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 연대연합강의 제10강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10강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10강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5장에서 죽었더라, 죽었더라는 그것은 아담의 형상이 그렇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될 때 아담의 형상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살다가 힘 빠지면 죽는 게 아니고 내가 아담의 형상은 다 죽일 거야. 그러면 아담의 형상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죽음 속에서 언약을 끄집어내면서 죽일 거야. 죽는다는 것은 허무해. 절대로 허무하지 않아요. 귀중품들 빼놓고 죽이는 거예요. 폐차할 때 그냥 폐차하지 않지요. 중요한 엔진부품 빼내잖아요.
주께서 죽음에서 빼낼 때 나오는 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죽음을 보지 않아요.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냥 하늘나라로 가게 함으로써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근거를 그 후에 주어질 언약에 근거해서 에녹이 올라갑니다. 그 근거가 노아에요. 이게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엘리야와 모세가 구원받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누가복음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어떤 주제로 이야기했는지가 나옵니다. 주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이 화를 낼만한 이야기를 해요. 아브라함이 내 때를 보기를 원했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게 주체로 자아로 가게 되면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만났으며 언제 만났느냐고 내가 나를 주체할 때 나는 여기 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하잖아요. 그 조건 맞추어서 아브라함이 언제 만났습니까, 어디서 만났습니까? 또 튀어나와요. 유대인들이 화가 난 거예요. 왜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냐? 죽은 아브라함이 언제 서른 살밖에 안 된 당신과 이야기했느냐 이 말이지요. 믿지 말란 이야기지. 우리는 곧잘 믿는데 곧잘 믿는 우리가 수상한지 그쪽이 너무 치밀한지 누가 가짜인지 잘 모르겠어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가 먼저 있고 난 뒤에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바쳤다. 믿음의 조상이잖아요. 그럼 그 믿음으로 천국 가야 되는데 아브라함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누굴 기다렸느냐?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 오신 걸 보고 그는 오케이 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한 천국은 하나님나라라면, 이것은 하나님나라가 아니었고 허망한 것이고 결국 아들의 나라에요.
아브라함이 만난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름이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자기와 동행이 가능한 하나님. 신을 만나면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가 신에게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알아서 인간 속에 들어갈 만한 조건을 스스로 갖추어서 그냥 내려오셔서 관여하시고 동행하시는 끝자락에 천국이 있었던 겁니다. 그 천국의 긴 그림자, 히브리서에서는 그걸 모형이라고 해요. 모형 중에 에녹이 있고 노아가 있는 거예요.
그럼 제가 질문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에녹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지요. 그럼 에녹은 몇 번째라는 말입니까? 참 곤란한 질문이지요. 우리의 시간관은 과거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현재고, 그 다음에 미래잖아요. 예수님 오기 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갔잖아요. 그분은 안 죽었다는 이야기고 시체는 찾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살아났어요.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도 살아났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누구지요? 여전히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고 왜 첫 열매가 되느냐 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아중심의 시간관은 주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5절에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우리 같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주님은 창조하신 분이니까 나를 보낸 분이고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차례가 나구나.”
그게 아니고 나보다 앞선 것은,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늘나라에 계시다는 말이 아니고 지상에 같이 뛰어든다. 그런데 누가 나이 많지요? 세례 요한이 6개월 많지요. 그럼 나보다 앞선 것이라고 했을 때는 하늘나라에 계셔서 앞선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따져도 6개월 늦은 분이 나보다 앞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역사 속에 시간 흐름조차도 새로운 시간을 몰고 새롭게 오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이나 그 뒤에 계속 보게 되면 그때가 항상 인간이 생각하는 그때가 아니라 시간의 역전이 계속 일어나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시간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철로라고 본 겁니다. 시간을 우리 시간으로 보지 말고 저쪽 시간으로 보라는 거예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2장의 가나혼인잔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여, 포도주가 떨어졌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여자여,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내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속성이고 기능이란 말이죠. 그런데 마리아는 기능으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본 거예요. “예수님, 한편 맞지요? 이 결혼식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으니까 나를 위해서 포도주를 어떻게 조달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마리아 자리를 허용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마리아에게 이야기를 해버려요. “마리아야. 무슨 상관이냐. 내 때가 되지 않았다.” 우리 같으면, “그럼 삐질까?” 또는 말 취소. 아니야. 취소하지 마. 기능인 거예요.
장차 때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빈 물통으로 현장에 가게 만들었어요.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것은 요한복음 6장에서 내 살과 내 피가 변한다는 새 언약과 관련돼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상관없다고 해놓고 상관없는 일을 장차 때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환경으로 하나님께서 접수해버리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살지만 단순히 먹고 사는 안개에요. 주체가 다 찢어버렸어. 예쁜 안개, 참한 안개 없어요. 안개는 그냥 물방울이고. 주체는 안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럼 자살하면 되겠네? 자살하지 말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돼요. 물론 뭘 할까요? 자살해라. 이렇게 하면 되겠는데 글쎄요. 그러면 거울에다 내 마누라는 사탄이란 말을 쓰지 말고 해야 돼요. “내가 죽는 것은 주의 뜻이다.” 이렇게 써야 되는데 원망조로 썼다는 말은, 자기 자아가 결정해서 일이잖아요. 내 자아 포기 못하겠습니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창세기 5장을 이야기하는데 죽었더라의 의미가 뭐냐는 겁니까? 죽었는데 안 죽었어요. 아담 죽었잖아요. 안 죽었어요. 좀 위로 받읍시다. 진짜 미치겠다, 정말. 십자가 사건 때문에 안 죽었어요. 아브라함도 안 죽었어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왜 살았다, 죽었다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개념을 정하고 평가하느냐 말이죠. 평가는 주님이 해요. 주와 함께 하면 무조건 산 자고 주와 함께 없으면 살아도 죽은 자에요. 왜 주님의 평가를 애써 외면하고 무시하는 겁니까? 목회라는 이름으로. 그게 무슨 목회에요. 목회자가 목회 방해하는 셈이에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떻게 보느냐고 묻지 마라.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못 보게 돼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난해한 이야기 중에 하나는 이거에요. 빛이 왔을 때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는 어두운 곳에 빛이 비추면 환하게 돼있어요. 저만 느끼는 겁니까? 손전등 비추면 환하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빛이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지요.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두움, 죽었다는 모든 개념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우리는 그 속성을 증거해야 될 기능으로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럼 열두 제자는 뭐냐? 깨닫지 못하는 기능을 해야 돼요.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소경이라고 하니까 본다. 요한복음 9장. 그 이야기를 왜 하시는 겁니까?
특히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 8장이에요. 예수님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왔어요. 율법에 속한 여인이 왔어요. 그 여인을 잡아온 바리새인들 율법에 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율법이 우르르 몰려왔다고 보면 돼요. 그리고 현장에서 그 여인을 죽이면 되는데 일부러 예수님한테 달려들었어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율법에 속한 것처럼 예수, 당신도 율법에 같이 속해서 살면 좋겠다는 요청을 한 거예요. 들어올래, 말래? 율법이 최고니까.
이에는 이에요. 눈에는 눈이라고 율법에는 율법으로 대항하십니다.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꿇어앉아서 뭘 썼어요. 율법밖에 볼 줄 모르고 법으로만 따지는 그 인간들이 뭘 봤어요. 뭘 봤는지는 모르겠어요. 이것은 분명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율법 주장하다가 율법 있는 곳에서부터 도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유발시킨 게 있어요. 그러면 인간인 진정 자기가 아는 율법 속에 속한 겁니까? 아니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율법을 이용해먹은 겁니까? 이용해먹은 거지요. 율법보다 독자적인 존재, 나는 나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나는 나라는 숨겨진 속성에 의하면 전부 다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한 거예요. 그 전통을 인간인 이상 유지되는 겁니다.
아담의 형상의 마지막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지요. 어떻게 살면 되는가를 묻지 마세요. 어떻게 사는 문제는 독점적으로 다음에 언약이 발생됩니다. 노아언약에 의해서 밝혀질 겁니다. 에녹은 살아있으면서 죽지 않는 게 목적이 아니고 뭐라고 외쳤습니다. 유다서에 나오지요. 노아의 마지막 때가 올 것이라고 외쳤지요. 이게 기능이잖아요. 나, 믿음 좋아서 구원받는다고 외친 게 아니지요. 장차 뒤에 오실 어떤 일을 외쳤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에녹 좋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에녹은 365년 동안 뭘 했느냐 하면, 장차올 일을 미리 앞당겨서 예고한 거예요. 마치 세례 요한처럼.
여러분 세례 요한을 보면서 우리 몸이 움찔하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이 성령의 뜻에 의해서 태어났지요. 이름도 천사가 와서 지어줬지요. 그 순간에 예상되는 세례 요한의 미래상은 총회장입니다. 간증으로 그만한 간증거리는 없어요. 이 정도 되는 사람을 주께서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잖아요. 누가복음 1장에서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아는 세례 요한의 말로는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가시나 말 듣고 아버지가 아이한테 장난감 선물 주는 식으로 머리를 잘라서 쟁반에 담아 공개적으로 웃음거리로 만들었지요.
그걸 보면서 세례 요한은 믿음 좋으니까 그 일 발생되겠지만 저는 그만한 믿음 안 되니까 제 주체와 자아를 막장으로 몰아치면 힘듭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자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목적은 뭐냐? 자기는 쇠해야 되고 주님은 흥해야 하는 이 원리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계속 해봅시다. 율법이 와르르 몰려왔을 때 땅에 썼습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알았으면 간음한 여인뿐만 아니고 바리새인도 구원받았을 거예요. 희한하게도 간음한 여인만 빼놓고 다 도망 가버렸어요. 그러면 간음한 여인이 주님 앞에 왔다는 것은 바리새인은 자기가 위급하니까 율법이나 나발이고 다 도망쳤지만 그 여인은 어쩔 수 없이 여전히 율법 아래 있지요. 정죄 당해야 되지요. 너를 고소한 자가 있느냐고 일부러 물어요. 주님께서 시력이 나빠서 묻는 게 아니고 여인의 현 위치를 묻는 거예요. 너를 고소한 자라고.
예수님의 주 되심에 누가 필요하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고소한 자만이 그 여인이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주 되심의 기능이 살아서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의 속성이 구원받고 기능이 살아나는 거예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 하나 재료를 삼아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사건 이후에 나오는 말이잖아요. 자유라는 말은 네 자체로는 할 수 없고 반드시 예수를 경유할 때 율법의 고소에서 벗어난 새롭게 매인 상태를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출애굽에서 애굽을 상정하듯이 자유란 말을 쓸 때는 반드시 율법을 전제로 깔아야 자유란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율법에 속합니까, 안 속할까요? 우리는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나한테 유리할 때는 율법을 동원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치잖아요. 목사한테 무슨 문제 있어서 당회 열리면 초청받은 목사가, “여러분, 은혜로 합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인데 우리가 그걸 믿으면 돈 문제 있더라도 그냥 넘어갑시다.”라고 하거든요.
그러나 제가 아는 은혜는 그 목사를 추방하는 게 은혜입니다. 제가 아는 법은 “나갈 때 얼마 받을래?” 이것이고, 제가 아는 은혜는 빈 손들고 쫓겨나가는 게 은혜에요. 그래야 그 목사는, “이 세상에 믿을 놈 없구나. 오직 주님 아니면 없습니다.” 하고 다시 말씀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교인들이 은혜를 빌미로 빼앗아 갑니까? 교인들이 너무 못 됐어. 너무 악해. 망해서 사는 그 길을 교인들이 도와주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게 돼요. 갑자기 분위가 숙연해져버렸는데 내가 말 잘못했다는 것 같은데.
노아언약 보겠습니다. 에녹은 노아언약과 관련돼있고 그 언약은 땅의 안식과 관련돼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유념할 단어가 하나 나와요.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체란 개념이 왜 나오는지. 그러면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단지 육체가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대체 육체란 것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 이 개념 살필 때 반대로 해야 돼요. 그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육체냐는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되고, 이렇게 해야 돼요.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육체라고 결과론적으로 해명이 돼야 돼요. 당신은 저주받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저주받습니까?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도대체 믿지 않으니 그 상태가 저주라고 설명해줘야 돼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그게 새 언약이기 때문에. 도레미파솔라시도, 정점에 새 언약이 있거든요. 새 언약을 경유해서 세상을 다시 봐야 돼요.
그러면 노아 홍수가 벌어진 이유는 알았습니다. 언약이 주어진 것은 개개인이 얼마나 훌륭하냐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사람과 하지 못할 사람을 분류시키기 위해서 그렇다 했다는 거예요. 분류된 노아는 신나겠네? 신나지 않습니다. 왜? 언약의 구성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 기분 좋잖아요. 기분 좋지 않아요. 그 안에 다음 언약을 위해서 부정적인 요소가 합류가 돼야 돼요. 그게 바로 노아의 가족 가운데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이 있지요.
이상하다. 하나님께서 어떤 심판을 내릴 때는 정화의 차원에서 심판을 했는데 심판결과가 깨끗함이 계속 지속돼야 되는데 왜 더러운 것이 섞여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정화의 차원이 아니고 정화되기 위한 요소의 차원에서 심판을 일으킨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정화됐느냐가 아니라 누가 우리를 정화시키는 핵심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으킨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는 그 정화가 반복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정화돼야 될 더러운 것을 함께 동행시키는 동행이 계속 이어져가는 겁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 또 궁금한 것은 분명히 노아 홍수 때 가인의 족속이 몰살당했지요. 그런데 가나안 땅에 가인의 족속이 왜 있습니까? 그 가인의 족속은 어디서 발생된 거예요? 몰살당할 때 좀 남겼습니까? 노아 여덟 식구 말고 다른데 빼돌린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면 과학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이 홍수가 메소포타미아 지역만이고 남극이나 북극에는 안 일어났다. 극소적인 홍수였다는 창조론에서 하는 주장을 하렵니까?
성경해석에 있어서 신약에 나오는 사도들이 구약을 해석할 때 어떤 관점으로 해석했는가를 보게 되면, 그들은 항상 새 언약, 십자가 완성을 통해서 해석해왔었어요. 이것은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구약 자체를 나와 동일한 지평선, 같은 바탕에 있다고 여기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모든 질문들은 성경에서는 어떤 해답도 주지 않습니다. 왜? 질문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 악한 질문에 해답할 이유가 없어요.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뭐냐고 물었지요. 빌라도가 질문했기에 답변을 안 한 거예요. 아무 소리하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에티오피아 내시가 빌립한테 질문했지요. 아주 친절봉사를 다합니다. 빌립이 인물 좋다고 해주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역사가 그래요. 진짜 개한테 진주를 던지지 말라와 같은 말씀이에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해서 자기 아내를 삼았다고 할 때 여기서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며, 사람의 딸은 누구며, 거기서 나오는 네피림과 크로마뇽의 관계는? 거인족은 이 세상의 유인원, 원숭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중간, 네안데르탈인 이런 것.
그런 육들은 과학적으로 어디에 점하고 있습니까? 또는 가인이 결혼했던 여자는 누구의 딸이겠어요? 그런 질문을 중세 때 아무도 안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쓸데없이 과학자가 있으니까 새롭게 질문이 나온 거예요. 이런 질문이 나오는 전제가 있어요. 과학은 가장 진리에 가까운 학문이다. 뉴턴 이후에 나오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산물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백과사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며, 사람의 딸이 누구냐 할 때 그 존재가 어떻게 생겼으면 어느 위치에 있었으면 몇 년도에 살았는지 시간과 공간으로 하지 말고 기능으로 설명해야 돼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기능을 하고, 사람의 딸은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그 기능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기능자로서 그들은 생산되게 돼있습니다. 언약에 대적하는. 그러니까 사탄이라 하는 것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은 뱀이었지만 그 이후에 역사의 과정에서 천국의 실체도 점점 늘어나는 동시에 사탄의 실체도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경우를 같이 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거인족이죠. 이 거인족은 바로 이스라엘이 공격해야 될 가나안에 있었습니다. 정탐꾼을 왜 보냅니까? 자기가 자기 시간에서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안 돼요. 왜 자꾸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참 위대한 점은 안 보고도 믿는 게 아니고 보고서도 믿었다는 사실이 위대해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시력이 남보다 더 뛰어난 게 아니거든요. 동일한 조건에서 정탐했잖아요. 그런데 열명은 똑같은 것을 보고 망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들은 장대 같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 똑같이 보면서도 그러니까 우리 것이란 거예요. 열명이 제시하는 원인과 결과의 논리구조와 갈렙이 제시하는 논리구조가 서로 맞지 않아요. 그것은 바로 열명의 지파는 애굽의 논리구조가 그대로 유지됐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만한 믿음을 미리 당겼기 때문에 그 믿음을 경유해서 본 거예요.
그래서 천국은 하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이 바로 이곳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 얼굴을 보고 믿겠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이 이 소자한테 한 것이 주께서 한 것으로 믿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이스라엘 가야 성지순례라고 하는 반면에 여러분 계신 중국이 성지순례하고 있는 중이에요. 성지순례의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와 주의 원수가 만나는 지점이 성지순례에요. 거기서 십자가 사건이 발생되기 때문에.
어제 잠간 언급했는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시집을 가려는 아가씨는, 내가 남편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에 몰두하게 되고, 장가가는 인간은 아내를 어떻게 기쁘게 할까에 몰두하게 된다고 했어요. 요새 그런 남자 드물지요. 어떻게 하면 아내의 입술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할까, 어떻게 하면 웃겨서 사는 게 행복이 넘쳐서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대만족하게 할까 하는 남편이 40대, 50대 되어서도 효과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염려해서 차라리 혼자 살라고 할 때 열 지파 정탐꾼들은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라면 해보고 후회하겠다는 쪽이에요.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결혼 안 한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가 결혼 안 했다는 말이 아니고, 예를 들어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뜻이면 고자 되겠다고 나온 거예요. 안 하겠다는 것은 내가 권하는 말로 했으니까 안 해야 천국 간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혼인을 천하게 여기는 그것도 이단입니다. 하고, 안 하고 간에 해도 내 믿음 변동 없고 안 해도 변동 없다는 사람이 나중에 결혼 생활 때문에 신앙생활 못했다는 어설픈 그따위 핑계는 대지 말란 뜻입니다.
아가씨 때는 신앙생활 잘 했는데 결혼해서 잘 못했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선물로 주신 믿음은 오히려 어떤 환경 속에서는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돼있어요. 그렇다면 그 믿음은 뭐냐? 좋은 환경, 남편이 잘 해줌, 어려울 때 자기가 견딤, 그거 아니에요. 환경이 어떻든 간에 그냥 예수님 좋은 것, 그게 믿음이에요. 그냥 예수님이 구원해주셨다. 그게 전부에요. 믿음의 내용은 십자가로 끝나는 거지 뭐 있습니까.
그러니까 고난을 위장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개척교회하면서 고난 받는다고 우기지 마세요. 그건 지 살기 위해서 고생한 거고, 마음대로 안 되니까 고생한 것이지. 원수 앞에서 주의 편에 섰기 때문에 원수로부터 미움 받는 거예요.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아야지 얼굴 못 생겨서 미움 받는 것은 주의 고난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6장에서 계속 나오는 것은 육체 됨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 노아 홍수가 개입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먼저 던져놓고 그 말씀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역사 속에 우발적인 사태를 일으켜요. 그게 뭐냐? 언약 사건입니다. 노아 좋겠다고 하지 마세요. 노아는 남들이 하지 않는 힘든 일을 해야 돼요. 방주를 짓고 그 안에 타야 되고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지 분간도 못하는데 고마운 게 있어요. 함이란 자식이 어떤 자식인지 모르겠고 가나안이 어떤 손자인지 모르겠지만 고마운 것은 동승자가 있어요. 정결한 짐승입니다. 일곱 쌍. 부정한 짐승은 두 쌍.
우리가 같으면 더러운 걸 알아서 제거해줬으면 좋겠는데 잡을 때 정결한 짐승을 잡아요. 이 덕분에 더러운 것도 무사히 심판을 통과했다. 내가 앞으로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너희가 어려서부터 더러운 짐승으로 대변되는 쪽에 속했기 때문에 너희에게는 묻지 않고 정결한 짐승을 받고 내가 너희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인간성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있는 곳에는 봄여름가을겨울과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햇빛과 공기와 물을 주시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신다. 그러니까 너희도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지옥 가는 사람은 은혜를 못 받아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못 받았다고 핑계 댈 수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서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은혜 받은 적 없습니다. 세종대왕이 지옥 가는 이유는, 핑계 댈 게 없는 핑계를 댔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진작 복음 전하지. 뒤늦게 1800년대 언더우드 앞세워서 보내서 우리는 맛도 못 봤습니다. 아니야. 이미 맛봤어. 왜냐하면 은혜는 누구의 희생 덕분에 준 은혜거든요. 햇빛과 공기를 받을 때 주여, 저 같은 죄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왜 주십니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어디를 추적해 들어갑니까? 나는 이런 은혜를 받을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누구야?
만약에 이방인이라면 이스라엘을 만나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성전을 만나고 성전 안에 매일같이 불 속에서 누가 타지요. 상번제, 아침저녁으로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타고, 탄 그것이 모세언약에 충족되어서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이스라엘 주변에 모든 이방나라에 골고루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방나라 사람 백부장이 알았고 동방박사가 알았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이 백부장이 천국의 원 자손이 될 것이다.
노아언약의 시대에 돌입됩니다. 그전에는 약속이 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복습하면 여자의 후손은 여자 이름이 생명이다. 원래 생명은 에덴동산에 생명나무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보내셔서 이제는 역사 속에도 생명이 출현할 수 있도록 주께서 약속대로 따라간다. 따라간다면 여자의 후손은 어디서 발견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있는 곳에만 발견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는 어디서 발견되는가? 이미 원수에 복속돼있는 선악과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함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발견되지 못한다. 그러면 흔적이 되는데 흔적이 있다. 죽었더라. 그럼 사는 게 정상인가, 죽는 게 정상인가? 죽는 게 정상이다. 아담의 형상은 죽는 게 정상이에요. 죽었다고 할 때는 마땅한 형벌이라고 생각하고, 고생하는 것도. 어디서 살았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그 원천을 찾아가라. 그게 언약을 있기 때문에 살았다고 봐라. 그게 그 시대에 전한 에녹의 복음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장차 주께서 심판할 날이 온다. 그게 노아 심판이었습니다.
노아 심판이 전부냐? 아니지요. 도니까. 깔렸으니까 나중에 새 언약에서 다 폭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언약 전체를 두 자로 이야기해요. 총 언약, 새 언약이라 하지 않고 약속이라 합니다. 이미 완성 단계에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에게 준 주님의 지시지요.
창세기 8장 끝에 보면, 봄여름가을겨울 이렇게 복 준다고 해놓고 있어요. 그러면 8장까지 알았지요. 그러면 9장이 비었다고 치고 여러분이 내용을 채워보세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았고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 번 다시 아무런 법을 주지 않는다. 법 없어도 이미 악한 걸 아니까 법 없어도 그들은 봄여름가을겨울, 햇빛과 공기가 있기 때문에 새 땅에서 만족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글을 쓰고 싶지요. 법이 없다고 여겼지요. 법과 무관해서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런데 법이 있어요. 갑자기 9장에 보면,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니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5,6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었다는 말은 창세기 1장 26절 말씀입니다. 어린애가 엿 부대에 들어가서 엿을 먹고도 자기는 안 먹은 척했지만 온 몸에 허옇게 엿이 붙어있지요. 하나님께서 기능으로 다룹니다. 기능으로 다루면 인간이 태어난 모든 곳에 선악과 따먹은 사건에 집어넣어요. 그걸 하나님이 지적하시면서 하나님 형상대로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고맙다고 하면 될 텐데 여기다 법을 집어넣어요. 절대로 피를 흘리지 말라는 새로운 법이 동원됩니다.
여러분은 율례와 율법을 모세가 처음 받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주의 율례와 법도를 따랐다고 돼있지요. 아브라함은 법을 어디서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성경 보면서 안 궁금했어요? 율법이라는 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 이후에 430년 후에 와요. 그럼 아브라함 때는 율법이 없어야 되는데 창세기에 막상 가보면 아브라함이 율례와 법도를 지켰다고 돼있어요. 그 율례와 법도의 내용도 나오지 않아요. 그럼 그 율례와 법도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전승이라는 게 있어요. 노아언약은 아브라함처럼 특정 가족이 누군지 구체적이진 않지만 이미 전승으로 흘러오고 있었어요. 그 전승의 내용이 비춘 것이 욥기에 나와요. 욥은 율법 받기 전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요. 욥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짓지 않은 완전한 의인이지요. 그렇다면 창세기 이야기가 도중에 소실되었을까요, 대대로 흘러왔을까요?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 계속해서 흘러오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을 왜 성경에서 이야기하지 않느냐? 성경은 바로 성령께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증거하기 때문에 언약 중심으로 증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채택해서 쓴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해석할 때 너저분한 것 다 해석하려면 너무 과욕이고 목사가 오버한 게 돼요. 십자가 언약과 관련된 사항만 있다고 하고 그것을 해석할 때는 언약으로 모아서 해석해야 됩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울산에 가면 항구가 있잖아요. 항구에 골리앗크레인이 있어요. 골리앗크레인은 아주 거대해요. 그야말로 공중에서 노는 것 같아요. 크레인 기사가 조종해서 잡아당겨서 이동시켜요. 언약이 뭐냐 하면, 골리앗크레인이에요. 창세기 9장을 해석할 때 창세기 10장, 11장으로 바로 넘어가면 안 되고 그 시대에 적용되는 언약으로 끌어올려서 언약에 의해서 이동시켜줘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십자가 사건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그냥 가버리는 대표적인 해석이 뭐냐 하면, 성전과 그리스도의 관계, 이것은 언약이란 크레인이 없어요. 온갖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어서 해석해서 정말 누가 봐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한 것처럼 보이지요.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성전의 구조란 책들이 나옵니다. 성전을 볼 때 관찰자가 있어요. 성경해석하려고 성전의 구조가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완성되는지 알고 싶은, 히브리서에서 모형이라고 하니까 모형으로 설명하게 되면 그것도 하나에 부흥집회에서 시간 때울 수 있는 멋진 재료가 되거든요. 그림 그려놓고.
문제는 그렇게 관찰할 때 관찰자가 관찰자로 머문다는 거예요. 야구 경기 볼 때 관중석에 앉습니까, 유니폼 입고 야구장에 나섭니까? 나서면 지키는 사람이 쫓아내지요. 우리는 성경을 관찰해서 해석해낼 자격이 없어요. 이미 우리 자체가 언약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는 일부로 있어요. 일부가 전체를 본다?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거예요. 그럼 전체를 보는 분을 찾아야 되겠지요. 전체를 푸는 분은 나를 포함해서 일부에 속한 이것을 이미 다 이루었다고 외친 분이 있어요.
외친 분이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내가 내 주변을 둘러보면서 성경해석을 해서 다 알았다고 외치지 못하게 만들고 왜 따로 골리앗크레인처럼 새 언약의 완성자로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느냐? 그것은 죽을 때 다 이루었지요. 그 죽음은 언약적 죽음이지요. 다시 말해서 언약적 죽음이 아니면 누구든지 전체를 볼 수 있는 해석권이 없다고 이미 판정이 나버린 상태에요. 그렇다면 그런 자격이 없는 우리가 성경 해석한다는 자체가 구라, 거짓말이 돼요.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걸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믿었지요. 그 믿은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지요. 그러면 그들이 해석을 잘못한 거지요. 그 잘못된 해석을 헤쳐 보니까 뭐가 나왔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안 믿었지만 우리 이스라엘은 믿습니다. 그게 포함됐으니까 해석이 정당하다는 거예요. 그랬던 자들이 독사의 새끼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죽을 생각이 없어요. 안개 될 생각이 없습니다. 살아서 뭔가 정보를 확인하고 확인된 정보로 주님 앞에 구원해달라고 제시하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것 아니까 주님께서 날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제시하고 싶어요.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그 자체가 잘못됐어요. 우리는 관여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놓쳐버리고 내가 나서서 “주님이여, 한 수 가르쳐 주세요.” 이렇게 나서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내가 된 것을 받기만 해라. 성령을 통해서 주어질 거야. 주어지면서 나는 뭘 받느냐 하면 모든 해석은 왜 잘못된 해석인가를 감사하면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해석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받는 사실을 우리는 추후적으로 매일같이 느끼면서 오늘도 육신의 본성대로 해석하려고 덤벼들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합시다.
첨부파일 :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10강.hwp (32.0K), Down: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