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 연대연합강의 제18강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18강
이름 : 관리자(IP:119.18.90.53)
연대연합강의 18 녹취
이스라엘이 두 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갈라져야 메시아가 옵니까? 갈라지지 않고 메시아가 오면 안 됩니까? 그런데 왜 북쪽 남쪽으로 갈라졌습니까? 갈라진 것과 메시아가 오는 것과의 특별한 인과관계를 우리가 찾아낼 수 있습니까?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시대 사람들은 천국 맛을 보았습니다. 온통 금입니다. 숟가락 젓가락도 금입니다.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돈을 주셨고, 건강을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건강을 주셨고, 원수가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는데 원수가 저절로 망했습니다. 저절로 고개 숙이고 들어 왔습니다.
솔로몬은 단지 기도하기를 거저 하나님이 다스려 달라고 했습니다(왕상3장). 이 혜택을 솔로몬과 백성들이 입지요. 그렇다면 역사는 끝이 났네요. 메시아 올 것도 없이 이 누림보다 더 호사스러운 누림이 없다면 이것이 만족스런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드디어 솔로몬은 너무나 잘되었다 끝. 이것으로 드라마를 끝내면 좋은데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끝냅니까 끝내지 않습니까?
끝내지 않지요. 솔로몬이 메시아입니까 아닙니까? 메시아 아닙니다.
솔로몬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솔로몬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솔로몬보다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하고 더 복되고 더 대단하고 더 지혜로운 분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아들이 솔로몬보다 더 뛰어난 믿음과 지혜가 오면 아무 문제없이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우리는 관찰자고 구경꾼입니다. 지켜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니 보자고 합니다. 솔로몬 믿음 좋네, 똑똑하네. 복주셨네. 솔로몬에게 잘 배웠으면 더 믿음 좋은 사람 오겠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둘로 쪼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11:13).
북쪽은 르호보암이, 남쪽은 여로보암이 다스립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 좋던 행복이, 축복이 왜 쪼개졌지? 돋보기 갖고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관찰자, 구경꾼, 남의 나라 이야기를 듣는 입장입니다. 왜 깨어졌는가를 살펴봅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는 것을 이미 알듯이, 그에 대한 답변을 하십니다.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의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왕상11:5-8).”
하나님께서는 이런 솔로몬을 곧장 칠 수도 있지만 다윗의 등불(왕상11:36)을 생각해서 그때에는 치지 않고 그 후대부터 쪼개신다고 말씀하십니다(왕상11:12-13). 그렇다면 관찰자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릴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 믿음 좋은 것을 다 아시는데 믿음 좋은 사람이 왜 우상숭배 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허용하시는 가입니다.
우리는 항상 발전을 원하고 좋은 것이 누적되어 더 좋은 것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솔로몬을 지나자 말자 나라가 둘로 쪼개어 지니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둘로 쪼개어지는 것은 다윗언약의 구현체는 둘로 쪼개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언약에 의해서 메시아가 옵니다. 다윗언약이 지상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이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되어 이 땅에서 쪼개어져 다 날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있습니다. 솔로몬 재판아시지요. 열왕기상3:16절 이하에 나옵니다. 솔로몬 재판할 때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솔로몬을 둘로 쪼개면 한쪽에는 지혜가 나옵니다.
솔로몬 이후에 드디어 지혜문서가 나옵니다. 욥기, 잠언, 아가서, 전도서, 시편이 나옵니다.
지혜문서가 액기서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솔로몬은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의 댓가는 율법에 의하면 멸망, 저주 죽음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솔로몬은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제국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 무너지는 기간이 14대입니다. 솔로몬 제국이 무너져 포로로 잡혀갔던 나라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스가랴에 의하면 제 2 의 애굽입니다(슥10:10).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후 하나님의 약속은 두 번째 출애굽입니다. 첫 번째 출애굽은 어린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출애굽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릴 때 두 번째 출애굽이 성사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 출애굽을 보전할 것은 율법이 아니고 지혜입니다.
솔로몬을 두 조각내면 지혜가 나오는데 이 지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어긴 인간이 지혜는 어기지 않겠습니까?
지혜는 인간이 어길래야 어길 수 없는 단단한 껍질 속에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인간이 손탈 수 없는 곳에서 지혜가 작열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혜서 자체가 헛되고 헛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1장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했습니다.
여러분 헛된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헛되지 않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창세기4장에서 헛되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아벨입니다. 아벨이라는 용어를 전도서에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벨의 형 이름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던 가인이 뱀의 후손 쪽이 되어 버립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다고 생각한 가인에 의해서 헛되게 죽임당한 아벨 쪽이 여자의 후손 쪽입니다.
솔로몬을 두 쪽을 내어 지혜와 율법이 갈라지게 합니다. 이것이 솔로몬 이후에 갈라진 두 나라 중 지혜의 혜택을 입는 쪽이 있을 것이고 지혜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율법대로 망해야 하는 나라가 있을 겁니다. 율법대로 망한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입니다.
남쪽 유다지파는 다윗의 등불로 인해 지혜의 혜택을 입습니다. 그러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중 누가 더 나쁜가요? 둘 다 나빠요. 에스겔 선지자는 말하기를 둘 다 창녀인데 에스겔23장4절에 나옵니다. 어니가 먼저 창녀 짓을 하니(겔23:8) 동생이 언니보다 더 심하게(겔23:11) 창녀 짓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몰아넣고 그동안 인간이 손대지 못한 것이 인간을 구원합니다. 그러면 지혜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이스라엘의 멸망한 후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어떤 사람이라고 소문났습니까?
모든 지혜에 통찰했다고 합니다(단1:4). 다니엘이 지혜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당신 지혜가 많지요 라고 물으면 다니엘은 손사래 칩니다. 부담주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본인이 꿈꾸고 신하들을 모아놓고 어제 내가 꿈을 꾸었다. 그래서요? 꿈이 요상했거든. 그래서요? 그 꿈을 잊어버렸거든. 그래서요? 그 꿈을 찾아내라. 신하들은 항상 정상들입니다. 정상적인 답을 합니다. 임금님이여 임금님 개인이 꾼 꿈은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한 신들 외에는 왕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습니다(단2:11) 라고 지극히 정상적인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정상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정상적이고 합리적입니다. 이성적입니다. 정상적으로 비정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때 느부갓네살이 아주 정상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내가 비싼 연봉주고 너희들을 고용했는데 이런 것을 알지 못하면 고용할 이유가 없지.
너희들은 분명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의 계시를 우린 알 수 있습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나도 그런 줄 알고 내가 너희에게 월급주면서, 필요할 때마다 전쟁할 때마다 물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진짜 신만이 아는 것을 이야기 하니 너희들이 그것은 신만이 안다고 답변하면서 우리는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지금까지 거짓말하면서 월급을 축냈다. 그러니 다 죽어야 한다. 그래서 바벨론의 모든 지혜 자들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죽여야 할 대상자 가운데 다니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칩시다. 다니엘과 세친구가 죽는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연속성이 끊어집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대책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다니엘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통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가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하고 먹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지혜가 아니라 율법을 지켰습니다. 율법대로 지키면 다니엘과 세친구를 율법대로 지켜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율법 지킨다는 그것이 바벨론 나라에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율법은 아니까 지킬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지혜는 돌발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의 투입입니다. 지혜냐 아니냐는 우리가 지혜를 모르는 경우가 발각될 경우에 아하 지혜가 저쪽에 있구나를 아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벨살살 왕때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촛대 맞은편 석회 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단5:5).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글입니다(단5:25). 또 누가 해석합니까? 다니엘이 또 해석합니다. 다니엘이 손가락이 나타나는 것을 미리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글자내용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대략난감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다니엘은 왕에게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것(꿈)을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단2:19).
다니엘 본인은 자신이 지혜롭지 않은 것이 압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니엘이 지혜롭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지혜는 다니엘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결정적인 사실이 밤에 은밀한 것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장면입니다.
여기서 다니엘은 자기에게 주어진 꿈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꿈과 자기가 속해 있는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힌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 멋도 모르고 삼키지 말아야 할 것을 삼켰기 때문에 결국 삼킨 너희들이 우리의 지혜자에 의해서 망하도록 전략이 그렇게 짜여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단2:25-45).
그 이야기 듣고도 느부갓네살은 분노를 내는 것이 아니라 대인처럼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단2:48).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믿는 민족은 잡았다고 우기지만 사실은 마르둑 신이 이스라엘을 잡아먹도록 하신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잡아먹히게 하셔서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내렸던 언약적 규정조항이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전 세계로 확산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스라엘 땅만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사로잡혀 간 모든 땅, 흩어진 곳들이 약속의 땅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마태복음24장30절에서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고 하십니다.
누가복음21장35절에서는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지구상에 덮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살아날 대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책이 없습니다. 대책 세우지 마세요. 그냥 기다리고 반기세요. 우리가 주님반기는 것만 하면 됩니다. 반갑습니다. 이제 오시는 군요. 이것만 하면 됩니다. 무슨 대책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무슨 대책이 필요합니까? 대책이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지혜에 속했습니다. 율법이 깨어질 때, 즉 율법의 한계가 드러날 때 그 속에서 지혜는 기지개를 킵니다. 그 지혜는 율법 잘 지킨다고 소문난 이스라엘이 율법에 의해서 망한 후에 드디어 지혜가 기지개를 킵니다. 이 지혜를 인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호칭할 때 인자라고 하셨지요(마16:13). 에스겔을 부를 때 어떤 호칭을 사용합니까? 인자야라고 합니다. 에스겔은 B. C 586년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사로잡혀가서 바벨론 그발강 가에서 살았습니다(겔1:3).
에스겔은 동쪽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신이 동쪽으로 빠져 나가 포로 잡힌 사람들의 집단을 하나님의 성도가 되게 하셨다는 대목이 나옵니다(겔11:23,24).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연속성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솔로몬을 두 조각냅니다. 북쪽 남쪽으로 나눕니다. 솔로몬은 지혜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이 솔로몬을 쪼갭니다. 지혜는 쪼개야 나옵니다.
창기 두 여자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삼일차로 낳았는데 한 여자가 밤에 그의 아들 위에 누으므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내 아들을 뺏어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서로 죽은 아이가 너 아이고 산 아들이 내 아들이다라고 우깁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판결했습니까?
칼을 가져오라해서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진짜 엄마는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짜 엄마는 그래 좋습니다.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로 나누라 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써 먹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이 수단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육과 교육이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똑 같이 흉내 냅니다.
둘로 나눌 때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를 가려냈습니다.
솔로몬 후 나라는 반드시 둘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대로 그냥 멸망해 버리면 건질게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지혜는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시간에 따라 율법의 양태가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두 쪽이 나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대나무를 쪼개면 쫘하면서 두조각납니다.
지혜와 율법이 갈라져 흘러갑니다.
사무엘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상하를 역사서라고 합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는 지혜문서라 합니다.
지혜문서와 역사서가 결합된 것을 두고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은 지혜에 대해서는 역사끝 즉 종말을 채용합니다. 종말에는 역사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역사서에서는 고난가운데 희망이 있다는 것을 채용합니다. 그러면 솔로몬 이후의 왕은 무엇입니까? 그 왕들은 가짜입니다. 모두 다윗혈통이지만 가짜입니다. 가짜라면 나라가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있어요.
가짜인데 왜 나라를 그대로 내버려 둡니까? 그것은 가짜 왕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가짜 왕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핍박받는 사람들은 진짜 선지자입니다. 여기에 진짜 라는 수식어를 왜 붙입니까? 왕들이 가짜선지자를 양성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양성되고 진짜 선지자는 거짓선지라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진짜 선지자가 나름대로 나라를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교회를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까? 선지자는 율법에 의해서 희생물이 되어야 합니다. 희생물은 죽음을 함유합니다. 자기 죽음이 끝나면 세습제로 누가 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선지자가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 기적을 다음선지자가 그대로 인수인계 할 수 있습니까? 딱 한 경우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입니다. 그러면 엘리사 다음에 또 나타납니까? 아닙니다.
북쪽 남쪽 두 조각이 있어야 솔로몬제국이 갈라졌음을 언급할 수 있는데 만약 두 쪽 중 한 쪽이 사라져 버리면 기적을 베푸는 선지자의 존재 이유도 사라져버립니다.
그럼 그 다음 선지자들은 없습니까? 있지요. 문서선지자입니다. 이들은 돌아다니면서 기적을 베푸는 분들이 아니고 이제는 글로 남깁니다. 그 최초의 문서선지가가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다음 예레미야는 이사야 문서에 추가된 계시를 담은 문서입니다. 예레미아에 추가된 계시를 담은 사람은 에스겔입니다. 드디어 문서로 남기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엘리야, 엘리사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비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많은 기적을 행한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가 지난 후에는 문서선지자들이 활동합니다.
그렇다면 기적으로 하셔도 되는데 왜 문서입니까? 문서의 특징은 추후 확인해 보라는 기능을 갖습니다. 멸망은 기증사실이고 멸망당한 후에 다시 문서를 보라. 그것은 멸망하도록 예언되었던 시나리오대로 진척되었구나를 보여주는 것이 문서선지자입니다. 기적이 아니고 글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가 글을 썼습니다. 스가랴가 무슨 기적 일으켰습니까?
없어요. 이사야 예레미야가 무슨 기적 일으켰습니까? 없어요. 이사야는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며 애굽과 구스에 대한 예표와 기적이 되게 하셨습니다(사20:3). 이것도 기적입니까?
문서선지자는 맨날 말만 합니다. 문서의 내용은 망해라 망해라 앗수르 와서 북이스라엘 망하고 , 바벨론 와서 남유다 망해라. 문서만 남아 있으면 됩니다. 나라 정체성의 연속성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문서의 연속성입니다. 이 안에 묵시문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에도 묵시문학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제1이사야, 제2 이사야, 제 3 이사야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8). 역사적 연속성을 찾던 학자들은 많이 당황합니다. 연속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유대교가 맞는 것 같아요. 문서내용들이 다 실질적입니다. 장소도 명확합니다. 스가랴14장4절에는 메시야가 예루살렘 앞 동쪽 감람산에 오신다고 합니다.
에스겔40장 이하에서 성읍과 성전설계도가 쫙 나옵니다. 천사가 측량합니다. 있지도 않는 것을 측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48장을 보면 지파별로 땅 분배가 끝났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누가 보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보고 있습니다. 현재 회복하지 못한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에스겔에서 영원한 언약이 주어집니다. 바로 안식일입니다(겔46:1).
창세기17장에서는 할례입니다. 이 둘만 챙기면 그 땅은 유대인들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유월절(겔45:21), 초막절(겔45:25), 월삭(겔46:1), 안식일(겔46:1)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당시 유대인들은 에스겔47장의 성전에서 나온 물에 대한 말씀을 요한복음7장에서 재현합니다. 초막절8일째 초막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축제의 가장 큰 날에 실로암물을 떠서 성전에서 물을 퍼붓습니다. 그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그 물이 그 물이 아님을 압니다. 하지만 에스겔 말씀대로 우리는 성전이 올 것이고 메시야가 올 것이고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다 같이 한 마음으로 한 이데올로기로서 지켜냅시다라고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어떤 역경과 고난이 있어도 그 가운데서 다짐과 다짐을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52,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즉 집단적 단수이다. 그것이 바로 고난 받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에 대해 과연 고난 받는 종이 이사야 자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지 물은 사람이 에티오피아 내시였습니다. 성령 받은 빌립은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도 아니고 이사야도 아니고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니고 얼마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리고는 홀연히 떠나버립니다. 떠나게 하신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행8:39).
그리스도의 영은 묵시문학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3:17절에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종말이라는 뜻입니다. 인자된 지혜는 완성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완성 앞에서는 무엇에든 꿀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어떤 연속성도 유지할 필요도 없고 유지를 내세울 이유도 없습니다. 어차피 우린 흙이라는 동질성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믿을 것을 믿어야지 왜 자신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자체가 게임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 있어서 신학을 한다는 자체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받는데 신학 했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신학하지 않으면 구원받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신학은 왜 하는가? 주님 오실 때까지 뭐하겠습니까? 이거나 해야지요. 이거 하라고 주님이 시키신 겁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일이, 신학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을 떠맡은 겁니다. 떠맡았기 때문에 종이 주인의 일을 걱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문방구 점원이 물건 팔리지 않을까봐 왜 걱정합니까?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지.
부교역자는 너무 교회 걱정하지 마세요. 당회장 있잖아요. 우린 부교역자 잖아요. 주님이 계신데 건방지게 걱정을 왜 우리가 해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모욕이고 모독이고 건방진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것이 연속성이다라고 하면 부셔 버리고, 저것이 연속성이다라고 하면 부셔버립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때에 엘리아가 다시 온다는 말씀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 그래서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묻습니다. 네가 엘리야냐?(요1:21)
예수님께서 이 소문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으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17:11-12)”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네가 엘리아냐 묻는다는 것, 또한 예수님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엘리야(마16:14)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엘리야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노선은 분명 경부선입니다. 대전에서 한쪽으로 가면 부산이고 다른 쪽으로 가면 광주입니다. 유대인들은 광주로 가는 길이라고 우기는데 대전에서 노선이 바뀔 줄을 몰랐습니다.
천국이 부산에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대전에서 부산으로 가는 노선은 역사적 노선이 아니라 성령의 노선입니다. 역사적 노선을 붙든 사람들은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노선 바꾸는데 세례요한은 엘리야 흉내를 냈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마3:4).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취급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요단강 건너기 직전의 자리고 갔습니다. 그곳이 광야입니다. 새로 다시 하자. 이전에는 요단강을 건넜지만 이제는 내가 주는 물세례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물세례가 없으면 역사적이지만 물세례가 있게 되면 나에게 물세례 주라고 하신 분의 세례가 기다립니다. 두 가지입니다. 불과 성령의 세례입니다. 묵시 안에서는 시간과 상관없이 불세례가 주어집니다. 물, 성령, 불세례는 세트입니다. 메시아 오시기 전에 물세례를 주었고 메시아가 오셔서 성령세례를 주셨다면 당연히 그 메시아가 불로 심판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불로 심판하시면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마13:30).
이런 심판이 오겠나라고 하지 마세요. 이미 오셨잖아요. 앞의 두 개, 물과 성령의 세례를 주셨잖아요. 그러니 나머지 하나는 반드시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일을 초대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형식으로 반복했습니다.
그 흔적이 마태복음28장18-20절에 나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씀입니다. 현재의 영원한 반복입니다.
부산으로 가는 묵시적 노선에서는 광주로 가는 역사적 노선을 잊어야합니다. 역사적 노선을 잊어버리라고 합니다.
함께 계시면 되었지 다른 무엇이 의미 있습니까? 이미 종말인데. 그렇다면 이미 종말이라면 역사적인 기다림이 완전히 엉터리임이 확인이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오히려 주님께서는 역사적 해석을 마음껏 하게 만드셨습니다. 마음껏 해봐라. 역사를 채워 보아라. 그것이 메시아와 얼마나 무관한 것인지를 네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역사적 해석법으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을 찾아 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놓쳤습니다. 그러나 놓치지 않은 세력이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마귀입니다.
마태복음8장에서 거라사인 지방에 귀신들인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다가가니 청년이 먼저 소리 지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라고 합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자신들을 멸망시키러 온 줄도 알았습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요청하니 예수님께서 귀신을 돼지 떼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일로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은 재산의 손실로 인해 예수님을 동네에서 추방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국지적 사건입니까? 아니면 보편적인 사건입니까?
이것은 일부의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8장44절에서는 너희 아비가 마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은 쫓아내지 않습니까?
답변한번 해 보세요. 왜 쫓아내지 않습니까?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핍박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핍박은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누가 했습니까? 정치적 조직적이라는 것은 잔챙이들 말고 전부를 통치하고 지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독사의 새끼이며 그들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만일 병이 고쳐져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주님께서 병을 고쳐서 구원시켰을 겁니다. 눈뜨게 해서 구원된다면 눈뜨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죄가 용서 받아야 구원됩니다.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의 목적은 중풍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중풍병도 고쳐주시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요한복음2장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포도주만 공급해 주면 그것으로 하실일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장차 진짜 출애굽, 죄에서부터 구원하는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런 사건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솔로몬이 둘로 나누어집니다. 나눠지는 이유가 우상숭배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을 끝내야 합니다. 솔로몬은 죽여야 하지요. 그러나 솔로몬을 죽이지 않고 깨어 버립니다. 솔로몬은 깨어지면서 지혜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나온 지혜는 시간과 역사의 제약, 저촉을 받지 않습니다. 영원한 현재입니다. 욥기, 아가, 전도서, 잠언, 시편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현재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에 어겼다 어기지 않았다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지혜와 역사가 결합되려면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역사가 반드시 망해야 된다는 것을 확인되고 나고 지혜는 비로소 등장합니다. 지혜가 등장하고 나니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삼킨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바벨론이라는 최후의 애굽이 이스라엘을 삼키도록 유도하셨습니다.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삼킨 자가 도리어 삼킴을 당하면서 인자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때가 종말입니다. 이때는 할 수 있는 모든 구원의 시도는 해 본 것이 됩니다. 성전도 지어보고, 율법도 지켜보고, 역사의 연속성도 찾아보고, 메시아도 만들어 봅니다. 이 모든 것을 해보고 이것으로는 쓸데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 때 역사를 덮어버리고 인자가 오게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묵시, 즉 하늘에 있는 완성이 지상에 나타나는 흔적이 바로 선지자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스데반도 죽고.
언약에 의해 죽은 자만이 영원히 산자가 됩니다. 이 죽음은 인간의 역사가 실어 나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역사 밖으로 사라졌다가 지혜를 통해 역사 가운데 나타난 겁니다.
다니엘은 70년을 기다렸습니다. 70년이 끝날 즈음에 다니엘에게 계시가 임합니다. 70년이 아니었고 70이레였습니다.
역사적 해석법에 의하면 다니엘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합니까? 70*7=490년이니까? 이미 70년이 지났으면 나머지 420년만 기다리면 되나요? 420년 기다리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이레는 묵시적 용어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에 나오는 한때 두 때 반 때, 천이백구십일, 천 삼백 삼십오일 은 역사적 시간으로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사건으로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에가 한때 두때,반때 이며 마흔 두 달이며 천이백구십일입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반복입니다. 날짜를 계산하지 말고 사건으로 계산하라는 말은 어려운 말입니다.
예를 들면 스프링을 톡 치면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톡 튀어 올랐다가 내려갔다 하지요. 이것이 묵시적 사건의 특징입니다. 묵시적 사건의 특징은 전 우주를 상대로 되풀이합니다.
요한계시록6장 이하에 나오는 일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이 그때그때마다 터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역사적 해석법으로 보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목사님 지금 다섯 번째 인입니까 여섯 번째 인입니까? 전염병이 있으니 네 번째 인이네요.
그러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는 이미 지나갔으니 매직으로 그 성경을 지워도 괜찮지요.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우리는 네 번째 인에 속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일곱째 인을 떼실 때 일곱 나팔이 나옵니다. 그러면 역사가 어떻게 됩니까?
1, 2, 3, 4, 5, 6, 일곱 번째 인, 1, 2, 3, 4, 5, 6, 일곱 나팔, 1, 2, 3 ,4, 5, 6 일곱 대접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펼쳐보면 오늘 2014년도는 어디에 위치합니까? 만일 여섯 번째 대접입니까? 그러면 지나 간 것은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주눅들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율법과 지혜가 복합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 죄가 드러나고, 십자가의 피로 의롭게 된다는 지혜가 반복이 되어 버리면 계속해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일어납니다.
첨부파일 :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18강.hwp (33.5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