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40227-마15장22절(개)49강 - 이 근호 목사
대전140227-마15장22절(개)49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대전140227-마15장22절(개)49강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마태복음15장22절입니다. 이 내용은 어떤 여자 하나를 만나게 되지요. 만나는데 자기 딸이 귀신들렸다고 이렇게 왔습니다.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습니다. 했을 때 여기 22절에 보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이 대목에서 이 여인이 외쳤던 입에서 나왔던 신학체계를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람이 예수님 만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 착한 예수님 또는 선한 분이여! 하늘의 하나뿐인 분이여! 내 딸의 귀신 쫓아 내어주시옵소서. 하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특수한 용어를 예수님에게 붙였어요.
이것은 이 여자뿐만 아니고 성경에 예수님 가는 곳에 보면, 문둥병자도 그런 이야기해요. 소경도 그런 이야기하고.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게 일단은 다윗의 자손이 뭔가를 알아서 이 속에 들어가야 이 여자의 원하는 바, 외침이 무슨 의미로 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겠지요.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있다면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있다면 이스라엘 속에 왕이 있지요. 다윗이 등장하잖아요. 다윗이 등장하는데 다윗이 등장하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바로 연결되지를 못하고 하나님 쪽에서 내민 손길, 언약,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움직이게 돼 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발생된 그런 나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어떤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 그 모든 취지와 계획과 프로젝트는 언약을 통해서 주입되게 돼있어요.
주입되었을 때에 전에 있는 다윗언약이전에 있는 언약을 무슨 언약이라 하는가 하면, 모세언약이라 하거든요. 모세언약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율법입니다.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법을 받은 거예요. 법을 받았는데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법만 준 게 아니고 법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속에 잠입을 한 거예요. 잠입, 스파이처럼. 이걸 동행이라 할 수 있는데 잠입할 때, 잠입했다는 그 개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과 더불어 이스라엘 속에 함께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스스로 이스라엘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이 따로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와 함께 동행 하시는 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면 돼요. 그러면 전쟁할 때 어떻게 전쟁하느냐, 전쟁할 때는 무기도 있어야 되고 용기도 있어야 되고 단결도 해야 되고 군사도 있어야 되고 그렇게 해야 되는데 하나님은 이리 합니다.
‘내 이름을 앞장세우면 적들은 패배하게 돼 있다.’ 내 이름만 앞장세우면.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앞장세우는 방법은 뭐냐, 그게 뭐냐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게 하면 되거든요. 드러내는 장치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제사법’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4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20장 24절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법대로 제사를 하게 되면, 화목제를 드리게 되면, 제단을 쌓고 피를 뿌리고 이렇게 언약대로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이 말이지요.
이걸 말로 하니까 약간 복잡한데 SF영화 공상과학영화로 생각해 봅시다. 공상과학영화에 보면 이상한 어떤 물건 하나가 있거든요. 쇠붙이라 합시다. 주인공이 쇠붙이 가까이 오니까 거기서 갑자기 뭐가 나오는가 하면, 형광물질이 나오면서 쇠붙이에서 어떤 인물이 나오던지 어떤 형체가 새로 나왔을 때, 요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에 해당되고 요 앞에 쇠붙이는 제사 드리고 있는 제사의 현장이라 보면 돼요.
어떠한 특수한 물질에서 갑자기 음악이 뷰~웅하고 나오면서 뭔가 아우라가 이미지가 확 떠오르는 게 있지요. 요것 때문에 요 이미지가 떠오르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갈 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인도했잖아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으면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희한해요. 하여튼. 만나를 먹어가면서 원망했거든요. 그들은 알았어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있는 건 인정하겠는데 함께 있으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제공되지 않으니까. 이게 원인과 결과가 전혀 맞지를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일이 잘 풀려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안다니다가 교회 나왔으면 집안이 잘 풀려야 되는데 교회 나오고 하나님 믿고 십자가 복음 믿는데 집구석이 말이 아니라, 가출하고, 애는 교통사고 나서 죽고, 남편은 바람피우고, 이거 뭐 말이 아니에요. 뭔가 하나님 믿을 건더기가 제공되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뭐합니까? 원망할 수밖에 없지요. 바로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그거에요. 원망을 일부러 유도를 해요. 원망을 유도하고 원망 앞에 뭐가 등장하는가 하면, ‘희생’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희생인데 누가 대타로 나가는가 하면, 선지자의 고난이 여기에 마중을 나가요. 그럼 원망한 쪽은 졸지에 뭐가 되고? 죄인 되고 이쪽은 뭐가 되고? 희생을 근거로 해서 긍휼과 자비가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사사기에 보면 희생해야 될 선지자 자리에 누가 들어가는가 하면 바로 사사가 들어가요. 이 사사가 들어감으로서 사사를 보고 그들은 이걸 구원합니다.
예를 들면, 입다 같은 경우에 입다는 지 힘을 까불다가 누가 죽지요? 딸을 죽이지요. 그러니까 입다는 이번 전쟁에서 딸을 희생당한 유일한 집안이에요. 그런데 딸의 희생을 근거로 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아랍나라한테 해방을 받거든요. 그러면 입다 가정에서 요 아우라를 피게 하는 고 물질, 쇠붙이가 뭐해야 됩니까? 입다의 딸이 되고 입다의 딸을 통해서 뷰~웅 하고 등장하는 게 뭐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이미지가 여기에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이전부터 이스라엘 속에 동행하신 겁니다.
자,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 사람들은 뭘 봅니까? 다윗을 쇠붙이로 본 거예요. 다윗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이 다윗은 고난 받아요. 다윗이 고난 받으면서 했던 유명한 시편22편 내 하나님이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지요. 다윗은 희생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희생자로 등장하는 거예요. 희생자로 등장하면서 다윗이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다윗을 희생하게 했던 저 쪽은 뭐가 되고? 죄인이 되고, 이쪽 희생케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의 이름이 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22편 지나고 23편에 가면 여호와의 목자가 등장해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잠입했던 증거가 뭐냐 이겁니다. 고난입니다. 십자가 고난, 고난 받는 것, 하나님의 약속대로.
또 있어요. 또 예를 들면 요셉입니다. 요셉은 꿈에 봤잖아요. 꿈보고 난 뒤에 요셉의 인생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버지는 요셉을 잃어버리고 요셉은 누구를 잃어버리고?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아버지와 요셉이 생이별 해버려요. 마치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것 같아요. 요셉이 꿈을 꾸고 난 뒤에 요셉은 못 되고 남들은 다 잘되고. 그런데 요셉은 갈수록 인생은 점점 더 꼬이기 시작하고 점점 나락으로 빠지지요. 심지어 요셉의 해석대로 승진했던 원래 자리로 복귀했던 그 사람이 요셉을 생각했습니까? 생각 안했습니까? 요셉을 잊어버렸어요. 아마 드라마 이리 쓰면 시청자들 원망 많을 겁니다. 빨리 요셉 복귀시키라고.
요셉이 복귀된 것은 요셉의 희망사항이 아니고 바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한 그 꿈이었습니다. 또 다른 꿈이 바로 왕이 꿈을 꾸니까 요셉은 꿈속에서 논 거예요. 그래서 요셉이 뭐라고 합니까? “형들이여, 형들이 나를 버렸다고 혹시 내가 복수할까봐 신경 쓰시는데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이 아버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앞서서 저를 희생자로 보냈습니다.”그게 야곱언약이에요. 야곱언약은 희생자가 있어요. 아브라함은 누구를 잡습니까? 이삭을 잡지요. 아버지가 이삭을 잡지요. 모든 언약의 핵심은 이 아우라, 하나님의 아우라가 피는 것은 반드시 이 지상에 아벨과 사가랴처럼 적들에 의해서 피흘림 되는 살해사건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반복에서만 천국이 있고 십자가 바깥에는 천국이 없어요. 반드시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죽어줘야 죽어진 내가 아우라를 피워내는, 그리스도를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아, 돌 던지지 마세요.” 이러면 그리스도가 안보이겠지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하고 스데반하고 죽기 이전부터도 이미 함께 있었다는 걸 알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봤으면 안돼요. 신약에 왔으면 신약에서는 보는 게 아니고 그 안에 거주하는 겁니다. 내가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안돼요. 말씀을 실천하면 안돼요. 그건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고 말씀 안에 녹아 들어가야 돼요. 말씀 안에 녹아 들어가면 실천은 누가 하느냐, 말씀이 말씀 스스로 실천하지 내가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는 게 아닙니다. 발걸음 세는 것도 전부 다 말씀이에요. 내가 하루 일어났다. 운동한다. 운동 한 걸음, 한 걸음 그것이 내 뜻이 아니고 말씀이 시켜서 하는 뜻이에요. 말씀대로.
내 목숨하나도 참새가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 죽는 것도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살려내는데 말씀을 말씀되라고 살려내는 것이지 말씀이 아니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께서는 나를 살려주는 법은 없습니다. 주께서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를 않습니다. 본전 다 뽑아요.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살고 싶어도 더 살지를 못해요. 말씀의 활용 때문에. 말씀을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살릴 필요가 있으면 계속 살리고 더 이상 살 필요 없으면 그냥 죽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잖아요. 그렇게 한다고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하는데 굉장히 난해한 말을 했어요. 우선 첫 번째 바리새인부터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연구한 근거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멸망부터 시작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등장한 게 에스라, 느헤미야죠. 에스라, 느헤미야 때, 그 때는 성전도 없으니까 그들이 기대한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는 무슨 운동을 일으켰느냐, 말씀 운동을 일으켰어요. 말씀대로 돌아가자. 말씀운동을 하면 반드시 가르치는 선생이 필요해요. 그 선생을 누가 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했고 그걸 돕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레위인들이에요. 제사장 이 사람들은 말씀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비가 충당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마지막에는 보면 모든 국민들은 모든 남자들은 다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십일조를 해야 돼요.
십일조를 하면서 또 하나 아이디어는 뭐냐 하면, 십일조 하되 아브라함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혈통을 유지해야 돼요. 그래서 이방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전부 다 강제이혼을 다 시켜버렸습니다. 참 울고불고 많이 했을 거예요. 여보, 가지 마! 자식새끼는 어떻게 하고? 했을 거예요. 자식은 내가 키운다. 이방여자는 가! 종교를 바꾸던지 안 그러면 유대교 하던지 아니면 헤어지던지 해라. 강제조치를 그렇게 했어요.
강제조치해서 남은 게 뭐냐 하면, 말씀 하나 유지했고 그 다음에 혈통 유지했잖아요. 두 가지 남긴 거예요. 또 하나 했다면 여기서 십일조강조해서 레위지파를 유지시키려고 애를 쓴 거예요. 요 세 가지가 한 덩어리 된 것이 BC400년경에 있었던 말라기에 나옵니다. 말라기는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레위언약은 영원하다. 레위지파는 영원하다. 그 다음에 십일조이야기해서 그들에게 생활비를 충당해서 오실 선지자와 오실 메시아를 대비해야 된다. 이 말라기가 440년 또는 400년경에 선지자가 끊어집니다.
자, BC440년 그 다음 예수님오십니다. 오시기 전에 선지자가 먼저 오지요. 세례요한이 오지요.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인정했지만. 지금은 오자마자 인정 안했으니까 일단 쳐주고. 이걸 무엇으로 메우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까 힌트를 줬지요. 모든 건 사라져도 마캅의 전쟁이 있고 복잡한 게 있는데 어쨌든 그들이 마캅의 전쟁해가지고 독립운동해가지고 우리는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자, 할 때 무엇으로 했느냐 하면, 말씀으로 했잖아요. 말씀으로 했다면 말씀의 어느 대목을 붙잡느냐 하는 겁니다.
에스겔과 그리고 열왕기하에 보면 다윗이 예언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장차 하늘에서 메시아가 오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다니엘 같은 경우는 구름타고 오게 되어 있고 에스겔 같은 경우는 물이 나오는 성전 나온다는 거예요. 장차. 이걸 조합해봤어요. 조합해보니까 에스겔 37장 같은 경우에 보면 그 때 다윗이 다시 오리라, 목자가 오리니 여호와 자체가 그 분 자체가 목자 되어 오리라,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새 언약을 이룰 것이라, 그 때는 말씀이 너희 마음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안에 온다. 마음 안에 직접 하나님의 신이 심어져서 말씀 안에 있다. 그 때 안식일의 영원함과 성전 두 가지의 영원성을 에스겔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다윗은 온다. 에스겔37장 24절에 보면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나옵니다. 그러면 다윗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볼까요?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건데. 다윗의 후손이다, 하고 나오면 어떻게 할 건데? 뭔가 기준이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기준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안식일 지키는 것과 성전 지키는 거예요. 에스겔에서.
요한복음5장에서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혼났지요. 예수님이 일부러 시켰다고요. “담요(자리) 들고 가세요.” 이리 해가지고 그걸 온 천지에 다 보란듯이 달려갔잖아요. 그럴 때 지켜보던 유대인들이 한 마디씩 욕을 했잖아요. 안식일 날 노동했다고. 그 정도로 유대인은 무엇을 주장했습니까? 안식일을 일체 양보 못하는 거예요. 안식일을.
마태복음12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갈 때 밀을 손으로 비볐다고 안식일 위반한 걸로 봤잖아요. 하여튼 그 때 이미 CCTV가 온 군데에 있었던 모양이라, 안식일을 지키든지, 그래서 그들이 만든 법의 대부분은 뭐냐 하면 안식일과 관련되어 있어요.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 열성분자들 한 12% 그 사람들은 군대도 안가요. 세금도 안내고 다른 사람들이 싫어해요. 시장가가지고 안식일 되면 토요일 저녁 되면 벌써 종 울리고 난리 납니다. 거기 문 닫으세요. 문 닫으세요. 테마여행에 보면 나와요. 문 닫으세요. 코시라 해가지고 돼지고기 안 들어가는 그런 음식을 따로 해가지고 해요. 한국에도 비치되어 있어요. 코시라고 해서. 율법대로 제대로 된 가공된 음식을 파는 미국 슈퍼에 깔려 있어요. 미국 안 가봤지만. 뉴스에 보면 나오잖아요.
안식일과 그리고 성전, 그러니까 헤롯이 유대인들에게 호응 받았던 이유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유대인들이 뭘 원하는지 알기 때문에. 성전을 지어준 거예요. 성전을 지어준다고 하니까 입을 싹 다물었어요. 왜냐 하면, 이들은 아랍사람들, 이방인이지만 성전을 지은 거 보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착 착 시나리오대로 잘되고 있다고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이는 그 증거이외에는 아예 믿지를 않아요. 그 증거이외에는.
헬라인들은 뭘 믿어요? 인간의 고매한 지혜와 지식을 믿지요. 유대인들은 뭘 믿어요? 그 나라 자체가 기적이에요. 왜, 홍해를 건너왔기 때문에, 만나를 먹었기 때문에, 모세를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독대한 사람이 조상이 십계명이 있기 때문에,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기적이에요.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신을 찾아가는 그 인간의 이성, 아까 칸트 이야기한 지혜를 찾는다고요. 그럼 인간치고 기적과 지혜 빼놓고는 인간 없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 없다니까. 예수 믿고 싶어서 믿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차 빼고 포 빼고 무슨 장기를 둡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나왔는데. 구원 받는 사람, 신앙 있는 사람, 찾아본다는 것은 바닷가에서 진짜 다이아몬드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신학도 아니다. 방언도 아니다. 병 고침도 아니다. 그럼 하나님 믿는 행세를 할 수 있는 증거를 대봐라. 뭐 있어야 내놓지. 신학도 아니고, 성경공부도 아니고.
그런데 유대인들은 느헤미야의 법칙을 다 따랐거든요. 유치원 때부터 시편 달달 외우게 했어요. 왜? 느헤미야 방식만이 지금 솔로몬보다 못한 성전을 유지하는 이상은 말씀의 연속성,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서기관들은 말씀을 정확히 주석붙이는 것이고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말씀의 생활화에요. 이 말씀이 어떻게 녹녹하게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상 속에 어떻게 빨아들일 수 있도록 완전히 전체가 스폰지처럼 녹녹하게 다 들어갈 수 있는 방식을 그들은 법제화해서 규칙을 집어넣은 거예요.
안식일과 성전이 있어야 나중에 결국 감람산에 스가랴에 보면 감람산에 누가 옵니까? 메시아가 오게 돼 있거든요. 결국 성전이 있어야 성전에 와야 돼요. 성전이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니까. 거기에 메시아가 오게 돼 있어요. 예수님이 성전에 간 적이 있어요? 없어요? 갔잖아요. 성전에 3번씩 올라갔고 성전에 분명히 갔다 말이죠. 갔는데 사람들은 못 알아보는 거예요. 왜? 다윗의 자손에 대해서 그들은 성경을 볼 때, 뭐로 봤습니까? 문자적 해석을 한 거예요. 다윗의 자손.
그런데 문자적 해석을 했다고 제가 말했지만, 사람치고 문자적 해석 안한 사람 누가 있어요?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사상은 개혁주의 사상입니다. 개혁주의 사상이 뭐냐, 딱 2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뽑는데 두 가지를 뽑는데 한 가지는 문법적 해석이고 또 하나는 역사적 해석입니다. 딱 둘로서 다 뽑아내요. 이거 바리새인들이 했던 거예요. 문법적 해석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문맥을 보는 거예요. 프로젝트. 문맥은 단어에 매이지 말고 문맥을 보자. 문맥에 매이지 말고 그 전체를 보자. 그 전체를 보지 말고 그 더 전체를 보자. 전체에서 무슨 의미이냐 문법적 해석이에요.
역사적 해석이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했던 거예요. 뭐냐 하면, 과거에 했던 해석가운데서 옳은 것은 뽑아내고 후대에 연구에 의해서 안 맞는 것은 요걸 추출해 내는 거예요. 그럼 그 시대 또 넘깁니다. 그걸 그대로. 그럼 고 시대에 진리겠지요. 시대에 와서 더 연구를 해보니까 또 안 맞는 것, 미진한 것은 뽑아내고 또 엑기스, 남는 것은 진리이죠. 그걸 가져가요. 그 다음 그 시대에 또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갈수록 진리의 엑기스에 가깝겠습니까? 안 가깝겠습니까? 점점 더 진리에 다가가겠지요. 요 뽑아내고 뽑아낸 엑기스만 뽑아낸 것이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했던 신학방법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지금까지 우수하고 성신 받는 성령 받은 우수한 믿음의 사람들이 연구하고 연구한 그것을 토라에 집어넣어요. 다시 말해서 해석법도 계시가 돼요. 탈무드에요. 해석에 대한 해석도 계시가 된다니까요. 왜? 하나님의 신앙으로서 은혜로서의 해석이기 때문에. 그냥 육으로 해석한 게 아니고 은혜로 해석했기 때문에 은혜로 해석한 것도 은혜인 것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예를 들면, 시편은 다윗의 신앙으로 했지요. 그럼 묻겠습니다. 다윗 같은 신앙인이 다윗뿐이겠습니까? 다윗 같은 신앙인이 또 있겠습니까? 있겠지요. 다윗 같은 동질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시를 읊어가지고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있으면 그것도 하나님의 계시에요? 계시 아닙니까? 예수님이 했던 어릴 적 모습이 잘 안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비디오가 있다 합시다. 비디오로 예수님 어릴 때 모습을 찍어놨습니다. 그럼 비디오 찍은 것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계시 아닙니까? 계시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란 말은 틀린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편지는 모두 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다. 가 아니죠. 그럼 사도바울의 편지가 다는 계시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사도의 편지가운데 계시이고 아니고는 추려내는 주동자가 누구였습니까? 성령이 그렇게 했지요. 그렇게 성령이 했다는 것을 누가 근거를 댑니까? 성경이죠. 결국은 이건 뭐냐, 순환논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이쁘다. 누가 이야기하더노? 내가 이야기한다. 이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했거든요. 공격한 이유가 바로 예수님 자체가 갖고 있던 폐쇄된 논리를 공격한 거예요. 너가 메시아인 걸 증명하라, 하니까 말씀대로 증명해 볼게. 증명해봐라. 말씀에 보니까 두 사람이 증명하면 된다고 하더라. 그럼 증명해 봐라. 하나님 아버지가 증명하고 내가 증명한다. 딱 둘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한 수 더 뜹니다. 니가 이거 믿나? 안 믿나? 바리새인들이 니가 미쳤구나! 그러니까 니가 마귀 들렸지. 마귀 들린 사람 또 등장하네. 바리새인들이 질문하다가 졸지에 마귀 돼버렸어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괜히 예수님에게 질문하다가 마귀된 거예요.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 것은 바로 그 당시에 바리새인이 갖고 있던 신앙이었습니다. 멸망당했지만 멸망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반드시 하나님의 구약 말씀은 반드시 그냥 소멸되거나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취가 된다. 잠시잠간 우리가 죄를 지어서 우상숭배해서 지금은 로마한테 억압돼 있지만 반드시 메시아가 오게 되면 그 메시아를 무슨 메시아라 하는가 하면 이걸 ‘정치적 메시아’라 합니다. 정치적 메시아로 다시 오게 되면 지금 누가 누르고 있습니까? 로마가 누르고 있지요. 로마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다윗의 시대로 돌아가서 온 천하를 거룩한 유일한 제사장나라로 만들 그 분이 오는 거예요.
그럼 그 분이 오기 위해서는 우리는 안식일을 준비하고 그 다음에 뭘 지키면 된다? 안식일 준비하고 말씀 지키고 성전을 보전하게 되면 언젠간 메시아는 참, 너희들 안식일 지키느라 고생 많이 했어. 칭찬할 것이고 말씀 잘 지켰다고 칭찬할 것이고, 왜냐 하면 가장 진리에 근접했으니까. 그들은 오직 경건함으로 오직 세속의 모든 걸 끊어버리고 말씀 자체가 뭐라고 하는지를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문법적이고 이성적인 해석법을 총 동원해서 진짜 하나님이라면 뭐라고 이야기할 것인가를 거기에 혼자의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수백년 내려왔던 그 모든 지혜를 다 쏟아 부어서 그들은 요게 엑기스다, 해서 만들은 게 따로 있어요. 탈무드죠.
그걸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너희들은 율법은 안 지키고 너희들이 만든 계명을 가지고 너희들이 지키니까 너희들이 바로 뱀 새끼들이다. 마귀가 딱 그런 짓한다. 이유가 뭐냐, 이유를 대라 하니까 너희들이 나를 내가 율법이고 완성인 것을 안 믿기 때문에. 결국 다 잘라버리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왔잖아. 다윗 자손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못 알아봤다. 그러니까 그동안 너희들이 노력한 모든 경건성과 거룩이 결국은 나를 죽이기 위한 힘을 축적한 마귀에서 힘을 축적해 온 거예요.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가지고 다윗이 했던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킬 그 분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다윗자손이라고 외친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국가 선택론이죠. 유대나라, 유대나라의 유일한 국가다. 이리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했지요?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그게 마태복음10장에 보면 나와요. 마태복음10장 6절에 보면,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했지요. 그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어떻게 발생되는 겁니까? 이스라엘이 있어야 되고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자가 양이죠. 그럼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양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 본인이 되겠고 그 전에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이스라엘 신학 체계에 의해서 쫓겨난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마태복음8장에 보면 백부장 같은 사람입니다. 문둥병환자들, 그런 사람들이겠지요.
그들이 어떤 용어를 쓰던 관계없어요. 그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님 한다고 믿음 좋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이 여인이 믿음 좋은 게 아니에요. 그래서 해석이 어려운 거예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것을 먹지 않습니까, 니 믿음이 크도다. 했잖아요. 그래서 해석이 굉장히 난해한 해석이 돼버린 거예요. 다윗의 자손이여, 뭐라고 궁시렁 궁시렁 하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모든 것의 자체가 이 여인이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주님께서는 믿음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그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시킵니다. 새롭게 발생시켜요.
무엇을 발생시키는가 하면,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말씀대로 필요한 어떤 자재나 그 어떤 재료 같은 것은 이 땅에서는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없고 예수님께서 새롭게 규정하고 새롭게 규명을 해줘야 돼요. 내가 집사님에게 이쁘다 할 때만 이쁜 거예요. 남들이 이쁘다 하는 것은 못난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은 일방적이에요. 모든 게 예수님 맘 대로에요. 율법에도 소용없어요. 내가 법 정리하면 그게 법이에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 그게 법이에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법은 구약의 율법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대목 없어요. 모세는 이혼증서 써주면 이혼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혼증서 써줘도 그것은 이혼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생각이에요. 예수님 본인의 생각이라니까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 빼놓고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사람 자체가 없어요. 전부다 육이에요. 육.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구원받을 자격도 입장도 안돼요. 그들은 생명나무에서 쫓겨나는 것이 마땅한 거예요. 쫓겨날 때 쫓겨난 취지가 살아나야 돼요. 취지가 살아나려면 절대로 그들은 구원받으면 안돼요. 구원받을 사람 같으면 쫓아낸 주님의 취지가 살지를 못한다니까요. 몇 년 살다 고생하고 오너라, 이렇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럴 것 같으면 에덴동산 동편으로 가는 길을 굳이 막을 필요가 없다니까요. 오기만 해봐라! 그런 뜻으로 보낸 거예요. 오기만 해봐라! 어디서 살아서 들어오려고 해! 저주받고 죽어라. 말씀을 말씀되게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말씀을 말씀되게 못 해요. 뭐, 성경을 실천한다. 뭐, 성령받기 전에는 실천 못해도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이제는 온전히 말씀을 지킨다. 로마서8장에 이젠 율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함이라. 이게 전부 다 바리새인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해놓고 정작 세례요한이 한 짓은 회개하라는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물에 수장시켰어요. 회개할 테니까 물에 들어가지 말게 해주세요. 할 수가 있어요. 회개하라 해놓고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물속에 집어넣었잖아요. 그냥 때만 벗겨내는 겁니까? 그냥 강가에서 씻기면 되겠네. 때만 벗겨내면 되겠네. 그동안 지은 죄를 씻어달라고.
수장입니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물에 사람 죽이는 그 방식은 성령세례방식을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그 외는 없어요. 죽은 자는 율법에서 거론하거나 율법을 지킨다거나 이미 죽은 자에게는 율법하고는 끊어졌어요. 죄가 율법을 쏘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율법이 쏘는 것은 사망이란 말이죠. 살아있는 자를 다 죽여 버리는 게 율법이거든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냥 살면 안돼요. 그리스도 안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의인되어야 돼요. 그래야 율법에 속을 게 없어요. 그리스도 밖에 나오면서 이제는 착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 가능성 가지고 오면 안돼요. 그냥 나올 때부터 손도 댈 필요가 없어요. 이제는. 나올 때부터.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부터 이미 그 사람은 이미 완벽한 하나님의 의인이 된 거예요. 완벽한 의인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와서 할 일은 뭐냐, 왜 완벽한 의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그걸 확인해 줄 절차만 남아 있어요.
그 때는 율법들이 마구 증거 해야 돼요. 사도의 권면과 사도의 명령과 이런 게 막 늘 우리에게 부딪혀야 돼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마지막 때 자기만 사랑하고, 이런 게 막 와야 돼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라, 죽은 자여 깨어나라, 이제 니가 용서받은 것은 남을 사랑해 줘라, 수시로 기도하라, 무시로 기도하고 그리고 수시로 복음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여튼 복음을 전하고, 항상 어디서든지 정결하고, 뭐든지 거룩하고, 뭐든지 착하고, 그 이야기가 계속 우리에게 부딪혀야 돼요.
아까 미끄럼틀 이야기했지요. 죽 내려가면서 우리는 그걸 맛 봐야 됩니다. ‘아, 내가 이래서 죄인이구나!’ 항상 거룩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지 못한 죄인이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에 불구하고 사랑 안한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어디서 금화100억을 주웠으니까 좋아서 입이 째져가지고 90%는 이웃에게 쓴다. 나도 그런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갑자기 새로운 상상의 시나리오가 시작되는 거예요. 부자 됐다고 치고 시작되는 상상되는 시나리오 있잖아요. 집이 세 채있다고 치고 시작되고 상상하는 거.
이리 해석하면 제일 쉬워요.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줄줄 흘리고 다녀요. 뭘 흘리느냐, 말씀의 완성을 흘리고 다닙니다. 그 이야기하고 다윗 이야기할 거예요.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 돼요. 어려우니까. 예를 들면, 원래 매직이 없었는데 내가 가는 곳마다 흘려버렸어요. 흘리니까 매직이 떨어져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을 유일하게 실현시키는 분이 발현시키는 분이 예수님 본인 이외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13장할 때 비유했지요.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어떤 비유가 나와도 그건 전혀 인간하고 상관이 없는 예수님 본인 이야기에요.
말씀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재가 뭐냐, 바로 귀신들인 딸을 가진 여자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리고 만남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만남이 있었고 그 여인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정신없이 이야기 한 거예요. 지 딸만 낫기 위해서. 지가 아는 용어를 이야기했겠지. 자손의 자손이여, 왜냐, 그 당시의 신학이니까. 메시아의 별명이 다윗의 자손이고,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니까. “오실 메시아여,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여인은 예수님이 하시는 연극에 조연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관심사는 관객이 주가 돼요. 관객이.
자기한테 역할 맡은 조연급의 여인은 의미 없어요. 그걸 지켜보고 있는 관객이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여인에게 튕겨보는 거예요. “나, 니 같은 더러운 개에게 준 적 없어. 연기하는거야 잉~” 그러나 여인은 그게 연기인 줄 모르죠. 심지어 같이 갔던 제자들도 몰라요. 제자들이 성경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냐 하면, 오순절 날 성령 받고 난 뒤에 다시 자기가 3년 동안 지내온 것을 다시 회고하면서 성령으로 기재한 겁니다.
그 당시에는 그들은 유대국가라는 막강한 힘의 주눅이 들려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예수를 버릴지언정 절대로 출애굽이 안돼요. 이 세상에서 절대로 탈출이 안 됩니다. 어느 인간이 힘을 버려요. 힘을 원하고 있는 입장에서. 자기가 힘을 원하는데 원하는 인간이 힘 있는 곳을 버리고 힘없는 곳으로 간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나중에 여인이 성령 받고 난 뒤에 보면 ‘아, 주께서 나를 철저하게 써먹었구나!’하는 것을 아마 이 대목보고 자기도 놀랐을 거예요. 내가 그냥 한 말이 아니고 주께서 내가 흘린 말을 전부다 믿음이 뭐냐, 장차 올 내가 십자가가 지고 난 뒤에 구성될 그 믿음이 모델케이스의 믿음이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전에 십자가 지기 전부터 이미 작업에 나섰다는 사실을 나중에 추후로 알게 되죠. 그게 요한복음2장에 보면 나옵니다. 2장에 보면 성전이야기 할 때,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할 때 제자들은 무슨 소리인지를 몰랐어요. 나중에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아, 그 성전이 그 성전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구나!’ 알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전인 줄 알았지요.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지요. 그걸 오늘날 사람들이 알아듣느냐 이 말입니다. 못 알아듣죠. 제자들도 뭘 걸쳤기 때문에 알았는데 알았다고 여기는 제자들의 모든 그 요한복음의 말씀도 그 못 알아보는 요한복음을 들여다보면 들여다보는 사람은 다 압니까? 아니지요. 그러니 그 때 모르는 제자들 입장이나 오늘날 인간들의 입장이나 똑같은 입장이에요. 성령이 임해야 돼요. 성령이 임해야 예수님의 몸이 뭔지를 알아요.
예수님의 몸은 공간적인 점유가 아니다. 따라서 예수의 몸이 있는 그것도 성전이 아니지요. 왜냐 하면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뭘 비유합니까? 현재 내 몸이 여기 있다. 어떤 특정지점을 점유하고 있는 그 상태의 몸을 그 신체를 몸이라 하잖아요. 그 몸으로 예수님의 몸을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몸은 성전이다? 아니다? 아닌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교회를 할 때 교회라고 의미를 확장시켜 버려요. 교회의 의미를 확장시켜 보니까 문제 또 생겼어요. 교회는 지상에서 만들 수 있거든요. 우선 교단하나 등록하고 그 다음에 홀을 하나 빌리는 거예요. 교회를 등록해서 홀을 하나 빌리고 간판 하나, 150만 정도의 간판하나 대한예수장로회 하나 붙이고 그래서 모였다가 창립예배하면 그걸 뭐라 합니까? 교회라고 하고 교회 안에 있는 예배라 하고 거기에 모이면 주께서 함께 있고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함께 있다 했으니까 두 세 사람이 있으니까 주께서 함께 자동적으로 오는 줄 알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이름 붙이는가 하면, ‘성령의 공동체’라 이름을 붙인 거예요.
성령의 공동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성령의 공동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어요. 뭘 경유해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해야 성령의 공동체라 하거든요. 왜냐 하면, 성령은 십자가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과정을 반복하게 돼있어요. 만약에 성령이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성령의 공동체 되어 버리면 아까 칸트에서 이야기한 칸트의 이성 속에 뭐가 있다? 영원과 거룩함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어요. 아우라, 이미지 같은 것을 그리워한다고요. 천사도 만들어내는데 이까짓 거 못 만들어 낼까요. 그걸 가지고 ‘초월성’이라 해요. 초월성을 만들어 내는 걸 ‘초자아’라 하는데 초월적인 것은 어떤 모임을 그리워할 수 있거든요.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나는 어떻게 됩니까? 죽지요. 그러면 나의 상상력도 죽지요. 나의 이성도 죄가 되지요. 나의 오성, 직감도 죄가 되지요. 그래서 생긴 교회는 여기서 뭐가 없습니까? 내 것을 따로 챙길 수 있어요? 없어요? 챙길 수가 없지요. 내 것 챙기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거든요. 천국은 죽은 자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가거든요. 그럼 내 것 챙길 수 있는 교회라면 그건 성령의 공동체가 아니지요.
성령의 공동체라 하면 누가 계셔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그런 예수님 계시면 내가 빠져나와도 성령의 공동체 될까요? 안 될까요? 될 수 있지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빠져나오고 다시 말해서 그 쪽 단체가 나보고 이단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때부터 저주가 시작됩니다. 이게 복음도 모르고 나를 욕해. 에이, 저주 받아라. 이 이단단체야! 갑자기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이쪽이 갑자기 이단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천지일보에서 질문한 게 뭐냐 하면, 정통과 알곡과 가라지가 뭡니까? 질문했잖아요. 무엇이 알곡이고 무엇이 가라지입니까? 단독적으로 질문했는데 답변하기를 뭐라고 했는가 하면, 질문자체를 고치세요. 무엇이 알곡이고 무엇이 가라지인지 하지 말고 예수님은 알곡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내고 가라지는 어떻게 만듭니까? 그렇게 질문해야 돼요. 왜냐, 인간은 자기 빼놓고 다 이단이 되기 때문에. 자기 빼놓고 다 이단이에요. 신학자치고 안 그런 신학자가 어디 있어요. 어떤 목사치고 안 그런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날 때부터 이단입니다.” 손들고 나오는 목사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서 결국은 뭡니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나를 증거 하는 다시 칸트 쪽으로 자기 자아의식으로 정신병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라 하는 것은 성령이 그 때마다 십자가를 가지고 발생해야 돼요. 있는 장소가 교회가 아니고 이 모임도 마찬가지에요. 이 모임이 어떤 모임이든 다음 주면 이 몸이 사라 없어져요. 또 없어져야 되고. 주님만 안 없어지면 돼요. 이 몸이 사라져도 괜찮아요. 교회 없어도 괜찮아요. 주님이 엄연히 살아있으면 주님 바라보면서 살면 되지 그게 교회에요.
내 교회 필요 없다니까요. 이 여인은 말려든 겁니다. 결국은. 장차 성령 받은 사람의 믿음은 반드시 뭘 경유해야 된다? I am a dog. 나는 개다. 이걸 고린도전서에서는 나는 흙이다. 15장에서. 이걸 나는 개다. 중간에 가면 개가 또 무엇으로 바뀌었냐 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이걸 레고를 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성령을 주신 믿음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 나가세요.” 하면 가만 있어보자, 내가 와가지고 헌금이 몇 배 불은만큼 내가 올 때 주 50만원 나왔는데 주 100만원 나오니까 50만원 다 달라는 게 아니고 20만원만 목사 챙겨주세요. 나 때문에 처음에 교인이 10명이었는데 50명 됐으니까 40명 나 때문에 왔기 때문에 그 한 사람 양 계산해가지고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쪽 교회에서 나가라 하면 어떻게 나가야 돼요? “주여, 이제 저를 개처럼 취급해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이리 되어야 돼요. 그래서 성경은 뭐냐, 성령을 받으면 범사에 감사하라. ‘아, 개인데 개 아닌 척 했을까’ ‘아, 그냥 흙인데’ 흙인데 반짝 반짝 빛나는 흙, 쫀득 쫀득한 흙, 이쁜 흙으로 행세했을까, 이게 사람이 감사하라 하니까 감사하는 척을 해요. 그러면 어색해서 안 돼. 가만히 있어도 망가지게 하는 가운데 감사가 나올 수 있어야 돼요. 그게 십자가를 경유하게 하시는 성령의 반복적인 반복성입니다. 십자가는 단회성이지만 성령은 반복이거든요.
계속 십자가를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계속해서 돌리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 하면 주께서 십자가만 바라봐라. 성령은 십자가를 바라봐라. 악령은 나를 바라보라. 십자가 믿는 내가 믿음이 얼마나 대단 한가 갑자기 자기가 졸지에 대단한 믿음 자가 되어버렸어요. 십자가를 아니까. 그래서 항상 성령과 악령은 이 세상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고 우리는 완전히 들러리고 바보고 정신병자고 매일 싸우는 것은 성령과 악령의 싸움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 틈바구니에서 싸우는 거예요. 우리는 조연급이에요.
여인으로 하여금 개라고 이야기하고 여인이 하는 말이 “맞습니다. 옳소이다. 내가 개라는 것에도 관심두지 않겠습니다. 떨어지는 것이 어디서 원천이 되어서 떨어지느냐 그것만 쳐다보는데 떨어지는 원천의 자리에 누가 있다? 지금. ”예수님 당신이 계십니다.“ 요걸 그대로 말씀 화 시켜서 그걸 그대로 십자가 지면서 완성해 버려가지고 마태복음15장에다가 집어넣어버렸어요. 성령께서. 요 대목을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으면 성령을 통해서 이 본문을 본 사람들은 요 대목이 아이, 이 대목 알고, 하면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이게 인생의 70을 살던, 80을 살던 그게 매일 새록, 새록 매일같이 살아나는 거예요. 매일같이.
하루를 살면서 실망스럽지 않은 날이 없어요. 내 뜻대로 되는 날이 없고 꼭 난데없이 사고 터지고 뭔가 실적이 미진하고 이거 짜증나고 이제 그만 살래,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 때마다 성령이 이 대목을 대주면 아이고, 뭐 예수님의 생명만 뜨면 그 다음에는 거지가 돼도 좋습니다. 잠시나마 한 2초 내지 3초, 원래 정신의학에서는 이걸 0.3초에서 0.5초라해요. 0.3초 0.5초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행동하고 난 뒤에 두뇌에서 인정한 그 순간, 간격이 0.3초에요. 아이고, 뜨거워라, 알고 피하면 늦으니까 몸부터 먼저 피하고 난 뒤에 뜨거워라가 0.3초 뒤에 온다 이 말입니다. 의학에서 그렇게 밝혀냈어요.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진화됐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께서 먼저 피하게 하시고 다 주의 은혜입니다. 요거 한 3초 가는가 몰라. 마치 3초 지나면 역시 나는 믿음 괜찮은 사람이야. 또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는 현상이 또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계시니까 주님께서 계시니까 요러한 여인의 상태가 매일같이 우리한테 되풀이 되면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 안에 녹아지게 돼있어요. 팥죽 안에 들어있는 새알처럼 우리는 그렇게 폭 잠겨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말씀 잘 지켰다고 자부하고 싶은 우리의 악마적인 본성이 다시 한 번 느껴집니다. 주님 증거 한다고 으스대면서 실은 자신의 잘남을 증거하고 가르쳤던 우리를 앞으로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만 십자가 바라보면서 그래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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