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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03 연대연합 강의 제5강자유게시판마태복음

201403 연대연합 강의 제5강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01403 중국강의 제5강

(강의:이근호 목사)

별자리 이야기 좀더 진행해보겠습니다. 성경해석할 때 교수들이 이야기해요. 원어를 알아야 된다. 원어를 왜 알아야 되는가? 나머지는 번역본이기 때문에 원어를 해야 본래의 뜻이 살아난다. 여러분, 원어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언어학을 몰라서 그래요. 20세기 들어 와서 언어는 기호학에 복속이 돼버립니다. 언어학의 범위가 더 넓어진 것이 기호학이 돼요.

그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소쉬르 이후에 기호학적으로 등장한 이론들인데. 먹구름이 몰려왔다. 잠시 후에 폭풍이 왔다. 그러면 먹구름이 언어인가, 언어가 아닌가? 그것은 일종에 언어가 될 수 있고, 상징은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일기 예보할 때 먹구름 표시한 것은 내일 비 온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린 구름은 먹구름은 아니에요. 먹구름 닮게 그려놓고 우리에게 폭풍우 오니까 주의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먹구름 그림을 개나 소나 돼지한테 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면 언어나 기호는 사람과 사람의 용도가 되겠지요.

그것은 기호가 될 수 없어요. 하나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데 흔히 상징이 자주 나오는 부분이 요한계시록이에요.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이것은 상징이란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상징이란 말을 쓰려면 상징의 의미를 알아야 되는데 상징이 두루 뭉실 너무 모호해요. 말 안 되니까 상징이란 말을 한 거예요. 해석 못했다는 다른 고백에 지나지 않아요.

기호는 위치 문제에요. 여러분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다가 돌이나 졸이 모자란다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지요. 그러면 졸과 다른 대체물과 안 닮아도 되지요. 다만 그 빈칸에 하나 들어가는 것뿐이지요. 그럼 닮았다, 안 닮았다, 흔히 말하는 상징적이라는 것은 의미 없고 위치가 의미를 낳아요. 위치들이 모여서 만든 게 시스템이거든요.

장기에서 게임의 룰이 있잖아요. 룰이 살리는 데 있어서 장기 알 대신 다른 것을 넣어도 괜찮아요. 심지어 종이를 오려서 ‘졸’이란 글자를 써서 하잖아요. 따라서 위치가 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졸이 장기에서 주인공 역할, 주체가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장기에서 주인공이 누구지요? 장기는 어울림이지요. 장기는 차, 포, 졸, 마, 상, 전체가 장기의 룰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장기의 주체는 장기 알 속에 없고 장기 게임을 만든 인간들이 장기에 대한 주체가 되겠지요.

그걸 생각해서 성경을 해석해보세요. 성경에 놓여있는 사탄, 악마, 뱀, 인간, 사도바울, 아브라함, 전부 다 본인들이 주체로 할 수 없어요.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3:3 미팅했어요. 저쪽에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이 등장했습니다. 왜 3:3으로 만났느냐 하면, 그중에 누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느냐? ①여기서 주인공은 하늘에 속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다. ②예수님이다. 몇 번입니까? 몇 번이 정답이겠어요? 예수님이 주인공이죠. 그 이야기가 뒤에 나오지요. 초막 셋 지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세 명 있다가 둘 날아가고 예수님만 남았고 음성이 들렸지요. 너희는 주의 말을 들으라고 했지요.

그러면 모세와 엘리야 당시에 예수님이 안 나타났지만 구약의 장기판이 있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중의 한 사람이 엘리야고, 모세니까 자기 중의 한 위대한 인물이 등장했으니까 이 인물의 등장은 바로 이스라엘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한 줄 알았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교인들이 목사님을 청빙했어요. 교인들은 주를 위해서 청빙했다고 봅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인 됨을 목사를 청빙한 거예요? 안 그러면 목사님이 새로운 당회장 되라고 청빙한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목사님이 당회장 되라고 청빙했잖아요. 그게 잘못이라니까. 그것이 이스라엘의 잘못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 교인들은 목사님을 청빙하면서 당신은 이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청빙해줘야 되지요.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 청빙돼야 되고.

말씀이 해석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실제 모든 교회 구석구석에 파급이 돼요. 목사가 와서 하는 말이, “이 교회의 머리와 주인은 주님밖에 없고 저는 아닙니다. 제 지시 받으려면 성도 아니라고 간주합니다. 제가 하는 행동과 말씀 가운데 성령 받은 여러분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든 잘못됐다고 지적하라고 저를 이 자리에 보냈습니다. 십자가 지신 분은 주님이지 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설교했을 거예요. 주님만 교회의 머리입니다. 분명히 했지요.

제가 이렇게 편해서 하는 이유가, 교인이나 목사가 수시로 그 점을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성경해석 제대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훌륭한 종이라고 간주해서 정작 목사가 노리는 큰 교회를 주께서 보너스로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은근한 노림수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바르게 했으면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바르게 하니까 키워서 크게 쓰시게 되면,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 죽는 게 아니고 세상에서 기대하는 크게 쓰심 있잖아요. 마태복음 4장에 두 번째 시험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예수님 사명이 메시아 사명이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놀라 자빠져서 얼마나 많이 따라오겠습니까. 그렇게 크게 쓰시는 그것, 그게 유행 되었으니까. 사람은 환경에 따라 새로운 인식이 그냥 주어지거든요. 별자리 속에 있으니까 우리가 주체니까.

주체란 자아잖아요. 자아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타자, 타인을 불러내게 돼있어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남들이 나를 뭐라고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누군지 그때그때마다 확장하겠다는 겁니다. “머리했는데 내 머리 잘 나왔어?” 아내가 남편한테 묻는 이유가, 자아가 결정하기보다는 타자를 경유해서 말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 타인 중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가 같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 저 어때요?” 그걸 기도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지요. “주님, 저 살아가는 것 어때요? 신앙생활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습니까?” 묻는 겁니다. 구정물에서 주님 얼굴 나타나서 두만강 건너서 그 사람들한테 가라. 그 계시 받은 영화가 [신이 보낸 사람]이란 영화거든요. 그 영화대로 적용한 사람이 다 죽어 버렸어요. 성공 못했다고. 성공 못했으니까 마귀가 준 계시입니까, 진짜 계시입니까?

계시는 이것밖에 없어요. 보탤 계시가 없어요. 우리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계시가 뭐냐는 첫째 시간 이야기로 되돌아갔어요. 자꾸 잊어버려요. 성경이 계시란 사실을 잊어버리고, 성령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내용만 반복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내가 주체가 돼있으니까 그리고 주체라는 것은 홀로 주체를 인정하지 않고 남들이 나를 신앙인이라고 간주해줄 때 우리는 그것을 되받아서 새로운 내 주체로 정립하고 싶어 하니까 자꾸 남의 평가와 남의 시선과 남의 인식에 대해서 귀 기울인다고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아요.

스데반 집사가 스트레스 받았을까요? 받은 적이 없겠지요. 성령 충만한 빌립 집사가 스트레스 받았겠습니까? 받을 수 있겠는데 성경에 나오는 그 순간만큼은 안 받았을 거예요. 제 생각에는. 주의 천사가 와서 보내서 에티오피아 내시 만났을 때 저 사람이 구원받을 사람인지 기다릴 때 스트레스 받았습니까? 전혀 그런 것 없었습니다. 무슨 대목을 가르치면 저 사람이 세례 줄까? 그 생각 미리 한 적 없어요. 오히려 그쪽에서 이사야 53장을 펴놓고 여기서 말하는 종이란 누구를 이야기합니까? 그쪽에서 먼저 언급을 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때 빌립은 그것부터 시작해서 성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로 설명해준 것, 단지 십자가 지신 그분이 주님이라는 그 사실밖에 할 수 없었어요. 세례 주고 난 뒤에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 뒤에 만난 적 없어요. 빌립 집사가 총회장 됐어요? 그런 것 없어요.

졸이라니까. 상, 마. 게임은 누가 주관합니까, 누가 움직입니까? 주님이 움직일 때 법칙이 있어요. 언약 중심으로 언약 완성은 십자가니까 십자가 중심으로 자기를 부인하면서 그리스도의 공로만 드러내라고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가만있지 않고 자꾸 움직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의 움직임을 차단시켜서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 우리는 씩씩거리면서 불평하고 짜증내면서 움직이다 보니까 이미 나는 주님께 짜증을 냈고 주님께 원망이 있는데 가보니까 예상 못한 주님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을 때 모든 공로를 오직 주께서 게임의 주관자라고 돌릴 수밖에 없지요.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전도할 때 그 주선을 천사가 했지요. 베드로가 먼 데까지 갈 필요도 없고 올 필요도 없고. 그냥 보자기 내려왔고 베드로는 안 먹겠다고 했습니다. 보자기를 누가 내렸겠어요? 선교, 전도 이야기할 때 분명히 한국에서 하는 게 아니고 어린양의 보좌에서 선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지금 주님이 놀지 않습니다. 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겸손하게 논다고 하는데 노는 것도 일이에요. 왜? 주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자기도 놀면서 주의 일하심을 믿는 게 일이라니까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선교할 때 선교 대상이 바로 우리에요. 선교사에게 주께서 선교하는 거예요. 정신 차리라고. 열 사람이 있다고 영광 더 되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만 믿어도 충분해요. 주님의 주 되심에 영광 돌리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훼방만 안 하면 천만다행이에요. 아까 점심 먹을 때 시내에 차들이 다니지요. 차바퀴 누가 굴러가게 하십니까? 주께서 굴러가게 하신 거예요. 그걸 좀더 언약적으로 말하면, 주의 십자가 희생의 힘으로, 에너지 힘으로 차바퀴가 굴러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마음대로 치고 들어오는데 그것도 주의 십자가 은혜로 마음대로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발걸음을 누가 세신다? 성경에 주께서 발걸음 세신다고 마태복음 10장에 나오잖아요. 그게 실감나야 돼요. 그게 실감나려면 발걸음에 관심 안 두다가 어느 사건이 터져서 갑자기 남의 발걸음 신경 쓰게 만들면서 마태복음 10장과 매치시키면서 저 사람의 발걸음을 주께서 세시는데 그럼 내 발걸음도 주께서 세시겠구나. 참새는 누가 키우지? 주님. 그럼 내 목숨은? 주께서 키우시는구나. 잠시 잠간이지만 몇 초 상관 아니지만 다시 말씀이 활성화되도록 주께서 우리의 원대로가 아닌 주의 뜻대로 지금도 부리고 계시는 겁니다. 주님은 심장 뛰도록 하시면서 안 놓아요.

괜히 내가 주인공이 된 장기 게임을 따로 벌이기 때문에 그저 주님한테 원망하는 거예요. 주님이여, 목회라는 장기판을 하는데 저쪽에서 졸이고 상이고 다 가져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을 우리 세 식구밖에 안 남았어요. 이래서는 목회할 마음이 안 납니다. 이래서 주님과 동업자 되겠어요? 뭔가 의욕을 북돋을 만한 어떤 계기를 달라고 솔직하게 하겠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을 이루려 함인데 아버지 뜻은 내게 준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네가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내가 양을 놓치는 법은 주님의 게임에는 일체 없습니다. 그게 믿어지도록 우리로 하여금 먼저 원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들이닥치도록 만듭니다. 짜증나는 일들이 매일같이 들어서 나는 기껏 짜증장이, 원망장이, 죄인 중의 괴수, 불평투성이. 그러면서도 십자가 통해서 저 같은 죄인을 구원을 해내시다니 이 게임 주여, 감사히 받겠습니다. 졸로 등록된 것을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밥이 탔다, 라면이 퍼졌다. 그게 그날 될 게임이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분은 좋은데 너무 자기 행동에 대한 변명이나 합리화, 자기 태만 또는 방심, 개판, 막 살기를 옹호하는 셈이 되지 않느냐고 저한테 질문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삼십 년 역사 가운데 수 천 명이 넘습니다. 그러면 이야기하지요. 그런 질문 자체가 뭔가 자기는 부지런 떨었다는 거거든요. 그 부지런함이 태만인 것을 미처 몰랐어요. 왜냐? 주를 믿는 것이 주의 일인데 자기는 나름대로 막 살지 않고 부지런 떤 것을 자기의 주체, 자아성 때문에 역시 주의 일은 부지런해야 돼. 항상 부지런함으로 주를 섬기라 했으니까 그 부지런함이 이런 형태를 말하는 거야. 성경말씀을 일방적으로 자기 부지런함으로 자기가 말씀이 모델, 에프엠, 표준이 된 거예요.

그것 때문에 주님의 일하심이 방해되는 거예요. 막 사는 걸 오해했어요. 부지런 떤 것이 그것이 바로 막 사는 거고 막 사는 게 성실한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알아서 들으세요.

“목사님의 그 말을 이해는 하겠는데 우리끼리는 되는데 그걸 기초도 안 된 교인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들이 그걸 잘도 이용해 처먹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자기 합리화에 나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다면, 그들이 모르게 하면서 몰래 우리끼리만 했던 그 게임 방법은 주님한테 들통 났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차 폭풍이 나한테 거치고 나는 당회장이고 권위를 부여받은 권위자니까 교인은 내게 복속돼야 마땅하다는 실체적 교회론에 의해서 했던 이 모습 자체가 진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일을 나의 자아성, 자존심, 명예, 체면 때문에 방해하지 않았는지 다시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시면 되는 겁니다.

주시하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말라고. 그러면 목회자가 늘 조마조마 떠는 것은 뭐냐 하면, 누가 불쑥 교인 몇 명입니까? 헌금 얼마입니까? 거기에 대해 답변하면서 초라한 나의 자괴감, 다섯 명이라고 외치지 못하는 뭔가 선입감, 언제까지 감출 겁니까? “다섯 명이라도 천국 간데요.” 이렇게 못하는 나의 자존심. “이번에 또 두 명 나갔어요. 이제 세 명 남았어요. 세 명이라도 십자가로 구원받는데요.” 그걸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괴감, 내 안에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분명히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복음에 대해서 부끄럽지 아니하노니. 복음만 있으면 부끄럽지 않다고 했는데 주님은 부끄럽지 말라고 복음을 줬는데 우리는 복음을 간직한다고 주장하면서 남들의 시선에 부끄러워한다면 내가 갖고 있는 복음은 엉터리 복음이에요? 가짠가요? 중국산 짝퉁인가요?

제가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하는데 그분이 이런 이야기해요. “목사님 말씀 다 맞는데 그래도 권위는 존중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분이 권위를 주장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옛날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 당회장 목사가 그만두라고 할 때 분명히 정치적 수작인 줄 알면서도 성경말씀대로 권위에 복종하라고 해서 나왔는데 자기 결정이 옳지 않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제가 강의하면서 모든 성경구절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된다. 그러면 사도들이 권위를 존중할 때 권위는 바로 복음의 권위였어요. 그럼 복음의 권위자가 누구냐? 사도보다 낫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에게 복음이 임할 때 사도는 그 어린아이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발견합니다. 어린아이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고 너는 어떻게 해서 그런 선물을 받았는지 복음을 아는 자체에서 권위를 느끼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말씀 맞지요.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걸 주었고, 배고플 때에 먹을 걸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걸 주었다고 했지요. 누가 돼 묻느냐 하면 천국 가는 양이 돼 묻지요. 제가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누가 물어요? 주님한테 양이 묻지요. 우리 상식은 뭡니까? “그때 봉사한 것을 주님이 알아챘구먼. 주님이 아실 줄 알았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는 것도 아시는 분인데.” 이렇게 나와야 앞뒤가 맞는데 오히려 누가 의아해 하며 묻습니까? “주님이여, 저가 언제 옥에 계실 때 돌아보았습니까?” 할 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살아계시는 겁니까? 복음을 믿는 초신자, 그들 속에 선물로 주신 복음의 권위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섬길 때 그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고 그 사람 속에 있는 복음을 인하여 목사는 섬겨야 되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길 때 너희들이 나를 섬기는 게 아니라 나는 너희를 섬기러왔다. 세상 권세자들은 자기를 섬기라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쓴잔을 마시면서 너희를 섬기노라 할 때 주님 무시하고 맞먹으라는 뜻입니까? 아니지요. 아버지의 뜻이 열두 제자에게 있는 거예요. 그걸 창세전에 이야기가 끝났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에 언약 완성에 주님께서는 복종하시는 거예요. 그 권위에.

그래서 반드시 성경에 권위라는 말이 있더라도 어떤 존재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십자가의 복음을 경유해서 이해하게 되면 성경해석이 다 이해가 되는 거예요. 누구나 십자가 앞에서는 의인이 없고 누구나 그리스도만 높여야만 될 입장이기 때문에 누가 나서서 대장질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에 그 기름 부음을 존중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보면 그걸 영적 예배라 하고 그 다음에 일방적으로 섬기라는 게 아니고 서로 섬겨라. 왜 서로 섬겨야 되느냐 하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잖아요. 그냥 가면 안 돼요. 그냥 가면 자기 신앙 좋은 것 자랑질해서 안 돼요. 반드시 경유해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해서 가게 되면, 나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거든요. 죄인이 되면서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당신 죄인이니까 죄인 맞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로 받느냐 하면,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형제우애로 이해가 됩니다.

목사는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은 목사 얼굴에서 온유와 양선과 자비와 성령의 열매가 한꺼번에 다 튀어나오네요. 그런데 반대로 나는 목사라고 하니까 육의 열매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시기와 다툼과 이런 게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줘야 돼요. 은사가 그렇게 하게 만들어요. 손이 발더러 쓸데없다고 발이 손더러 쓸데없다 한다.

그러니까 실체론적 교회론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실체론적 교회론은 법 중심의 교회론으로 문제가 있는 거예요. 문제가 있으니까 없앨까요? 없애면 안 돼요. 제 말을 오해하는 부분이 거기에요. 없애겠다는 말은 내 힘으로 좋은 교회 만들겠다는 시도밖에 안 되거든요. 우리의 흙은 본성대로 실체론적 교회론이 마지막 모습이에요. 지금 천주교 모습을 개신교가 따라가는데 결국 천주교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높고, 높고 최고 높은 사람 위주로 가야 결속력이 생기니까 힘이 유지가 돼요. 각자 자기 팔 흔들면 교회가 중구난방으로 잘났다고 다 깨져버리고 교회 중요한 돈 되는 비품들은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고, 누가 교회 담보로 돈 다 가져가고 희한한 일 생긴다 말이지요. 그러면 제직회할 때 2/3 찬성하지 말고 10% 찬성하면 되겠네? 그러면 교회입니까? 그렇게 하려면 지방교회하든지. 혹시 오늘 말씀 받으신 분 있으면 말씀하세요. 이렇게 할까요?

실체론적 교회론, 그게 맞습니다. 법대로 해야 돼요. 하나도 빠지면 안 돼요. 그래서 죄인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이상적인 교회를 실시해도 이상적인 교회관을 실시하는 나 자신이 바로 죄인입니다. 이미 교회는 새 언약에 의해서 주님이 알아서 교회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고 내 자아 중심에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교회가 따로 있거든요. 그 그림이 될 때까지 만족함이 없고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어요. 아니야. 이건 아니야. 좀더 섬김, 더 관심. 이것으로는 모자라. 그렇게 되면 내가 그려낸 모델이 생기고 그 모델은 우상체가 되고 말아요. 나의 투영체가 되고 마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위치입니다. 게임이야기. 원어는 필요 없어요. 원어는 그 시대에 필요했던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고 지금 현대의 성경말씀은 바로 이 말씀이 성경말씀이에요. 한국말 때려치우고 헬라어 배우자는 것, 의미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헬라어, 히브리어는 고대어거든요. 고대어는 모든 것이 분명치 않아요. 두루뭉술한 겁니다. 하나의 대접이 구분이 되지 않아요. 사물이 그만큼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원어를 캐보면 원어에서 새로운 개념이 나오는 게 아니고 희미한 경계선만 나와요. 희미한 경계선을 자기가 자르다보면 자기 마음대로 칼질을 해요.

베들레헴이 떡집이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배당 떡집 아니에요. 조직신학, 교리신학에 맞추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시대는 사물이 많지 않아요. 대충 묶어서 한 거예요. 대표적인 용어가 ‘날’ 개념. 날이 24시간이라고요? 24시간이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럼 24시간이 아니면 ‘세대’라고 이야기하거든요. 누가 세대라고 이야기해요? 그럼 정답은 뭐냐? 몰라요. 진화론이 발달하고 설마 7일 만에 창조했겠는가? 주님께서 말하는 날이라는 단어는 전체 게임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졸로써 개입된 거예요. 졸 하나 떼서 거기서 장기 게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상이나 마 떼어서 장기 게임 어떻게 하지? 몰라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언약이 주어져요. 앞에 있는 창세기 의미는 그 다음에 주어지는 언약에 의해서 창세기에 담긴 의미가 조금씩 깊은 내막이 밝혀집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지요.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놀랍게도 창세기 1장에는 죽는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나는 죽음이라는 그러한 숨겨진 비책이 있다고 창세기에는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창세기 2장에서 따먹는 날에는 죽는다고 나오지요.

그러면 창조의 확산이고 확대에요. 창조가 7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끝내버린 창조가 2장, 3장으로 넘어오면서 계속해서 창조가 반복될 때마다 창조 밑바닥에 숨어있는 지혜와 비밀들이 하나씩 바깥으로 노출됩니다. 노출되는 계기로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 형상이란 이름의 인간이에요. 그러다가 잠언 8장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로 창조했지요. 그냥 지혜입니다. 지혜자라는 것은 지혜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자라 하고 지혜는 그냥 지혜에요.

그런데 지혜가 어떤 인물로 등장해요. 그러면 장차 그 지혜는 어떻게 되는가? 어떤 인물로 등장될 지혜지요. 신약에 오면 그 지혜가 누굽니까? 예수님 본인이 지혜에요. 천지창조 때 계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한 꺼풀, 두 꺼풀 뜯기는 거예요. 뜯어내려가면서 내가 창조했다고 하실 때 솔로몬이 지혜 얻으려고 나한테 왔다고 했을 때 그 말씀하고 승천했습니까? 산상설교 잘 들었지? 난 이제 간다. 할 일 다 했다고 그냥 가버렸습니까? 왜 그냥 가시지 않지요? 산상설교 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지요. 요한복음 19장에.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지요. 그것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열두 제자 가운데서 먼저 제안한 사람이 있어요? 없지요. 그렇다면 창조된 인간은 창조에 개입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창조될 뿐이지 창조에 기여할 수 없습니다. 핵심을 모르니까. 핵심 안다고 기여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무지한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이야기는 아무도 몰랐고. 심지어 겟세마네 기도할 때도 제자들 세 명은 몸이 피곤해서 잠을 잤습니다. 네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잤다는 소리를 듣고 그럼 기도원에 가서 잠을 안 자야 돼요? 육신은 잠자게 돼있지 잠 안 자면 육신이 아닙니다.

모든 게 장기 알이라니까. 하나의 게임이라니까요. 졸이 상하고, 상이 졸 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육신다우면 되는 거예요. 그걸로 충실하면 되는 거예요. 인간은 무지하고 몰라요. 난 체하는 것이 주님을 힘들게 할 뿐입니다. 모든 일은 주님이 마무리하셔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걸 다 이루었다면 처음부터 아기 예수 태어나자마자 오른팔에 개 물린 자국, 사탄의 흔적이 나타나서 밤에 악몽 중에 개가 나타나서, 그때 은혜로운 유명한 말이 나오지요.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저주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 저주 보고 싶어? 내가 저주 보여줄게. 죽어? 아담은 죽으면서 죽음을 몰랐어요. 진짜 죽음은 기다려야 돼요. 언제까지? 십자가가 갈 때까지. 진정한 죽음은 예수님 오셔야 모든 성경의 단어, 개념은 십자가에서 밝혀지는 겁니다. 그걸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의, 하늘나라, 율법 개념, 사도바울은 그걸 알았어요. 새 언약이 이뤄져야 비로소 모든 개념은 완전히 진리를 드러낸다는 사실.

예수님이 오실 때부터 십자가에 죽지 왜 산상설교 하십니까? 쓸데없는 짓을 왜 했어요? 산상설교 듣는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지키나 안 지키나 구원과 관계없는데.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뭐가 찾아오느냐?

우리 노선은 자아 노선이거든요. 마귀가 우리한테 준 자아노선, 우리는 육이 아니고 자아란 이 말입니다. 나는 나라는 말을 두로의 왕이 이야기했고, 바벨론 왕도 이야기했고, 바로 왕도 이야기했고. 항상 이방나라 책임 추궁할 때 이방나라 멸망한다. 이유가 뭐냐? 나는 나다. 완전히 부처 이야기 아닙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는 나란 말이죠. 우리가 어떻게 거기서 탈피할 수 있습니까? 급하면 살고보자인데. 나는 나니까.

너는 그 여자 왜 좋아하지? 내가 좋아한다는데 니가 와? 너는 돈 왜 함부로 쓰지? 내 돈 내가 쓰는데 왜? 우리의 몸이 나는 나를 기억해요. 우리의 몸은 궁극적인 것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이에요. 신이 아니라고 추궁하면 짜증나. 스트레스 받아. 몸이 신이기 때문에 신으로 행세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주님과 라이벌 관계에 있어요.

제가 주일에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이 강박증이 있으면 군에서 조교가 시키면 자기한테 명령한 건방짐을 능가하기 위해서 시킨 것보다 더 충실하게 해버려요. 나한테 시키기만 해 봐라. 이것은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뭘 이야기하면, 시킨 대로 반듯하게 해놓고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모독하게 돼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어딜 감히 나한테 지시해?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나야. 그게 어린아이 때부터 조금씩 나타나요. 아빠 있을 때는 아빠가 좋고 엄마가 있을 때는 엄마가 좋고. 아빠, 엄마 다 있을 때는 그런 것 묻는 것 아니야.

애들은 힘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인간의 육신은 아담의 육신은 흙이에요. 흙이 될 수밖에 없는 몸이기 때문에 무엇이 힘이 될 수 있느냐? 힘이 될 수 있으면 그게 진리고 그 다음에 정의에요. 그게 선이고. 부자 청년이 왔을 때 영생? 영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든 재산을 팔라고 하니까 근심할 일이 아닌데 근심하면 돌아갔잖아요. 우리 같으면 안 돌아가겠습니까? 돈 있는데. 망하면 오겠지요.

내가 모아놓은 힘의 덩어리가 자아에요. 그 안에 나의 잘남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걸 누가 건드려? 예수가 건드려? 건드리면 다 사탄이에요. 이것 하나 구축하려고 얼마나 애쓰고 얼마나 양보하고 했는데 이걸 건드려?

창세기 1장에 죽음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나갔어요. 창세기 1장 자체가 나중에 언약이 오게 되면 그게 하나에 언약처럼 활용당합니다. 처음에는 약속이 있어요. 언약은 창세기 6장에 처음 등장해요. 노아언약으로. 인간을 죄 짓게 하고 만들어진 것이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관계인데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정하는가? 자손이 누가 여자인지를 정해요.

아브라함 자손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정하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가 아브라함의 계열인지 정해요. 바리새인과 그것으로 논쟁했던 대목인데 유일하게 예수님이 먼저 질문한 게 그거에요. 다윗의 자손을 다윗이 주라고 했을 때 이게 말이 되느냐고 주께서 질문했지요. 어떻게 새까만 후배한테 주라고 했느냐고 답변을 해보라고 하니까 아무도 없다고 했지요. 바리새인이 왜 답변이 못했을까요? 바리새인은 역사적 해석인데 한 방향으로 가요. 역사의 역전은 없어요. 거꾸로 된 역사는 없단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그걸 간파하시고 시간을 거꾸로 돌려버려요.

여러분 아브라함의 자손이 몇 명입니까? 수없이 많다, 아니면 한 명이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여럿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지요. 그 말을 곧이듣는 그 사람이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분명히 그 시대에는 아브라함 자손은 혈통에 속한 사람, 할례와 안식일을 행하면 전부 다 아브라함으로 쳐줬던 분위기에요. 그런데 갑자기 돌변해서 아브라함 자손이 모두가 아니고 예수님밖에 없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신다는 것은 완전히 부도난 언약밖에 안 되잖아요. 별처럼 많다며? 하나밖에 없는 별이 있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니까요.

갈라디아서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한분부터 해서 다수로 이어지는 데는 인간이 개입될 수 없고 성령이 개입하면 다수가 되는데 이걸 절대로 다수라 하지 않고 다수를 1로 치는 거예요. 에베소서 4장에 몸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협의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협의하면 절대로 1이 안 됩니다. 이미 하나이었음을 인정한다면 그건 성령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 하나 있다는 것은 주체가 있을 경우에는 오류고, 하나가 되려면 십자가 지신 분이 바로 한 분이잖아요. 한 분을 경유하다보니까 한 소망 맞네. 한 몸이 맞네. 반드시 모든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언약을 경유해야 숫자가 여럿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겁니다. 손이 발더러 쓸데없다 해도 섬기는 이유가, 내가 너한테 잘해주고 네가 나한테 잘해주면 숫자가 내가 1이고 네가 1이면 2가 되잖아요. 그런데 한 지체가 돼버리면 1+1=2가 아니고 하나가 되는 놀라운 현상이에요.

목사님은 왜 저희 집에 심방 오십니까? 하나거든요. 제가 요청했잖아요. 요청한 게 아니고 하나 되신 분이 지시했거든요. 목사님은 왜 저를 위해 기도합니까? 하나거든. 왜 말씀 가르칩니까? 하나거든. 교인 하나 늘었군요. 교인 하나 늘면 숫자가 5678 이렇게 돼요. 그래서 진짜 복음 아는 목사는 교인 몇 명이라고 묻는 것은 실례입니다. 그러면 묻지 말까요? 그게 제 말을 오해한 거예요. 안 물으면 안 돼요. 물어야 돼요. 왜? 육신이기 때문에. 진짜 어렵지요.

목사님한테 교인 몇 명이고, 헌금 얼마 나오는지 묻는 것을 실례라고 했지요. 주님만 바라보는데 물으면 안 되니까 안 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안 된다는 그것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흙이니까. 빨리 참아야 돼. 몇 년 동안 참으려고? 말로 못하니까 메시지를 보내. 그것도 안 되면 교인 몇 명 나옵니까? 입이 근질근질 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자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그 말은 돈을 사랑하란 말이에요. 나부터 돈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란 말이지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을 봐야 돼요. 다 누구 이야기입니까? 그걸 위반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세상에 이렇게 많은 죄도 구원받았구나.

여러분 돼지 털을 몇 개 뽑을 때 돼지가 아픔을 느낄까요? 일곱 개? 42개 뽑으면 아픕니까? 하나만 뽑아도 몸통 된 돼지는 아프지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한 율법을 어겨도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거지요. 왜냐하면 같은 몸통에 붙어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걸 모르는 교인들은, 믿음이 약해서 이것부터 지킬게요. 온유, 화평은 내가 성질이 좋아서 지키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애 과외비 들어가니까 이건 못 지킵니다.

법을 자꾸 쪼개는데 몸통은 하나입니다. 털 40개 뽑으나 달랑 하나 뽑으나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0분 쉬고 이야기할 것은 도대체 인간은 그 몸통이 어디에 붙어있는가? 그것은 창세기 2장에 뱀이 등장함으로서 우리의 몸통은 어디 붙어 있는지 밝혀집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403 중국강의 제5강.hwp (52.5K), Dow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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