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1-루터, 칼빈신학
201403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1-루터, 칼빈신학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3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1-루터, 칼빈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125페이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를 이야기하면서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영광이다. 죄를 구원하는 영광이다. 도대체 그전에는 뭘 이야기했기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개신교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느냐는 알 필요 없고 의미도 없고요. 그전에 성경 보는 해석은 뭐였는데 달리 봤는지 그 차이만 이야기하면 되거든요.
124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스콜라주의자들도 신의 영광을 말했으나(토마스 아퀴나스를 보면 됩니다) 그들은 신을 최고의 축복으로 알고 그 축복을 얻으려는 행복주의의 동기에서 말한 것이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 신학과 접목하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왜 좋은 분이야? 우리 인간을 행복해주려고 애를 쓰시기 때문에 좋으신 분인 거예요. 하나님이 좋다, 안 좋다는 판단기준을 우리가 먼저 정해버린 거예요.
개척교회 하는 목사들에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하나님이 좋은 분이지요. 그럼 어부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자기를 행복하게 하면 되는 겁니다. 정치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행복이라는 그 동기를 마다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요. 그들은 신, 하나님 이야기하면서 은근히 뭘 원하는 상태에 있단 말입니까? 결국 “행복하게 해주세요.”를 전제로 하고 계속 하나님과 관계를 이으려고 하는 거예요.
루터는 뭐라고 했습니까? 보통 인간들은 나의 행복. 남의 행복은 짜증나. 신경질 나. 상대적으로 내가 덜 행복하게 되니까. 루터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효과가 행복이 아니라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행복, 복에서 시작해서 복으로 나가는 반면에 루터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와서 영광으로 가는데 그 노선은 오직 십자가의 반복으로서만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잖아요. 십자가 안에서 세상과 원수가 되었고 죽었고 하는 말이 나오지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125페이지 봅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찾았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자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그 의도가 뭐지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스콜라신학이라고. 인간이 행복,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잖아요.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라고 하는 거예요. 무엇에 근거해서? 그것으로 인하여 십자가가 천시되고 외면받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죠. 하나님 영광은 십자가를 보고 싶어 하는데 십자가 자리에 자기 행복을 집어넣고 영광을 드리겠다고 하니까 그것은 악마의 일이란 말이죠.
이런 루터의 주장은 빌립보서 2장에 잘 나와 있지요. 2장 9절에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되기를 스스로 포기했지요. 왜 포기했습니까? 이 마음을 품으라 했는데 우리도 그 마음을 품어야 되는데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데? 스스로 영광을 포기한 그 마음을 품으란 말입니다. 포기하신 예수님의 목적지가 어디지요? 십자가까지 낮아지죠.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 죽은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알아요. 무엇이 아버지께 영광인지. 십자가에 죽는 게 영광이거든요. 그 영광을 마다하는 것은 악마가 그렇게 시키면 마다하지요. 그게 악마 짓인지 안다면 어쨌든 간에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어이 아버지 영광을 이룸에 어떤 것도 포기할 마음이 없지요. 그러니까 그 다음 하나님 조치가 뭡니까? 십자가 달려 죽은 그를 지극히 높여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고 많은 입으로 그를 주라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2장 11절에서 나오잖아요.
성령 받은 자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로 골치 아픈 이야기가 아니고 스무스한 그야말로 미끄럼틀 내려가듯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우리의 복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자신의 행복을 거론한단 말이지요.
그 뒤에 봅시다. [루터는, 회심 이전의 금욕주의적인 그 방법은, 결국 스콜라주의자들이 긍정하던 자기애의 그릇된 노력임을 후에 고백한다. “내가 구하면 구할수록, 그리하여 하나님에게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었다. 아니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가 그를 찾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라고 하였다.]
상당히 말이 어려워요. 가까이 갔다고 생각한 것이 도리어 멀어졌던 거예요. 그러면 가까이 간 것이 왜 멀어지느냐 하면, 가까이 갔다고 하면 내가 나의 존재를 생각하지요. 나는 지금 이 정도야. 하나님 앞에 바짝 붙었어. 자기 존재를 의식하지요. 신과 내가 좁아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걸 알려주는 십자가와 성령의 책망은 어디 있습니까? 너무나 완벽한데 책망 받을 게 있어야 책망 받지.
성령은 책망하는데 있어요. 책망 없는 성령의 역사는 없습니다. 방언? 은사?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에요.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책망을 해줄 때 나타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설교자로서 강단에 서면, “오늘 뭐라고 이야기하지.”라고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요. 그럴 때 성령이 임하면 이 시간에 나를 포함해서 이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의 말씀을 앞장세워서 저희를 책망해주시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고마운 일입니다. 이렇게 마음 갖도록 책망하는 마음을 허락해달라고 하시면 돼요. 설교가 책망하는 설교를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야 회개가 유발돼요.
[구약의 율법은 적극적인 의인 반면, 신약의 복음은 피동적인 의로 보았다.] 이런 게 루터가 성경신학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한 거예요. [율법은 죄인을 보복하시는 정의이고, 복음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의이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죄인을 용서하는 것을 사랑이라 하잖아요. 루터는 그 사랑이 정의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뒤에 나오는 칼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가 우선이고 사랑은 나중이에요. 루터는 사랑이 곧 하나님의 의, 정의인 반면에 칼빈은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세우기 위해서 사랑을 줬다고 보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내 사랑 받고 용서받았으면 이제 내 정의를 펼쳐봐라. 이게 칼빈의 생각, 칼빈주의에요. 루터는 하나님의 용서해주신 사랑을 율법의 완성으로 보는 겁니다. 로마서 13장 8절의 말씀처럼.
[루터는 인간의 믿음 자체도 죄의 용서를 받을 만한 토대, 즉 공적이 되지 못하고] 참 중요한 말했네. 믿는 자체도 공적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믿음이라는 은혜로 구원받지요. 믿음이란 선물로 구원받지 선물이 은혜니까. 내가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란 뜻이에요. 그냥 믿어버리면 하나의 결단력이 되고 신념이 되고 오기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잠재적인 속성에 속하기 때문에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돼버려요. 그러면 안 되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 믿음이 우리에게 나온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선물로 준 믿음이기 때문에 둘의 믿음을 구분해야 된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다만 경로에 불과하다. 파이프라 하지요.
[의인은 믿음으로 얻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은혜로 거저 얻는 것이다.] 거저 얻는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 땅에서 지옥 갈 사람이 천국 갈 사람이 섞여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해서 지옥 가고, 내가 이렇게 해서 천국 간다고 서로 싸운다는 그게 의미 없는 이야기에요. 나는 지옥 간다고 한들 주님께서는 그 분위기를 참조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영향을 고려하지 않아요. 따라서 인간이 이 땅에서 설치고 산다는 자체가 자기 구원과 관련 없는 거예요. 구원받아야 될 죄와 관련돼있지요. 주님의 피에 의해서 씻겨 내려가야 될 시커먼 죄 속의 일부가 그거지 씻어주는 피에 어떤 영향력에 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겁니다.
[루터의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론과 심한 대조를 이루는데, 루터는 ‘그리스도중심의 예정론’이라면, 칼빈은 ‘하나님중심의 예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적 예정론이라고 보면 돼요. 삼위일체적 예정론의 특징은 바로 구원론적 예정론입니다. 날 구원하기 위해서 예정이 있다는 거예요. 예정되어서 구원되었다는 말은, 동일한 말이지만 느낌이 뭐냐 하면, “날 구원하려면 예정되어야 구원되는구나.”라고 여전히 주어 자리에 자기 구원을 집어넣고 생각하는 예정론은 잘못된 예정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중심의 예정론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예정론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언약적으로 보면, 이때는 언약을 몰랐으니까 성부와 성자 사이에 창세전에 의논해서 확정된 그 내용, 그 질서가 언약이고 그 언약을 펼치는 방식은 예정된 것 아니면 펼쳐지지 않습니다. 에서와 야곱에서 한쪽은 무조건 사랑했고 한쪽은 미워했고. 왜 그렇게 했는가? 야곱, 에서한테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태어나지도 않은 피조물에게도 지배권을 갖는다는 뜻이에요. 피조물이 그냥 태어난 게 아니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의논된 대로 이뤄지기 위해서 태어났단 말이지요. 따라서 예정론은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논리에요. 성부, 성자의 언약을 위해서 태어났다면 태어난 것은 언약의 내용에 종속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고 지극히 당연한데 그게 논리가 어렵다고. 아무 이상한 것도 아니지요. 정상적이지요.
[루터는, 예정의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의 은폐성에 속하는 것과 예정의 유일한 확정은 그리스도임을 밝히면서 인간 이성의 제한으로서 예정론을 소개하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루터가 예정했다는 것은 예정을 이용해서 자기 구원을 시도한 모든 인간의 시도로부터 단절되기 위해서입니다. “예정론 이용해서 구원받아 볼까?”라는 시도가 성사되지 못하도록, 그러한 시도가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다른 영역에 속한 예정론입니다. 따라서 “그러면 그 예정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잖아.” 할 때는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이미 예정된 자에 한해서만 십자가의 피가 믿어지게 돼있고 그 결과로 우리의 구원은 예정된 바에 따라서 구원됐다는 사실을 아울러 믿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단 말이지요.
그러면 자기 구원중심이 아니고 주어 자리가 자기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지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이 된 거지요. 결과적으로. 그러니까 구원론이고 종말론이고 모든 이론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일어난 현상들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중심이고 인간들도 예수님중심으로 돼요. 주는 예수님만 주가 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53번 칼빈 보세요. 루터가 이런 이야기할 때는 항상 예수님중심이잖아요. 예수님중심이 왜 칼빈이나 개혁주의신학자들에게 못 마땅할까요? 인간들에게 왜 못 마땅할까요? 그들에게 삼위일체가 심어져있거든요. 삼위일체는 특정 누구 하나를 높아지게 하면 삼위일체 자체가 균형이 안 맞는다는 그런 개념을 갖고 있단 말이지요. 나란히, 나란히. 피아노 위에 못난이 인형 세 개 있는 것 봤지요. 러시아정교회 성화처럼 성부, 성자, 성령 나란히 있을 때 인간들은 만족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만족하는 것과 주님이 영광 받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어요. 예수님이 중심이라면 따라줘야 되는데 삼위일체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가 복음이지 삼위일체가 복음이 아니거든요.
칼빈 봅시다. 칼빈의 실질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예정인데 이 예정은 십자가 사건의 예정이 아니고 존재의 예정이에요. 모든 존재가 그와 관련돼있다는 겁니다. 칼빈의 사상은 모든 세상 피조물들이 삼위일체 이론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 이론을 위해서 있다고 본 거예요. 그 삼위일체 이론을 칼빈은 하나님중심이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이 원리에 준해서 그는 항상 성화와 경건의 실천을 권하고 있다.] 참 이상하지요. 칼빈이 뭔가 너무 잘못 생각한 게 성화와 경건의 실천을 한다고 했는데 이 점이 어렵기 때문에 128페이지 봅시다.
[칼빈은 그 다음으로 외면적 자유를 말하는데 외면적 자유는 영적 삶보다는 지상의 삶에 속한 것으로써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들과 관련한다. 외면적 자유에는 섭리와 아디아포라(무해 무익한 중립적인 것)에서의 자유가 있다. 성경에는 금하거나 명백하게 명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자유인데]
성경에서 뭔가 하지 마라, 또는 하라는 것이 없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실제 교인들이 목사한테 물을 거잖아요. 그럴 때는 자유의 능력을 알아서 균형 맞추어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아디아포라라고 하는데 왜 그게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은 칼빈의 이론에 의하면 성령 받은 사람의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나야 된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칼빈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본 겁니다. 믿음으로 의가 아니고 행함으로 파악이 돼야 그게 의라는 거예요.
지금 칼빈을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하라, 하지 마라는 그 당시까지 문화잖아요. 성경에 스마트 폰 하라, 하지 마라가 있습니까? 그때는 스마트 폰이 발명되지 않았지요. 세상은 모든 게 얽혀있거든요. 칼빈이 무식한지 유식한지 진짜 구분이 안 되는데 세상은 모든 쪼개져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율법 이야기할 때 돼지 털을 몇 개 뽑으면 돼지가 아프냐고 했지요. 모든 율법은 몸통과 연결돼있지요. 야고보서에 보면 율법 하나만 어겨도 모두 어긴 게 되잖아요. 그 몸통이 예수님이잖아요.
이 말은 세상에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돼있단 말이죠. 악마라는 것도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거부한 게 악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룬 것이 새 언약이잖아요. 그런데 구약에서 악신들이 어디를 공격합니까? 사울이 왜 다윗을 공격합니까? 다윗에게 새로운 언약, 다윗언약이 함께 있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언약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윗언약이 아니라 사울언약이 돼야 되잖아요. 언약이 등장하니까 창 던졌는데 악신이 들려서 던졌거든요.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가인의 본성이 아닙니다. 죄가 덮치니까 동생을 죽일 수밖에 없잖아요. 마귀를 누가 이겨요?
십자가를 안 믿는다. 그러면 우리는 상당히 복음적으로 받아들여요.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 복음은 어리석게 보이고 그냥 기적만 원하고 지혜만 원하지. 십자가는 어리석을 수밖에 없어요. 악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 그렇게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요. 개인적으로는 안 됐지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새 언약에 묶여있다면, 보통 인간들이, “목사님, 이걸 할까요, 말까요?” 하는 모든 것은 이 세상 죄 아래 있는 원리에 같이 묶여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젖 물리는 것은 착하는 일이고 그 착한 내가 화투치는 것은 나쁜 일이고. 이렇게 안 돼있다고. 젖 주면서 화투치는 게 나쁜 일입니까, 좋은 일입니까? 진짜 애매모호해요.
전쟁하면서 대민 사업하는 것, 이게 착한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북한의 김정은이 시찰 나가면서 병든 노모를 모시는 가족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 착한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진짜 나이팅게일 같은 슈바이처 같은 그런 자비심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버이 태양 같은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미사일은 왜 쏘는데?
다윗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면, 다윗이 분명히 남편 있는 여자를 간음했습니다. 더 못 된 것이 그 남편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사람이 상식적으로 우리야한테 미안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미 죽어 버렸지만 우리야한테 고맙다고 그래요. 주께서 꺾어진 뼈를 통해서 내가 용서받았으니까 고맙다는 거예요. 세상에 뻔뻔함의 극치 아닙니까. 자기가 가해자가 되어 피해 본 그에서 오히려 너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그 뻔뻔함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것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 감동, 이것은 지금까지 고생해서 이스라엘 왕 되었다는 건 문제도 아니에요. 진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는 사실.
루터는 그게 십자가였어요. 십자가를 알았다는 말은 모든 책, 백과사전 덮고 바보등신 되어서 상관없는 큰 기쁨이에요. 충격이에요. -게임 오버- 게임 끝났어요. 개콘에 나오는 것처럼(‘깐죽거리 잔혹사’란 코너)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끝. 모든 것을 당황하지 않고 십자가로 끝. 그러니까 마귀는 뭘 못 보게 하는 겁니까?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기근과 어떤 걸 다 끄집어내서 기어이 뭘 못 보게 해요? 정죄함이 없다는 십자가를 못 보게 만들어서 가슴 콩닥콩닥하게 만들고.
사탄도 바빠요. 사탄이 천사거든. 천사는 시키는 대로 해요. 마귀도 지 마음대로 못해요. 언약 안에 묶여있어요. 언약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거예요. 사도바울의 가시가 사탄의 가시 아닙니까. 사탄이 없으면 그런 가시 박히질 않을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 가시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는데 다 캔슬됐지요. 거부당했잖아요. 네가 약한데서 은혜가 모인다. 약하면 그 정도로 된 줄 알아. 그 정도면 됐어. 더 이상 어떤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지 말란 말이에요.
칼빈은 그 믿음이 없는 거예요. 눈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눈으로 보고 싶으니까 제일 눈으로 잘 보이는 사람으로 목사를 세운 겁니다. 131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줄. [칼빈은 가견적인 교회를 강조해서 기강을 잡으려고 했다.] 기강을 왜 잡습니까? 에베소서에 나오는 교회는 성령이 잡아도 잡는데 목사가 왜 잡아요. 그것은 보고 싶은 거예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정의를 윤리적, 도덕적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심사를 해야 돼요. 교회의 심사장이 목사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제 점수는요? 하고 눌려야 돼.
말씀 안에 정의가 들어있고 그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이 정의로운 공동체가 될 때 칼빈은 그걸 교회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이러한 칼빈의 교회정치는, [귀족주의적 과두정치의 공화국 정치사상과 상통하는 교회 정치론이다.]라고 131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132페이지 봅시다. 위에서 여섯 번째 줄. [칼빈은 초대교회의 교회 직분을 설명하여 사도가 제일 높은 자리에, 그 아래 예언자, 전도자, 그리고 교사가 제일 낮은 것으로 말하였다.] 사도가 제일 높은 자리, 그 다음에 예언자, 전도자, 교사의 자리가 있으면 자리의 역전, 자리의 분배가 고정된 자리입니까, 변동이 있는 자리입니까? 한 번 자리면 계속 자리에 있는 겁니까, 거기서 탈락될 수도 있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탈락될 수도 있지요. 반복음을 한다든지 성경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하면 탈락돼야 마땅하지요.
교회라는 것이 복음으로 서야 되잖아요. 그러면 교회에서 탈락된다는 말은 직분에서만 탈락되는 걸 말하는 겁니까, 그리스도 몸에서 끊어지는 걸 의미합니까? 아예 끊어지는 걸 의미하지요. 그런데 직분에서만 쫓겨날 때 그 사람이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확정지을 수 없지요. 그러면 도대체 교회가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잘못 해석한다든지 잘못된 복음을 전했을 때 직분에서 쫓겨난다면, 직분에서 쫓겨날 정도가 아니고 아예 교회 성도 자체가 아닌 사람일 경우에 해당 돼요. 내가 보기에 칼빈 자체가 복음을 몰라. 칼빈 자체가 쫓겨나야 돼.
목사가 제일 높고 그 다음에 교사, 장로, 집사로 돼있는데 목사와 집사 사이에서 복음을 더 잘 알고, 덜 알고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복음을 조금 알기 때문에 집사하고, 많이 알면 목사 한다는 게 돼요, 안 돼요? 이게 안 되지요.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나타나는 거거든요.
그러면 목사가 안 되고 집사가 되더라도 얼마든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목사보다 더 은혜를 많이 알고 복음을 더 많이 아는 사람 되는 거예요. 로마서 12장에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의 분량대로 하라고 돼있지요. 그것은 적다는 말이 아니고 어느 자리라 할지라도 구원받는데 합당한 용서에서는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아까 식당에서 수정과 주지요. 수정과 조금 먹으니까 맛나든가요, 많이 먹어야 맛나든가요? 조금 먹든, 많이 먹든 수정과 그 맛이잖아요. 그럼 나는 왜 많이 먹었느냐? 수정과가 뭔지 알기 위해서 먹은 게 아니고 목말라서 먹었다고요. 어떤 집사가 복음이 목말라서 많이 먹으면 그 사람이 목사 해야 됩니까?
칼빈이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이유는, 성령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세상 안에 성령 없는 곳에서 교회를 만들어서 그걸 보여줘서 그 사람들로 교회 등록하게 해서 구원받게 하고자 하는 그러한 천주교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이런 현장이 일어나는 겁니다.
왜 칼빈이 그런지 여기 나옵니다. 125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 봅시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실은 정의 실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선택된 자를 구원하시고 버림받은 자를 멸망케 하시는 그의 정의에 있으며, 이런 정의로움이 곧 하나님의 영광의 열쇠라고 보았다.]
루터의 영광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지요. 빌립보서 2장 9~11절. 영광 돌리는 코스를 하나님이 이미 정해놨지요. 칼빈은 정해놓은 걸 안 믿고 우리가 납득이 되는 정의를 따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 정의가 뭐냐? 세상에서 통하는 정의를 따라줘야 저 사람들도 자기가 원하는 윤리, 도덕을 찾고 싶을 때 교회 온다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죽은 것도 사람들에게 오해 받아 죽었지요. 그걸 성경에서는 걸려 넘어진다고 해서 ‘걸림돌’이지요. 걸림돌을 빼버리면 그게 교회입니까? 십자가 사건이 걸림돌 때문에 생겼잖아요. 걸고 넘어졌잖아요.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네가 죽으라고 해서 죽여 버렸단 말이죠. 십자가 자체가 모든 인간을 걸려 넘어지도록 하는 십자가란 말이죠.
그런데 칼빈은 안 넘어지도록 배려해준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보고 싶습니까? 우리 교회에 오세요. 우리 교회는 아주 체계적으로 잘 돼있습니다. 이러면 그 사람들이 교회 몰려오더라도 걸림돌이 빠진 교회지요. 걸림돌이 빠진 교회라면 가짜, 진짜를 구분할 수가 없지요. 이제 가짜, 진짜는 목사가 판정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목사보다 더 착한 사람 온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것은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지는 거예요. 왜? 다른 사람은 사울이 다 장악하는데 다윗에게는 장악하려고 해도 장악 당하지 않는 요소가 다윗에게 아우라처럼 있었단 말이죠. 사울 왕이 자기 딴에 믿음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확인해봤어요. 확인 해봐도 하나님이 뭔가 빼주는 것 같아. 그래서 나중에 사울도 인정해요. 하나님이 너를 승리하길 원한다. 그 다음부터 사울은 사울의 길로 가고, 다윗은 다윗의 길로 가버려요.
126페이지 제일 위에 뭐라고 돼있냐 하면, [칼빈의 신론은 그리스도중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삼위일체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인간의 세상에 ‘적응’하시는 형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인간 보기에 낮아졌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단의 모습으로 온 거예요? 분명히 성경에 낮아졌다고 하거든요. 그 낮아지심이 우리 인간들 보기에 낮아짐으로 보입니까, 교만한 것으로 보입니까? 바리새인 보기에 예수님이 낮아지신 분이에요, 교만한 분이에요? 교만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누구라도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지요.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갖춘 신학적인 자질은 인간끼리 붙어서 최고의 자리에 있지요. 최고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판정해봤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낮아진 게 아니고 교만덩어리고 귀신의 왕초요, 율법을 모르는 자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아 마땅한 자지요.
그런데 인간들의 생각한 하나님의 낮아짐이란 결국 뭡니까? 테레사 수녀? 결국 그런 쪽이네. 주기철 목사? 아낌없이 내주고 자기는 죽는 것? 그런데 그게 바리새인 같은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라면 예수님은 거기에 없지요.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로 나갑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너희들이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소경이라 하니까 보는구나. 이게 인간들 귀에는 얼마나 건방진 소리냐 말이죠.
그래서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 믿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열두 명 가운데 한 명도 없어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은 했지만 성령이 와야, 성령은 예수님의 사건으로 책망하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열두 제자가 돌아보니까 살아온 인생 자체가 전부 다 곡해와 오해와 왜곡, 오류의 세월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뜻대로 인생을 가지 못하고 주의 뜻대로 가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 앞에 등장하고 십자가 앞에 등장하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짜여지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요.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하나 되어 움직이는구나. 그게 눈에 들어온다니까요. 심지어 교회마저 마찬가지에요.
칼빈은 신의 섭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신의 섭리와 일반종교에서 말하는 주권과 차이점이 없어요. 칼빈이 신의 섭리를 이야기한 이유는, 자연세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로마서 8장에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요. 피조물이 허무한테 탄식하며 그들이 누가 나타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원하지요. 보세요. 피조물조차 십자가 복음을 경유해야 되지요.
홍수 이후에 자연세계가 봄여름가을겨울로 돌아가지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절대로 이 땅에 억울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 하에 돌아가는 겁니다. 그냥 십자가 없이 잘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잘 돌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잘 돌아가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운영한다는데(127페이지) 뜻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운행된다는 게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습니까? 그 뜻에 대해서 칼빈은 이야기를 못해요.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돼. 그 말은 맞는데 그 뜻이 뭐냐? 모르지요. 성경에 보면 새 언약대로 돼요. 새 언약이 뭡니까? 십자가 따라 움직이게 돼있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노아 때는 노아언약, 모세 때는 모세언약. 모세 때 여호수아와 아말렉이 싸웠습니다(출17:8~16). 그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된 거지요.
그럼 물어봅시다.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요? 뜻대로 되지. 그럼 그 뜻이 뭐냐고 물으면, 여호수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세가 언약한 대로 은혜 받지 아니할 자는 멸망당하고 은혜 받은 우리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그 뜻대로 되겠지요. 그런데 칼빈이 세상은 뜻대로 되는 거야 할 때 이것은 운명론이고 섭리론이지 여기에 복음적인 것이 없는 거지요. 이건 스토아철학이에요.
“세상 다 그렇고 그런 거야.” 이걸 안다고 구원받습니까. 이건 성철 스님도 그런 소리하겠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 도대체 불교 중과 손잡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들에게 복음이 없는데도 손잡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운명론, 섭리론,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되고 저쪽은 신이란 이름의 부처의 뜻대로 되고. 둘 다 주권사상이니까 손잡으면 되겠네. 그래서 칼빈주의가 말하는 신의 주권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맹탕이에요. 이렇게 되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칼빈은 말하기를 악도 신의 뜻대로 된다는 겁니다. 악이 뭡니까? 몰라요. 악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훼손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악이에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전쟁이었으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을 벌였으니까. 구체적으로 악이란 여자의 후손이 하는 일을 훼방하는 것이 악마의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경유해야 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말고 주 안에서 해야 돼요. 주가 누굽니까? 십자가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란 말이에요. 그만큼 우리가 스스로 죄인인 것을 알면서 부모를 공경하란 뜻이에요.
128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봅시다. [칼빈은 잠언 16:4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다. “여호와께서는 온갖 것을 그 용도에 따라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여호와란 말 대신에 신이나 부처, 자연이란 말을 넣어도 말 되지요. 일반인들에는. 그럼 이 잠언해석이 뭘 경유하지 않았습니까? 잠언이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예루살렘의 왕이 이야기한 거죠. 잠언이 이방 왕이 이야기했습니까? 아니지요. 예루살렘의 왕이 이야기했잖아요. 그것은 다윗언약에 소속된다고요.
잠언의 모든 것은 하늘의 질서에요. 하늘의 질서가 땅의 질서를 책망하기 위해서 잠언을 준 겁니다. 이것은 잠언 중 몇 개를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문제가 아니고 하늘에서 쏟아진 모든 질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다 대응하는 관계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내가 알아서 할 거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은 잠언서에 없어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관계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내를 얻은 자는 여호와께 복을 얻은 거지요. 그러면 아내를 얻었다는 것은, 그 당시 다윗언약을 경유해서 보면 다른 이방민족에게는 절대로 아내에게서 언약이 있지 않고 그냥 살림 해주는 여자만 만나지요. 저에게 살림해주는 여자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은 이방민족이 생각하는 신께서 내게 아내 주셔서 고맙다는 뜻이고. 이스라엘은 언약과 관련되어서 아내를 주셨다. 이것이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과 같이 하라. 그것과 연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성경 전체가 지혜가 되는 겁니다. 중국에서 강의했잖아요. 솔로몬 깨면 두 개가 나온다고. 하나는 지혜가 나오고 하나는 율법이 나온다고.
지혜라는 것은 율법이 깨졌을 때 지혜는 깨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근거가 돼요. 율법은 사람 손으로 지키면 되지만 지혜는 사람 손으로 할 수 없어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 이걸 어떻게 수정할까요? 가만있어도 헛된데. 이제부터 헛되지 않기. 이게 안 되는 높이에 지혜가 있어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지혜가 되는 겁니다.
솔로몬이 범죄 했기 때문에,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솔로몬 안에 담겨있는 지혜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계기가 된 거예요. 그리고 율법대로 이스라엘은 14대, 14대, 14대를 거쳐서 멸망해야 되고. 멸망할지라도 지혜는 손을 안 타니까 지혜는 오히려 지혜답게 성취되는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겁니다.
129페이지 봅시다. 칼빈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의 신성에 가있다. 예수님을 인성, 신성으로 따지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일하는 걸 보지 않고 내재하는 신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만큼 칼빈은 인간이 만든 신학을 복음이고 진리라고 우기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렇게 주장하지 않으면 저쪽에서 이단이라고 하면 교회 안 될까 싶어서.
마지막으로 생각해봅시다. 교회가 인간이 되고 안 되고 간여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주께서 만들어놓은 교회를 이게 교회냐, 아니냐? 더 교회답게 되느냐? 하고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느냐 말이죠. 우리가 열심히 하면 교회 더 잘 되고 나태하면 교회 안 되는 그런 게 교회냐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 머리가 주님이 아니고 목사고 사람이 되잖아요. 그래서 목사나 모든 직분자는 머리 되신 십자가를 경유할 때 경유하면서 “내가 교회 주인도 아니고 알아서 일한다고 교회 더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나, 안 하나 주님에 의해서 날마다 교회 되게 하시는구나. 십자가를 적용하면서 되는구나.” 할 때 우리는 완료된 묵시의 세계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칼빈과 루터를 보면서 그들이 메시아도 아니고 그들도 죄인에 불과한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학 자랑하지 말고 주님만 자랑할 수 있는 성령 받은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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