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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140327-마15장29절(선물)50강 -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140327-마15장29절(선물)50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대전140327-마15장29절(선물)50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5장29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리 되어 있습니다. 여기 주인공이 누구지요? 예수님이 주인공이어야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주인공을 뭐로 보느냐 하면, 혜택 입은 소경과 벙어리와 불구자와 절뚝발이 이런 사람들이 이 사건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겁니다.

왜냐 하면 자, 예수님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많은 불구자들이 왔잖아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없고 전부다 예수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려면 불구자가 갔던 그 경로를 따라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혜택을 입었어요? 불구자들이 혜택을 입었잖아요. 그러면 자신은 뭘 느낍니까? 나도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런 혜택을 입을 때, 비로소 우리는 누구를 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만큼 중요한 분이고 우리한테 필요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크나 큰 오해지요.

왜냐 하면 벙어리가 말을 하잖아요. 그런데 불구자 아닌 사람은 뭐합니까? 그냥 말하지요. 만약에 벙어리가 예수님 때문에 말도 하고 한 달 월급 2천 만원을 받는다면, 벙어리 아닌 사람이 예수님에게 갈 때는 한 달 2천만원을 원해서 가겠지요. 그런데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말을 하잖아요. 예수님이 고쳐서 말을 했잖아요. 그러면 벙어리가 기껏 얻은 게 뭡니까? 기껏 자기 수준하고 동일한 걸 얻은 거죠. 벙어리가 말하고 돈까지 챙긴 게 아니고 그냥 말했을 뿐이에요.

이렇게 되면 우리한테 예수님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전혀 안 필요한 거예요. 필요하지를 않은 거예요. 왜? 처음부터 멀쩡하니까. 그러니까 멀쩡하다는 것, 멀쩡하다, 안 하다를 불구자를 상대로 해서 비교해보면 ‘나는 역시 멀쩡해’ 라는 이 자체가 이것은 문제될 게 없는 정상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불구자를 낫게 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정답을 말해 보세요, 하면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불구자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하신 일이 불구자를 낫게 하는데요, 예수님이 하는 일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바로 나중에 십자가로 가게 하거든요. 십자가 죽게 하신 그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능력으로 이 불구자를 낫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십자가 지기전이잖아요. 지금 십자가 안 졌잖아요. 안지시니까 사람들이 뭐가 안 보여요? 예수님이 아는 나는 십자가지고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산다는 그것은 예수님만 아는 거예요. 예수님만 아는 요것이 삭제된 상태에서 불구자를 낫게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은 멀쩡한 사람은 예수님이 굳이 필요 없지요. 다가갈 필요 없고 또 불구자도 고치고 난 뒤에 다시 예수님을 찾아올 이유도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돈을 주신다. 돈을 주신다면 이건 다 예수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왜냐 하면 현재 자기의 멀쩡함, 소경과 절뚝발이는 정상인이 아니잖아요. 정상이 아니니까 없애버립시다. 없애버리고 이 사람들은 지금 벙어리도 아니고 소경도 아니고 절뚝발이도 아니에요. 아닌데 원하는 것은 돈을 원한다 말이죠. 돈을 원하는데 예수님이 돈을 주게 되면 다 찾아오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왜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들이 나를 믿어서는 안 되느냐 하면, 그들이 “나는 멀쩡합니다.” 라고 그래서가 아니라 멀쩡함 동시에 “나는 돈을 원해.” 뭔가 더 여분의 것을 더 원하고 있는 그런 조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되고 믿지도 못할뿐더러 믿도록 허락하지도 않는 거예요.

다시 볼게요. 주님이 불구자를 낫게 한 것이 주의 뜻이 아닙니다. 동시에 주님이 이들을 믿게 하려는 주의 뜻이 아니에요. 주의 뜻은 뭡니까? 남들이 모르는 무슨 길을 간다? 고난 받고 부활하게 되면 이게 아버지의 뜻이에요. 이게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룬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멀쩡하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있으면 저 사람을 보냈느냐, 안 보냈느냐 하는 것은 내 소원이 있는데 내 욕망을 들어주면 그 분 예수님을 믿고 안 들어주면 안 믿겠다는 거예요. 자기 자리가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게 있어요.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인간이 원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아니다?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하지 않는다면 왜 벙어리와 소경과 절뚝발이는 왜 해줬는가, 이 벙어리와 소경은 이것은 대다수 사람이 아니고 특수한 사람이에요. 특수한 사람인데 그들은 뭘 느꼈습니까? 나는 멀쩡한데 멀쩡한데다가 플라스 알파를 더 달라는 게 아니고 이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 만나기 전에 다른 멀쩡한 사람들과 비교해 보니까 여기서 결핍이 생겼고 뭔가 모자라지요. 남들은 대부분 사람들은 눈을 떴는데 자기는 눈이 감겼잖아요. 그러니까 남들만큼 안 되는 결핍이 있잖아요. 미흡이 있잖아요. 고거 채워달라고 예수님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뭡니까? 자기 자신이 멀쩡하지 않고 나라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 앞에서 발견해야 예수님을 찾아요. 아버지 앞에서. 그런데 인간은 누구를 봅니까? 아버지를 찾아보는 게 아니고 서로 서로를 보니까 자기는 별문제가 없거든요. 제가 수요 설교 때, 빌라도하고 예수님 이야기했잖아요. 그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뭐했느냐 하면 나한테 말만 잘하면 풀어주겠다 했거든요. 그건 왜 그런가 하면 빌라도가 객기를 부리고 오버한 게 아니고 지금 그 유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빌라도에게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이미 권한을 줬고 빌라도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는 이 유대의 왕이거든요. 총독이고 왕이잖아요. 왕이고 다른 사람들도 최고지도자고 총독이고 왕이라고 서로 인정을 해줬다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에 대한 것은 뭐냐 하면, 빌라도가 보기에 자기가 최고의 자리에 앉아있다면 예수님은 최고의 자리가 아니고 자기보다 더 아래에 있으면서 자기가 통치하는 중에 인원수가 한 명의 예수일 뿐인 거예요. 그래서 심문하기를 “이 나라는 내거니까 나한테 말을 잘하면 니가 잘 빌면 내가 알아서 잘해줄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아니했다.”했지요. 이 말은 빌라도의 말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빌라도를 왕이라고 추앙하는 것, 참 내 자식은 언제쯤 빌라도처럼 돼보느냐, 사람들이 빌라도의 있는 자리는 사람들의 모든 여망과 희망과 욕망과 욕구의 최종 종점에 있어요.

이 세상에서 왕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 없잖아요. 그걸 부러워한다는 것은 같은 한통속이라는 말이에요. 같은 통속이에요. 만약에 집사님의 자제분이 만약에 세계에서 제일 권위 있는 차이코프스키 대상에서 최고 대상을 받는다면 축하해주는 사람들 전화 받느라고 성경공부 할 수가 없어요. 전화 받느냐고. 만끽하고 거기다가 갑자기 서울대학교수로 애를 초빙해가지고 한다면 어머님 제가 모실게요. 이리 나온다면 이건 뭐, 잘 들어보세요. 이게 내가 이걸 원하는 게 아니고 이게 오늘 강의에서 두 번째 어려운 건데요.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내가 뭘 원하는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주위에서 어떤 괜찮은 일이 발견될 때 ‘아, 나는 평소에 저걸 원하고 있었고 부러워하고 있었구나!’를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어요. 베드로가요, 예수님이 잡혀있을 때, 세 번 부인했잖아요. 베드로가 평소에 ‘나는 예수님을 부인할거야. 예수님을 부인할거야.’ 아예 장담했습니까? 아니요. 정 반대였어요. 모든 사람이 부인할 때는 “나는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했는데 막상 체포될 때 베드로 본인도 자신도 모르게 이미 그 쪽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들통 난 거예요.

자기는 충분하게 예수님의 편에 서있다고 장담했는데 그 장담은 헛소리였고 하나의 개소리였어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소리였고 막상 예수님이 잡혔을 때는 어두움의 권세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그들의 앞잡이로서 그냥 살아온 거예요. 예수님 가까이에서. 예수님 가까이에서 살아온 거예요. 어두움의 자식으로서 살아온 거예요. 닭이 울잖아요. 닭이 울 때, 닭이 우는 걸 보고는 말씀에 의해서 내가 모든 것이 다시 해석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무서워하는 권세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 주의 말씀이 더 위에 있구나!’ 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내가 벌벌 떠는 이 세상 권력보다 더 위에 있는 거예요. 엉엉 울었지요. 울어도 소용없지요. 잡혀갔는데. 그래서 새삼스럽게 자기가 자기도 미처 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까발려지는 일들을 주님께서 이렇게 기적이란 이름으로 해주셨습니다. 이 기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아무리 해도 나를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확인해 가는 것이 바로 주께서 일으킨 기적입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기적이 뭐냐 하면 요나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셨고 그 요나의 기적 대목에서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는 그것이 제자들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여야 되는데 제자들은 그걸 기적으로 보지 않고 파탄으로 본 거예요. 망했다! 로 본 거예요. 망했다, 로 보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때려죽어도 안 망해야 할 정도로 나는 건전하고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나같이 정당한 사람이 망한다는 것은 어울리지가 않아. 남은 다 망해도 나는 절대로 망하면 안 돼.” 이것이 자신도 모를 정도로 죄에 갇혀있는 그런 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게 되면 죄란 무엇인가, “남은 망해도 나는 망하면 안 돼!” 이게 죄라는 거예요.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망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여 버립니다. 인간은 두 번 죽어야 돼요. 두 번 죽어야 됩니다. 두 번 죽지 아니하면 끝남이 없어요. 육신이 죽어야 되고 자아가 죽어야 돼요. 두 번 죽어야 돼요. 자아부터 먼저 죽여 놓고 그다음 육신 죽이는 겁니다. 자아가 죽지 않게 되면요, 육신이 죽게 되면 자꾸 죽어가는 육신 살려달라고 합니다. “주여, 살려주소서.” “왜?” 하면 “저는 살아야 될 존재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매일 이렇게 자기 가치를 고수하게 되는 거예요. “왜 니는 살아야 돼?” “저는 장애자 아닙니다. 저는 결핍이 없어야 됩니다.”

방금 이야기를 다시하게 되면, 예수님께 12제자가 있습니다. 12제자는 전부다 지 잘난 맛에 살아가요.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높으냐고 했지요.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기적이라 하는 것은 제자들은 오해하고 예수님만 알지요. 심지어 소경된 사람도 눈을 떠놓고 도로 어디로 갑니까? 눈 떠놓고 도로 안 믿어요. 눈 떴으니까 믿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눈 뜬 것하고 믿는 것하고 관계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9장에서도 실로암가에서 제자들이 있는데 누가 지나가다가 눈 떴지요. 실로암 진흙 발라서 눈을 떴지요. 눈 떴을 때 예수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그 다음에 믿고자 하나이다. 할 때 믿은 거예요. 그러니까 소경도 육체로서의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로 그 소경이 내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는 눈 뜬 거와 상관없이 따로 또 주께서 챙겨주셔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상 밖의 기적을 받을 때, 그 기적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게 아닙니다. 예상 밖의 기적이 오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그 기적을 “야, 예상 밖에 주께서 살아계시는구나! 복 주는구나! 병 낫게 해주는구나!” 이렇게 돈 벌게 해주고 병 낫고 기적이 올 수 있어요. 이것은 평소에 우리가 어디에 마음 두고 살았는가를 까발릴 수 있는 까발리기 위한 기적이에요. 히브리서6장에 뭐라고 있습니까? 성령의 비췸을 얻고 많은 기적을 받았잖아요. 그럼 기적 받으면 뭐합니까? 그게 타락해버리니까 지옥 가버리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은 먼저 평소에 점잖은체하고 믿음 좋은체하지만 사실은 뭔가 하나 기적이 찾아왔을 때는 우리는 주께서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까발려지는 기적이 일어나야 돼요. 이게 밝혀지는 기적. 주님! 주님! 하지만 정작 나의 소망과 나의 욕망은 다른데 있었다는 것이 그게 노출되는 기적을 받아야 돼요. 노출되는 기적.

그것이 바로 그 뒤에 나오는 35절 봅시다.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 하니까 어디서 많이들은 것 같지 않아요? 마태복음14장 18절 보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하시고 17절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죠. 그리고 오천 명을 먹이죠. 15장35절에는 떡 일곱 개와 생간 두 마리를 가지고 그 다음에 사천 명을 먹이죠. 14장에서는 사천 명 먹이고 15장에는 오천 명 먹이죠. 같은 일을 두 번 반복시켰습니다.

이렇게 기적을 일으킨 것은 제자들이 예수를 못 믿습니다. 믿을 능력도 없고. 믿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뿐이죠. 그렇다면 제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지 않느냐,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소급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쥐가 고구마를 갉아먹듯이 십자가 그 때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뒤돌아봐서 갉아먹어버리면 그들은 제자이고 싶어서 제자가 된 게 아니고 주께서 선택해서 제자가 된 겁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는 이야기했는데 사실은 우리가 매일같이 깊이 있게 늘 우려먹어도 은혜가 되는 소리입니다.

“내가 너를 선택해서 니가 구원을 얻었다.” 하시고 우리는 얼마나 잊어버리는지 몰라요. 원인과 결과를 자꾸 내 쪽에서 찾다보니까 거기에 선택이 끼어들지를 못한 거예요. 우리는 선택을 내가 아는 원인을 찾으면 안 되고 원인을 하나님의 선택에 둬야 되는데 내 욕망이 원인이 되어버리니까 모든 게 짜증이 나는 거예요. 불만이고, 불평이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것조차도 예수님의 선택의 결과인 것을 우리가 자꾸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뭐냐 주님의 기적이 임해서 주께서 그들을 선택한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믿어요. 못 믿지만, 주께서는 그들을 선택한 거예요.

요한복음6장에 보면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 선택했잖아요. 선택했다는 것은 그냥 선택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구멍을 파버려요. 거기에 주님께서 결핍을 집어넣는 기적을 베풀어버립니다. 지금 12제자는 멀쩡하잖아요. 장애자 아닙니다. 12제자에 장애자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장애자 아니니까 그 당시에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해보니까 서로가 멀쩡하잖아요. 멀쩡한데 멀쩡 안 하게 만들어버려요. 죽어 마땅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고요. 그게 뭐냐 예상 밖의 기적을 베풀어버려요.

예상 밖의 기적을 베풀어버리면 그들은 예수님을 3년 따라다니면서 안다했는데 예상 밖의 기적이 왔을 때는 또 물어요. “주여, 이건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또 이야기해요. “내가 그렇게 기적을 했는데도 못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겠습니다.” 아까 장애자들만 결핍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장애자 결핍은 뭐냐 멀쩡한 사람과 자기들과 보니까 자기는 귀가 안 들리고 눈이 감겨있고 절뚝발이 이런 것은 신체적인 결함 때문에 그거 메우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왔잖아요. 그런데 멀쩡한 사람은 안 간다니까요. 왜? 멀쩡한데 왜 가요. 돈이나 주면 몰라도.

그런데 주님께서는 소경에게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자신도 미처 모르는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 가지고 나는 이런 걸 원해, 하는 그것을 그들에게 기적으로 예상 밖의 기적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혜택을 입으면서도 그들 속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 혜택을 입으면 보통 ‘이쯤해서 주님께서 떡을 떼어야 될 건데.‘ 이렇게 미리 예상해버리면 우리가 미리 아는 원인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떡을 줘버리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나는 눈치 챘어.” 이리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렇게 칠병이어를 행했을 때에 받기는 받아놓고 이걸 왜 받아야 되는지를 모르잖아요. 여기서 무지가 발생되지요. 무지몽매가 된다 말이죠.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집에 세탁기가 고장 났어요.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여, 세탁기를 주시옵소서.” 하고 있는데 갑자기 택배요! 왔다 말이죠. 기도하는 가운데. 보니까 덩치 큰 게 왔어요. 가전제품 큰 게. 와! 왜 이리 신기해. 딱 딱 하나님이 맞게 해주시는구나! 하고 택배 뜯어보니까 세탁기가 아니고 김치냉장고에요. 김치냉장고는 있는데 또 들어왔어요. 어떻게 됩니까? 예상 밖이죠. 그럼 냉장고 그냥 돌려보낼까요. 고맙기는 고마운데 이게 왜 있어야 되는지를 모르지요. 이 말은 십자가거든요. 우리가 기대했던 그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피로 죄 씻음 받는 거 우리의 아이디어 아닙니다. 우리의 아이디어는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받으면서 천국 가는 것이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우리의 아이디어에요. 그래서 제가 수요설교 때 했잖아요. 인간의 한계는 인간이죠. 인간 본인이 인간의 한계에요.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착한 일해도 나라는 한계에서 벗어나는 생각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칠병이어는 인간 속에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한 기적입니다. 그 문제점은 뭐냐 하면 바로 “나는 살아야 되겠다.” 하는 이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못 믿게 만드는 근본적인 문제점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이렇게 돈도 떨어지고 돈 없을 때 주여, 살려달라고 하잖아요. 돈 떨어지고 쌀독의 쌀이 다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망했다고 봅니까? 기적으로 봅니까? 망했다고 보잖아요. 이제는 그걸 기적이라고 보세요.

그렇게 돼야 나는 내 평소의 소원은 예수님이 아니고 어찌됐던 내가 사는 게 내 소원이라는 것이 발각당하지요.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 교회의 교인들 남아있을 사람 없지요. 왜냐 하면 다들 살려고 오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다 가게 되면 가는 것도 기적입니다. 평소에 목사가 자기 교인 늘어나는 것이 소망이면서도 매일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거짓말 해댔다가 교인들 다 나간 뒤에 비로소 발각당하는 겁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의 행동으로 속아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뭘 생각하는지를 내가 나를 미처 모르는 것까지도 다 알고 계셔요.

제가 대중가요 노래 가사 중에서 사라지지 않고 자꾸 기억되는 이런 게 있어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남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어떤 여자가수가 부른 노래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해주는 그런 남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가사도 복음적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결국은 목적은 뭡니까? 나는 무조건 사랑 받아야 될 대상이라는 게 이미 전제를 깔고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럼 이렇게 해야 돼요. ‘나보다 더 나를 미워하는 분’ 이게 복음이죠. 이것이 바로 나 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그 미움 받는 내가 천해지고 가련해지고 남한테는 예리해도 자기한테는 항상 관대하잖아요. 내가 미워한다 하면서도 자기한테는 ‘내가 이렇게 미워하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정도로 착해.’ 라고 한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고난 주일날 했던 짓이에요. 가슴을 마구 때리면서 사순절 지키면서 나는 고난주일 지키면서 그러면서도 멍이 들도록 가슴을 치면서 ‘이 정도로 나를 낮췄으니까 설마 주께서 나를 버릴 리가 있겠어.’ 이리 나온다니까요.

정말 복음적으로 소급해서 이 대목들을 보게 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내가 원치 않는 예상 밖의 선물을 통해서 우리가 선물을 매일같이 제공 받고 있다 이리 보면 됩니다. 선물 앞에 뭐가 있는가 하면, 희생이 있거든요. 희생을 통해서 선물이 오잖아요. 우리는 선물을 받는 입장이다 말이죠. 그런데 문제가 이 선물에 대해서 오해가 왜 생기느냐 하면, 우리가 선물을 알려면 주님의 희생에서부터 나와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여기 있고 선물을 받다 보니까 이 선물이 선물 같지도 않은 것을 선물 아니라고 내팽겨 치고 내가 원하는 선물에만 선물이라는 생각을 가져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희생에서 왔는데 배후의 희생을 모르고 그냥 내가 몸이 원하기에 감사합니다, 라고 되어버리면 이 감사는 일방적인 감사고, 죄악 된 감사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햇빛과 공기와 단비 이건 어디서 온 겁니까? 노아의 언약에 보면 노아의 정결한 희생 때문에 오거든요. 그런데 노아 이후의 사람들은 뭐냐 하면 이걸 당연하다고 보는 거예요. 아버지 노아 때문에 햇빛과 공기를 받았으면 하나님의 아버지가 벌거벗던 우이했던 간에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줘야 돼요. 은혜를 알면.

그런데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과 자기 모습을 비교하면서 함은 얼레리 꼴레리하고 놀려버린 거예요. 그걸 덮어주지를 않았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보기에 함은 지금 하나님의 희생, 주님의 고난, 주님의 피, 희생바깥에 존재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저주라는 것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 게 아니고 저주받아야 하기에 함은 술 취한 아버지의 하체를 안 덮어 주게 된 겁니다.

노아는 함을 직접 본 게 아니고 노아는 예수님의 희생을 경유해서 노아는 보는 거예요. 여러분, 자식을 볼 때 그렇게 봐야 되고 사람들을 볼 때 그렇게 봐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해서 볼 때에 저 사람의 저런 주장은 같이 십자가를 공유한 입장이 아니고 자기만 챙기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흥정이나 타협이나 협상에 불과하다고 이리 보는 겁니다.

제가 십자가마을에 ‘노아’라는 영화의 평을 올려놨잖아요. 서 경수 목사님은 얼마나 화를 냈는지. 진짜 쓰레기 같은 영화에요.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그 감독이 뭘 몰랐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어떻게 다른지를 모른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뭐고 사람의 딸이 뭐냐, 이 대목에서 풀리지 않으니까 그 다음부터 영화가 엉망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괴물이 등장해요. 뭐냐 하면, 노아가 힘이 세서 방주를 지었다고 보는 거예요. 노아는 힘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냥 은혜를 입은 자일뿐이지 힘이 있는 자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반대편은 뭐냐 하면, 힘이 없이는 못 살겠다는 거예요. 그 쪽이 노아의 반대편입니다. 노아는 살고 죽는 것은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약속을 믿느냐. 이런 이야기를 목사들에게 이야기해도 목사들은 완전히 화를 내고 있어요. 목사들에게는 뭐냐 하면, 관심이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왜? 교회에서 뭐가 나오기 때문에? 자기의 힘이 생존의 힘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뭘 믿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뭘 사랑해요? 교회를 사랑해요. 왜? 그게 힘이 되기 때문에. 이게 가인의 후예에요. 교회에 질문할 때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목사한테 질문을 하게 되면 목사는 화를 안 내요. 그런데 교회에서 뭘 하면 화를 내는 거예요.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렸다는 거예요. 항상 우리 가정이 나를 살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가정과 나, 이렇게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우리는 성도라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이렇게 가정을 생각해야 돼요.

왜냐 하면 가정은 그냥 가정해버리면 나 살리기 위해서 가정이 있는 겁니다. 사람이 남자가 나이 많으면 “여보, 떠나지 마!” 하거든요. 떠나지 말라는 거예요. 평소에 예수님보다 마누라가 더 믿음직하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나 예수를 믿어버리면 떠나지 말고 안 말고를 관계없이 주께서 붙여주면 떠나라 해도 같이 붙어살아야 돼요. 이게 선물이라니까요. 주어진 모든 게 선물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가 좋아하는 것, 기대한 걸 줬을 때만 자꾸 선물로 간주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렇지요?

그래서 주님의 기적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창조 전에 있었던 계획을 경유해서 기적을 베풀었지요. 그 기적이 뭐냐 하면, 바로 36절에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이 축사할 때 예수님의 단독행위입니까? 아니면 누구하고 의논했어요? 요한복음14장에 보면 예수님의 하는 모든 일은 단독으로 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했어요.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의논한 대로 그냥 실시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그 의미가 뭐냐, 32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무리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는 거예요. 그러면 떡을 먹을 때, 떡이라는 게 선물이 왔다는 거잖아요. 떡 뒤에는 뭐가 있습니까? 떡은 뒤의 주님의 희생이란 말이죠. 희생이 지금 칠병이어가 됐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 떡을 먹었느냐, 내가 곧 뭐다? 생명의 떡이다, 했지요. 이렇게 예수님은 자꾸 뭘 소개하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내용을 자꾸 소개하려 하는데 사람들은 떡을 주니까 떡을 먹고 배부르니까 예수님을 쫒아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야 돼요? 안 보내야 돼요? 돌려보내야 돼요. 안 돌려보내면 자기가 예수 잘 믿는 것처럼 된다니까요.

제가 주위에 많은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어요. 기도하니까 병이 낫더라. 기도해서 병 나아 믿으면 그건 신자가 아니에요. 기도해서 병 나을 수가 있어요. 있는데 그게 선물이고 칠병이어가 될 수 있는데 막상 진짜 기도해서 병이 나아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 가슴을 치고 반성하고 회개해야 돼요. 예수님의 피를 가지고 생명의 피를 기껏 내 병 낫는데 암에서 병 낫는데 소모품으로 건방지게 그걸 사용하다니. ‘그래, 주님은 죽고 나만 살면 그만이다.’ 세상에 이렇게 못된 생각이 어디 있느냐. ‘나는 죽고 주님은 살아야지’ 이렇게 되는 것이 마땅한데 ‘나는 살아야 되고 주님의 죽음으로 내가 삽시다.’ 이게 얼마나 자기 이기주의인가, 나는 회개합니다. 이리 나와 줘야 그게 제대로 기적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진짜 기적 받은 사람은 뭐만 증거 하는가 하면, 십자가만 자랑해요. 십자가만. “내가 병 걸리고 병 낫는 순간 내가 얼마나 못된 인간이고 저주받을 인간 맞습니다.” 하는 것을 통감했다는 식으로 오직 해야 되고, “나는 암 걸린 불구자이지만 여러분들은 아직까지 나처럼 암 안 걸렸으니까 여러분들은 바로 십자가만 자랑해야 됩니다.” 라고 나서서 이야기해야 되지요. 그러니까 이래나 저래나 목사가 설교에서 뭐만 해야 돼요?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지요. 그 교회도 십자가만 자랑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려고 애를 씁니까? 십자가 믿으시면 덤으로 이런 선물 줍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답변은 기대 안합니다.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은 선물을 주시는데 나부터 출발할 때 이 선물이 선물이냐, 아니냐, 내부터 출발한다는 자체가 내가 아쉬운 것, 내가 원하는 것, 출발한다는 자체가 이 자체가 이미 가짜에요. 가짜 복음입니다. 가짜 교회이고. 그러려면 칠병이어 먹였고 오병이어 먹인 사람들에게 누가 배신당해야 됩니까? 바로 떡을 주신 예수님이 도리어 배신당해서 결국 그 배신의 연장이 십자가사건으로 이어지고 그게 다시 유턴해서 돌아와 가지고 우리를 공격하잖아요.

예를 들면 도로 4차선이 중앙분리대가 있는데 차 두 대가 이렇게 간다 말이죠. 차가 가는데 내가 졸음운전 했다 말이죠. 졸음운전해서 뒤차를 박아버렸어요. 박아가지고 그 차는 튕겨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놀래가지고 얼른 숨어가지고 도망쳤다 합시다. 도망쳤는데 이 차가 기어 나와 가지고 따라오는 거예요. 이런 양상이에요. 내가 먼저 가려고 욕심냈던 내가 원하는 선물 달라고 하는 것 때문에 주님이 튕겨서 십자가에 죽었는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가지고 이 차가 사흘 만에 나타나가지고 내 다리 내놔라하고 따라 붙인다 말이죠.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걸 몰랐어요. 주니까 좋다고 얻어먹었지. 얻어먹고 난 뒤에 예수님 다 배반했잖아요.

여기서 약간 어려우니까 그냥 들으세요. 12제자 가운데 11제자와 한 제자로 구분해 봅시다. 한 제자가 가룟유다지요. 11제자는 가룟유다외에 모든 제자입니다. 차이가 어디 있느냐, 성경에서는 가룟유다를 이걸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 중에 하나는 사단이라 했지요. 한 제자는 사단이라 이 말이죠. 11제자 중에 하나가 베드로에요. 베드로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참 중요한 고백을 했어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이야기할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을 주어자리에 놓고 자기는 뒤에 빠졌지요. 주께서 아실 겁니다.

가룟유다 보세요. 가룟유다는 주님을 경유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내가 스승을 팔아먹었구나!” 이리 되지요. 그래서 가룟유다는 자살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 부인하고 자살했습니까? 닭 우는 소리 들릴 때, 그것마저 주께서 하신 일에 자신이 말려든 것을 감사히 여겼지요. 그러니까 베드로는요, 자기가 저지른 일로 그걸 일의 모든 가치의 마감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주님을 세 번이나 배신했어. 그래서 나는 배신한 인간이야. 배신한 인간이야.” 그걸로 마감한 게 아니에요. 그걸로 끝낸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더 나아간 거예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사단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께로 경유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를 못해요. 잘못도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책임도 누가 진다? 내가 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잘못을 여러분이 책임지지 마세요. 그냥 마사지 받더라도 환란인 줄 아시고 책임지지 마세요. 그 책임지는 거 굉장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악마가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인간의 한계입니다.

악마의 일이 뭐냐, 내가 책임지려고 할 때 그게 마귀의 일이에요. 그럼 무책임은? 무책임도 마귀의 일이에요. 책임지는 것도 무책임이에요. 그럼 정답은 뭐냐, 주께서 책임지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무책임이 아니고 주께서 책임지는 거예요. 율법을 안 지킨다, 무율법주의에요. 지킨다, 율법주의입니다. 정답은 뭐냐, 주께서 율법을 이룬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꼭 주님 없는 인간들이 무율법주의라고 공격을 해대지요. 주님을 항상 경유하고 나와야 돼요. 주께서 책임을 져 주시는 것을 베드로가 말한 것을 주께서는 그대로 이어가기를 “니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성도의 삶이 바로 그 한마디에 다 들어있습니다. 니가 원치 않는 길, 그렇다면 내가 주를 위해서 고난 받겠다고 십자가 지는 것은 원하는 겁니까? 원치 않는 겁니까? 그것은 지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그 길을 안 가게 합니다. 마사지 받게 해요. “아, 시원하다.” 그런데 마사지 받으려하면 마사지 못 받게 하십니다. 하여튼 매사에 주님께서 개입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다 피해버립니다.

그래야 내 안에 내 의가 마일리지가 쌓이지를 않아요. 자, 말레이 항공에 중국으로 가야 될 비행기가 호주로 남쪽으로 가버렸어요.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유족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레이 나라는 악마의 나라다. 그렇게 했습니다. 처음부터 미친 조종사 다 허락했고 처음부터 그런 조종사가 있는 걸 불구하고 태운 것은 이건 말레이 당국이 책임져야 된다. 하고 그렇게 했거든요.

지금 무슨 사건이 벌어졌어요? 지금 중국의 유족들에게 무슨 사건이 벌어졌어요? 죽음 사건이 벌어졌지요. 죽음 사건이 딱 터지니까 책임이 원인을 찾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 본인이 죽을 때, 원인은 누구 때문입니까? 본인이 죽는다면? 사람은요, 본인이 죽는다는 그 자체가 결과가 아닌 이유가 인간이 있다는 이 자체를 하나님이 원인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죽어야 될 인간 자체가 원인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내가 만약에 죽는다면” 이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에요. 처음부터 우리는 죽도록 되어 있어요. 선악과나무가 심어진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인간보고 죽으라고 있는 거예요.

지금 마귀가 그걸 없애라, 없애라 그래서 같이 합세해서 없애버린 거예요. 우리의 원인을 없애버린 거예요. 우리가 있어야 될 본래의 자리를 마귀가 부추겨가지고 그 자리를 없애버린 거예요. 그럼 우리는 붕 떴어요. 도대체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살아있으니까 무조건 살아야 된다는 그것뿐이지 원인을 모른다니까요. 원인을.

현대차가 고장 나면 현대차한테 수리를 부탁하면 되는데 레벨을 떼어버렸어요. 우리는 현대가 만들었는지, 삼성이 만들었는지 몰라요.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몰라요. 왜 우리가 죽어 가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냥 차타고 달리기만해요.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그냥 달려요. 아침 눈만 뜨면 살아야지, 살아야지, 오늘도 밥 먹고 살고, 오늘도 장사해서 살아야지, 그 살아야지 밖에 몰라요. 바꿔야 돼요. 오늘도 죽어야지, 죽어야지, 오늘도 일하다가 죽어야지, 봉사하다가 죽어야지, 섬기다가 죽어야지, 이렇게 해야 돼요. 그렇게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주께서 원치 않는 쪽으로 죽이실 거예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니까 성도는.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 죽는 것보다도 우리는 그것밖에 몰라요. 우리의 한계는 우리밖에 몰라요. 우리 자체가 한계니까. 내가 내 진리를 아는 것에 내가 방해하니까. 그런데 이미 우리의 자리는 주께서 이미 십자가에 마련해놨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면 무엇이 보이는 쪽으로 인도하겠어요? 자꾸 방향을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해서 뭐가 보이는 곳으로? 그런데 십자가가 왜 돌아가셨지? 오늘 장사가 안 되는데 십자가는 왜 돌아가셨지? 말레이 항공은 추락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왜 돌아가셨지? 박근혜 대통령은 몸살 걸렸는데 십자가는 왜 돌아가셨지? 우리는 관련성을 짓지 못하고 살아가잖아요.

그걸 성령이 오게 되면 관련성이 있는 거예요. ‘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게 아니구나!’ 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해서 ‘지금 주어진 것이 주님의 희생에서 온 선물로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구나!’ 를 우리가 알게 하시는 겁니다. 권사님 머리 나는 것도 다 선물이에요. 주께서 주신 선물이죠. 어떤 선물? 죽음의 선물.

당뇨에 합병증 걸리면, 장님 되고 치아 다 상하고 발이 붓고 절단하고 그래요. 참 사람이 이래요, 한 번 보세요. 혈당량이 높습니다. 무섭습니까? 그 자체가. 혈액속의 혈당 별로 안 무섭지요? 그런데 결과로서 시커멓게 다리가 썩어 가면 무섭지요. 인간은 겉모습만 무섭지 안에 원래 다리가 왜 썩느냐 하면 혈당량이 혈액 속에 맑은 피가 있어야 하는데 그 쓰레기 같은 당이 많아서 썩잖아요. 피가 안 통해서. 산소를, 영양을 공급해야 되는데 당이 많다보니까 썩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썩는 그것은 겁내면서 “혈당량이 좀 많네요.” 이 말 자체는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를 못하는 거예요.

주님이 십자가 지셨다. 전혀 안 무서워요. 그런데 당뇨 걸려서 썩어 간다. 이건 무서워한다고요. 사실은 뭘 무서워해야 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사실은 이것이 소스라치게 오골오골하면서 무서워해야 될 사건인데 우리는 발에 가시 있으면 “주여, 가시 빼주세요.” 주님이 이발사입니까? 가시 빼주게. 발톱 깎아 달라와 같은 소리에요. 성령께서는 바로 니가 무서워할 필요도 없는 것에 무서워하고 정작 무서워해야 될 것은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데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칠병이어 준거요,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이거 먹고 같이 죽자!” “니 죽고 나 죽어 가는데 니 나를 따라올 의향이 있느냐” 그래서 칠병이어 일으킨 거예요. 제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16장5절 봅시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때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주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 하였도다 하거늘” 5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8절, 누룩을 주의하라 7절에 보면, 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하였다, 하지요. 하나님께서 칠병이어를 주니까 그들이 원하는 선물을 주님이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오해한 거예요. 잘못 생각한 거다 말이죠. 주님의 십자가 피를 줬는데 그 피는 보지 않고 “야, 떡 맛있더라. 배부르더라.” 이것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배부른 게 뭡니까? 배불러봐야 몇 시간 지나면 어떻게 돼요? 배고프잖아요. 배고프니까 주님의 십자가 피를 떡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떡을 가져왔나?” “안 가져왔다.” “이 바보야, 떡을 왜 안 가지고와. 남으면 가지고 와야지.” 결국 제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그대로 다 보여줍니다. 십자가 이야기는 설교 들을 때 십자가지, 돌아서면 전부 다 떡 이야기잖아요. 성령께서 또 책망합니다. 어떻게 책망합니까? 8절에 보세요.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라고 되어 있잖아요. 떡 없음을 가지고 주님이 책망하지만 듣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떡 말고 우리가 의논할 게 뭐가 또 남아있습니까? 떡이 전부인데. 밥이 전부고 돈이 전부인데, 식구들 모여가지고 “여보, 우리 십자가 의논하세” 이런 가정 봤어요? 그런 가정 봤습니까?

“띵~동~ 자기 일찍 퇴근이네.“ ”그래“ ”십자가 얼마나 생각했어?“ 웃으면서 반갑게 묻습니까? ”오늘 월급날이지“ 대번 이리 나오지요. 하루24시간 일과가 돈, 돈, 돈, 돈이 전부에요. 윤리 도덕해도 끝에는 돈으로 해결되고 돈 없으면 해결 안 나고 그런 거예요. 내가 이야기해도 너무 심하게 했네. 어떤 문제도 마지막 해결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윤리 도덕이라도 돈으로 해결되는 거예요. 성추행 당했다. 돈으로 해결하면 끝나는 거예요. 인간의 도덕이고 가치고 돈이 전부입니다. 돈 없으면 사람 아니고 돈 있으면 사람대우 받는 세상에서 주께서는 우리를 원치 않는 길로 데려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지금부터 십자가 눈에 안 보입니다.

십자가 안 보이면 오늘 죽으면 끝나는 거예요. 주께서 늘 성령께서 성령은 십자가에서 나왔거든요.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의 일상들이 내가 조작해낸 가짜 현실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 가짜 현실이지만,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그러한 선물 보따리라는 것을 알아서 이렇게 밥상보자기를 당기면서 “아이고, 십자가 덩어리!” 밥을 먹어도 십자가, 미친 사람 비슷하지만, 하여튼 모든 것을 십자가 은혜로 햇빛과 공기와 목숨을 줬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제자들이 하는 일은 예수님과의 서로 맞지 않는 이런 대화가 오늘날 우리가 늘 상 해내는 대화의 내용이 섞여있음을 저희들이 자인합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육신의 매인 몸이라 십자가보다도 힘을 원하는 저희들 그때마다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늘 십자가 이야기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140327-마15장29절(선물)50강 - 이 근호 목사.hwp (34.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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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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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