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산 140404
시내산 140404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한윤범(IP:14.♡.134.60)
14-04-09 11:22
201404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시내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2장부터 할 차례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시내산 밑에서 모세가 없는 상태에서 백성들이 가만있지 않았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없으니까 모세의 부재, 부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모세가 없다. 그러니까 구원자가 없을 때, 구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과연 구원자가 없느냐는 문제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울산이나 대구나 예수님이 계시다는 그런 이야기는 여러분 귀에 안 들리지요. 예수님이 해변에 나타났다는 이야기 안 하잖아요. 이렇게 메시아 부재의 환경에서 사람들은 과연 뭘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도 모세가 보이는 상태에서 시내산에 오게 함으로써 시내산 만남 없이 구원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 시내산은 뭐냐? 자신의 속내가 들통 나는 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들이 그동안 함께 지켜봤고 동행했다는 인도자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럼 시내산에서 모세가 부재하다는 말은, 모세가 다른 곳에 가버린 거예요. 시내산 위에 올라간 겁니다.
이런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만남을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부터 하겠어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정말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 우리가 구원받는데 인자가 왜 들려야 하느냐? 들리지 않으면 구원이 왜 안 되느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절) 그러니까 인자가 들리는 그 상황이 바로 우리가 구원되는 상황인 것을 수긍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는 거예요.
그 인자가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동료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인자의 본질이 분명치 않아요. 그런데 그 구원자가 우리를 떠나야 되는 겁니다. 부재해야 돼요. 우리와 같이 섞이면 안 돼요. 자기가 사시는 곳으로 가셔야 되는 겁니다. 가 주셔야 우리가 그곳에 가는 거지요. 이 말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정들었고 경험했고 느꼈던 모든 이 세계는 결국 털어야 될 그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뭐냐 하면, 왜 우리가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다 떨쳐버려야 될,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기에 주님도 떠났고 우리도 떠나야 될 세상인가를 출애굽을 통해서 시내산 만남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같은 취지로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내가 여기 있고 주님에게 여기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곳에 주님이 합류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도리어 우리 곁을 떠나고 우리가 우리 자리를 떠나서 주님 가신 곳에 합류가 될 때 그것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떠날 때 우리가 아는 곳으로 떠났느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거든요. 베드로 오해한 것 중에 제일 큰 오해가 뭐냐 하면, 자기 목숨 바치면 주님과 합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네가 목숨 바쳐도 네가 있을 처소가 없다는 거예요.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돼요. 주님과 함께 있으면 당연히 내 처소, 내 자리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주여, 제가 목숨 바쳐서 주와 함께 가겠습니다.” “안 돼.” 왜냐하면 처소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갑자기 이제 와서 처소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 말이죠. 이것은 사람들이 상상한 그 무엇은 전혀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영생이나 그 천국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교회 다니면서 어떤 상상을 하면서 어떤 천국을 상상해도 그것은 주님이 준비한 그 처소가 아닙니다.
그 이유가 정말 상당히 난해하지만 그냥 편하게 제가 이야기할게요. 이제는 쉽게 하려고 해도 내 능력이 안 되서 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에덴동산에 사람이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이미 떨어졌다. 이걸 타락이라 하거든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다른 동네, 여긴 저주가 기다려요. 저주가 있는 동네에서 아담과 와가 살았어요.
사람은 에덴동산을 생각하거든요. 자기가 추방이 되었으면 다시 에덴동산으로 복귀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게 복귀가 되려면 에덴동산에 추방당했던 그 이유를 이쪽에서 충분히 보상이 될 경우에만 복귀가 성립이 돼요. 예를 들어서 어떤 가정이 전세비용 천만 원 못 올려줘서 빌라에서 쫓겨났다면, 자기 아들에게 “여기가 우리가 살던 집이야.” “살던 집이면 왜 다시 못 돌아가는데.” “그것은 돈 천만 원이 없어서 못 들어가는 거야.” “그럼 천만 원 있으면 들어갈 수 있지?” 천만 원 있으면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사는 걸 실패했으면 그냥 못 들어가요. 실패한 그것이 상쇄가 되는 다른 요소가 있을 경우에는 복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인간들이 이쪽에서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도가 성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에서 천만 원 없어서 쫓길 때는 빌라에서 살던 내 몸이나 쫓겨난 몸이나 동일한 몸이기 때문에 천만 원 있으면 들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나왔을 때 우리의 생각, 사고방식, 우리 몸, 모든 것을 처음에 에덴동산에 살 때의 수준으로 유지가 안 돼요. 날이 갈수록 점점 늙어가고 흙이 돼가고 있고 모든 게 망가지는 입장에서 멀쩡해도 안 되는 판에 다시 에덴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래서 한 번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길을 차단했잖아요. 이 말은 선악과나무를 훼손했으면 훼손한 것을 원상복귀해서 그 다음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능력과 자질과 기술, 그러한 지혜가 인간에게는 용납이 안 돼요. 하나님께서 뭉개버리고 없애버렸습니다. 한 번 떠났으면 두 번 다시 그 장소에 돌아올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떠났으면 인간은 다시 돌아가겠다는 집착을 계속 갖게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에덴동산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따로 분리했지만 그 에덴동산을 인간이 저주받은 공간까지 확장시켜 놓습니다. 확장시키는 방식이 바로 죽음이 따라오는 거예요. 죽음이 온다는 말은 인간이 사적으로 개성 있게 갖고 있는 구원의 어떤 조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 많이 했습니다.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교회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각자 내세우는 구원의 조건을 하나님께서 허락을 안 해요. 구원 조건이라고 인간 쪽에서 개인적으로 나오는 것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가 방금 두 가지로 인간을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이 돌아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가인부터 시작했어요. 가인이 제사할 때 제사 대상이 누구에요? 신이지요. 자꾸 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신과 교류하고 싶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뜻하는 겁니다.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신과 그의 세계를 잊을 수가 없어요. 종교란 인간에게 영원한 자기 투영이기 때문에 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에덴동산의 사건의 확장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에덴동산의 사건이 계속해서 인간이 있는 곳에 찾아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사건을 확장시키고자 하시고 인간은 돌아올 수 없다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건들이 계속 유발돼야 되는 겁니다.
전체 하나님의 일을 피리라고 보면, 피리에 구멍들이 나있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피리 속을 통과하게 하시면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 들어가서 언약 구성마다 튀어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동행했다는 티를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언약이 되는 겁니다.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고 창세기 5장에 나오지요.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났지요. 에녹의 4대손이 그 이름도 유명한 노아지요. 노아의 고조할아버지가 에녹이에요.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했을 때의 효과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이런 게 참 어려워요. 시간이 어디까지 흘러가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까지 흘러가요.
여기서 에녹과 노아 사이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죽음을 보지 않았잖아요. 에녹은 본인이 아담의 어떤 효과가 아니고 후대, 4대손 노아의 효과를 미리 앞당겨서 맛보는 식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가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노아 때 땅이 안식하거든요.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방주를 지어서 구원받은 것은 노아의 후손, 그 다음의 피리 구원, 아브라함(샘의 자손)의 축복의 효과를 거꾸로 노아가 부여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뒤에 나오는 자식의 효과를 미리 앞당겨서 맛보는 식으로 어디를 향하여 갑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 나올 때까지. 어떤 이는 노아의 자손이 될 수 있고, 아담의 자손이 될 수 있지요. 아담은 예수님의 모형이니까. 십자가가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가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없으면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돼버려요. 울산바닥에 주님이 어디 계셔? 언약이 없으면 동일하게 돼버려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을 알게 하시면 십자가 사건의 효과가 어디서부터 구원되느냐 하면, 죽음으로부터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피리 안에서, 울산바닥에서 대구바닥에서 이걸 깨닫게 하는 흔적들을 주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시내산 이야기가 모세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시내산을 만나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질문은 이겁니다. 지금 시내산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시내산이 반드시 포함되고 시내산을 만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어요. 왜냐하면 시내산에서 자기가 들통 나야 되니까. 그리고 시내산에서는 구원자가 부재하니까. 보이질 않아요. 달랑 자기들끼리만 남았어요. 그렇게 남은 상태에서 자기의 어두운 본색을 드러내고, 시내산 위에 있는 구원자가 가져오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뭘 가져옵니까? 모세가 언약을 가져오거든요. 아까 피리.
언약이 부재했을 때 우리의 본모습과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에덴동산 사건의 확장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 죽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일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하는 겁니다.
시내산 지상에서 인간들은,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고 그들은 아론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지요. 금송아지를 왜 만듭니까? 그건 모세는 부재해도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는 얼마나 경건해요. 어떻습니까? 오직 하나님만 찾는 종교적인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으로 수많은 무리가 일치된 마음을 가졌어요. 인간들끼리만 있으면 안 되고 반드시 신이 우리와 함께 있어야 돼. 그것이 우리의 여망이고 우리의 소망이라고 일치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시내산이 왔을 때 신을 믿는 마지막 최종 모습을 보인 겁니다. 막다른 절벽, 한계에 부딪친 거예요. 인도하는 자는 없고 자기들이 알기는 신은 존재하니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고백하고 그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너나 할 것 없이 다 동조한 거예요. 한결같이. 그런데 막상 그들이 신과 자기와 매개, 중재, 연결시키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것, 나무나 짚이 아닌 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금은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 있는 거잖아요.
시내산이 어디 있느냐 하면, 우리 쪽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다 집결합시다. 그게 우상이에요.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게 헌금하기, 전도하기, 예배참석하기, 예배당세우기, 열심히 봉사하기, 그런 것들은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금가락지들이에요. 정말 귀한 것들이에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구원의 조건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그 말이 성립되려면 네가 할 수 있는 것 다 내놓으라. 자리를 비켜줘요. 모세를 산 위로 불러놓고 모세가 없는 부재 상태에서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것으로 신을 섬기는 고유의 방식들, 그것도 아론이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동의했어요.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어요. 모세가 산 위로 오르기 전에 그들과 함께 있었지요. 그러니까 모세는 있으나마나 들러리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있을 때는 그 사랑을 몰라요. 제가 대구에서 그런 설교했지요. 사랑이란 헤어졌을 때 비로소 사랑을 느낀다 했어요. 아주 심오한? 두 번만 심오했다가는 이혼 다하겠다만. 평소에 같이 있을 때는 사랑을 몰라요. 잠시 여행 갔을 때도 사랑을 몰라요.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때 그리움, 그게 사랑이에요. 그런데 안 돌아오겠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비가 철철 오는데 문밖에 서있더란 말이죠. 신세 조져놓고 이제 찾아온 거예요. 그게 유명한 박강성의 [문밖에 있는 그대]의 가사내용이 그래요.
※[문밖에 있는 그대] 박강성
그대 사랑했던 건 오래전의 얘기지
노을처럼 피어나 가슴 태우던 사랑
그대 떠나가던 밤 모드 잊으라시며
마지막 눈길마저 외면하던 사람이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오늘은 거기서 울지만
그렇게 버려둔 내마음속에 어떻게 사랑이 남아요
한 번 떠난 사랑은 내 마음에 없어요 추억도 없어요
문밖에 있는 그대 눈물 거두어요
가슴 아픈 사랑은 이제는 잊어요
모세가 함께 있을 때는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모세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한 겁니다. 그 문장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달리 할까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이게 틀린 겁니다. 그게 틀렸다면 맞는 문장은 뭡니까? 맞는 문장은 안 생겨요. 우리가 어떤 문장을 외우고 성경을 천 독, 만 독을 해도 성경문자 그대로 외워도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오늘 강의의 결론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예수 믿어도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아요. 사람이 예수 믿는 그것, 오해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내가 하나님께 내세울 수 있는 구원의 조건인데 그것은 시내산 안 가고 주님이 함께 있다고 우리가 그것만 상상하기 때문에 내 믿음이 괜찮은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있는 믿음 탈탈 털어내야 됩니다.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음을 혹독하게 느낄 때 동시에 주님이 안 계신 걸 느끼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때 우리가 그동안 주님한테 기대했고 주님을 의지했던 내 믿음도 다 부도수표라는 걸 혹독하게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시내산 앞에 오는 거예요. 탈탈 털리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시내산 만나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는 꼭 베드로 같아요. 늘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나를 건져내리라고 생각한 겁니다. 왜? 주님이 나를 건져내는 방식을 나도 안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였어요. 나와 함께 있는 주님이 나를 구원할 거니까 나는 그걸 믿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구원하는 걸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방식을 사용해서 주님이 구원하는 걸 믿고 싶다는 거예요.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는 겁니다.
같이 있을 때는 사랑을 몰라요. 여행 갈 때도 몰라요. 완전히 바이바이 할 그때 사랑하는 자의 빈자리가 넘쳐날 때 그 빈자리가 자신의 인생을 점령할 때, 정말 외로워서 보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게 성경적인 방법이에요. 아내가 그리워 자살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아내를 사랑했다는 사람으로 들통 날 겁니다. 주님께서 같이 죽자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주님부터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우리가 주님 죽은 방식으로만 죽어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방식 있잖아요. 한강에 뛰어내리고, 약 먹고, 그러면 안 돼요. 주님이 죽으시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 방식에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내가 진짜 장담합니다.
그럼 어떻게 죽이십니까? 살려주시면서 지금 죽이고 계셔요. 간단하지요. 오늘도 살았지요. 이게 죽이시는 방법입니다.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시간관념은 출생하고 장례식이잖아요. 주님은 장례식부터 먼저 있고 장례식이 왜 필요한지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게 시내산 꼭대기에서 흐르는 시간과 시내산 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 서로 반대로 흘러가고 있거든요.
시내산에서 준비된 것은 언약입니다. 그래서 시내산을 만나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말은, 언약을 만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다. 그런데 그 언약이 방주였던가요? 그건 노아 때고. 그러면 시내산에서의 언약은 뭐냐? 그것은 모세의 부재, 모세가 사라진 상태에서 우리가 품고 있는 속내를 탈탈 다 털어내야 돼요. 다 털어져야 돼요. 다 털어내는 게 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다 끌어 모아서 주여, 받으시라는 그 짓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것은 5절입니다.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할 건 다했어. 어디 본 건 있는 모양이라. 여러분이 자꾸 모세를 생각하니까 느낌을 모르는데 지금 모세는 없어졌어요. 자기들끼리 수많은 군중들의 의견이 일치된 다수가 진리라고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다수가 한 마음으로 제단을 쌓을 때 그중에 누구라도 이건 아니라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성의와 정성을 다하되 이름이 뭐냐 하면,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이니라” 여호와 이름을 어디서 들은 모양이라.
다시 말해서 시내산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이 내세우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뭔 내세워야 합니까?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거든요. 상한 심령이니까 회개 주일 지킬까요? 그게 아니고 상한 심령 척하는 것 말고 진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알게 된 상한 심령, 그것은 주님께서 자리를 피해줘야 됩니다. 우리의 본색이 다 나오도록.
정성을 다한 금송아지 있지요. 그 다음에 4절에 보세요.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애굽 땅에서 인도했다니까 과거의 하나님의 사건도 머리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다 알지요. 그들이 경험했잖아요.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놀라운 사실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 몇 년 지났다고 모르겠어요. 얼마 전의 이야기인데 다 기억하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한 걸 다 알고 있지요. 단지 없는 건 모세가 부재하다는 것. 이제는 모세 없이도 하나님과 교제할 것 같은 그러한 자신만만한 생각이 들었단 말이지요. 그런 환경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빼내서 그들만의 잔치로, 그들만의 본색이 드러나는 자리를 일부러 만들어준 거예요.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어떤 아이디어가 총집결되는지를 자리 비켜줄 테니까 너희끼리 만들어보란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이 만들어지는 요소가 그렇게 아주 막돼먹은 게 아니에요. 굉장히 경건하고 거룩한 거예요. 요즘 예배당 지을 때 남는 푼돈으로 짓는 게 아닙니다. 전세금 빼고, 정말 귀한 돈 정성을 모아서 성의를 다해서 먹을 것 안 먹으면서 진짜 누가누가 믿음 좋은지 시합하듯이 그런 식으로 했거든요. 그게 쌓이면 쌓일수록 그게 우상이 돼요. 작년인가 우연히 새순교회 재정장부를 보니까 남는 게 없어. 그게 우상이 아닌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상한 심령들은 실패를 해야 되는데, 베드로처럼 실패해야 되는데, 우리가 생각한 천국은 천국이 아님을 알아야 되는데 내가 익히 아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 삐져나온 우상의 모양새에요. 시내산 만나지 않고서는 우리는 구원받을 길 없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목숨 바치겠다는 객기를 부리지 아니하면 그는 복음도 몰라요. 자기가 마음껏 객기를 부리도록 주께서 기회를 준 겁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 다 해봐라. 그것 아니거든. 그럼 어떻게 됩니까? 구원은 언약에서 나오는 언약 고유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가 언약을 가진 능력이 아니고 언약 고유의 능력.
여러분이 달을 볼 때 달아달아 보름달아 달빛을 비춰달라니까 비춰주던가요? 달은 우리 말 안 듣고 그냥 비춰주잖아요. 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언약아, 언약아 날 구원해줘.” 하면 언약이 구원해주려고 달려옵니까? 택배 기사입니까? 호출하면 오는 콜택시에요?
언약 고유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언약 안에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들어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께로 난 자가 있어요. 가락교회에서 이야기할 때 우리가 거듭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자로 교체가 되는 거예요. 혈통과 육으로 나지 않고. 그러니까 혈통과 육은 죽어야 돼요. 혈통과 육은 죽을 만해서 죽이는 거예요. 기껏해야 금신상이나 섬기기 때문에. 죽을 때 죽더라고 내가 왜 죽는지 알고 죽어야 그걸 바탕으로 해서 언약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언약, 십자가, 예수님 이야기하면 기존에 있는 것 가운데 비빔밥처럼 집어넣는 거예요. 만약에 십자가가 미나리라면 콩나물, 고추장 있는데 미나리를 넣고 그냥 섞어버려요.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미나리라면 우리가 비빈 걸 다 버리고 소복이 미나리만 담길 때 그게 미나리 밥, 미나리 먹은 거예요. 우리는 빈 그릇이고 오직 그곳에 주님의 언약의 완성인 예수님의 살과 피가 가득 있는 우리는 그냥 껍데기 그릇으로 몸만 제공할 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죠.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결국 구원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방해하는데 그 이유가, 나는 항상 나의 것을 일단 깔아놓고 나의 것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지 시나리오를 쓰고 있거든요. “주님이여, 나의 것이 천국에 도달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가봐야 천국이 아니고 지옥입니다.
시내산에 가서 나의 것이 상해버린 것이 돼요. 상한 심령이니까. 그냥 심령이 아니고 상한 심령이지요. 여러분 자식들에게 상한 음식 먹일 수 있습니까? 냉장고에 있는 우유 유통기한 지났는데 하면 아빠 줘라 하지요. 그런데 자식한데는 뭐든지 음식 할 때 조사해서 행여나 해가 갈까 해서 상한 걸 안 주지요. 주님은 상한 것만 먹습니다. 주님은 식성도 희한하지요. 우리는 자존심이 세서 오늘도 안 상하기로, 오늘도 교회 나오는 착한 교인임을 자부하면서 나오잖아요. 착한 사람으로 집에 가면 안 됩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기 때문에 푹 삭아서 가야 돼요.
이 교회를 새순교회라 하지 말고 홍어교회, 푹 삭힌 홍어교회. 따라서 김치와 돼지고기 좀 비치해서 삭힌 홍어와 같이, 참 독하지요. 쏘잖아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통해서 설교시간에 내가 피우는 독한 우상숭배의 지독한 악취를 즐기기 바랍니다. 내 속에서 뿜어내는 악취, 상한 심령. 그걸 나의 것으로 간주하는 나, 나를 붙이는 거예요. 나의 것이 있기에 그것이 곧 나다. 나는 나의 것으로 인하여 구축된 영토가 바로 나의 영토다. 그러한 것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거기다 예수를 집어넣어도 나를 위한 예수, 삼위일체를 집어넣고, 교회, 천국, 축복, 뭘 집어넣어도 전부 다 ‘나’가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너무 쉬운 이야기했어요.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상한 심령 되려면 저주받으면 되겠다고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시도하고 노력해도 본인을 저주할 수 없고 저주받을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고 해서 받게 된 죽음과 저주는 단 한 분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만이 저주를 경험할 수 있어요.
그러면 가룟 유다가 받은 저주는 뭐냐? 그것은 예수님이 받은 저주를 앞당겨서 받았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아까 에녹 이야기할 때 노아가 받았던 안식, 노아 이름 자체가 안식이고, 노아도 하나님 동행해서 심판에서 건짐 받잖아요. 에녹은 기껏 안 죽은 거지만 노아는 심판에서부터 구원이에요. 어느 것이 구원의 내용에 가깝습니까? 에녹보다는 노아지요. 에녹이 구원받은 것은 노아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했지요.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했지요. 아브라함은 누굴 보기를 원했습니까? 아브라함도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지요. 엘리야도, 모세도 마찬가지고. 마찬가지로 저주받을 사람의 저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은 저주를 앞당겨서 받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제가 했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나님의 신이 사람들과 함께 안 하는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되기 때문에. 이들이 하나님의 신, 그러니까 성령이 함께 하지 않다는 내용이 창세기 6장에 나오지만 그 이유가 나오는 것은 신약, 로마서 8장에 나와요. 성령이 없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아까 피리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언약의 구멍의 최고의 마지막은 십자가라는 거예요. 십자가는 모든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앞의 모든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란 말이죠. 새 언약이라는 것이 그냥 새 언약부터? 아니에요. 새 언약이 소급해서 모든 것들이 새 언약을 위하여 이미 사전에 실시된 겁니다.
이번에 동계올림픽도 그렇고, 하계올림픽에서도 그렇고 개회식 하기 전에 이미 게임이 시작돼요. 어떤 종목에서는. 이번 소치올림픽에서도 개회식 하기 전에 아이스하키는 이미 했고. 참가국이 많을 때나 경기일정상 개회식 하기 전부터 예선전을 치루거든요. 완성되기 전에 준비돼왔다 이 말이죠.
그 준비된 중에 하나가 인간이 선악과 따먹어야 되는 이야기에요. 성경은 인간 구원하는 책이 아닙니다. 주님이 자신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깔아놓은 일꾼들입니다. 역할이고. 제가 지금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방인들 알아들으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방인들은 강의 처음부터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요.
이방인들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사람 여기 있고 신이 있잖아요. 그냥 정성 드리면 신과 교제 된다는 겁니다. 이게 가인의 제사입니다. 받으소서.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에요. 이건 개 같은 이방인들이고.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신이 있으면 언약이 있어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데 이걸 이야기하는 교회가 없어요. 이걸 이야기하면 교회가 안 되니까. 그저 자식 공부 잘하고, 사업도 해야 되니까 그냥 정화수 떠놓고 빌듯이 정성과 간절한 기도와 나의 낮아짐과 경건함과 착함을 보시고 받으시라는 거예요.
이쪽은 뭐냐? 그게 아니라~오. 이건 아니에요. 언약 내려놓고 언약만 올려요. 언약 던져놓고 걸려들면 당기는 겁니다. 언약 안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주님의 주 되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의 주 되심을 모르면 아들의 나라, 천국에 못 가요. 그런데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을 자기가 만들었어. 극락이라고. 에덴동산 회복이라고.
교회에서 회복이란 말을 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 실패에서 회복할 때는 반드시 여기에 이성이 들어가요. 회복을 실패한 상태에서 상상해내기 때문에 그 회복이 실재 회복될 상태가 아니라니까요. 인간이 망가진 상태에서 고통에서 면제된 어떤 상황, 멋들어진 유토피아를 그린다면 그것은 망가진 상태에서 유발된 역시 엉터리 같은 이상사회지 주님이 제시하는 천국은 아니라니까요. 제가 말을 어렵게 했지만 분명히 어려운 말은 아닌데 사람들이 이 말을 거부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전제 조건에 뭐가 있습니까? 실패, 망가졌음, 이걸 자꾸 전제로 깔아놓으니까 그 사람들이 이런 소리가 듣기 싫은 거예요.
얘가 이번에 고3인데 어떻게 좋은 대학? 하면, 그것이 바로 마귀가 시킨 일이라는 잔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그 교회는 갈 수가 없는 겁니다. 몸이 암에 걸려 말기인데 어떻게 낫게 해달라고 하면, 암에 걸렸으니까 남들은 모르지만 우리 집안 식구는 나아야 된다는 그것이 마귀가 심어준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할까봐 복음 전하는 교회에 갈 수 없는 거예요. 물론 복음 전하는 교회 갈 수도 없지만 아예 오지 말라는 식으로 간판도 교회 있는 줄도 모르고.
왜 사람들이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해도 이런저런 핑계대면서 안 듣느냐 하면, 상한 심령이 되기 싫어서 그래요. 비록 내가 완전치 않고 뭔가 부족한 건 알지만 완전히 실패했다고는 말하지 말자. 약간의 여분의 희망이 있다면 희망의 불씨를 불면 다시 에덴동산으로 복귀가 가능한 어떤 희망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오늘도 고생스럽지만 이 울산바닥에서 살아보겠다는 그 가상한 의지를 왜 아예 사그리 짓밟느냐? 못 되도 너무 못 돼. 복음 아는 사람들은. 애초에 희망의 싹을 싹둑 잘라버려요.
사람이 술을 왜 먹는가? 사람이 술을 먹는 이유는, 자기가 비겁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술을 먹는다고 했어요. 내가 못 나지 않았다는 걸 과시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얼마나 비겁해요. 못 났으면 못 나면 되는데 못 나지 않았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그래서 술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같이 술 좋아하는 사람들과 섞이면 같이 굴러가니까 안 못 났잖아요. 뭔가 된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게 얼마나 허세입니까. 차라리 술을 안 마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용기도 없고 의지도 없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4-04-09 11:23
201404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시내산
(강의:이근호 목사)
아까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저주받고 싶다고 저주받는 게 아니고 저주받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저주가 주어지게 돼있습니다. “난 나쁜 짓했으니까 저주받아야지, 지옥 가야지.” 니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나는 지옥 가야지. 안 갑니다. 천국 가야 돼요. 창세전에.
기준은 뭐냐? 내가 하는 행동으로 어떤 평가받는 기준을 넘어서려면 시내산에 가야 됩니다. 지금 시내산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시내산의 의미를 놓쳐버렸어요. 왜냐하면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갔는데 사라져버렸어요. 이제는 모세가 없는 입장에서 말만 시내산 밑에 있을 뿐이에요. 시내산의 의미는 위에 계신 분이 합류해줘야 전체적으로 시내산 의미가 살아나는데 합류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내산 오나마나 상관없이 똑같은 입장에 있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그들이 모세와 함께 있을 때는 모세 말 잘 듣는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모세가 떠나도 자기 본색은 달라지지 않아요. 모세가 있어도 신앙, 안 생겨요. 모세가 떠나도 신앙, 안 생겨요. 안 생겨야 돼요. 그래야 언약 고유의 능력으로 구원받지요. 내가 신앙 만들어내면 안 돼요. 신앙 만들어내지 맙시다.
일반 교인들에게 묻고 싶어요. “복음 모르는 목사의 설교 듣고 평해보세요.” 그러면 대번 그래요. “모르겠는데요. 똑같은 데요. 그 차이를 모르겠는데요.” 이 말은 평소에 복음 아는 목사가 설교해도 다른 목사 설교한 것과 똑같은 태도가 유지된 겁니다. 복음 모르는 목사 있으나 그분 가고 다른 목사 오나 달라질 게 없어요.
만약에 서 목사님 다른 데 가시고 다른 목사 와서 하는 소리가, 여러분 헌금 안 해도 되고 봉사 안 해도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서 목사님과 똑같네. 이럽니다. 똑같지 않거든요. 그게 하나에 교회 키우기 위한 수법인 것을 몇 개월 안 가서 눈치 챌 겁니다. 눈치 채는 것도 성령 받은 사람이라야 눈치 채지만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눈치 채지도 못하지만. 그러니까 정말 이런 사태 만나면 참 답답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내산을 경유해야 구원받는데 시내산에서 인간은, 자기가 상한 심령이라는 것이 다 들통 나야 됩니다. 그게 하나의 절차입니다. 절차기 때문에 상한 심령 되면 부끄러운데. 정말 짜증나는데. 다른 길은 없을까? 다른 길은 일체 없어요. 그렇다면 시내산 밑에서 아론이 금송아지 만들고 여호와 절기라고 축제를 벌이는데 근본적으로 이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절대적으로 평가를 내릴 기준이 없다는 것. 전부 똑같은 인간이니까. 한 통속이 되었으니까 기준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우리는 복음적으로 사니까 세상에 물들지 않고 반듯하게 살지요. 사람이라는 것은 세상이 하나 됨을 요구할 때 거부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이 나를 호명하지 아니하면 밥도 못 먹어요. 호명이 뭐냐 하면, 취직함입니다. “아저씨, 이것 해볼래요?” 그게 호명이거든요. 호명되지 아니하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도 날 찾지 아니하면 나도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됩니다. 결국 그 마지막은 자살이에요. 나라는 것은 남을 경유하면서 내가 되거든요. 남이 뭐라고 해줄 때 “그래 맞아. 그게 나야.” 꼭 누가 나를 뭐라고 해줘야 비로소 내가 정립이 되거든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고, 3년 내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우편배달부도 안 오고, 자식들 전화 한 통 없을 때 이미 그 노인네는 죽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평가내릴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럼 어떻게 평가 내리느냐? 내가 했기에 내가 한 것은 무조건 정당한 겁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했는데 가룟 유다 입장에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올바른 행동이 자살이에요. “네가 내 사정을 알아?” 그게 그 말이거든요. “그러면 안 돼. 네가 내 사정을 알아? 너나 잘 하세요. 당신이 내 사정 알아?”
절대적인 기준은 누가 정한다는 말입니까? 그 기준을 내가 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문제점은 자기가 한 행동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그게 없지요. 그래서 저는 시내산을 막다른 한계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절벽이 있다면 그들은 차를 몰고 절벽까지 온 거예요. 더 갈 데가 없어요. 이게 출애굽기 32장의 상황입니다. 그들이 왜 차를 몰고 왔느냐?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네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라. 결국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내가 했기에 그래서 옳다는 겁니다. 남이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해도 안 옳아도 내가 한 것은 내가 했기에 무조건 최고에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평가는 뭐냐 하면, 위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돌을 떠밀고 있어요. 돌이 떨어지면 어디로 떨어지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박살내는 자리까지 오는 이 세트장이 시내산입니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시내산을 만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돌멩이 얻어맞을 때 내 모습은 뭐냐 하면, 내가 했기에 오는 거예요. 그걸 선택이라 하고 나의 선택을 인간의 자율성, 자유의자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었다. 그런데 누가, “집사님, 지옥 갑니다.”라고 했을 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말합니다. “저, 지옥 가는 줄 알아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지옥 가는 것 맞아요.” 이렇게 되는데 자기가 믿음을 유발시키고 만들어낸 사람 같으면, “나, 성경대로 예수 믿기 때문에 천국 가요.”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얻어맞을 방법밖에 없는데 그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더 진격할 데는 없어요. 여기가 끝이니까. 여기에 돌멩이가 던져지면서 내가 차라면, 나를 치고 돌멩이가 틈, 간격, 그리고 균열을 만들어내요. 내가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틈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와보니까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진작부터 죽었어야 돼야 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진작 죽어야 되고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나도 진작 죽어야 돼요. 그래서 장례식이 먼저고 출생은 나중이라니까요. 출생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진작 죽어야 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아버지께 저주받았잖아요. 그 저주를 진작 나도 같이 받아야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울산에 사시는 여러분들에게 매일같이 진작 죽도록 합니다. 어떻게? 때로는 비빔밥, 때로는 탕수욕, 때로는 간짜장 둘에 우동 한 그릇, 다음 달에는 피자가 예상되는데, 죽는 방법이. 자식 결혼시키고 죽이고, 결혼시킨 자식이 또 직장생활하면서 죽어가고 있고. 올해는 저렇게 까불며 죽어가고 있고, 커서는 교회도 안 나오고 숙제한다고 죽는 방법도 있고. 머리는 오십 넘어서 흰머리 나오고 갑자기 갱년기인가 하면서 죽고. 사도 바울처럼 매일같이 죽노라. 왜? 진작 죽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죽음은 내가 자살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죽이신다는 그것이 감사하지요. 우리도 이 시간에 팔자 좋아서 앉아서 성경공부하면서 죽지만 어떤 젊은 사람들은 잔업하고 죽어요. 보충수업하고 죽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발상을 나부터 출발하게 되면 성경해석 제로입니다. 전혀 안 됩니다. 그게 변명과 핑계의 연속이에요. 그런데 창세전의 예수님부터 출발하게 되면 내가 죽어가는 것도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 것을 주님이 알아서 죽여주시는 거예요. 언약 안에서 죽으면 안식이 되지만 언약 바깥에서 죽으면 지옥이 돼요. 언약 안에서 죽으면 천국이 되지만,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 언약 안에서 매일같이 죽으면 우리가 천국 가지만 언약 바깥에서 죽여 버리면 지옥 갑니다. 그걸 언약 완성으로 보면, 우리가 주 안에서 살든지 죽던지 영생이지만 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도 지옥이고 죽어도 지옥이에요. 사나죽으나 저주가 머물러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에게 저주가 임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자녀들아 부모한테 효도하기를 주 안에서 하라. 부모들아 자식을 훈계해도 주 안에서 하라. 그것은 출발점을 내 자식으로 출발하지 말고 주님의 자식, 언약의 자식으로 출발해서 주의 말씀으로 훈계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사실은 내가 이렇게 고생한다고 말하면 안 되고 그건 잘못이고. 주 안에서 따지면 주님이 이 길로 가셨구나. 주님이 이런 고생했구나. 주님이 잔업하다 손가락 다쳤구나. 모든 것이 주님이 겪었던 일을 우리가 뒤늦게 태어나서 뒤늦게 겪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확정된 사실이고 죽기 전에 주님 가신 길이나 밟아보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거든요. 말씀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면 그 죄인 역할을 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죄인을 부르러 왔다니까 부르시는 주님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자진해서 죄인으로 살아도 괜찮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왜 잘난 맛에 사십니까? 이게 언약 밖에서 했던 행세와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시내산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까지 서론이고 본격적으로 시내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1절에 보면, 모세가 양을 치는데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하나님의 산이거든요. 출애굽기 3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이지요. 10절에 보니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리고 뒤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12절)
이 대목을 읽은 취지가 뭐냐 하면, 시내산이 있다면 시내산의 검은 자락이 이미 홍해 이전에 애굽에서도 시내산 자락이 덮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갈 때 이유가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기 위해서 왔다는 거죠. 그런데 제가 방금 읽었던 것은 모세가 호렙산에 있으면서 “모세야 애굽으로 가거라.” 말 못한다고 핑계를 대지만 가기는 가요. 갈 때는 모세 혼자 갔지만 올 때는 네가 있던 그 장소로 백성들은 이끌고 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내산 자국이 발가락이 애굽까지 뻗어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 시내산 꼭대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를 보냈고 모세는 그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서 데리고 오는 입장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내산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죠. 우리가 이 강의 들으면 알아요. 정답이 시내산이 있느냐, 없느냐는 뭐로 확정하느냐 하면, 좌표상 어디냐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실시됐다는 그 흔적과 증거로 인정이 되는 영적 공간이 바로 지금의 시내산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한 맹세대로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출해서 이끌어 와서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게 하지요. 이 과정과 절차가 그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지만 지금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갇혀있는 자기 백성을 건져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바르면서 주님과 함께 경배하게 했다는 이 정황과 상황 속에 놓여있음을 아는 그 사람은 매일같이 시내산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삶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주 안에서 사는 삶이에요.
그래서 주 안에서 산다는 말은 언제냐고 묻는 게 아니고 주 안이라는 언약의 완성 상태를 누리고 만끽하면서 그 혜택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지금의 시내산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느낄 때 나는 구원받았다는 게 아니라 주께서 이 작업을 매일같이 되풀이한다는 사실입니다. 눈만 뜨면 이 작업을 또 되풀이하고, 눈만 뜨면 되풀이 하고. 눈만 뜨면 우리는 애굽에 갔다가 다시 구원받고, 눈만 뜨면 애굽에 갔다가 다시 구원받고.
볼펜 안에 스프링을 눌렀다가 놓으면 나오지요. 애굽에 있던 우리를 주께서 눌렀다가 놓으면 어느새 시내산에 있고. 다음에 또 누르게 되면 우리는 애굽에 있으면서 못 살겠습니다. 북한 핵 때문에 못 살겠고, 날씨 추워서 못 살겠다. 벚꽃놀이 가야 되는데 벚꽃 다 져버리고. 온갖 되도 않는 소리 다 하거든요. 그걸 놓으니까 내가 주 안에서 있으면서 엉뚱한 희망을 품고 있었네. 다음 날 되면 또 못 살겠다고 노래 부르고.
구약에서 시간, 공간이 제한되었던 것이 성령 안에서는 단순히 제한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그걸 반복했다는 것이 중요해요. 구약부터 신약 전체가 이미 완성된 것을 소유하란 말이 아니고 완성된 자체에 소유당해서 늘 스프링 뛰듯이 거기서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방금 이론상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체감합니까? 체감하는 방법은 시내산 밑에서 한 것도 포함돼 있잖아요. 뭘 했습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는 핑계를 매일같이 마지막에 어려울 때 그걸 이야기합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그때 뭘 보라 했습니까? 막다른 벽인 줄 알았는데 틈이 갈라지면서 완전히 막혀서 절망이라고 느꼈는데 그 틈에서 생수가 나오지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 분명히 물 길러 왔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양동이를 버리고 갔어요. 왜 그래요? 그 사람은 자기로 왔다가 주님의 것으로 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처음에 물 길러 올 때는 나의 것으로 왔다가 우물에 물 길러 왔다가 본인이 우물 됐어요. 생수가 나오니까. 주인이 바뀐 거예요. 주의 것으로 바뀐 거예요. 물론 그 뒤로 그 아줌마가 물 안 먹었다는 소리는 없어요. 물 길러 오겠지요. 하지만 그때는 물 없어도 괜찮아요. 이제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한 건했다, 추수했다고 해요. 너희들이 심지도 힘들이지도 애쓰지도 않은 그것은 너희들 없을 때 내가 추수했다. 추수했다는 말은, 그런 식으로만 건져낸다는 거예요.
지금도 주께서는 시내산을 반복시켜서 우리에게 해댑니다. 그래서 처음에 강의할 때는 듣기에 상당히 절망적이었지요. “홍해 건너와도 그것밖에 안 되는데 생활에 매여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 생활 하겠나. 난 포기했어.” 이제 와서 가만 보니까 느긋하게 볼 수 있지요. 그야말로 즐길 수 있지요. “이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네. 마치 옛날 이야기하듯이. 꼭 내 모습이네.” 느긋하게 성경을 볼 줄 알아야 돼요. 초조하고 다급하게 이것 못 지키면 지옥 간다고 부들부들 떨고. 이것은 아직 돌멩이를 덜 맞아서 그래요. 완전히 큰 돌멩이 맞아봐야 이제는 절망이라는 소리까지도 없어져야 돼요.
우리는 절망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뭔데 절망을 논해요. 사람이 절망을 논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깝다는 거예요. 내 인생 이렇게 망가지면 끝난다는 겁니다. 그 소리마저 싹 가도록 해야 돼요. 내가 이런 식으로 하는, 그 내가 깨져야 돼요. 이런 식이고 저런 식이고 간에 나란 자체가 산산조각 나고 주의 것으로 재조립돼야 돼요.
이 이야기하고 다음 진도 나갑시다. 시내산은 늘 조립돼야 한다. 매일같이 주께서 우리로 시내산 사건을 조립시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성령이 오셨거든요. 성령은 이미 이루어진 일을 반복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반복한다니까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십자가만 반복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의 긴 자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말씀화 되어야지 우리가 말씀 지키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가만있어도 그 자체가 말씀이 되어야지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고 해버리면 우리가 말씀 아닌 경우가 생기잖아요. 그러면 주님 말씀이, 우리가 무서워서 침투 못한 셈이 돼요.
달이 비추려고 오니까 어떤 사람이, “나는 달빛이 비추니까 알레르기 생겨.” 그러면 달이 그 사람을 비껴갑니까? 그쪽에서 무슨 소리하든지 간에 그냥 달이 비추듯이 말씀이 그래요.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만 지켰고 안 지킨 건 남겨두고 이런 건 없고 우리가 뭘 해도 말씀 안에 들어오게 돼요. 말씀 안에 들어있으면 시내산이 반복이 되고 시내산이 반복이 되면 우리는 기껏 난 최선을 다했다. 난 내 할 일 다했다는 그런 저주받을 짓만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을 팔짱 끼시고 느긋하게 봐주시라니까요. 회개해도 느긋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느긋하게 회개할 수 있는 그런 레벨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번도 회개를 쉬지 않고 늘 회개하시되 느긋하게 오징어 초장 찍어먹으면서 “내가 이런 거 먹을 자격도 안 돼. 맛있긴 맛있네.” 하면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즐기고 있다 오란 말이죠. 뭐가 답답하고 뭐가 무서워서 뭐가 겁나서 벌벌 떨면서 오느냐 말이죠. 그게 하나님이 즐기라고 준 분복인데. 느긋하게 즐기시되 그 자체가 회개가 되고, 그 자체가 참회가 되고, 그 자체가 환란이 되고, 그 자체로 고난 받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모습이 희한하지요. 온천에 가서 “시원~하다, 아이고 환란, 아이고 환란.” 이게 환란이에요. 환란이란 개가 안 되는 게 환란이에요.
언약 안에서 사는 모든 것은 천국에서 볼 때 전부 다 환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신 환란의 길을 반복해서 되풀이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했지요. 그 말씀 듣고 여러분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 본 되는 행동과, 본 되지 않는 행동을 나누려고 시도했지요. 그게 될 말입니까? 주 안에서 사시면 어떻게 살아도 그게 전부 다 십자가를 본받는 게 돼요. 왜? 여러분의 오기보다 말씀이 위력이 하얀 눈 덮듯이 합니다. 모든 걸 덮어버리지요. 지금도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주의 은혜가 덮치고 있습니다. 단 언약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느낌 아니까.
내일 아침 일어나면 우리는 또 어디 가있습니까? 애굽에 가있어요. 못 살겠다고 하는 거예요. 요새 티비 CF에 보면서 은혜를 받은 게 있어요. 별로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서로 잘 생겼다고 하잖아요. 바로 그거에요. 자기 조건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주 안에 있기 때문에.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창세전부터 잘 생겼어요.
그런데 그런 느긋함은 눈 뜨면 생기는 게 아니고 절차가 있어요. 애굽에서 실컷 고생하다가 홍해 건너와서 아직도 모자라. 시내산은 모세의 부재의 공간이지요. 울산은 주님의 부재의 공간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예수님이 안 보여요. 간혹 노숙자나 보이지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이 보여요. 우리 육체는 타인을 의식합니다. 남이 있을 때와 없을 때 행동이 달라요. 오래 사귄 사람과 처음 만난 사람은 행동이 다릅니다.
사돈 상견례 할 때 가관입니다. 누가 경우 바른지 시합하는 중입니다. 양반 인사하는 거예요. 구봉서, 배삼룡 코미디 하듯이. 그저 극치의 예의를 차립니다. 혹시 말 실수했을까봐. 말 한 것 때문에 파토날까봐. 저도 많이 당했습니다. 말실수했다고. “당신이 그 자리에서 복음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느냐. 혼사 깨려고 하느냐.” 잔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자리에요. 집에서 하는 행동과는 달라요. 천사 같아. 웃기지도 않아요. 참 가관이에요.
우리가 애굽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가관입니다. 주님은 손톱만큼도 의지 안 되고 지금 나한테 잘해줄 사람한테 얼마나 비비느냐. 금가락지 빼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때 꽝 하고 십자가, 언약의 돌멩이 얻어맞고 틈 갈라지고 그 틈에서 생수가 나와서 또다시 시내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나를 통해서 되풀이시키는 실존하시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주의 활동성에 우리는 온 마음으로 만끽하게 되지요. 못난 것에 대해서 잘 생겼다고.
언약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언약이 없는 것은 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인의 제사에요.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언약이 있는 겁니다. 이야기 끝나지 않았습니다. 언약이 있으니까 그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잘난 존재고, 언약을 아니까 우리의 죄는 감추어질 것이고, 우리의 본색은 처음부터 구원받을 만한 괜찮은 자질의 사람인 줄 오해를 했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시내산까지 끌어당겼습니다.
32장 9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들을 진멸하지요. 그러니까 모세가 나서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떠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게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애굽에서 나갈 때는 당당히 나가놓고 그들은 몰살할 때 그것을 고소해할 혜택을 어떻게 애굽 사람에게 줍니까. 하나님이 인도하고 다 죽여 버리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셔서 그 화를 거두어달라고 했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세 말 듣고 화를 거둔다고 할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세의 위상, 중보자의 위상인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우리가 기도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면 우리 입을 완전히 다물게 만들어놓고 따로 어떤 분이 아버지와 대화했기 때문에 구원이 온 거예요? 우리 말고 중보자가 하나님과 직접 독대해서 이야기했던 효과로 우리가 구원됐잖아요.
그럼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됐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되었다. 기도로 구원되었다. 인내해서 구원되었다. 회개해서 구원되었다. 다 아니지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됐잖아요. 거기에 우리 믿음이 왜 들어갑니까. 빼야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을 반복하기 위해서 믿음도 두 가지로 나누었어요. 우리 믿음과 주님의 믿음을 나란히 있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 사랑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사랑을 나란히 가게 합니다. 나란히 가게 하는 이유는 둘 중에 하나는 가짜에요. 누가 가짜겠습니까? 내 것이 가짜에요.
소망도 두 개의 소망이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들은 이미 우리가 보고 기대할 만한 것들을 끌어 모아서 간절히 기도하지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기도를 안 듣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우리 기도를 안 듣는다고 하니까 그러면 왜 기도하게 하시는가? 그거야 시내산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갖고 있는 걸 다 들통 내야 우리 기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언약의 개입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드높여줘야 주님이 주 되심의 일이 성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난 우리로 주님의 주 되심에 활용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교회 참석할 때는 상한 심령, 아주 군내 나는 홍어가 되라 했지요. 우리가 상해버린 상한 심령이 될 때 그게 활용도가 높다니까요.
방금 제가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두 가지가 생겼어요. 내가 스스로 상한 심령이 되는 방법이 하나 있을 것이고, 주님에 의해서 상한 심령이 되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주께서 말씀하실 때는 대립 되는 두 가지 경우가 함께 느끼도록 하시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죄인이라는 그것과 진짜 주님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경우가 다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못났습니다.” 한 40일 동안 해보세요.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40일째 드디어 우리가 참다, 참다 못 참고 화를 내지요. “더 이상 금식 못합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