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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해외강의(연대연합)성경[신학]

해외강의(연대연합)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해외강의(연대연합)

관리자(IP:203.♡.42.222)

14-04-03 09:05

201403 연대연합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피]라는 책의 중요한 내용들을 보면서 핵심은 성경 전체 해석을 어떻게 일관되게 해석해야 되는가?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일관되게. 어떤 특정 구절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볼 때 어느 대목을 설교해도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 방법에 대해서 그동안 한국교회나 세계, 개신교 말고 천주교를 포함해서 교회사 말고 신학사라고 합니다.

신학사가 뭐냐 하면, 작년에 제가 대전에서 50시간을 강의했는데, 기독교 들어오고 이후부터 신학이 어떻게 발달했느냐는 정도가 아니고 그 전에 헬라의 탈레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왜 그들을 거론해야 되느냐 하면, 이미 그들이 신에 대해서 언급을 했거든요. 그래서 단출하게 이야기해서 교회의 신학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의 결합이다.

그러면 단출한 것만 외울 게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란 말이죠. 그들도 지식인들은 성경을 알고 있거든요. 사도의 편지도 알고 있고. 구약성경은 옛날부터 신성시해서 알고 있고. 특히 유대교는 교육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백성이라는 것은 구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인간이 만든 헌법이고 이런 것은 뒷전이고 중요한 것은 성경 법이란 말이죠.

그래서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권위는 구약성경입니다. 그걸 통할해서 율법이라 하고 나누면 지혜와 율법 또는 더 보태면 선지서 등 나오지만 어쨌든 전체를 합해서 법, 그리고 전통적으로 법을 해석한 추가된 주석, 신앙 있는 선배들이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연구해서 토를 달아놓고 거기에 대해서 해석을 가미한 그것도 일절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까지 합류해야 된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유대교 신학자들의 특징이 이거 하나거든요. ‘역사성’입니다.

역사는, 인간의 지식은 누적 될수록 진리에 접근한다. 이겁니다. 인간의 지식은 역사 흐르면 흐를수록 진리에 접근하게 돼있다고 그들은 믿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무엇인가는 시간이 흘러가면 인간의 지혜가 더 발달할 것이고 잘못된 것은 소거해버리고 진리에 부합된 엑기스만 모으는 겁니다.

모은 것은 후손들에게 물려줘요. 물려주면 그 다음 차례의 신학자들이 더욱 더, 지식이란 언어지식을 포함해서 어법, 문법, 역사적 상황들을 고려해서 “이것은 우리 선배들이 오해했네. 그것은 이 시대와 안 맞아.” 지금보다 지식이 발달하지 못해서 오해한 부분은 제거하고 충실하게 진리에 가까운 것만 따로 모으고 추가해서 그들은 역사적 해석법을 구축해서 이것을 전승이란 이름으로서 가르쳤습니다.

이 전승에 대해서 시비 거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신학적인 작업을 거치고 난 뒤에 비로소 가타부타 이야기하라. 자기 마음에 안 맞는다고 성경해석 틀렸다고 일방적 주장을 할 수 없고 이 말씀이 옳다는 것은 그저 이 시대에 사는 신학자들의 권위가 아니고 아브라함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권위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감히 아마추어가 프로한데 시비 걸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의 해석법은 일단 역사적 해석법이 구축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뭘 하느냐 하면, 양육, 훈육이고 교육입니다. 전반적인 교육이지요. 잠언서에 보면 어린아이들을 가르쳐야 되니까. 아비는 가정의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부모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계시전달 노선에서 이탈 돼요.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 정도가 아니고 대대로 아버지에게 부여된 가정의 영혼을 책임져야 될 가정의 목회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일년에 세 차례씩 세미나에 가야 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제사장들이 있어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하는 일은 방금 이야기한 역사적 권위가 어떻게 구축 돼왔는가? 그 신학역사를 공부하는 거예요. 지금 신학교에서는 신학역사 공부를 못해요. 왜냐하면 시간도 없고 급조해서 목회자를 양성해야 되기 때문에. 헬라철학부터 시작해서 터툴리안, 천주교 신학까지 섭렵해서, 개신교란 다른 게 아니거든요. 천주교에 반발해서 나왔잖아요. 반발했다면 반발한 정답만 쥐고 있으면 그 정답이 의미가 없어요. 어떻게 해서 반발했는지 그쪽 이야기를 다 들어줘야 돼요.

그리고 1517년 루터만 개신교라고 하는데 그전에 천주교에 대해서 반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의 등장했고 많은 이단들이 있었지만 정치적인 조치에 의해서 한 우산 속에 포용시킨 거예요. 정치적으로 안 되니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신학이 갈라지지 않습니까. 나중에는 서로 다른 삼위일체가 등장하고요.

그런 과정들을 놓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는 개신교라고 한 우산을 썼는데 그 개신교에 대한 반발의 요소가 이미 개신교 이전에 천주교에서 나온 반발의 요소를 반복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단이라고 했다가 정치적으로 자기편이라고 한 그러한 정치적 조치를 개신교가 똑같이 하는 거예요. 안 맞는다고 했는데 갑자가 교세가 커지고 그 교회가 숫자가 많으니까 역시 하나님이 저렇게도 역사하네 하고 수용이 된다고. 순복음교회가 대표적인 경우잖아요. 교인이 수십 만 되니까 무시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의 교회는 진리다. 왜 진리가 한결 같지 않지요. 진리라고 해놓고 왜 양적 부흥에 쉽게 굴복하는지. 진리라고 했으면 끝까지 진리여야 되지, 무엇이 무섭고 무엇이 실용적이고 무엇이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겠어요? 안 되지요.

그래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적 해석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까 이야기한 신학사, 신학에 관한 역사입니다. 여기에다 권위를 부여해요. 제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신학 자체에 권위를 부여했지요. 그럼 물어봅시다. 신학 자체에 권위에 있습니까? 그 신학을 다루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겠습니까? 전자는 분명히 신학 자체에 권위가 있겠지요.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도 만약에 자기가 옳다고 했는데 위반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권위를 박달하든지 존중할 필요가 없겠지요.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너희가 왜 지키지 못하느냐?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단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육신의 할례는 했는데 마음에 할례는 안 했다. 따라서 너희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이스라엘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런데 로마서 2장의 이 문제는 로마서 10장과 외형적으로 충돌해요.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 거냐? 아니면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거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는 문제냐, 아니면 둘 다 해야 되느냐? 아니면 하나를 했으면 하나는 없어도 괜찮으냐는 새로운 문제가 부각이 된단 말이지요.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쉽게 이야기하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성경에서 그 말씀 외에 다른 말씀들은 안 해도 구원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수 이름을 부르면 그것으로는 모자라고 플러스 마음속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의 완성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건 또 문제가 있어요. 육신의 할례 같으면 문신 같이 한 번 해놓으면 지워지지 않아요. 마음은 심리거든요. 심리는 시간의 흐름에 저촉을 받게 돼있어요. 오전 10시에 믿음이 있다고 여기다가 오후 2시에 갑자기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날 때 천사가 와서 마이크 대면서 “당신, 믿습니까?” 물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의 할례를 유지하려면 새벽 3시든, 오전 11시든 언제 들이대도 항상 마음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해야 되느냐는 문제가 발생되겠지요. 누가 와서 약을 올려도 온유하고 약을 안 올려도 온유해야 되는데 마침 주께서 내가 짜증낼 때 재림해버리면 마음을 찍은 엑스레이 시커멓게 될 수도 있는 문제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로마서 10장에서 이야기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주의 이름을 얼마마다 불러야 합니까?

그러면 나중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할머니,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몰라.” “할머니, 사도신경은?” “나 그런 것 다 잊었어.” “할머니, 찬송가?” “나훈아 노래 틀어줘. 찬송가는 질색이야.” 이럴 때 그 사람이 50년 섬겼던 권사라면 구원받겠어요? 이것이 목사님들이니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일반 신도들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정신 있을 때 마일리지 바짝 쌓아야 되겠어요? “정신없을 때는 내가 정신 있을 때 고백 많이 했으니까 그걸로 때웁시다.” 이렇게 거래, 흥정에 나서야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유대교는 아주 명쾌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권위가 역사적이에요. 역사가 진리입니다. 역사가 계시에요. 논리적으로 이렇게 돼요. 그들에게 구약성경이 있잖아요. 백이면 백 해석이 다 달라요. 다 다르니까 권위가 없어서 역사에서 믿음이 정말 좋은 출중한 사람의 깨끗한 이성과 깨끗한 오성, 그리고 욕심 없는 마음으로 깊이 평생을 성경을 연구해서 얻어낸 놀라운 신앙적인 경건하고 고상하고 거룩한 누가 봐도 감동할만한 희생적이고 봉사적인 은사처럼 보이는 해석을 끄집어내요. 거기다 역사적 권위를 부여합니다.

이 문제가 뭐냐? 옛날에 유명했던 랍비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그야말로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하다시피 성경을 해석했던 놀라운 지혜거든요. 문제는 그걸 가르치는 사람, 본인은 금식을 별로 안 했단 말이지요. 금식도 안 한 상태에서 금식한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를 속마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걸 일반인들이 의심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한경직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훌륭했다. 교인들이 너는? 그분들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살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정치적이고 돈 좋아하고 그러느냐. 목사들이 그걸 대비한 멘트들, 여러 버전이 있어요. 교황도 마찬가지고. 나에게 주신 것은 나의 개인적인 권위가 아니고 주께 주신 권위입니다. 이게 천주교 주교와 교황의 멘트에요.

혹시 교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거든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나의 권위는 나의 개인적인 성실도와 신앙도에서 나온 권위가 아니고 주께서 주신 권위입니다. 그걸 성령으로 기름 부은 권위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지도 않은 사찰이 성만찬 만지고 떼고 하면 안 되고, 천주교 같으면 평신도가 복장 갖추고 향 뿌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적어도 인간 속은 더럽지만 깨끗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졌기에 할 수밖에 없는 권위라고 해서 테두리를 쳐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누가 지적질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지 감히 네가 지적질하고 그래. 주의 종은 주께서 다루시고, 너는 섬기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1517년 루터가 외쳤던 만인제사장 이론은 어떻게 됩니까? 그거는 그런 뜻이 아니고. 아마추어가 프로의 깊이도 모르면서 들은풍월로 아는 척해. 루터가 그런 이야기했지만 천주교를 의식한 것이고 그 뒤에 갈빈 대에 들어가면 분명히 만인제사장이라 했고 성령 받은 사람은 모두 성도라고 했지만 교회 내에 딱 계급이 져버리지요. 3대 계급으로 정해버렸어요.

설교하는 권위는 신이 주신 권위인데 함부로 나대지 마라. 성만찬도 마찬가지고. 특히 성만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치리권. 그것이 만약에 구비되지 않으면 교회의 고상한, 거룩한 질서 자체가 무너진다. 그렇게 해서 목사와 장로직이 있는 것은 구약 때부터 내려오는 장로라는 특별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에 의거한 합당한 권위 있는 질서가 된다고 칼빈은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당신이 정말 교회에서 뭔가 일이 있으면 당신도 우리가 받은 교육 받고 특히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아서 하라고 나오지요.

현대에 칸트 이후에 리츨, 신학사에 보면, 개신교가 시작한지 미처 100년도 안 되서 개신교 스콜라 신학이 됩니다. 스콜라 신학이란 학자적인, 이론적인 것으로 개신교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풍토를 말하는 거예요. 마치 천주교가 생기를 잃어버리고 교리가 이론으로 치우친 것처럼 개신교도 안착이 되면서, 개신교가 안착된 것은 국가 권력과 함께 한 거예요. 네덜란드 같은 경우 개신교 국가거든요. 루터가 개신교로 성공한 것은 국가가 영주가 보호해서 그래요. 그전에 루터 이상으로 외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다 실패했어요. 동조자가 없었고 특히 경제적인 후원자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타이밍이 맞아서 성공한 거고.

루터 성공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 칼빈입니다. 프랑스 사람인데 스위스로 도망가서 했고, 스위스는 정치적 독립을 바라면서 종교를 이용한 거예요. 나중에 칼빈 죽고 난 뒤에 스위스는 중립적인, 어정쩡한 위치에 처하지만. 그 당시 교회 역사를 보면 종교는 교회를 이용했고 교회는 종교를 이용한 겁니다. 왜냐하면 유럽의 국가개념은 19세기 들어오면서고. 그 당시에는 영주 개념이 있었어요. 영주 개념은 땅에서 나는 생산물을 다 차지하겠다는 경제적인 욕구가 우선이었던 겁니다.

개신교에서 신앙고백을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유대교 해석법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이라는 큰 역사적 이슈를 전통적으로 유지하려면 여기서 확정된 신앙고백서가 수십 개가 쏟아져 나왔어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백년도 못 되어서 신앙고백서 수정하기 시작해요. 수정하는데 두 가지를 수정했습니다. 하나는 예정론을 수정했고, 또 하나는 성경무오설을 수정했습니다.

왜 수정했을까요? 예정론이 예지론으로 바뀝니다. 여기 감리교 목사님도 계시지만 예정론과 예지론의 차이를 잘 아셔야 돼요. 예정론이 깊겠어요, 예지론이 신학이 깊겠습니까? 상식 밖으로 예지론이 더 깊어요. 예정론은 그 사람이 태어나서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로마서 9장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는 거지요. 에서는 미움 받기로 결정되었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결정된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에서가 천국 가기를 애써도 그것이 다 괜히 헛짓이고 소용없는 짓인 거예요. 자기가 구원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모독과 모욕이 되는 겁니다. 지금 어른이 결정했는데 쫄다구가 변경하려고 해. 어른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니야. 네 운명을 네가 결정해. 이미 결정했는데. 태어나기도 전에. 착해도 안 돼. 네가 착하려고 하는 짓이 나쁜 짓이야. 이게 예정론이에요.

예지론은 그것보다 더 깊이 나갑니다. 이걸 사후적, 또는 소급적이다. 그 사람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미 확정적이에요. 그래서 전도나 선교에 있어서 외부인이 장담을 하면 안 됩니다. 너는 천국 가게 돼있어. 너는 지옥 가게 돼있어. 그렇게 확정지으면 안 돼요. 목회자가 신이 아니니까. 그런데 분명히 천국 간다고 생각했던 알렉산더와 후매네오처럼 사단에 빠졌다고 해서 마지막 때에 배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다고 뒷담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 아셨구나. 감리교의 예지론은 사실은 라이프니치의 예정조화론이라는 겁니다.

신학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그대로 아무 오류 없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채 성경구절만 뽑았는데 세상에 그 안에 철학이 담겨있을 줄이야 그들은 상상도 못했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철학적 존재기 때문에. 어떤 성경구절을 볼 때에 빈 마음에 볼 수 없어요. 가다머가 이야기한 것처럼 선입견, 선이해. 선이해는 역사적 전통,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변에 둘러 쌓여있는 모든 환경이 역사적으로 이미 무엇이 옳다, 그르다고 장착돼있는 것이거든요. 마치 붉은 단팥죽에 떡 알맹이 집어넣은 것처럼.

인간의 생각은 이미 기존에 확립돼있는 의식에다가 담갔다고 빼내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영향 줬던 그것은 자기와 상관없는 남이라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본인이 살아가면서 계속 내놓는 것이 어디서 들은 것이고, 누구의 주장이고 그런 것이 나오는 거예요. 자기는 순수하게 기도 가운데서 신의 응답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도서관에 가서 보니까 수백 년 전에 벌써 누군가 다 이야기한 것이고. 이야기한 정도가 아니고 나보다 더 정리가 잘 돼있고 나는 성경구절 서너 개 뽑았는데 저쪽은 250개나 뽑아서 그걸 확립해놓았을 때 그럼 내가 그 사람에게 신학적으로 종속돼야 되는가 하고 자존심 상하는 기분도 더러운 거예요.

그래서 예지론을 겸허하게 수용하자는 겁니다. 당신은 천국 가기로 예정돼있어. 당신은 지옥 가기로 예정돼있어. 그렇게 하지 말고 관찰해보자. 끝까지 어떻게 가는지 지켜보자. 다만 우리 할 일은 다 하고. 맞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결국 주께서는 다 알고 계시는 이야기를. 그래서 선교도 의미를 살리고, 로마서 9장 의지도 같이 살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리 예정돼버리면 그 다음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께 예정된 사람이라면 미쳤다고 선교해요, 미쳤다고 전도합니까? 입 다물고 있어도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는데 내가 왜 귀찮게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전도해야 돼요. 전도 의지가 팍 꺾이면서 사명감이 성경적으로 발생되지 않지요. 성경 자체가 모순되는 거예요. 예정 돼있다고 해놓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면, 그럼 뭐예요? 하나님은 우리와 동업자인데 하나님 본인만 알고 있고 우리한테 전혀 내막은 알려주지 않을 때에 우리가 전하는 것이 과연 확신 있게 전했다고 내가 확정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사라지잖아요.

신학사에게 두 가지가 있어요. 유대교도 마찬가지지만 개신교도 역사적 해석으로 들어가서 양육과 훈육과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일반 교인들의 영혼 상태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8년)에서 인간은 전적 타락했다고 돼있을 때 그것도 나중에는 손질하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양육과 훈육, 교육이 아무 의미가 없어버려요. 타락했다면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해골이잖아요. 해골한테 주님은 살아계신다고 해봐야 말이 안 먹히잖아요. 그러니까 넓은 범위에서 타락했지만 아직도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어떤 약간의 접촉점은 있어야 선교할 가능성이 성립되는 거예요.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루터의 주장에 의하면, 전적 타락이에요. 인간은 죽은 자에요. 전적 타락했어요. 그러나 루터교는 천주교 다 됐지만 개신교 칼빈의 후예들도 전적 타락은 교리만 이야기할 뿐이에요. 전적 타락은 어디에 써먹느냐 하면, 우리가 겸손해야 은혜가 높아진다는 그러한 취지에만 써먹지 실제 모든 교회 교육에는 전적 타락이란 성립이 될 수 없어요. 타락된 사람이라면 타락된 상태로 놔둬야지 만약에 내가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이 알아먹는다면 전적 타락이 아니잖아요. “이해되네요.” 이러면 전적 타락이 아니라니깐요. 그럼 덜 타락된 것이고 영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척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죽은 척하고 있었는데 말씀을 주니까 그때 정신 번쩍 들어서 이제 깨어났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역사적 해석법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쭉 가는 것은 아니다. 옛날 시대에는 맞는 것이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은 추려내고 이 시대에 그야말로 누가 봐도 믿음이 있다는 사람, 기도에 열심이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의 신앙적인 고백과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여 새로운 해석법으로 추가시키고 거기에 하나님의 계시라고 권위를 입히는 거예요.

그리고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권위가 확장이 되고,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주의 말씀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가르칠 때 배우는 사람한테는 양육과 훈육과 교육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교육학이라는 있잖아요. 교육, 가르침이 성립된다는 거예요. 그럼 가르침 성립이 되려면 전적 타락, 예정론, 성경무오설 이런 것은 옛날에는 루터, 칼빈이 주장했는데 지금 이 시대에는 안 맞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강의 줄거리입니다. 손질을 해야 되는 거예요.

성경무오라는 걸 봅시다. 성경무오라면 설교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제가 만약에 창세기 1장을 한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만 이야기해야 돼요. 40~50분 설교할 때 시간이 남잖아요. 그럼 또 해야 돼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만약에 창조라는 것은 ‘빠라’인데 무에서 유를 말하는 것이고, 창조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만들어진 것에서 변형되는 것과 등등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떤 청년이 원어를 더욱 더 연구하는 거예요. 이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까지 연구하는 거예요. 목사님은 빠라가 그런 뜻이라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다른 뜻이 섞여 있었는데 기독교 신학에서 일방적으로 주목 되는 것은 의미를 남기고 나머지는 배제해서 전통이 됐습니다. 새로운 이론에 의하면 그게 아니었다고 나오면, 무엇에 어긋나요? 성경무오설과 관련 되면서 그렇다면 그 자료가 어디 있느냐?

그 자료가 원래 있던 히브리 성경 원판에 가장 가까운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까운 건 뭐냐, 덜 가까운 건 뭐냐? 이것 알려면 성경은 어떻게 편집 되었으며 어떻게 짜깁기 되었는지 다 나와야 돼요. 그렇게 되면 성경 번역서에 성령이 임하느냐는 문제가 생겨요. 쉬운 성경에 성령이 임할까요? 아니면 전통이 80년 된 개역 성경에 성령이 임할까요?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무오설이 생기면 그 다음에 계시가 뭐냐 하는 거예요. 전통적 칼빈 문서는 성경이 계시였습니다. 더 이상 빼지도, 더하지도 말라.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사도 열두 명이 다 죽은 이유가, 계시가 확정됐다고 사도들이 다 죽었거든요. 사도가 있는 이유는 성경을 확정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고 오직 이게 전부라고 해서 끝내버렸는데 만약에 지금 예수님의 어릴 때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새롭게 발굴 되었을 때 예수님이 어릴 때 갖고 놀던 장난감, 마굿간이라든지, 입었던 옷, 창 자국, 성배, 그런 것들이 발견되었다면 계시에 집어넣을까요, 말까요? 더 우습게 말해서 예수님 7살부터 16살까지 찍은 비디오가 있다면 그 비디오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제가 예전에 총신대 강의하면서 이 질문을 했어요. 많은 학생들이 그것도 계시라고 했어요.

그게 신의 계시라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성경책이 신의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이 신의 계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수들의 일관된 주장이 성경책이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이 계시라는 거예요. 칼 바르트에 의해서. 그런데 신학사에 보면 문제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계시일 때 신의 계시가 예수님만이 계시겠는가? 삼위일체에서 성부와 성령이 있을 때 예수님만 계시가 되면, 성령이 하는 일은 계시이냐, 계시 아니냐가 돼버려요. 성령이 하는 일이 계시가 되면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으면 계시가 돼버려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성령의 계시에 속한 사람은 주 예수를 안 불러도 구원이 되는 거예요. 신의 계시를 받았으니까. 그런 계시가 어디에 있는가? 시편 103편에 보면,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신이 다스리지요. 저 들에 있는 백합, 공중에 있는 새, 달, 별, 이 모든 것이 신의 솜씨지요. 그뿐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만 신의 자녀가 아니고 지금 절에 가는 사람도 신의 자녀가 되지요. 하나님의 신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기 때문에. 이사야도 그 비슷한 대목이 나와요.

그러면 예수를 꼭 믿을 필요가 있어요? 예수교라 하면 안 되고 하나님교라 해야 돼요. 그래서 순복음 교단이름이 하나님의 성회잖아요. 버전을 업그레이드한 거예요. 너희는 아래 단계에 머물러있지, 우리는 위 단계로 성숙돼있다는 겁니다. 성령을 통한 계시는 율법과 예수님이 하는 모든 기적과 관계없이 그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결국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인간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천주교는 불교와 악수하게 돼있지요.

옛날 천주교 신학이 다른 종교를 용납했습니까? 한국에 천주교 처음 들어왔을 때 제사 인정했습니까? 처음에 한국에서 순교자들이 제사 반대하다가 순교했다고요. 지금의 천주교는 어떻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괜찮아요. 갑자기 역사적 해석법이 왜 달라졌어요? 그것은 오직 하나 선교 때문에. 그걸 신학의 토착화, 삶의 정황 속에 신은 계신다. 그 신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신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자. 비록 예수를 모르고 교회를 안 다니더라도 하나님이 만든 자녀라면 그 속에 하나님의 품성이 이미 들어있다. 이게 바로 양육과 교육을 성사시키는 새로운 이론으로 첨가가 되는 겁니다. 신앙고백서를 반드시 손질하게 돼있어요.

그러면 선교를 왜 하느냐? 항상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거든요. 교회의 확장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권위자고 나 홀로 있을 수 없고 나와 더불어 많은 성도들이 발생하고, 그걸 성령 공동체라 하지요. 성령 공동체가 발생될 때 과연 나는 주의 종 맞는다고 확인이 되지요. 교인들도 자기 교회에 헌금을 했는데 옆에 교회는 쪼그라들었는데 내가 헌금하고 헌신하고 새벽제단 쌓은 교회가 커질 때 그 안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의 신앙감이라는 것은 점점 더 확신에 확신을 더할 수 있는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버리지 않았어.”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지요. 거기에 나온 신앙의 반열에 속한 사람들이 특징이 뭐냐 하면, 모범 답안이 없어요. 자기 주변에.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주변에서 만들면 따라하겠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누굴 흉내 내거나 모방할 수 있는 어떤 에프엠이 전혀 없었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한테 일부러 어긋맞게 축복하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양쪽으로 축복할 때 어떤 전통이 없었던 거예요.

이걸 사건이라 합니다. 이건 새로운 거예요. 오년 전에 느꼈던 감동과 달리 지금의 감동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남들이 다 따르는 자체가 이상하게 넓은 길처럼 느껴지고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될 같은 느낌이 들고. 프로스트의 시처럼 숲 속의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남이 가지 않은 길로 갔다. 요새는 남의 가지 않은 길로 가면 분명히 되돌아와야 돼요. 길도 없고 해서.

신앙인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똘아이에요. 사람이 정상이냐 할 때는 보편적인 상식으로 정상이냐, 아니냐 하거든요. 그게 권력의 힘이라 하는 거예요. 다수의 힘이 진리가 되는. 그런데 신앙인들의 특징은 다수가 아니고 낯설어, 이상해. 혼자다. 분명히 사람들은 안 알아줍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처럼. 분명히 무화과나무에서 혼자 있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나다나엘에게 “너 무화과나무에서 기도하던데?” “어떻게 알았지요?” 어떻게 알기는 기도를 받으니까 알았지. 나다나엘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네 속에 간사한 게 없구나. 네가 참 이스라엘이다.”

그 규정은 주님 보시기에 일방적으로 규정했지만 제삼자가 보기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어요. 남 따라 하지 않는다는 것. 일부러 특이하게 수염 기르고 도사처럼 하는 그것도 유행이지만 그게 아니고 전혀 자기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주님만 생각하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 자기 공로나 자기 행함을 찾을 수 없는 상태로 주님께서 집어넣었을 때 본인 자체가 당황스럽기 짝이 없고 사람에게 위기를 줘도 피할 길을 주든지 하지 이렇게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가 있습니까.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런 고백을 사건 만들어준 당사자, 주님에게 말할 수 있는 상황. 그런 상황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났어요.

사람이 홍해를 건너고 또 홍해가 나타나면 옛날에 역사적 해석법에 의해서 홍해 건널 때는 지팡이만 있으면 되더라. 이미 입력이 돼있어요. 그런데 요단강에서는 지팡이 있는 사람을 일부러 없애버렸잖아요. 이제는 모세 없이 가봐라. 모세 대신할 사람이 없어요. 여호수아는 자기 계시 받은 적이 없어요. 여호수아가 고백한 것이 있어요. 내가 한 것은 내가 받은 계시가 아니고 모세가 받은 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했어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장관이었어요. 꿇어! 이제부터 전쟁은 나의 전쟁이다. 그 전쟁을 신학적으로 붙여주는 전쟁, 여호와의 전쟁이라 하는데 말이 그렇지요. 완전히 도박과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이미 알고 있어요. 전설로. 이미 해본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방이 되고, 그것은 양육이고 교육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끄 엘룰 같은 사람은 천주교는 시작하자마자 망했다는 거예요. 시작하자마자 권력의 맛을 봤다는 거예요. 교회가 권력의 맛을 보면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사건화 돼야 되는데 사건이 아니라 존재가 돼버렸어요. 주께서 어떻게 뒤집어놓는가는 사절이고 있는 교회 우리끼리 친목을 도모하세. 어떤 결속을 다지세. 이런 쪽으로 나선 거예요. 거기에 필요한 것이 교육이었고, 교육에는 역사적 해석법이 먼저 있어야 되고 그것에 권위를 줘야 되고 가르치는 사람에게 권위를 주고 권위에 복종해야 되고 교회 질서가 있어야 되고 교인들은 섬겨야 되고 밑에 사람은 무조건 그것을 믿으라고 단속해놓고 권위자가 판단해야 되고 판단자는 하나여야 되고. 교회에 태양이 둘이면 안 되거든요. 한 사람이 판단해서 너는 이단이야, 너는 삼단이야 하고.

이런 식으로 할 때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인간이 전적 타락하면 안 된다.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형상은 잠재된 상태지 죽은 상태는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에 신의 계시가 오게 되면 깨어나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잘 가르치면 되겠지요. 잘 가르치면 구원받는다. 잘 가르친다는 말은 설득력이라 하는 겁니다.

설득력은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위반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성령의 나타남이라 할 때 앞의 말, 내 말과 내 전도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이 자리에 다른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성령의 나타남은 어떤 어르신네거든요. 내가 생명을 대신할 자가 아니란 말이죠. 나 따로 있고 성령 따로 나타나고 나는 성령 앞에서 쪼다가 되고 나는 무익한 종이 되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죄인 중의 괴수고. 여러분은 안 보입니까? 저 말고 다른 분 안 보이냐고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열두 제자를 보내면서 하는 말이에요. 앞으로 너희에게 성령을 줄 테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20절) 얼마나 위험한 발언입니까? 누구나 차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발언일 수도 있고 위험한 만큼이나 그게 진리잖아요. 악령 받은 사람도 그런 소리 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말씀이니까 함부로 하지 말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말씀의 취지는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거든요. 네가 얼마나 못 났으면 못난 너를 성령께서 사용하겠느냐? 성령께서 사용했기 때문에 덩달아 권위자라고 주장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요한일서 2장 27절, 28절에 나와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친히 모든 사람에게 직접 가르칠 것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에베소서나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치는 은사 받은 것과 대충돌이 일어나요. 분명히 은사 중에서 가르치는 은사가 있단 말이지요.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는 말은 배우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에 대들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쪽이거든요. 성령의 은사에서. 제 말 맞잖아요. 다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요한일서 2장 27,28절은 왜 나오느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네 안에서 성령이 친히 가르친다는 거예요.

이 충돌에 대해서 기존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것은 초대교회 때 신학이 이미 세분화되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 계통 따로 있고, 베드로 계통 따로 있고. 초대교회가 세파로 나눠졌다는 겁니다. 각각 다른 소리한다는 겁니다. 요한파 따로 있다는 거예요. 현대신학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보수 말고 통합측, 감리교에서.

그렇게 되면 뭐가 깨져요? 사도바울 말이 다 계시가 아니구나. 사견, 개인적인 의견이구나.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 올 때 여자들이 구태여 머리에 수건 쓸 필요가 없고 여자라고 남자한테 복종할 필요 없구나. 그것은 그 당시 사회적 문화구나. 그렇다면 그 당시 문화를 하나의 계시로 사용했다면 오늘날 뭘 사용하든지 뭐가 나쁘냐? 까짓 것 우리 교회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면 된다는 아이디어가 여기저기서 올라올 때 그것을 되고, 안 되고를 누가 결정합니까?

그것은 10분 쉬고.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처음 시간에는 역사적 해석법이라는 것은 인간인 이상은 절대로 거기서 못 벗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괜찮아서 훌륭해서 이러면 반드시 후배에게 전달하기 마련이고 양육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선배 목사님이 이것으로 은혜 받았다는데 누가 토를 달아. 우리는 그것을 본 받아서 그분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식은 되지만 권위에 감히 도전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시대에 사람들도 또 구원해야 되니까 이 시대 형편에 맞도록 각색한다든지 내용은 달라지지 않지만 모양새는 더 맛있게 한다든지 이런 것은 유동성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처음에는 보통 그렇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다 바뀌지요.

아까 제가 바뀐 예를 들었지요. 성경무오설 지금 없고. 미국 개신교 신앙고백서에 예정론 다 수정돼있고 성경무오설 수정 다 돼있어요. 그러면 신앙고백서라는 게 왜 있느냐? 제가 지금 역사적 해석법의 문제점을 계속 하는 거예요. 천주교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일반 교인들이 와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 눈에 보이는 교회 질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질서를 세운 거예요. 그걸 실체론적 교회론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실체가 있는 거예요.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국가 경영, 국가 행정에서 실체론적 국가론에서 나온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국가라 하면, 국가가 어디 있어요? 국가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대학 캠퍼스. 대학이 있다. 대학이 어디 있는데? 대학 가보면 대학이 없어요. 교수 있고, 교직원 있고, 학생 있고, 캠퍼스 있지만 대학은 없잖아요. 그걸 보편논리라 하는데. 세퍼트 있고, 발발이 있지만 개는 없어요. 그런 것들을 모아서 추상적 개념 하나를 따로 만들면 개가 되는 거예요. 철학에 보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데 사람은 없어요. 그런 것들 모아서 추후적으로 말해서 사람이라고 하자 이런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가면 예배당 건물 있고, 사람 있지 교회는 없는 거예요.

국가가 만약에 실체로 없으면 사람들은 국가를 편리하게 이용하지만 예를 들어 도둑 들면 잡아달라고 하지만 세금 내라고 하면 도망쳐서 미국으로 이민 갈 수 있어요. 사람은 자기 보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용할 만한 것은 다 이용해 처먹는 거예요. 국가가 됐든 뭐가 됐든. 그러면 전쟁할 때 누가 지키는데? 희생? 없잖아요. 미쳤다고 희생해요.

그래서 실체론적 국가라 할 때 중요한 것은 여기서 법을 만드는 겁니다. 그냥 법을 만들면 아무 소용없어요. 반드시 상벌제로 만들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누가 상을 주고, 누가 벌을 주느냐가 문제가 등장하거든요. 지금 국가가 실체적 국가가 되기 위해서 법을 만든다고 했지요. 천주교에서 교회를 만들 때 법이 있는 거예요.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그 당시에는 귀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헌법상 국민,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천주교에서는 법을 하나님에게로 돌렸습니다. 그 밑에 예수 있고, 그 밑에 바로 교황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과 교황의 이 꼬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동방교회 또는 개신교가 돼버려요. 그리스정교회는 이걸 인정하지 않아요. 마테란 공의회에서 성경무오설이 아니고 교황무오설을 주장했습니다. 지금 천주교 이야기가 아니고 개신교 이야기하는 겁니다.

개신교에서 당회장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로 와버렸을 경우에 이것은 당회장 목사 자기가 교주하고 싶어서 환장해서 한 게 아니고 실체론적 교회로 바뀌기 위한 법의 최종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싫더라도 하나님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이 돼야 돼요. 그러면 각자가 교주가 너무 많잖아요. 그걸 방지하는 대책이 교단을 만들었어요. 교회는 당회를 만들어서 의회 제도를 채택한 겁니다. 목사출신의 회원과 장로출신의 회원으로 저울의 균형을 맞추어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두 개의 수레로 서로 견제하는 방식으로 실체적인 교회를 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개신교에서 유형교회라고 해요. 히브리서 12장 23절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총회를 무형교회라 합니다. 무형교회는 구원받은 성도의 집합이에요.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게 144,000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항상 문제 있어요. 유형교회를 안 거치고 무형교회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루터는 안 그랬는데 칼빈은 유형교회를 거치지 아니하면 무형교회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어요.

거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뭐냐? 치리입니다. 치리는 징벌을 가하는 거예요. 지금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핵심은 역사적 해석법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거예요. 천주교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개신교가 닮아가고 있으니까. 실체적 교회에서 치리를 누가 하느냐 할 때 처음에는 목사만 한다고 했어요. 시간이 역사적으로 흐르면서 반발이 생기니까 목사와 장로가 한다고 했습니다. 투표를 하게 되면 숫자가 많으니까 장로 쪽의 의견이 채택이 될 가능성이 많지요. 그래서 당회를 열 되 당회장이 거부권을 갖는 방식을 채용하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아닙니까. 일반 동호회 회의할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아무리 장로들이 뭘 해도 당회장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안 되는 거예요. 도대체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뭐냐 하면, 법을 살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법이 성경에 근거하느냐 하는 문제를 따져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개신교에서는 성경책이 하나님의 계시에요. 물론 지금 신학은 성경책이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이 계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흔적이나 유품이 있으면 그것도 계시에 포함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발언 같은 것,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편지가 발견되면 예를 들면 도마복음 같은 게 나오면 그것도 계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을 때 교인들에게 혼란만 가중하고 교인들이 빠져나갈 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교인 숫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 힘이 중요하니까. 보수적인 의견을 채택하고 자기 의사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정략적, 정치적 조치를 융통성 있게 해야 돼요. 그걸 목회라는 이름으로 하지요.

문제는 이겁니다. 치리할 때 성경에서 누가 치리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9장 같은 경우에, 누가 교회에서 범죄 하거든 두세 증인으로 하라고 하잖아요. 두세 증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에서 아니라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써먹을 수가 없어요.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자기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서 돈으로 새신자 만들어서 표를 늘일 경우에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교회끼리 축구 시합하는데 축구 잘하는 절에서 데려와서 승리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이것이 역사적 해석법에 다 나와요. 치리에 참여하는 교인은 적어도 일년 동안 교회에 나온 세례교인에 한한다고 돼요. 그 법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출석교인 2/3 이상의 찬성으로 장립집사가 된다는 법이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어디에 나와요? 안 나오거든요. 안 나오는 이야기가 왜 삽입되었는가? 중간에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이게 가장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라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헬라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민주주의는 진리가 아니에요. 천국은 민주주의 제도가 살아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나오니까 하는 말이, 이 세상은 다 한계가 있는 세상이니까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필요하다고 보자. 그래서 필요-악이라고 해요. 이것은 옳은 것은 아닌데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쩔 수 없는 것, 진리는 아니지만 이것을 대대로 해보니까 그나마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여겨서 계속 실체적 교회를 위해서 법들이 추가되고 추가된 겁니다. 10%로 하면 개나 소나 다 되니까 2/3로 하자. 어떤 교회는 그걸 반대해서 100% 찬성이 아니면 안 되게 돼있어요. 100% 찬성은 진리가 아니고 신라시대 때 화백제도에요.

하여튼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미 옛날에 다 나왔던 제도입니다. 전도서 말씀대로 해 아래 새로운 게 없다고 전부 다 나왔던 제도에요. 그러면 강사의 뜻은 뭡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필요악도 소용없다면 뭐냐?

하나님의 계시, 성경말씀은 바로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를 더 죄 짓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자기 의에 복종하는 것으로 끝난 줄 알았지요. 자기 의에 충실하게 마일리지 쌓이듯이 날마다 성화되고 착해서 점점 착해지면 그걸로 됐다 싶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차버린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리로써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말씀대로 착하게 사는 게 뭐가 나쁘냐?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상식적이고 보편화된 세계에서 누가 그걸 지적하겠느냐 말이죠. 안 착해서 문제지 착한 게 뭐가 문제 되고 오히려 장려될 문제지.

거룩하라, 거룩하라.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거룩한즉 너희도 거룩하라고 분명히 문장으로 나와 있단 말이죠. 에베소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새 형상을 입으라. 이제는 어둠에 속한 자가 아니고 빛에 속한 자다. 에베소서 5장 1절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라는 명령이지요. 명령한다는 것은 우리 속에 명령을 하달 받았을 때 그걸 즉각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명령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미 인간에 말씀이 들어왔을 때 성령 받기 전에는 법을 못 지켰지만 성령 받은 뒤에는 온 율법을 지킬 수 있고 이제는 성령의 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진짜로 제대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사도바울이 권면과 지시와 명령을 내렸다는 거예요. 근데 이상스럽게 왜 그 말을 거론하면 거론할수록 점점 더 십자가가 퇴색되고 십자가가 점점 멀어져가지요. 마치 기차를 타고 가면 서울, 대전, 대구 갈 때 지나가는 간이역들은 멀어지잖아요.

역사적 해석법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 있어요. 역사적 해석법에서 나온 결과들, 성과만 갖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유대인들의 역사적 해석법은 그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네 속에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흐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담아버리면 예수님의 일이 인간의 시간의식 속에 깔립니다.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다음에 승천하신다는 과거-현재-미래로 겸해서 같이 포개지게 돼요.

그러면 현재 십자가는 이미 과거가 돼버리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이 문제가 돼버려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자기는 몰랐었어요. 십오 년 전이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했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사는 거예요.

보세요.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예수님과 내가 십자가 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십자가 진 사람은 양쪽에 있었던 강도 둘뿐이었습니다. 분명히 삼종 세트에요. 그런데 만약에 사도바울이라는 이름 숨기고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아저씨,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고향이 어디십니까? 혹시 예루살렘에서 달렸던 그 강도?” 이렇게 묻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게 상징이다, 유비다 하는 것은 나중에 핑계 삼아 하는 이야기하고 그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과장법으로 쓴 게 아니고 진짜 실체로 이야기한다면 진짜 십자가 옆에 사도바울이 꼬마가 되서 있던가 해야 돼요.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이 사는 거예요. 그리고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가 어디 있는데? 이미 십자가는 과거 사건이에요. 대전에서 대구 가려면 이미 작은 역은 스쳐지나갔다니까요. 그것은 뒤돌아 볼 필요 없어요. 십자가는 과거 이야기니까. 지금은 부활의 새 생명 시대에 놓여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과 같이 승천할 그것만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기억 속에 집어넣으면 돼요. 이제는 내가 할 것은 새 생명 따라서 성령 따라서 살면 되고.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재림만 기다리면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성령 받았는데 예수님 재림할 때 깜빡 졸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 받은 사람은 온다고 힌트를 주는가요? 문제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기름 준비한 여인들과 열 명 중 아무도 깬 사람이 없었어요. 다 주무셨어요. 그런데 에베소서에 그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깨어있으라. 새벽 2:30에 도적 같이 와버리면 깨어있으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도둑놈이 미리 알려주고 오면 도둑이 아니에요. 친구지. 도적 같이 오려면 몰래 와야 되거든요. 그러면 몰래 왔을 때 몇 초 후에 깨어있을 때를 깨어있는 범주에 넣어줄 것이라는 문제가 발생돼요.

일단 도적 같이 오는 것이 성립해야 되고, 깨어있는 조건이 다 만족하려면 일단 도둑이 왔다고 할 때 깨어주지 아니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하고 그 타이밍에 맞춰야 된다 이 말이죠. 그 힌트가 요한계시록이든 어느 구석에 박혀있어야 되는데 그 구석에 박힌 것을 캐내어주는 것이 천지, 천지, 신천지란 말이지요. 왜 사람들이 신천지에 빠지는데요? 가려운 곳을 긁어주니까 빠지는 거예요.

일반교인들은 신앙은 관심 없어요. 주님은 재림하신다는 데 깨어있으라는 데 어떤 정보를 미리 입수하면 무사히 144,000에 들어가서 천국에 가느냐? 지금 요점은 그거에요. 예정론이고 다 치우고 내가 구원받고 우리 가정이 구원받아야 되니까. 어떻게 준비하면 지금 오시더라도 구원이 됩니까? 그걸 제시하라니까 이 설교자들아. 다른 소리하지 말고 그걸 내밀라니까. 그러면 기존 교회 목사들은 너무 들어가지 말고 상투적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이 가르치는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이단에 속하는 것이고, 보태지고 빼지도 말고. 마지막 때에 이단이 등장할 때는 이단이 보좌에 앉아서 적그리스도고.

지금 그것은 다 아는 이야기고 그것 말고 우리 교단이 이단인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제시해주면 신천지고 구천지고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고객만족을 해줘야 장사가 될 게 아니에요. 고객이 뭘 듣기를 원하는데? 그걸 왜 간파를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말이죠.

몇 초 뒤에 오고 그 타이밍 어떻게 합니까? 바로 신천지는 통일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통일교는 흔히 말하는 알레고리라고 하는 거예요. 유비설교를 하는데 알레고리가 가관입니다. 알레고리는 1920년대 평양의 이용도 부흥사가 원조였고 그 설교를 모든 한국교회 부흥사들이 베꼈고. 거기에 나오는 알레고리 설교를 하니까 이게 신학적으로 옳다, 그르다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효과 본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더란 말이죠.

성경도 모르고 신학도 모르고 성경도 읽을 시간도 없는 일반교인들에게 그야말로 맨날 보리밥 먹다가 맛있는 뷔페 요리로 다양하게 해서 “여러분, 원하는 게 뭡니까?” “구원입니다.” “어떤 구원입니까?” “승천할 때 내 가족들, 내 자식들 앉혀서 이 땅에서 못 다 누린 호사를 천국에서 누리기를 원합니다.” “일 단계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것 챙기고 헌금내고 자기 볼 일 보고 다음주에 또 오고하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실제에요. 조작한 게 아닙니다. 우리 동네에 있어요.

어떤 사람이 제가 따지니까 그 사람이 화가 나서 저한테 하는 이야기가, “성경의 중심이 뭡니까?” “성경의 중심은 로마서 11장에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가는 겁니다.” “목사님, 성경의 중심은 구원받는 겁니다.” 일반 평교인이에요. 신천지를 접했습니다. 신천지는 처음이고 끝이고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바로 구원론입니다. 구원론을 채워주면 목회 되고 구원론만 벗어나면, 신론이 어떻고, 예수님이고 뭐고 구원론만 제공하면 교인들은 대만족하고 은혜 많이 받았다고 돌아갑니다.

이 작업을 침례교에 있던 구원파도 시도했고 신천지도 같은 계통으로 온 겁니다. 따라서 신천지나 구원파나 이런 데로 가지 않게 하려면 그 사람들이 원하는 더 간편한 구원론을 제공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그 교회나 신천지나 전부 구원론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론에 빠져있으면, 이것은 창세기 3장 21절이지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문을 활짝 열어놨습니까? 너희들 나중에 정신 차리거든 오라고 했습니까? 생명나무 가는 길을 동쪽을 막았지요.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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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