철학자들이 인간의 모든 속성을 잘 대변해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더불어서 한번 잘살아보려고 한 것이 창세기 11장에 보면 나오는데, 바벨탑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바벨탑을 왜 만들었는가? 다시는 흩어지지 말자는 것이다. 이제 이산가족은 싫다는 것이다.
(창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 서울의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을 만들면서 조형을 만들려고 했는데, 물론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취소되었지만, 그것이 원통형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이 보여주는 것이, 더불어 사는 것이고, 인간의 행복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 현대 목회란, 교인들을 달래주는 것이다 !!
* 요즘 교인들이 어떠한가? 말씀은 원하지 않지만 목사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목사의 관심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교인들을 달래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옥으로 보내지만 말이다.
*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한 평생 익혀왔던 개념들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과연 어떤 인간이 순종을 하겠는가? 예를 들어, '탐내지 말라' 라고 했을 때, 과연 며칠을 버티겠는가?
*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 인간의 '탐심'을 끄집어내면서 인간 속에는 이미 죄가 장악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웃을 도와주니까 구제처럼 보이고, 십분의 일을 바치니 십일조로 보이고,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안식일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 탐심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마음과 생각이 드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그러니 이미 창세기부터 말하고 있는 인간이란 것이, 우리의 신체가 요구하는 그런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항상 인간은 자기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지 간에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 아담이 어떻게 범죄했는가? 선악과를 따먹고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씨앗인가? 아담이 아닌가? 아담 안에 있는 인생은 아담의 그런 선악체계에 다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는 선악과를 모른다고, 따먹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모두 다 정죄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선악이 아닌 생명나무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고 안 따먹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은 그 환경이 하나님의 죽음의 법과 생명의 법 속에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상황이 기분 나쁜가?
◈ 목사의 임무 - 무엇이 우리를 저주케 했으며, 또한 살리는가 !!
* 그렇다면, 목사의 임무는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 우리를 저주케 했으며 또한 살리는지를, 오직 그것만을 이야기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건방지게 마치 자기가 살리는 것처럼 그렇게 설치지 말고 말이다. 누가 누구를 살린단 말인가?
*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조카가 있는 병원에 검사를 하러 왔는데, 결과가 간이 나쁘다고 나왔으면, 아무리 조카든 삼촌이든 간에 나쁜 것은 나쁘다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랑이 아니냐는 것이다.
* 새벽에 두류공원에서 한 시간을 운동을 하는데, 웬 할아버지가 나무에 매달리기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새벽부터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나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무에 매달리지 마세요' 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 그러면 그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겠는가? 당장에 '내가 여기에 매달린다고 이 나무가 부러지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젊은 놈(?)에게 새벽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기가 차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바로 자기 의(義)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분명히 그런 행동이 나쁜 줄 알면서도 자기 의로 포장한다는 것이다.
◈ 이웃사랑이란, 그 이웃의 실체를 밝혀주는 것 !!
* 그러니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이런 자기 의로 둘러싸여 있음을 마구 들추어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사랑이란 그 이웃의 실체를 밝혀주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당신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신 의로 말미암아 지옥에 갑니다' 라고 말해주는 것이 이웃사랑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말을 바꾸어서, 조금 전에 언급한 루소의 입장에서 보면, 루소의 입장에서는 이웃사랑이란 더불어 사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약점을 덮어주고 장점을 부각시켜주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MBC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칭찬합시다' 라는 프로도 바로 이런 이웃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왜 박수를 치는가?
* 며느리가 시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시집이라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서의 이웃사랑이고, 동양의 '효(孝)'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효를 자기 의(義)라고 한다는 것이다.
◈ 동양의 효(孝) - 성경은 이것을 '자기 의(義)' 라고 한다 !!
* 지금까지 아주 거칠게(?) 요약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을 버린 인간은 혼자서는 외로워 못사니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데, 즉,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불어 산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공동체가 중요한데, 이 공동체는 마치 온실처럼 상처받지 않고 사랑만 받는 그런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해도 좋은 말을 하고 말이다.
* 그런데 이런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뭐가 필요한고 하니, 법(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빌려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이라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 말이다. 즉, 율법을 도용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두고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너희들은 지옥 불에 들어가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라는 것이다.
◈ 십자가 -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을 다 파악함으로 !!
* 여기서 잠시 십자가에 다시 정리하자면, 십자가란 양대 진영이 서로 반대해서 생긴 것인데, 한 쪽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이고, 다른 쪽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저쪽을 바라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고, 이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보고서 모르는 자, 또는 이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이 그들을 두고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한 이유와,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율법을 모르는 자라고 한 이유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양쪽 진영의 사고방식을 다 알아야 비로소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 7: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요 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 예배당에 무엇이 걸려 있는가? 십자가 아닌가? 그러면 이 십자가 사건이 계속 터져 나와야 교회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중간에 끼어서 이 십자가를 이용해서 천당에 가기만 소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니까, 예수님을 분명히 그 당시에 적이 있었는데, 오늘날 교인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만 모였는지,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6장 말씀은 뭐가 되는가?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우리가 예수님의 영을 받았다면, 무엇이 마귀인지에 대해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로마서의 '화평을 누리라' 라는 것만 인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엉터리로 말이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지금 이웃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사랑이란 우리 인간들의 사랑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조직의 번영과 발전을 꾀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모두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사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사랑은 은사이어야만 하고, 그 은사는 예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분이시고, 그 십자가 사건을 예수님에게 마귀라는 소리를 들은 자들이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 자들이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사랑 - 인간 공동체의 사랑에 대한 고발 !!
*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사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일종의 'X-레이' 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푸니까, 자기도 예수님을 따라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아니 도대체, 예수님께서 베푸신 사랑이 어떤 사랑이기에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 공동체에서 낙오된 자들, 즉, 소경들, 절름발이들, 거지들, 그리고 창녀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참 사랑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 그러니 예수님의 사랑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 당시 인간 세상에 대한, 즉, 공동체의 사랑에 대한 고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악한세대가 된다는 것이다. 더럽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세상에서 건져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출애굽기를 보면, 히브리인들이 무슨 재주로 애굽의 권세를 이겼는가? 못 이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을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가? 골짜기로 데리고 가시는데 해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축축한 물기가 있는 해골도 아니고 바싹 마른 해골 말이다. 그러니 무슨 스스로 DNA 복제가 되겠는가?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 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 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 과연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라고 하는, 이러한 하나님의 질문이 성립이 되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도 불가능한데,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런 기적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기가 알아서 사랑을 하려고 하지 말고, 누가 그런 사랑을 주셨는지,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5장에 보면,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윤수일 - 사랑만은 않겠어요 !!
*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이 알아서 할 수 있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가 강의를 하면서 윤수일이라는 대중가수에게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그 가수가 불렀던 노래 가운데 '사랑만은 않겠어요' 라는 것이 있는데, 아니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윤수일 말이 맞다는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의 주체자가 부각이 되는데, 부모가 정성을 다해서 자식을 키우면 키운 만큼 기대가 더욱더 커진다는 것이다. 첼로리스트 장한나의 부모가 얼마나 희생을 감당했던가? 그만큼 공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 그러니 따지고 보자면 그런 부모의 사랑은 자기 자식이라는 전제 조건하에서 다듬고 닦여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경우에도, 사랑했던 교인이 다른 교회로 가버리면 그야말로 미친다는 것이다. 그 동안에 심방을 간 것이 몇 번이었고, 저녁마다 기도한 것이 몇 번이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랑이 진짜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 되는 것이고, 결국 윤수일 말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 이 세상의 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대이다 !!
* 이렇게 인간사랑은 처음부터 미움이 포함된 그런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상대방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자기를 더욱더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실체라는 것이다.
*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랑을 더 이상 사랑이라고 부르지를 않고 '정복욕' 혹은 '지배욕'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그런 즐거움을 위해서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사랑이 바로 춘향전에 나오는 사랑타령이라는 것이다. -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어화둥둥 내 사랑이야 !
*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머리가 좋으신가? 인간사랑은 '자기애(愛)' 이고, 여기에는 미움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런데 이런 '자기애'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누가 슬그머니 왔는고 하니까,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이다. 메시야가 오니 사람들이 좋아서 자기 사랑으로서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아가 저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성령이 오신다는 것이다.
* 이렇게 성령은 인간들의 모든 것들이 다 들통이 나고 부서진 다음에, 그런 것들을 좍 밀어버리는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상대방을 자기에게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놓아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여기 3절에 보면, '육신의 죄를 정하사'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죄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인간의 육체는 죄라는 것을 규정지었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죄의 모양으로 먼저 오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이 죄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사전에 다 차단해버린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을 입으신 것은, 육체에 대한 규정이다 !! - 죄 !!
*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을 입으신 것은, 예수님의 육신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육체가 더러운 것으로 판명이 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육체로부터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 몸도 살아나고 말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창세기 2장을 보면, 죽음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고 하니, 죄와 더불어 있으면 죽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날아다니고 움직여도 말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은 것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이름이 '아담(흙)' 이라는 것이다. 어떤 착한 일을 하고 무엇을 해도 말이다. 산 것이 아니기에 죽었다는 것이다.
* 사실 이런 개념정리가 상당히 중요한데,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면서 경험한 선입관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서로 충돌이 되고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가 서로 충돌해서 다운이 되듯이 말이다.
* 다시 정리하자면, 성경에서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사이에 있는 것을 두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을 수도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그것은 아무리 날뛰고 설쳐도 죽었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왜? 원래 살아있는 인간과는 다르니 말이다. 원래 창조한 모습이 아니니 말이다.
* 지금 자기 앞에 성경책이 있는데, 그래서 그 성경책을 믿어서 천당에 간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그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죄를 짓지 않은 정상적 인간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 자체가 전혀 말씀과 맞지를 않다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늘에서 누군가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와 섞여서 어떤 사건이 터졌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 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 자체를 문제 삼아서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통해서 죄의 개념이 새롭게 재정립된다 !!
*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모든 것들이 다 정상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죄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5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 무슨 뜻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새롭게 규정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죄의 개념이 새롭게 재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들이 죄인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니, 그 동안 '하나님이 계시니 믿자' 라고 했던 유대인들의 종교관이, 구원관과 선택관이 모두 다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탈락된 문둥병자와 창기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낙원이 허락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없다. 오직 죄인밖에 !!
* 이근호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이단소리를 듣는데, 아니 예수님만이 구세주이시고 오직 그분만을 믿자고 하는데 무엇이 이단이냐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왜 그런 가능성을 제외시키느냐는 것인데, 그러나 도대체 이 세상에 인간이 어디 있는가? 죄인밖에 없는데 말이다.
* 도대체 기도란 무엇인가? 인간의 가능성인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은사(은혜)라는 것이다. 봉사와 헌금 등 모든 것이 다 말이다. 이런 모든 은사는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두 시간을 기도한다고 자기도 그렇게 따라할 필요가 없고, 100만원을 헌금한다고 해서 따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러니 모든 것이 예수님 한 분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예수님의 증인이고 참된 사랑을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닌가?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분명히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는데, 우리가 좀 죄인이 된들 그것이 무엇이 그리 기분이 나쁘냐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의 말씀이 놀랍지 않는가? 그분은 죄인을 구원하는데는 완벽한 분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진정 죄인이라면 그분만을 바라보면 되지 않겠는가? 쓸데없는 짓거리 좀 하지 말고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됨으로, 그래서 그분만이 오직 구원자임을 드러냄으로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것이다.
* 그런데 아직도 무슨 자존심인가? 그런 것이 왜 필요한가? 죄인인 주제에 말이다. 그러나 구세주가 계시기에 그런 죄인됨이 기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자기 의(義)로 감추려고 하는가? 주님의 오심은 죄임을 건지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 53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사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 그분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위해서 기도하셨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이 죄의 문제로 부끄러워하고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몸부림친다면 그 담당자가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담당자에게 맡기면 되는데 말이다.
* 어떤 무식한 할머니가 동사무소에 갔는데, 글자를 전혀 몰라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담당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글씨를 모른다고 안타까워하고 소란을 피운다면 그것은 담당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그리 쉽지를 않다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얼마나 원망하는가? 홍해를 건너고서는 '여호와는 우리 용사이시니' 라고 하면서 춤을 추다가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 구세주도 오셨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주시는데,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자기 의(義)에 완전히 둘러 싸여있기에, 더불어 함께 사는 것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오히려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친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이다.
* 지금까지 계속 서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이웃사랑의 모델은 예수님이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든지 할 수가 있는데,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 우리가 진짜 사랑을 받았으면, '영감님, 나무에 올라가지 마세요' 라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기 주제파악을 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의(義)에 도취되어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백 배 낫지 않는가?
◈ 예수님의 참 사랑이 왜 이 세상에서는 이단으로 보였는가?
* 참 사랑은 예수님이 주셨다는 것은 다 아는데, 지금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고 하니, 예수님의 사랑이 참 사랑이지만 그러니 그것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는 이단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왜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오히려 바라바를 풀어주도록 요구했겠는가?
* 이렇게 예수님의 참 사랑이 십자가의 순교로 갈 수밖에 없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죄에 그 원인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죄 아래 놓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령이 준비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가 왜 죄인인가를, 도대체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밝혀낸다는 것이다.
* 사실 설교자가 얼마나 어려운지, 일주일 설교를 10번씩 하면 1년이면 다 밑천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하는 목사들이 엄청 많은데,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들의 죄에 위해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그것을 파고들면 설교할 것들은 너무나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교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죄(罪) - 학문과 지식과 교양, 윤리와 도덕, 종교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
* 그런데 이것도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죄(罪)라는 것이 그냥 죄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학문과 지식과 교양,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함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말씀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과학자의 경우라면, 예수님도 진리이지만 자기의 학문도 진리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수학 선생의 경우에 '1+1=2' 라는 것을 진리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교수의 경우에 가르치는 것을, 의사를 경우에는 치료하는 것을, 그리고 목회자의 경우에는 그런 목회자체를 죄라고 인정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목회만큼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죄의 영역에서 자기 담당구역은 빼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조폭의 두목 같은 경우에는 좀 갈등이 생기지만 말이다. 그러나 결론은 같지 않겠는가?
* 그러나 여기서 목회자의 임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을 일일이 찾아내어서 죄임을 지적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목회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설교시간은 바로 목회자 자신의 붕괴시간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칼로 일일이 해부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십일조를 한 죄, 기도한 죄, 심지어 말씀을 본 죄, 그런 것들을 일일이 다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몸뚱아리가 바로 죄이니 말이다.
* 이렇게 목회자는 교인들을 따라 다니면서 일일이 그 죄를 다 지적해야 하니 얼마나 바쁜가? 그러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웃사랑과 윤리' 라는 글은, 죄라는 것이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의 윤리로 확산되고 있음을 고발하는 리포터라는 것이다.
* 만약에 우리가 전교조라면, 전교조가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교육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이 아닌가? 수산물을 취급하는 공동 어시장의 사랑이 무엇인가? 외국 수산물을 거부하고 우리나라 어부들이 잡은 고기를 잘 팔아주는 것이 아닌가?
* 소위 수협에서 전화가 얼마나 자주 오는지, 자기 수협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좀 팔아달라는 것이다. 기장수협은 미역을 팔아달라고 하고 말이다. 그리고 소위 몬테소리라는 곳에서는 무슨 그리 전화를 하는지, 그야말로 못된 소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이런 부분을 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해야 죄라고 생각하지, 자기 몸 자체가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무엇을 챙기고, 그래서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면서도, 그렇게 육신의 열매를 맺고 있으면서도 소위 '성도' 라고 하니, 당연히 그런 이중생활은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성도는 이 모든 것이 죄이기에, 그것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런 죄 아래에 있는 자들은 구하려 오셨기에 말이다. 이렇게 구원자가 왔는데, 무엇이 더 두렵겠느냐는 것이다.
* 그래서 이제 각 부분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의 한계가 점점 더 드러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한계가 다음과 같은 점이라는 것이다. 이제 리포터를 한번 보도록 하자.
⊙ 예를 들면, 루게릭이라는 병(ALS)이 있다. 감각과 신체의 틀은 그대로이나 온 몸이 너무나도 무기력해져서 심지어 입술조차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무너져 내려버리는 질병으로서 치료약이나 예방법도 없다. 그저 죽는 날을 기다리면서 인공호흡기로 생명이 연장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병에 대한 치료제 계발을 과연 어느 나라가 담당하는 것이 합당할까? 앓고 있는 환자의 입장에서 가장 큰 이웃 사랑이라면 어떤 것은 말하는가? 그것은 일시적인 고통을 완화하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시중들어주고 사랑하고 위로 격려해 주는 것보다 아예 치료제를 계발해서 자진해서 우뚝 서서 걷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도움이 없을 것이다.
* 여기 아픈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저귀를 갈아주고 자기를 간호해주는 것보다는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심리학자인 '피아제'의 교육이론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자긍심 고취' 라는 것 말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의 목표라는 것이다.
◈ 피아제 - 자긍심 고취 !!
◈ 존듀이 - 하나의 개체로서 자립적인 인간 !!
* '존듀이' 라는 미국의 교육학자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교사는 자꾸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도와주면 교사를 계속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사는 학생들의 장점을 잘 개발해주고 그런 것을 정립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거 우리나라 교육부에서 채택해서 지금까지 왔던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인간을 하나의 개체로서 인정을 해서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서지 못하는 자폐증 같은 것이 있는 학생들은 그야말로 부모에게나 국가적으로 봐서도 애물단지라는 것이다. 특히, 목회자 가정에 이런 아이들이 있으면 그야말로 미친다는 것이다. 사모가 더한데, 이 아이 때문에 소위 은혜가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러니 결국 이웃사랑은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상상하기 어려운 자금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런 돈은 어떻게 조달이 되는가? 강대국이 후진국을 착취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기계하나 싸게 팔아놓고 부속 값은 엄청나게 비싸게 받고 말이다. 물론 고장이 나도 미국의 기술자를 가서 불러와야 되고 말이다. 이렇게 악랄하게 벌어들인 자금이 루게릭병을 고치는 치료제를 개발하는데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겠는가?
* 요즘 하리수가 엄청나게 뜨는데, 하리수의 엄마의 경우에 자기 딸(?)이 얼마나 대견하겠는가? 소위 트랜스젠더라는 신종용어도 만들어가면서 돈을 벌어다주니 말이다. 그러나 제 2의 하리수가 등장해서 자기 딸이 그만 인기가 떨어졌다면 그렇게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던 엄마도 '남자가 저게 뭐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딸의 밥그릇을 빼앗아 갔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란 것이다. 이웃사랑의 한계이고 말이다.
* 여기서 마태복음 5장을 한번 보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이것은 누가 상을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거지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겠는가? 국회의원에 나갈 일이 있는가? 인간이란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는 것인데, 즉, 서로 'give and take' 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 또 다른 예는, 휴대폰 회사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기간을 간격으로 하여 쉴새없이 신제품을 계발하고 쏟아내고 있는데 이는 소비자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그래서 과소비를 유발시키게 된다. 하나를 만들더라도 오래 쓰고 식상되지 않는 디자인을 계발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따질 때 참된 절약에 부합되는 기업 윤리이다.
* 요즘 휴대폰이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낭비임에 분명한데, 아니 휴대폰 화면이 세 줄이면 어떻고 일곱 줄이면 어떠한가? 무슨 TV도 아니고 말이다. 과거에는 생산이 먼저였고 소비가 후자였는데, 그런데 요즘은 먼저 소비가 형성되고 그 기호에 맞추어서 생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소비중심의 경제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소비나 허영심을 유발해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 사실 경제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이렇게 모순된 점이 많다는 것이다. 소위 'IT산업'이 이제 내리막길인데, 왜 그런고 하니 제 아무리 기술을 부르짖어도 구매력이 뒤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TV를 벽에 걸던지 선반 위에 놓던지 그것이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냉장고 문에서 냉기가 나오던지 않던지 시원하지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럼에도 과소비를 유도하고 이런 제품들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이런 제품들이 나와야 기술축적이 되는 것이고, 그래야 수출을 해도 경쟁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출을 열심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형제나 가족들이 취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분명히 낭비인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낭비가 우리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중들이 머리를 깎고서 산에 들어가 폼을 잡지만, 그러나 다 그렇게 해버리면 누가 먹여 살리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인격적 인간이 아니라, 얼마나 돈을 많이 끌어들일 수가 있는지, 바로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이런 것을 요구하니, 남자가 여자로 된 것도 내어놓고 온갖 것을 다 쏟아낸다는 것이다.
* 그러니 과연 이런 것을 나쁘다고만 하겠는가? 오히려 절에 들어가서 속세를 떠나서 살아가는 듯한 중들이 더 나쁘지 말이다. 도대체 떠나가는 어디를 떠난다는 말인가? 물론 산 속에 들어가서 굶어서 죽는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 라는 것이 혼자서 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청나게 태풍이 부는데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태풍이 피해 가는가? 물론 자기들은 피해간다고 하면서 자랑을 하는 별 희한한 인간들도 다 있지만 말이다.
* 모든 사람이 'NO' 라고 할 때에 'YES' 라고 말한다고? 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눈치를 보면서 같이 동참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처세술' 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진리이냐고 묻는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진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당신의 죄를 아는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NO' 혹은 'YES'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 해결이 되는데, 그분은 죄 문제를 해결하려 오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누가 그분을 믿을 수 있는가? 성령이 아니고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뭐가 복잡한가? 전도라는 것도 주께서 만나게 해주는 자들에게 조용히 하고 말이다. 뭘 설치고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전도하려고 난리를 피웠는가? 하늘에서 보자기가 어떻게 내려왔는가? 베드로가 기도해서인가? 오히려 반대라는 것이다. 이미 고넬료를 변화시켜놓고 베드로를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보자기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는고 하니, 율법에 의하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들만 있었다는 것이다.
(행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 10: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행 10: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 도저히 베드로는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야단치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베드로 네가 속되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먹은 사람이 바로 고넬료라는 것이다.
* 그러니 사도행전 10장에서는 먼저 율법이 던져 지면서, 베드로가 고넬료를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넬로가 베드로를 전도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으로 구원받겠다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사실은 양쪽 다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교회 -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들의 모임 !!
*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바라보면서 그야말로 바싹 마른 해골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만 '고맙습니다' 라는 말밖에 아무 말도 할 말이 없는 자들, 그들이 바로 신자이고 그런 자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이것이 안 되는가? 아직도 이 세상에 미련이 있고 순수한 인간미에 이끌려서 그렇다는 것이다. 헨델의 음악은 참으로 은혜가 되고, '1+1=2' 라는 것은 분명히 진리인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죄라고 하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 성만찬을 강조하는 자들이 많은데,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의 주장은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그 확실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포도주의 도수는 몇 도이고, 누가 거행해야 은혜가 되는, 그런 것이 있는가? 이들이 붙들고 있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성만찬을 거행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생각하기만 하면 마구 눈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 그러나 죄송스럽게도 그것도 역시 죄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종교의 행태라는 것이다. 성만찬은 성만찬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은 모든 삶에 확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 나의 이런 죄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성만찬에 참석하면서도 아프지를 않고 감사함이 없다면, 그것은 평소 그 사람의 본질이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 교육 현장에서의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 간의 경쟁력을 도입하지 아니하면 학생들은 학문을 이해하고 그 학문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학습 능력을 갖출 의욕을 유발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국가 경쟁력이 남의 나라보다 뒤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경쟁력이란 보다 높은 보상이 마련되어야 가장 큰 효과를 보는데 그것에서 파생된 것이 인류 대학 합격을 위한 입시 경쟁이다. 물론 국가적 입장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골고루 인재가 요구된다. 하지만 이런 취지의 공교육은 일선 학교장에게는 전혀 먹혀 들어갈 수가 없다. 누가 자진해서 나서서 이류 고등학교 되겠다는 학교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인원수를 일류 대학에 진학시킴으로서 그 고등학교는 교육 능력에 있어 사회적으로 보장받게 되어 있고 보상받게 되어 있다. 그 학교에 보다 더 많은 인재들과 자본이 들어온다. 그렇지 아니하면 도태되게 되어 있다.
◈ 우리나라 공교육 문제 - 평균이 낮다 !!
* 이제 공교육 문제인데, 고국에서 살려고 미국에서 온 사람이 이 교육문제 때문에 도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미국에서는 공부를 제법 했는데, 우리나라에 오니 꼴찌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존심이 허락을 하겠는가?
* 그렇다면 미국이나 외국 등의 교육과 우리나라의 교육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미국의 공교육 개념을 그대로 베끼고 있는데 말이다. 미국에는 과외가 없는가? 경쟁이 없는가? 그대로 모두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왜 미국에 가려고 하는가?
* 미국과 한국의 공교육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한국은 이런 공교육 역사가 짧기 때문에 그 평균을 나누는데, 그 '평균'이 낮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 평균이 낮다는 것은, 학생들의 평균점수가 낮다는 말이 아니고, 이 교육에 대해서 국가가 요구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엘리트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어서 이 엘리트들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그래서 대다수의 교육 대상자들에게 자극을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인간 만들기' 라는 높은 수준의 교육이 아니고, '안정된 직업 갖기' 라는 낮은 수준의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봐라, 서울대에 가면 출세한다' 라는 공식을 만들어서 다들 그렇게 공부하도록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공교육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 이것을 일선 학교의 교장들이 모르는가? 안다는 것이다. 알지만 서로가 경쟁이 되니 어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평균점이, 즉 교육을 바라보는 눈이 낮으니 말이다. 그런 틀을 왕창 부수지 않고서야 무엇이 해결되겠는가? 공부 잘하는 놈은 칭찬하고 그렇지 않는 놈은 마치 인간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앞에서 당기니, 그렇게 되면 부모의 마음은 무엇이겠는가? '내 자식은 몇 등인가?' 라고 당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 그렇게 되면 교장 선생님의 이웃사랑이란 무엇인가? 설령 교장 선생님이 '여러분, 교육이란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더라도, 학부형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아니 교장 선생님, 그렇게 해서 몇 명이나 서울대에 들어가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장 선생님은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넣어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 이웃사랑과 윤리 (2) ]
십자가마을 수련회 / 2001,8,13-16 경남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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