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314a-히7장18절(멜기세덱과 율법) - 이 근호 목사
안양20140314a-히7장18절(멜기세덱과 율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안양20140314a-히7장18절(멜기세덱과 율법) - 이 근호 목사
멜기세덱에 대해서 마지막 정리시간으로 생각해 봅시다. 히브리서7장17절에 보면, “증거 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리 되어 있지요. 여기 세 가지 단어가 얽혀 있어요. 굉장히 어려운 단어인데. 뭐냐 하면, ‘영원한 멜기세덱’이 나오지요. 그 다음에 ‘반차’가 나오지요. 족보가 나온다 말이지요. 이게 안 맞아요. 영원함과 족보가, 영원함의 족보가 있다는 자체가 이상스러워요. 또 하나 뭐냐 하면, ‘제사장’있지요. 멜기세덱과 제사장이 왜 결합되느냐 그거 알아야 되고 그 다음 마지막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율법이 어떻게 여기에 관련성을 잇느냐 이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한 번 수풀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참, 어려운 수풀 속인데. 우선 “멜기세덱 당시에 율법 있었습니까?” 라고 먼저 묻고 싶어요. 멜기세덱 당시에 율법 있었습니까? 율법이 없지요. 그러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이 430년 후에 오지요. 아브라함 이후에 430년 뒤에 율법이 주어지잖아요. 그러면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율법 없어도 의로움이 될 수 있다? 없다? 율법 없이도 의롭게 되는 거예요.
율법 없이도 의롭게 된다는 말은, 의롭게 되는 근거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이라는 것이 굳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근거로서 굳이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가 되는 겁니다. 율법 없이도 의롭게 됐으니까.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처음부터 율법 없이 의롭게 됐으면 애초부터 그 후에도 율법 없이 의롭게 되면 이야기가 간단하게 끝날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십일조 없이도 복 받는다. 십일조가 율법에 속합니다. 율법에 속하는데 그러면 율법 없이 구원을 받는다면 십일조 없이도 복을 받는다가 되지요. 십일조해서 복 받는다는 것은 말라기에 나오는 차후의 문제이고, 그 원판 원래주신 원판에는 십일조 없어도, 믿음으로 십일조 지키는, 행함 없이 믿음으로, 이미 복을 받은 게 됩니다. 복을 받은 게 되니까 그 뒤에 추가되는 십일조해서 복 받는다는 말은 충돌이 돼버립니다. 이것은 원래 믿음의 조상 믿는 사람은 이러해야 된다는 모델케이스는 십일조 없이도 율법 없이도 안식일 없이도 이미 의롭게 되고, 후에 나오는 후손들은 십일조 해야 되고 안식일 지켜야 된다면 우리 인간보기에 쓸데없는 안 해도 되는 짓을 주께서 일부러 부과한 셈이 되었다 말이죠.
그럼 우리는 차라리 어디가 수월해요? 차라리 율법 없어도 아브라함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요. 그 문제는 이렇게 풀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습니까? 복이 된 겁니까? 아브라함이 뭘 해서 복의 근원이 된 거예요? 아니면 아브라함 자체가 복의 근원입니까? 복의 근원이죠.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 되기’에요.
내가 만약에 여자다. 여자인데 어떤 남자와 결혼했다. 그럼 그 남자의 아내가 됐지요. 그런데 그 집에 가니까 어떤 젊은 총각이 하는 말이 형수님이라고 불러줬다 말이죠. 그러면 형수 되려고 결혼했습니까? 아니지요. 그 질서 속에 들어가니까 졸지에 뭐가 돼요? ‘형수 되기’가 되어버렸지요. 내가 가기 전에 이미 질서의 구조가 짜여 졌는데 들어가니까 형수님! 하고 밑에서는 형님! 하고 며느리! 하고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이 와르르 다 쏟아지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믿음으로 구원받겠다는 생각도 사전에 애초에 그런 발상을 가진 것도 아닌데 주님이 날름 딱 집어가지고 그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복의 근원은 내가 아니요, 나를 집게 한 바탕에 이미 복의 근원은 따로 있었던 겁니다. 따로 있는 겁니다. 따로 있는데 나를 거기다가 세워버리니까 그 밑에 있는 기가 올라와 가지고 졸지에 나는 본인의 원치 않는 복의 근원 노릇을 해야만 되는 거예요.
그럼 아브라함은 나 의인되었다, 자랑질 합니까? 아브라함은 누구를 지목합니까? 손가락으로. “내가 아니요, 내 바탕을 유지하는 그 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일한 게 없는데 내가 언제 의인되었지? 아, 내가 아니고 내 바탕이구나!‘ 그러면 바탕 자체적인 흐름과 그 연속성 속에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율법이 동원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바탕에 섰다는 것 때문에 효과를 본 것뿐이지 자기보고 복의 근원입니다. 라고 해버리면 자기가 한 것도 없으니까 그냥 믿었을 뿐인데 딱 세워놓으니까 그리 된 거예요. 전선이 있는 곳에 어두웠는데 여기다가 전구하나 딱 놓으니까 예수님이 만든 전구 놓으니까 갑자기 전구에서 빛이 빛나면서 “야, 전구다! 빛이 들어왔네.” 하면 전구가 하는 말이 “아니야, 왜들이래요. 나 아니에요.”라고 설레발 지어야 돼요. “아이고, 왜 이래요. 저 빛 아니에요. 바탕보세요. 바탕. 그 바탕에 당신들도 갈 수 있습니다. 유독 저를 잘났다고 합니까? 저는 아닙니다.” 라고 거부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어야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7장, 8장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이 모든 법이 어떤 인물과 엮어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율법이 인물과 엮어져 있다. 설명하기 참 힘들어요. 설명하기 힘들지만 설명하려고 합니다. 파란불에서는 건너가시고 빨간불에는 횡단보도 건너가지 마시오. 이게 인물입니까? 이것은 법이지요. 법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약속정도다 말이지요. 약속.
빨간불에는 건너가지 마시고 파란불에 건너가세요. 분명히 약속은 그냥 규율이고 규칙에 불과한데 그 규칙이 어떤 사람과 연결됐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희한한 일입니다. 도저히 우리 세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규칙 지킬 사람은 이해되는데 규칙 자체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율법이 곧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것은 성사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법이 사람이 돼요.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맏물’이라는 겁니다. 맏물.
예레미야2장3절을 봅시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나니”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물 중 처음 익은 뭐가 됐습니까? 처음 익은 열매가 됐지요. 맏물이 되지요. 맏물은 출애굽기나 신명기에 보면 이게 십일조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일조는 10%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지난번에 했잖아요. 10%의 의미가 아니고 제일 첫 번째 난 소산물이 맏물입니다. 그러면 알기 쉽게 이야기할게요.
모든 세상이 지옥입니다. 모든 세상에 죄에 묶여있고 죄밖에 없어요. 그래서 거기서 뭐가 나와도 전부 다 죽음밖에 나올 수 없어요. 죽음의 세계니까 죽음밖에 나올 게 없어요. 만약에 죽음의 세계에서 누가 새싹이 솟아난다면 그 새싹은 죽음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처음으로 등장한 첫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십일조가 먼저입니까? 아니면 약속의 땅이 먼저에요? 약속의 땅에서 뭔가 첫 열매를 맺을 때, 그 다음에 십일조를 통해서 “내 놔! 첫 번째 것은 내거야.” 라고 “내가 가져가야 돼!” 라고 가져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조성이 되겠지요. 그러면 약속의 땅은 어떻게 됩니까? 전멸해야 되고 그게 죽음이어야 돼요. 사람들이 이걸 이해 못해요. 사람이 이스라엘 땅에 가니까, 이스라엘도 이해 못했지요. 사람이 사는 땅이니까 살만 하겠지요. 보니까 전부 다 약속의 땅에 있는 사람은 포도를 운송하는데 너무나 포도가 잘되어가지고 두 사람이 가지에 묶어 다닐 정도로 ‘야, 우리가 가게 되면 저 포도나무는 우리 거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맞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오해였습니다. 그 땅은 죽음의 땅이에요. 아무것도 열릴 수가 없습니다.
그게 신명기에 나와요. 네가 만약에 그 땅에 가서 말씀을 어겨버리면 그 땅은 열매는커녕 그 땅은 아주 황폐하고 가뭄이 있어서 니가 거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 하지만 니가 내 언약대로 준수한다면 그 땅이 마구 마구 젖과 꿀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노동력은 거기에 의미가 없지요. 그러면 뭡니까? 땅 자체에 누군가가 작용해서 땅 자체에서 열매가 맺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 나라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약속의 땅은 죽은 땅이에요? 산 땅이에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는 죽음의 땅이에요. 죽은 땅인데 약속의 백성이 들어가면서 매치가 되고 만나면서 그 땅이 드디어 죽음의 땅이 아니고 산 땅이 되어서 젖과 꿀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과 마주하느냐, 아니면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어떤 분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이스라엘 동행에 누가 동행하는가 하면, 이 분이 동행해요. ‘주의 이름’이 동행합니다. 모세가 이미 말했어요. 주와 함께하지 않으면 저는 절대로 이 백성 데리고 어디 못 갑니다. 제가 무슨 수로 이 사람들을 데려 갑니까? 설득을 어떻게 설득해요? 삐져버리면 대책 없지요. 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니가 왜 데려와서 고생시키느냐, 물어내. 이렇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모세도 알고 있어요.
이 백성을 이끌어 내신 것은 결코 본인이 해야 될 수행할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을, 자기는 그냥 우리 곁에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 옆에 누가 계십니다, 를 늘 소개하고 증거 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모세가 이들을 데려갈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 절차가 언약과 약속이 아니면 뚫리지 않는 그러한 칸막이들로 연속되는 거예요. 이걸 어려운 말로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뭐와 함께? 이스라엘과 함께. 누가 있기에?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 하시는 주의 이름으로 약속의 땅을 만드는 것이지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이라고 가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그 땅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갔다가 언약을 위반하면 졸지에 그 땅은 뭐냐 하면, 그 땅은 저주의 땅이, 죽음의 땅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천국을 소지용으로 소유용으로 삼을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존재하고 있고 존재는 채워야 맛이거든요. 존재는 빈털터리면 존재란 존재는 가치가 없어요. “너, 뭐야?” 하면 나, 이것 갖고 있고 이것 직업 있고 나는 키가 몇 센티고 뭔가 자기 속성을 이렇게 담겨있는 걸 풀어낼 때, 아 니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듯이 존재란 존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그걸 채워지는 그것들을 풀어내야 그게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나무는 나이테로 이야기한다고요. 나무를 쪼개보면 뭐가 있습니까? 긴 역사로 만들어진 나이테가 있지요. 나라는 존재는 그냥 나라는 존재가 아니고 살아온 역사나 이런 것들이 나를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그런 식으로서는 약속의 땅에 못 가는 겁니다. 왜냐, 내 살아온 인생은 약속이 아니고 나의 존재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는 약속의 땅에 결합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야 돼요? 나라는 존재는 주님이 만들어낸 나이테로 일괄 바뀔 필요가 있잖아요. 바뀌어야 돼요. 태어난 것부터 죽을 때까지 전부 다 주님의 솜씨로 솜씨의 나이테로 바뀔 필요가 있다 말이죠. 그럼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 존재는 주님의 존재가 되려면 나를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돼요. 그 맡기는 과정에서 그들은 약속의 백성이 됩니다.
만약에 40만중에 우리가 포함됐다 봅시다. 같이 텐트치고 동행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동행은 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인생을 그 분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행해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가요. 그러나 우리는 못 들어가요. 같은 인간이라고? 같이 홍해바다 들어가요? 아니에요. 주님께 맡기는데, 주님께 맡기는 방식을 주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게 맡겨라, 가 아니라 어디에 맡기느냐 하면, 바로 언약궤입니다.
그들과 함께 지금 뭐가 동행하느냐 하면, 요단강 건너 갈 때 뭐가 안치되어 있어요? 언약궤가 있었지요. 언약궤.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지금 이스라엘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언약이 중요합니까? 언약이 중요하고 싫으면 가라, 이 말입니다. 싫으면 죽던지, 애굽으로 돌아가던지 니 맘대로 해! 나는 너희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하다? 언약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언약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장차 어떤 인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언약의 성취될 그 분이 중요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오해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봅시다. 이게 설명되어야 되는데,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홍해바다 건너와서 좋다고 노래 부르는 장면이에요. 노래 부를 때 여기 3절에 보면, 여호와는 용사지요. 지금 이 대목이 난해한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지금 홍해를 건너오면서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오징어하고 싸웠습니까? 고래하고 싸웠습니까? 홍해 건너올 때. 그들이 칼을 쥐었습니까? 돌멩이를 쥐었습니까?
전쟁이 내가 전쟁하지도 않으면서도 이상한 전쟁에 말려든 거예요. 이상한 전쟁인데 적은 누구냐 하면, 적은 애굽이 적이잖아요. 그러면 애굽이라는 것과 현재 자기 자신과 건너온 이스라엘과 애굽과의 적인데, 전쟁하면 적이 있어야 되니까.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애굽사람들은 모양새가 이상하고 히브리인들은 코가 세 개 네 개가 아니지요. 차이가 없지요. 차이가 없는데 차이 나게 하신 분이 있지요.
그래서 신앙이라 하는 것이 어떨 때는 우리가 억울해요. 안양에서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냥 내 욕망대로 내 욕구대로 그냥 살고 싶어요. 우리는 전쟁하고 싶은 마음 없다니까요. 갑자기 딩동 해가지고 주차문제가지고 멱살 쥐고 싶지를 않아요. 우리는 그냥 조용히 살면 돼요.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나의 전쟁, 나의 사적인 전쟁에 말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상치도 않는 내가 생각지도 않는 다른 전쟁에 말려드니까 그 때부터 헷갈리는 것이 나의 적이라는 사람과 내가 살아가는데 하루 세 끼 먹은데 전혀 차이가 있어요? 없어요? 내가 차이를 모르겠다니까요. 저 사람은 악하고 내가 착한 게 아니다 라는 말이죠. 저 사람은 거짓말하고 나는 안하고, 이게 아니라는 말이라니까요. 이스라엘 전쟁에 휘말리게 된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좀 어렵게 이야기해서 우리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게 오늘 강의 첫 번째 나오는 포인트에요.
우리가 사람이니까 “이상하게 법이 인물 돼? 법이 사람으로 오신다는 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규칙이 어떻게 사람이 돼?” 이리되는 거예요. 내가 사람이라고 우기니까. 사람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서니까 우리 말고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 말고는 인물이 없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취급 안 해버리면 비로소 나는 인간 아니요, 그대만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물 그 분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구약, 신약을 하는 교수 카톨릭 신학교 가가지고 도서관에 가서 책 찾고 방배동에 신학교가가지고 책 찾고 구약의 흐름과 그 사상의 언약의 노선을 찾기 위해서 박사학위 논문 여호와 전쟁 개념, 뒤집어 보면서 그걸 찾아보면서 제가 결론은 뭐냐, 이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박사들이 전혀 모른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인간입니다, 부터 출발한 거예요.
내가 인간이니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어떤 분을 보내주시면 우리가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나 같은 인간은 지옥갈 수 없지요. 나 같은 인간은 천국가야 됩니다. 나를 천국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간되어서 보내주시옵소서. 우리가 다 아는 흔히 말하는 2000년 역사 기독교 신학이 그거에요. 그러니까 구약에서 그들이 뭘 못 찾는가 하면 동행하는 여호와 이름 있잖아요. 여호와 이름이 그냥 이름인 줄 알았어요. 그냥 이름이지, 어떤 분의 어르신네라는 사상은 아무리 해도 나올 수가 없어요. 어떤 어르신네.
자기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인간은 인간끼리 알아보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인간이 아니고 돌멩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의논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의논 안합니다. 우리보고 계획 잡겠습니까? 계획 안 잡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일하게 상대하시는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면 우리는 늘 죽어야 되지요. 죽었는데 그분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분이 하신 일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죽은 데서 깨어나서 “누구십니까? 나를 죽은 놈을 이렇게 깨어나게 하신 분이?” “어?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당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라고 비로소 찬양하고 증거하고 고백하고 또 씩씩하고 “너희들은 다 죽었어! 우리 힘이 아니야. 너희 블레셋 다 죽었어. 이제는. 우리 싸움이 아니야. 그 분이 친히 용사시고 그 분의 이름이 친히 나서서 싸우는 거야. 너희들 눈에는 우리만 보이지? 우리는 인간도 아니야. 그 분이 참된 살아있으시는 분이야. 우리는 그 분 덕분에 매일같이 사는 거야.”라고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출애굽기 15장에서 그 내용이 나온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뭐냐 하면, 전리품이에요. 15장3절 다시 보면,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여호와가 용사라 하는 것은 만군의 하나님 다 아는 이야기고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여호와의 이름이죠. 그런데 모세는 주의 이름이 함께 있다고요. 주의 이름이. 이 주의 이름이 뭔가를 찾기 위해서 제가 도서관을 다 뒤지고 했는데 거기에 대한 정답을 못 내리더란 말이죠.
우리한테는 이름이 있잖아요. 이름이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합니까? 이 근호 안 중요해요. 이 근호 몸통이 중요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몸통은 없어요. 뭐만 있어요? 이름이 중요해요. 그 말은 주님 이름 앞에 내가 중요하다는 이 자체가 주님 보기에는 그건 인간 같지도 않은 거예요.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제가 중요하고 이름은 안 중요합니다.” 라고 할 때 주의 이름이 “나는 이름이 중요하지 너는 안 중요해.” 이리 되는 거예요. 이제부터 이름을 바꿔야 돼요. 내 이름이 있잖아요. 바꿔야 돼요. 주의 이름으로 소속된 이름으로 바꿔져야 돼요. 이제는 이스라엘 이름이 돼야 돼요. 내 이름 되면 안 돼요. 사적인 이름은 의미 없어요. 주의 이름으로 바꿔질 거예요. 왜냐 하면, 주의 이름이 되어야 저주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버틸 수가 있어요.
야곱의 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꿔져야 브니엘, 내가 죽었다가 비로소 생명을 얻었다. 가 성사된다니까요. 이름 자체가 바뀌어져야 되는데 왜 바뀌어져야 하는가, 그 이름 자체가 무슨 이름이냐 하면, 바로 ‘언약의 이름’이에요. 언약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나와 주님이 언약을 한다는 게 아니고 나하고 언약을 맺지 않고 나로 하여금 이름 바꿔진 그 분과 하나님과의 이야기해서 그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모든 것이 성부와 성자, 그 둘만의 이야기에서 그 선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겁니다.
그 이름이 지금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해답 나왔지요. 성경에 있는 모든 율법은 사실은 누구이름? 주라는 인물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엮여져야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율법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는 것은 인간도 아니야, 하고 추방시키는 작업이 동행하면서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니는 멸망해야 돼! 어디 인간도 아닌 게 어딜 인간 행세해! 니 같은 인간은 하나님이 상대 안 해.” 하고 배제하고 배척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율법을 주고 율법을 못 지켰을 때는 나오는 결과는 뭡니까? 율법을 못 지켰을 경우에는 소비되는 거죠. 그냥 물체 화되고 사물이 되는 거예요. 죽여 버리는 거예요.
늘 우리를 율법을 통해서 저주받아 죽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가 죽었을 때,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그 분의 이름만이 아니라 어떤 어르신네, 하나님과 유일하게 내통하시는 분이 그동안 우리하고 동행하고 계셨고 율법은 그 분을 겨냥해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스파이더맨에서 뭐가 나오지요? 거미줄이 나오지요. 주의 이름에서 율법이 좍좍 나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거미줄로 해서 이쪽 빌딩에서 저쪽 빌딩으로 휙 휙 날아다니잖아요. 뛰고 날고 악한 놈 나오라고 쳐부수고 하잖아요.
이스라엘 전체가 주의 이름이 스파이더맨 되셔가지고 하시는 작업인데 우리는 자신을 “나도 율법 지킬 수 있습니다.” 에 주장하면서 하다 보니까 이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주의 이름은 하나도 안 보이고 조금 배부르다 싶으면 조금 편안하다 행복하다 싶으면 곧장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다른 같은 인간인 이방나라에 우상섬기고 그들과 함께 같이 율법이고 다 버리고 친하게 지내고 결혼도 왕끼리 정략결혼하고 그렇게 나온다 말이죠.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출애굽기15장 12절에 보면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오른 손을 든다 했지요. 제가 책을 찾아 봤어요. 오른손이 뭐냐, 내가 찾아본 책이고 논문이고 오른손이 무언가를 아무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어요. 주께서 오른손이죠. 그러면 보통 왼손, 오른손이 거북이한테 쓰입니까? 거미한테 오른손이 쓰입니까? 누구한테 오른손, 왼손이란 말을 씁니까? 사람이죠. 그러면 누구만 유일한 사람이에요? 주의 이름만 유일한 사람이에요. 우리 오른손 의미 없다니까요. 우리 오른손은 취급도 안 해요. 흙덩어리이죠.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이란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상대하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주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몸통이 보여주는 그 분, 그분이 오른손이에요. 그러니까 오른손이 이야기하거든 니가 오른손이라는 것을 느끼는 이상으로, 니 오른손이 움직이는 것을 현실이라 보지 말고 이것은 그냥 흙덩어리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진짜 오른손은 따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른손이 있는 것으로 봐라 이 말이죠. 진짜 오른손에서 일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달고 다니는 오른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있어요. 진짜 인간을 보이고 자기는 은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인간의 모습을, 인간의 탈을 쓴 겁니다. 흙이 되기까지 인간의 모양새를 갖춘 거예요.
정리하면, 모든 율법은 한 인물에 속합니다. 모든 성경은 누구한테 증거 한 것이다? 모든 율법과 성경은 모두 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5장39절에. 그럴 때 그것도 참지 못하고 우리는 “율법 제가 지킬게요.” 우리의 오른손 들잖아요. 그 오른손을 우리가 들어버리면 무슨 오른손이 안 보입니까? 주의 오른손 덕분에 우리가 공짜로 천국 간다는 이 놀라운 언약적 원칙이 우리가 너무 설치다 보니까 눈에 보여요? 안 보여요? 눈에 안 보이는 거예요.
오른손이 한 군데만 나오는 게 아니고 시편에 좍 깔려버렸어요. 주의 오른손이, 주의 오른손이, 그 오른손의 정체가 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이나 사도행전2장에 보니까 베드로 설교가운데서 주께서 죽었다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어디에 앉히시니? 주의 오른편에 앉히시니. 주의 오른편에 앉히시니까 이는 여호와하나님도 우리보다 더 인간이라. 우리가 오른손이기 때문에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오른손이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오른편이니까 하나님도 우리의 뜻보다 더 인간이죠.
그러면 이 세상은 우리만 인간인 줄 알았는데 이 말 자체가 어패가 있지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만 인간인 줄 알았는데 우리만 인격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우리는 인격체를 증거 하기 위한 임시 땜방의 인격체, 잠시 살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그런 흙으로 돌아갈 임시 땜방의 잠시 잠간의 임시변통의 인간이라고 행세할 뿐이죠. 진짜 아들은 주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양자에요.
인간이 있다면 인간 속에 뭐가 있지요? 인간 속에 족보가 있지요. 지금 제가 강의 설교 처음하면서 뭐가 난해 하느냐 하면, 영원한 멜기세덱이라 했는데 반차가 왜 있느냐, 영원함과 족보가 있다는 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족보라 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순서대로 죽고 태어나서 애 낳고 죽고, 애 낳고 죽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 빼놓고 자식이 그 족보를 따르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 족보는 뭐냐, 애초부터 조상의 족보의 반열, 반차라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면 결국 반열, 족보, 반차라 하는 것은 이것은 영원한 묵시의 소리가 아니고 역사 속에서나 통용될 그런 개념들이고 내용들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영원한 멜기세덱 해놓고 그 다음에 족보가 있다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영원함이라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묵시로 초월한 입장인데 초월한 입장에서 다시 족보를 언급하니까 족보 속에 들어가면 초월이 아니잖아요. 시간 속에 매이게 되고. 시간 속에 안 매이게 되면 족보가 없어야 되는데 어떻게 해서 멜기세덱이 영원하다 해놓고 왜 족보가 있느냐 말이죠.
멜기세덱은 뭐라 했습니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지요.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데 족보는 시작도 있고 끝이 있다 말이죠. 태어나고 애기 낳고 죽고 그 다음에 또 자식이 크면 또 죽고, 그 영원한 족보를 하나님이 율법으로 그 연관을 시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맏물’이에요. 맏물.
예레미야 다시 한 번 봅시다. 예레미야 2장 3절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제가 어렵게 하지 않고 쉽게 하겠습니다. 농사로 땅을 갈았습니다. 첫 번 감자가 나오고 고구마가 나왔습니다. 그럼 첫 열매는 뭡니까? 처음에 나온 감자와 고구마죠.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농부가 인물입니다. 땅을 갈았습니다. 땅 나오지요. 농부 있고 땅 나오고 갈았더니만 비 내려서 첫 열매가 나오지요. 우리가 열매라 하는 것은 바로 농부 있고 땅이 있고 농사짓고 나온 첫 열매잖아요. 이건 인간 세상에서 통하지요. 그러면 고구마 감자는 이해됩니다. 그리고 양을 낳았는데 첫 새끼다. 이해되지요.
그런데 사람이 첫 열매라, 이건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이 첫 열매라 했을 때는 이스라엘 자체가 첫 열매가 되려면 이스라엘을 낳은 분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따로 있잖아요. 내가 자식을 낳았다. 그것은 가능하지요. 그럼 내가 이스라엘을 낳았다.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내가 남자를 낳았다. 여자를 낳았다. 이건 말이 되는데 내가 이스라엘을 낳았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뭐를 포함하고 있느냐 하면, 모든 죽음을 초월한 초능력을 지녀야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만들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통과하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사가 와서 모든 집안에 맏이를 다 죽였잖아요. 그런 것 가운데서 피 때문에 통과가 된 거잖아요. 그럴 때 나온 게 이스라엘이잖아요. “너, 너, 이스라엘” 이건 아니고 심지어 이스라엘은 유월절하기 전에 이미 할례를 당했습니다. 이미 피를 냈어요. 피 내고 피 바르고. 그랬더니만 그 살아남은 무리가 집단이 이스라엘이란 말이죠.
그 이스라엘을 우리 가정에서 임신해가지고 회임해가지고 됩니까? 안 됩니까? “오, 이스라엘이네.” 이게 돼요? 안 돼요? 안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안 되는데 우리와 똑같이 생긴 어떤 인물이 있어가지고 인물이 뭐를 만들어낸다면 그는 뭐가 된다?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럼 그 분은 어디에 속했느냐, 바로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르는 그 분이라는 거예요. 제가 어렵게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자체가 어렵게 하는 거예요. 성경 자체가.
영원한 멜기세덱 해놓고 밑에 족보가 있더란 말이죠. 그 멜기세덱에 속한 어떤 자식들이 낳다 말이죠. 그러면 이 영원함과 성립이 안돼요. 왜냐 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늙어죽으니까. 그럼 늙어죽으면 뭐가 안돼요? 영원함이 안 되잖아요. 늙어 죽으면 무슨 영원함입니까? 살다 죽으면 그만이니까. 제가 왜 이렇게 어렵게 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걸 몰랐던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레위지파 알잖아요. 유다지파 알잖아요. 레위지파, 유다지파 알면 뭐합니까? 레위지파 사람들 다 늙어죽었는데. 유다지파 알면 뭐합니까? 유다지파에서 태어났다. 성장했다. 늙었다. 죽었다. 이게 무슨 영원함입니까?
다시 정리합시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레위지파 알아요. 다 알아요. 유다지파 압니다. 베냐민지파 알아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 멜기세덱 지파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성경은 누가 구원받아요? 멜기세덱의 족보만 받아요. 이거 누구 약 올립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경주이씨 알아요. 안동권씨 알아요. 그게 우리의 족보입니다. 뻔히 알아요. 이항복 경주이씨 우리 족보입니다. 알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멜기세덱의 족보가 아니면 그 영원한 세계에 못 간다는 거예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쩌라고? 우리는 대책이 없는 거예요. 기껏해야 붙드는 것은 레위지파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칭 나라가 유다지파 아닙니까. 베냐민 유대지파. 이스라엘은 유다지파가 대표하거든요. 유대지파 붙든다 말이죠. 붙들면 뭐합니까? 멜기세덱 지파가 아닌데. 제가 어렵게 한다고 비난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대책이 없다니까요. 괜히 성경에서 멜기세덱 지파 이야기해서 골치 아파요.
족보가 어딥니까? 베냐민지파입니다. 아이고, 이스라엘이네. 그럼 구원받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수월해요. 멜기세덱지파를 집어넣음으로서 이스라엘 자체가 망해야 된다는 사실을, 왜 망해야 되느냐 하면 살았다가 죽으면 그거 사람 아니다, 라는 거예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 우리는 사람인데요.” 그거는 니들끼리 이야기고. 하늘에 계신 주님 보시기에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그냥 흙이에요. 잠시 보였다가 사라질 약간의 사람 흉내, 사람인 척, 또는 사람 역할, 사람의 가면, 사람의 마스크, 실제는 흙인데. 실제는 흙인데 사람이 약간 노력하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임시방편의 하나의 땜방처리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다. 사람이다. 그러니 제발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아담에 속해서 그냥 흙이라고 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람은 우리가 사람이라고 우기는 이상 사람이 안 되고 그리고 우리는 흙이기 때문에, 제가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이 죽었잖아요. 흙이 됐잖아요. 우리도 아담 속에서 흙 됩니다. 여기서 구원? 넘보지 마세요. 이건 안 됩니다. 영생? 안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끝났어요. 구원은 희망사항일 뿐이지 이거 우리에게 해당사항도 없고 어떻게 애쓴다고 될 수가 없습니다. 안 되지요.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겁니다. 무엇으로? 언약으로. 언약 속에 뭐가 들었는데? 멜기세덱 반차, 족보를 심는 거예요. 무엇을 경유해야 돼요. 그 경유하는 그 분이 얼굴이 사람의 형체는 없지만 그 분이 형체는 없는데 이름이 붙어있어요. 그 이름이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을 하시는 거예요. 동행을 해서 이상스런 현상들이 일어나요. 분명히 우리는 애굽을 못 이깁니다. 이스라엘 백성 어디 군사훈련 했습니까? 애굽 이기려고. 그들은 노예들이에요.
주께서 시험을 칩니다. 애굽 너 나와! 히브리 너 나와! 시험문제가 뭔지 공부를 합니다. 자, 시험 친다. 내가 죽음의 사자가 심판 할 테니까 심판에 이긴 사람은 합격 패스고, 심판에 못 이긴 사람은 그냥 지옥 가! 죽어버려! 그 시험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양쪽 다 못 풀기 마찬가지잖아요. 일방적으로 이쪽에는 컨닝을 사전에 시험을 유출해요. 피 발라, 문설주에 피 발라, 이건 반칙입니다. 이건 정말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문설주에 피 발라! 왜요? 이론은 따지지 마! 어떤 논리로? 논리도 따지지 마! 어차피 너는 죽을 놈이야.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피 바르고 할례행하고 어린양 발라. 어떻게? 따지지 말고 결과만 보자는 거예요.
에이 씨~ 발라 보자. 발랐더니만 한 쪽은 다 죽었는데 이쪽은 다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홍해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신나서 출애굽기15장 찬송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합니다. 절대로 우리가 이긴 것이 아닙니다. 아! 참, 이 고백이요, 정말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당신이 하지도 않았는데 이겼어?” 우리 안에 누가 계십니다. 누군데? 니 안에 지도자 이름 대라! 하니까 이름 대는 이름이 무슨 이름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인데. 그 사람의 무기가 뭔데? 수류탄이야? 무기가 뭐야? 오른손이었습니다. 아니, 그 분 오른손에 뭐가 쥐어있는데? 그건 메시아까지 온데요. 메시아까지 와야 된다. 그게 무기고 성령이거든요. 십자가 근거란 말이죠.
십자가 죄의 용서가 유일한 영생 얻는 무기가 될 줄이야. 지금도 마귀는 그 무기를 그 십자가라는 복음의 무기를 제일 서지 말라고 마귀가 매일 우리한테 빕니다. “너, 똑똑하잖아, 신학 했잖아, 니 설교 잘하잖아 그거 써먹어, 그거 써먹으라고. 제발 십자가라는 건 쓰면 안 돼! 우리가 납득되는 거 해, 기적 일으키는 거, 병 고치는 거, 기적 써 먹어.“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똑똑함으로 할 때 우리가 증거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 피 능력 밖에 없습니다.
지금 히브리서에서 사도바울이 썼다고 친다면 사도바울은 그야말로 본인이 행하는데 너무 어려워서 젖 먹는 애는 모른다 했거든요. 지금 너무 어려운 과제를 이 시간 줬어요.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와 그 다음 뭐가 나온다? 율법. 율법이야기는 아직 손도 안댔어요. 너무 어려워서 못합니다. 일단은 영원함과 족보 이야기만 했을 뿐이지 율법은 그 다음 시간에 할 거예요. 이건 우리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자꾸 인간이니까 하나님이 저를 만들었으니까 건져내세요. 이리 하니까 이게 레위 족보, 유다 족보 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한 번 봅시다. 7장11절에 보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이리 되어 있지요. 그렇게 해놓고 14절에 보면,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났지요. 지금 이 흐름이요, 흐름이 뭐냐 하면, 레위지파라는 제사장이 제사장 값을 한다? 안 한다? 제사장직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제사장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그 분의 흉내를 미리 앞당겨서 폼을 내는 자들이 있었다, 라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그게 제사장인데 그 제사장직으로 멜기세덱의 족보와 엮여질 수 있다? 없다?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레위지파가 한계선을 드러내고 레위지파 안 되는구나! 하고 레위지파에서 노선이 바뀌어져야 돼요. 서울서 대전까지 왔던 기차가 목포나 광주로 가려면 그 철도원이 노선을 바꿔져야 돼요. 이걸 가지고 별다른 지파에요. 별다른 지파.
제사장은 레위지파입니다. 유다지파는 제사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또 골치 아파요. 유다지파는 제사장이 없어요. 제사장이 없어요, 라고 제사장 앞에 지워보세요. 그럼 뭐가 됩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이 땅에 아무도 없어요. 없는 분이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는 겁니다. 현재 없으니까 내가 여기 있어도 나는 없어요. 나는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어요. 내가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있어요. 나는 안동권씨, 경주이씨 집안인데 그 족보는 소용없어요. 레위지파 소용없습니다.
조건입니다. 제사 없이 구원 없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제사는 누가 독점한다? 레위지파가 독점한다. 그런데 레위지파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레위지파로 구원이 성사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럼 보여주는 것이 뭐냐, 제사장이 없는 지파로 보여줬어요.
유다지파는 제사장이 없지요. 그럼 레위지파는 제사장이 있지요. 있는 것은 없이 돼버리고 없는 유다지파에 제사장이 있다면 유다지파에 누가 섞였다는 이야기에요. 누가 섞였는가? 하늘에 있는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르는 분이 유다지파를 이용해가지고 그 안에 스며든 거예요. 스며들면서 하는 말이 “레위지파는 아니야.” “레위지파는 아니야.” “레위지파는 아니야.”자꾸 외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유다지파로 온 이유라는 겁니다. “어이, 바리새인” “예” “어이, 사두개인” “예” “너희들 제사는 누가 드리지?” “우리에게는 레위지파가 있습니다.”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해서 노선 바꾼다니까 “에이씨, 니가 죽어라.” 해서 죽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느 지파요?” “유다지파요.” “유다지파는 제사가 없는데.” 제사가 없는데 그게 제사라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없음 자체가 영원함이기 때문에 제사가 된다는 거예요. 단 한번으로 제사가 끝났기 때문에 너희들 보기에는 반복이 안 되니까 마치 제사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이제 조금만 하고 10분 쉽시다.
이제 더 이상 이해 안 돼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레위지파는 제사장은 율법이 완성되는 거니까 율법이 오기 전에 그러면 뭐냐, 율법이 오기 전에는 누가 관리하는가, 누가 관계 하는가 ‘맏물’입니다. 맏물이 누구냐 하면, 바로 멜기세덱이에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당신은 맏물입니다.” 하고 십일조 드림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 소속의 아브라함이 속해버리고 그 아브라함 소속에 레위가 허리에 있으니까 레위지파가 속해져 버리고 그 아브라함 소속에 유다지파가 속해져있고 그 아브라함 자손 되시는 예수님이 소속돼버려요.
그런데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자손이 누구를 건진다? 자손이 선조를 건져요. 그러니까 수직적으로 멜기세덱의 영원한 그 분의 족보가 지상에 흐르고 있는 인간들이 유다족보에 흐르는 역사와 접점지점을 이루면서 유다지파에서 난분이 유일하게 하나님 앞에 맏물이 되면서 그분이 바로 율법 없이도 구원받는 조건을 우리에게 제공하신 분이에요.
여러분, 출애굽 이길 때, 이스라엘이 율법 지켜서 홍해 건너왔습니까? 율법 없이 구원받았잖아요. 꼭 그 식으로 아무 법도 우리가 지키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있는 그 분 때문에 그 분의 오른손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을 때, 율법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그 대원칙이 짜여 지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40314a-히7장18절(멜기세덱과 율법) - 이 근호 목사.hwp (33.0K), Dow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