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 연대연합강의 제7강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7강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7강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일부러 그렇게 물은 게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분지어야 돼요. 시편 110편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이미 다윗 때 나왔거든요. 그걸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그 다음에 나온 게 원수, 그 원수가 뱀이란 말이죠.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의 정체가 뭐냐? 뱀을 후려치는 사람은 땅꾼이지요. 땅꾼이 메시아가 아니거든요. 땅꾼이 메시아가 아닌 것을 우리는 알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뱀의 머리를 후려치는 땅꾼을 마치 메시아인 것처럼 표현을 그렇게 하느냐 말이지요. 뱀 잡는 땅꾼을 메시아라고 할 위인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주님 쪽에서 표현을 어렵게 끄집어내시느냐 말이죠. 믿으란 말인지 믿지 말란 말인지. 딱 지적해서 이 인물이 사탄이라고 하면 안 하는데. 이건 데살로니가후서도 마찬가지에요.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온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이름을 밝히시고, 성은 누구고,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지 우리가 주체라 할 때 시간과 공간, 위치를 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주면 편하겠어요. 그런데 뱀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정도의 위치를 설명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뭐냐? 그래서 제가 답변한 것이, 우발적인 사태 속에서 발견된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럼 우발적인 사태가 어떤 사건이냐 물으시면, 원인은 없는데 결과만 들이닥치는 것. 그러면 우리는 그걸 볼 때 닥쳤다, 당했다고밖에 표현할 없어요. “형, 날 때릴 거지? 이쯤 가면 돌로 칠거지?” 아벨은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냥 당한 거예요. 그리고 형도 마찬가지에요. “동생을 죽여 버리겠어. 내 취미는 동생을 없애는 거야.” 그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동등하게 같이 받으면, 동생 때려 못 죽여서 환장한 형 없습니다. 그리고 형도 동생을 죽이려고 않았어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지방에 죄가 엎드렸으니 들이닥치는 거예요. 죄가 꼭 개 같아. 죄가 엎드려서 지금 너를 덮치고 있구나. 그렇게 하나님이 미리 아시면 쫓아버리면 될 텐데 닥치고 있다고 해놓고 덮쳤네, 덮쳤어. 완전히 돌아버렸지요.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이 아시고 죽고 난 뒤에 찾아왔습니다. 당한 아벨의 입장에서는 무척 억울해요. 아시면서 왜 말리지 않았느냐.
제가 했지요. 우리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사는 것은 다른 노선에서 발견된다고. 이쪽 노선은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이미 죽은 자에요. 방향성이 흙이 되어가는 과정, 이름이 아담이니까. 그러면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생명은 특별조치로 같이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심어줬습니다. 여자에게. 여자의 이름이 졸지에 ‘생명’이라는 겁니다.
이것도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차단했지요. 생명은 어림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철저히 차단해야 되는데 주께서 생명을 막아놓고 여자 이름을 생명이라고 해버리면, 어느 게 생명이고 진짜 생명이냐? 같은 생명이냐, 다른 생명이냐? 이런 복잡한 문제가 야기되는 거예요. 저만 복잡한가요? 여러분은 안 복잡하던가요?
여자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여자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묵시적 존재로 만든 겁니다. 방금 존재란 말 쓰지 말고 사건이란 말을 쓰면서 왜 당신은 존재란 말을 쓰느냐? 지상에서의 존재는 반드시 ‘역사적’ 존재에요. 역사적으로 인간의 흔적이 우선 있으니까. 그런데 ‘묵시적’ 존재라고 말할 때는 이 세상에서 사건으로 나타난다고요.
예를 들면, 물어봅시다. 어렵기 때문에 묻고 해야 돼요. 이삭이 태어날 때 누구 뜻이었습니까? 세 분의 천사가 왔지요. 이름을 누가 지어줬습니까? 천사가 지어줬잖아요. 이삭의 존재는 어느 소속입니까? 천사는 역사를 초월한 묵시적 존재지요. 그러면 천사가 이야기한 이삭은 묵시적 약속 인물이지요. 그런데 태어나기는 사라의 역사적 존재(늙어죽는, 흙으로 소멸하는)에서 태어났지요. 그러면 역사와 묵시의 유일한 만남은 묵시적 존재가 와서 약속을 남겨야 돼요.
천사 오라고 아브라함이 초청했습니까? 아니지요. 난데없이 천사가 들이닥쳤어요. 그러면 이건 누구 조치였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그냥 당했을 뿐이에요. 그냥 왔어요. 다메섹에 내려가는 사울이, “지금쯤 나사렛 예수가 나타날 때가 됐는데?” 이랬습니까? 그냥 덮쳤잖아요. 우발적 사건이죠.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우발적 사건은 원인을 제공할 수 없는 거예요. 결과만 사울은 바울이 된 겁니다. 똑같은 방식이 아니면 구원 못 받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면 거듭날 것이라고 예상하면 안 돼요. 예상하는 건 자유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만약에 복음을 알았다면 절대로 기도원에 가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거기다 접목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누가 뭐래도 자기 자랑이 돼요. 그 방법은 주께서 채택하지 않습니다. 금식하세요. 금식하시되 당한 당사자는 본인이 놀래요.
사도행전 3장에 성전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했지요. 누가 놀랬습니까? 앉은뱅이도 놀랬지만 관중들도 놀랬고 베드로와 요한도 놀랬습니다. 이미 예상한 대로 관중들은 묻습니다. 당신의 경건함으로 이 사람을 낫게 했지요? 베드로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저의 능력으로 건짐을 받지 못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 3장 16절에 보면, 저 사람이 낫게 된 것에서 우리를 빼주세요. 왜? 그 사람이 나은 것은 그 사람에게 주신 주님의 믿음으로 낫게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관중들 보기에 베드로, 요한, 앉은뱅이, 관중들 외에 그 무대에 등장인물은 없지요.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건을 통해서 누굴 등장시킵니까? 지금 주님은 이 현장에 방금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다만 목격자일 뿐입니다.” 그 목격자에서 나온 용어가 주의 증인, 전도자에요. 전도자, 선교사가 뭐라고요? 목격자에요. 어떤 목격자? “보세요. 지금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이상하네. 그게 왜 안 보일까?” 그걸 증거하는 목격자입니다. 이게 이해될 문제가 아니에요. 저도 그냥 증언할 뿐이에요.
그래서 누가 구원받았다는 말입니까? 아벨입니까, 가인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은 성경해석하면서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의 받았다고 했잖아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아벨이 형한테 맞아죽는 일이 벌어져야 끝나는 거예요. 왜 그걸 쏙 뺍니까? 아직 드라마 50회 끝나지도 않았는데 25회 보고 드라마이야기하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음으로 주께서 유발시킨 우발적인 사건이 원인이 되어서 아벨이 죽었다면 아벨의 죽음은 우발적 사건이지요. 역사는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데 거기에 우발적이 되면 묵시적 사건이 개입되는 순간입니다. 묵시적 사건이 개입된다는 것은 묵시적 존재가 개입되는 순간이에요. 그것이 바로 약속을 이루는 주체의 등장입니다. 어떤 때는 아벨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스가랴의 모습으로.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아벨과 스가랴의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예수님의 노선은 묵시적 노선인 거예요.
히브리서 7장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설명하면서 멜기세덱 족보와 연결시킵니다.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가 몇 %냐고 묻지 않고 누구냐고 물어요. 예수님이 바로 십일조에요. 아까 돼지털 이야기했지요. 돼지털 하나 뽑아서 분석한다고 율법 되는 게 아니고 돼지털은 돼지 몸통과 경유해서 나와야 돼요. 십일조, 안식일, 그건 예수님 몸통을 경유해야 돼요.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누가 안식일 안 지킨다고 너희를 함부로 비난하느냐? 그럴 필요 없다. 이미 모든 율법은 주님의 십자가로 찢어버려도 괜찮다. 만약에 그걸 안 찢는다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2장 16절과 갈라디아서 4장에서 아직도 절기와 월삭 지키고 한다면 내가 전한 복음이 헛될까 함이라고 돼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모든 사도바울의 발언은 우발적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 말씀을 성령에 의해서 전하게 되면 우리는 그 우발적 사건에 의해서 빈번하게 당하고 또 당합니다. 성도는 매일같이 주님의 우발적 기능에 휘둘리게 되고 휩싸이게 되고 남들은 알지 못하는, “주여 그만 괴롭히소서. 정말 짜증납니다.” 주님이 와서 나를 힘들게 만들지요.
회사 경영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와서 당신 제품에 하자 있다고 덤벼들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뭡니까?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제가 지난주일에 예배 참석한 줄로 아는데요. 왜 주여 하필이면. 그 비슷한 노래가 임재범이 불렀던 [고백] 저 여자만 허락한다면 제가 죽어도 좋습니다. 제발 저 여자만 주시옵소서. 무슨 그런 기도 응답이 다 있는 줄 모르겠어. 그 여자가 우상이 돼버렸지요.
우리 이 몸이 언약적으로 다루면 육신인데 언약을 생각 안 하면 자아가 돼요. 자아는 존재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존재가 되면 하나님을 존재로 봐요. 기능이 아니고. “주여, 거기 계시지요? 제 소리 들리지요. 주여, 지금 십일조 올라갑니다. 거룩한 제단을 특별히 구별했습니다. 주일성수 도장 찍었어요. 주여, 받으시옵소서. 했습니다. 이제 갑니다.”
존재는 존재를 부르지요. 포이에르바하는 그게 바로 신은 자기의 적응이라 해요. 배트맨 영화에서 옥상에 배트맨 상징물에 조명을 비추면 밤하늘에 배트맨 문양이 비추지요. 하늘에 배트맨이 있는 게 아니고 모양새가 건물 옥상에 있지요.
내가 여기 존재하매 신은 저기에 존재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선악과 따먹은 속성들로 주고받는 겁니다. “주여, 선은 귀하게 여기시고 악은 버리라고 했지요. 지금 잘 버리고 있지요?” 선악으로 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예 선악 자체를 몰라야 내가 원래 창조했던 인간이라는 겁니다. 선악은 주님만 알아야 되지 피조물 된 인간은 알면 안 돼요. 선악에 대해서는 주님이 알아서 해요. 악이 뭐냐? 악마거든요. 선악에 따른 조치는 주의 이름이 알아서 조치하는데 네가 왜 끼느냐? 마귀가 그걸 알고 일부러 집어넣었지만. 꼬셔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난처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집어넣었잖아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을 건드리면 곧 뭘 건드린 게 돼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중요하냐, 형상이 중요하냐? 이것은 마귀도 다 알고 있어요. 인간보다 형상이 더 중요하거든요. 우리의 형상이 들어있는 인간이 있단 말이죠. 마귀는 인간을 공격한 게 아니에요. 정작 뭘 모독하겠다는 거예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공격하는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이걸 철학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인간은 삼분설이지요. 동물적인 것, 혼적인 것, 영적인 것이 있다고 하지요. 조직신학에 이런 게 있어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공유적 속성은 하나님도 있고 인간에게도 있는 것, 비공유적 속성은 하나님에게는 있는데 인간에게는 없는 것, 그게 문제가 됩니다.
공유적 속성은 뭐냐? 에베소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으라. 이것은 새사람인데 거룩한 것이다. 거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도 갖고 있고 인간도 갖고 있는 공유적 속성이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구나. 이걸 내 몸에서 쇠퇴하면 안 되고 흐릿하게 하면 안 되고 기도하게 되면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이 밝아지게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비공유적 속성에서 문제되는 것은, 예수님이 우신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그때와 그 시는 모른다는 거예요. 그때와 그 시는 아버지만 안다면 본인은 뭐예요? 앎의 한계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모르는 거네. 모르는데 하나님이 돼요? 거기다 부자 청년 만나서 하는 말이, 선한 선생이라고 하니까 선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할 때 자신은 덜 선한 거예요?
비공유적 속성은 이런 문제점이 있어요. 예수님의 전지전능에는 한계가 있다. 또 울기는 왜 울어요. 예수님이 세 번 울었는지 두 번 울었는지 확실치 않아요. 성경은 우리가 원하는 해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묵시적 기능만 보여주기 때문에.
아까 장기 알 자체가 존재가 뭐냐를 보여주는 아니지요. 그것이 어울려서 보여주는 게 장기 게임이고 규칙이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가 주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의 룰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존재가 되다보니까 우리는 내가 선택하고 싶은 거예요. 좋은 것, 선한 것, 주님이 기뻐하는 것을 내가 알아서 미리 알아채서 하게 되면 항상 내가 원인자가 되지요. 내가 예상이 돼버려요. 여기서 모델을 찾게 돼있고. 누구를 본받으면 주의 형상을 본받는 게 될까 하고. 가까운 교회부터 해서 훌륭한 목사를 찾게 돼요. 찾아서 타협에 나서요. 어느 정도면 따라붙을 것인지 계산하면서. 그리고 하다 안 되면서 항상 반성하고.
도대체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의 인식이, 바리새인은 안 죽었어요.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살아있어요. 주의 계시도 아닌데 좋은 경험을 계시에다 추가시켜요. 그걸 간증집회라 합니다. 제가 암에 걸렸었는데 나았습니다. 듣는 순간 교인들도 나도 암에 걸렸으면 좋겠다. 암이 좋아서가 아니라 암에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는 이벤트가 그리운 거예요. 왜? 그렇게 되면 그 사람 못지않은 신앙인이 되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신화는 영웅설화입니다. 영웅설화의 특징은 잘 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일단 고난에 들어가요. 신의 도움으로 나중에 놀라운 파격적인 위대한 존재로 변화됩니다. 춘향전, 심청전, 그리고 안티고네. 하여튼 세상에 모든 것이 영웅주의에요. 모든 영화, 드라마를 보세요. 공통점이 고난을 받지만 인간적인 용기와 의지와 강한 신념(기독교에서 말하는 강한 믿음)으로 쓰러질 뻔하다가 이겨내서 마지막에 원수를 갚았다고 하잖아요.
[마법의 성]이란 노래에서 공주 하나 차지하려고 산 넘고 물 건너고 하잖아요. 그 노래가 우리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를 줍니까. 김종환의 [존재의 의미]란 노래 알아요? 실직자나 변변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 여자들은 몰라요. 남자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달려갈 테니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야. 2절 가사에 보면, 쓰러져 피곤에 치쳤지만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성공해서 너와 결혼할 테니까. 그 노래 들어보세요. 조금 늦는다고 아주 늦는 건 아니라는 내레이션이 나와요.
왜 그런 노래가 사람한테 인기 있고, 왜 그런 설교를 듣고자하는 겁니까? 좋은 일에 대해서 자기도 한 다리 끼고 싶은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자기도 조금이라도 기여했다고 하고 싶은 거예요. 나도 보탬이 되었습니다. 나의 회개와 나의 반성과 나의 성경공부와 나의 기도와 나의 금식이 약간은 동업자로 보탬이 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 해서 실패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고마운 소식은 이스라엘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 실패한 그것을 긁어버린, 동전으로 긁으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정말 주님께서 십자가로 긁을 때 듣기가 싫어. 긁을 때 홈이 생기잖아요. 그 홈에서 주의 피가 흘러나와요. 내가 그동안 엉뚱한 상상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주님은 죽으라 했는데 나는 죽음을 가장한 채 죽음을 근거로 내가 맺힌 한을 풀고 가려는 고집이 있잖아요. 잠시 만요, 한 풀고 가실게요.
그 한에 대해서 프로이드가 이야기합니다. 네 아버지가 무의식적으로 너에게 강박감을 줬다는 거예요. 아버지든지 아버지를 대신할 만한 사람, 교사나 교회 목사, 자기가 존경할 만한 어떤 영웅이, “내가 기대하는 걸 알지?”라고 평소에 세뇌를 줬거든요. 그 아이는 항상 타인의 욕망이 모델이 되어 흉내 내어서 어릴 때부터 나의 욕망으로 전이된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나온 게 보란 듯이 주먹을 쥐고 공부하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 MIT, 브라운대학, 하버드대학 가고야 말리라. 그게 뭐냐? 놀라운 초인의 능력을 발휘케 합니다. 니체가 그걸 주목한 거예요. 인간은 건들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 건드리면 오기로도 자기 이상의 능력이 발휘되는 거예요. 꿈과 비전을 사람을 일깨워주는 게 아니고 누가 건드려줘야 돼요.
“아빠는 돈도 못 벌고?” 그것도 제일 사랑하는 딸이 건드려줘야 돼요. “너, 아빠 우습게 봤지. 어디 두고 봐.” 보란 듯이 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서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나의 존재에 대해서 광채(아우라)가 나도록 아버지의 권위가 팍팍 서도록 이미 타인의 욕망은 나에게 세뇌를 가한 겁니다.
바로 그렇게 하도록 여자의 후손은 묵시적 존재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존재가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본받도록 부추기고 조작하고 유발시켜요. 신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보란 듯이 인생을 멋들어지게 깨끗하게 살아보겠다고 용기를 북돋아줄 때 주께서 와서 긁어버리지요. 긁은 홈에서 피가 나오게 하는 겁니다.
“아벨이 보란 듯이 살았느냐, 보란 듯이 망했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벨은 보란 듯이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사 받을 때 신났지요. 제사 받은 그것이 묵시적 원인이 되어서 묵시적 결과가 뭡니까? 거룩한 죽음의 노선에 합류되는 거룩한 결과를 낳았다면, “이제는 네 차례야. 네가 아벨이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성령의 노선이 아니고 율법의 노선이야.” 갈라디아서 4장에 노선이 두 개있습니다. 사라의 노선과 하갈의 노선이 나오거든요. 그걸 두 언약이라 합니다. 한쪽은 성령에 속한 사람, 한쪽은 율법에 속한 사람. 누가 누굴 핍박한다? 율법에 속한 사람이 약속에 속한 성령에 속한 사람을 핍박하게 돼있어요.
그게 역사적 존재에서 미지의 X라는 숨겨진 노선이에요. 숨겨진 노선을 우리가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발적 사건이 매일같이 들이닥쳐서 우리로 하여금 깜짝깜짝하고 놀라게 만들어요. “기도했는데 기도한 대로 안 될 줄 알아.” 그러면 돼요. “내 기도 안 될 줄 알았는데 됩니다. 그래. 주께서 응답하시는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없어요. 됐다고 안심하면 다른 사건 터지고. 기뻐할 때 찬양하고 슬퍼할 때 기도하라 하는데 이제는 기뻐할 때 다른 사건 터져서 찬양을 무효화시켜버리고, 슬퍼하려 하는데 갑자기 예상치 않은 찬양이 되고. 기도할 때는 찬양이 나와 버리고 찬양할 때 기도가 나와 버리고. 나는 기뻐할 때 찬양하려고 마음준비하고 지키려고 하는데 그 지킴을 반대방향으로 말씀대로 활성화되게 만들어요. 그럼 나는 완전히 농락당한 게 됩니다.
이 소리 듣고 어떤 간사는 말하기를 “목사님. 인간이 로봇입니까? 인간이 기계입니까? 인간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인격’이란 말은 헬라철학에서 가면 썼다는 말이고 그 가면은 벗겨도, 벗겨도 본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 가면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헬라철학에서 인격은 무대장치에 쓰는 용어인데 무대장치는 관객에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인격은 자기의 야망이 아니고, “이런 사람 되기 원하지요? 아버지, 어머니. 이런 아들 되기를 원하지요? 원대로 보란 듯이 하겠습니다.” 하고 사법고시 합격. 그것은 가면입니다. 자기의 본심은 감춰져 있어요.
로봇은 죄를 짓지 않아요. 주께서는 로봇보다 더 못한 존재, 하면 할수록 그것이 죄가 되는 존재로 만들고 거기다가 “남의 죄 따지지 마. 마귀 이야기하지 마. 네가 바로 마귀야.” 하고 우리를 긁으면 거기서 십자가 피가 나오면서 주께서 다루시는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대접했거든요. 대접을 받아도 너무 많이 받아요. 대접하는 보상은 주님 앞에서 대접하는 본인들이 신앙인이 아님을 들통 내는 것이 주께서 하신 대접이에요. 아프다고 전갈 보냈습니다. 주님과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닙니다. 주께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했어요. 얼마나 요한복음 11장이 어려운지 보세요. 예수님이 그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갑시다.” “기다려라.”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이제 가자고 했어요. 왜 가시냐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잔다고 했거든요. 그걸 도마가 앞뒤를 맞춰보고 우리 죽으러 가자고 했어요. 그러니까 자기 딴에 나름대로 철저하게 한 해석이 엉터리 해석이에요. 왜냐하면 죽음이란 예수님이 십자가 져야 비로소 아는 거예요.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는 그 의미에 대해서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비로소 제자들이 그 의미를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삼 년 동안 예수님 재림의 의미를 몰랐어요. 모른 그것도 자체로 의미가 있어요. 모른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삼년 동안 교육받았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안 게 없었다는 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취지입니다. 우리와 똑같네. 난 대단한 줄 알았는데. 세미나 받아도 소용없네. 바로 그거에요. 성령의 은혜가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모르게 돼있어요. 지식이 있다고 안다고 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열두 제자가 있음으로 무식해도 구원받아요.
16년 동안 아무 이유도 없이 애인이 안 생긴다는 개그콘서트에 코너가 있거든요. 16년 동안 열심히 일해도 믿음이 안 생겨요. 로마서 9장에 보면, 네가 달음박질해도 믿음이 안 생겨요. 열심낸다고 해도 믿음이 안 생겨요. 그러면 믿음은 오직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람만 생겨요. 열심히 한다고 안 돼요. 그러면 “열심히 하지 말까요?” 하잖아요. 열심히 안 해도 안 돼요.
그 말은 묵시적 존재는 이 땅에서 어떤 원인을 결부시키지 않고 차단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은 아벨의 죽은 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아벨을 죽였듯이 내가 등장하면 너희를 죽일 거야. 원인을 제거할 거예요. 그런 기능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찾아갑니다. 찾아가지 마세요. 주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기능을 일으킵니다. 우리를 긁는 기능. 그 기능이 바로 말씀이 반복입니다. 성경을 반복해서 읽으라는 뜻이 아니고 똑같은 본문인데 전에 읽을 때는 놓쳤는데 그 다음 읽으니까
여러분이 큐티하면서 같은 본문을 열 번 읽으면 똑같은 해석이 나옵니까? 다른 해석이 나옵니까? 찬송가를 같은 찬송가를 불러보세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를 눈물을 흘리면서 부릅니다. 두 번, 세 번 부르면 3절이 너무 길어요. 또 무슨 생각나는지 알아요? “주여, 용서하소서. 제가 짜증 안 내는 것도 오늘 기분 좀 뭐하네요. 다음에 기분 좋을 때 잘 부를 테니 오늘은 봐주고 넘어가 주세요.” 변명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마귀가 원한 거예요. 여러분, 마귀가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그것 때문에 마귀를 허락했고 그것 때문에 우는 사자가 옆에 있도록 허용한 겁니다. 우리 같으면 마귀 있으면 파리채 들고 다 잡고 싶어요.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마귀가 오도록 하는 겁니다.
마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중요한 대목입니다. 마귀는, 내가 원하는 그것을 들어준 사람, 그게 마귀에요. 사실은 마귀는 묵시적 존재기 때문에 마귀의 존재를 말하면 안 되고 존재는 역사적 존재에만 붙이고 마귀의 기능이라고 하면 돼요. 내가 원하는 것, 나는 자아거든요. 자아는 육신에서 나왔지요. 언약성취가 완성이거든요. 언약성취를 위해서 우리는 육신으로 가담이 된 거예요. 그럼 육신은 육신 값을 하면서 죽어가야 돼요. 우리 이름이 아담이니까.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 죄가 왕 노릇했지요. 어느 누구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반란이나 시위나 데모가 일어나면 왕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도둑이 들어와서 문간을 넘어서면 세간이 주인이 온다고 냉장고가 옆으로 걸어서 마중 나오면 안 돼요. 그것은 제대로 마귀한테 붙잡힌 게 아니에요. 그리고 도둑놈이 주인을 묶어놓고 그 다음에 우리를 강제로 데려가요. 주께서 우리를 질질 끌고 가는 그 반복적인 기능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언약이 주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언약적으로 인간이 아니고 육신이지요. 육신 나름대로 피어나는 것이 자아입니다. 자아는 나름대로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해요. 이미 자아는 역사에 속했거든요. 역사에 속했다는 말은 선악과 따먹은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이후가 되지요.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 기본적으로 선과 악이 깔려있지요. 선과 악은 우리에게 간격을 줘요. 선과 악이 벌어질 때 거기서 나온 게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우리에게 공포를 가져다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십일조를 하다가 안 하고 일주일을 보내보세요. 언제 떨어질지 모르지요. 본인은 십일조 하는 걸 선으로 봤지요. 그런데 본인은 지금 십일조 안 하고 있지요. 악이지요. 간격이 벌어졌지요. 성경을 하루에 다섯 장 읽고, 기도는 30분 하는데 갑자기 손님이 와서 성경 다섯 장 못 읽고 나중에 밤 12시쯤에 할 때 그때 선과 악이 갈라졌지요. 내 숙제를 다 하지 못한데서 공포가 오지요. 오는 공포를 잠재워야 되겠지요. 다음날 열 장을 읽으면 상쇄가 되잖아요. 그러면 마음이 한결 놓이고 공포가 줄어지고, 이제 종을 쉬게 하는군요.
교인들이 11시 예배인데 11시 20분에 왔어요. 늦게 온 건 지각이니까 악이잖아요. 그리고 헌금할 때 천 원을 하는데 손에 만 원짜리가 잡혔다. 옛날이라면 바꿀 텐데 그대로 매미채에 집어넣을 때 이천 원을 해도 되는데 팔천 원을 더했기 때문에 마음이 어떻습니까? 뿌듯하지요. 충만한 의가 되지요. 잘못은 조금했는데 상쇄하는 비용이 너무 과했지만 마음은 뿌듯한 거예요.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넘친다는 표현을 그렇게 해요. 죄 졌잖아요. 죄를 용서하면 무죄가 돼버려요. 그럼 우리는 창세기 2장으로 되돌아가요. 그러면 또 지면 또 죄인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의는 무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의인이 돼버려요.
양동이에 물 담을 때 물을 알맞게 담는 것이 아니고 넘치게 담으면 그 안에 원래 있었던 오물이 씻기고 계속 신선한 물이 넘치지요.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영원한 생수가 넘치는 우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끊이지 않는 생수가 나오는 겁니다. 아까 백두수? 비교가 안 되지요. 삼다수? 비교가 안 돼요. 주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샘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하는 행실이 뭐였습니까? 남자 다섯 명 사귀었고 방금 헤어졌고 지금 사귀는 남자, 여섯 번째고. 정말 뛰어난 미모, 봤다면 끌릴 수밖에 없는, 알 수 없는 마력 같은 것, 전지현, 김연아, 하여튼 그 레벨 쯤 되는 것 같아요. 본인도 알아요. 본인도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에 대한 본색을 드러내지요. 어디서 예배드리면 나 같은 사람도 구원될 수 있느냐는 조로 이야기할 때 자기가 아는 티를 내요.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데, 어느 공간에서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냐고 묻지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메시아가 와야 된다. 메시아가 오게 되면 에스겔에 나오는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그전에 먼저 메시아가 와야 된다고 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사마리아 여인에 성령이 덮친 것 같아요. 물동이를 버려두고 뭐라고 합니까? 메시아 오신다고 이야기했어요? 이미 나는 메시아를 봤다고 이야기합니까? 오신다는 것이 묵시적 존재에서는 이미 현재가 돼버려요. 메시아를 봤다는 거예요. 그제야 제자들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 나 추수 벌써 한 건 했다. 너희들의 심지도 않고 너희들이 애쓰지도 않은 것을 내가 독단적으로 했다. 너희들은 내가 한 추수를 같이 누려~. 누리면 돼요. 그걸 종말의 현상이라 합니다.
물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의 준비된 본인의 기능, 주로서의 기능, 에스겔 42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물 나오는 그 기능을 염두에 두시고 그 기능을 그야말로 구원받지 못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 다가서고 찾아오시고 덮침으로 말미암아 여자로 하여금 자기의 살아온 인생을 드러내게 하시고 동전으로 긁어서 여자로 하여금 선악밖에 모르는 아담의 속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만들어요.
어디서 예배드리면 저 같은 여자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심봤다. 내가 메시아 만났다. 그것이 바로 수확물, 결과물이에요. 원인은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에요. 주님이 찾아오심이 원인이 됐고 그 결과가 추수물이라는 결과를 낳았어요. 그리고 이와 같은 식으로 앞으로 추수할 것이다. 너희들을 보내서.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언제까지? 성령 올 때까지.
주님 기적 일으킬 때 오천 명이 먹을 때에 뭔가 일이 잘 돼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떠났을 때에 그들은 모든 일이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뜻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역사적 존재로서 자기 자존심과 위상, 위치, 자기 게임을 계속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께서는 십자가로 긁어줌으로써 그건 그대로 하면 돼요. 내 게임, 자존심 게임 앞으로 하실 거예요. 나의 명예, 위신 찾을 거예요. 주님보다 남편이 더 좋고. 주님보다 아내가 더 좋고.
고린도전서에서 결혼 안 하는 게 낫다고 백날 해도 우리는 결혼하는 게 좋아요. 처녀로 혼자 사는 게 낫다고 해도 결혼 못했으면 하고 싶어서 환장해요. 그냥 사세요. 긁어주실 거예요.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 선악 자체의 지평에 금이 가게 하실 거예요. 그래서 주님 앞에 나올 때 선악 바탕에 주께서 긁어주신 상처투성이를 보여주시고 거기서 피를 보여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게 새 언약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첨부파일 :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7강.hwp (30.5K), Down: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