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2-츠빙글리 예정론
201404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2-츠빙글리 예정론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4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2-츠빙글리 예정론
(강의:이근호 목사)
교재 132페이지 봅시다. 츠빙글리가 예정론을 했는데 십자가와 관련된 예정론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예정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예정론이 십자가 예정론과 논제의 전개에 무슨 차이가 나는가? 루터는 신앙을 위한 예정론이라고 하거든요. 예정보다 신앙이 앞선다고 본 반면에 츠빙글리는 신앙보다 예정이 앞선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사실은 함축된 글이기 때문에 읽어보는 게 좋은데 읽어본다고 이해되는 게 아니니까 전체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츠빙글리는 말하기를 예수 안 믿어도 구원된다는 거예요. 예정되었으니까. 상당히 도발적인 발언이지요. 루터같이 십자가 중심의 예정론이면 십자가 지신 분이 하나님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졌지요. 그러면 일단 예정론이 예수님을 거쳐서 펼쳐진 예정론이에요. 그런데 츠빙글리는 예수님의 예정론이 아니고 하나님 예정론이 되거든요. 여기서 현재 개혁주의신학을 표방하는 한국의 모든 교회를 보세요. 그들의 예정론이 무슨 예정론입니까? 하나님 예정론이지요. 하나님의 예정론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이란 말을 씁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다시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의 주권이 구약 때 있었습니까? 답변을 못하시는 걸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있었다면,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외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왜냐하면 에덴동산부터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게 돼요. 새삼스럽게 하나님 나라 새롭게 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이나 세례요한이 뭔가 말을 잘못했다든지 인간들이 잘못한지 둘 중에 하나겠지요.
하나님의 주권을 우선시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것을 기대하느냐 하면, 신앙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논리적 범위가 마련돼요. 먹고 입고, 참새가 떨어지고 시장에서 팔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주권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구원되고 안 되고는 주권이지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인간은, 내가 구원받으려고 예수 안 믿어도 구원되는 수가 있고, 내가 예수 믿는다고 처도 구원 안 되는 수가 있고. 왜냐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관계없이 그것보다 먼저 앞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먹구름이 온다는 게 내가 대리운전 부르듯이 먹구름이 옵니까? 또 먹구름을 가라하면 갑니까? 먹구름은 일방적으로 오잖아요. 구원과 선택이 일방적으로 와버렸는데. 소낙비가 쏟아지는데 “소낙비야 내 옷이 젖잖아. 그만 내려줘.” 하면 비가 멈춥니까? 그런 일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자를 신자로 만드는 방법은 있음 자체를 신의 주권 속에 포함돼있다는 것에 대해서 수긍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구약의 긴긴 역사와 관계없이 이 사람을 신자로 만들 수가 있는 겁니다. 무슨 신자입니까? 하나님 믿는 신자로.
로마서 1장 21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알면 구원받습니까? 성경에 뭐라고 돼있어요? 야고보서 2장에서 귀신들이 하나님이 한분인 걸 믿잖아요. 그럼 귀신이 천국 갑니까? 귀신은 지옥 간단 말이죠. 천국 가려면 모든 사람이 아는 하나님 아는 그것도 최종적인 결정요건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한분인 걸 알고 무서워 떠는 것도 천국 가는 구원 요건에 탈락되죠.
성경에서 주님의 권리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주님의 권리입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도 신이 있지요. 다른 나라 신도 권리를 주장하지요. 이렇게 신이 있고 신의 주권이 있으면 최종적인 관점에서 보는 신, 이 신만 믿으면 저절로 다 구원받는 셈이 돼버린다 이 말이지요.
츠빙글리는 말하기를 천국에 가면 안 믿는 사람도 모여 있다는 겁니다. 그게 신의 주권에 의해서 예정돼있다는 겁니다. 신이 그냥 예정론을 내뱉으면 구원되는 거예요. 그런데 루터는 십자가 예정론이라고 했지요. 신의 예정론이 우리가 아는 신과 예정론이 아니고 십자가를 향하는 예정론이 돼버리면 루터에 있어서는 우리가 아는 예정론은 십자가 예정론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부정당해야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그냥 주님께서 독약 마시고 자살한 사건이 아니고, 개인이 칼로 죽은 사건이 아니고 주님이 죽은 사건에 누가 개입되게 돼있습니까? 신의 주권을 언급하고 최고의 윤리와 도덕을 자랑했던 그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언약을 먼저 받았고, 율법을 먼저 받았고, 신의 계시를 먼저 받았던 대표자로서 예수님의 죽음에 가담했단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 안에 반드시 무엇이 포함되느냐 하면, 십자가 내용상에, 인간이 끄집어낸 어떤 신학적이고 철학적이고 놀라운 관념적인 형이상학적인 논리라 할지라도 모든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진짜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우상적 조치에서 나온 것이라고 되는 거예요. 신의 형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상이 아니라 마지막 때는 신이란 이름을 이야기해도 그게 우상이 되는 시대에요. 삼위일체를 이야기해도 그게 우상이 되고, 심지어 십자가를 언급해도 우상이 되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과 실제로 십자가 능력이 왔을 때는 어떻게 돼요? 제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주의 원수가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원수 된 자도 구원되잖아요. 이 말은 원수일 경우에만 십자가 은혜가 은혜답게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원수가 아니면 마치 자기 실력으로 알아낸 것처럼 자기는 자기 잘남의 증인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구원받는다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말씀대로 적용시켜놓고 그 적용된 사람이 자기 위치가 아니고 말씀 위치에 가보니까 자기는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파악했을 때 어떤 짓을 해도 소용없는 게 아니고 죄인이 되는 거지요. 내 구원에 소용없다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다. 소용없다는 것은 중립의 자리에 있을 때나 가능하거든요.
“내가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구나. 내가 예수 믿어도 소용없구나.” 이러면 여전히 자기 자리를 계속해서 시도해보는 자리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렇게 시도한다는 자체가 반드시 시도해야 된다는 거예요. 왜? 죄인이기 때문에 죄 모습을 드러내야 되는 거죠.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를 계속해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말이죠.
내가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전에 지키려고 하는 그 자리마저 성경에서 규정받은 자리에요. 너는 죄인이니까 죄의 솜씨를 부려봐. 부려보니까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은 다 튀어나오더라. 그러면 그 자리는 내가 마련한 자리가 아니고 성령께서 마련한 자리라면 자리 값을 하면서 살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즐거운 이야기에요.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교리공부를 새삼스럽게 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 인생을 내가 건드려서 될 문제가 아니고 내가 건드리기 이전부터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건드려진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좀 어렵지만 칼빈 예정론, 루터 예정론, 츠빙글리 예정론, 유대교 예정론, 한국교회 예정론 그리고 복음적인 예정론 등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그림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여러 가지 예정론 자체를 죄로 만들어버리는 점선의 예정론이 바구니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예정론을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점선으로 된 예정론. 이게 왜 점선이냐? 인간은 자신을 자아, 자아적 존재, 존재란 말은 어려우니까 나는 나라는 덩어리.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입니다. 이 바깥은 책상이지 나가 아니거든요. 나라는 것은 그냥 나가 아니고 자기의 한계 지어진 나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가 대구 가면 부산에는 없어요. 대구에 나가 있지 부산에는 사라진 나가 되는 겁니다. 나란 어디서 어디까지 규정이 돼있어요. 하나에 덩어리니까. 신체라는 덩어리를 갖고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성경책, 교재, 성경의 내용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아중심으로 자아를 경유해서 이해를 해버려요. 지금 여러분이 부산에 오시면서 가로수에 나뭇잎에 몇 개인지 헤아려 봤어요? 안 세어 봤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가로수 괜히 심게 하셨네. 우리와 상관없는 가로수를 왜 심어놨지요? 그만큼 우리가 아는 것은 주님이 준비한 것 중에서 일부만 알지요.
그러면 우리는 뭘 몰라요? 가로수 있는 줄 몰랐는데 가로수가 부러져서 내려앉을 때 그때 우리는 가로수와 나와 그 순간 연결이 되지요. 우리는 우발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필연적 관계 속에서 만나게 하신 거예요. 만나게 되면 우리는 내가 생각한 가로수 없는 나의 세계에서 가로수한테 얻어맞아 본넷이 터지는 순간 가로수와 연관돼있는 나가 되고 그 다음부터는 가로수를 한 번 더 보게 되지요. 가로수 이야기하니까 재미가 없어요?
이십 대 아가씨가 사랑한다고 접근해서 명품 가방을 들고 튈 때 그 다음에 아가씨 사귈 때 뭘 봅니까? 인간은 반드시 현재의 모든 결정은 과거를 참조로 해서 하게 돼있어요. 두 번째 아가씨 만날 때 “아가씨, 혹시 명품 가방 좋아하십니까?” 이렇게 물어본다니까. 첫 번째 당했기 때문에 두 번째는 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한 2개월 사귀다보니까 백혈병이라. 그럼 세 번째 사귈 때 “혹시 집안에 병력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본다니까. 인간, 자아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고 과거의 사건이 층층이 중첩돼있는 거예요. 제가 떠벌이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사건이 뿜어내는 풍기는 냄새 같은 것이라니까. 과거의 흔적들이 나오는 거지요. 자아라는 게 주님 보기에 하나에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대전수련회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존재는 예수님뿐이고 우리는 존재의 기능으로 환원한다. 우리는 자아를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 나와!” 이러거든요. 자기 여기 있다는 말이거든요.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는 주님께서 우리가 있도록 만든 사건의 중첩된 덩어리가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내 인생 내가 관리한다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그것으로 “주님 나와! 나는 신의 주권과 상대할 거야.” 주권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걸 점선으로 이야기해요. 실은 여기 실선이라고 우기는 이것도 사실은 점선에 불과한 거예요. 그때그때마다 인간은 쉴 새 없이 변화되고 달라지는 겁니다. 인간은 정해진 게 아니에요. 정해지지도 않았으면서도 마치 우리가 정해졌다고 여기고 정해진 신이 나를 예정했다고 본 겁니다. 나를 구원하는 주님의 구원이 예정됐는데 우리는 나의 덩어리가 예정됐다고 우기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예정했어요. 예수님 세계를 예정했고 예수님을 예정했단 말이죠.
지난 수요일인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사적 구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 구원입니다. 이 세상을 둘로 나눴어요. 천국이란 세상과 지옥이란 세상에서 천국이란 세상을 만든 동시에 지옥이란 세상도 필히 만들어요. 지옥 없는 천국 없고 천국 없는 지옥 없거든요.
주님께서 세상을 만드는데 우리는 자기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나를 포함된 세계를 따로 만들고 있고 이 세계를 건지기 위해서 신의 주권사상으로 신과 거래와 흥정에 나서는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신께서 만드셨습니다. “방금 그 이야기 누가 하고 있지?” “제가 하고 있습니다.” “네가 누구지?” “제가 여기 있잖아요.” “너는 어디 소속이고?” “소속은 무슨 내가 여기 있다는데. 나만 있으면 되지 소속이 왜 필요합니까?”
이렇게 주장하는데 주님께서는 개인으로 다루는 법이 없어요. 어디에 소속된 개인으로 보는 거예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할 때 야곱은 천국에 소속된 야곱으로 구원하신 거예요. 그게 변화산에 나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무슨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언제 돌아가십니까? 그러니까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이고 간에 개인적 구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나라, 예수님 세계에 소속된 소속원으로서 그들은 주의 일을 한 거예요.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도 그렇게 주의 일을 한 겁니다.
소속이 어디냐고 묻는 거예요. 네가 누구냐고 묻는 게 아니고. 그런데 우리는 어떤 소속을 언급할 이유가 없는 게 우리가 말하는 소속의 출발점은 나라는 덩어리에요. 내가 덩치에서 만들어서 내 몸의 확장이 나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나의 세계는 가로수의 나뭇잎을 세지 않아도 되는 세계, 이 앞의 가로수 나뭇잎을 몰라도 나는 괜찮은 세계에요. 그런데 주님의 세계는 가로수가 다 심겨져있는 세계, 그것도 나뭇잎사귀가 수천 개 달려있는 그 가로수가 있는 세계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가로수를 빼고 생각한 주의 주권이고, 주님의 주권은 가로수가 심어져있는 주의 주권이고. 같은 게 아닙니다. 이게 달라요.
말썽꾸러기가 없는 학원과 말썽꾸러기가 있는 학원, 내 목적과 부합되는 걸 따지는 학부모가 생기는 그런 계기, 그럴 때 갑자기 화를 낼 때 모든 주의 주권인데 왜 화를 내요? 원래 주의 주권이면 화가 안 나야 돼요. 따라서 여러분 차가 길의 실선을 넘어가면 위법이지요. 그런데 여기 점선이 있으면 지 마음대로 왔다갔다해도 괜찮지요. 우리 인생은 실선이 아니고 점선으로 돼있는 주님이 마음껏 침입하고 주께서 마음대로 내 인생을 뺄 것 빼고 병들게 하고 아프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님의 주권이에요.
그래서 주권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주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망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주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주권은 날아가 버렸어요. 다만 이스라엘이 느끼는 것은 우리의 주권은 소용없었단 말이죠. 우리가 주장한 주권과 상관없이 주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는 사실. 그러면 진정한 주권은 점선을 통해서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굳혀진 주권, 이것은 아들만 알지 아들 외에 어떤 인간도 모르는 주권. 요한복음 5장에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아버지께서 자기 택한 백성을 살리는 것처럼 나도 택한 자를 살린다고 돼있어요.
여기 교재에 보면 츠빙글리 예정론, 루터 예정론, 칼빈 예정론과 함께 칼 바르트까지도 언급해놨어요. 안셀무스도 나오는데. 133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 [그의 관심은,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며 우리의 신앙이나 자비와는 무관하다는 데 있다.]
츠빙글리가 개혁주의에 속하거든요. 그래서 천주교를 반대했거든요. 천주교 반대했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반대한 것이고, 그 당시 모든 제도와 조직을 반대한 거예요. 츠빙글리가 원래 수도사였는데 설교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회심하고 기도하고 헌금해도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정된 사람만 구원받습니다.”라고 해서 수도원에서 채용을 안 했어요.
옛날에는 수도원이 성지 순례하듯이 순회하거든요. 그 수도원에 취직한 거예요. 설교해서 순례자한테 헌금을 받아야 운영이 되는데 돈 빼내라고 설교자로 세웠는데 츠빙글리가, 여러분이 순례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 소문 듣고 안 오는 거예요. 츠빙글리가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자에요. 신부의 미사나 참회도 소용없어요. 믿음도 소용없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예정된 자만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츠빙글리 신학 확 들어옵니까?
첫째 시간과 연관해서 해볼게요. 마지막 때에 교리를 가지게 되면 구원받습니까? 교리로 구원 못 받지요. 교리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않지요. 츠빙글리가 우리가 죄인이라고 했습니까, 신의 주권과 신의 예정을 믿으라 했습니까? 적어볼까요? 중요한 건데. 츠빙글리가 주장한 것이 어느 쪽입니까? 신의 주권을 이야기했지요. 이것은 교리가 되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첫째 시간에 츠빙글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성경 이야기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러면 나는 죄인이라고 하면 구원받습니까? 나는 죄인이라는 교리 믿으면 구원되는 것 없어요. 마지막 때는 예수님 마음대로 다루기 때문에 구원될 자는 십자가 뜻대로만 구원돼요. 우린 안 되는 거예요. 새로운 질서 앞에.
여기서 나는 죄인이라 할 때 아까 제기했던 문제의 응용문제 해봅시다. 나는 덩어리다. 덩어리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에요. 무조건 나에요. 서울 가도 나고, 부산 가도 나고, 미국 가도 나에요. 그럼 내가 교리를 들었다. 죄인이라고 해야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들었어요. 그러면 내가 나를 죄인으로 어떻게 만들어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보세요. 나란 덩어리가 있다면 죄인을 어떻게 만들어요. 그래야 십자가 피로 용서받고.
그럼 내가 나를 어떻게 죄인 만듭니까? 우리가 만들어내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선악과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생명나무가 우리를 건드려줘야 질문이 나오고 그 질문은 나의 정당성, “내가 이 세상 사는데 이렇게 힘들게 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잘못, 무슨 죄를 지었기에 힘드냐?”라는 질문을 하게 되지요. 신앙생활의 시작은 질문부터 해요. 이 질문이 원통과 절통과 분통으로 나온다니까요. 그냥 살아버리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놓고 돈 먹는 도박에 빠지는 거예요. 주께서 건드려준다고.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왜 힘들게 살게 만듭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네가 죄인 되어라.” “그럼 죄인 되지요.” 그 다음부터 선악과적인 죄인 만들어요. 성경을 활용해요. 성경을 율법적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무시로 기도를 안 했구나. 감사를 안 했네. 구제를 해야겠다. 이게 바로 주님한테 버림 받은 바리새인이 한 거예요.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기도하고. 금식한다는 말은, 나는 죄인이라는 뜻이고, 구제한다는 것은 착한 일 하겠다는 것이고, 십일조하는 것은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나는 돈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그건 지금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나라는 덩어리가 문제 되는 거예요.
그래서 츠빙글리의 공부가 중요한 거예요. 츠빙글리는 말하기를 신의 주권을 인정하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뭘 심하게 차이 둡니까? 천주교 신부들, 미사들, 헌금하는 것들, 기도하는 것들, 회개하는 것들, 참회하는 것들, 그래서 구원받는 게 아니야. 순례객? 치워라. 하지 마라. 구원은 오직 신의 주권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츠빙글리는 내 말에 반박하려거든 반박해봐라.
신의 예정을 반박하려면, 같은 인간의 논리로 반박이 되려면, 신의 주권으로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간의 행함으로 들어가야 된다. 이럴 경우에만 츠빙글리에 대해서 반박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츠빙글리는 더욱 더 개혁주의, 오직 믿음이잖아요. 신앙생활하는 믿음이 아니고 신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오직 믿음이라니까요. 츠빙글리의 논리는 이겁니다. 구원은 신으로부터 온다. -끝-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오늘날 교회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보세요. 우리가 츠빙글리나 루터나 칼빈을 공부할 이유가 있지요. 그들이 내세우는 교리라는 것이 이미 그전에 언급을 해놓은 거예요. 우리는 그런 것 몰라도 되고 내가 성령으로 성경만 해석하면 된다고 생각했잖아요. 내 나름대로 해석한 모든 업적들이 이미 선배들, 바리새인들이 깔아놨는데?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지. 자기만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교재를 보니까 주권론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지 노출되는 거예요.
루터는 말합니다. 예정론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정론이 나온다. 이런 루터의 예정론을 크게 부각시키는 예정론이 칼 바르트의 예정론이에요. 칼 바르트의 예정론은 루터와 같은 시기의 칼빈의 예정론을 치기 위함이란 말이지요. 칼빈의 예정론은 구원을 위한 예정론이에요. 방금 츠빙글리는 구원을 위한 예정론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이지 그걸 이용하라는 말이 아니고.
츠빙글리는 뭐냐?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의 예정대로 움직이니까 인간들아. 저 사람이 예수 안 믿는다고 할지라도 구원되는 거예요. 신이 예정된 사람은 예수 안 믿고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고. 칼빈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정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이고, 루터는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예정론이 나온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뜻을 증거하기 위한 예정론이라는 것이 루터의 예정론이고.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듣는 인간들은 자기 구원에 대한 욕구의 차원에서 그런 것들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고.
세리가 고백했던 “주여, 제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 주님께서 의인이라고 했잖아요. 바리새인은 그 앞서 스스로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동네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134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부터 보겠습니다. [츠빙글리는 더 담대하게 하늘나라에는 성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들 외에도 프랑스의 선임 왕들과 비기독교인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츠빙글리의 보편주의는 종교다원주의적 이해에 기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성에 근거된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교황의 운명보다 세네카(스토아학파 윤리학자)나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물론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구원의 근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에 대한 사고는 루터와는 달리 츠빙글리를 그리스도와 성례에 대한 다른 이해와 강조로 나가게 한다. 츠빙글리는 어거스틴을 이해함으로써 서구신학의 지배적인 전통이 되어 온 예정의 문제를 섭리와의 관련에서 파악했다. 칼빈에게서의 예정은 섭리론이 아니라 구원론과 교회론의 맥락에서 다루어짐으로써 예정론에 대한 운명론적 사별을 봉쇄하는 데 진일보하게 된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섭리를 ‘예정의 어머니’로 파악함으로써 섭리론에 구원론적이며 기독론적인 성격을 간과하지 않았다. 고전적 예정론은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써 타락했음을 말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타락 전 예정론이냐, 타락 후 예정론과 관련되어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칼빈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타락 후 예정론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정론이 츠빙글리 예정론과 동일해요. 사실 동일하다고 하지만 하나 추가한 거예요. 타락 전 예정론 뜻도 섭리적으로 이미 가담이 돼있습니다. 뭔 뜻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보세요.[칼빈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타락했지만 그러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타락 전, 타락 후 예정론 봅시다. 우선 타락 후 예정론을 먼저 언급해야 돼요. 타락 후 예정론은 누구나 이해되기 때문에. 타락 후 예정론은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에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지요. 그 다음에 죄인 되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음이 확정되었지요. 그 뒤에 죄인 중에서 특정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특정 인간을 버리기로 작정했을 때 죄인들이 반발할 여지가 있습니까? 반발할 여지가 없지요. 어차피 그들은 지옥 가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래서 타락 후 예정론은 납득하기는 쉬워요. 그리고 구원 안 됐다고 반발할 수 없지요. 그래서 구원 안 됐다고 반발하는 것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것이 타락 후 예정론입니다.
그런데 타락 후 예정론에 문제점이 있어요. 창세전에 이미 버리기로 작정됐다는 게 문제에요. 인간이 죄 짓기 전에 버리기로 작정돼있다면, 뭔가 잘못을 저질러야 수긍이 되는데 잘못을 저지르기 전부터 구원 안 되기로 해버리면 얼마든지 반발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뭔가 시켜보고 안 될 때 매 맞는 건 당연한데 시키지도 않고 때리면 인간의 자기 행위에 대한 죄에 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주어질 수 있는 근거가 없잖아요. 사람이 뭘 하고 난 뒤에 잘못 했을 때 맞으면 되는데 하기도 전에 매부터 맞고 시작하면 얼마나 억울하냐 말이죠. 이러한 타락 전 예정론은 로마서 9장에 합당하죠.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뭔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는 사랑받고 하나는 버림받았다는 것에 합당한 거예요.
그럼 목사님은 어느 쪽입니까? 둘 다 말이 안 돼요. 전과 후라는 개념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 나라에 전과 후는 없습니다. 창세전이라는 말은 창세 이전이란 말이 되기는 되지만 창세 이전의 세계가 아니고 사실은 창세에 있던 모든 원리를 통괄하고 지배하는 영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과 후는 인간의 육신이 갖고 있는 시간개념에서 나온 겁니다. 시간의 흐름.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과 후가 아니고 동시성입니다.
대구에 극장이 두 군데 있습니다. A라는 극장이 있고 B라는 극장이 있어요. 조조 9시 20분에 영화를 상영했어요. 두 개의 영화가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후입니까? 둘 다 아침 9시 20분인데. 이것은 동시에 상영하지요. A라는 극장에서 보고 나왔습니다. B라는 극장에서 보고 나왔습니다. 둘이 시내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영화 본 것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전과 후가 생기지요. 영화는 같은 시간에 봤지만 이야기하는 순간 전과 후가 생기지요. 주님께서 벌인 사건에 대해서 인간의 입으로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여기서 전과 후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개인적으로 내가 스물네 살 때 친구 만나서 영화 이야기를 했다. 그게 2014년 4월 15일이었다. 그 사람이 태어난 건 1994년이었다. 태어난 것은 전이고 영화 이야기한 것은 후가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 안에서는 이것을 전부 다 동시성이라고 해요. 예수님은 시간이 없다고 했지요. 알파와 오메가니까. 예수님에서 뿜어내는 것은 시간적 요소로 진행됩니다. 언제 태어나야 되고, 시내에서 친구 만나서 영화 이야기해야 되고.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은 여기 있다면, 인간이 시간적 요소를 갖고 있는 덩어리가 주님을 만나려고 하면 시간적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주님을 경유하는 순간 내가 태어난 사건도 주님 안에서 태어났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주님 안에서 일어났다면 모든 시간적 요소가 결국 이스라엘 멸망처럼 내가 죽는 순간이 올 때 태어난 나도 죽고, 친구 만나서 영화 이야기한 나도 죽는다면 결국 죽음 안에서 모든 것은 사건의 중첩으로서 도서관에 편집이 되지요. 하늘나라 도서관에 꽂히게 되겠지요. 그러면 같은 장소에 꽂히게 되는 거예요. 그걸 생명책에 기록이 된 거예요. 기록이 먼저 됐고 주님 안에서 펼쳐지는 거지요.
사람들이 타락 전, 타락 후를 논하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 요소로 구원을 어떻게 따낼까, 구원을 어떻게 이해할까와 관련돼있습니다. 제가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할게요.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봤지요. 어디서 봤습니까? 아들 잡을 봤어요? 죽을 때 봤어요? 보고 기뻐했다니까.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에요, 산 자에요? 산 자지요. 그럼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은 살아있지요.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주를 만나는 게 당연하지요. 하늘나라에는 시간이 없지요.
엘리야가 선배입니까, 모세가 선배입니까? 지상에서는 모세가 선배지만 그런데 변화산에서 같이 만났지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전부 동시성이지요. 같이 일어났지요. 같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같다는 말이 아니고 시간 요소를 뺀 상태에서 같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같은 차원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시간적인 전후 차원, 시간의 순서대로 일어나지만 주님은 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시간적 요소를 집어넣지 마세요. 하여튼 그 세계에서는 같이 일어난 거예요. 시간적 요소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시간적 요소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시간적 요소를 갖고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시간적 요소로 상대합니다. 그래서 죽고 난 뒤에 사흘이란 기간을 두고 부활해야 돼요. 그것은 바로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구원될 수 없다. 완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몇 년에 구원되는 것과 상관없이 나이가 몇 살인지 상관없이 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에 도달하게 돼요. 먼저 도달한 사람, 선배가 텃세 부릴 수가 없어요. 몇 년에 구원받은 것과 상관없이 구원받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같은 시간대에 영원한 시간 속에 같이 있게 되는 겁니다. 같이 산 자가 돼버려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를 강조한 것처럼 고함지르는 것 같은데. 조용조용 이야기하겠습니다. 선악과 사건이 이미 우리의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한테 들어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 지금부터 이천 년 전에 있었잖아요. 하지만 이미 성령 안에서는 그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고 선악과 사건도 반복되고. 여리고 성 무너지는 것도 우리 안에서 같이 연동되어서 같이 연결되어서 같이 진동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백부장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옆에서 일어난 이야기라니까.
어리석인 자여, 네 영혼 누구 것이 되겠느냐? 옛날이야기라고 덮어버릴까요? 주께서 성령 안에서 어리석은 자여, 네 영혼을 오늘 밤에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우리 안에 반복시켜서 나한테 적용되는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시간과 무관하게 늘 우리에게 반복되는 거예요. 홍해 사건 버릴까요? 지금 홍해 사건이 우리 안에 계속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여리고 성, 요단 강 사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주께서 성령 안에서 말씀의 사람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끝 날까지 주님이 함께 있으면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고 주님의 증인이 되면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면,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주께서 예정된 구원의 상황, 구원의 상태, 주 안이 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과 칼빈은 오해한 거예요. 만약에 루터가 십자가를 통해서 예정론이 온다고 그것만 이야기한다면 루터도 오해한 거예요.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예정된 거예요.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정론의 정답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예정됨이 우리 안에 반복해서 작용하고 있음을 저희들이 증거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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