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 연대연합강의 제8강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8강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8강
(강의:이근호 목사)
어제 이야기한 전체적인 내용을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존재로 대할 것이냐, 기능으로 대할 것이냐? 지금까지 서구신학이 자아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존재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한 의도로써 욕구를 가지고 성경을 본 겁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아예 빠져버려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보다 인간이 주인의 자리에 놓여있게 되면, 동일한 성경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것은 날아가 버리고 인간이 구원받는데 있어서 정보를 획득하는 시도로써 성경을 이용할 뿐이지요.
기능으로 볼 것이냐, 존재로 볼 것이냐? “그러면 우리는 존재를 버리고 기능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육신을 언약적으로 다루는 기능적으로 보면 되겠네요. 우리는 그렇게 살면 되겠네요.”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있어. 내가 보는 관점과 네가 미처 네 자신도 모르는 내가 이런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까발려줄 테니까 그냥 가만있으라는 거예요. 출애굽기 14장 14절 말씀처럼.
홍해를 어떻게 건널 것이냐에 대해서는 홍해 유발자가 건너는 방법도 가르쳐주거든요. 그런데 홍해를 가르는 것은 하나님 몫이고, 홍해를 어떻게 건너느냐는 건너는 당사자, 또 주체입니다. 그걸 못 건너면 내 주체가 죽으니까 인간은 사는 쪽으로 움직이거든요.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는데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는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자동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냥 살고 싶은 거예요.
언제까지 살 거예요? 95? 102살? 죽는다는 것만큼 현실적인 게 없는데 왜 죽는다는 현실을 놓치고 다른 조건으로 현실을 자꾸 재구성하면서 가느냐 말이죠. 그 재구성하는 것도 남의 사정을 인정하는 게 아니고 내 사정을 고려해서 나만을 위한 나만을 향상시키는 그런 쪽의 현실관을 매일 눈만 뜨면 다시 구성되고 구성되는 겁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심각할 때는 주식을 팔았다가 어떻게 해결됐다면 또 주식을 사고. 이러한 행동을 우크라이나를 걱정한 겁니까, 러시아를 걱정한 거예요? 이 틈에 돈 벌어볼까라는 자기 자신만을 걱정하는 거예요. 그러한 버릇이 성경을 대할 때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아니냐?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시겠지.
용납의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대로 현실을 구성하는 그 짓마저 허용하시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나로 하여금 내 멋대로 살고 내 기분대로 사는 것을 왜 하나님께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그걸 방치하듯이 용납해줘요? 내 돈 떼먹고 도망친 사람이 있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서 죽었으면 좋겠는데 들리는 소문에는 그 아들이 이번에 사법고시 합격했다는. 그게 뭐예요?
그게 시편 73편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나는 안 믿는 사람이 잘 되는 걸 보고 미끄러질 뻔했다는 거예요. 그들은 죽을 때도 고난이 없고. 그야말로 삼박자 구원이에요. 모든 일에 형통해요.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돼요. 안 믿는 자, 신앙에 태만한 자, 교회에 소홀한 자가 오히려 열심한 자보다 모든 게 잘될 때 거기서 무슨 신앙적인 의욕이 나겠습니까? 보람, 기대, 그런 것들을 찾을 수가 없어요. 계속 성경지식을 축적시켜놨는데 그것이 내 생활이 개선되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을 때 과연 성경공부,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기능이냐, 존재냐 할 때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취하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는 둘을 나란히 다 함께 가져가요. 왜냐하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천국은 지옥과 겸해 있는 것인데 우리 같으면 지옥을 아예 없애버렸으면 좋겠어요. 여호와증인처럼. 하지만 나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 지옥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란 것도 그렇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기뻐해야 될 주체는 오직 한 분의 주체,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체, 그 주체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뤄서 진행되게 돼있어요.
그러면 피조물은 뭐냐? 피조물은 하나의 기능인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기능인으로 다뤄질 때 내가 보는 기능인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다뤄지는 기능인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언약이 종합이 돼버려요. 제가 대전수련회에서 창세기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사운드오브뮤직]이란 영화를 보면, 마리아 선생이 애들한테 도레미 송을 가르치는 게 있어요. 중창이 아니고 합창을 할 때 도 사라지고 레가 시작되는 게 아니고, 밑에 도가 계속 깔려서 가요. 그 위가 레가 등장해요. 미, 파, 같이 화음을 이뤄서 같이 가는 겁니다. 언약이 하나 끝나고 하나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하나 밑에 베이스로 깔리고 그 위에 중첩되어서 언약이 계속 되는 거예요.
기존의 언약신학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이렇게 같이 중첩되어 나가는 것을 모르고, 김의원 교수라든지 여러 교수들의 문제점은, 인간이 죽어서 천국 갈 거냐, 하늘나라를 어떻게 확장하고 하늘나라에 내가 어떻게 끼어들 거냐 하고 자기 존재부터 시작하니까 이 언약은 지나고 이 언약이고, 이렇게 보는 거예요.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전부터 개입했다는 여기에 초점이 있어야 되는데 어떤 언약이 내 구원에 필요할 것인가를 자기 원하는 대로 성경을 골라잡으려는 그런 의도 때문에 성경해석이 애초부터 암초에 부딪치는 거예요.
리델보스나 게르하르트 보스나 전부 그런 쪽이에요. 영 잘못된 거지요. 왜 그런 신학 현상이 있느냐 하면, 개신교 이전에 중세 때부터 살펴보게 되면, 신학은 유명한 명제가 있어요. 신학은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다. 정답은 복음에서 나온 신학이어야 한다. 이래야 하는데 신학을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 존재이유로 제공하는 그 교회가 실천적 교회냐? 아니면 유형교회냐, 무형교회냐? 그 문제를 또 따져야 되는 겁니다. 어느 교회를 말하는 신학이냐? 교단신학교의 존재이유는 뭐냐? 교단신학을 유포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럼 진리는? 진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단과 교회가 중요하고 신학은 거기에 봉사하면 그걸로 끝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구원은 교단, 교회가 해주는 것이 아니고 제가 알기에는 예수님이 해줘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공격했어요. 그런 유대인의 공격을 우리가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어요. 왜 너만 진리고, 너만 길이고, 너만 생명이냐고 제대로 예수님을 향하여 항거해야 되고 대항해야 됩니다. 그게 우리의 본색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제거될 생각은 안 하고 진리라는 예수님 덕분에 나도 진리이고 싶어 하고. 뭔가 이용해 먹고자하는 주체적 속성이 또다시 발휘되는 거예요. 마치 제자들처럼. 하지만 베드로에게 권력자가 위협하니까 베드로는 나름대로 몸부림쳐 보지요.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벴지만 말고의 귀나 쳐서 혁명이 성사되겠어요? 어설프게 욱하는 성질에 칼 휘둘러서 되겠어요?
또 뭐라고 장담했느냐 하면, 다른 제자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는다. 입은 있어서 할 소리를 다해요. 베드로가 고마워요. 우리 할 소리를 대신 대해주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 빠진 게 있다. 뭡니까? 악마다. 네 눈에 악마 안 보이지? 안 보일 수밖에 없지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성령은 악령을 대동하고 오거든요. 성령 혼자, 악령 혼자 등장하지 않아요. 반드시 천국과 지옥은 같이 오고. 화투장에서 앞면, 뒷면 같이 오듯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같이 나타나듯이, 성령이 오는 것은 악령이 같이 와요. 내가 성령이다가 아니라 무엇이 악령인 줄 아느냐고 지적하면서 오는 거예요.
정통? 이단과 겸하여 와요. 네가 이단을 아느냐? 그렇게 부정적인 말씀만 하지 마시고. 이건 부정적, 긍정적 문제가 아니고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긍정적인 것을 선택하겠다는 것은 지 자유지만 주님의 차원에서는 짝을 이루고 온다니까. 한쪽은 버리고 한쪽은 선택하는 그런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다니까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주신 아벨 대신에 다른 신을 주셨다 하고 그때부터 여호와 이름을 불렀잖아요. 여호와 이름의 기능이 뭘까? 여호와 이름을 왜 불렀지? 하고 보니까 5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와요. 하나님의 형상이 창세기 1장으로 끝난 줄 알았어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분명히 형상대로 만든다고 했단 말이죠.
그 형상의 기능 가운데 종속된 기능이 뭐냐 하면, 선교단체에서 애용하는 유명한 말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이 계명, 문화사명, 칼빈주의적 문화관, 아브라함 카이퍼, 네덜란드의 개혁신학, 존 스토트, 이런 계통, 소위 ccc 계통으로 들어오는 건 전부 문화사명이에요. 소년이여 꿈을 꾸어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여호와 이름이 등장하면서 형상이 다시 됩니다. 이 말은 창조는 1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여호와 이름이 주체가 되어서 시작할 거라는 거예요.
어린애가 엿 맛을 보고 엿이 너무 달고 맛있으니까 엄마가 외출하고 난 뒤에 엿 부대에 들어갔어요. 엿을 붙지 말라고 밀가루를 발라놓잖아요. 그때 엄마가 들어왔어요. 어린애는 마지막 엿을 먹고 입술을 닫았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보고, “너, 엿 먹었지?” 아이는 이상한 거예요. 분명히 입술을 닦았는데. 엿은 없어요. 과거에 먹었지, 현재는 남아있지 않았는데. “엄마는 도사다. 어떻게 알았지?” 옷에 온통 허옇게 다 묻혔는데 어디서 왔겠습니까?
선악과 이야기할 때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목사님. 우린 선악과 안 따먹었어요.” 맞아요. 주체 입장에서는 인간의 주체는 자기 생년월일에 있고 이전의 일은 책임이 없는 걸로 돼있거든요. 그런데 로마서 5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온다고 한 거예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개체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의 기능으로 간주한 거예요. 기능으로 간주하면 인간을 계속 생성하면서 하나님의 형상과 창세기 4장에 있는 여호와 이름을 직접 결부시켜버립니다.
인간의 죄로 버려진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식으로 회복되는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간주되는 그분에 의해서 지상에서 인간과 동행하면 또는 간여하면서 훼손된 창조, 본래 형상이 있어야 인간이라고 쳐주는 그 인간, 그 형상을 이제는 망가진 인간 주체의 몸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이름이 그들과 동행하면서 지켜나간다는 겁니다.
아이가 하얀 밀가루 묻어있으면서도 모른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엿 부대 속에 집어넣어서 옛날에 있었던 창세기 2장, 3장 사건을 인간 대대로 이어지는 혈족 가운데 되풀이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악과는 어디 있느냐? 그것은 움직이는 선악과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선악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거기서 독 안에 든 쥐가 계속 새끼를 까는 것처럼 거기서 선악과 확산되고 확대되면서 여전히 생명나무와 대치되는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제가 어제 강의하면서 사탄이 보고 싶지 않느냐고 했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사탄이 어디 있느냐? 뱀이 에덴동산에 등장해서 그 짓하게 된 원인제공자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면 인간이 범죄 하거나 고생할 이유가 없어요. 어떤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탄을 보려면 이 지점에 오시면 사탄을 만날 수 있어요. 이 선악지점에서 인간은 선악과만 보였던 겁니다. 뱀도 이것만 지적했고. 선악과 따먹어라. 생명나무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어요.
사탄이 알면서 그랬는지 모르면서 그랬는지 사탄이 못된 존재인데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짝을 이룬다고 했잖아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짝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사탄은 암시한 적이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 무심코 가는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따먹지 말라는 조건 속에 생명나무가 포함 안 됐거든요.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조건은 어떤 사건 이후에 새롭게 밝혀진 사건입니다. 선악과 따먹을 경우에는 절대로 생명나무 따먹는 것을 허용치 않으리라.
그러면 진즉에 이야기하지. 왜 진즉에 이야기하지 않느냐 말이죠.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뒤쪽으로 서로 연결돼있다는 것을 진즉에 이야기하지.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안 먹을 거야. 그런 마음으로 아담이 따먹었습니까? 보이는 것은 선악과뿐이에요. 하나님께서 마귀를 선악차원에서 영원히 형벌을 주고자 하는 그 늪에 마귀와 인간은 다 빠져버렸어요.
악마가 하늘에서 미카엘과 싸우고 예수님과 싸울 때 그들이 시비 건 것은 이거에요. 왜 하지 말라는 것을 피조세계에 법칙으로 고정화시키느냐 말이죠. 왜 피조물은 하지 말라는 안에 갇혀야 되는 천지를 만드셨습니까? 그게 불만이에요. 이게 지금 마귀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까? 아이들이 엄마한테 대드는 경유가 뭐예요? 아이들이 처음 배우는 말은 맘마, 아빠. 조금만 지나면 뭐 배우는지 알아요? 하지 마아~. 하지 말라는 것은 엄마가 먼저 아이들한테 주입시켜요. “그것 하지 마. 고추장이야. 그건 나쁜 거야. 거기 가서는 안 돼.” 그걸 아이가 언어를 들었던 말이죠.
“이것 해?” “하기 싫어.” 이게 몇 살 때냐?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거울단계, 상상계에 속하거든요. 6개월 이후에 그 다음 단계(2년 6개월)에 생기는 현상이란 말이죠. 2년 6개월 지나고 신앙교육, 도덕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 채찍과 당근이에요. 그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싫어’, ‘안 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당장 기어 다니는 아이는 언어로 표현 못하고 동물처럼 그냥 울지요. 그래서 29세까지는 인간이 계속 성장한다는 거예요. 청춘? 아프니까 청춘인 거예요. 30 되면?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경미 시인)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창조 끝난 다음에 하나님을 안식하셨잖아요. 하나님에 영광이 되는 요건들이 갖추어져야 영광이 돼요. 하나님의 창조를 훼손케 할 때는 그걸 완성케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관리하고 완성시키는 가운데 진행됩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이름이 형상의 만남.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 장차 어떤 인물로 되기 위한 동행하시는 하나님, 다른 말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고난에 동행하셔서 그들이 뿜어내는 죄로 인하여 희생과 아픔을 손수 겪으시는 하나님, 그분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이름은 번제와 속죄제,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릴 때 어린양, 흠 없는 제물로 제사 드릴 때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동행하지 않습니다. 동행하는 하나님은 하나님 쪽에서 따로 주어진 거예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이름입니다. 주어질 때 언약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하나님 이름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도레미 송 다시 하면, 도~, 레~, 미~. 도가 끝나고 그 다음에 레하는 것이 아니고 도는 도대로 그냥 가요. 도는 깔리고 그 다음에 레 끝날 지점에 미. 레도 살아있고, 도도 살아있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아브라함, 이삭, 야곱언약이 주어지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그 인생 아브라함언약에 저촉 받고 이삭언약, 야곱언약 다같이 합창단으로서 복합적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인간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 훼손당한 시점이 주의 이름이 개입하는 시점이거든요. 인간이 원망했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님 이름으로 어떻게 개입해서 다시 그것을 유지시키고 언약대로 성취시켜나가는가를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그 다음 세대가 또 탄생해야 되는 거예요. 탄생했던 세대는 새로운 언약의 투입으로 그 언약에 맞추어서 실패해야 되고, 실패한 그것을 성공하면서 성공 자체를 새로운 언약으로 구축되고 집합되는 장소에서 계속 동행하는 겁니다. 완성의 때까지.
방금 제가 ‘완성의 때’라 했지요. 엄청 어려운 단어에요. 카이로스, 에이온, 크로노스. 이 셋 중에 때가 어느 시간개념을 도입하느냐에 따라서 성경해석 다 달라져요. 성경해석에 있어서 내가 있다고 하면 그때를 사람은 자기 자아성이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 계산하다보니까 주께서 오신다는데 벌써 이천 년이나 됐는데 온다는 거야, 오다가 갔다는 거야, 안 오면 안 온다고 통보나 해주지. 아무 소식 없고. 소식 없는 것을 예상하시고 이렇게 겁주네요.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어쩌라고? 견뎌야 되는데 너무 지루하단 말이죠. 사도바울도 그렇게 지루했겠습니까?
샌더스라는 지난 20년간 인기 있는 남아공의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쓰면서 곧장 올 줄 알았는데 안 오니까 다음에 편지쓰기를 미안하다. 우리 시대에 올 줄 알았는데 미안하다. 기다리는 형식을 수정하자. 가만 보니까 내가 착각했다. 이제부터는 느긋하게 기다리자. 교회 만들어서 직분 세우고 기다리자. 이랬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사도바울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거지요.
사도바울의 편지는 함부로 풀어서는 안 되고 성령에 의해서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함부로 풀다가 망한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내가 배운 것이 사람에게 배운 게 아니고 주님께 직접 받은 거예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의 말씀인데 그보다 더 어려운 말은 8절인데 그 말씀은 모든 철학자를 삐지게 만들어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 했거든요. 방금 우리 속에 사도바울 본인도 포함돼있지요. 사도바울도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전한 본인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제가 어제 지옥 갈 것을 선택할 사람은 없다고 했지요.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소리해요. 내가 유대인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걸 용납하겠다는 거예요. 미쳤어요? 그 대목에 있어서 목회자는 휙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목을 야무지게 씹고 새겨서 가다가는 교인들이 마음속으로 손가락을 그런 설교한 목사한데 향할 수 있거든요.
사도바울은 자기 유대인 구원하겠다고 자진해서 지옥 가겠다고 용감하게 나섰는데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목사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진해서 지옥 갈 그런 마음 준비돼있습니까? 우리는 성경 보면 잠 오고 실체를 보고 싶습니다. 성경은 마취용이고 실제로 말씀대로 산다고 우기는 당신의 사생활을 보겠습니다. 자기 교인 살리기 위해서 자진해서 지옥 갈 마음준비가 돼있습니까? 그래야 로마서 9장의 말씀이 성령이 구체화될 것 아닙니까. 혹시 따질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그냥 슬쩍 넘어가지요.
제가 지난 주일오후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목사치고 교인부터 먼저 챙기는 사람 없습니다. 항상 자기부터 챙깁니다. 그러니까 목사한테 주님의 희생을 기대하지 마세요. 목사가 십자가 진 게 아닙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 말은 주의 종을 건드리면 저주받는다는데 축복의 저주의 기준은 도레미 송, 언어에 의하면 이미 확정돼있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저주받고, 부르면 축복을 받게 돼있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파이프에 죄가 차있으면 저주되거든요. 그런데 파이프로 예수의 피로 죄가 없어지면 이제는 모든 것이 축복이 돼요(에베소서 1장 7절 참고). 저주로 오거든 반갑다고 마중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 저주가 다 복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상은 너를 미워하거든 널 보고 미워하는 게 아니다. 나를 보기 때문에 미워한다. 그 말은 은혜로운 말씀이 아니고 상당히 움찔거리게 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과 우리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있는 거예요.
어제 식당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목사님이 “정석훈 목사님이 이근호 제자입니다.”라고 하니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제자 아닌데요. 아무런 계약서도 없어요. 말은 소용없어요. 말은 오전 10시고, 오후 5시에 다를 수가 있어요. 말은 기분 따라 달라질 수가 있어요. 계약서가 없다니까요.
데카르트에 이후에 근대시민이 있고,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근대국가가 성립됩니다. 국가라는 개념이 18, 19세기에 생겼어요. 그전에는 국가가 없었어요. 놀랍게도. 그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경제, 사유재산이에요. 사유재산은 바로 법, 계약서로 유지돼요. 사유재산을 어디서 인정받느냐 하면,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시장에서 인정받는 거예요. 시장은 모든 종교, 문화로 확대됩니다. 이게 자본주의사회가 되는 거예요. 자본주의사회는 남자, 여자, 어린아이, 어른이냐를 묻지를 않습니다. 모든 가치는 두 가지밖에 없어요.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분명히 내가 정석훈 목사를 제자라고 했다가 여기 와서 딴 소리하면 정석훈 목사가 계약서를 가져와야 돼요. 목사님의 경거망동 때문에 정신적 피해를 뭐로 보상하라? 돈으로 보상하라. 이게 근대 자본주의사회에요. 그러면 제가 계약서 보자고 나오지요. 사인을 안 한 거예요. 사인 안 했으면 소용없는 거예요.
자본주의사회가 어디서 생겼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도레미 그 여파가 결국 자본주의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는 바로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에 나오는 두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이 최초에 등장한 자본주의적 도시국가입니다. 무역이 없으면 잉여가치가 발생되지 않습니다. 잉여가치가 발생돼야 인간의 노동도 하나의 돈으로 환산돼요. 노동시장이 형성돼야 돼요. 그러면 그것은 바로 잉여가치지요. 그러니까 자본이 많은 사람한테는 인간의 가치가 인격, 믿음, 소망, 전혀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 시장에서 구매자가 얼마로 쳐주느냐가 가치가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옵니다. 사람들이 사고파는 물품 속에 인간의 영혼이 포함돼있어요.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풀려면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알아야 돼요. 그걸 알게 되면 요한계시록 해석에 어떻게 유리하냐 하면, 요한계시록을 푸는 나 자신도 자본주의에 말려든 거예요. 요한계시록을 잘 푸는 목사가 목사라는 노동시장에서 값을 많이 받는, 큰 교회에서 초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생활비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값어치가 높은 목사가 되고 요한계시록을 전혀 못 푸는 목사는 가봤자 쫓겨나고 갈 데 없고. 정확한 현실입니다. 꿈꾸지 마세요. 현실은 우리가 꿈꾸기 전에 먼저 우리를 덮쳤습니다.
철학을 공부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철학 공부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공부했을 때 노동시장에서 나의 가치를 철학을 모르는 사람과 대비해서 얼마나 생활비를 더 받겠느냐와 연관돼있어요. 그래서 결혼은 돈 보고 한다. 딴 소리지만. 자식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자식이 얼마나 가치 있을 것인지 투자하는 형식입니다.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시장에서 마치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못 빠져나오듯이 자본주의사회라는 최종 형태의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속에서 단 한 분만 빠져나왔어요. 여호와의 이름. 이제 여호와의 이름이 새롭게 애굽을 만들어낼 거예요.
다시 합시다. 천국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지옥과 짝을 이루면서 온다. 여호와 이름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애굽은 지리적으로 멀어졌어요. 하지만 여호와 이름이 가는 곳에서 새로운 언약이 투입이 되고 그 언약에 걸맞은 새로운 애굽이, 출애굽 되어야 될 애굽이 그 주변에 새롭게 발생됩니다. 이스라엘이 초반에는 모압, 암몬, 블레셋, 아람 그런데서 버텨내야 돼요. 그런데 그들이 언약을 잊어버린 사사기 이후에는 내부에서부터 내부의 이스라엘을 빠져나와요.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처럼.
내부의 지파 간의 갈등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지파가 거기서 뽑혀져 나오느냐? 지파가 열두 지파인데 하나가 더해지면서 열세 지파 되면서 한 지파가 메타 차원으로 승격됩니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레벨로 등장합니다. 이 지파가 레위지파거든요. 레위지파의 숫자가 희한하게도 다른 지파의 족장들의 숫자와 동일해요. 일부러 광야에서 숫자가 엇비슷하게 가요.
레위지파 떼면서 열두 지파를 유지하기 위해서 요셉지파가 둘로 나눠지잖아요. 새로운 언약이 가미되면 레위지파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원천으로 올라간다 이 말이죠.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제사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아니하면 다른 말로 하면 모세언약이 유지되지 아니하면 노동에 합당한 소산물을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레위지파가 제사를 제대로 드렸다는 증거는 그들의 노동에 달린 게 아니에요.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 때 산 밑에서 여호수아가 싸운 것과 상관없이 전쟁은 무엇에 좌우됩니까? 모세 지팡이가 올라가나, 내려가느냐로 좌우됐잖아요.
똑같은 구조로 지금 레위지파가 올라간 거예요. 올라가고 난 뒤에 모든 땅의 소산물 가운데 세금을 내요. 그것도 제일 좋은 것으로. 맏물을 십일조로 해서 레위지파에 드리고 그걸로 끝입니다. 그들은 땅을 갖지 않는 대신에 땅의 10%를 거두면서 유지되는 거예요. 사실은 레위지파가 수입이 제일 많은 편이 되지요. 열두 지파니까 100%를 넘어서거든요.
문제는 10%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그들은 10%를 내는 생각이 아니라 맏이를 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출애굽 이후의 맏이는 그 가정의 소속이 아니에요. 출애굽의 목적이 뭐냐? 맏이 생산에 있습니다. 출애굽 하기 전에 할례를 행했고 그 다음에 어린양 심판 오기 전에 미리 안 알려줬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갈구는 성질이 있어요. 뭔가 미리 알려주고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고 미리 안 알려줘요.
애굽의 맏이들 다 죽었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반대는 뭡니까? 애굽의 맏이는 다 죽었다. 우리 집 아이는 살았다. 이렇게 반대로 생각하잖아요. 그것 틀렸습니다. 애굽의 맏이가 죽어서 없어졌잖아요. 동시에 이스라엘의 맏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어린양 이후에 모든 맏이는 바로 내게 속했다. 첫 소산, 첫 아들은 다 내게 속했다. 강제로 맏이를 빼앗는 겁니다.
맏이를 빼앗아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언약 안에서 전환시키는 겁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면 다른 신분을 갖추는 것처럼 아직 예수 안이라는 완성이 아닌 그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아래서 이 맏이가 새롭게 다른 위상을 갖게 돼요. 그 맏이가 가정에 내려오게 되면 맏이와 더불어서 약속의 땅을 부여받을 수 있는 배급권을 가집니다. 그걸 기업, 상속이라고 합니다.
이 코스를 따라가 보면 출애굽 사건은 홍해 건넜다고 과거 사건이 아니고 도레미파솔~처럼 이스라엘이 있는 이상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반복적으로 이뤄진다는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역사적 해석법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반복해서 진행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어요.
보만이라는 유명한 교수가 지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란 책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히브리적 사고는, 1234567 그 다음은 8910입니까? 다시 1234567.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이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늘 수직에서 수평처럼 누르고 튕기고, 누르고 튕기는 거예요. 누르고 튕기는 그것이 그냥 동일한 언약이 아니라 인간이 죄 지을 때마다 희생의 강도를 더하면서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 언약을 보여주는 외부적 환경이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드는데 바로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가 무엇이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과거 일이 아니고 현재진행형이 되는 거예요. “저 선악과 본 적도 없어요.” 이러지 않고. 선악과나무는 훼손되었지만 훼손되지 않은 나무가 있어요? 생명나무지요. 생명나무가 역사 속에서 여호와 이름과 함께 동행하게 되면 왜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가가 계속 취지가 살아있는 거예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여야 하는데 이미 그 형상이 마귀와 합작해서 깨어져버린 거예요. 깨어져버렸다, 깨어져버렸다를 반복하는 가운데서 뭔가 나오는 게 있어요. 깨어졌으면 끝내버리면 왜 유지됩니까? 유지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창조는 완성이 되는 수단 중에 하나가 죄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하늘나라 완성을 이뤄가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난해하고 복잡한데 이것만 알면 난해하고 복잡할 것 하나도 없어요. 나는 존재가 아니고 나는 하나에 언약의 기능인인데 나의 육신은 뭘 주장한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내 존재를 주장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첨부파일 :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8강.hwp (30.0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