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슥13장 7-9(삼분지 일)140413-이 근호 목사
34강 슥13장 7-9(삼분지 일)140413-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203.90.42.222)
34강 슥13장 7-9(삼분지 일)1404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3장 7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4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 성경 해석 자체가, 이 본문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본문도 해석을 어떻게 합니까? 물을 필요없이 해석 불가할 정도입니다. 해석 자체가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철학으로 도저히 해석이 안 됩니다. 삼분의 이는 멸절될 것이요 삼분의 일은 건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건짐 받는데 어디서 건짐 받느냐면 불 가운데 건짐 받는다 라고 했습니다. 일단 문자 그대로 합시다. 해석을 할려면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합시다.
인구가 3000만명 인구 중에서 2000만명을 멸망하고 1000만명만 다 예수 믿는 그런 나라가 인류의 역사 속에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유다나라에도 삼분의 일은, 현재 인구 중에서 이스라엘 인구가 천만이 안 되거든요. 이스라엘 인구 중에서 삼분의 이는 다 멸하고 삼분의 일만 달랑 남아서 하나님 섬기는 그런 유다나라 역사가 있었는가? 그런 적도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해석을 할 때에는 실제로 말과 결과가 동일할 때에 그 결과를 가지고 그 말을 해석하게 되어 있거든요. 경험치 않은 것을 해석할 수는 없어요. 뿔이 하나밖에 없는 그런 용이 있다고 말은 할 수 있습니다. 말은 되는데, 용을 본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따라서 그 말은 헛말이 되는 겁니다. 두 번, 세 번 확인이 되어야 되거든요. 영국 북쪽에 호수가 있는데 호수에 네스라는 괴물이 등장한다고 공증사진도 찍고 했다 이 말이죠. 그 뒤 과학자가 그 호수를 수 십 년 탐색해도 그런 동물 없어요. 없으면 그 말은 헛소리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헛소리가 안 될려면 같은 이야기된 것이 두 번 반복이 되어야 돼요. 두 번 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사십일 금식하고 기도하면 병 낫습니다가 될려면 너가 사십일 해도 병 낫고, 내가 해도 병 낫고, 당신이 해도 병 낫고. 그렇게 될 때, 사십일을 하면 어떤 병도 낫는다는 것이 진리로서 채택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면 되는데 너가 하면 안 되는거 그거는 채택이 될 수 없어요. 따라서 어떤 말이라도 이것이 검증된 사항이 되어야 이 말의 해석이 용인이 되고 용납이 되고 설득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자꾸 간증 집회를 하는 이유가, 자꾸 간증으로 설교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 눈으로 보고 믿으라고 그렇게 자꾸 간증을 하는 거예요. 한번 해보세요. 복을 받나 안 받나. 십일조 해보면 말라기에 나오는 말씀대로 너가 십일조 하게 되면 창고에 복이 넘치도록 쌓인다고 했으니까 시험해 보라고 하니까 시험해 보세요. 해보게 되면, 십일조하게 되면 창고에 넘칠겁니다 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너도나도 십일조 해봤거든요. 안 생겨요. 창고에 넘치지가 않아요.
수 십 년 십일조 하고 망한 사람이 안 망한 사람보다 천 배나 더 많아요. 어쩌다 된 사람 가지고, 어쩌다 0.01퍼센트 하나 된 것 가지고 나머지 99.9퍼센트 다 된다고 그렇게 구라를 치고 싶은 이유가 사람은 지금은 안 되지만 희망하고 사니까 언젠가는 차고 넘치겠지. 희망에 호소하기 위해서. 희망을 품고 있는 그 인간에게 호소해서 장난질을 쳐대는 겁니다. 없어요.
주의 모든 말씀은, 미리 결론부터 말씀 드리겠는데 주의 모든 말씀은요 우리가 뭘 얻는데 있는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지 우리가 이렇게 하면 어떤 효과 얻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삼분의 일 이것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적 없습니다. 그래서 해석이 불가합니다. 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누가 해도 거짓말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이 해석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 우리가 해석이 안 되는 이유는 여기에 나오는 삼분의 일을 할 때, 삼분의 일을 우리가 평소에 이 세상에서 경험했던 그런 산술적인 생활, 그러니까 수 계산하는 그런 생활에 속한 그 삼분의 일과 삼분의 이를 여기에다 바로 적용하기 때문에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런 것이 있어요. 제가 아주 기억을 자세히 못하겠는데, 삼형제가 있었는데 엄마가 복숭아를 하나 가져왔어요. 동화에 나와요. 교훈용 동화인데. 애들아 너희들이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고 복숭아를 주니까 힘센 형이 다 차지하고 말았어요. 그때 엄마가 갑자기 개입했죠. 개입 안 했으면 동생들 복숭아 못 먹을 뻔 했습니다. 해서 엄마가 복숭아를 삼분의 일로 나누어 주니까 사이좋게 먹었다 하는 아주 저학년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 듣고 지금 수 십 년이 지난 나는 의문이 들어요.
뭐냐 하면 빵을 삼분의 일로 나누는 것은 가능합니다. 떡도 가능한데 지금 복숭아를 놓고 나누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예요.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그 문제가 아직 풀리지 않아요. 제가. 복숭아 씨는 칼이 안 들어가요. 어떻게 삼분의 일을...사과는 돼요. 하필이면 그 동화에 복숭아가 나와서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삼분의 일이라는 것은 이처럼 어떤 덩어리가 있고 그것을 삼등분해서 그 하나를 삼분의 일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고요. 주님께서 삼분의 일을 사용할 때는 삼분의 일이 양적으로 삼분의 일이 아니라 도대체 삼분의 일이라는 그 단어와 삼분의 이라는 양적으로 구별된 그 구분이 어떤 사건의 계기가 되어서 그런 구분이 일어나는가를 보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기서 작은 자들 위에, 큰 자와 작은 자가 나누어지는 겁니다. 나누게 되는 이것,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상을 큰 무리와 작은 무리로 나누시는 계기가 뭐냐 하면 목자를 칼로 치는 거예요. “칼아 깨어서 내 목자를 쳐라 내 짝된 자를 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목자 친다는 이야기는 교회 조금이라도 다녀본 사람은, 고난 주일을 한번이라도 지켜본 사람은 다 들은 풍월이 있을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마가복음 14장 같은 경우에 제가 안 찾아봐도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마가복음 14장 27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기록된 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스가랴 13장 7절. 기록된 바, 그 기록에 의해서 목자를 치리라 양들이 흩어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방금 우리가 보았던 13장 7절을 우리가 해석하거나 우리가 봐도 이것은 소용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봐가지고 이렇게 해석할까? 하면 주님께서 비켜! 비켜! 내가 해석할게 하고 주님이 중간에 끼어드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예수님 인생에서 두 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열 두 살 먹었을 때에, 부모와 예수님하고 유월절에 참석했을 때 부모가 열 두 살 먹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사흘 동안 찾았습니다. 아, 그 부모 참 속 타고. 예수님 낳았을 때에 예수님이 커서 이렇게 속 썩일 줄 부모도 몰랐을 거예요. 열 두 살 먹었을 때 그렇게 가출해서 뭐 112해도 119해도 없어요. 나중에 소문 들으니까 성전에서 어른들하고 말씀을 강의한다는 거예요. 강의의 신동 뭐 그런 겁니까?
어른들 강의하는데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강의하고 있으니까 부모가 허둥지둥 와서 여기 있다고 이야기하고 가지 왜 이렇게 부모를 속 썩이냐? 사흘 동안 찾았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너무...이렇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제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몰랐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몰랐습니까? 아버지가 둘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아버지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열 두 살 먹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부모가 어떤 생각을 해야하냐면 “여보 우리 예수가 안 보이네?” “가만 있어봐 가만 있어봐” “예수님의 아버지는 둘이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하나는 당신이니까 하나님 집에 가면 아마 예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흘 동안 찾을 필요도 없이 35분내지 40분만 바로 달려가면 예수님 만날 수 있을 거다 이 말이죠. 세상에 그런 생각을 하는 부모가, 세상에 그런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거는 인간에게 요구할 것을 요구해야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 잃어버리면 “가만있어봐. 내 딸이 예수를 믿으니까 그럼 내 딸은 어디 갔을까? 내 딸의 아버지는 둘이 있다. 당신이 아버지고 또 하나 아버지는 우리교회에 있다. 그러면 우리교회 가야지.” 하고 오면 우리교회에 딸이 와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우리교회 평소에 문 잠겨 있어 들어오지도 못하는데.
또 하나의 경우는 뭐냐 하면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에 가셔서 자진해서 이사야를 펴 놓으시고 읽으시면서 이사야 61장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때 성신이 임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이 뭐냐 하면 소경이 눈을 뜨며 귀머거리가 듣게 되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가 복을 받는다” 라고 하며 그 말씀이 지금 이때에 이루어졌느니라. 이 말이 나에게 응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얼마나 도발적인 말입니까? 지금 그 말씀을 유대인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데 어떤 난데없는 청년이 투입해서 하는 말이 “ 그 말씀 여러분 궁금해요? 궁금하면 내가 바로 말씀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납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게 무슨 설득력이 있어요? 그게 무슨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겁니까?
설교하면서 자꾸 설교자의 가슴이 아프고 심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백날 해봐야 이거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처지가 안타까워요.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 양이 흩어지는데 다수는 날라가고 작은 자 위에 내가 손을 드리우리라. 갈 놈은 가되, 사실 안 갈 사람도 없어요. 다 가는데 간 사람에 비해서 소수자를 내가 찾아와서 그들에게는 불 가운데 구원하리라. 9절에 보면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목사님, 스가랴서에 삼분의 이가 나오고 삼분이 일이 나옵니다. 삼분의 이는 뭐고 삼분의 일은 뭡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단답식으로 단촐하게 단순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사분의 삼은 아니고 왜 삼분의 이며 왜 칠분의 일은 아니고 육분의 일은 아니고 왜 삼분의 일이라는 용어를 써야 되는지 단답식으로 딱 이야기해 달라고 우리는 궁금해 미치는 거예요. 그 점이 궁금해요. 왜 사분의 삼이 아니고 삼분의 이인지 그 점이 궁금해요. 숫자가 왜 8이 아니고 7이며 왜 6이 아니고 5냐? 뭐 이런 식으로.
삼분의 이와 삼분의 일 그것은요, 지금 질문을 잘 못했어요. 왜냐하면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진다 할 때에 그 목자가 누구며 그 양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예요. “니가 알면 믿을래?” 이런 식이 되거든요. 목자, 양을 우리가 일방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식으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버린 이유는, 그리고 이사야 펴 놓고 그 말씀이 내게 임했다고 단언하는 식으로 한 이유는 인간이 성경을 보게 되고 그 성경을 보면서 반드시 궁금증을 가지고 해석을 해댈텐데 그 해석을 해버린 모든 해석 자체가 잘못된데서 온 잘못된 질문이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다른 노선으로 이것을 해석해 버려요. 다른 노선으로.
그러니까 삼분의 이가 뭐며 삼분의 일이 뭐냐 하는 것은, 지금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른다는 얼굴인데 이렇습니다. 내가 삼분의 이로 정해버리고 내가 삼분의 일로 정해버리면 거기다가 무슨 뜻으로 삼분의 입니까? 하고 끼어들지 말라는 거예요. 결국. 내가 목자를 치면 양이 떠난다 할 때에 목자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지 말고. 이 말씀은 누가 오셔야 해석이 됩니까? 로 물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목자가 누구인줄 아고 양이 누구인줄 알면 그거 조립해서 목자를 알아맞추겠다는 심보가 먼저 가동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가동을 먼저 멈추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전기가 들어와야 되는데 잘못 만져 가지고 전기가 안 들어온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미 전기가 들어온 상태를 안 상태에서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400년 전으로 잠시 조선시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잠시 도민준 되겠습니다. 잠시 40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조선 초기에 있는 사람보고 “전기가 들어왔는데요, 전기를 빼니까 전기가 안 들어와요.” 그럼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이큐 높은 세종대왕이라도 “지금 짐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죠? 그게 바로 우리들이 하는 질문이예요. 우리는 질문 자체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아침에 일찍 와 가지고 주방에 들어가 보니까, 오랜만에 주방에 들어가 보니까 스위치에 새카맣게 때가 있었어요. 분명히 스위치를 여자분들이 누르는데 여자분들이 스위치 누르면서 때 묻은 스위치를 가만히 두고 보고 있더란 말이죠. 나이든 티를 다 내고. 나이들어서 잔소리 한다 싶어서 세제 묻혀서 스위치를 문질렀는데, 깨끗하게 한 것은 좋은데 불이 안 켜져요. 다시 떼가지고 말려서 하니까 이제 불이 들어왔어요. 점심식사 준비하는 사람은 그런 놀라운 사건이 있는 줄 몰랐죠? 그냥 불 켜니 불 들어오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놀라운 정전 사건이 있는 것을 우리는 모른 거예요. 주께서 죽었을 때는 이미 이 세상 정전되어 버린 거예요. 어떤 누구도 성경해석해서 하늘나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다시 부활해서 성령이 오니까 이제 우리로 하여금 삼분의 이와 삼분의 일을 가름하는 그것에는 반드시 사건이 먼저 있었다는, 그게 뭐냐 목자를 치니까 양들이 흩어지더라. 따라서 목자는 얻어 맞고 양들은 도망가고 이 세상은 끝. 이 세상은 모두 끝나버렸어요.
이제 구원의 관계 문제는 바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해서 설쳐줘야 이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설칠 때 설친다는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면 삼분의 일이라는 스가랴의 묵시적 예언에 있는 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삼분의 일로 구원한다는 식으로 이렇게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적혀 있느냐면 요한계시록 8장, 9장에 나와 있습니다. 8장 8절에 보면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절 “피조물들이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10절 “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12절 “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9장 18절에 보면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요한계시록 해석 뜻이 뭐냐 하면 삼분의 일이라는 자체가 우리가 사용하는 삼분의 이 말고 삼분의 일, 한 덩어리 중에서 삼분의 일, 복숭아 가운데서 삼분의 이 말고 삼분의 일. 그 내용이 아니고 스가랴에 나오는 삼분의 일이라고 구태여 자기의 십자가, 주님의 죽으신 십자가 사건과 결부되어서 사용된 삼분의 일이란 것을 모르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양 중에서 삼등분해서 그 중의 하나늘 삼분의 일, 양 중에서 삼분의 일, 그렇게 수로 생활하는, 거기에 나오는 용어 삼분의 일을 가지고 요한계시록 해석을 하게 되니 이 해석이 풀릴 리가 있습니까? 풀릴 턱이 없지요?
요한계시록 8장 9장 삼분의 일, 삼분의 이 나올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서 구원하는구나. 또는 능력으로 심판하는구나. 이렇게 보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스가랴서 13장 7-9절 말씀을 현 세계에 적용시키는구나. 이렇게 해석하면 이 해석이 깔끔하게 끝. 주께서 활동하셔서 건질 자는 건지고 버릴 자는 버린다. 모든 자연 세계를 통해서. 이렇게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이거 요한계시록 8장 9장을 그냥 들여다 보니까 삼분이 일 하면 그러면 삼분의 이는 어떻게 되지? 자꾸 양적으로 삼분이 일을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목자를 치니까 양이 흩어졌잖아요? 흩어진 양 가운데 한 마리예요. 흩어진 양 중의 하나라구요. 제가 오전 설교 끝부분에도 그렇게 했잖아요? 오전 설교 때 뭐 저 스위치 때문에 생고생했지만. 설교하면서 시간은 뭐 40분 넘었죠. 끝내야 되는데 할 말은 있고 저거 신경쓰이고. 오전에 설교 끝내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도살장이야기 했다구요. 사실을 그 이야기 더 해야 되는데. 도살장이 될 때에 왜 도살장이냐 하면은, 왜 우리가 예수님을 도살해 죽이고 싶은 이유가 뭐냐 하면은, 아까 기도할 때도 했지만 우리가 무의미한데 자꾸 우리가 의미 있다고 하는 바람에 누가 무의미하냐면 예수님이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자꾸 배척하니까 도살할 양같이 끌려가든지 말든지 애앵하고 울든지 말든지 나만 안 울면 되는 거예요. 나만 고생 안 하고 나만 수입만 늘어나고 나만 돈만 잘 벌면 끝나는 거예요.
이 세상이 그런 판이니까. 그런 판이니까 목자를 치든 말든 양들은 제 갈 길 가버리는 거예요. 그런 세상이 지금 삼분의 일의 작용에 대상이 되는 겁니다. 삼분의 일이 양적으로 어느 쪽이냐고 묻지를 마시고 그 삼분의 일이라는 단어 자체 속에서 주께서 우리 때문에 죽으셨구나를 찾아내고 발굴하면 되는 거예요.
제가 안양에 가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줘요. 제가 이야기 들으니까 참 가슴 아픈데, 자기 앞 집 지하에 목사님 내외분이 살고 있는데 그 목사님 내외분을 그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요. 그 목사님이 가끔 가다가 열 두 시만 땡하면 들어와서, 그럼 이웃집 집사님은 짐작을 해요. 아, 또 벌어지는구나. 한시간 동안 집안의 가재도구를 다 때려 부순답니다. 술 먹고. 술 먹고 다 때려부수면서. 그러면 사모님은 큰 소리 치고 고함질러도 다 참고 집을 나가요. 열두시에 들어와서 한시간 때려부수면 한 새벽 한시쯤 집을 나가는데 아마 교회 가서 기도하시겠죠. 사모는 그런 겁니다. 기도하면 그 다음부터 목사가 가관인데 두시간 동안, 한시부터 세시까지 엉엉 운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집사님이 어떤가 하고 가보면 두 사람이 아주 말끔하게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개척교회 목사님인데 교인수는 얼마 안 되고. 그래서 주로 침 놔주고 교회 오라고 그렇게도 하는데. 그걸 들으면서 뭘 생각했느냐면 왜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성경을 모를 리가 없고. 성경을 백독했다고 자랑질을 할 수 있는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왜 술을 그냥 쳐먹지 술을 쳐먹고 살림살이 부수고. 아직도 부술것이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가끔 부수니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늘 부수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두시간 동안 엉엉 운다는데 왜 우는가? 자기 행동이 후회돼서 울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아직도 자기 존재에 대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목자를 치고 양들이 흩어지면은요 나는 목자 칠 때 도망간 한 마리 양으로서의, 주님의 의미에, 십자가 의미에 합류하면 끝. 그게 그걸로 됐어요. 그만. 자꾸 다른 것 찾지 말고. 자꾸 단독적으로 의미 찾지 말고. 주님을 경유해서 의미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주여 저 어떻습니까?” “니는 나 얻어맞을 때 도망간 놈이야” “아멘” 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이예요. 오늘 아침도 아멘 나 혼자 아멘하고. 문제는 왜 성경을 경유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그런 자만이 구원받는 거예요.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요소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경유한 요소가 담겨 있거든요. 그 요소가 담겨 있잖아요?
제가 서울 의존교회 강의할 때 이런 강의했습니다. 어떤 대목이냐면 디모데전서 2장 내용이거든요. 하도 강의 내용 올려놔도 보지도 않지만.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그 대목을 설명을 했습니다. 그 앞에 보면 여자는 남자한테 순복하고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강의 내용을 다 할 수는 없고 거기 한 가지 뭐냐 하면 여자가 그걸 보고 난 뒤에 이제부터 남편한테 순복해야지 라고 나오면 그때부터 남편은 힘든 남은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남은 부부사이가 힘들어요. 왜? 성경은 모든 것이 같이 연동되어서, 같이 연결되어서 움직이기 때문에 여자가 만약에 남자에게 순복하게 되면 남편은 그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주님은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남편된 자들아! 아내를 위해서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것처럼 사랑을 하라고 한 거예요. 남편들 그 말씀 기억하십니까? 아직 기억나죠?
왜 그것을 남편들이 실행에 옮기지 않느냐면은요, 고맙게도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순종을 안 해줬기 때문에 우리 서로 퉁 친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은혜 받아 가지고 “여보 이제부터 나 순종할게” 이러면 남편들이 힘들어요. 그냥 하던대로 살아요. 하던대로. 그냥 고집부리고 잔소리 나와야지. 괜히 그렇게 나오면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돼요. 이게 연동되어 있거든요. 연동되었다는 말이 주님을 경유해서 부부가 새롭게 맺어져버리면 너나 나나를 내세울 것이 없어요. 말씀 앞에서 남편이고 아내고 잘났다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같이 우리는 목자치니까 다 도망갔어요. 도망가서 눈 맞아 만났어요. 도망친 채 부부된 거예요.
그러니까 불 가운데 삼분의 일은,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목자를 치니까 양들이 흩어진 것에 대해서 되돌아와서, 컴백홈 구원하신 분이 삼분의 일. 그것이 로마서 9장에서 남은 자라고 합니다. 남은 자는 은혜로 남아요. 행함은 끝났어요. 이제. 다 해봤는데 다 소용없어요. 순종해보고 뭐. 아내를 위해서 목숨바쳐봐야 다 한 때고. 무조건 은혜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 혜택이라는, 그 연동, 그 말씀의 구조 안에 여러분들이 놓여 있다면 우리의 어떤 행위도 의미 없고. 우리가 경유했던 주님의, 목자가 침을 당하는, 목자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그것만이 남은 의미로 증거하라고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울고불고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그렇게 우는 그 배경에 자기 존재에 아직도 의미가 있어 그런 울부짖음이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자주 잊어버립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일 제 갈 길로 간 것을 잊어버렸는데 이제는 말씀을 통해서, 실제 경험을 통해서 주님 안에 하나의 잃어버린 양으로서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그러한 관계에 있음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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