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411b-히7장21절(죄의 발견) - 이 근호 목사
안양20140411b-히7장21절(죄의 발견)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안양20140411b-히7장21절(죄의 발견) - 이 근호 목사
첫 째 시간에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있을 때에 우리는 예수님 앞에 믿는다. 안 믿는다. ’믿으면 죄 아니고 안 믿으면 죄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 죄를 지을까 말까 하는 그런 대상으로 보는 것처럼 똑같이 예수님도 그런 대상 중에 하나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죄는 빨래해도 설거지해도 죄가 되는 이유가 바로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누가 결정해요? 본인이 스스로 양심껏 결정하기 때문에 이 자체가 자기의 본래의 자리를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 나의 본래의 자리는 다윗이 안 것처럼 이미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펄펄 죄를 짓게 되어있었어요.
그 죄가 뭐냐 하면, 바로 ‘정치적이다’ 인간의 모든 죄는 정치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소속된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살아간다. 나는 세상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이 힘들어도 나는 안 버릴 거예요. 이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도 좋지만, 애가 갑자기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이럴 때는 갑자기 기분 좋지요. 왜? 사법고시에 합격됐다는 것은 남한테 봉사한다는 그게 아니고 출세의 가도, 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는 방향이 정해졌다, 하는 그 점에 대해서 내가 원했던 방향은 결국은 짐승의 힘이었어요.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그런 쪽으로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는 거예요. 그게 계기가 있을 때는 노골화되는데 없을 때는 마치 예수를 사랑하고 주님을 쫄랑, 쫄랑 쫓아가는 것처럼 천국 가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거든요.
사실은 이게 전부 다 정치적입니다. 정치적인 이유가 뭐냐, 정치적인 이유는 어디서 나타나는가, 바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명이 되는 겁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정치적이 아니고 복음적이었지요. 왜냐 하면, 어느 누구도 대장질 못하기 때문에. 정치라 하는 것은 계급이 있는데 어느 누구도 왕이 필요치 않아요. 이스라엘은 왕이 없으면 안돼요. 사무엘상8장에서 그들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왕을 구한다는 자체가 너희들은 이제 나를 버렸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렇게 보신 거예요.
그 말을 백성들은 이해를 못했어요. ‘하나님 따로 믿고 우리 필요한 왕이 있으면 실용적인 왕이 있으면 되지’ 라고 생각했지 이 왕이 저 왕을 버리는 그런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그들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를 않았던 겁니다. 왕이 있다는 것은 곧 이방민족이고 왕이 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린다는 생각을 못한 이유가 한 가지 뭐냐 하면, 세상의 왕은요, 위에서 통치로 힘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은 사람들의 죄를 건사하고 그걸 계속 씻어내는 일을 해요. 이스라엘은 왕은 없지만, 사람들이 지시하는 높은 자리에서 하는 역할이 있었는데 그게 왕 없는 시대에 그게 누구지요? 제사장이지요. 물론 선지자도 있지만, 선지자는 고난 받고 원망 받고.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 뭐지요? 그냥 제사 드리는 거죠. 그 제사 왜 드립니까? 히브리서7장에 보면 우리의 죄를 씻어낸다는 거예요. 그만큼 죄가 계속해서 나온다는 뜻이거든요. 계속 죄가 나오기 때문에 계속 저쪽에서도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심장이 하루에 한 번만 뛰고 우리 놀 때 같이 놀면 어떻게 돼요? 죽지요. 왜? 우리가 논다고 여기는 가운데서도 피는 계속 더러워지잖아요.
그것이 좌심실, 우심실해가지고 피가 흐르고 서로 소통됨으로서 교환됨으로서 허파로 들어온 그 산소와 더불어서 헤모글로빈 해가지고 피가 맑아지면서 우리의 두뇌도 맑게 정리되어 돌아가게 되어 있지요. 마약하고 그러면 머리가 안돌아가니까 완전히 정신없이 환각을 보고 그러잖아요. 그것처럼 일종의 그 당시의 심장 역할 하는 것이 제사장이고 그들이 계속해서 죄를 씻어내는 가동이 되어야 이스라엘이 이방나라하고도 칼 없이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봅시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믿을 수는 없고요, 예수님의 소속한 나라에 소속이 되어야 돼요. 나는 주의 나라를 믿어야 됩니다.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말고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같으면 예수님 오기 전까지도 이미 하늘나라잖아요. 하나님은 그게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늘나라라고 언급을 해놓고 실제적으로 오신 나라는 예수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간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하늘나라에서 쫓겨나는 식으로 하늘나라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 요한복음1장18절을 봅시다. 전에 가락강의에서도 했지요. 다시 한 번 봅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질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뭘 생각합니까? 하늘나라 생각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늘나라가 아니지요. 예수님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늘나라 생각한다? 이건 잘못된 겁니다.
예수님이 나타났다면 예수나라만이 하늘나라에요. 예수의 나라만이.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고 예수님 그 분이 천국이고 그 외에는 천국이 없어요. 왜? 독생하신 하나님이 비로소 나타났기 때문에.
그러면 유대인들 봅시다. 정치적이니까.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잘 알면서도 중요한 거니까 진도 나가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인들에게 어떤 죽음이었습니까? 복음적 죽음이 아니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정치적 죽음이었지요. 정치적 죽음이었는데, 영화나 성경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제목이 두 가지에요. 하나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너가 누구냐?” “나는 하나님이다.” 그게 제목이에요. 신성모독이고 그리고 자기는 유대인의 왕이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에요. 왜냐 하면, 메시아만이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인데, 자기가 왕이라 했으니까 잘못되고. 그래서 유대인이 물어요. 가야바가 묻지요. “당신이 메시아라 하는 증거를 대라.” 할 때 주님께서 미래의 증거를 대요.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내가 구름타고 오는 것을 볼지어다.” 그럴 때 이미 결판났어요. 이미 끝났어요. 더 이상 우리가 무슨 증거를 더 원하리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자가 구름타고 온다. 질문할 때는 서서히 메시아 되는 과정을 보여 달라고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이미 메시아 된 상태에서 이미 되었음을 보여주는 질문을 해대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렇게 질문하는 자세 자체가 메시아가 와도 못 알아먹는 그러한 입장에서 질문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지금 지적을 해주시는 겁니다. “니는 질문할 자격도 그러한 위치에 있지도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그걸 알아듣고 어떻게 하느냐, “니가 차라니 내 손에 죽어봐라.”라고 나오지요. 기 싸움이 돼 버리는 거예요. 이건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니고 내 살기 위해서 결국 니가 죽어야 된다. 내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니가 죽어야 돼, 이리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히브리서7장19절 봅시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하지요. 그 당시 예수님 십자가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법이 주어졌지요. 모세의 율법을 줬잖아요. 자, 이 법이 있음으로서 다른 민족에게는 법이 없는데 자기한테는 법이 있다는 말은 자기는 이미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그런 증거로서 이 법이 있다고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유대인들이.
우리한테는 법이 있다는 거예요. 법이 있다는 자체는, 법을 줬다는 자체는 법을 지킬만한 정당성이 우리 안에 있다고 우리는 그렇게 그들은 해석을 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해석한 것이 아니고 법을 준 것은 그야말로 낯짝에다가 법을 준거와 똑같은 거예요. “아나? 이 인간들아!” 하고 준 건데, 저들은 뭐냐, “상장 받아라.” 하고 법을 받은 겁니다. “아이고, 이런 법을 주시다니. 지킬 줄 알고 주시는군요. 아이고, 이 법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충성케 하겠나이다.” “모든 백성들은 이제부터 대성상회의 말을 들어라.“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대성상회는 기황후에 나오는 대사 한 대목이에요.
”이제부터 대성상회 배관의 말을 들어라.“ 하니까 백성들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본인이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유대인들이 자기가 ”이 세상을 대표해서 우리가 대표로 나서서 잘 지키겠습니다. 메시아나라 만들겠습니다.“ 와 같은 거예요.
위임 목사 할 때에 노회장이 “이제부터는 이 목사는 이 교회의 위임목사로 청하노라.” “받들어 모시겠습니다.”와 똑같은 거예요. 목사의 임무는 죄를 보여주는 거예요. 자기 죄를 보여주는 게 자기 임무에요. “저도 죄인입니다.” 그 이야기하라고 강단에 서게 한 거예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바로 성전이 무너진다고 협박했다는 거예요. 이 돌 하나에 돌을 남기지 않고 다 헐겠다는 것을 들었거든요. 성전이 무너지면 하나님과 유대인과 만남은 그 기도하는 집이 없어지잖아요. 심지어 협박정도가 아니고 아예 환전하는 비둘기파는 그 테이블을 뒤집어버리지요. 영화에 보면 테이블3개를 뒤집어버려요. 확 엎어버려요. 두 번째가 성전 깨지는 것을 협박하는 거예요. 요 두 가지 제목으로 했어요. 이것은 정치적입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이런 정치적인 평가를 통과해서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심판 받을 때, 우리는 그 당시에 있는 백성들이나 제자들이나 배신했지요. 예수님을 배반했잖아요. 어쨌든.
왜 배반했습니까? 이미 그들은 정치를 몰라도 안철수를 모르고 김한길을 몰라도 이미 그들은 정치적이에요. 인간 자체가 애앵하고 태어났으면 이미 정치적이에요. 새누리당, 민주연합당인가 그거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비정치적이 아니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북한의 이산가족 올 때, 이산가족과 만났으면 옛날 자기 과거이야기 해야 되는데 왜 거기서 김정은 이야기 왜 하느냐 말이죠. 어버이 수령 김일성 이야기는 왜 끄집어냅니까? 북한에서. 이미 그 자체는 그들은 정치적이에요. 힘이란 말이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자기 소속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소속이야기 안 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정치 성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드러낼 수밖에 없어요. 많은 젊은 목사들이 복음을 전해야 될 그런 사람들이 자꾸 정치적인 변화를 피력해요. 이런 이야기를 또 많이 하게 되면 걸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말을 많이 못하겠습니다만 목사님은 누구 찍었어요?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만 나를 믿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를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내가 이 세상의 정치적 죽음을 당했지만 정치적 죽음을 당한 이유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정치적 경향성을 벗어나서 나는 예수 믿어요.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세 번씩 부인한 거 보세요. 본인은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 당시의 권력에 대해서는 아주 서슴없이 굴복했잖아요. 왜? 본인이 이 세상의 사람이고 싶어 한다는 경향을 본인이 스스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부러워하면 같이 부러워하고 이 세상이 좋아하면 그것을 우리는 좋아하고 그런 것이지 예수님이 보여준 그 나라, 하나님의 품속에 나타난 그 나라를 그것만 좋아한다.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이 육신이 나중에 난타로 죽어줘야 없어져봐야 ‘아, 우리가 그동안 죄만 지었구나!’ 비로소 그 때는 노골적으로 깨닫지요.
그래서 우리는 옛날에도 제사장이 죽어야 되는 것처럼 지금도 매일같이 제사장이 죽어야 돼요. 그럼 매일 죽는 제사장은 누군데? 김목사, 이목사, 박모사, 매일 죽어야 되는가, 고 매일 죽는 제사장을 한꺼번에 묶어서 단번에 죽으면서 그걸 늘 죽는 걸로 만드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에 저촉을 받으려면 우리의 시간관을 포기를 해줘야 돼요. 우리는 한 사건 지나면 그 다음 사건, 한 사건이 지나면 그건 과거로 밀리고 지금 사건은 현재가 되고 앞으로 미래는 오지 않았고, 미래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장담하면 안 되고 어떻게 하면 안 되고 하지요. 미래에 대해서는. 미래에 대해서 본의 아니게 겸손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는 굉장히 자신만만한데, 그것도 잘못됐어요. 과거의 자신만만한 것도 그것도 과장된 거예요. 과거 가운데서 지 맘에 드는 것만 따로 뽑아내서 자신만만하지요.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 꽃다발 주잖아요. 꽃다발 주는데 세상 꽃 다 담겨있습니까? 아니면 몇 몇 꽃만 담겨있습니까? 안개하고 장미 몇 개하고 백합 몇 개 하잖아요. 온갖 꽃 다 있는 게 아니지요. 고렇게 뽑아서 꽃다발해서 내 정성을 받아주옵소서. 이렇게 한다 말이죠. 정말 정성은 온 세상의 꽃들을 다 꽃밭으로 다 줘야지. 그렇게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꽃밭 전체고 우리가 주님 앞에 생색내는 것은 백합, 튤립 몇 송이밖에 없고 이게 저의 정성이옵니다. 이리 바치는 거예요. 우리가 내놓는 것은 기껏 극히 일부고 받은 것은 “모든 걸 다 이루었느니라.” 했으니까 받은 것은 앞으로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받는 용서를 다 받아놓고 생색내는 것은 “이번 일 잘돼서 고맙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색내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함에 대해서 긍정적 점수를 주면 안돼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좋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너무나 얄팍하고 간사한 존재에요. 우리가. 조금 해놓고 떠버릴 수밖에 없는 “내 점수는요?” 해가지고 99점, 100점주고, 주님께서는 의자 뒤로 돌아섭니다. 뒤돌아서버려요.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한다. 이 말은 이미 율법이 못한다는 게 아니고 율법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번 적어볼게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데 율법이란 것이 왔을 때 문제 있는 우리를 율법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해결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해결될 수가 없었던 거죠. “아이고, 율법주면 잘하지요.” 했는데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미 율법을 받은 사람이 있어요. 그게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고 난 뒤에 무엇으로 바꿨습니까? 정치적인 구성요소로 바꿨지요.
그 이스라엘이 율법이라는 법을 가지고 나라를 만들고 정치적인 구조적 시스템을 시킬 때 그 구조 안에서 누가 살해당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살해당했잖아요. 그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에요. 지금 우리 이야기에요. 따라서 우리는 법을 언급하면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훼방하는 짓거리를 지금 내가 그 순간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여, 오늘도 탐내지 않았습니다.” 라고 입을 내뱉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고 있는 행위에요.
“저 사람은 못 지켰는데 나는 지켰습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영화에 보게 되면 이런 장면이 나와요. 영화 이야기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성경이야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여자를 조져놨어요. 여자는 얻어맞아서 얼굴이 벌건 채로 질질 끌고 와가지고 예수님한테 간음한 여인이라고 그전에 많이 팼어요. 팰 대로 패놓고 데려 와가지고 “예수여, 율법에 의해서는 돌로 쳐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예수님이 돌을 쥔다고요. 영화니까. 쥐니까 바리새인이 “니도 어쩔 수 없이 우리하고 한 편이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돌을 쥐고 여자를 치려고하다가 몸을 돌려서 돌을 가지고 마치 치는 듯이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고 하니까 여자 치라는 돌이 자기에게 날아올 걸 생각하고 겁이 나서 돌을 하나, 하나 다 버렸어요. 다 가고 난 뒤에 예수님은 돌을 버려요.
그런데 성경은 원래 그렇게 한 게 아니고 돌을 집어던지지 않고 그냥 땅바닥에 글을 썼어요. 글을 쓰니까 다 가버렸어요. 영화가 너무 힘으로 달려드는 것 같아. 물론 영화는 말합니다. 칼로 쓴 자는 칼로 망한다. 는 말을 하긴 했어요. 인간적인 감화 감동보다도 성경에 보면 그냥 글을 썼는데 글을 보고 난 뒤에 예수님이 뭘 썼는가 보니까 그 사람들이 돌을 놓고 다 가버린 거예요.
22절을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렇다면 더 좋다는 말은 뭐냐 하면, 23절에 보니까 많은 숫자가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율법을 보면 제사장보고 너희는 제사를 드려라, 했던 그 율법은 농담이냐, 헛소리냐, 괜히 해본 소리냐, 해도 소용없는 것을 아시고 일부러 소용없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인지, 그럼 도대체 율법은 왜 주신 거예요?
자, 히브리서에서 율법이라 하는 것은 히브리서10장9절에 보면, 첫 것을 폐하심이라, 되어있지요. 요걸 설명하기 위해서 이걸 합니다. 여러분, 부활이라 하는 것은 앞에 뭐가 먼저 있어요? 십자가 있고 부활됐지요.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질문은 중요하기 때문에 질문하는 거예요. 부활하신 분이 죽음의 의미가 없어진 거예요? 아니면 도리어 품고 있는 겁니까? 품고 있는 거죠.
부활은 죽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는 그 사실을 본격화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거예요. 폐하심이 없으면 완성이라는 게 의미가 없다 말이죠. 완성이라는 의미가.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을 의도적으로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폐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더 이상 폐지될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 너희에게 주어진 이 신약 때에 언약은 이것은 폐지될 그러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폐지된 끝에는 영원한 거예요. 천지개벽이 나도 어떤 자칭 메시아라고 등장해도 어떤 소리하더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불량식품에 유사 식품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요 본문을 가지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존을 봅시다. 그들은 완성된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완성된 것은 아무도 이야기 안 해요. 왜냐 하면, 목사 본인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한다는 것은 지가 평소에 지가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에요. “나는 평소에 이런 식으로 해서 천당 가고 있습니다.” 고런 이야기를 그대로 설교시간에 성경해석하면서 다 내놓는 거예요. 결국은 그들이 내놓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 십자가 믿고 그 피로 용서받고 열심히 착하게 살면 구원받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착하게 살면 영광입니다.” 이리 이야기하거든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어요? 자기 자신한테 관심이 있지요. 그럼 자기를 증거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어느 교회에 목사가 자기도 증거하고 집사도 증거하고 증거 하게 되면 숫자가 적어요? 많아요? 숫자가 많지요. 많은 숫자를 증거 하는 것은 이것은 복음의 내용에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많은 숫자는 이게 제거되어야 돼요. 아론도 제사장이다. 그 밑에 있는 아들도 제사장이다.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은 복음의 내용으로 들어설 수 없다 말이죠. 도리어 율법에 의해서 율법이 폐할 때, 그들이 율법 지켰다 하는 모든 자랑거리도 같이 날아가 버려야 돼요. 마치 컴퓨터에서 파일 날아가듯이. 홀라당 다 날아가 버려야 돼요.
“저는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이고” 그것도 율법이 십자가에서 다 날아가야 돼요. 그걸 지난주일 때 설교한 게 뭡니까? 중국산 라이터 들고 십자가 앞에서 불 질러 버리라고 했지요. 다 태워버리란 말이죠.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등신불이 되어야 됩니다. 김동리 소설에 보면 나오지요. 부처를 믿다가 더 나아가서 지가 지를 불 질러서 지가 부처가 되는 거. 베트남에서 실제 있었어요. 베트남에서 어떤 중이 자기 자신을 부처로 만들기 위해서 그것도 영원한 부처되기 위해서 영원히 자기를 하나의 재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재가 된 그 사람의 그 부처를 등신불이라 합니다. 그것을 베트남 사람들은 그걸 빌고 있는 거예요. 아마 김동리 소설이 제주도 이야기인지 어디 이야기인지 하는 거예요. 보세요. 얼마나 극단적인 자기 찬양입니까?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소설로 보여주는 거예요. 김동리가 하나의 설교자라면 설교자가 소설을 쓴다는 말은 자기가 세상을 이렇게 해석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는가 모델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요. 손양은, 주기철, 모델은 뭐가 모델이라 했습니까? 이미 구원이 시간 자체가 모델인 거예요. 구원이 가깝다는 것. 그 자체가 모델이 되는 거예요. 말씀 자체가 모델이 되어야 되지 말씀 잘 지키는 어떤 사람을 모델로 삼아버리면 나도 그걸 모방하려는 실존적인 행동을 보일 수가 있어요.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모사품이고 유사품이지요. 따지고 보면 다 가짜에요. 교회자체가 가짜에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을 가지고 세자로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도살장’ 이 세상은 사람을 죽이는 도살장인데 주님이 거기에 같이 끼어들어서 같이 도살당하는 거예요. 그 주님과 같이 도살당했을 때 그 양무리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정치적 죽음이 우리의 죽음과 하나가 될 때, 다시 돌아오신 게 아니고 계속 함께 있으면서 함께 있는 증거와 티를 이제는 우리 주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알려주시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게 이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뭘 요구한 것이 아니고 율법 줘놓고 폐기시키는 방법을 썼지요. 율법을 주니까 사람들이 율법에 확 메이는 거예요. 법적으로 정당하기 위해서. 그런데 율법을 폐기할 때 율법폐기와 동시에 그 안에 율법가지고 자기 의롭고 정당하겠다는 그 모든 것도 다 폐기된 겁니다. 이제 그 정도는 이해되시겠지요. 믿음의 내용은 우리가 아니고 빠져야 되고 주님의 믿음 내용인데.
그 다음에 십자가이야기 해봅시다. 부활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 죽음을 본격적으로 영원히 합류하는 것이 부활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 없는 부활은 없지요.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흐지부지 만드는 원상복귀가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의 세계가 천국이거든요. 그러니까 에덴동산이 아니지요. 십자가 달린 그 분이 계신 곳이 천국이지,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는, 복귀하는 게 아닙니다. 통일교가 아니에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십자가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재판했지요. 재판하면서 유죄판결을 내렸지요. 죄 있다고 판결을 내렸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은 죄 없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성경에도 나와 있고.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죄 없다고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이 죄 없다 하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수용해야지 “내가 보기에는 예수가 죄 없는 것 같아” 이것은 보통 실수를 한 게 아니에요. 어떻게 건방지게 피고가 판사보고 당신 죄 있네, 없네. 지금 누가 누굴 재판하는 겁니까? 지금 판사 재판하라고 재판 열린 게 아니고 우리를 피고로 간주해서 주님이 재판장되어서 하는 그 판에서 “니는 뭐고?”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니는 뭐야?” 이리 나오면 안돼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가 내 일이 잘 안 될 때는 “하나님, 정말 너무 하십니다.” 이리 나와요. 주님께서 “내가 뭘 너무 한데?” “이리했으니까 잘못됐잖아요.” “니가 누군데 나를 함부로 지금 판단하느냐?” 니가 지금 나를 일을 잘했다, 못했다,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이죠. 우리는 주님 판단 못할뿐더러 남들도 판단 못할 지경에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여기서 나온 것은 의라는 것은 주님이 의인되었음의 의인은 우리가 기다렸던 그 의인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기다렸던 의인. 우리가 선하다고 여겼던 그 선함에 주님은 같이 끼어든 게 없다는 말입니다. 안 끼어들어요. 부자청년이 와서 예수님 보고 “아이고, 선하십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거부했지요. 니가 선하다는 그 자체가 내가 보기에는 악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선하다, 의롭다, 하는 자체가 이것은 하늘나라에서는 통용 안 되는 개념입니다. 괜히 우리가 잘나 보이기 위해서 또는 내가 그렇게 선하고 의롭다는 내 목표점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런 짓한 거예요.
그러면 묻습니다. 뭐가 이 땅에 와서 유일한 의는 뭐냐 하면, 약속대로 죽는 거예요. 약속대로 죽는 겁니다. 아까 제가 어린애가 오줌 쌌다 했지요. 그 오줌 쌌을 때, 오줌이 엄마 신발까지 뜨뜻하게 적셨다 말이죠. 애는 그것도 모르고 엄마한테 달라고 조른다고요. 엄마는 애가 오줌 쌌다는 것에 착안점을 둬서 애가 장난감 사 달라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아요. 빨리 오줌 싼 것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주님이 나타남으로 인간의 흘러넘치는 그 죄가 주님 쪽으로 쏠리게 되고 쏠린 것이 주께서는 십자가 사건으로 유월되지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 입장에서 다시 거꾸로 돌아가 봅시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여기에 주께서 택하신 백성이 있어요. 택하신 백성들의 오줌 싼 것이 주님 쪽으로 흘러들어왔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대표해서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바로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이루어진 것을 그 누구로의 죄로부터 왔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작업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이미 죄 씻은 사람을 소급해서 찾아가는 작업을 성령께서 해주시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보험회사에서 약관을 실수해가지고 천오백만원을 내줘야 될 걸 계산을 잘못해서 천만원을 주고 오백만원을 들 내주었어요. 그런데 그 보험 들은 가입자들은 그 내용도 모르고 보험회사에서 알아서 잘했겠지, 법을 아니까 실수 없이 했겠지, 했습니다. 금강원에서 그걸 발견해가지고 그 가입자에게 천만원을 내어줘라. 왜? 가입자들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남의 돈을 왜 가지고 있느냐, 이렇게 됐다 말이죠. 그래서 일일이 전화해가지고 혹시 우리 회사 보험 든 적 있지요? 예, 있습니다. 그 오백만원 더 받았는데 돌려드리겠습니다. 라고 일일이 전화해서 소재지 찾아서 다 돌려줘라, 라고 명령받고 움직이시는 분이 성령님이에요. 이래도 이해가 안 되면 곤란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상쇄된 죄를 다 씻어놓고 이 죄가 어디에 효과가 있는데 죄의 효력을 봐야 될 사람을 성령께서 일일이 다 찾아다니면서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오백만원을 근거로 해서 이미 당신의 대표자가 이미 죄 값을 치렀습니다. 라는 것을 가지고 찾아갈 때, 누가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이냐 하면 “나는 그 보험회사 가입 안했는데요.“ 이런 사람들은 ”아, 당신은 아니구나!“ 하고 그 사람은 제켜놓고 그 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복음을 때를 얻든지 안 얻든지 전해야 될 이유가 천국의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 그러니까 보험회사 가입된 명단보고 찾아가는 거예요. 성령께서. 찾아가가지고 용서를 다 돌려줘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용서 받은 거예요. 그 이야기를 출애굽기에 함축을 시켜가지고 압축해서 이야기했어요. 피를 발라 놨더니만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벌벌 떨고 있고 바깥에는 어린양하고 죽음의 사자하고 둘이 이야기해가지고 “알았어요. 이 집은 그냥 통과할게요.” 그냥 넘어가는 날, 유월절, 그냥 넘어가주는 거예요. 둘이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는 그것은 신약 때 어린양이 왔을 때 드러나는 이야기고. 구약에서는 이미 그걸 하나의 응축된 모습으로 미리 거기에서 예고편으로 주어진 거예요.
영화 예고편 봐가지고는 영화 스토리 안 짜여 집니다. 영화 예고편 1분 봐가지고 2시간짜리를 어떻게 알겠어요. 신나기만 하지요. 그래서 구약은 신나는데 내용은 몰라요. 신나기만 해. 여호수아가 설치고 모세가 홍해 물을 갈랐는데 우리는 물 갈라지고 들어가면 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그건 뭐냐 하면 바로, 면제 또는 의로움, 하나님의 의, 죄 용서 이겁니다. 이것이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넜을 때,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죄에 해당되는, 우리가 생각하는 흔히 이야기하는 그런 용서가 아니고 절대적인 용서와 영원한 용서 그것도 단번에 끝나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오, 대표자입니다.
그러면 제가 강의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해봅시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데 어떻게 하면 성령이 오게 할 수 있습니까?” 그 애절함과 답답함, 뭔가 말은 맞는데 이상하게 그게 가슴에 확 와 닿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뭘 놓쳤느냐 하면, 그 순간도 오줌을 질질 싼다는 것을 놓친 거예요. 지금 그렇게 걱정하는 자체가 이미 죄의 강이 흘러서 이미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그 죄가 소급해서, 테이프를 반대로 돌리면 행동이 반대로 되잖아요. 리마인드하게 되면 되돌아가잖아요.
“어떻게 하면 성령이 나에게 올 수 있습니까?” 그 짓하는 그것도 죄의 일부로서 온 거예요. 입만 뗐다 하면 죄고 숨만 쉬었다 하면 다 죄고 죄 아닌 게 없게 하는 것. 그래서 제대로 행동하고 바르게 살게 하는 그것은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염려할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모든 것은 환경 따라 우리가 수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지금 배가 부르니까 떡 잡수어라, 해도 떡 안 먹고 과일 안 먹지만, 만약에 사흘 동안 굶어보세요. 대번에 “혹시 남은 떡 있습니까?” 집사님이 “다른 떡은 없고 하나님께 드릴 떡만 있습니다.” 하면 “그 떡이라도 주세요.” 나올 거다 말이죠. 하나님보다도 나부터 사는 게 우선이에요. 내가 우선이지. 그 식대로 사세요. 또 죄 지으라고 이야기했다고 또 뭐라고 하겠다.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내가 우선이라니까요. 힘이 중요하지 돈이 중요하지 하나님 안 중요해요. 그 식대로 사시되, 그 오줌이 이미 십자가에 흘러들어간 오줌이라고 믿어진다면 성령께서 이미 거듭난 사람입니다. 죄 안 짓겠다고 설치는 것도 죄가 돼요.
자, 그렇게 보시고 21~24절 보겠습니다.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이제 여러분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이것이 그냥 보면 이해가 안 되고 내가 오줌을 질질 싸고 있다는 걸 감안해서 보게 되면 이 한 구절, 한 구절이 얼마나 귀하신 축복의 은혜입니까?
세상에 이런 말이 믿어지게 해주신 하나님께 찬양할 수밖에 없지요. 이 말이 그렇게 좋게 다가오고 평안하게 다가오고 기쁨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주님이 크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크게 보이는 순간이에요. 이렇게 크게 보이다가도 “그 몇 번이오? 차 빼세요.” 하면 “아이고, 차...,” 하는 순간 또 싹 소멸하겠지만. 어쨌든 그 소멸할 때 소멸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영원히 접속되어 있는 것. 영원은 잘라서 순간 되는 게 아니고 접속하는 순간 영원에서 분리될 수 없어요.
잠시 잊혀 질 수는 있지만, 영원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디 부모자식 사이가 삐졌다고 해서 자식 아니고 부모 아닌 겁니까? 적어도 우리가 주님과 피로 맺은 관계인데. 주님의 목숨으로, 주님이 자기 목숨 바쳐서 맺은 관계가 몇 번 삐졌다고 주께서 “너, 내 자식 아니다.” 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또 주님한테 삐졌다고 해서 주님께 버린 자도 아니고.
항상 본드처럼 목공 풀처럼 영원한 게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십자가 피 입니다. 그 피의 효과는 영원합니다. 그리고 나는 영원하지 않아요. 십자가 피가 영원합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 분 안에서 우리가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25절 봅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자, 여기서 봅시다. 실컷 2시간 동안 강의해 놓고 여기에 와서 또 헷갈릴까봐 잠시 염려됩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면,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①자기를 힘입어 ②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③온전히 구원, 지금 이렇게 성령을 받지 않고 믿어버리면,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해석해버리면 자기는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을 힘입지 않으면 구원 못 받네요.’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말이 뭐냐, ‘성령이 네 죄를 추적해가지고 날마다 성령한테 죄를 지적받지 아니하면’ 그런 뜻이에요. 성령은 어디서 오는가, 십자가에서 오지요. ‘십자가 피 묻은 손으로 나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이런 뜻입니다.
십자가 피를 모르는 자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내 쪽에서 예수를 힘입기를 내가 나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실존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존재에 합류되는 게 아니고 내가 오줌 싼 게 주님에게 축축한 게 아니고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가 되는 거예요.
내가 10m, 9m 가까이 가야 되고 또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니까 6m, 5m 나아가는 자만이 그 때서 온전히 구원한다. 이렇게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말이지요.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이미 보험을 들어놓지 않은 자들은 그 주님의 용서의 혜택을 소급 분을 받을 수가 없어요. 이 세상 자체가 천국, 지옥으로 완전히 완료된 세상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섞여있는 거예요. 어떻게 섞여 있느냐, 성령을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과 섞여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적 기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어요. 이 말씀이.
율법적 기능이 뭡니까? 내가 지킬 때만 유효하다는 것. 내가 안 지킨다면 나한테 소용없다는 것. 이게 율법적 기능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율법적 기능으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거든요. 그 시대는 이미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이미 증명이 된 시대잖아요. 이 시대가 십자가 오심으로서.
그래서 자기를 예수님을 힘입고, 힘입어야지, 힘입어야지, 매일 힘입어야지, 육은 안 되지만 혼으로 해야 되고 영으로 해야 되지 자꾸 이런 식으로 도 닦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어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하나님이 어디 자리에 앉아계시는 겁니까? “거기 잠깐 계세요. 제가 방문할 테니까.” 이리 되는 겁니까?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는데? 나아가는 방법을 모르는데. 100m 앞이에요? 50m 앞이에요? 그대 100m 앞이에요? 변진섭입니까? 어떻게 나아가는데?
온전히 구원한다. 이 온전히 구원은 뭐냐 하면, 이미 구원을 율법적 차원이 아니고 이미 온전한 언약은 구원이라는 것이 진행되려면 구원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예수를 힘입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것이 예수께 힘입었다는 자체가 예수님이 우리를 아버지께로 데려가고 있는 작업이라 하는 것을 본인이 구원받은 사람은 그걸 느끼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믿었다. 너는 여기까지 믿었다. 이게 아니고 이게 한꺼번에 다 안에 소속이 되어 있어요. 한꺼번에 다. 밑에까지. 구원받았다는 속에 소속됐기 때문에 예수를 힘입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예수를 힘입으려고 애써봤자 용쓰는 자기 모습만 거울에 비칠 뿐입니다. “주여, 요렇게? 주여,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혼자 발강을 해요. 나중에서는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누가 뭐 하라 했어? 지가 혼자서 열불 춤춰놓고 지가 지쳐가지고” “더는 십일조 못 냅니다.” “누가 십일조 내래.” 괜히 십일조해가지고 돈 오나 안 오나 시험해가지고. 돈 오지 않고.
구원이라 하는 것은 율법, 십일조, 안식일, 율법이 아닙니다. 그건 온전치 못한 것이 확정되었음을 본인이 이제는 그것을 체험해야 돼요. ‘아, 왜 이게 안 되는지를’ ‘왜 십자가만 되는지를’ 율법으로서는 앙~ 대요. 안돼요. 십자가로 다 이룬 거예요. 이뤘기 때문에 이룬 게 뭐냐, 너를 예수님의 힘입게 만드는 능력도 십자가에서 나오고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바로 예수님께서 너와 같은 소속이 되어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성취시켜 준다는 그런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고 지금 살아있는 죽음으로서 우리가 몰랐던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의를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를 통해서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니 이것을 감사히 여기며 축복으로 여기고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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