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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03 연대연합 강의 제3강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201403 연대연합 강의 제3강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3 중국강의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아까 마지막에 드린 질문은, 말씀이 역사하는데 그게 위반이 되느냐?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죄 되게 한 겁니다. 위반도 없는데 죄가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위반해야 죄지요. 성령이 들어온다면 위반이 없다며? 위반이 없는데 그게 왜 죈데요? 그냥 막 나가면 안 되지요. 납득까지는 안 되더라도 앞뒤 말은 맞아야 되지 않습니까. 위반이 없는데 죄인 된다? 거기에 대한 질문 하나로 설명하면 되지요.

회개하는 것도 죄입니까?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도 죄입니까? 이 문제는 칸트라는 철학자의 책 속에서 인간은 반성하는 주체라 했어요. 인간은 도둑놈이든 강도든 나쁜 짓을 해도 끊임없이 반성을 해야 변명거리가 만들어져요.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가만있지 않는다. 이성과 오성이 있기 때문에. 이성과 따짐이 그야말로 오기통처럼 움직일 때 반성이 나와요.

이번 선택은 실패야. 주식을 거기다 투자하지 않는 건데. 땅을 거기다 사지 않는 건데. 목사들 같으면 내가 심방 한 번 더 가는 건데. 심방을 안 가서 다른 교회로 갔어. 내가 관심을 뒀더라면 사랑 없는 교회라는 소리를 안 들었을 텐데. 부부싸움 같으면 내가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닌데. “네 처갓집 다 그렇잖아.”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했을까.

인간은 문을 열면서 닫으면서 반성하고, 주차를 여기 동쪽에 했어야 했나, 아니면 북쪽에 했어야 했나? 항상 인간은 행동하고 그냥 돌아서는 법이 없어요. 그 반성의 연속성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라면 회개는 결국 일반 반성과 차이가 없지요. 그러면 반성하는 주체를 탐구해보니까 인간은 반성하면서 신에게 접근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신처럼 되는 거잖아요. 신처럼 될 때 회전하면서 되는 거예요.

“나는 잘못했다. 하지만 잘못을 아니까 그만큼 성숙했겠지. 성숙했다고 여기는 이게 교만이구나. 하지만 교만한 걸 아니까 그만큼 성숙했겠지. 아니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야.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 그 고백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점점 더 뺑뺑 도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한 마디로 조집니다. 너는 흙이다. 흙이 쫀득쫀득한 한 흙이 예쁠까요, 물렁물렁한 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요, 반짝반짝 윤기 나는 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요, 아니면 잡것이 많이 섞인 흙이 예쁠까요?

주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든 것은 네가 아무리 회개하고 반성해도 네 본성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아담의 흙이기 때문에 너는 흙에 속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면 그때 너는 더 이상 흙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형상에 속한다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그걸 흔히 부활장이라고 하는데 부활장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 되심의 연속장이에요.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일하신다. 흙을 흙 되게 고발하고 노출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주 작업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이 날마다 나를 죽이시고 죽이는 가운데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심이라.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날마다 “너는 죽어야 돼, 너는 흙이야.”라는 것을 반복해서 되풀이하면서 알려줌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사는 것은 네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까발려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회개하는 것도 죄입니까? 정답은 죄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은 틀렸잖아.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과 방금 한 말이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할 거예요. 회개하는 것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나는 죄입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이건 이렇게 됩니다. 회개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회개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나는 그 묻는 자체가 죄인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한데 계속 관심 두고 반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했지요. 사랑은 뭐냐 하면, 남자가 여자한테 반한 거예요. 반한 조건 하에서는 어떤 조건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이 두꺼운 성경에서 외치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 나한테 반했나?” “반했습니다.” “일체 너의 짓도 문제 삼지 않겠다. 따라서 너도 네 자신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말라.” 그래야 네가 주님께 반했다는 사실, 주와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네 교회 교인이 몇 명이냐? 그런 것이 주님께 문제가 안 돼요. 노아가 방주 지을 때는 수천 명 올 줄 알았지요. 방주에 몇 명 들어왔습니까? 말이 8명이지 자기 집안 식구들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 목회한 것이 자기 식구들밖에 구원 못한 거예요. 베드로후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그러면 노아가 천국 가서 꿇어앉아서 손들고 있습니까? “내가 복음 전하라고 했는데 네 집안 식구들밖에 없어.” 하고 꿇어앉게 했습니까, 아니면 잘했다고 하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잘했다고 하는 거예요. “너 말고 한 명 더 들어올까 봐 조마조마 했는데 네가 내 은혜로 성공했네. 오지 않을 자를 오지 않게 하는 은혜는 너의 능력이 아니고 내가 너한테 준 은혜다.”

그걸 성경에서 두 자로 언약이라 합니다.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만 알고 있던 그 내용. 성부와 성자만 알고 있던 내용이기에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내용.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만 주어질 경우에만 비로소 그 사람은 창세전의 계획을 눈치 챌 수 있는 혜택을 입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창세전에 이미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음을 반해버린 거예요. 주님의 조치에 반해버리면, 반했다는 말은, 어떤 조건도 문제 삼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도 처음에 연애할 때 다 반했잖아요. 반했을 때 고춧가루 끼고, 성질 더럽고, 키가 작고, 집안에 돈 없고, 어떤 신학교 나왔고, 그런 것들이 문제 되던가요? 뭐 성격이 좋고, 인품이 어떻고, 집안에 아버지가 기도 많이 하고, 그런 것은 핑계고 딱 깨놓고 반해서 그런 거예요. 그 첫사랑을 유지해야 돼요. 첫사랑을 유지해야 라면 하나 못 끓여도 그것이 가정불화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 못 낳고 바가지 끊더라도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수 없어요. 반할 때는 일체 어떤 조건도 능가하는 겁니다. 그게 아가에요.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하겠습니다. 구약에는 두 종류로 돼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율법의 노선이고 하나는 지혜의 노선이 있다는 거죠. 율법의 노선은 피, 제사, 언약, 이런 노선이라면 지혜 노선은 이런 요소가 없는 거예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여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고 엘로힘 하나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세기 1장에 거론했던 6장의 언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란 인간에게만 제공하는 특별혜택이 아니라 모든 자연세계에 은혜를 주시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그런 차원의 묵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 속에는 언약의 계통이 개입될 수 없다고 잘라버렸어요. 이스라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상식적으로 제대로 산 사람들도 나중에 연옥을 거쳐서 패자부활전이거든요. 연옥을 거쳐서 천국에 이룰 수 있는 연옥설이 천주교에서 나왔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겠지요.

연옥설이 왜 나왔겠어요? 교인들이 요구하는 거예요. 교인들이 신론, 기독교, 삼위일체, 요구하지 않습니다. 날 건져주세요.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까 죽어서는 누리면서 살도록 해주세요. 교회가 그런 여행사 역할을 하니까. 구원받으면 돈 드릴 테니까 어쨌든 이 몸 하나 죽어서도 살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연옥설이 나왔습니다.

연옥설은 그야말로 패자부활전이에요. 세상 돈 버는 데 바빠서 미처 보지 못했던 성경책, 기도 소홀히 했던 것, 연옥 가면 약간 살기가 괴롭잖아요. 괴로울 때 사람은 정신 바짝 들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은 반성하는 주체니까. 내가 미쳤어. 말씀도 안 듣고 너무 내 이익만 채웠구나. 마지막 기회줄 때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렇게 정신 차리고 회개하면 그것도 복역기간이 빨라요. 보석금내고 빨리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이 산 사람한테 안 되니까 천주교에서는 같이 기도해주는 거예요.

야고보서에서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능력이 크지요. 그러면 교회에서 누가 가장 의인이겠어요? 바로 당회장 목사가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가 기도원 간다고 하면 차비 막 내줍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님이 기도하는데 그걸 미사 넣는다고 합니다. 미사 넣을 때 그냥 넣는 게 아니고 100~150만원 듭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때까지 복음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미 죽은 고조할아버지에 대한 구원을 위해서 후손들이 신부를 통해서 미사를 넣게 되면 먼저 갔던 신앙이 우수한 사람이 있어요. 열두 제자가 우수하잖아요. 그 다음에 성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들이 우수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어머니한테 압력을 넣으면 어머니는 아들한테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빨리 빼달라고. 하여튼 천국이고 어디고 돈 없으면 되는 일이 없어. 빨리 빼주게 되면 기도와, 천주교 장례식에 보면 가면서 기도하고 그러잖아요. 믿는 사람의 기도발이 성모를 통해서 먹히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압력을 넣어서 빨리 빼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연옥설의 대충적인 시나리오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중보기도라는 겁니다. 너만 구원받으면 다야. 네 새끼들은 어떻게 하려고? 완전히 이기주의 아니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뭐냐? 희생이란 말이지. 너도 교회에서 희생하란 말이죠. 어떻게 희생할까요?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주께서 성령을 줬다는 것은 기도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본 방침을 줬다는 것이고 중보기도하게 되면 중보기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그걸 네 기도가 아닌 주의 기도로 쳐서 네 자식들이 빠른 시간 내에 구원받는다. 실제로 많은 큰 교회가 중보기도 해서 그 시스템 도입해서 실제로 많은 기적들이 있는데 해 보지도 않고 그런 기적이 없고 신학적으로 안 맞는다고 하지 말고 해 봐라. 해보고 난 뒤에 해보는 가운데 내가 이만큼 믿음이 부족하다는 걸 얻을 수 있는 혜택도 있고. 그래서 중보기도하는 거예요.

십오 년 전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그전에는 이런 게 없었어요. 그전에 왜 없었을까요? 성경이 바뀌었습니까, 신학이 바뀌었어요? 왜 도입을 안 했을까요? 바보들이에요? 도입 안 해도 저절로 교인들이 많아져서 그런 걸가요? 왜 중보기도 안 했을까요?

신학체제가 개신교 신앙고백서에서 계속 수정해나간다고 했지요. 신앙고백서는 그때뿐이에요. 그 시대에 토착화를 위한 하나에 법적인 장치입니다. 얼마나 실용적이냐가 진리가 돼요. 이걸 존 듀이의 도구주의 사상이라고 하는데 이론이란 실적을 얼마나 남기느냐가 진리에 부합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증거가 된다고 이렇게 믿는 겁니다.

그만큼 중보기도조차도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이론이 아니고 출발이 밑에서부터 출발해요. 불교의 금강경인가에 나와요. 엄마가 극락에 갔는데 자기 아들이 지옥 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한테 부탁을 했어요. 내 아들 좀 건져 달라. 부탁하는데 근거가 있어야지? 제가 업보를 많이 쌓습니다. 자기 항공 마일리지를 사용해서, 말 잘못했다^^ 아들이 먼저 받고 엄마는 지옥 불에 있는데 빽써서 엄마를 건져오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딸려오니까 발로 찼단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서 중보기도하려면 자기 남편만 해서는 안 되고 남편 돈 떼어먹은 부도 낸 사기꾼도 함께 교회에 나오도록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중보기도할 때 중보기도 대상에서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만이 아니고 못하는 사람에게도 중보기도해야 되는 근거는 뭐냐? 마태복음 6장에서처럼 원수를 사랑하란 말이죠.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까지 하려니까 범위가 너무 넓어지니까 순서를 정합시다. 그러면 순서 정하기에 있어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부터 정하면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기도와 부합되느냐는 문제가 생겨요. 결국 이것은 구원론과 관련 돼있고 이기주의적 구원론과 상관된 거예요.

결국 그렇게 중보기도를 교인들에게 믿음이 있는지 티를 내보라 하면 교인들은 오기가 나거든요. 믿음 있으면 중보기도해서 데려오든지. 교인들에게 자극을 줘서 교회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활성화될 수 있고. 그게 왜 십오 년 전에는 없었는가? 그때는 가만있어도 온 모양이지요? 갑자기 교인수가 늘지 않고 하니까 어떤 수가 없는지 틈새시장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합리적인 것을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미 모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발적 사건입니다. 항상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벤트로 매일같이 우리를 다루셔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거나 반성할 공로를 일체 제공하지 않게 하십니다. 네가 회개한다고 원하는 게 제공되는 게 아니고 반성한다고 뜻대로 되는 건 아니고, 반성과 회개는 항상 성령께서 했던 것이고, 미처 주의 뜻을 몰랐다는 근원적인 문제에 다가서게 합니다. 근원적인 문제의 자리가 바로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 자리에서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시간적인 미래의 희망은 거기서 일체 박탈당한 상태에 있습니다. 주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면 그런 가사를 썼겠습니까? 뭔가 노림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주 뜻대로 하옵시고 하려면 쥐포 찢듯이 힘이 모아서 집중해서 어떤 결과물을 얻고 싶은데 집중 못하도록 내 정신과 의지마저 온 사방팔방 완전히 전기톱으로 사지를 절단해서 한데로 모으지 못하게 찢어서 나란 것은 바람에 날릴 정도로 될 때 그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이 피 흘린 예수님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데 어떻게 행함을 주장할 수 있느냐? 네가 현재 살아있는 자체가 어렵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인데 성령이 주신 선물을 발로 차? 네가 무슨 자격으로 발로 차? 은근히 나름대로 자기 영광을 빛내는 소설을 쓰고 있었구먼. 네가 드라마 작가야. 네가 자꾸 비전이라는 꿈이라는 말을 하면서 소설을 쓰는 거야. 구약 못 봤어?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한 거예요.

제가 이번 강의에서 본격적으로 하려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성경해석입니다. 아직까지 서론 끝나지 않았어요. 끝날 부근에 와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출-애굽이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순간 출애굽됐다고 오해한 겁니다. 그런데 애굽이 이스라엘 덩어리에 붙어서 이스라엘 가는 곳마다 애굽이 확산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본인들이 몰랐어요. 그들이 광야에서 시험할 때마다 열 번이나 한 소리가 있습니다. “에이 애굽이 더 나았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부러 갈라요.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다는 그 속성은 지리적으로 수평적으로 공간적으로 애굽을 빠져나왔지만 애굽을 달고 나왔습니다. 애굽의 확산입니다. 진짜 애굽이 어떤 식으로 징벌 받는가를 통해서 약속의 땅은 네가 전에 살던 애굽이 아니듯이 네가 생각했던 어떤 특정 공간이 아님을 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비 본토 집을 떠났지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왔지요. 떠났는데 갈 바를 알지 못했다. 미쳤어, 미쳤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는 분명히 약속의 땅으로 간다고 했는데 카메라 들고 가보니까 분명히 가나안 땅에 정착을 했단 말입니다. 정작 아브라함은 여기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성상납 사건이 있었잖아요. 자기는 복의 근원이니까 살아야 돼. 마누라는 죽이고. 완전히 [기황후]에요. 주진모가 사랑하는 아내를 원나라 왕한테 바치고 사랑하기에 버린다 이 말이거든요. 얍삽하기 짝이 없어요. 아브라함이.

인간은 기본적으로 살고보자에요. 그걸 극복한 사람이 미친 사람이에요. 아담이 흙인데. 흙은 흙이란 속성을 팍팍 보여줘야 돼요. 흙이 아닌 척하면 안 됩니다. 나는 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려고 아직까지 우리를 안 죽이고 있는 거예요. 흙이 얼마나 토핑을 잘하는지. 흙이면서 아닌 척하는 재주를 마음껏 피워봐라. 죽을 때 흙이 흙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게 이스라엘의 반복이거든요. 구약의 반복. 말씀의 칩, 구약성경의 칩이 우리한테 들어오게 되면 성경에 의해서 되풀이 되는 거예요. 계속 반복 되면서 이스라엘의 실패가 나의 이야기고 버전이 계속 업그레이드 돼요. 바리새인이 나고, 사두개인이 나고, 서기관이 바로 나고, 가룟 유다가 딱 내 취향에 맞고. 내 몸이 가룟 유다를 기억해요. 내 몸이 세 번씩 부인한 베드로를 기억합니다. 세상 권력, 중국 권력이 무서워요. 만약에 공안이 와서 예수님 사진을 밟으라고 하면 지근지근 밟습니다. 살아야 되니까. 내가 북한에서 잡혔다.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해요. 나는 국정원에서 돈 받고 왔습니다.

순교는 우리가 조작해낼 수가 있어요. 멋들어진 순교. 방금 이야기가 김은국의 [순교자]란 소설에 나온 이야기에요. 북한 장교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시험해보니까 믿는다는 인간들은 다 배신자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막상 북한에 잡혔을 때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개 같은 자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주님께서 그 말씀 안 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 말씀 없었으면 우리는 다 죽은 사람이에요. 얼마나 감사한지. 들을 귀도 없는 인간에게 할 필요도 없단 말이지요. 개한테 왜 복음을 전합니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처신해 왔지 않습니까. 아닌 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어떤 사건, 어떤 파도가 밀려올지 몰라요. 단단히 마음 준비하세요. 주님을 부인할 만반의 준비를 다합시다. 어차피 흙이니까. 그게 우리 칩이 요구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네가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해도 일체 문제 삼지 않겠다. 왜? 너는 나한테 반하면 그만이니까. 창기나 세리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지금 바꾸란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기 직업 버리란 말이 아니에요. 창기는 창기 아니기에 착하다고 여기는 자를 고발하기 위해서 창기로 살아야 되고, 구원받은 강도는 강도되도록 조치가 그렇게 취해진 거예요. 강도라도 능히 구원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공로가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이야기가 끝난 상태에요. 그걸 수정하고 변경할 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왔을 때 애굽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건 이거에요. 이스라엘이 나왔을 출애굽했다고 생각했던 신학 해석법이 뭐냐? 그들은 어떤 신학 해석법을 동원했기에 이미 우리는 출애굽했고 우리는 택하신 백성이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자부했던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우리는 승리하고 없는 적들은 물러간다는 그 사고방식은 어떤 논리에서 나온 잘못된 성경해석이냐를 보자는 겁니다. 그들은 물론 쉐마, 쉐마, 다 알고 있었어요. 율법, 십계명 다 알고 있었어요. 안식일을 어긴 사람들에게 돌을 던졌을 때에 어떤 해석법에 의해서 돌을 던졌느냐 말이죠. 돌을 던졌으면 구원해야 되는데 돌을 던진 그들도 멸망하거든요. 도대체 역사적 해석법이 왜 튀어나왔느냐? 현재 내 지점이 정당하다는 흙적인 요소, 육신적인 요소의 발현이 아닌가?

그래서 출애굽할 때 유일하게 출애굽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사사기에 보면, 레위인이 첩이 죽었을 때 시체를 열두 지파에게 다 보내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사기의 반복이에요.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서 전 세계, 열방에 뿌렸을 때 열방들이 여호와는 한물갔다. 여호와는 더 이상 천지를 창조하신 신이 아니다. 마음껏 모독을 받게 하신 거예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에요. 그런데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끝나고 난 뒤에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단체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성경해석법을 그대로 인수합니다. 역사적 해석법입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제는 성전도 없으니까 이제는 말씀을 생활화하자. 실천화하자. 그래서 말씀을 봉독하고 생활화하는 방식을 채택한 그 당파가 마카비 전에 등장한 바리새파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성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사두개파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씀을 그대로 카피한 서기관들이고. 이놈, 저놈 다 꼴 보기 싫고 우리는 마지막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쿰란공동체고. 또 하나 열심당원이 있었고. 다윗의 약속에 의하면 네 번째 짐승, 로마에 승리할 때 감람산에서 기다리자는 열심당원. 이 다섯 개의 파에게 다 오해받고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오색 깃발을 끄집어내야 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섯 개의 해석법을 다 끄집어내면서 다섯 개의 해석법이 오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모델로서 우리 속에 육신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자백해야 돼요. 같은 아담의 자손이거든요. 네가 끄집어낸 해석법이 내 안에 내장돼있다는 것.

이스라엘을 온 천지에 뿌려놓고 주님께서는 무책임한 이야기를 해요.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 중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아브라함 자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면 돌들로도 이스라엘을 만들어낼게. 이스라엘과 천국을 절대로 연속시키지 말라. 내가 뜯어낼 거야. 백부장 이 사람을 천국의 본 자손이라는 자들을 다 끄집어내고 집어넣을 거야.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이 그 당시에 그런 이야기할 때는 이미 유대인에게 어떤 신학적인 체제가 갖추어져 있는 거예요. 그런 시스템이 갖춰졌다는 것은 그걸 근거할 수 있는 해석법이 있는 겁니다. 그 해석법이 어떻게 오늘날 개신교 해석법과 닮았는지, 천주교와 닮았는지 해석법 자체가 차이가 나지 않아요. 목사들의 심방해석법과 차이 나지 않아요.

신약성경의 모든 해석법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됩니다. 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모든 말씀을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돼야 되는데 목사들이 심방할 때 잠언서 끄집어내고 오른쪽은 부자고, 왼쪽은 건강이라고 할 때 이게 십자가를 경유한 건덕더기도 보이지 않고 끄집어내려 할 때 저쪽에서 싫어하면 곤란하고.

제가 대구에 대덕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일하면서 심방을 했거든요. 심방을 하면서 지금도 그 본문을 잊지 못해요. 새로 이사 온 수퍼하는 분인데 요한복음 6장으로 했어요.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게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믿는 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안색이 달라졌어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우리는 촌에서 대구로 왔습니다. 촌에서는 목사들이 절대로 심방 가서 그런 식으로 하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건방지게 내 신앙을 숙제검사 하듯이 하는가. 그래서 그분 안 나왔어요. 저 때문에 안 나온 사람도 많지만 저 때문에 나온 사람이 더 많았어요.

심방 갈 때는 신명기 28장을 들고 가야 돼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얘들 군에 갔을 때는 여호수아 1장을 들고 가야 됩니다.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후방으로 빠진다. 병자한테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그리고 긍정적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그런데 그 모든 말씀들이, 긍정적이라고 했지요? 긍정적이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극단적인 부정적인 심한 본문들이 없어요.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 네 일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면 죽으라는 말이에요. 지금 주어진 네 일에 대해서 은혜로 감사가 안 되거든 궁시렁거리지 말고 당장 내가 널 죽어도 할 말 없다는 뜻이란 말이지요.

항상 기뻐하란 말이 뭔 뜻이냐 하면, 기뻐하란 조건을 준 게 아니고. 이래도 기뻐할래? 이런 뜻이란 말이죠. 어쭈, 견디는데? 더 심하게 해서, 이래도 기뻐할래? 어이구. 세게 나오네. 이게 어떤 경우냐 하면, 믿음이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린 그 믿음이 온 것이냐, 아니면 내가 뭔가 노림수를 갖고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 자기 마일리지를 근거로 해서 이만큼 봉사했으니까 이 정도는 주셔야 흥정이 맞는다는 식으로 억지로 짜내는 믿음이냐를 항상 구분시키는 방법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나는 그 외는 없습니다. 다른 방식이 없어요.

왜 그러냐?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했거든요. 이스라엘 모든 왕들은 자기가 다윗의 혈통으로 봤어요. 다윗언약이 뭐냐?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온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큰바위 얼굴처럼 마을사람들이 큰바위 얼굴 닮은 사람이 와서 마을을 부흥시킨다는 거예요. 훌륭하고 소문난 사람도 아니고, 어떤 시인도 아니고, 어떤 재벌가도 아니고. 나중에 누가 진짜 그 마을에 대한 큰바위 얼굴이냐? 큰바위 얼굴을 기다렸다가 늙어버린 사람이 어느 저녁노을에 보니까 판박이라. 바로 어떤 비전과 꿈을 가진 사람만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세속적인 문학의 멋진 교훈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이 시간 간다고 늙는 것이 아니고 꿈을 잃는 순간 그때부터 사람은 늙는다. 멋진 멘트 아닙니까. 그야말로 교인들이 듣고 싶은 긍정적인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 부정적이 아니고. 고난 속에 이길 수 있는 것은 나의 믿음밖에 없다. 그 믿음은 신념이라 해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고.

그러나 열두 제자, 스데반 집사가 신념이 강해서 예수님 만났습니까? 돌이 날아오는데 “이건 돌이 아니야. 스티로폼이야.” 이래서 견뎌냈습니까? 주님께서 던지는 시늉만 하고 빨리 빼주든지 해야지 직접 날아올 줄이야. 아플 줄이야. 피를 흘릴 줄이야. 주님이 지금 장난치고 있습니까? 중국에 계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을 대단하게 봅니다. 어떻게 저 세계에서 견디나. 하지만 중국에서 만난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나는 그냥 놉니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사람은, “놀아도 안 갈 거야.”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에게 반해버리면 그게 사랑이거든요. 주께 반하면 우리의 어떤 조건도 일체 묻지 않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남자가 여자를 지독하게 스토커처럼 따라다닙니다. 여자가 귀찮아서 문을 닫아버리니까 손이 문에 끼었어요. “자기야. 손 끼인 건 안 아픈데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귀한 약을 가지고 왔으니까 이것만 놓고 갈게.” 손 끼인 채로 돌아섭니다. 이건 일방적인 사랑이고 지독한 사랑이에요. [별에서 온 그대]보다 더 심합니다. 완전히 그 상대 없으면 못 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에요. 그걸 누가복음 2장에서는 내 기뻐함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 네가 나를 기뻐한 게 아니고 내가 먼저 너를 사랑했고 기뻐했다.

그래서 마을에 소문 나쁜 여자가 울면서 향수를 뿌리지요. 주님께 반해버렸는데 이런 나의 조건이 뭐가 문제입니까. 조건을 문제 삼는 자가 바로 역사적 해석법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에요. 저 여자의 역사를 압니까? 저 여자가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주님은 아십니까? 모르지요. 저 여자가 얼마나 소문이 나쁜지 아십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말이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바로 단절이에요. 나는 흙과 안 논다. 흙이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그 예쁜 짓 때문에 근거하지 않고 네 속에 집어넣을 거야. 로마서 8장 11절 말씀처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영이 너희 속에 오게 되면 죽은 너의 몸도 너의 속에 있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끝.

우리를 비껴가서 대화해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끼리만 대화하고 일처리 다하고 우리를 끼어 넣어주지 않습니다. 네 속에 있는 성령만 있으면,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다. 그게 보증금이거든요. 아파트 보증금, 고린도후서 1장. 보증금이 미리 왔다는 말은 이미 접수했다는 것이고, 점령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하나님은 노가 없고 전부 예스에요. 여러분 인생이 어떻게 되든 노가 없어요. 예스에요. 집어넣으니까.

나머지 문제는 성부, 성자, 성령 자기들끼리(?) 다 처리해버리고 우리는 들러리. 우리는 결과물. 이걸 여호와 전쟁에 부산물이라 합니다. 붙여주는 전쟁에서 여호와 혼자 승리하고 용사가 되셔서 그 얻은 부산물 속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그게 성소가 된다는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말씀, 그게 성전이에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들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에베소서 4장의 말씀도 붙여주는 전쟁의 연장선에 있어요. 그래서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봐야 되고 구약해석은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 돼요. 점심 먹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해석에 들어갈 겁니다.

오전 공부를 마감하면서 정리하게 되면, 출애굽에서 어린양이 죽었지요. 그렇다면 어린양을 확대시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여기서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씀을 지켰다고 할 때 그냥 보지 말고 자기 죽음을 경유해야 돼요. 그러면 거기에 마중을 나와요. 이미 십자가에 함께 죽었던 분이 마중을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해야 될 나의 숙제로서의 내 구원이 아니라 우리를 마중 나오는 주님의 숙제로서 나를 구원시켜버리는 일이 벌어져요.

제가 칭다오 공항에 내렸을 때 말을 할 줄 압니까, 아무도 없고 찾아오라고 하면 못 찾아오지요. 정 목사님이 마중을 나왔어요. 천하보다 반갑지요. 한국에서는 별로 안 반갑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 이 정보, 144,000 그것만 알면 구원받는다고 했던 것처럼 확실한 정보를 기억할 수 있도록 치매 걸려도 안 잊어버리는 그런 정보를 알게 해주옵소서. 예수 안 믿는 내 남편, 내 딸도 구원받아야 돼. 이렇게 걱정하면서 와서 성령 인도로 출애굽하기 위해서 죽음이 와버리면, 누가 네 딸이야? 제 딸인데요. 마태복음 12장에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네 마누라? 네 마누라 아니야. 네 남편? 네 남편 아니야. 내가 만들어서 너한테 붙여준 거야. 그동안 네 소유였지. 내 자식이니까. 그때부터 새로운 피조물로 바뀝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장 7,8절) 내 속에 장착된 말씀이 드디어 구체화 되면서 우리에게는 “죽어. 어디서 네 것이라고 우기면서 내 일에 방해했어.” 마귀 자식이 따로 없어. 얼마나 방해했는지. 하지만 방해한 것보다 내 일이 더 세기 때문에 십자가까지 온 거예요. 와서 드디어 우리를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이고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주의 마누라 되고, 주의 남편 될 때 에베소서에 의하면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내 대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게 되는 거예요. 내 마누라 되면 안 돼요.

말씀이 말씀 노릇하려면 반드시 경유해야 될 게 예수님 죽음에 경유해서 교체해야 되고 그동안 반성하고 회개한다는 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반성케 하시고 회개케 하시지 반성, 회개한 내가 죄인입니까, 아닙니까? 물을 자격조차 안 돼요. 주의 것이니까 반성케 하고, 주의 것이니까 회개케 했기 때문에 회개했다고 잘난 척하면 안 되고, 반성했다고 훌륭하다고 여기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걸 이미 주님은 일을 시작했는데 우리가 몰라요. 왜? 우리는 남과 이 세상에서 경쟁해서 잘남을, 자랑질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맨날 기도하는 게 자기 자랑질할 요소만 끄집어내서 새벽기도하고 있다고. 남에게 지기 싫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소급해서 주께서 일으키신 일을 마치 그래야 구원되는 줄 착각한 거예요.

결국 성도는 마지막에 만세를 부릅니다. 뭐라고? 다 이루었다. 십자가 이룰 때 시간적으로 이미 소급해서 다 이룬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십자가는 이미 이룬 사건인 것을 미처 모르고 새삼스럽게 십자가를 믿어야 되고 주님을 믿어야 되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받는 것처럼 내가 오해를 했습니다. 부르도록 했고 믿도록 한 것을 모르고 내가 불러야 내가 장착해야 구원되는 줄 알고 오해했던 것, 얼마나 그동안 세상 유혹에 내 자신이 주는 유혹에 빠졌는지요.

그리고 난 뒤에 나중에 천국 가보니까 면류관을 내가 쓴다는 게 말이 돼. 요한계시록 4장에 어떤 사람은 십오 미터 던진 사람 있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생명의 면류관, 무슨 면류관 다 던지는 거예요. 이것은 주님께서 쓰셔야 되지 절대로 우리가 써서는 안 됩니다. 왜? 모든 일은 주의 뜻대로 됐기 때문에.

목사님, 성경의 중심이 뭡니까? 성경의 중심은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그냥 주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식사합시다.

첨부파일 : 201403 중국강의 제3강.hwp (54.0K), Dow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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