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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 60강(목적의 위험) 마태복음51강(요나의 표적) 140424강의요한복음

사도행전 60강(목적의 위험) 마태복음51강(요나의 표적) 140424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공은주(IP:218.♡.196.154)

14-04-26 13:14

대전140424-행22장12절(목표의 위험)60강 - 이 근호 목사

사도바울이 사울 당시에 다메섹에서 내려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그 대목 이야기인데. 우리가 요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연결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4복음서 있잖아요. 복음서 내용으로부터 우리가 오늘날 기독교란 것은 예수님의 정신과 복음으로부터 시작해야 될까요? 아니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예수님 만남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될까요? 어느 쪽이 옳은 코스가 되겠습니까? 예수님 만남으로부터. 너무 쉽게 정답이라고 우기시는데, 사실은 우리가 여기 있다면 우리가 골라잡을 입장이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났다. “난 이 쪽이 좋아. 이쪽이 마음에 확 들어! 한방에 예수님 믿었으니까.”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이것은 제자들이 실패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3번씩 부인하고. 그러니까 막상 이러한 상황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또 실패를 겪어야 된다는 부담을 안기 때문에 차라리 실패하기 전부터 한 번에 알약 한 번 먹듯이 마약 마시듯이 ‘그냥 한꺼번에 구원받았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정답은 이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이렇게 밀려온 거예요. 토사가 밀려와가지고 산사태 이르듯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토사가 사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 입장에서 이야기가 예수님의 자기의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는 그 이룸이 그냥 가만히 있는 이룸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이룸이 되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이 전체를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새 언약’ 또는 ‘새 언약 시대의 돌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어요. ‘새 언약 시대의 돌입’

전에 제가 언급할 때 언약이라는 말을 쉽게 할 때는 이렇게 하라고 했지요. 울산의 현대중공업에 보면 거대한 크레인이 있지요.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 배에 있는 것을 부두에 놓으려면 사람의 손으로는 안 되니까 기증기로 해서 올려놓으면 되잖아요. 바짝 들어서 옮겨 놓으면 되는 것이.

구약의 옛 언약 위에 인간이 실패한 그 언약을 인간은 이제는 손을 떼어야 돼요. 실패했으니까. 언약인데, 약속인데, 인간이 못했으니까 실패로 끝나면 안 되잖아요. 그걸 바짝 들어가지고 예수님께서 골리앗 크레인이 되어가지고 부두에 와서 툭 떨어뜨리는 거예요. 여기에 제공한다, 적용시킨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중요한가 하면, “나는 사도바울처럼 짜릿한 걸 원해” 이것은 잘못된 거고요, “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완성 상태를 원해” 이러면 말이 되고. ‘사도바울이 길을 가다가 뭔가 빛을 봤구나. 나도 봤으면 좋겠다.’ 라는 내가 어떤 순간적인 체험을 사모하면 안 되고 ‘이렇게 밀려왔으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전체가 나를 덮쳤으면 좋겠다.’ 이렇게 되어야 옳습니다.

그렇게 되면 덮쳐진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말씀의 사람, 아주 작게 쓰겠습니다. ‘말씀의 사람’ 그리고 말씀 덩어리가 왔으니까 눈을 한꺼번에 받으면 그 사람은 갑자기 ‘눈사람’ 돼요. 갑자기. 겨울왕국에 나오잖아요. 레잇고하는 눈사람. 눈에 파묻힌 작은 사람. 주체는 날아가 버리고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 말씀이 새롭게 제공하는 새로운 주체로 바꿔치기가 이 안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전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전에는 구약식이에요. 구약식이 뭐냐 하면, 내가 말씀을 지켜내는 겁니다. 십계명. “십계명 가지고 와! 내가 지킬 거야.” “십계명, 제사법, 할례, 십일조, 안식일, 내가 다 지킬 거야.” 이랬는데 신약에 와서 이것이 실패로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주체가 되셔가지고 언약의 주인공이 되셔가지고 우리에게 옴팍 뒤집어씌우면 이제는 나를 통해서 십일조가 무엇이며, 안식일이 무엇이며, 십계명이 무엇이며, 예수님의 말씀 복음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내가 십일조 10%를 내는 것이 십일조가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그 자체가 십일조가 되게 하신다 말이죠. 십일조가 되어버렸는데 무슨 또 십일조를 내요. 십일조 받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은 십일조 받을 사람이 없다는데 누구한테 냅니까? 받을 주체가 없는데요. 만약에 십일조를 계속 받게 된다면 이건 십일조 율법이 말라기 율법이 아직도 미완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극동방송 20년 전에 생중계하는 상담을 하면서 “헌금은 여러분 자신에게 하세요.” 라는 말을 한 거예요. “헌금을 교회에 내지 말고 여러분 자신에게, 자기의 살림살이에 보태세요.” 이 말이에요. 난리 났지요. 생중계로 전화 받았어요. 아직도 구약이라, 구약은 흥정이고 거래입니다. “이거 해줄 테니 뭐해 줄 거요?” 이리 나와요. 신약은 “가만히 있어라. 내가 덮칠 테니까.” 이것은 일종의 사도바울이 봤던 ‘구멍’이에요.

하늘나라와 지상에서 구멍, 바늘구멍까지 쏟아질 구멍이지요. 물이 있는 풍선에다가 바늘 하나가 콕 찍어가지고 그 구멍사이로 풍선에 있던 물이 오르륵 쏟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쏟아진 거예요. 젖소 젖 짤 때, 젖 나오잖아요. 젖이 한 두 개가 아니고 여러 개로 전부 다 오는 거예요. 이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젖이 여러 개 있어가지고 쥐나 개나 젖을 다 빨아먹게 되었어요. 매일분유 이제 망하게 됐어요.

사도바울이 그걸 증거 하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었다. 아주 즐겁게 이야기해요. 나는 죄인이었다, 를 아주 노래 부르면서 이야기해요. 이번에 진도에 배빠지고 난 뒤에 제가 쓴 글이 뭐냐 하면, ‘일상과 죽음’이라는 글을 십자가마을에 올렸습니다. 글의 내용이 뭐냐 하면, 수요 설교의 내용이 그거였잖아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죽는 거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그쪽에 갔잖아요. 갔는데 왜 자꾸 오라고 안산에 다시 오라고 기도회를 여느냐 말이에요. 주님께서 친히 보낸 애를 왜 자꾸 오라고 하느냐 말이에요. 이것은 마리아 마르다가 누구를 자꾸 오라고 하는 거예요? 죽은 오빠를 자꾸 불러내라는 거예요. 안산하고 똑같아요. 지금 쉬고 있는데 지금 자고 있는데 왜 자꾸 불러내라고 간곡히 기도하느냐 말이에요.

출애굽이 뭡니까? 출애굽이라 하는 것은 죽은 자의 모임에서 산자들의 모임에 따로 분리되어서 가는 거거든요. 그게 구출이고 구원이잖아요. 구원받는다는 말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떨어져서 주님이 계신 죽음도 없고 아픔도 없는 세계에 가는 게 구원입니다. 그게 구원인데 구원시켜줬는데 오라하면 그것 참, 주님 하신 일이 뭐가 됩니까? 그래서 제가 쓴 글에 보면, 주일 설교에 보면, 바다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바다는 누구를 위해 있다는 겁니까? 바다는 예수님을 위해 있는 겁니다. 사람을 위해 있는 바다라고 그동안 다들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사실은 이미 태어나면서 저주받은 세상에 빠졌어요. 이게 창세기3장이야기입니다.

모든 일에 말씀에 연관되지 않은 일이 없어요. 여러분이 어떤 일이 일어나거든 고 일을 통해서 내가 몰랐던 복음을 새롭게 알라고 그러한 계기를 줬다, 이리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래야 모든 일이 일어남이 다 주님의 손에서 일어나고 의미 있는 일이 돼요. 만유가 주님의 손에 있는데 중심을 자꾸 내 중심으로 되어버리니까. 충격 받았다. 충격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나는 살고 싶었다는 이 이야기밖에 안되거든요. 내가 만약에 그 상태에서 죽으면 안 돼! 안 돼! 안 돼! 이리 된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에게는 안 돼 라는 것이 더 이상 용납이 안 되는 그러한 세대에 들어왔습니다. 이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는 악한세대라고 합니다. 개인이 악한 게 아니고 통째로 악해요. 이 세상 자체가 통괄적으로 악해요. 소급해서 다 악해요. 갈라디아서 1장 4절의 복음이 뭐냐 하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주님께서 자기 몸을 드리셨느니라,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니라. 사람들은 악한세대에 자기를 포함시켜 줘야 되는데 자꾸 악한 세대에서 자기는 따로 빠져나오려고 생각하는 거예요.

빠져나오는 특별대우 받아야 되는 것처럼, 여기에서 빠져나와서 새사람 되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구원파입니다. 악마의 마지막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구원이에요. 구원. 나만 달랑 구원받으면 OK. 그게 바로 악마가 마지막 주는 선물이에요.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는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주님의 구원에 우리가 참여하고 동참하는 것이지 구원을 “요거는 나는 달랑 받았지!”하고 받아 챙기는 이런 구원은 이 세상에 없어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구원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 참여되어야 돼요. 그 구원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면 그게 이스라엘 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주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가 따로 살림을 차리려고 한 거예요. 독자적인 나라 이스라엘을 멋들어지게 한 번 만들어 보자, 하는 거예요. 지금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독자적인 겁니다.

개인이 복수가 되는 거예요. 복수라 하는 것은 여럿을 말하는데, 개인이 복수화되고 복수화를 단수화 만들어서 이걸 삼위일체 체계로 대변화 시키는 겁니다. 이게 자기를 위한 자기가 포함된 어떤 집단의 이름으로, 어떤 가정의 이름으로, 국가 이름으로 단수화되는 겁니다. 하나로 모아지는 겁니다. “우리 교단은 정상이다.” 이게 전부다 여기서 나온 겁니다. “우리 교회는 이단 아니다.” 전부 여기서 나온 겁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교회라는 말 자체가 더 이상 이상적인 교회를 찾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성경에 말씀 자체에 교회가 있으면 말씀 자체가 고 하나밖에 없는 그 교회를 말씀 자체가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게 안 믿으니까 자꾸 눈에 가시적인 이상적인 성령의 공동체를 자꾸 보고자 하니까 이게 폐쇄적인 자기만의 집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집단에 들어가려하면 등록해야 되고 돈 내야 되고 결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목회가 어디로 쏠립니까? 모든 단체가 모든 게 돈이고 돈은 결국 사업이에요. 사업. 교회라는 게 하나의 사업이라니까요. 구원파도 사업이에요. 저임금 줘서.

이건 구원파가 먼저 한 게 아니고 천주교에서 먼저 한 거예요. 수녀들 월급 얼마 한다고요. 수녀들 간호사해서 월급 얼마 줍니까? 간호사 월급이 250만원에 잔업까지 하면 300만원까지 올라가거든요. 그런데 수녀들은 40만원 받는다고요. 착취지요. 신앙심을 이용한 착취라니까요. 그래서 헌금한 거 바티칸에 보내고. 교황은 미국에서 신자의 헌금이 삼분의 일이 아니면 바티칸 유지 되지를 않아요. 용병들 월급 줘야 되지.

눈에 보이는 특정 집단을 이렇게 고수하게 되면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금이 밑받침이 되어야 돼요. 돈 없는 단체는 없어요. 돈이 항상 힘이 되고 지출되어야 되거든요. 수입이 되려면 수입을 교묘하게 수입을 잡는 그러한 상품화될 만한 교리 같은 게 있어야 돼요. 지방교회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교회 만들기는 돈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서 만들어졌어요. 돈이 필요 없어요. 피만 있으면 교회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피 안에서는 이미 언약이 완료된 상태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 피로 말미암아 의인되었고 의인이라는 말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흠이 없다는 말이거든요. 따라서 그 사람은 이미 구원된 상태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자기 안에 구원을 소유하는 것은 구원파고요, 주님 안에서 구원받으면 주님의 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로 사울이란 사람이에요. 사울은 지금 주님 앞에 매여 있지요. 매여 있기 때문에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기 구원이 아니고 주님에 관한 구원이에요. 이 용어가 제가 잘 안 쓰는 용어지만, 애매할 때는 쓸 수밖에 없어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예수님 구원 외에는 다른 구원 없습니다. 왜냐 하면, 언약 자체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언약이거든요.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성자는 아들인 동시에 나중에 이 땅에서 뭐가 되는가, 주가 되어야 돼요. 하나님의 계획은 이게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고 인간 위주가 아니고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 명제, 이것을 완성시키거든요. 따라서 구원이라든지 소망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믿음이라 하는 모든 것은 일단 언약밖에 있는 인간은 배제당합니다. 배제당하고 진짜 구원, 소망, 사랑, 믿음, 천국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창세전에 확정된 그것을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죄 가운데 실천을 하게 되면 이게 주로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걸 몰랐어요. 몰랐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주님이 가시는 그곳에 합류하겠다고 나섰거든요. 베드로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 가도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뭐가 준비 안됐기 때문에? 요한복음14장에 처소가 준비 안됐다는 거예요. 처소가 준비 안 되었다는 아이디어가 도대체 왜 진작 이야기 안했어요? 주님 따라 가면 되는 줄 알았지, 주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계속 함께 있다고 베드로는 오해한 거예요.

제가 어릴 때, 항상 엄마 가는 곳에 내가 계속 따라 붙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이가 6살, 7살 돼도. 어느 날 엄마가 어디 가거든요. 그래서 제가 따라 붙었지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어디에? 여탕에는. 그걸 감안을 못한 거죠. 함께 있다고 해서 계속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천국은 애초부터 못 들어갈 존재가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니까 사람들은 “이제야 제가 천국 가는군요.” 하고 마치 자기가 천국갈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이 있는 것처럼 일단 마음먹고 그 다음에 예수님과 조인되어 가지고 천국 간다고 이리 생각한 겁니다. 오늘날 젊은 아이들 선교단체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는 천국 갈 자격이 있고 보내주는 그것을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사랑’ ‘자비’라고 표현하거든요. 사랑과 자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쓸 수 있는 용어가 안 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인간한테는 방언이에요. 우리는 이 말을 해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본인이 알지를 못하는 거예요.

천국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아시는 거예요. 예수님만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면 그 다음에 누가 오시느냐 하면, 성령이 따라와야 돼요. 처소가 마련되게 되면 그 다음 절차가 보혜사를 보내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의 육신에서 나온 사랑과 믿음, 소망, 구원, 천국이라는 이것과 성령 차원에서의 율법이며 천국이며 그게 뭔가 혁혁한 차이를 보여줘요. 차이를 보여주면서 요 차이가 바로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과 피로서 차이가 극복되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요 차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통째로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죄의 어두움으로 한 묶음 묶어져야 돼요. 죄와 어두움, 사탄의 지배, 율법의 아래 저주의 아래라고 표현함으로서 진짜 천국에는 이런 식으로는 돌파가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그 다음에 십자가를 통해서 이랬던 우리가 바로 이러한 진짜 예수님, 하나님의 안에 참여하게 되었고 거기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아래쪽에서 어둠 속에서 무얼 생각했습니까? 교회를 생각하겠지요. 이 교회는 천국에서 말하는 그 교회하고는 다르다 말이죠.

그러면 이런 논리라면 결국 나온 결론은 아주 간단합니다. 간단한 논리가 뭐냐 하면, “그러면 성령을 안 받은 경우에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은 어떻게 합니까? 성령을 안 받게 되면 못 들어가지요.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뭡니까? “전도라는 게 의미가 없지 않느냐” 그래서 제가 전도라는 것은 어린양의 보좌에서 하는 것이지 우리끼리 옆 사람끼리 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보험회사 건수하나 올리는 것이지 이건 전도가 아니라 했어요.

전도라 하는 것은 선교 전도는 위에서 해야 돼요. 한국에 있던 사람이 나이지리아에 갔다. 한국에서 선교하러 간 게 아니고 한국에 있을 때에 어린양에서 파견 받은 사람이 이제는 그 작대기를 가지고 “이제는 한국에서 그만 살아. 이제는 나를 나이지리아에 보낼 거야.” 이렇게 나이지리아에 보낸 거예요. 그럼 뭐를 잊어야 돼요? 이제는 한국은 잊어야 되지요. 작업을 해도 그 자체 안에서 작업을 해야 돼요. 왜, 이제 한국에서의 사이는 끝났으니까.

만약에 한국에서 보내버리면 한국이 메시아나라 되고 한국이 돈줄이 되는 나라가 되기 때문에 사업차 하나의 지점 하나 개설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이것은 속임수지요. 정말로 선교하려면 그 사람 나라 가가지고 그 나라에 국적으로 바꾸고 그 나라에 세금내고 그 나라 사람이 되고 이제는 한국은 잊어야 되고 가끔 친척들 놀러오는 것은 좋지만, 한국 땅 밟기를 끊어줘야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사울이 봤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왕창 엄청나게 뒤집어썼습니다. 그러면 사울에게 주어진 것이 뭐냐 하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거거든요.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거라면, 그러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과 이방인 사도되는 거와 무슨 관계있느냐, 관계있어요. 왜냐 하면, 구약의 마지막에 보면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짓겠다고 할 때, 그 때 이방인들이 가담이 된 겁니다. 이방인들이. 호세아, 아모스 같은 경우에.

구약 선지서의 내용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끝났다는 거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쭉 이어진다는 겁니다. 아주 간단해요. 모든 선지서를 한꺼번에 통괄해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끝났다. 하지만 언약은 안 끝났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안 끝난 그 언약은 누가 채울 것인가? 거기에 이방인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누가해요? 사도바울이 그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지요. 내가 보낸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 간 것이다. 결국은 아까 골리앗 크레인처럼 예수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언급한 내용도 바로 구약 자체를 완성시키잖아요. 구약 자체를 완성시킨다는 말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어떤 요소가 새롭게 발생되느냐 하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천국에 합류할 수 있고 언약 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그러한 요소가 예수님의 공생애 속에 그게 포함이 됐겠어요? 안 됐겠어요? 반드시 포함되게 되어있어요. 포함돼 있습니다. 그게 포함됩니다.

그런데 그걸 누가 극구 반대해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극구 그걸 저항하지요. “왜 당신은 메시아라 하면서 율법을 그렇게 스스로 위반하면서 율법을 어기느냐” 이리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저들은 개 같은 인간이니까 구원은 우리가 구원하고 설사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일단 유대교가 갖고 있는 두 가지 법이 있어요. 하나는 할례와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거예요. 두 가지 지키는 조건하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 유대신학의 포인트입니다. 구약을 조사를 다해보니까 딱 두 개가 정의 돼요. 하나는 뭐냐 하면, 안식일과 할례를 행하면 육적으로 이미 아브라함자손이 되고 안식일은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나 이런데 보면 영원히 안식일은 변경되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안식교도 그렇게 설치잖아요.

그래서 구원받는 방법을 딱 맞췄어요. 구원받는 방법을. 할례하고 안식일 두 가지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일단은 우리 유대인이 먼저 하고 그 다음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지시 하에 들어오게 된다. 그런 절차인데. 예수님께서는 개 같은 이방인 여자도 구원받고 이방인 백부장이 구원받고 천국의 본 자손 다 쫓겨나고 니가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 또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이야기하면서 이 어두움의 장소에서 빛이 임했다는 이사야가 이루려함이니라, 그래서 이방인의 장소에서 거꾸로 뭘 공격하느냐, 예루살렘을 공격해 버리지요. 그야말로 불도저를 몰고 오시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갈릴리의 이방인들은 이방의 어두움의 자리에서 굴삭기로 뚫고 돌격! 진격! 하는 거예요. 어디까지? 예루살렘을 확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냥 전부 밀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예루살렘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니가 죽어라, 했지요.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이것을 사도바울이 알게 된 거예요. 예수님한테 계시 받고. ‘아, 유대인들은 인간은 안 되는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심판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먼저 시험거리 테스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것들을 애굽에서 건져냈구나!’ 라는 사실을 알고 이것이 창세기부터 감추어진 예정된 비밀이라는 거예요.

이 비밀이 십자가에서 복음으로 드러났다는 거예요. 이제는 십자가 앞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이제는 담을 쌓지 말라, 이게 에베소서 2장에 나옵니다. 주께서 화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원수지간이 아니고 이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면 예정된 한 형제가 된다. 그렇게 언급하는 겁니다.

이러한 모든 스토리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뭐냐 하면, 첫 째는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 없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의 율법을 못 지키면 못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못 지켰을 때는 반드시 뭐가 주어집니까? 못 지키면 반드시 저주가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성경전체 내용을 보면 인간은 완전히 인간의 주도권을 하나님한테 이미 빼앗긴 셈이 되고 하나님은 철저하게 인간을 이용한 셈이 돼요. 하나님은 자기의 법에 우선권을 두면서 이 법가지고 밀고 당겼다, 밀고 당겼다 하는 그런 권한 자가 되는 겁니다. 완전히 병 주고 약주고, 약주고 병 주고 하는 식이에요.

인간으로 하여금 힘든 인생 살게 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나름대로 구원을 시도하지만 그 구원을 시도한 그것들이 그것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이미 확정지어 놓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실패를 답습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에게 놀아난 거예요. 로마서9장 같은 경우에는 토기장이가 토기 만들 때, 토기가 나서지 말라 이 말이죠. “재는 저렇게 주전자 만들고 나는 완전히 찌그러진 냄비 만들고 나도 저렇게 예쁜 주전자 되게 해 달라” 그렇게 나대지 말라 말이죠.

나대지 말라는 말은 어떤 인간도 독자적인 자기의 아이디어로 니 구원을 성취시켜 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니 인생은 니가 관리하고 니가 살려내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32장에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누구하고 한 판 싸우지요. 야곱이 뭘 모르고 하느냐 하면, 내 인생은 누가 지킨다? 사는 동안 내가 지킨다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는 그것이 모든 복을 무효로 돌릴 수밖에 없는 이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예요.

그리고 깨지고 난 뒤에 야곱이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뭘 모르는가를 깨우치기 위해서 찾아와 주셨다는 그 자체가 이게 로또복권보다 더 센 이것은 일생일대의 최고의 행운을 잡은 거예요. 나는 평생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고 내가 나를 천국 보내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내가 밥 먹고 살게 만든다는 이것이 죄임을 깨우치도록 조치를 취했던 그 조치가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 속에 놓여있는 자의 여유, 즐거움의 혜택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내신다. 그래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천국의 삶이 있게 하는 거예요. 천국의 삶이 뭐냐 하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제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는 자들만 여기 집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요 이 사람들 뽑는 이 지상에서 뽑아내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방법으로, 다른 방법이 아니고 꼭 요런 결론이 나오도록 방법을 주시는데 그 사건들이 이 지상에서 나는 모든 사건들입니다.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내 인생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될 인생이 아니군요.” 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사건들이에요. 비록 내 가정에서나, 남의 가정에서 또는 대전은 아니지만 안산에서 일어나던지 진도에서 일어나던지 일어나서 나로 하여금 내 인생은 지금도 내가 몸조심해서 이만큼 살아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그런 천국의 삶이 뭐라는 것을 정보를 미리 언지를, 암시를 미리 주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14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누구든지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고 나를 위해 죽는 자가 없다 이리 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가셨던 그 길을 사도바울이 이제 참여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정답 알았습니다.”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갔던 그 길을 참여해야 돼요. “아이고 뭐, 됐습니다. 됐습니다. 이제 오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이런 거 없어요.

“이제부터 니는 죽었어.” 쓴잔을 마셔야 돼요. 쓴잔을. “쓴잔을 안마시고 그냥 높은 자리에 누가 앉겠습니까?” “아니야, 너는 높은 자리 생각하지 말고 내가 마신 잔을 너희들도 마셔야 돼!“ 쓴잔을 마셔야 돼요.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말씀은 다나 속에 들어가니까 쓰디쓴 약도 없어요. 그냥 쓰게 되는 겁니다. 우리 권사님도 잠시 쓴잔을 마신 거예요. 어휴! 그래서 제가 주일날 했잖아요. 그 진도사건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아이고, 다행이다.“ 다행이라는 말을 하라고 그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닙니다. ”제가 교만했군요.“ 이 회개하라고 준 사건을 가지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뭘 감사해? 뭐가 다행이라?

인간이 이렇게 교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요, 뭘 갖고 있기 때문에? 목적을 따로 만들기 때문에 그래요. 목적이 있는 곳에는, 꿀이나 설탕이 있으면 뭐가 달려듭니까? 벌이나 개미가 달려들지요. 음식 놔두면 똥파리 달려들듯이 이 목적이 있으면 반드시 일곱 귀신 마귀가 다 달려들어요. 목적이 있으면.

이 목적에 왜 달려드는가 하면, 목적으로 인하여 인간은 이미 자기 자아가 정립이 되어 버립니다. 대표적인 것이 임 재범이 불렀던 고해라는 노래, 저 여자만 주신다면 제가 뭐든지 신에게 충성하겠습니다. 저 여자만 주신다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저 여자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사람은 뭐냐 하면, 그 여자와 함께 있는 자기로서의 순간이 바로 평생 살아왔던 고 자기의 진 모습이에요. 인류평화도 아니고 북한 핵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그 순간은 뭐냐 하면, 내가 저 여자와 함께 사는 것 이걸로 굳혀져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기도하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꼬기 꼬기 숨겨놓은 목적을 돌출시키고 그 목적을 위해서 내가 거기에 목적이 하나의 나의 우상이 되고 종교가 되어가지고 나는 신도로 변해요. 그 목적을 위해서 무슨 짓도 할 수 있는 하나의 신도로 변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누굴 숭상하느냐 하면, 바로 내가 나의 목적을 숭배하는 교주도 나고 충성된 신자도 내가 되는 거예요.

요번에 여름에 할 주제가 출애굽기입니다. 창세기는 이미 대전강의에서 넘겼습니다. 출애굽의 핵심을 여러분에게만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금가락지 빼고 우상을 섬기는 거기에 누가 부재해요? 모세가 없지요.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이거든요. 안 보이지만 여호와를 상상하는 거죠. 그리고 자기가 경험했던 것을 모아서 홍해를 건너왔던 여호와를 상상해서 나름대로의 자기 속에 잠재되어 있던 모든 정결했던 것을 다 끄집어내서 집결시킬 때, 우상은 바로 내가 바로 우상이었던 사실, 내가 매일같이 눈만 뜨면 나는 오늘도 나만을 섬기는 나를 섬기는, 사랑과 전쟁2 백날 봐도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를 섬기는 거예요. 막장드라마의 주제는 전부 다 나를 섬기는 거예요.

목적이 될 때, 목적과 더불어서 운명을 같이해 버립니다. 그러면 마귀는 달려듭니다. 이렇게 하면 목적이 된다. 저렇게 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자꾸 마귀가 멘트를 날려요. 왜냐 하면, 목적은 이미 본인이 정했기 때문에. 교인이 교회에 올 때는 이미 목적가지고 이미 기도를 몇 시간째 기도하고 오면서 이 목적을 위해서 기도하고 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온갖 마귀의 종들은 여기에다가 격려를 해주지요.

오늘 이 사건은 무슨 사건인가 하면, 목적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럼 목적 자체가 없으면 뭐가 돼요? 목적이 없으니까 그 존재는 무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사울을 다메섹에서 만났을 때, 바로 무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무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허무지요. 또는 무. 무에서 주님이 새로운 사명이 줘버리면 이 목적은 마귀가 격려할 수 있는 목적입니까? 아니면 마귀가 싫어하는 목적입니까? 싫어하지요.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마귀의 싸움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쫓아 추방해버렸잖아요. 그 추방된 목적을 가지고 사울에게 줘버리니까 이제는 사울은 자기 목적 말고 예수님 입장에서 이 마귀와 싸우는 영적 전쟁을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면서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거든요.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주신 목적이 주어집니다. “너는 반드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돼!” 그 모든 목적은 하나밖에 없어요. 복음 전파에요. 복음. 하나의 복음입니다. 오늘 개가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오늘 개가 들까불다가 조용하거든요. 개가 조용한 이유가 주께서 그렇게 힘주셔서 조용한 거예요.

모든 일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집어넣었을 때, 개가 조용한 것도 조용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개 같은 내가 조용한 것은 주께서 이렇게 조용하게 하셨기 때문에 조용한 거예요. 왜 우리 16살 먹은 둘째 애는 수학여행 안가고 안 빠져 죽었느냐, 주께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번 진도사건의 정답은 이미 나왔지요. 누가 하셨다고요? 살리고 죽이고 누가 하셨습니까? 주께서 하신 거예요. 어떤 요령이나 방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안산 시내의 고등학교가 한 주 전에 이미 세월호타고 제주도 수학여행 갔다 왔어요. 그 애들은 멀쩡해요. 그 애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세월호로 잘 달렸습니다. 모든 발걸음을 누가 세신다 했습니까? 마태복음10장에서 주께서 세시고 머리카락 세시고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주의 뜻이다. 백날 성경 달달 외워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제는 이걸 실습을 시키는 겁니다. 이걸 실습을 시켜보니까 개코나 믿어요? 뭘 보고 믿어요? 믿은 사람 있던가요? 아무도 없어요. 결국은 바로 야곱이 야곱처럼 내가 믿음 같은 거 성경을 인용해가지고 그것가지고 내가 내 힘으로 내 믿음으로 내가 한 번 살아보겠다는 야곱이 얻어맞기 전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살아있어요.

성령이 와서 그걸 뭐합니까? 목적이 너를 그렇게 버려놓은 거예요. 인간을 버려놓은 거예요. 목적이 인간을. 올해 11월 8일에 1시 김 종임 권사님 따님 진희 결혼합니다. 이미 목적이 정해졌어요. 목적이 정해지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마귀에게 시험 듭니다. 왜냐, 목적이 정해졌기 때문에 목적이 달성해야 되기 때문에 파토나면 안되기 때문에, 주례는 누가 할 겁니까? 상견례하면서 기 싸움 벌어져요. 이제는 제주도가 골치 아픈 게 아니고 진희 때문에 골치 아파요. 결혼을 어떻게 무사히 성사시킬 것인가, 욕 안 얻어먹게 할 것인가, 또 시집에 가서 구박받도록 혼수 적게 했다고 구박하는 게 아닌가, 지금 골치 아파요. 그 마귀 7귀신이 다 들어와요.

도대체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려면 잠수사가 500명이 있어야 합니까? 몇 명이 있어야 합니까? 주님 한 분으로 돼요. 500명 들일 필요 없어요. 인간 방수 쓰고 UDT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예수님만 건지십니다. 어떻게 건지시는가, 골치 아프게 하셔서 마귀한테 시험 당하게 하십니다. 고요하게 조용하게 가는 법이 없어요. 기 싸움하고 장소 싸움, 음식 등등 마귀에게 해가지고 우리는 마귀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확실하게 느끼게 해서 거저 저 같은 죄인도 딸 키운다고 분명히 노아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다가 갑자기 온 것처럼 아무리 주님께서 오셔도 그래도 나는 일단 요번에 딸은 시집보내야 되는데, 어찌합니까? 부르면서 천국이고 재림이고 나중이고 다 밀어버리고. “주여, 일단은 딸은 치워야겠습니다.” “주여, 이것만은 일단은 집중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셔가지고 고생 실컷 하게 하셔서 “역시 나는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십자가 피가 아니면 구원 받을 수 없군요.“ 그것이 곧 선교사입니다. 이 대전 땅에서.

주께서 파견한 어린양 보좌에서 파견한 선교사가 바로 지 잘난 체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는 시댁귀신이 얼마나 센 귀신인지 한 번 보세요. 벌써 옷차림부터 해가지고 상견례 할 때부터 상대방의 저 사람의 키가 얼마고 말씨가 어떤지 시누이, 올케 될 사람이 어떤지 탐색에 들어가는데 복음이고 뭐고 다 잊어버려요.

목사 개척교회 하면서 복음하고 말씀대로 하는데 교인하나 새로 왔다. 그때부터는 모든 중심은 “주여, 저 사람을 일단 붙들고 봅니다. 하나님이여, 그것만 용서하소서. 일단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하나가 아쉬운데 보니까 돈 좀 헌금깨나 할 사람으로 보여요. ”주여, 살아야겠습니다.“ 목적이 되면 마귀가 달려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결국은 나라는 인간은 주님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그 교인을 좋아한 이러한 나쁜 인간이라 하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 만든 그 작업이 성령이 하시는 작업 중에 들어가요.

우리 위에는 마귀가 타고 있고 마귀위에는 주님이 타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마귀는 없애버리고 주님만 타는 그런 거 없어요. 일단 마귀 태워놓고 주님 태워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자기 공로로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았다는 소리, 처소에 갔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했잖아요. 그 사태 누가 유발시켰습니까? 주님께서 유발시킨 거예요. 닭만도 못한 존재라고. 닭이 시간보고 꼬끼오! 울었는데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해야 될 그런 존재로 전락된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항상 주께서 함께 있다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나의 목적으로 인하여 내가 실패로 끝났을 때, 이것이 주님의 사랑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은 이것은 사랑하는 척 하는 거고 진짜 주님의 사랑은 쓸데없는데 고민했고 낙담했고 허무한 것에 절망을 느끼는 것이 ‘아,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깨닫는 순간 그것이 바로 성령이 주신 감사와 사랑의 폭발에서 나오는 그 순간이에요.

그 다음에 봅시다. 12절에 누구를 붙여주는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을 택하여 14,15절에 보면,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라고 아나니아는 전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조치를 해놨는지 사울의 일이 되지 않게 사울 개인의 일로 되지 않게 하는 거예요. 그 사울이 하는 모든 공적이 사울에게만 홈빡 돌아가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께만 돌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준비된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하나님의 선교, 전도 작업에 있어서 만나야 될 사람들을 이미 배치를 해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어떤 모든 일이 본인이 한 그 말 그대로에요. 복음에 매인바 되지요. 사랑의 줄로 꽁꽁 매였다는 노래도 있지만 복음에 줄로 꽁꽁 매인 거예요. 또는 복음에 빚진 자로다. 사채를 쓴 모양이라, 사채를 써가지고 복음에 자꾸 쫓겨. 모든 것이 복음의 세계로 재구성하고 그런 안목으로 현실로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에게 조그만 소망이 있다면 빨리 속히 자기가 죽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20절에 보면, 요거하고 10분 쉽시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다윗이 밧세바하고 간음해놓고 그 뒤에 그걸 나타냈습니까? 숨겼습니까? 일단은 숨겼지만, 그 뒤에는 어떻습니까? 그 뒤에는 누구하고 결혼했어요? 밧세바하고 결혼했지요. 이게 무엇의 의도입니까? 왜 밧세바하고 결혼합니까? 밧세바와 간음한 것이 그 전에는 자기가 죄 지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죄 지었다고 생각한 것이 죄 지은 거예요. 자기는 죄 지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에요. 제가 한 말이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는데.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이미 나면서부터 죄를 짓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깜빡 놓쳐버리고 내가 죄 지을 경우에만 죄인 되고 내가 착한 일하고 물에 빠진 사람들 위해 선금내면 나는 착한 일했다고 오해해요. 헌금하고 십일조하면 기도하면 이건 착한 일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뭘 잊어버립니까?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놓쳐버려요.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내는 거예요. 요거는 착한 일, 요거는 나쁜 일이라고 본인이 그렇게 정한 그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된다는 겁니다. 어떤 관점인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에 그 안에 우리가 포함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십자가 졌다는 그 사실에 버림받았다고 사실에 합류가 되어버리면 이미 그 자체는 우리는 죄인이에요.

우리가 행동으로 죄인이라 하지 말고 십자가를 갔다 대자 이 말이에요. 십자가를 갔다가 대니까 십자가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어야 하고 의인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살리기 위해서 다윗은 누구하고 결혼하는가 하면, 밧세바하고 자기가 남의 아내지요. 우리아의 아내와 보란 듯이 결혼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이스라엘 왕으로서 그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알고 있던 왕은 제가 아니고 지금도 여러분을 용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진정한 이스라엘의 보이지는 않지만 진정한 왕이십니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됩니다. 나는 여자 밝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왕의 자리에 계속 있어야 될 이유입니다.” 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로서 권한을 할 때, 잘나서 권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스데반이 죽을 때, 자기가 가표 던진 것은 자기가 살인에 공로한 거죠. 살인을 찬성했다고 하잖아요. 그런 죄인 중의 죄인을 포행자요, 예수님을 시위했던 그런 자를 세웠던 이유가 뭐냐를 그것까지 포함해서 복음을 전한 거예요.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된다면 여러분도 구원될 수 있습니다.” 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세웠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러한 사건은 아무에게나 주는 사건이 아니고 사도바울을 되게 하기 위한 주님의 목적 하에 주어진 사도의 사도됨입니다. 그래서 자꾸 사도된다고 하지 마시고요, 나도 이런 일 좀 하지 마세요. 이건 사도바울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있는 자리에서 그냥 낮잠 자다가 억하고 순교하면 돼요. 그렇게 해도 귀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8.♡.196.154)

14-04-29 17:56

대전140424-마16장1절(요나의 표적)51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6장 초반은 별로 어렵지 않은데 중간부터 어려워집니다. 왜 어려워지느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있어요. 언급이 되어있는데, 이 교회이야기 해놓고 고난 이야기한 겁니다. 교회이야기하고 너는 베드로라 하고 내가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울 것이라, 해서 뭔가 교체 의미를 줘요. 이제 이 유대교를 대신하여 이 12지파를 대신할 새로운 12지파가 등장하는 그것을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미리 알려줘 가지고 내가 교회 만들거든 내가 만들었다고 여겨라. 따라서 교회 있음에 있다는 자체가 주님이 계속 활동하는 것으로 그렇게 봐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면 주님은 어디 가느냐, 나는 고난 받고 이 땅에서 죽어야 된다. 그러니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주님이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할 때, 죽고 살아남이 죽기 전의 상황과 동일한 상황이라고 오해를 한 거예요. “아이고, 죽을 뻔했다. 아이고, 식겁했네.” 이렇게 했다는 것은 엎어질 때, 엎어지고 툴툴 털고 일어나면 되잖아요. “아이고, 내가 엎어질 뻔했네. 내가 다칠 뻔했네.” 다치고 넘어진 상황이나 전의 상황이나 동일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동일한 상황이 아닙니다. 완전히 세상이 바뀌어져 있어요. 동일한 상황이 아닙니다. 부활하기 전에는 주님이 제자들과 같이 육체로 함께할 수 있지만, 부활하고 난 뒤에는 주님이 찾아올 경우에만 허락이 되고 제자들이 같이 있고 싶어도 그냥 홀연히 떠나버리면 제자들의 손에 잡히지를 않아요. 왜 그리되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고 살아난 것이 십자가죠. 십자가의 반복성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의 반복성은 십자가 목걸이 걸면 이것은 반복성이 아니고 십자가의 목걸이는 늘 고정적으로 유지되잖아요. 그런데 사건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손에 조작되거나 연출은 되겠지만, 그 사건은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없어요. 동일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아요. 남녀가 연애할 때, 연애의 감정이 결혼하고 난 뒤에는 찾을 길이 없어요. 왜, 이미 한물간 사건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남자가 바람피우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사랑을 알기 때문에 바람을 피우는 거예요. 차라리 사랑을 모르고 그냥 어른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그냥 살면 되는데, 사랑해서 연애를 했기 때문에 결혼하고 난 뒤에는 이미 그 연애감정이 없어지잖아요. 없어진 것을 다시 찾고 싶어. 더 이상 식모하고는 살기 싫어. 옛날 그 사랑했던 사랑, 그게 있어야 살맛이 나는 것 같아. 동일한 사건을 찾는데 그 동일한 사건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동일한 사건은 예수님만이 이룰 수 있는데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거든요.

십자가사건의 반복은 뭐냐 하면, 그냥 사건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대 자체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거예요. 이 세대 자체를 한 바구니에 얹어가지고.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거예요. 십자가 죽기까지의 모든 사건을 품고 그걸 다시 이 땅에서 떨어뜨리고 다시 건지고. 떨어뜨리고 건지고. 성도한테 십자가사건도 반복되지요.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시고 매일같이 죽인 우리를 다시 살려내시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새우튀김 해놓고 한 번 쳐다보면 반짝, 반짝 소리도 바삭, 바삭 나지요. 그런데 아들 주려고 놔던 것이 3시간 지나면 숨다죽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기름으로 확 튀기지요. 다시 바삭 바삭 하잖아요. 성도도 마찬가지거든요. 주님께서 세상에 집어넣었다가 딸 결혼 때문에 신경 많이 쓰게 하다가 다시 십자가 바라보게 하다가 돌아서면 또 ‘아니야, 이건 성사되어야 돼“ 하다가 십자가 보게 하다가 매일 이런 식으로 반복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반복하기 위해서 악한 이 세상을 전부 다 하나로 대조를 시키는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어요. 하나로 시스템을 만들어가지고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요 시스템 속에서 뭐를 끄집어내는가 하면, 주께서는 사탄과의 관련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태복음16장 미리 봅시다.

23절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단아 물러가라,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교회 만들면서 이 교회라는 것이 이 세상의 어떤 단체와 어떻게 대조가 되는지를 대비가 되는지를 그 때 써먹을 하나의 핵심 요소가 돼요. 일종의 컴퓨터 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괜히 베드로보고 이런 욕했다고 베드로보고 화를 내는 게 아니고 베드로에게 똑바로 하라고 책망하고 교육을 시키는 게 아니고 어떤 칩을 만드는 재료로서 베드로가 하는 그러한 반발도 그게 다 필요한 경우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보고 뭐라고 했지요? 사단아! 했지요. 지금 예수님은 제자훈련을 시키는 게 아니에요. 제자훈련은 성립이 안돼요. 다락방 이런 건 안돼요. 훈련을 시켜서 성도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냥 들었다, 놨다, 반복해서 십자가를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새우튀김은 되게 돼있어요. 그냥. 그러니까 훈련할 필요도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지금 훈련받고 있는데 주님이 훈련하고 있는데, 남들이 왜 나서서 훈련을 해요. 그건 지가 스승이라고 자처하게 되는데. 이 세상에 스승은 없습니다. 예수님만 스승이고 아버지는 하나님만 아버지지, 아비고 스승이고 없어요. 진정한 하나님과 스승은 예수님이 친히 스승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보고 사단아 물러가라 하는 것은 앞으로 진척되어야 될 하나님의 작업은 요런 요소, 요런 요소들이 모아져서 요걸 매일같이 반복시킨다 하는 그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16장 봅시다. 16장부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길로 갑니다. 16장은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해서 공관복음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해요. 16장이 마태복음을 둘로 쪼갰다 이리 보는 겁니다. 16장부터 본격적으로 한 번 해보자. 하는 식으로 팔 걷어붙이고 “그래, 내가 죽어야지. 너희들과 한 번 붙어보자.” 이런 식으로 나섰다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스스로 당신이 증명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이야기 논리하면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바리새인들의 현실, 사두개인들의 현실, 이 사람들의 현실이란 속에서 나름대로의 기적이라는 게 있어요.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반드시 인간이 해내지 못할 요소가 개입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그들은 기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홍해가 갈라졌지요, 여리고성 무너졌지요, 요단강 걸었지요. 하나님이 항상 개입하게 되면 예상 밖의 기적이 일어난다. 따라서 기적들을 모으면 하나님의 일에 집대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과거만 그렇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동일하게 똑같이 앞으로 하나님이 오실 때도 과거와 동일한 차원의 놀라운 기적을 동반해서 오신다. 라고 그들은 믿었던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인자가 올 때는 반드시 구름타고 오게 돼있고 그리고 그들의 신학에 의하면 만나에 떡을 내리면서 장차 메시아는 오신다. 라고 그들은 그렇게 규정을 한 겁니다. 떡을 줌으로서 메시아 티를 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모세는 광야에서 떡을 줬는데 당신은 뭘 줄 것이냐, 이렇게 이야기가 나오지요. 어쨌든 간에 그들은 신기한 기적만이 살길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당신은 어떤 기적을 베풀어서 당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해 보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렇다면 요 기적은 이 세대에서 기대하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이걸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통째로 규정해 버리면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이라 하는 것도 악하고 음란한 더러운 요구사항이 되는 겁니다. 이건 더 나아가서 뭐냐 하면, 너 자신이 문제가 있는데, 문제 있는 내가 어떤 요구를 한다는 자체가 그 요구사항도 역시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잘못된 사고방식가지고 질문을 해대는 것은 그 질문자체도 들어보나 마나 잘못된 삐뚤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진리를 바로 겨냥하지 못하고 진리 아닌 것을 겨냥하기 위한 질문을 내놓는 것밖에 안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적은 뭡니까? 왜 나는 너희의 세대에 속하지 않는가, 그것만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내가 왜 그런 너희들을 지적 질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 그 위치만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아무리 반성하고 회개해도 요 세대에 갇혀있기 때문에 갇혀있는 자기가 아무리 반성하고 회개해도 나중에 반성했다는 그 자체가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거든요.

그래서 교회에서 꼭 문제되는 것은 뭐냐 하면, 회개 많이 하는 여자 권사들이나 집사들이 문제를 일으켜요. 워낙 해결을 많이 하니까. 워낙 착하고 바르게 사니까. 도대체 천사야 뭐야? 저 사람이? 이 정도로 될 경지에 이르러버리면 모든 게 불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은 이렇게 합니다. 3절에 보세요.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뭐는 분별 못한다?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니라. 시대의 표적. 천기는 날씨지요. 날씨를 미리 헤아리는 것은 이 갇혀진 이 인간세대에서는 돌고 도는 거예요. 늘 상 그래왔던 겁니다. 과학이죠. 과학이란 반복적인 법칙에 의해서 내놓는 것이 과학적이잖아요.

너희들이 하는 기적의 수준은 뭐냐 하면, 익히 너희들이 이미 예상하고 있는 기적, 마치 날씨 일기 예보하는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 그런데 너희들 이 세대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은 너희들이 파악할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세대를 이야기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세대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이 시대라고 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있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수 없느니라.

요나의 표적이 뭐냐 하면, 이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요나의 일생을 통해서 보여준 표적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빠졌잖아요. 빠졌으니까 이것은 죽음이죠. 요나가 죽었다는 사실은 누가 평가한 거예요? 육지, 땅, 땅에 있는 사람들이 요나가 죽었다고 본 거예요. 요나가 죽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쪽에서(요나 쪽) 보면 요나가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요나가 고기 배속에서 있다가 몇 일만에 나왔습니까? 사흘 만에 다시 육지로 나왔지요. 그러면 여기서 봅시다.

이 땅에서 육지에서, 이 세대에서 바리새인들의 이 세대에서의 죽었다가 살아나면 이것은 그들이 기억하는 기적이 돼요.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보고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잖아요.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기적이지 예수님이 보여주는 진짜 이 세대자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기적은 아니에요. 그 표적은 아니에요. “아이고, 사람이 죽었는데. 살아났데. 아~ 신기해!” 신기하지요. 인간들이 말하는 기적이지요. 그리되면 자기 자신이 문제 있다는 것은 발견할까요? 발견 못할까요? 발견 못해요. “아이고, 우리 가운데 누가 죽었다가 살아났데. 아이고, 나 그 분 한 번 만나고 싶어.” 이렇게 되지,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런 소리는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표적과 기적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군요. 제가 뭘 해도 죄인입니다.“ 라는 식으로 맞닥뜨릴 때, 우리는 진정한 그 기적이 주님의 기적으로 끝나지 않고 확산되어 내 속까지 완전히 확장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죽었다가 살아나면 좋겠다.“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요나는 하나님의 성전과 더불어서 있었습니다. 이걸 가지고 다윗언약이라 해요. 다윗언약은 성전 하나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류가 계속 되어지는 그 약속을 가지고 다윗 약속,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다윗언약 이후에 성전을 지었거든요. 이 성전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계셔가지고 니가 죄를 지었을 때나, 아플 때나, 니가 가뭄 들었을 때나, 전쟁에 패배했을 때, 다 나한테 오게 되면 내가 너희의 소원을 들어주마. 라고 하는 것이 성전을 주신 취지가 되는 겁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뒤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성전만! 성전만! 성전만! 성전만 있으면 그들은 이제 땡잡은 거예요. 왜? 아쉬운 게 없어요. 뭐든지 다, 물에 빠져도 살려주고 성전만 있으면 다 살아나는 거예요. 왜, 거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상주해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요나가 살아난 것이 누구 덕이냐 하면, 요나의 기도 덕분이 아니고 성전 덕분이에요. 요나는 요나 개인의 사정보다도 이 성전 다윗언약을 계속 전파해야 될 막중한 임무를 띤 선지자입니다. 언약이 죽지 않는 한 요나도 죽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성도는 죽지 않습니다. 이것도 제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지 마세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사적인 우리 개인의 능력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줄기차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자체 안에서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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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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