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시내산
201404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시내산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4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시내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2장부터 할 차례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시내산 밑에서 모세가 없는 상태에서 백성들이 가만있지 않았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없으니까 모세의 부재, 부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모세가 없다. 그러니까 구원자가 없을 때, 구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과연 구원자가 없느냐는 문제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울산이나 대구나 예수님이 계시다는 그런 이야기는 여러분 귀에 안 들리지요. 예수님이 해변에 나타났다는 이야기 안 하잖아요. 이렇게 메시아 부재의 환경에서 사람들은 과연 뭘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도 모세가 보이는 상태에서 시내산에 오게 함으로써 시내산 만남 없이 구원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 시내산은 뭐냐? 자신의 속내가 들통 나는 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들이 그동안 함께 지켜봤고 동행했다는 인도자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럼 시내산에서 모세가 부재하다는 말은, 모세가 다른 곳에 가버린 거예요. 시내산 위에 올라간 겁니다.
이런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만남을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부터 하겠어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정말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 우리가 구원받는데 인자가 왜 들려야 하느냐? 들리지 않으면 구원이 왜 안 되느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절) 그러니까 인자가 들리는 그 상황이 바로 우리가 구원되는 상황인 것을 수긍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는 거예요.
그 인자가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동료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인자의 본질이 분명치 않아요. 그런데 그 구원자가 우리를 떠나야 되는 겁니다. 부재해야 돼요. 우리와 같이 섞이면 안 돼요. 자기가 사시는 곳으로 가셔야 되는 겁니다. 가 주셔야 우리가 그곳에 가는 거지요. 이 말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정들었고 경험했고 느꼈던 모든 이 세계는 결국 털어야 될 그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뭐냐 하면, 왜 우리가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다 떨쳐버려야 될,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기에 주님도 떠났고 우리도 떠나야 될 세상인가를 출애굽을 통해서 시내산 만남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같은 취지로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내가 여기 있고 주님에게 여기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곳에 주님이 합류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도리어 우리 곁을 떠나고 우리가 우리 자리를 떠나서 주님 가신 곳에 합류가 될 때 그것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떠날 때 우리가 아는 곳으로 떠났느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거든요. 베드로 오해한 것 중에 제일 큰 오해가 뭐냐 하면, 자기 목숨 바치면 주님과 합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네가 목숨 바쳐도 네가 있을 처소가 없다는 거예요.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돼요. 주님과 함께 있으면 당연히 내 처소, 내 자리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주여, 제가 목숨 바쳐서 주와 함께 가겠습니다.” “안 돼.” 왜냐하면 처소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갑자기 이제 와서 처소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 말이죠. 이것은 사람들이 상상한 그 무엇은 전혀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영생이나 그 천국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교회 다니면서 어떤 상상을 하면서 어떤 천국을 상상해도 그것은 주님이 준비한 그 처소가 아닙니다.
그 이유가 정말 상당히 난해하지만 그냥 편하게 제가 이야기할게요. 이제는 쉽게 하려고 해도 내 능력이 안 되서 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에덴동산에 사람이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이미 떨어졌다. 이걸 타락이라 하거든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다른 동네, 여긴 저주가 기다려요. 저주가 있는 동네에서 아담과 와가 살았어요.
사람은 에덴동산을 생각하거든요. 자기가 추방이 되었으면 다시 에덴동산으로 복귀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게 복귀가 되려면 에덴동산에 추방당했던 그 이유를 이쪽에서 충분히 보상이 될 경우에만 복귀가 성립이 돼요. 예를 들어서 어떤 가정이 전세비용 천만 원 못 올려줘서 빌라에서 쫓겨났다면, 자기 아들에게 “여기가 우리가 살던 집이야.” “살던 집이면 왜 다시 못 돌아가는데.” “그것은 돈 천만 원이 없어서 못 들어가는 거야.” “그럼 천만 원 있으면 들어갈 수 있지?” 천만 원 있으면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사는 걸 실패했으면 그냥 못 들어가요. 실패한 그것이 상쇄가 되는 다른 요소가 있을 경우에는 복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인간들이 이쪽에서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도가 성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에서 천만 원 없어서 쫓길 때는 빌라에서 살던 내 몸이나 쫓겨난 몸이나 동일한 몸이기 때문에 천만 원 있으면 들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나왔을 때 우리의 생각, 사고방식, 우리 몸, 모든 것을 처음에 에덴동산에 살 때의 수준으로 유지가 안 돼요. 날이 갈수록 점점 늙어가고 흙이 돼가고 있고 모든 게 망가지는 입장에서 멀쩡해도 안 되는 판에 다시 에덴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래서 한 번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길을 차단했잖아요. 이 말은 선악과나무를 훼손했으면 훼손한 것을 원상복귀해서 그 다음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능력과 자질과 기술, 그러한 지혜가 인간에게는 용납이 안 돼요. 하나님께서 뭉개버리고 없애버렸습니다. 한 번 떠났으면 두 번 다시 그 장소에 돌아올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떠났으면 인간은 다시 돌아가겠다는 집착을 계속 갖게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에덴동산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따로 분리했지만 그 에덴동산을 인간이 저주받은 공간까지 확장시켜 놓습니다. 확장시키는 방식이 바로 죽음이 따라오는 거예요. 죽음이 온다는 말은 인간이 사적으로 개성 있게 갖고 있는 구원의 어떤 조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 많이 했습니다.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교회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각자 내세우는 구원의 조건을 하나님께서 허락을 안 해요. 구원 조건이라고 인간 쪽에서 개인적으로 나오는 것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가 방금 두 가지로 인간을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이 돌아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가인부터 시작했어요. 가인이 제사할 때 제사 대상이 누구에요? 신이지요. 자꾸 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신과 교류하고 싶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뜻하는 겁니다.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신과 그의 세계를 잊을 수가 없어요. 종교란 인간에게 영원한 자기 투영이기 때문에 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에덴동산의 사건의 확장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에덴동산의 사건이 계속해서 인간이 있는 곳에 찾아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사건을 확장시키고자 하시고 인간은 돌아올 수 없다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건들이 계속 유발돼야 되는 겁니다.
전체 하나님의 일을 피리라고 보면, 피리에 구멍들이 나있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피리 속을 통과하게 하시면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 들어가서 언약 구성마다 튀어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동행했다는 티를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언약이 되는 겁니다.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고 창세기 5장에 나오지요.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났지요. 에녹의 4대손이 그 이름도 유명한 노아지요. 노아의 고조할아버지가 에녹이에요.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했을 때의 효과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이런 게 참 어려워요. 시간이 어디까지 흘러가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까지 흘러가요.
여기서 에녹과 노아 사이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죽음을 보지 않았잖아요. 에녹은 본인이 아담의 어떤 효과가 아니고 후대, 4대손 노아의 효과를 미리 앞당겨서 맛보는 식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가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노아 때 땅이 안식하거든요.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방주를 지어서 구원받은 것은 노아의 후손, 그 다음의 피리 구원, 아브라함(샘의 자손)의 축복의 효과를 거꾸로 노아가 부여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뒤에 나오는 자식의 효과를 미리 앞당겨서 맛보는 식으로 어디를 향하여 갑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 나올 때까지. 어떤 이는 노아의 자손이 될 수 있고, 아담의 자손이 될 수 있지요. 아담은 예수님의 모형이니까. 십자가가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가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없으면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돼버려요. 울산바닥에 주님이 어디 계셔? 언약이 없으면 동일하게 돼버려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을 알게 하시면 십자가 사건의 효과가 어디서부터 구원되느냐 하면, 죽음으로부터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피리 안에서, 울산바닥에서 대구바닥에서 이걸 깨닫게 하는 흔적들을 주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시내산 이야기가 모세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시내산을 만나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질문은 이겁니다. 지금 시내산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시내산이 반드시 포함되고 시내산을 만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어요. 왜냐하면 시내산에서 자기가 들통 나야 되니까. 그리고 시내산에서는 구원자가 부재하니까. 보이질 않아요. 달랑 자기들끼리만 남았어요. 그렇게 남은 상태에서 자기의 어두운 본색을 드러내고, 시내산 위에 있는 구원자가 가져오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뭘 가져옵니까? 모세가 언약을 가져오거든요. 아까 피리.
언약이 부재했을 때 우리의 본모습과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에덴동산 사건의 확장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 죽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일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하는 겁니다.
시내산 지상에서 인간들은,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고 그들은 아론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지요. 금송아지를 왜 만듭니까? 그건 모세는 부재해도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는 얼마나 경건해요. 어떻습니까? 오직 하나님만 찾는 종교적인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으로 수많은 무리가 일치된 마음을 가졌어요. 인간들끼리만 있으면 안 되고 반드시 신이 우리와 함께 있어야 돼. 그것이 우리의 여망이고 우리의 소망이라고 일치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시내산이 왔을 때 신을 믿는 마지막 최종 모습을 보인 겁니다. 막다른 절벽, 한계에 부딪친 거예요. 인도하는 자는 없고 자기들이 알기는 신은 존재하니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고백하고 그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너나 할 것 없이 다 동조한 거예요. 한결같이. 그런데 막상 그들이 신과 자기와 매개, 중재, 연결시키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것, 나무나 짚이 아닌 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금은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 있는 거잖아요.
시내산이 어디 있느냐 하면, 우리 쪽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다 집결합시다. 그게 우상이에요.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게 헌금하기, 전도하기, 예배참석하기, 예배당세우기, 열심히 봉사하기, 그런 것들은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금가락지들이에요. 정말 귀한 것들이에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구원의 조건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그 말이 성립되려면 네가 할 수 있는 것 다 내놓으라. 자리를 비켜줘요. 모세를 산 위로 불러놓고 모세가 없는 부재 상태에서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것으로 신을 섬기는 고유의 방식들, 그것도 아론이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동의했어요.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어요. 모세가 산 위로 오르기 전에 그들과 함께 있었지요. 그러니까 모세는 있으나마나 들러리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있을 때는 그 사랑을 몰라요. 제가 대구에서 그런 설교했지요. 사랑이란 헤어졌을 때 비로소 사랑을 느낀다 했어요. 아주 심오한? 두 번만 심오했다가는 이혼 다하겠다만. 평소에 같이 있을 때는 사랑을 몰라요. 잠시 여행 갔을 때도 사랑을 몰라요.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때 그리움, 그게 사랑이에요. 그런데 안 돌아오겠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비가 철철 오는데 문밖에 서있더란 말이죠. 신세 조져놓고 이제 찾아온 거예요. 그게 유명한 박강성의 [문밖에 있는 그대]의 가사내용이 그래요.
※[문밖에 있는 그대] 박강성
그대 사랑했던 건 오래전의 얘기지
노을처럼 피어나 가슴 태우던 사랑
그대 떠나가던 밤 모드 잊으라시며
마지막 눈길마저 외면하던 사람이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오늘은 거기서 울지만
그렇게 버려둔 내마음속에 어떻게 사랑이 남아요
한 번 떠난 사랑은 내 마음에 없어요 추억도 없어요
문밖에 있는 그대 눈물 거두어요
가슴 아픈 사랑은 이제는 잊어요
모세가 함께 있을 때는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모세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한 겁니다. 그 문장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달리 할까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이게 틀린 겁니다. 그게 틀렸다면 맞는 문장은 뭡니까? 맞는 문장은 안 생겨요. 우리가 어떤 문장을 외우고 성경을 천 독, 만 독을 해도 성경문자 그대로 외워도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오늘 강의의 결론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예수 믿어도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아요. 사람이 예수 믿는 그것, 오해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내가 하나님께 내세울 수 있는 구원의 조건인데 그것은 시내산 안 가고 주님이 함께 있다고 우리가 그것만 상상하기 때문에 내 믿음이 괜찮은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있는 믿음 탈탈 털어내야 됩니다.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음을 혹독하게 느낄 때 동시에 주님이 안 계신 걸 느끼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때 우리가 그동안 주님한테 기대했고 주님을 의지했던 내 믿음도 다 부도수표라는 걸 혹독하게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시내산 앞에 오는 거예요. 탈탈 털리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시내산 만나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는 꼭 베드로 같아요. 늘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나를 건져내리라고 생각한 겁니다. 왜? 주님이 나를 건져내는 방식을 나도 안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였어요. 나와 함께 있는 주님이 나를 구원할 거니까 나는 그걸 믿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구원하는 걸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방식을 사용해서 주님이 구원하는 걸 믿고 싶다는 거예요.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는 겁니다.
같이 있을 때는 사랑을 몰라요. 여행 갈 때도 몰라요. 완전히 바이바이 할 그때 사랑하는 자의 빈자리가 넘쳐날 때 그 빈자리가 자신의 인생을 점령할 때, 정말 외로워서 보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게 성경적인 방법이에요. 아내가 그리워 자살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아내를 사랑했다는 사람으로 들통 날 겁니다. 주님께서 같이 죽자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주님부터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우리가 주님 죽은 방식으로만 죽어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방식 있잖아요. 한강에 뛰어내리고, 약 먹고, 그러면 안 돼요. 주님이 죽으시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 방식에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내가 진짜 장담합니다.
그럼 어떻게 죽이십니까? 살려주시면서 지금 죽이고 계셔요. 간단하지요. 오늘도 살았지요. 이게 죽이시는 방법입니다.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시간관념은 출생하고 장례식이잖아요. 주님은 장례식부터 먼저 있고 장례식이 왜 필요한지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게 시내산 꼭대기에서 흐르는 시간과 시내산 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 서로 반대로 흘러가고 있거든요.
시내산에서 준비된 것은 언약입니다. 그래서 시내산을 만나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말은, 언약을 만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다. 그런데 그 언약이 방주였던가요? 그건 노아 때고. 그러면 시내산에서의 언약은 뭐냐? 그것은 모세의 부재, 모세가 사라진 상태에서 우리가 품고 있는 속내를 탈탈 다 털어내야 돼요. 다 털어져야 돼요. 다 털어내는 게 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다 끌어 모아서 주여, 받으시라는 그 짓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것은 5절입니다.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할 건 다했어. 어디 본 건 있는 모양이라. 여러분이 자꾸 모세를 생각하니까 느낌을 모르는데 지금 모세는 없어졌어요. 자기들끼리 수많은 군중들의 의견이 일치된 다수가 진리라고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다수가 한 마음으로 제단을 쌓을 때 그중에 누구라도 이건 아니라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성의와 정성을 다하되 이름이 뭐냐 하면,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이니라” 여호와 이름을 어디서 들은 모양이라.
다시 말해서 시내산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이 내세우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뭔 내세워야 합니까?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거든요. 상한 심령이니까 회개 주일 지킬까요? 그게 아니고 상한 심령 척하는 것 말고 진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알게 된 상한 심령, 그것은 주님께서 자리를 피해줘야 됩니다. 우리의 본색이 다 나오도록.
정성을 다한 금송아지 있지요. 그 다음에 4절에 보세요.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애굽 땅에서 인도했다니까 과거의 하나님의 사건도 머리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다 알지요. 그들이 경험했잖아요.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놀라운 사실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 몇 년 지났다고 모르겠어요. 얼마 전의 이야기인데 다 기억하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한 걸 다 알고 있지요. 단지 없는 건 모세가 부재하다는 것. 이제는 모세 없이도 하나님과 교제할 것 같은 그러한 자신만만한 생각이 들었단 말이지요. 그런 환경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빼내서 그들만의 잔치로, 그들만의 본색이 드러나는 자리를 일부러 만들어준 거예요.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어떤 아이디어가 총집결되는지를 자리 비켜줄 테니까 너희끼리 만들어보란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이 만들어지는 요소가 그렇게 아주 막돼먹은 게 아니에요. 굉장히 경건하고 거룩한 거예요. 요즘 예배당 지을 때 남는 푼돈으로 짓는 게 아닙니다. 전세금 빼고, 정말 귀한 돈 정성을 모아서 성의를 다해서 먹을 것 안 먹으면서 진짜 누가누가 믿음 좋은지 시합하듯이 그런 식으로 했거든요. 그게 쌓이면 쌓일수록 그게 우상이 돼요. 작년인가 우연히 새순교회 재정장부를 보니까 남는 게 없어. 그게 우상이 아닌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상한 심령들은 실패를 해야 되는데, 베드로처럼 실패해야 되는데, 우리가 생각한 천국은 천국이 아님을 알아야 되는데 내가 익히 아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 삐져나온 우상의 모양새에요. 시내산 만나지 않고서는 우리는 구원받을 길 없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목숨 바치겠다는 객기를 부리지 아니하면 그는 복음도 몰라요. 자기가 마음껏 객기를 부리도록 주께서 기회를 준 겁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 다 해봐라. 그것 아니거든. 그럼 어떻게 됩니까? 구원은 언약에서 나오는 언약 고유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가 언약을 가진 능력이 아니고 언약 고유의 능력.
여러분이 달을 볼 때 달아달아 보름달아 달빛을 비춰달라니까 비춰주던가요? 달은 우리 말 안 듣고 그냥 비춰주잖아요. 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언약아, 언약아 날 구원해줘.” 하면 언약이 구원해주려고 달려옵니까? 택배 기사입니까? 호출하면 오는 콜택시에요?
언약 고유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언약 안에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들어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께로 난 자가 있어요. 가락교회에서 이야기할 때 우리가 거듭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자로 교체가 되는 거예요. 혈통과 육으로 나지 않고. 그러니까 혈통과 육은 죽어야 돼요. 혈통과 육은 죽을 만해서 죽이는 거예요. 기껏해야 금신상이나 섬기기 때문에. 죽을 때 죽더라고 내가 왜 죽는지 알고 죽어야 그걸 바탕으로 해서 언약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언약, 십자가, 예수님 이야기하면 기존에 있는 것 가운데 비빔밥처럼 집어넣는 거예요. 만약에 십자가가 미나리라면 콩나물, 고추장 있는데 미나리를 넣고 그냥 섞어버려요.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미나리라면 우리가 비빈 걸 다 버리고 소복이 미나리만 담길 때 그게 미나리 밥, 미나리 먹은 거예요. 우리는 빈 그릇이고 오직 그곳에 주님의 언약의 완성인 예수님의 살과 피가 가득 있는 우리는 그냥 껍데기 그릇으로 몸만 제공할 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죠.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결국 구원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방해하는데 그 이유가, 나는 항상 나의 것을 일단 깔아놓고 나의 것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지 시나리오를 쓰고 있거든요. “주님이여, 나의 것이 천국에 도달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가봐야 천국이 아니고 지옥입니다.
시내산에 가서 나의 것이 상해버린 것이 돼요. 상한 심령이니까. 그냥 심령이 아니고 상한 심령이지요. 여러분 자식들에게 상한 음식 먹일 수 있습니까? 냉장고에 있는 우유 유통기한 지났는데 하면 아빠 줘라 하지요. 그런데 자식한데는 뭐든지 음식 할 때 조사해서 행여나 해가 갈까 해서 상한 걸 안 주지요. 주님은 상한 것만 먹습니다. 주님은 식성도 희한하지요. 우리는 자존심이 세서 오늘도 안 상하기로, 오늘도 교회 나오는 착한 교인임을 자부하면서 나오잖아요. 착한 사람으로 집에 가면 안 됩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기 때문에 푹 삭아서 가야 돼요.
이 교회를 새순교회라 하지 말고 홍어교회, 푹 삭힌 홍어교회. 따라서 김치와 돼지고기 좀 비치해서 삭힌 홍어와 같이, 참 독하지요. 쏘잖아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통해서 설교시간에 내가 피우는 독한 우상숭배의 지독한 악취를 즐기기 바랍니다. 내 속에서 뿜어내는 악취, 상한 심령. 그걸 나의 것으로 간주하는 나, 나를 붙이는 거예요. 나의 것이 있기에 그것이 곧 나다. 나는 나의 것으로 인하여 구축된 영토가 바로 나의 영토다. 그러한 것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거기다 예수를 집어넣어도 나를 위한 예수, 삼위일체를 집어넣고, 교회, 천국, 축복, 뭘 집어넣어도 전부 다 ‘나’가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너무 쉬운 이야기했어요.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상한 심령 되려면 저주받으면 되겠다고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시도하고 노력해도 본인을 저주할 수 없고 저주받을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고 해서 받게 된 죽음과 저주는 단 한 분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만이 저주를 경험할 수 있어요.
그러면 가룟 유다가 받은 저주는 뭐냐? 그것은 예수님이 받은 저주를 앞당겨서 받았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아까 에녹 이야기할 때 노아가 받았던 안식, 노아 이름 자체가 안식이고, 노아도 하나님 동행해서 심판에서 건짐 받잖아요. 에녹은 기껏 안 죽은 거지만 노아는 심판에서부터 구원이에요. 어느 것이 구원의 내용에 가깝습니까? 에녹보다는 노아지요. 에녹이 구원받은 것은 노아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했지요.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했지요. 아브라함은 누굴 보기를 원했습니까? 아브라함도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지요. 엘리야도, 모세도 마찬가지고. 마찬가지로 저주받을 사람의 저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은 저주를 앞당겨서 받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제가 했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나님의 신이 사람들과 함께 안 하는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되기 때문에. 이들이 하나님의 신, 그러니까 성령이 함께 하지 않다는 내용이 창세기 6장에 나오지만 그 이유가 나오는 것은 신약, 로마서 8장에 나와요. 성령이 없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아까 피리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언약의 구멍의 최고의 마지막은 십자가라는 거예요. 십자가는 모든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앞의 모든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란 말이죠. 새 언약이라는 것이 그냥 새 언약부터? 아니에요. 새 언약이 소급해서 모든 것들이 새 언약을 위하여 이미 사전에 실시된 겁니다.
이번에 동계올림픽도 그렇고, 하계올림픽에서도 그렇고 개회식 하기 전에 이미 게임이 시작돼요. 어떤 종목에서는. 이번 소치올림픽에서도 개회식 하기 전에 아이스하키는 이미 했고. 참가국이 많을 때나 경기일정상 개회식 하기 전부터 예선전을 치루거든요. 완성되기 전에 준비돼왔다 이 말이죠.
그 준비된 중에 하나가 인간이 선악과 따먹어야 되는 이야기에요. 성경은 인간 구원하는 책이 아닙니다. 주님이 자신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깔아놓은 일꾼들입니다. 역할이고. 제가 지금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방인들 알아들으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방인들은 강의 처음부터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요.
이방인들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사람 여기 있고 신이 있잖아요. 그냥 정성 드리면 신과 교제 된다는 겁니다. 이게 가인의 제사입니다. 받으소서.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에요. 이건 개 같은 이방인들이고.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신이 있으면 언약이 있어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데 이걸 이야기하는 교회가 없어요. 이걸 이야기하면 교회가 안 되니까. 그저 자식 공부 잘하고, 사업도 해야 되니까 그냥 정화수 떠놓고 빌듯이 정성과 간절한 기도와 나의 낮아짐과 경건함과 착함을 보시고 받으시라는 거예요.
이쪽은 뭐냐? 그게 아니라~오. 이건 아니에요. 언약 내려놓고 언약만 올려요. 언약 던져놓고 걸려들면 당기는 겁니다. 언약 안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주님의 주 되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의 주 되심을 모르면 아들의 나라, 천국에 못 가요. 그런데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을 자기가 만들었어. 극락이라고. 에덴동산 회복이라고.
교회에서 회복이란 말을 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 실패에서 회복할 때는 반드시 여기에 이성이 들어가요. 회복을 실패한 상태에서 상상해내기 때문에 그 회복이 실재 회복될 상태가 아니라니까요. 인간이 망가진 상태에서 고통에서 면제된 어떤 상황, 멋들어진 유토피아를 그린다면 그것은 망가진 상태에서 유발된 역시 엉터리 같은 이상사회지 주님이 제시하는 천국은 아니라니까요. 제가 말을 어렵게 했지만 분명히 어려운 말은 아닌데 사람들이 이 말을 거부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전제 조건에 뭐가 있습니까? 실패, 망가졌음, 이걸 자꾸 전제로 깔아놓으니까 그 사람들이 이런 소리가 듣기 싫은 거예요.
얘가 이번에 고3인데 어떻게 좋은 대학? 하면, 그것이 바로 마귀가 시킨 일이라는 잔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그 교회는 갈 수가 없는 겁니다. 몸이 암에 걸려 말기인데 어떻게 낫게 해달라고 하면, 암에 걸렸으니까 남들은 모르지만 우리 집안 식구는 나아야 된다는 그것이 마귀가 심어준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할까봐 복음 전하는 교회에 갈 수 없는 거예요. 물론 복음 전하는 교회 갈 수도 없지만 아예 오지 말라는 식으로 간판도 교회 있는 줄도 모르고.
왜 사람들이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해도 이런저런 핑계대면서 안 듣느냐 하면, 상한 심령이 되기 싫어서 그래요. 비록 내가 완전치 않고 뭔가 부족한 건 알지만 완전히 실패했다고는 말하지 말자. 약간의 여분의 희망이 있다면 희망의 불씨를 불면 다시 에덴동산으로 복귀가 가능한 어떤 희망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오늘도 고생스럽지만 이 울산바닥에서 살아보겠다는 그 가상한 의지를 왜 아예 사그리 짓밟느냐? 못 되도 너무 못 돼. 복음 아는 사람들은. 애초에 희망의 싹을 싹둑 잘라버려요.
사람이 술을 왜 먹는가? 사람이 술을 먹는 이유는, 자기가 비겁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술을 먹는다고 했어요. 내가 못 나지 않았다는 걸 과시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얼마나 비겁해요. 못 났으면 못 나면 되는데 못 나지 않았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그래서 술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같이 술 좋아하는 사람들과 섞이면 같이 굴러가니까 안 못 났잖아요. 뭔가 된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게 얼마나 허세입니까. 차라리 술을 안 마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용기도 없고 의지도 없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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