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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4. 3. 21)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4. 3. 21) 1강

이름 : 서경수(IP:118.35.139.25)

광주 강의(2014. 3. 21) 1-1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아는 ‘시작’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가 천지를 만든 시작인데, 마가복음에서 시작이란 말을 했을 때, 새롭게 뭔가를 시작한 것이라면 창세기부터 마가복음 이전까지는 무효인가, 실패작인가?

여하간 시작이 두 개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시작이라고 했고, 마가복음에서도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일이죠? 그러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일은 누구의 일입니까? 그것도 하나님 일이잖아요. 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때의 시작으로 통합시키면 되는데 먼저 시작해 놓고 마가복음에 와서 또 하나의 시작을 유발시키는가? 그러면 시작이 두 개가 되잖아요.

그러면 마가복음의 시작이 처음 시작에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까? 포함이 안 되지요. 안 되니까 새롭게 시작을 거론한 것이지요.

따로 시작을 한다면 노선이 두 개가 되지요. 창세기에 천지를 시작했다는 노선이 하나 있고, 복음의 시작 노선이 따로 있다면 이것을 마주하는 인간은 두 개의 시작을 믿어야 될 입장에 놓였어요. 무엇이든 둘이 된다는 것은 불안해요. 왜냐하면 하나를 놓치면 실패인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잖아요.

두 개이니까 둘 다 잡을 때 성공이라면, 하나를 놓치면 실패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하나에 치중하게 되면 다른 쪽은 소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시작이 둘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창세기의 시작을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남기느냐? 창세기의 시작이 그동안 우리에게 뭘 보여주었기에 마가복음에서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던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창세기부터 마가복음 이전까지는 복음이 아닌 것이 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그동안은 기쁜 소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기쁜 소식의 시작이라고 하니까 그 전에는 기쁜 소식이 아니 슬픈 소식이지요. 그러면 창세기부터 복음 전까지 하나님은 무엇을 유발시켰는가? 복음이 시작되게 하기 위해서 슬픈 소식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슬픈 소식을 따로 이야기한 것은 없습니다.

여하간 저는 이것을 슬픈 소식이라고 일단 언급을 했습니다. 창세기부터 복음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하나님 뜻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복음의 시작에서는 미움 받으시는 그분이 기쁜 소식의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미움이 없는 곳에서는 기쁜 소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를 미워했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해서 일어난 일은 그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만드는 상황과 사태들이 줄곧 일어나는 도가니로 그동안 천지창조가 활용이 되었다는 일시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움을 받는 경우가 생겼는데 그러면 미워하면 구원 받습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주 예수를 미워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런 말씀은 없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미움을 받으면 구원 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적대적 관계로 형성되는 상황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면 복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 복음이 오기 전에 나는 뭘 했지?’ 라고 되돌아 볼 수 있는 여건도 같이 부여받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을 미워했다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면서 복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여기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써 내가 그동안 살아왔다는 것을 복음을 받는 순간에 같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그동안 미워했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 자신을 육신으로 봅니까, 자아로 봅니까? 자아는 ‘나’지요. 나는 나지 ‘나는 육신이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그러면 왜 나는 나를 육신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육신이라는 자체가 나에게 공포와 염려를 줍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구상할 수 있고 상상해서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육신이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허락도 없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의 허락 없이 주어진 것은 전부 이질적이고 타인이 되고 나를 공격하는 공격자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내 육신이 무서운 거예요. 나는 나를 원했지 육신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실은 나는 나로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신만 있을 뿐이거든요. 그리고 이 신체는 나의 허락도 없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육신이 있는 이상은 누가 가짜가 될 공산이 많습니까? 육신이 현실이고 실재라면 누가 가짜입니까? 나(자아)가 가짜에요. 그게 싫은 거예요. 이 사태가 미운 거예요. 그래서 내 허락도 없이 이런 육신을 주신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자아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뱀(사단)으로부터 온 거예요. 사단으로부터 형성된 자아가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볼 때 도저히 어울리지를 않아요. 나는 그냥 나가 아니라, 멋있는 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거울을 보면 나는 못생긴 나입니다. 내 인물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리고 젊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나이가 들면 더더욱 마음에 안 들어요. 청춘을 돌려달라고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어요. 흰 머리카락이 싫고, 주름살이 싫고, 기억력이 쇠퇴하는 것도 싫어요.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기억력이 영원한 것이 현실입니까, 기억력이 쇠퇴하는 육신이 현실입니까? 육신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이 자아가 있는 이상은 마음에 안 드니까 현실을 도망치고 싶은 겁니다. 자꾸 피하고 싶은 거예요.

저는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자녀들이 술을 마시는지 물어봅니다. 술을 마신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금주하도록 권합니다. 왜냐하면, 술이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어요.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갭이 짜증스러워서 술에 취해 그것은 잊으려고 합니다. “나는 육신의 현실은 없어. 나는 자아뿐이야!”라고 나를 감추는 비겁한 일을 술을 마심으로 합니다.

술 마시는 인간들은 다 비겁한 자들입니다. 자기 육신은 발로 차버리고 헛된 자아를 간직하려고 몸부림치는 수단 중 하나가 술을 처먹는 거예요. 제가 이런 쌍스러운 표현을 잘 안 쓰는데, 우리 집안에 술 먹고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 낮에 어떤 분과 대화를 하면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죽이고 싶다.”고 했어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맨 정신으로 해야 자기가 얼마나 어설픈지 양쪽 다 동등하게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술 취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안 마신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데 상대는 잘난 척을 합니다. 허세를 부리지요.

육신이 참된 현실이란 점을 자아가 핍박을 해요. 술을 마시게 되면 육신의 모든 기능이 잠시 흐릿해 져요. 그럴 때 정신을 못 차리면서 비틀거릴 때, 육신이 비틀거릴 때마다 오히려 자아 정신은 더 생생해요.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요. 마귀가 준 자아의 집착은 오히려 더 강렬한 겁니다.

아버지라는 자아 때문에 술 취해서 자녀들에게 용돈을 팍팍 주는데 이것이 뭐냐? “나는 훌륭한 아버지다.”라는 것을 과시하는 겁니다. 술 마시지 않고 용돈을 주면 됩니다. 왜 꼭 술에 취해서 과한 용돈을 줍니까? 정말 비겁한 짓입니다. 자기의 진면목을 안 들키고 싶고, 자기 육신이 마음에 안 드니까 술로 잠시 육신을 잊고 자신이 원하는 자아에 도취되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불쌍합니다.

드라마를 보면 남편이 바람피운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평소에 안 먹던 술을 마십니다. 그게 뭔가 하면, “그럴 리 없다.”는 것입니다. ‘바람 안 난 남편의 아내’가 자신의 자아상입니다. 그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현실을 잊기 위해 술에 취하는 겁니다.

지금 나의 자아를 서글프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누가 그렇게 하는 겁니까? 우리의 육신을 누가 관리합니까? 우리의 발걸음을 누가 헤아립니까?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만든 발자국에 자아가 따라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 늙은 나가 되어야 하는데, 육신은 늙었는데 자아는 계속 젊음을 고집하고 있어요.

이 자아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자아고,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던 자아입니다. 자아가 있는 이상은 자아가 생명나무를 따먹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가 아닙니다. 자아가 우리 이름이 됩니다. 바벨탑을 세웠는데 그 목적이 뭡니까? 탑에 자기 이름을 담아서 그 이름이 하늘에 닿게 한 거예요.

탑의 처음 벽돌을 놓을 때부터 이것은 탑을 쌓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이름을 쌓고 또 쌓는 일이었고, 그 사람들이 온 세상에 흩어져 현재의 인류가 된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이름, 인간의 자아에 영생을 줄 마음이 없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었지요. 이 두 나무가 곁에 있다는 것을 인간들은 몰랐어요. 선악과를 건드리기 전에는 생명나무는 따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선악과를 건드렸는데 갑자기 생명나무가 따먹을 수 없는 나무가 되고 말았어요. 그렇다면 나무에 문제가 있습니까, 나무에 접근하는 우리 자아에 문제가 있습니까? 자아와 생명나무는 엮여 질 수 없는 자아입니다.

마귀가 천국 갑니까? 못 가지요. 마귀도 자아가 있잖아요. 마귀는 생명나무가 있는 천국에 못 가지요? 우리가 그 꼴이 된 거예요.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우리 조상이 그 꼴이 된 거예요. 생명나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요. 있어도 못 따먹을 정도로 이미 우리의 자아는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와 상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상대해요. 우리 육신을 흙으로 바꿉니다.

흙으로 바꾸면서 약속의 징후를 육체에 남깁니다. 그게 가죽 옷이고, 아담의 아내에게 새로운 이름(생명)을 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와 상대합니까, 우리 육신과 상대합니까? 해답이 나왔지요. 육신과 상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가 우리 자아에 두어야 합니까, 육신에 두어야 합니까? 육신에 두어야 합니다.

머리카락을 보면서 “오늘도 주께서 이렇게 자라게 하셨구나.” 길을 걸으면서 “주께서 오늘도 내 걸음을 인도하시구나.”라고, 내 육신에서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져야 되는데, 우리는 육신을 볼 때마다 싫고 미워요. 그래서 내가 상상하는 나(자아)를 따로 만들어요. 우리가 꿈속에서는 몇 살로 나옵니까? 대부분의 경우에 실제의 나이보다 훨씬 젊게 나와요.

이 자아 구성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면, 공동체에서 와요. 타인의 욕망에서 자아의 내용이 채워집니다. 쌍둥이 아이에게 똑같은 것을 주면 안 싸웁니다. 그런데 다른 것을 주면 상대방의 것을 가지려고 싸워요. 내게 없는 것을 원해요. 이게 바로 욕망이고 잉여입니다. 내게 없는 것, 내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다른 것은 나에게 있지 않아요.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남에게 있지요.

타인을 경유하지 않으면 자아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육신은 어떻게 됩니까? 육신이 육신을 아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육신을 하나님이 관리합니다. 하나님(하나님의 언약)을 경유하지 않으면 육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신을 알기 위해서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아요. 자아를 알기 위해서 타인을 경유해요.

왜 그런가? 자아 안에 있는 모든 내용들은 욕망이 자아를 그때그때 재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자아를 깨보면 전부 남들이 가진 것이 내 안에 차 있어요. 친구가 젊게 보이면 나도 젊어지고 싶고, 남이 입은 옷이 예쁘게 보이면 나도 그 옷을 입고 싶고, 옆집 사람이 새 집을 사서 이사를 가면 나도 새 집으로 이사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에 따라서 나도 그들과 유사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내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가 하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중에서 어떤 노래가 유행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를 관철했어요. 그들 눈에는 가나안 땅 사람들이 보였어요. 이스라엘의 자아는 이방민족을 통해서 구성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는데 왜 섬겼습니까? 인간은 주변을 경유해서 자신을 압니다. “저들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잘 살지? 저들이 섬기는 신이 저들에게 복을 주는구나. 나도 저들의 신을 섬겨야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결핍을 통해서 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늘 목이 마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100억을 주면서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돈을 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그동안 돈이 없어서 못했던 골프도 치고, 스포츠카도 사서 타고 다니면서 뽐내야 됩니다.

만약 자기 아들이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했다면 가만히 못 있습니다. 평소에 잘 만나지도 않는 친구 찾아가서 친구 안부를 묻는 척하다가 결국은 자식 자랑을 하게 됩니다. 떠벌여야 돼요. 왜냐? 다른 사람 때문에 내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외부에서 왔기 때문에 외부와 섞여야 살 수가 있어요.

가인이 받은 형벌이 뭡니까?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벌인 이유가, 가인이 타지로 가면 그들이 가인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인이 사는 방법은 그들과 한통속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특히 학생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자살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왕따를 당해 자살하는 것을 잘 이해 못합니다. 친구들이 안 놀아주면 혼자 놀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안 됩니다. 친구들과 같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그들 무리와 어울리기를 원해요. 왜냐? 그들이 곧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고,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곧 ‘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는 타인을 향해 내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소연하고 있어요.

사람은 누가 날 호명하지 않으면 자살합니다. 자살의 이유는 호명 받지 못해서입니다. 남편이 집을 나갔을 때 아내가 전화로 불러주면 집으로 들어오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찾지 않으면 강물에 뛰어듭니다. 누가 나를 부르지 않으면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없어요. 희한하지요? 내가 종일 나를 불러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불러주면 “예”하고 얼른 달려갑니다. 강아지하고 똑같아요. 누가 불러줘야 돼요. 누가 불러줍니까? 이미 세상을 장악한 쪽이 불러줘야 돼요. 그게 바로 악마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불러줘야 돼요.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이름을 귀히 여기는 것이 누적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는 점점 죽음으로 가게 됩니다. 괴리가 생기고, 간격이 점점 멀어집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살 때 부자의 하루 일과가 뭐였습니까? 매일 파티를 열었지요. 혼자 산해진미를 장만해서 먹었습니까? 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놀았지요. 그런데 그와는 정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아무리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신 이야기가 있어요. “사람에게 높임을 받으면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께 미움 받으려고 작정을 했어요. 그것이 사는 보람이고 재미고 행복입니다.

세상에서 호명 받지 못한 나사로는 마지막 날 누가 호명해 줬습니까? 주님이 호명하셨어요. 부자는? 그냥 지옥에 떨어졌어요.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서도 이 땅에서는 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동생들이 지옥에 올까봐 걱정했습니다. 이런 착한 마음을 가졌다면 지옥에서 잠시 고생하다 빼주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안됩니다. 주님이 호명하지 않았기에 그는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호명 받은 나사로의 이름은 뭔가? 육신에는 이름이 없어요. 그냥 흙입니다. 우리가 붙인 이름은 가짜입니다. 나사로 육신에 주님의 자기 이름을 붙여서 주님이 자이 이름을 부른 거예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는 주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 작업을 이스라엘에게 먼저 했었어요. 이스라엘은 두 가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죄악 된 본성, 이방 민족이 섬기는 그 신에 합류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아성, 혹은 죄악 된 욕망이지요.

욕망은 결핍으로 채워지는데, 매울 방법이 없어요. 욕망은 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결핍을 생성하는 것이 욕망입니다. ‘나는 욕망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나를 그때그때 임시적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나는 없고 욕망만 있습니다. 선악적인 욕심. 하여튼 마귀가 인간을 버려놓았어요.

끝도 없는 갈증입니다. 강의 중에 집사님이 전화를 받았는데, 언제 또 전화가 걸려올지 조마심이 납니다. 나는 육신이어야 하는데 강의하고 있는 자아가 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만나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었고, 또 그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법을 경유하게 되면 죄인으로 등장합니다. 육신 자체가 죄악 된 육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너는 흙이다.”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주님이 하신 일의 반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율법으로 반복시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고 행함을 부정하면서, 행하지도 않았는데 의롭게 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아가 있기 때문에 법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니고 건성으로 법을 이용해서 자아를 유지하려고 하지요.

진짜 법에 의해 우리가 죄인으로 지적 받는다면 우리는 법에 복종할까요, 피해 버릴까요? 피하게 됩니다. 법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지 우리가 법을 반기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싫어서 피하고 도망쳐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법입니다. 우리는 나의 건사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를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법을 피하고 싶어도 이미 우리는 법 안에 있고, 그 법에 따라 저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복음의 시작(막1:1)’을, 창세기는 ‘천지 창조’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같은 성경에서 시작이 2개가 되는가? 그러면 창세기에서 복음서까지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때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미워해야 돼요. 그 기간을 만드는 것이 창세기에서 복음서까지의 기간입니다.

그 기간에 활동에 나선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고, 율법에 따르지 않으면 저주 받게 되어 있고, 이스라엘은 인간의 대표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저주 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라는 틀이 필요했던 거예요. 하늘과 땅, 봄, 여름, 가을, 겨울, 공간과 시간.

시간과 공간은 우리 자신을 포승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모든 것은 우리가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경유해서 모든 것을 봐야 하는데 우리의 자아는 율법을 외면하고 우상과 한 통속이 되어 살기에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누구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죄가 있는 곳에 어떻게 의를 발생시키는가? 죄와 의의 문제로 세상을 다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를 육신으로 보지 않고 자아로 보기 때문에 ‘자아가 어떻게 복을 받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죽어서 천국을 가는가?’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지만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에 묶여 살아요.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행복을 좇습니다.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이유로 행복할 수 있는 모든 길을 향해 질주합니다. 왜냐? 자아 속에는 욕망이 있고, 욕망이 복을 원하기 때문이지요.

죄가 천국을 원하는 겁니다.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죄인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갑니까? 천국을 개판으로 만들일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것에 대해 수긍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육신을 주었는데 이상하게 자아라는 괴물이 등장했어요. 이 자아는 실체도 없어요. 그런데 육신을 건드리면 자아가 아파요. 왜 그런가 하면, 내 육신은 아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의 자아를 형성시켰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날 건드리기만 해봐. 하나님이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런 악마가 준 마음이 육신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귀신은 우리 육신을 제 마음대로 들락거립니다. 자아가 강렬할 때는 일곱 귀신이 날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슨 일만 벌어지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불평을 합니다. 나는 없습니다. 내 이름은 없어요.

이스라엘은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여서 재로 만들고, 그 재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어 냅니다. 언약을 시행하시면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그러면 멸망 자체가 언약의 실행이지요. 그러면 실행 지점에서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처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이기에 멸망했지만 새롭게 생긴 이스라엘은 주를 위한 이스라엘이기에 멸망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인자의 나라지요. 짐승에게 인간을 내어주었고, 짐승인 인간을 덥석 물었어요. 이것은 미끼에 걸려든 겁니다. 잘못 문 거예요. 에덴동산에 사단이 출연해서 인간을 물게 만들어놓고 그 물린 인간 속에 하나님이 뛰어 들어가요. 주의 이름이 뛰어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니 악마가 주의 이름마저 물지요.

헤롯이 베들레헴의 2살 이하의 아이를 다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친 예수님을 결국 잡았지요. 결국은 사형 언도를 내려 죽였지요. 그러면 이 땅에서 누가 이긴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고 악마가 이긴 거예요. 처음부터 이 땅에서는 악마가 이긴 세상이었습니다. 힘만이 진리입니다.

이 힘의 기세에 12제자도 다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가 이런 말을 했어요. “네가 말만 잘 하면 내가 너를 풀어줄 수도 있다.” 이 때 주님 하신 말씀이 “아버지가 원하시면 천사들이 와서 나를 건지실 것이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세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이 세상이 예수님의 세상이 아닌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성도는 그 약한 주님을 좋아해요. 그리고 성도 역시 주님을 담아 약합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도들이 간 길이었습니다.

10분 쉽시다.

(2014. 4. 18. 08:2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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