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시내산
201404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시내산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4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시내산
(강의:이근호 목사)
아까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저주받고 싶다고 저주받는 게 아니고 저주받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저주가 주어지게 돼있습니다. “난 나쁜 짓했으니까 저주받아야지, 지옥 가야지.” 니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나는 지옥 가야지. 안 갑니다. 천국 가야 돼요. 창세전에.
기준은 뭐냐? 내가 하는 행동으로 어떤 평가받는 기준을 넘어서려면 시내산에 가야 됩니다. 지금 시내산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시내산의 의미를 놓쳐버렸어요. 왜냐하면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갔는데 사라져버렸어요. 이제는 모세가 없는 입장에서 말만 시내산 밑에 있을 뿐이에요. 시내산의 의미는 위에 계신 분이 합류해줘야 전체적으로 시내산 의미가 살아나는데 합류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내산 오나마나 상관없이 똑같은 입장에 있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그들이 모세와 함께 있을 때는 모세 말 잘 듣는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모세가 떠나도 자기 본색은 달라지지 않아요. 모세가 있어도 신앙, 안 생겨요. 모세가 떠나도 신앙, 안 생겨요. 안 생겨야 돼요. 그래야 언약 고유의 능력으로 구원받지요. 내가 신앙 만들어내면 안 돼요. 신앙 만들어내지 맙시다.
일반 교인들에게 묻고 싶어요. “복음 모르는 목사의 설교 듣고 평해보세요.” 그러면 대번 그래요. “모르겠는데요. 똑같은 데요. 그 차이를 모르겠는데요.” 이 말은 평소에 복음 아는 목사가 설교해도 다른 목사 설교한 것과 똑같은 태도가 유지된 겁니다. 복음 모르는 목사 있으나 그분 가고 다른 목사 오나 달라질 게 없어요.
만약에 서 목사님 다른 데 가시고 다른 목사 와서 하는 소리가, 여러분 헌금 안 해도 되고 봉사 안 해도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서 목사님과 똑같네. 이럽니다. 똑같지 않거든요. 그게 하나에 교회 키우기 위한 수법인 것을 몇 개월 안 가서 눈치 챌 겁니다. 눈치 채는 것도 성령 받은 사람이라야 눈치 채지만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눈치 채지도 못하지만. 그러니까 정말 이런 사태 만나면 참 답답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내산을 경유해야 구원받는데 시내산에서 인간은, 자기가 상한 심령이라는 것이 다 들통 나야 됩니다. 그게 하나의 절차입니다. 절차기 때문에 상한 심령 되면 부끄러운데. 정말 짜증나는데. 다른 길은 없을까? 다른 길은 일체 없어요. 그렇다면 시내산 밑에서 아론이 금송아지 만들고 여호와 절기라고 축제를 벌이는데 근본적으로 이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절대적으로 평가를 내릴 기준이 없다는 것. 전부 똑같은 인간이니까. 한 통속이 되었으니까 기준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우리는 복음적으로 사니까 세상에 물들지 않고 반듯하게 살지요. 사람이라는 것은 세상이 하나 됨을 요구할 때 거부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이 나를 호명하지 아니하면 밥도 못 먹어요. 호명이 뭐냐 하면, 취직함입니다. “아저씨, 이것 해볼래요?” 그게 호명이거든요. 호명되지 아니하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도 날 찾지 아니하면 나도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됩니다. 결국 그 마지막은 자살이에요. 나라는 것은 남을 경유하면서 내가 되거든요. 남이 뭐라고 해줄 때 “그래 맞아. 그게 나야.” 꼭 누가 나를 뭐라고 해줘야 비로소 내가 정립이 되거든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고, 3년 내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우편배달부도 안 오고, 자식들 전화 한 통 없을 때 이미 그 노인네는 죽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평가내릴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럼 어떻게 평가 내리느냐? 내가 했기에 내가 한 것은 무조건 정당한 겁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했는데 가룟 유다 입장에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올바른 행동이 자살이에요. “네가 내 사정을 알아?” 그게 그 말이거든요. “그러면 안 돼. 네가 내 사정을 알아? 너나 잘 하세요. 당신이 내 사정 알아?”
절대적인 기준은 누가 정한다는 말입니까? 그 기준을 내가 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문제점은 자기가 한 행동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그게 없지요. 그래서 저는 시내산을 막다른 한계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절벽이 있다면 그들은 차를 몰고 절벽까지 온 거예요. 더 갈 데가 없어요. 이게 출애굽기 32장의 상황입니다. 그들이 왜 차를 몰고 왔느냐?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네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라. 결국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내가 했기에 그래서 옳다는 겁니다. 남이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해도 안 옳아도 내가 한 것은 내가 했기에 무조건 최고에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평가는 뭐냐 하면, 위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돌을 떠밀고 있어요. 돌이 떨어지면 어디로 떨어지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박살내는 자리까지 오는 이 세트장이 시내산입니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시내산을 만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돌멩이 얻어맞을 때 내 모습은 뭐냐 하면, 내가 했기에 오는 거예요. 그걸 선택이라 하고 나의 선택을 인간의 자율성, 자유의자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었다. 그런데 누가, “집사님, 지옥 갑니다.”라고 했을 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말합니다. “저, 지옥 가는 줄 알아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지옥 가는 것 맞아요.” 이렇게 되는데 자기가 믿음을 유발시키고 만들어낸 사람 같으면, “나, 성경대로 예수 믿기 때문에 천국 가요.”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얻어맞을 방법밖에 없는데 그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더 진격할 데는 없어요. 여기가 끝이니까. 여기에 돌멩이가 던져지면서 내가 차라면, 나를 치고 돌멩이가 틈, 간격, 그리고 균열을 만들어내요. 내가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틈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와보니까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진작부터 죽었어야 돼야 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진작 죽어야 되고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나도 진작 죽어야 돼요. 그래서 장례식이 먼저고 출생은 나중이라니까요. 출생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진작 죽어야 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아버지께 저주받았잖아요. 그 저주를 진작 나도 같이 받아야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울산에 사시는 여러분들에게 매일같이 진작 죽도록 합니다. 어떻게? 때로는 비빔밥, 때로는 탕수욕, 때로는 간짜장 둘에 우동 한 그릇, 다음 달에는 피자가 예상되는데, 죽는 방법이. 자식 결혼시키고 죽이고, 결혼시킨 자식이 또 직장생활하면서 죽어가고 있고. 올해는 저렇게 까불며 죽어가고 있고, 커서는 교회도 안 나오고 숙제한다고 죽는 방법도 있고. 머리는 오십 넘어서 흰머리 나오고 갑자기 갱년기인가 하면서 죽고. 사도 바울처럼 매일같이 죽노라. 왜? 진작 죽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죽음은 내가 자살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죽이신다는 그것이 감사하지요. 우리도 이 시간에 팔자 좋아서 앉아서 성경공부하면서 죽지만 어떤 젊은 사람들은 잔업하고 죽어요. 보충수업하고 죽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발상을 나부터 출발하게 되면 성경해석 제로입니다. 전혀 안 됩니다. 그게 변명과 핑계의 연속이에요. 그런데 창세전의 예수님부터 출발하게 되면 내가 죽어가는 것도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 것을 주님이 알아서 죽여주시는 거예요. 언약 안에서 죽으면 안식이 되지만 언약 바깥에서 죽으면 지옥이 돼요. 언약 안에서 죽으면 천국이 되지만,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 언약 안에서 매일같이 죽으면 우리가 천국 가지만 언약 바깥에서 죽여 버리면 지옥 갑니다. 그걸 언약 완성으로 보면, 우리가 주 안에서 살든지 죽던지 영생이지만 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도 지옥이고 죽어도 지옥이에요. 사나죽으나 저주가 머물러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에게 저주가 임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자녀들아 부모한테 효도하기를 주 안에서 하라. 부모들아 자식을 훈계해도 주 안에서 하라. 그것은 출발점을 내 자식으로 출발하지 말고 주님의 자식, 언약의 자식으로 출발해서 주의 말씀으로 훈계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사실은 내가 이렇게 고생한다고 말하면 안 되고 그건 잘못이고. 주 안에서 따지면 주님이 이 길로 가셨구나. 주님이 이런 고생했구나. 주님이 잔업하다 손가락 다쳤구나. 모든 것이 주님이 겪었던 일을 우리가 뒤늦게 태어나서 뒤늦게 겪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확정된 사실이고 죽기 전에 주님 가신 길이나 밟아보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거든요. 말씀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면 그 죄인 역할을 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죄인을 부르러 왔다니까 부르시는 주님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자진해서 죄인으로 살아도 괜찮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왜 잘난 맛에 사십니까? 이게 언약 밖에서 했던 행세와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시내산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까지 서론이고 본격적으로 시내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1절에 보면, 모세가 양을 치는데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하나님의 산이거든요. 출애굽기 3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이지요. 10절에 보니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리고 뒤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12절)
이 대목을 읽은 취지가 뭐냐 하면, 시내산이 있다면 시내산의 검은 자락이 이미 홍해 이전에 애굽에서도 시내산 자락이 덮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갈 때 이유가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기 위해서 왔다는 거죠. 그런데 제가 방금 읽었던 것은 모세가 호렙산에 있으면서 “모세야 애굽으로 가거라.” 말 못한다고 핑계를 대지만 가기는 가요. 갈 때는 모세 혼자 갔지만 올 때는 네가 있던 그 장소로 백성들은 이끌고 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내산 자국이 발가락이 애굽까지 뻗어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 시내산 꼭대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를 보냈고 모세는 그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서 데리고 오는 입장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내산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죠. 우리가 이 강의 들으면 알아요. 정답이 시내산이 있느냐, 없느냐는 뭐로 확정하느냐 하면, 좌표상 어디냐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실시됐다는 그 흔적과 증거로 인정이 되는 영적 공간이 바로 지금의 시내산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한 맹세대로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출해서 이끌어 와서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게 하지요. 이 과정과 절차가 그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지만 지금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갇혀있는 자기 백성을 건져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바르면서 주님과 함께 경배하게 했다는 이 정황과 상황 속에 놓여있음을 아는 그 사람은 매일같이 시내산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삶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주 안에서 사는 삶이에요.
그래서 주 안에서 산다는 말은 언제냐고 묻는 게 아니고 주 안이라는 언약의 완성 상태를 누리고 만끽하면서 그 혜택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지금의 시내산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느낄 때 나는 구원받았다는 게 아니라 주께서 이 작업을 매일같이 되풀이한다는 사실입니다. 눈만 뜨면 이 작업을 또 되풀이하고, 눈만 뜨면 되풀이 하고. 눈만 뜨면 우리는 애굽에 갔다가 다시 구원받고, 눈만 뜨면 애굽에 갔다가 다시 구원받고.
볼펜 안에 스프링을 눌렀다가 놓으면 나오지요. 애굽에 있던 우리를 주께서 눌렀다가 놓으면 어느새 시내산에 있고. 다음에 또 누르게 되면 우리는 애굽에 있으면서 못 살겠습니다. 북한 핵 때문에 못 살겠고, 날씨 추워서 못 살겠다. 벚꽃놀이 가야 되는데 벚꽃 다 져버리고. 온갖 되도 않는 소리 다 하거든요. 그걸 놓으니까 내가 주 안에서 있으면서 엉뚱한 희망을 품고 있었네. 다음 날 되면 또 못 살겠다고 노래 부르고.
구약에서 시간, 공간이 제한되었던 것이 성령 안에서는 단순히 제한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그걸 반복했다는 것이 중요해요. 구약부터 신약 전체가 이미 완성된 것을 소유하란 말이 아니고 완성된 자체에 소유당해서 늘 스프링 뛰듯이 거기서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방금 이론상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체감합니까? 체감하는 방법은 시내산 밑에서 한 것도 포함돼 있잖아요. 뭘 했습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는 핑계를 매일같이 마지막에 어려울 때 그걸 이야기합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그때 뭘 보라 했습니까? 막다른 벽인 줄 알았는데 틈이 갈라지면서 완전히 막혀서 절망이라고 느꼈는데 그 틈에서 생수가 나오지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 분명히 물 길러 왔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양동이를 버리고 갔어요. 왜 그래요? 그 사람은 자기로 왔다가 주님의 것으로 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처음에 물 길러 올 때는 나의 것으로 왔다가 우물에 물 길러 왔다가 본인이 우물 됐어요. 생수가 나오니까. 주인이 바뀐 거예요. 주의 것으로 바뀐 거예요. 물론 그 뒤로 그 아줌마가 물 안 먹었다는 소리는 없어요. 물 길러 오겠지요. 하지만 그때는 물 없어도 괜찮아요. 이제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한 건했다, 추수했다고 해요. 너희들이 심지도 힘들이지도 애쓰지도 않은 그것은 너희들 없을 때 내가 추수했다. 추수했다는 말은, 그런 식으로만 건져낸다는 거예요.
지금도 주께서는 시내산을 반복시켜서 우리에게 해댑니다. 그래서 처음에 강의할 때는 듣기에 상당히 절망적이었지요. “홍해 건너와도 그것밖에 안 되는데 생활에 매여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 생활 하겠나. 난 포기했어.” 이제 와서 가만 보니까 느긋하게 볼 수 있지요. 그야말로 즐길 수 있지요. “이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네. 마치 옛날 이야기하듯이. 꼭 내 모습이네.” 느긋하게 성경을 볼 줄 알아야 돼요. 초조하고 다급하게 이것 못 지키면 지옥 간다고 부들부들 떨고. 이것은 아직 돌멩이를 덜 맞아서 그래요. 완전히 큰 돌멩이 맞아봐야 이제는 절망이라는 소리까지도 없어져야 돼요.
우리는 절망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뭔데 절망을 논해요. 사람이 절망을 논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깝다는 거예요. 내 인생 이렇게 망가지면 끝난다는 겁니다. 그 소리마저 싹 가도록 해야 돼요. 내가 이런 식으로 하는, 그 내가 깨져야 돼요. 이런 식이고 저런 식이고 간에 나란 자체가 산산조각 나고 주의 것으로 재조립돼야 돼요.
이 이야기하고 다음 진도 나갑시다. 시내산은 늘 조립돼야 한다. 매일같이 주께서 우리로 시내산 사건을 조립시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성령이 오셨거든요. 성령은 이미 이루어진 일을 반복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반복한다니까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십자가만 반복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의 긴 자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말씀화 되어야지 우리가 말씀 지키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가만있어도 그 자체가 말씀이 되어야지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고 해버리면 우리가 말씀 아닌 경우가 생기잖아요. 그러면 주님 말씀이, 우리가 무서워서 침투 못한 셈이 돼요.
달이 비추려고 오니까 어떤 사람이, “나는 달빛이 비추니까 알레르기 생겨.” 그러면 달이 그 사람을 비껴갑니까? 그쪽에서 무슨 소리하든지 간에 그냥 달이 비추듯이 말씀이 그래요.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만 지켰고 안 지킨 건 남겨두고 이런 건 없고 우리가 뭘 해도 말씀 안에 들어오게 돼요. 말씀 안에 들어있으면 시내산이 반복이 되고 시내산이 반복이 되면 우리는 기껏 난 최선을 다했다. 난 내 할 일 다했다는 그런 저주받을 짓만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을 팔짱 끼시고 느긋하게 봐주시라니까요. 회개해도 느긋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느긋하게 회개할 수 있는 그런 레벨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번도 회개를 쉬지 않고 늘 회개하시되 느긋하게 오징어 초장 찍어먹으면서 “내가 이런 거 먹을 자격도 안 돼. 맛있긴 맛있네.” 하면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즐기고 있다 오란 말이죠. 뭐가 답답하고 뭐가 무서워서 뭐가 겁나서 벌벌 떨면서 오느냐 말이죠. 그게 하나님이 즐기라고 준 분복인데. 느긋하게 즐기시되 그 자체가 회개가 되고, 그 자체가 참회가 되고, 그 자체가 환란이 되고, 그 자체로 고난 받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모습이 희한하지요. 온천에 가서 “시원~하다, 아이고 환란, 아이고 환란.” 이게 환란이에요. 환란이란 개가 안 되는 게 환란이에요.
언약 안에서 사는 모든 것은 천국에서 볼 때 전부 다 환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신 환란의 길을 반복해서 되풀이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했지요. 그 말씀 듣고 여러분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 본 되는 행동과, 본 되지 않는 행동을 나누려고 시도했지요. 그게 될 말입니까? 주 안에서 사시면 어떻게 살아도 그게 전부 다 십자가를 본받는 게 돼요. 왜? 여러분의 오기보다 말씀이 위력이 하얀 눈 덮듯이 합니다. 모든 걸 덮어버리지요. 지금도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주의 은혜가 덮치고 있습니다. 단 언약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느낌 아니까.
내일 아침 일어나면 우리는 또 어디 가있습니까? 애굽에 가있어요. 못 살겠다고 하는 거예요. 요새 티비 CF에 보면서 은혜를 받은 게 있어요. 별로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서로 잘 생겼다고 하잖아요. 바로 그거에요. 자기 조건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주 안에 있기 때문에.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창세전부터 잘 생겼어요.
그런데 그런 느긋함은 눈 뜨면 생기는 게 아니고 절차가 있어요. 애굽에서 실컷 고생하다가 홍해 건너와서 아직도 모자라. 시내산은 모세의 부재의 공간이지요. 울산은 주님의 부재의 공간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예수님이 안 보여요. 간혹 노숙자나 보이지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이 보여요. 우리 육체는 타인을 의식합니다. 남이 있을 때와 없을 때 행동이 달라요. 오래 사귄 사람과 처음 만난 사람은 행동이 다릅니다.
사돈 상견례 할 때 가관입니다. 누가 경우 바른지 시합하는 중입니다. 양반 인사하는 거예요. 구봉서, 배삼룡 코미디 하듯이. 그저 극치의 예의를 차립니다. 혹시 말 실수했을까봐. 말 한 것 때문에 파토날까봐. 저도 많이 당했습니다. 말실수했다고. “당신이 그 자리에서 복음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느냐. 혼사 깨려고 하느냐.” 잔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자리에요. 집에서 하는 행동과는 달라요. 천사 같아. 웃기지도 않아요. 참 가관이에요.
우리가 애굽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가관입니다. 주님은 손톱만큼도 의지 안 되고 지금 나한테 잘해줄 사람한테 얼마나 비비느냐. 금가락지 빼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때 꽝 하고 십자가, 언약의 돌멩이 얻어맞고 틈 갈라지고 그 틈에서 생수가 나와서 또다시 시내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나를 통해서 되풀이시키는 실존하시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주의 활동성에 우리는 온 마음으로 만끽하게 되지요. 못난 것에 대해서 잘 생겼다고.
언약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언약이 없는 것은 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인의 제사에요.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언약이 있는 겁니다. 이야기 끝나지 않았습니다. 언약이 있으니까 그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잘난 존재고, 언약을 아니까 우리의 죄는 감추어질 것이고, 우리의 본색은 처음부터 구원받을 만한 괜찮은 자질의 사람인 줄 오해를 했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시내산까지 끌어당겼습니다.
32장 9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들을 진멸하지요. 그러니까 모세가 나서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떠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게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애굽에서 나갈 때는 당당히 나가놓고 그들은 몰살할 때 그것을 고소해할 혜택을 어떻게 애굽 사람에게 줍니까. 하나님이 인도하고 다 죽여 버리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셔서 그 화를 거두어달라고 했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세 말 듣고 화를 거둔다고 할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세의 위상, 중보자의 위상인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우리가 기도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면 우리 입을 완전히 다물게 만들어놓고 따로 어떤 분이 아버지와 대화했기 때문에 구원이 온 거예요? 우리 말고 중보자가 하나님과 직접 독대해서 이야기했던 효과로 우리가 구원됐잖아요.
그럼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됐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되었다. 기도로 구원되었다. 인내해서 구원되었다. 회개해서 구원되었다. 다 아니지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됐잖아요. 거기에 우리 믿음이 왜 들어갑니까. 빼야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을 반복하기 위해서 믿음도 두 가지로 나누었어요. 우리 믿음과 주님의 믿음을 나란히 있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 사랑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사랑을 나란히 가게 합니다. 나란히 가게 하는 이유는 둘 중에 하나는 가짜에요. 누가 가짜겠습니까? 내 것이 가짜에요.
소망도 두 개의 소망이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들은 이미 우리가 보고 기대할 만한 것들을 끌어 모아서 간절히 기도하지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기도를 안 듣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우리 기도를 안 듣는다고 하니까 그러면 왜 기도하게 하시는가? 그거야 시내산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갖고 있는 걸 다 들통 내야 우리 기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언약의 개입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드높여줘야 주님이 주 되심의 일이 성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난 우리로 주님의 주 되심에 활용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교회 참석할 때는 상한 심령, 아주 군내 나는 홍어가 되라 했지요. 우리가 상해버린 상한 심령이 될 때 그게 활용도가 높다니까요.
방금 제가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두 가지가 생겼어요. 내가 스스로 상한 심령이 되는 방법이 하나 있을 것이고, 주님에 의해서 상한 심령이 되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주께서 말씀하실 때는 대립 되는 두 가지 경우가 함께 느끼도록 하시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죄인이라는 그것과 진짜 주님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경우가 다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못났습니다.” 한 40일 동안 해보세요.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40일째 드디어 우리가 참다, 참다 못 참고 화를 내지요. “더 이상 금식 못합니다.” 할 때 (박수소리)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기도하다가 드디어 본색이 드러날 때 끝. 이 모습이에요. 이게 끝이에요. 그동안 기도하면서 온갖 것 다 했는데 결국 주 앞에 화를 내지요. 만약에 주님이 바로 앞에 있으면 죽일 수 있는 힘이 나오지요. 그 힘이 나올 때까지 주께서는 기다리신 거예요. 그 나왔던 힘마저 주께서 용서하신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풀어나갑시다. 요한일서에 보면 죄가 두 종류가 있어요. 용서될 수 있는 죄가 있는 반면에 용서될 수 없는 죄가 있어요.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토록 사함을 받지 못하고,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사함을 받는다고 했거든요. 예수님이 본인이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을 훼방하는 것은 용서되는 죄에 해당되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해당되지요.
그렇다면 천국 가는 사람이 짓는 죄는 예수님을 훼방하는 죄는 지을 수는 있어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못 짓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까지 가야 돼요?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욕하는 세 번씩이나 모른다는 그 죄까지는 가야 되겠지요.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주께서 참착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해서 기다렸던 진짜 내가 지을 수 있는 마지막 죄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몫은 성령께서 알려주는 겁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습니다.
여기서 바로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잘못된 교리를 이야기한 거예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지셨고, 그 다음에 구원받고 안 받고는 어디에 달렸다? 자기가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고 그만큼 사랑을 했건만 사랑을 거부한 사람은 지옥 간다고 하지요.
여러분 그 교리가 왜 틀렸는지 아시겠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성령이 빠졌지요. 예수님이란 인간과 나라는 인간이 흥정과 거래로 끝나버렸지요. 인간이란 저주받거나 천국 가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이 저주받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받은 저주를 미리 받기 위해서 만든 인간이고 우리가 영생 얻는 것도 주님이 받았던 부활의 영광을 미리 받으려고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과 거래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와 이미 거래가 끝난 문제잖아요. 그걸 두 자로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강의를 끝내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창세전에 끝난 이야기를, 그러니까 인류역사는 없어요. 역사라는 게 없어요. 인간을 위한 에덴동산도 없고 생명나무도 없어요. 하나님 아버지 계시고, 아들 계신데 창세전에 있었던 계획을 펼치기 위해서 창조돼야 되고 펼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미 주님께서 창세전에 응축된 내용이 스크린에 펼쳐진 거예요. 생명나무, 선악과, 에덴동산, 뱀, 인간, 하와, 여자, 남자, 나중에 천국 가면 남자, 여자 끝납니다. 천사와 같이 되니까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요. 가고 싶어도 그때는 못 가요.
깔아놓은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미 경험한 것이고 경험한 것을 밟게 하는데 경험한 것이 두 가지라니까.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 때 저주고, 또 하나는 영생이잖아요. 영생과 저주의 두 노선을 가게 만들어서 저주에 참여하라고 악마를 만들어놓고 타락한 천사가 있고 뱀이 있고 거기에 동참할 진노의 그릇이 있고. 영생 받을 인간은 예수님의 주 되심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도록 짜여진 각본대로 인간을 심어놓은 거예요. 노아 심고, 아브라함 심고, 그 다음에 모세 심고, 울산에 여러분 심고, 우리 죽고 난 뒤에도 또 심고 태어나게 하시고.
그런데 이것을 누가 아느냐? 이것이 언약 안에 들어있거든요. 노아가 방주 만들 때 날씨 참작해서 만들었습니까? 그야말로 방주는 미친 짓입니다. 신앙생활 미친 짓이에요. 마치 마리아가 회임하는 것이 미친 짓이에요. 감축드릴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임신할 때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진짜 성령 받아서 믿음 생기면 마리아가 했던 똑같은 고백이 나와야 돼요. “주여, 어찌하여 이런 스케줄이. 이것은 제가 감당할 문제가 아닙니다.” 감당하라는 게 아니라 감당하나 안 하나 그렇게 살게 돼있어.
“주여, 제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걸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믿음의 실상을 아시겠습니까. “주여,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게 믿음이라니까. 믿습니다. 그건 백 프로 가짜에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집 나간 남편이 죽었다는 소문 들었는데 어느 날 허름하게 “여보, 잘 있었어?” 이게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날 버리고 떠난 여자가 문밖에 찾아와서.
“내가 메시아를 봤다!” 물동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메시아를 만난 거예요. 남자 다섯, 여섯 사귄 것, 그 여자는 남자 다섯 명 사귀어야 돼요. 그리고 또 헤어져야 돼. 여섯 번째 사귈 때 물 길러 와서 주님을 만났어야 돼요. 이걸 소급해서 다 알게 돼요. 모든 걸 아시는 분을 만났기 때문에. 메시아. 도저히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믿는다는 극단이 믿을 수가 없는 감탄사가 나와야지 “믿습니다.” 하면 안 돼요.
신앙생활은 하라는 게 아니고 누리시고, 느끼시고, 그리고 감사하시고, 찬양하시고, 고마워하시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시내산 사건을 되풀이하셔서 마땅히 진작 죽어야 저주받아야 할 우리를 우리도 허락 없이 메시아 앞에서 알아서 컨트롤해주시고 커버해주시고 저주를 사랑으로 바꿔주신 그 십자가를 믿게 해주시니 주여, 이 어쩐 놀라운 은혜인지 이 은혜 늘 새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40404b 울산강의.hwp (49.5K), Down: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