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 연대연합 강의 제15강
201403 연대연합 강의 제15강
이름 : 관리자(IP:119.18.90.53)
연대강의 15
이스라엘에 왕이 있는 것과 이방국가에 왕이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세상의 왕은 창세기10장 8절에 니므롯이 나옵니다. 니므롯은 세상에 첫 용사입니다. 영웅입니다. 고고학을 보게 되면 모든 민족의
시조는 영웅입니다. 족보 머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옛날에 다 한 자리 했던 사람들입니다. 시시한 사람은 족보의 시조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지도자를 뽑을 때 그들 가운데서 뽑습니다. 상대적입니다. 전쟁에 이길 만한 사람을 뽑습니다. 전쟁에 이긴다는 것은 신의 도움으로면 이길 수 있습니다. 만일 누가 와서 전쟁에 이긴다면 그 사람은 우리와 격이 다른 신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거나 신성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말할 때 영력, 영빨이라고 하시오. 우리는 그보다 영력이 미진합니다. 야고보서4장16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15일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 2분 만에 응답이 되면 그만큼 절약이 됩니다. 영빨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웅이 됩니다. 이 영웅의 영빨을 개인적 솜씨로 보지 않고 신의 작용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신을 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을 반대하면 악령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모든 민족의 왕은 그들 가운데서 뽑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시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 날 때부터 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품에서, 아버지 품에서 태어납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속성에서 아기가 됩니다.
이것이 싫어서 인간의 노선을 잘라버린 사람이 석가모니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그냥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만일 그냥 인간으로 취급하게 되면 천주교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흠이 없는 마리아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영원한 처녀여야 하고 보통사람하고 격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모르고 죽었던 조상들을 구원하기 위해 마리아가 압력을 행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라가 됩니까?
사무엘상8장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시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있었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는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만나 뵈어야 합니다.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에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려야 합니다(신16:16). 이때 세미나를 합니다. 계시 전승을 합니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배운 것,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출애굽 등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잠언서 1장8절에서 아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합니다. 십계명 제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입니다. 아버지 술 먹는 것 공경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버지 다우려면 언약적 아버지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의한 아버지가 되어야 됩니다.
에베소서 6장1절에서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를 공경하는데 그냥 공경하지 말로 주안에서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교회라는 것은 성경신학적으로 종말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렇다며 종말은 세상 끝을 말하는가? 세상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끝을 말합니다.
아직 산은 산대로, 물은 물 그대로 있는데 무슨 종말이냐고요?
종말이란 과학적으로 규명해서 종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추가될 언약이 없을 때 종말입니다. 마지막 언약에서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기준이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는 사람은 천국이고 예수님의 피가 없는 사람은 지옥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다는 인간의 말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 고백되어지는 믿음만이 주님께서 합격점으로 쳐 줍니다.
계시록7장13절에 흰옷 입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음을 받아 희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후 곧장 하늘로 올라가시지 않았습니다. 물위를 걷고 곧장 하늘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셔야 다 이룹니다. 부활한 것이 다 이룬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너희 앞에 부활이 보이느냐를 말하지 않고 너희 앞에 십자가가 보인다고 말합니다.
부활이란 새언약을 보여주는 환경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의 필름이 십자가고 스크린은 부활입니다.
부활을 만나려면 곧장 스크린만 만나서 되지 않습니다. 부활은 십자가가 담겨 있을 때, 십자가 담긴 전체를 두고 부활이라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빌3:10,11)”.
사도바울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부활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고 아니라 오직 내가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고 합니다.
방향성은 이미 십자가 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부자청년은 근심하며 가버렸습니다(마19:16-22).
만약 부자 청년이 부자가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라면 당장 따라 왔을 것입니다.
만일 소설 잘 쓰는 사람이라면 붓을 꺾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겁니다. 그러면 또 근심하며 가버립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보다 무엇을 더 자랑질 하는지를 아시고 , 그것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가를 물으실 때 이것을 할 수 있어야 천국에 갈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말이라는 환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즉 새언약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제칠일안식재림교에서 특이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 믿고 안식을 지켜도 최종 심판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조사심판이라고 합니다. 지상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심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 안식교에서 이렇게 했을까?
그 이유는 안식교에 가는 사람이나 교회 오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노리는 것은 교회를 위한 온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목사님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여기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줍니다. 정보를 알려주면 사람들이 머리를 굴립니다. 이제 내가 얻고자 하는 것 , 알고자 하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더 이상 교회에 이용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에 열심인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믿음 좋은 사람들이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할 일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별다른 직업 없는 사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그 정보를 알려 달라는 겁니다.
이건 안식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종교는 돈이 많아야 됩니다. 어려운 사람 도와 교회로 데리고 오고, 미끼를 내어 놓아야 , 받은 게 있어야 내 놓겠죠. 이것이 증여사상입니다.
고대민족의 특징은 돌고 도는 것입니다. 무상으로 제공받은 사람은 무한한 책임감을 느껴 또 다른 사람에게 제공함으로서 사회가 돌아갑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상 이전의 모습니다.
이번에 이것을 많이 실감했습니다. 제 딸을 치우는데 서로 사돈에게 보내는 것 있지요. 사도끼리 만나 간소화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온 것이 간소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더 담아서 보냈습니다.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다시 더 담아 왔습니다. 제 아내가 당황하지 않고 제치고 더 많은 것을 담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또 고맙다고 하면서 당황하지 않고 제치고 또 더 많이 보내 왔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것은 누가 경우 바른가 시합하는 것 같아요. 누가 의로운 사람인지 시합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는 뻔뻔스러워야 합니다. 목사가 만일 증여방식에 빠져 버리면 교회에 파벌을 유도합니다.
누구는 신경써주고, 누구는 이삿짐 날라주고 나는 왜 안 도와 주는가? 누구에게도 이삿짐 날라 주지 마세요. 끝. 누가 도와 달라고 해도 당황하지 않고 끝.
교인수가 적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수 많으면 권사 투표할 때 파벌이 일어납니다. 다 나옵니다. 안철수파 노무현파 등등 다 나옵니다. 겉모습은 하나인데.
천주교는 우산으로 다 덮었습니다. 어떤 이단도 오라. 우리가 천주교라 해 줄게. 파벌이 수백 개가 넘어요. 이단이라 하더라도 천주교입니다. 그래야 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부, 수녀가 그런 사람입니다. 경건한체하는 것이 수입이 되기 때문입니다.
왕이 없을 때에는 율법이 왕되신 분이 누구신지를 보여줍니다. 세미나를 열어 말씀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사람이 교훈과 훈육을 받으면 그것이 기억이 됩니다. 절대로 체험되지 않습니다. 기억됩니다. 기억된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기억된 것이 기억으로 남는 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사기2장22절에서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 이방민족들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고 밀어냈습니다.
죄가 가인을 덮치기 위해 엎드려 기회를 노리다가 가인을 덮칩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민족들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게 하셨습니다. 왜 제거하지 않고 그들을 밀어내셨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나 안지키나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교회문제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잠시 덮고 지나가실께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싫은 사람 죽여 버리면 좋을 텐데, 미안합니다 목사님, 그러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완전한 내편, 제자? 없습니다. 망치 들고 스승님?
누가복음16장에 나오는 부자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를 보면서 선한 사람도 지옥 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 가서 누구를 생각합니까? 자신의 형제 다섯 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발 그들은 고통 받는 이곳에 오지 않게 나사로를 보내 전도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예수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자신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칸트에 의하면 양심은 신의 법입니다.
로마서 2장15절에 나오는 양심(비 요8:9), 이방인들의 양심도 신의 계시라 했습니다. 그러면 가룟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스승 팔았다고 자살하는 훌륭한 제자 있으면 나오라고 해 보세요.
이 시대는 가룟유다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한 사람도 지옥 갔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지옥 나누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착해도 안 생겨요. 달음박질해도 안 생겨요.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요소가 아닌 나에게서 나올 수 없는 요소가 가미되어야 됩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내산을 여덟 번 올라갑니다. 율법을 받아 옵니다.
1.출19:3, 2.출19:8, 3.출19:20, 4.출20:21, 5.4.출24:4, 6.출24:13, 7.출32:31, 8.출34:4
왜 이렇게 바쁘게 오르락내리락 합니까? 이것은 기억이냐 체험이냐를 따지는 겁니다.
말씀 주면 이스라엘은 기억하지요. 그래서 모세는 직접 동행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 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출32:24).
주의 사자가 앞서가지 않으면 저는 이 백성 책임 질 수 없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 백성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이니 주님이 책임지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낯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갈 바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인도함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갈 바가 활주로입니다.
비행장이 있으면 비행기가 동서남북중 어디로 갑니까? 공중으로 날아갑니다. 땅에서 떠버립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땅에서 떠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땅에서 애굽화 되어 있습니다. 애굽이 세를 굳히고 있고 애굽이 행세하는 땅에서 출애굽, 떠야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머리 속에서는 땅에서 떠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없는 땅에 가라고 하시는데 인간들은 인간 땅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없는 땅에 가게 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못 가게 해 놓고 불평 늘어, 원망하세 하셔 놓고 가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홍해입니다. 가자 하셔놓고 인도하신 곳이 홍해가 가로막힌 곳입니다. 다른 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면 바다에 난 길은 무슨 길입니까? 바다는 죽음의 길입니다. 바다에서 죽은 자는 더 이상 산자가 되지 못합니다. 죽었다가 산 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은 진짜 죽었다가 다른 식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 건너기 전의 삶과 건넌 후, 죽 죽음 이후의 삶이 다릅니다. 무엇이 추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포함됩니다. 성막입니다.
이후 요단강을 만나게 하셔서 또 못 건너게 합니다. 주여 길 열어 주시면 가겠습니다. 옛날 사건을 기억합니다. 주께서는 기억나는 것을 다시 하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니라(딤전6:10) 는 말씀을 열일곱 살 때 이 말씀을 체험한 것과 사십세에 체험한 말씀이 다릅니다. 말은 똑 같습니다. 그러나 체험이 다르지요. 히브리서13장5절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 하십니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십 대, 사십대 다릅니다. 늘 새롭게 느낍니다. 기억이 아닙니다.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지금 새롭게 느끼게 하십니다. 설교는 간단합니다. 목사는 자기 신앙생활 하는 본문을 전하면 됩니다. 이것을 정답으로 생각하세요. 만일 정답이 따로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지금 그때가 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건방진 말입니다. 주께서 그때는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석가모니 믿으라고 할지 누가 알아요. 내일일을 누가 알아요?
그건 걱정하지 말고 지금 주께서 주신 말씀, 과거에 느꼈던 말씀 말고, 지금주실 때 이 본문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는 것을 교인들에게 제시하게 되면 됩니다. 성령이 있는 교인이 있습니다.
요한1서2장27절의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같이
목사님이 나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목사님 말씀에 동의한다면 아멘 하겠지요. 성령이 직접 가르치십니다. 한 지체니 나는 이런 식으로 알았습니다를 제시하는 겁니다. 그래야 학원 강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땅은 없는 세계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따지면 죽음 그 다음의 세계입니다.
요단강 건널 때 죽음이었고, 홍해도 죽음이었고, 어린양도 죽음이었고, 가면 갈수록 죽음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이방민족들을 진멸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주변에 배치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나 안지키나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지키지 않는다면 저들이 쳐들어옵니다. 천사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공격해 오면 이스라엘은 못 살겠다고 하겠지요.
신명기5장3절에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하나님이 옛날이야기와 빠이빠이 했으면 우리는 알아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주의 이름이 함께 동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주의 이름에 의해서 항상 현재화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억과 주님이 현재화 시키는 말씀의 성취가 같다면 말씀에 순종한 것이 되지만 다르다면 기껏 말씀을 기억한 것 밖에 안 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십자가 십자가 아. 압니다. 그러나 부도같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데모하듯이 새벽기도 나와 울며 불며 땅을 치며 기도하지요. 여러분 목회하면서 이런 분들 만나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지 않습니다. 해결되었다는 말입니다. 목사도 새벽기도 나오지 않기를 바라지요. 왜? 해결되기를 바라니. 아들이 가출했다. 그러면 또 새벽기도 나옵니다. 그러다 나오지 않죠. 돌아 왔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랑 어디로 갔습니까?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말씀의 상황을 지금 현재화 시키기 위해서 현재 그들의 죄와 연계되는 방식의 장치를 그때그때 마다 새롭게 장만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말을 누가 못합니까? 그러나 새로운 무대, 새로운 환경을 마련하셔서 이래도 왕이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러면 에이 왕이셔도 소용없네요. 내가 이렇게 고생하니. 이런 소리가 톡 튀어나오게 만들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예상치 못한 왕의 통치 방식을 처음으로 그 시대에 베풀어 주십니다. 이 방식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지만 이것은 주변의 적들이 공격하지 않는 조건하에서였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인들이 믿던 신을 믿었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와 우상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 )이 없습니까? 우상은 언약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언약대로 시행하십니다. 그래서 사사기 2장을 보게 되면 주님께서 언약대로 하신다고 하니 울어버립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 하지요. 매맞을까봐 미리 울어버립니다. 자신의 믿음 없는 것을 우는 것으로 때우려고 하는 얄팍한 술책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다가 갑자기 이방나라가 공격해 왔을 때 처음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힘으로 버팁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버리면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이나 모두 하나님의 적이 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상황이 얼마나 힘든 상황이 되겠습니까?
누가 더 힘이 셉니까? 이방민족들이 힘이 더 셉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도와주세요.
나를 지켜 주옵소서 하다가 안 되니 나라는 주체가 어디로 갑니까? 주님 언약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자신은 술어자리로 빠집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니 당연히 주어 자리에 주님이 오시게 됩니다.
오시는 방식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어떤 인간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해버립니다.
여호와의 신은 인간의 육체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창6:3). 인간의 육체가 포기될 때에는 여호와의 신이 임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랑 할 때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다가 자기 완전히 포기할 때 성령의 은혜가 임하지요.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노림수를.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했는데 기도하지 않는 내용을 통해 우리로 감격케 하시고 감사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구나. 주님을 조종하려는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주인 자리 앉았음을 깨닫게 합니다.
사사기에서 변변치 않은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왼손잡이, 깡패, 방앗간 주인 등이 있습니다.
방앗간 주인 기드온은 별 볼일 없습니다. 그러데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찾아와 큰 용사라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만일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면 기적을 보여 주세요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양털 한 뭉치를 마당에 두면 양털에만 이슬이 젖도록 원합니다. 자기 수준의 지평에서 초월적인 놀라운 일은 그 정도 수준입니다. 주님께서 원대로 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원한 것은 자기 생각에 과학적인 사고를 해서 원한 내용입니다.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에는 이슬이 내리도록 원했습니다.
이후 미디안을 칠 군사 삼만 이천 명이 모였습니다(삿7:3). 여호와께서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들 손으로 자신들을 구원했다는 소리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돌아가라. 그러자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갑니다. 싸움할 마음 없어요. 만 명 남았습니다.
또 많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물가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많다 많다를 제거하시고 적다고 하는 숫자를 뽑았습니다. 삼백 명 이들은 물을 먹을 때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었습니다. 나머지는 무릎을 꿇고 먹었습니다. 삼백 명만 전쟁에 나서게 합니다.
여기에서 삼백 명이 침착했다. 아니면 무릎을 꿇지 않아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면 전쟁 승리 요인이 삼백 명에게 있지 여호와께 있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많다 많다를 제거한 의미가 없어집니다. 언약에 위반됩니다. 언약은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주님의 구원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되는 세계가 언약의 세계고 천국입니다.
이제 삼백 명이 미디안과 싸우러 갑니다. 미디안, 아말렉, 동방사람들은 숫자는 셀수 없이 많습니다.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은 같았습니다(삿7:12).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시나리오를 짜더라고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칼이 없는데 적들이 칼에 맞아 죽었다. 이게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주님께서는 원인을 잘라버립니다. 사라의 태를 죽이는, 이게 창조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려내심으로 살려냄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어떤 공로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죽음과 없음으로 차단시킵니다. 죽음과 없음의 방식은 그 시대 시대마다 새롭게 만들어서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사전에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을 저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3장에서 바람같이 왔다고 바람같이 사라지는 것
입니다.
옛날 앞자리에서 은혜 받았다고 그 자리에 또 간다고 은혜 안 됩니다. 주께서 하신 것을 내가 원인이 되었기에 그것을 하면 자동적으로 은혜가 온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역사기 있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똑같은 결과가 올 것이라는 것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것을 피해버립니다.
기드온 쪽에서는 칼이 없는데 미디안 진영의 칼 가진 수많은 군사가 칼에 맞아 죽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는 알고 있으면 별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나 그 당시 기드온이라면 대략 난감입니다. 헐.
저들이 죽지 않으면 저들이 맹렬하게 공격해 올 것이고 그렇다면 삼백 명이 그 자리에서 꼼짝 없이 죽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관여합니다. 미디안 진양의 군사에게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을 친구에게 말하게 합니다.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덮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삿7:13)”
이 꿈으로 인해 미디안, 아말렉, 동방사람 진영에 꿈이 주는 공포로 휩싸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숫자 일로만 일을 하십니다.
주님이 계시면 나는 제로가 되고 오직 주님만 하나가 됩니다. 이런 방식을 미디안에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수십만이 있어도 그들은 하나의 꿈에 놀아났습니다. 바로 왕이 그렇게 위세가 대단하더라고 바로 왕에게 주신 하나의 꿈으로 인해 바로 하나가 넘어가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하나의 꿈속에 귀속되어 버립니다(창41:25).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사람들의 군사는 꿈에 이미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 즉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상한 확신이지요?
이제는 꿈이 실현된다는 작은 동기하나, 스위치만 켜면 됩니다. 그 스위치 역할을 삼백 명이 합니다. 이들도 여전히 하나의 꿈에 참여한 자들이 됩니다. 삼백 명을 세대로 나누어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춥니다.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불고, 오른손에 나팔 불며 외칩니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라고.
저들은 오해했습니다. 꿈이 개꿈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상 밖의 숫자로 적들이 쳐들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누가 아군인지, 누가 적군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하셨습니다.
이 방식이 열왕기하 7장에도 이런 방식이 나옵니다.
엘리사 시대인데 아람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에워싸서 물가는 폭등하고 먹을 것은 없고 그래서 아들들을 교대로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성문어귀에 있던 문둔병자 네 사람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 아람군대 진영으로 가서 먹을 것이라고 얻어먹고 죽자고 생각해서 아람군대 진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셔서 아람군대로 오인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고 말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자신들만 포식하기 미안해서 사마리아성에 알립니다. 물론 엘리야 선지자가 어제 예언했습니다. 곡물가격이 뚝 떨어져서 배부르게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군대 장관은 믿지 않았지요.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하면서 비웃었습니다(왕하7:5). 그래서 엘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군대장관은 오랫동안 군인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기엔 그럴 일이 절대 없다는 겁니다. 엘리사에 대해 네가 전쟁을 알아? 하는 식입니다.
엘리사에게 주의 이름의 조치를 알려 주셨습니다.
성경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동행,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성경해석이 하나도 안 됩니다.
동행, 언약, 백성들은 언약을 기억할 뿐 전혀 모릅니다. 인간들은 미래를 모릅니다.
이것이 그대로 실천이 되려면 인간이 무엇으로 등장합니까? 백성은 죄인으로 등장하고 죄마저 용서하신 여호와의 이름만이 자비로우신 분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해석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삶,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삶을 어떻게 삽니까? 언약의 통치하에 살면 주님의 공로만 높아지고, 새롭게 느껴지고 나는 죄만 짓는구나를 발견합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성과에 매료되지 마세요. 성과 믿다가 망한 것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는 살만하면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반복해서. 어렵다 싶으면 자기 힘으로 해 보다가 안 되면 하나님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도와달라는 이스라엘 편이 아니고, 그렇다고 이방민족편이 아니고 하나님은 누구편입니까?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편입니다. 자기 자존심, 명예, 자기 이름만 드러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도와 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위해 일하십니다. 주기도문 아시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지요.
누구 이름입니까? 하나님 이름이지요. 하나님 자신밖에 몰라요.
우리는 주기도문 하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주기도문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자존감, 명예, 이름을 위해 이방민족들을 배치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용하실 뿐입니다.
입다를 봅시다. 길르앗에 암몬자손이 쳐들어 왔습니다. 처음부터 입다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암몬자손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입다를 자신들의 장관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물론 이전에 자신들이 쫓아낸 사람이기에 속으로야 그러했겠습니까? 입다가 기생의 아들이잖아요.
장로들 생각에 가장 힘이 센 사람을 찾아보니 김두한입니다. 종로통에서 놀던. 깡패 입다.
입다는 말합니다. 만일 암몬자손과 싸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신다면 나를 머리고 삼겠느냐고 묻습니다. 급한 마당에 조건 따질 수 없지요. 길르앗 장로들이 승낙합니다.
그래서 입다가 전쟁에 나갑니다.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여서 전쟁에 나갑니다.
그때 여호와께 서원합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손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 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무로 드리겠나이다(삿11:30,31)”
입다 생각에는 개나 소, 동물이 나온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평안히 돌아오는 중에 누가 마중 나옵니까?
아브라함이 누구를 잡아야 했겠습니까? 사랑하는 독자 이삭입니다(창22:2).
이삭은 누구에게 축복을 해 주려고 했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에서입니다(창27:1).
야곱은 누구에게 가장 좋은 옷을 해 입혔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의 첫 번째 아들 요셉입니다(창37:3).
이들의 공통점은 다 죽었습니다. 에서는 저주받았고. 빗나갔습니다.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살려 내셨습니다. 그냥 죽은 자인데 야곱이 요셉을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언약의 정형화, 이 땅에서 언약이 구현될 때의 틀입니다. 그 방식대로만 합니다. 일하지 않았을 때 거져주시는 고마움을 느끼게 합니다.
입다가 처음부터 제 딸을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입다가 처음 나오는 것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서원했겠습니까? 만일 자신의 딸이 죽어야 한다면 그는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 손을 빼겠습니다라고 나올 것입니다.
그 딸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며 전쟁에 나갔고, 승리했고, 기뻐서 평안히 돌아오는데 경악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입다가 자기 옷을 찢으며 어찌할꼬라고 하는 것은 사전에 자신의 딸이 맨 먼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는가라고 생각했겠지요.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전쟁의 승리를 조폭 입다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승리 하셨습니까? 주의 언약이 어디로 흘러갔습니까? 딸에게 흘러갔습니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라(삿11:36).”
자신이 죽겠다고 합니다. 다만 두 달만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정도 딸이 정성을 보였으면 딸을 죽이지 않아야 할 것 아닙니까? 마치 이삭처럼. 그런데 숫양이 적용될 때는 그 시절 이야기입니다. 입다의 딸은 입다가 서원한대로 죽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이 시간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대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때에 왕이 없었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여기에서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것은 이방나라의 방식입니다. 영웅이 와서 자신들을 건진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영웅이 아니라 여전히 왕이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쪽으로 여호와께서 조치를 해버립니다.
사사기13장 이하에서는 삼손이 나옵니다. 삼손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임신하지 못하였던 마노아의 아내가 기묘자라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으로 삼손을 낳게 됩니다. 삼손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입니다. 술과 시체, 머리카락을 주의해야 합니다(민6:1-12).
포도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약속의 땅의 소산물이 인간의 노동이 아니고 누군가의 헌신에 의해서 헌신을 받았기에 주어지는 포도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들은 원초적인 창조의 행위를 서원한 자에게 입혀서 서원하게 하십니다.
시체에 관해서도 죽어야 될 너희들이 사는 것은 너희들이 애써서가 아니라 이 땅에 함께 동행하시는 여호와의 이름 때문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모든 재물에는 인간의 것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나실인이 서원한 기간만큼 자란 머리털은 하나님의 제물에 첨가 됩니다(민6:18).
삼손을 그 시대의 나실인으로 보냄으로서 다른 나라처럼 인간적인 왕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왕의 법은 율법이니 왕의 법은 살아 있다는 것을 삼손을 통해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삼손의 꼬락서니하고는 그 힘을 어디에다 사용합니까?
어릴 때는 몰랐지만 삼손이 힘을 제어할 수 없고 힘이 삼손을 주장합니다.
삼손에게 주신 힘이 삼손의 어두운 육신과 연계합니다. 삼손이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수년전에 나온 마스크를 보면 마스크를 하게 되면 녹색 마스크에 조정을 받는 것과 같죠.
일번이 여자고, 이번이 민족입니다. 여자가 일번이니 민족구원은 항상 뒷전입니다.
여자를 세 명 사귑니다. 여자를 사귈 때마다 삼손의 힘이 발휘되는데 여자와 관련된 보복과 복수입니다. 이 여자와 관련된 보복과 복수의 부산물로 떨어진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삿13-16장).
첨부파일 : 201403 연대연합 강의 제15강.hwp (35.5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