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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지도 140221강의에스겔

지도 140221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관리자(IP:203.♡.42.222)

14-02-22 14:17

서경수(IP:118.♡.138.213)

14-04-03 09:26

광주 강의(2014. 2. 21) 51-1

에스겔 48장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다 받으셨지요? 에스겔 마지막장을 보면 이스라엘 지파의 지도가 나오는데, 여러분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면 잘 지켜서 복을 받고 구원을 받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에스겔 48장은 이스라엘 12지파의 경계(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 제사장들을 위한 성소와 레위인들의 땅에 대해 이야기했고, 다시 지도를 한 번 더 거론하고, 마지막으로 성전에 12지파가 배치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언젠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세상이 고정되어 있다”고.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도 주님은 그 모든 것을 고정된 것으로 보십니다.

막걸리를 만들 때 술독을 보면 누룩이 발효되어 기포가 올라오지요. 이 기포 하나하나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라고 봅시다. 기포가 올라와도 술 단지는 여전합니다. 기포 하나하나를 보면 부글부글 끓어서(사업이 망하고, 질병에 걸리고, 차 사고가 나고) 난리가 나는데 술독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은 구더기 같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지 그것은 하나의 안개로 취급해 버리고 전체는 고정된 구조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선한 일을 했습니다. 오늘은 죄를 지었어요.” 이렇게 살까요, 아니면 어떤 구조를 알아야 할까요? 구조를 알면 됩니다. 왜냐? 우리는 구조 안에서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내가 행동을 이렇게 했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 혹은 저주를 받는다.’는 여기에 휩쓸리면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넓게 보지 못한 것이고 에스겔 48장을 이해 못한 것입니다.

전체 구조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 고정된 것을 본문은 지도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이 지도는 우리가 변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경계를 우리가 원한다고 변경할 수가 없어요. 에스겔 48장에 하나님이 그려놓은 지도가 에스겔의 결론입니다. 에스겔의 결론인 동시에 인류 역사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작 노렸던 것, ‘내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 이런 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지난 대전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스랍에 칸막이가 있는데, 거기에 빨랫감들을 분류해서 넣지요. 이처럼 이 지도에 보면 칸막이가 되어 있어요. 12개의 칸으로 나눠져 있는데 각 칸막이에 넣을 것들을 나눠서 넣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 들어갈 자라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지정된 칸에 들어갑니다. 그 지정된 경계(칸)는 바뀌지도 않고, 다른 칸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지정된 칸에만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고정된 칸을 하나님은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이 칸 안에서 모든 인간들은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틀을 인간이 변경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서랍이 우리를 담아내지 우리에게 수정하고 변경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시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시할 필요도 없이 완벽한 구조라면 그 구조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지시하면서 드러나요. 지시한 적이 없는데, 지시하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뭔가 하면 “네가 지시 받았다고 생각하는 너의 태도와 반응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지시는 너에게 지키라고 주신 지시가 아니고 모든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받은 대로 완료했다.”라는 것입니다.

지시를 받을 때 우리는 나에게 하는 지시라고 여겼는데, 나중에 신약에 가서 보니까 에스겔에 나오는 모든 구조는 나를 비켜서 다른 분에 대한 지시였음이 밝혀집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이 긴장하는 순간이 언제냐 하면, 칠판에 수학문제 기록해 놓고 “너 나와서 풀어!”라고 손가락으로 지시를 할 때입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선생님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가지요. 그런데 어떤 학생은 자신에게 선생님의 손가락이 갔는데 아닌 것처럼 피합니다. 그럴 때 선생님도 처음 지정한 학생이 아닌 그 뒤쪽 학생에게 지적한 것으로 오해해서 그 뒤쪽 학생을 최종적으로 지정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지시가 오니까(그 지시는 예수님께 향한 것인데) 우리는 나를 향한 지시인줄 착각하고 내가 어떻게 수용해서 성취할까 생각하고 덤벼들었지요.

처음부터 바로 예수님께 지시하면 되지 왜 우리한테 지시하는 것처럼 하시는가? 그것은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가 죄의 왕노릇 하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가를, 누가 죄를 유발시켜 인간을 지배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시를 하는데 “그 지시 제가 순종하겠습니다.”하고 손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을 거란 말이죠. 이게 마귀의 종노릇 하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지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담길 뿐이지 우리 자리를 내가 청소하고, 내가 다듬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지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고 이미 주께서 다 만들어 놓은 곳에 우리가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들어가면서 주의 할 것은, 우리 육신이 뿜어내는 본성 “제가 할게요.”하고 손들고 나오는 그 손을 꺾는 작업을 주께서 하십니다.

“이번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다 나 때문이다.” 라는 것을 꺾어놓습니다. “이번 일이 잘 된 것은 내가 기도했기 때문이다.”라는 것도 부러뜨립니다.

그 다음에, 숨어있는 질서를 어떻게 표면화 시킬 것인가? 안에 숨어있는 것을 어떻게 바깥으로 끄집어 낼 것인가?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전쟁을 벌이십니다. 그래서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12지파들이 땅을 차지할 때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전쟁에 승리해서 전리품 형식으로 제공하시는 겁니다.

이게 신약성경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전쟁 후에 전리품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생활하면서 주님이 전쟁을 하신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삽니까? 나의 생존을 위한 전쟁은 온 몸으로 느끼지만 주님이 영적 전쟁을 벌여서 그 승리의 결과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못 느끼잖아요. 그래서 오늘 강의에 풀어야 될 난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전쟁을 치르고 승리하신 후에 우리에게 전리품을 주시는데 그 전쟁이 일어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늘 내 생존문제만 생각하지만 생존문제와 내가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좋은 예가 이런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시합을 하기 전에 모든 사람이 금메달을 딸 것으로 예상했기에 은메달만 따도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어요. 그런데 김연아 선수가 은메달을 따고 난 뒤 신문을 보면 “고맙다. 김연아!” 이런 식으로 타이틀 기사를 섰어요.

그동안 김연아 선수로 말미암아 즐거웠고, 이번 올림픽에서도 최선을 다했고, 비록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받았지만 그의 수고와 땀에 대해 온 국민이 찬사를 보낸 것이지요. 만약 금메달을 받았으면 “역시 김연아는 금메달 감이야.” 이렇게 나왔을 텐데, 금메달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 미흡함에 대해 울컥하면서 온 국민이 메달 자체로부터 해탈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갑자기 사람들의 마음이 너그러워졌어요.

우리는 늘 ‘어떻게 하면 밥 먹고 살까?’ 항상 나의 생존문제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그 생존문제에 실패했을 때 저만치 멀어져 있던 진실이 내 앞에 다가옵니다. 이것은 나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숨어있던 질서가 밀려오는데, 이것이 바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4:8).”는 것입니다.

우리는 받은 적이 없는데 주님은 선물을 주셨답니다. 바로 “김연아가 금메달 못 따는 것을 줬다.” “아 그렇구나.” 우리의 마음이 격상해야 하는데 격상한 마음은 우리가 애초에 노려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주셔야 받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아는 마음이지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울면서 용서하심에 감사했는데, 그 후 막달라 마리아가 여전도사로 봉사했습니까, 뭘 했습니까? 예수님과 한 편이 되면 욕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12제자도 알고 있었어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는가 하면, 예수님과 한 편이라고 하면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리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리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불리하게 만들면서 질질 끌고 갈 때 비로소 유, 불리를 따진 것마저도 쓸데없는 공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보입니다. 정돈된 질서는 우리가 손 댈 필요도 없고, 우리가 지시를 따랐기 때문에 얻어진 것도 아니고, 이미 감춰져 있습니다.

감춰져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부정해도 그것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딴 데 정신을 팔다보니까 그 감춰진 질서가 미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하셨지요. 우리의 목숨은 이미 주께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우리는 사는 일에 바빠서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그냥 방치하시면 안 되겠지요. 끝까지 버려두면 안 되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무너지게 만들고, 그 무너진 현장에 주님 혼자 싸워 얻어낸 전리품을 선물로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셨지요. 그런데 우리가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전쟁을 통해서 우리의 것을 깨뜨리는 작업을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마귀를 깨뜨리고 우리를 깨뜨리는 거죠. 그러면 뭘 깨뜨리는가? 동질성을 깹니다. 우리는 자꾸 남을 따라가려고 남의 것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데 그것을 주님이 깨뜨리십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가는 길로 가고, 동질감을 유지하며 살려고 하는데 이것을 주님은 깹니다. 예수님의 12제자의 특징이 뭔가 하면, 그들은 기어이 동질성을 붙잡으려고 해요. “사람들 눈 밖에 나면 죽는다. 나는 가족들도 있는데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해.” 이런 생각으로 사는데,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한다.”고 했지요.

에베소서 4장 8절에 선물을 주신 분이 있잖아요. 주신 분이 있으면 반드시 받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밉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면, ‘미움 받으면 어떻게 살지?’ 이런 생각하지 말고, 그 미움 받는 분이 누구신지 찾아볼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미워한다는데, 그것도 예수님과 한 통속이란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이고, 예수님이 가는 길은 미움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동질성이 아닌 이질성이 만들어지지요. 분리가 일어나는 겁니다.

12지파가 땅을 차지했습니다. 여호수아 시절에 땅 분배를 완료했지요. 그 분배에 대해서는 여호수아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12자파가 분할되는 것과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분할이 같습니까? 다릅니다. 다른데 같은 것이 있긴 있어요. 에스겔에서 나눠지는 땅의 그림과 여호수아 때 가나안 땅 정복을 마감하고 12지파가 정착한 지도는 달라요. 그런데 유다와 베냐민 땅은 같아요. 그 외의 다른 지파는 약간씩 달라요.

이렇게 변경된 사항 속에는 뭐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그동안 이스라엘이 숱한 역경을 겪어 왔다는 것을 품고 있습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반복으로 된다. 십자가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산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고 다시 살려내는 것이다.” 제 말 맞지요? 그런데 우리 중 누구도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요. 설사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죽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만약 죽고 싶어서 사는 사람이라면 실패하고 넘어져도 “감사합니다.”라고 할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넘어지면 “아, 재수 없어!” 이렇게 나오지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신안 염전에서 일군들을 노예처럼 대우한 염전 주인들이 경찰에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제일 먼저 염려한 것은 ‘염전 주인들은 앞으로 어떻게 염전을 운영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염전 주인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염전에서 일하던 사람이 탈출해서 “내가 염전에서 노예처럼 당하면서 강제로 일했습니다.”라고 고발을 했는데, 그 사람이 다시 염전에 일하러 갔어요. ‘밥이나 먹여주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심정으로 또 일하러 간 거예요. 살고 싶은 거예요.

그 사람 모습이나 우리 모습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살고 싶은 거예요. 살고 싶다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구원 받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구원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질서에 합류가 되었어요. 아주 아이러니한 일이에요. 정작 구원 받고자 하는 사람은 구원하시지 않고, 구원에 별 관심도 없는 자를 구원하시려고 주님 혼자 용을 쓰시는 겁니다.

12제자들은 예수님 십자가 죽으신 후에 고기 잡으러 갔어요.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갔어요. 배반한 자를 왜 찾아갔습니까? 찾아가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는 내 사랑하는 자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제자들은 도망을 치는데 예수님이 끝까지 찾아가서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품고 있는 그 구원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집 떠난 자식을 찾아가서 집으로 데려왔는데, 며칠 지나 또 가출했는데 다시 부모는 가출한 자식을 찾아가서 또 데려오고 그럴수록 부모님의 사랑의 깊이는 점점 더 넓어지고 풍성한 것이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엡3:19).”

구약 아가서의 특징이 뭔가 하면,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얽히고설킨 것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세상이 나에게 죽음을 준다 할지라도 사랑은 죽음보다 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네가 죽어도 내가 살려내고 말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 지독한 사랑을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했어요.

우리가 이런 사랑을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 하면, 우리가 도망을 쳤는데 또 찾아오실 경우입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 고정된 질서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는 사람은 이것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겨울왕국]이란 영화를 보면, 끝까지 찾아오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사랑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단 그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필요하다.

사랑받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이미 희생했고, 값을 다 치렀다는 증표가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주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 받았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저를 위해 희생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지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구 너희를 꾀더냐(갈3:1)?”

세상은 동질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질성은 거대한 유혹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는 거대한 유혹이 세상입니다. 내가 아무리 힘써 주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해도 거대한 유혹은 강력한 지남철이 되어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완전히 세상 유혹에 빠져서 거기서 먹고 마시며 살 뿐입니다. 마치 더운 여름 아이들이 수영장에 가면 밥 먹는 때도 잊고 하루 종일 물에서 장난치며 노는 것과 같습니다. 물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합니다. 물장구치면서 노는 것이 너무 재미가 있어요.

주님의 희생은 죄인을 친히 찾아오십니다. 술 취해 비틀거리는 우리를 대리운전자가 와서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런 과정과 흔적들이 이 땅에 새겨져 있어요. 그래서 에스겔 48장의 천국은 지상에 있는 지도의 모습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에는 지도가 없어요. 에스겔은 역사적 상황이기 때문에 지도로 표현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세상의 거대한 유혹을 벗어나지 못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책망할 때 늘 하는 말이 “세상 풍속을 쫓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하는 짓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자꾸 합니까? 이스라엘이 결국 그들과 한 통속이 될 수밖에 없는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다고 해서 애굽과 결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애굽을 길게 엿가락처럼 늘였다가 어느 시점에는 용수철처럼 되돌아갑니다.

스가랴를 보면 제 2의 출애굽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때는 다시 출애굽 할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첫 번째 출애굽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제 2의 출애굽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에스겔 48장을 보면서 공감할 부분이 뭔가 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준다는 천국도 땅에 있는 지도의 모습으로 줍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땅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안 되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근거가 이 지도 어느 지점에 표기되어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과연 천국 가는 사람인가?’라는 것을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전쟁이 일어나는 시기와 지점이 어디입니까? 당시 에스겔 48장에서 지도로 말씀하실 때에 어느 지점에 강조점을 둠으로 다른 지파들이 공짜로 천국에 살게 되었습니까? 그 지점을 발굴하고 찾아내는 작업을 우리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줄거리와 흐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첫 번째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지시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시한 적이 없는데도 구원 받았다면 그 장소는 어떻게 찾아갑니까? 지시를 통해서 찾아가요. 왜 지시하느냐? 지시하게 되면 마치 우리가 그 지시에 순종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구원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 신체 자체가 문제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 지켜야 해. 안 지켰으니까 벌 받겠다.”라는 인식 자체가 전쟁을 통해서 무너져야 할 아담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 지점을 찾아가 봅시다. 제가 나눠드린 그림에 보면, 앞에 유다 지계(지역)가 있고, 밑에 베냐민 지역이 있지요. 거기에 레위인의 땅, 그리고 제사장의 땅, 그 안에는 성소가 있지요. 이곳은 지중해고, 이쪽은 요단강이고, 양쪽에 왕의 땅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전쟁에 승리해서 전리품인 땅을 백성으로 제공하시려면 그냥 나눠주면 되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지도를 그리고 복잡하게 해서 주시는가 하면, “내가 선물 받은 땅은 하나님께 받았다.”고 바로 말하지 말고, 옆에 있는 지역을 경유에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지역이 뭔가 하면, 바로 레위인의 땅, 곧 제사장을 위한 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성소가 있고.

성소에는 어린양의 보좌가 있겠지요. 그래서 이 땅을 에스겔 48장은 지도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을 옆에서 들여다보면 개마고원처럼 불쑥 쏟아 있어요. 위에서 보면 유다 지역, 베냐민 지역이지만 옆에서 봐서 불쑥 쏟아 있다면 나머지 지역이 이 지역보다 낮게 있겠지요. 그러면 불쑥 올라온 만큼 하늘나라에 더 가까이 있는 하나의 매개가 된다는 사실이 옆에서 보면 이해하시겠지요?

옆에서 보면 불쑥 올라와 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평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입체적으로 그려 본 거예요. 그러면 나머지는 위에서 흘러내려온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구원 받는 셈이 되겠지요. 그러면 얻어먹는 입장에서 “나는 잘나서 구원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십자가를 믿든, 성령을 받든, 뭘 하든 간에 전부 위에서 굴러 떨어진 거예요. 신약적으로 말하면 여기에 있는 유다 지파는 누구입니까? 한 분 뿐이지요. 한 명이 하신 음식이 부스러기로 굴러 떨어져서 밑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 챙기게 되는데, 이것은 천국의 숨겨진 질서에서 이미 구원 받기로 확정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가 있잖아요. 오병이어가 몇 광주리 남았습니까? 열두 광주리 남았지요. 이런 일은 없겠지만, 러시아 소치에서 동계올림픽을 다 마쳤는데 금메달이 몇 개 남았어요. 그래서 선수도 아닌 사람에게 금메달을 준다면 받는 사람은 값없이 받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받는 생명수가 어떤 생명수입니까? ‘값없는’ 생명수지요. 그러면 값을 치르고 생명수를 받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 외에 모든 사람은 값없이 받는 거예요. 그 내력에 대해서 성경에 나와 있고,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지역(광주, 대구 등)의 현실은 이 말씀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들쑤시는 것입니다. 생존에 목을 매고 있는 우리들에게 “너는 값없이 구원 받았어.”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는 사건과 사태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에스겔 48장의 지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2지파가 칸막이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값없는 은혜를 누가 받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는 아브라함 한 가정이지만 야곱에 와서는 한 국가가 돼요. 국가 되기 직전에 한 나무에서 12가지가 나오면서 12가지가 하나가 돼요.

아브라함이 하나였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몇 개의 가지가 나옵니까? 12개입니다. 12가 예수님에게 오면 다시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라고 하면 쉬울 텐데, 12로 벌여놓고 하나로 모으는 것은 왜 그런가? 12가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죄입니다.

그리니까 이 세상에 주어진 것이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편리를 위해서 부단히 이 세상을 나에게 편리하도록 바꿔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중의 새를 먹인다고 하셨지만, 우리가 새처럼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면 쌀이 생깁니까, 밥이 생깁니까?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안 되지요.

부지런히 설쳐서 내 생존에 유리하도록 바꿔 나가야 되잖아요. 그게 바로 12지파가 한 일입니다. 야곱에서 12자녀가 생긴 것은 라헬과 레아가 서로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겠다는 여파로 12자식이 생겼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설치게 해서 죄의 먼지가 유발되게 조치를 하는 겁니다.

그냥 하나에서 하나로 가는 법이 없어요. 반드시 설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죄를 경유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십니다. 깜짝깜짝 놀라고 절망하지 않고서는 기쁨이 없습니다. 김연아가 은메달을 땄다는 것이 뉴스에 나왔어요. 그러나 그 은메달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누구냐? 새벽 1시부터 3시 45분까지 경기를 다 지켜보고 결과까지 확인한 사람이라야 그 의미를 알아요. 뉴스를 통해서 결과만 들은 사람은 그 메달의 의미를 제대로 몰라요.

12지파는 우리 인생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실컷 고생을 해야 돼요. 그냥 놀고, 먹으면서 천국 가는 법은 없습니다. 12의 죄악을 거쳐야 비로소 숨겨진 1이 나옵니다.

10분 쉽시다.

(2014. 4. 3. 08:36 녹취 마침)

서경수(IP:118.♡.138.213)

14-04-10 22:04

광주 강의(2014. 2. 21) 51-2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혹독하게 경험하는 것이 12지파입니다. 야곱의 12아들은 전부 울고불고 난리 났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그런 일을 유발시켰습니다. 요셉에게 두 개의 꿈을 주셨고,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팔아넘겼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고, 야곱은 요셉을 잃고, 사사기의 입다는 자기 딸을 죽이고 --
구원은 힘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애씀으로 인하여 누군가 희생되는 그분 덕분에 굴러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어먹는 식으로 구원이 됩니다. 내 스스로 구원에 대해서 악착같이 버티려고 하는 그 모습들이 곧 주님을 죽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야곱이 11아들을 얻고 많은 재산도 얻었지요. 그래서 재산도 아깝고 11아들이 아깝지요. 이것은 자기가 받은 축복이라고 여겼잖아요. 그러면 축복이 귀합니까, 축복 주신분이 귀합니까? 축복 주신분이 귀하잖아요. 설날에 아이들이 세뱃돈을 받기 위해 공손하게 절을 하지만 일단 돈을 받고나면 공손함을 잊게 됩니다.

야곱이 하는 짓이나 오늘날 우리가 하는 짓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는 짓이 12지파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1을 12로 만들 때, 이것이 축복이 아니고 이 안에 축복이 들어 있는데, 이 자체는 축복이 아니고 축복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축복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이 가짜 축복으로 인하여 희생당한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란 사실을 야곱을 통해서 이야기해 주고, 12지파에서 되풀이 됩니다.

야곱의 12아들이 했던 경험은 나중에 국가(이스라엘) 단위로 되풀이 되면서 그들은 멸망의 길로 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것도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멸망의 길로 갔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인간이 멸망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따로 챙겨져 있고, 그 구원을 설명하고 구체화하기 위해서 구원 받을 자는 이 땅에서 멸망당하고, 주의 이름으로 미움을 받는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애쓰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한 세상을 몸소 경험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29장을 보면, 여자의 시기와 질투가 먼저 나오는데, 이것은 야곱과 에서의 시기 질투로 반복됩니다. 야곱과 에서의 싸움이 야곱 가정 내의 싸움으로 번지지요.

질문 드립니다. 야곱이 애초에 아내 두 명을 원했습니까? 아니지요. 외삼촌이 사기를 쳐서 얼굴 못생긴 언니를 덤으로 시집가게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아내가 둘이 되었습니다. 둘은 항상 불안정해요. 둘은 반드시 하나를 지향합니다. 둘 중에서 양보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희생과 양보는 주님의 영역이고, 인간의 영역은 죄의 영역이기 때문에 희생과 양보는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자신을 위한 쉬지 않는 투쟁만이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자살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마지막 남은 승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패배자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 전에 자기 생을 끝내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형사가 추적하던 범인을 마지막으로 체포하려고 하니까 범인이 독약을 먹고 입에 거품을 흘리면서 “지독한 놈!” 하면서 죽잖아요.

둘은 하나를 지향합니다. 라헬과 레아 중 누가 야곱의 아내인가를 하나님의 개입으로 판정받자는 시합이 벌어집니다. 자식을 낳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무자식은 저주고 잉태케 하는 것은 축복이기 때문에. 생산은 축복이에요.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하기 힘든 것은 축복을 인간의 선택으로 간주하니까 힘들어요. 그냥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 되는데, 내가 원하는 자를 내가 선택하겠다고 나서니까 힘듭니다.

창세기 29장 32절 이하에 보면,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데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하나님이 임신을 못하게 하시니까 자기 종 빌하를 통해서 단, 납달리가 태어나요. 그 후에 레아의 여종 실바를 통해서 갓, 아셀이 태어납니다. 그 후에 레아가 또 아이를 낳는데 잇사갈, 스불론이 태어났고, 마지막으로 라헬이 2명의 자식을 낳습니다.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식들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겼는데 막한 축복이라는 사탕을 까보니까 육신덩어리가 담겨 있어요. 원래 하나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하나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12명의 자식을 낳았어요. 그러면 12명이 하나로 만들어져야 돼요. 하나 속에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는데 죄인으로 들어가야 해요. 그냥 들어가면 천국의 아들이 두 명이 되니까 하나를 죽이고 들어가야 돼요. 그러면 한 몸에서 나온 144,000이 됩니다.

144,000은 12×12×1,000인데, 1,000은 언약의 완성을 말하고, 12는 언약의 숫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택한 백성들이 144,000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는 야곱에서 일어난 사태가 계속 반복되는데, 이런 자식들을 가지고 주께서는 뭘 설명하는가 하면, 우리 생각에는 12명이 있으면 12명 가운데 누가 훌륭한 자식인지 묻고 싶어요.

그런데 야곱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요셉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나머지 형제와 차별화가 일어납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보는 것이 아니고 요셉을 통해서 다른 11명의 자식을 보는 겁니다. 그러면 요셉과 다른 형제와의 사이에는 차별이 있겠지요? 야곱은 요셉을 사랑했고, 하나님은 요셉에게 두 가지의 꿈을 통해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는 요셉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고 난 뒤에는 야곱이 어떤 다른 아들의 위로도 거부했어요. “아버지, 우리가 있잖아요.” 할 때,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요셉이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오늘날 이 시대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 “제가 여기 있잖아요?”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우리는 필요치 않아요. 예수님의 곁가지(몸의 지체)로써만 의미가 있지 우리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이 뭐냐 하면, 개마고원처럼 부풀어 올라온 여기에서 쓰레기처럼 구원 받습니다. 구원받는 그들이 12지파 이름으로 서랍장이 되어 있다고 했지요? 12지파가 서랍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된다는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을 지금 설명하려고 합니다.

신명기 27장 11절에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 지파를 구분할 때 구분하는 기준이 뭡니다. [교회를 넘어서]라는 책에 이 부분을 설명했는데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면, “주인과 여종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주인과 여종의 관계’라고 말한 이유가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두 종류의 자식이 있는데 하갈의 자식이 있고, 사라의 자식이 있습니다. 사라의 자식은 약속에 따라 난 자식이라 천국에 가고, 하갈의 자식은 종처럼 살아야 하는데, 율법의 종으로 살아야 될 자들이기에 이들은 지옥에 갑니다.

율법의 종을 표현하면서 종이 하갈이다. 그 아브라함의 약속 속에 하나님의 의가 담겨 있고,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삭이고, 그 다음에 나온 자손이 야곱입니다. 그러면 야곱에서 12 아들이 있을 때 둘로 나눈다면 대략 어떤 기준에서 나누는가 하는 겁니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어요. 산이 12개라면 한 지파에 하나씩 주면 되는데, 산이 2개고, 이 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맞은편을 향하여 말씀을 낭독하게 되어 있는 그런 구조란 말이지요. 에발 산, 그리심 산의 높이기 약 900m 쯤 됩니다.

지금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12지파를 두 부류로 나누는 것입니다. 12를 둘로 나누면 6이 되고, 이것을 만약 4로 나누면 3이 되고, 점점 더 어디에 가까이 가지요? 결국은 1에 가깝지요. 3에서 1로 갈 때 1은 중앙에 두드러지게 불쑥 융기되는 모습이 1이 됩니다. 중앙을 차지하는 거예요.

그러면 12를 2로 나눌 때 우리 같으면 어떻게 나누겠어요? 지금 인간의 질투와 욕심에 의해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하고, ‘저 남편이 진정 누구의 남편인가’ 하는 식으로 둘에서 하나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 12지파가 결국 하나를 지향하는 그 원리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면 이걸 나눌 때 어떻게 나누는가? 그들이 싸움을 벌여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태어난 자식이 12명이었습니다. 레아 쪽에서 나은 자식이 8명(레아 6, 레아의 종 실바 2)이고, 라헬 쪽에서 나은 자식이 4명(라헬 2, 라헬의 종 빌하 2)입니다.

레아 쪽이 8명, 라헬 쪽이 4명이라 수가 안 맞지요? 그래서 이것은 레아냐 라헬이냐를 정확히 반으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먼저 종의 자식을 봅시다. 종의 자식이 몇 명입니까? 4명입니다. 그럼 본처의 자식은 몇 명입니까? 8명. 이렇게 나눌 수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나누는가 하면, 이 전체가 인간이 축복을 가장한 죄악 된 육신의 다툼인데, 이들을 배치할 때 균형이 안 맞게 배치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도 6대 6이 안 되니까. 6대 6이 안 되는 것을 주님이 어떻게 배치하는지 보세요.

그리심 산에 있는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은 전부 본처가 나은 자식들입니다. 그리고 에발 산에 있는 자는 르우벤, 스불론을 빼고 나머지 갓, 아셀, 단, 납달리는 종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등급을 매겨요. 한쪽이 숫자가 모자라니까 일단 종의 자식은 다 들어가고, 진짜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의 자식은 반대편에 세우고, 레아 자식 중 2명을 저쪽으로 보내면 6대 6이 됩니다.

여기에서 나눠지는 조건들이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의 종에 속한 사람과 정식 아내에게 속한 자식을 나누시는 하나님의 취지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는 레아 쪽이 아니고 라헬 쪽에 점수를 더 주는 식이 됩니다.

민수기 2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 그림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동시키거든요. 동서남북 방향이 나와 있고, 언약궤는 반드시 동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동쪽에 유다지파가 제일 먼저 나와요. 이것은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아들들에게 축복할 때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온다고 했어요.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마지막 성전이 완공되고 난 뒤에 12지파의 배치도와 민수기 2장에서 12지파가 광야에서 이동 중에 배치된 것에는 차이가 있는데 왜 차이가 나는지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의 12지파 배치를 보면 동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고, 반드시 메시아가 동쪽에서 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동쪽에 배치된 지파가 유다, 잇사갈, 스불론입니다. 그리고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이고, 동쪽의 세 지파와 남쪽의 갓을 제외한 지파는 정실부인(레아) 자식입니다.

그리고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인데, 이들은 종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유다와 누가 대립 요소가 되는가 하면 여기에 요셉 지파가 등장해야 되는데 각 방향에 3지파이면 네 방향에 12지파가 되는데 그러면 언약궤 옮길 지파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옮길 레위 지파를 빼면 11지파가 되는데, 요셉 지파를 둘로 나눠 에브라임, 므낫세를 투입합니다. 그렇게 유다 지파와 대립되면서 요셉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축복하는 대목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가 둘로 나눠 질 때 아래쪽은 유다지파, 위쪽은 요셉지파를 중심으로 해서 남북이 갈라졌잖아요. 창세기 49장 10절에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지요, 그래서 유다 지파에서 왕이 등장하는데, 24절에 보니까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이 요셉 지파에서도 나오고 유다 지파에서도 나옵니다. 축구에서 투톱입니까? 어쨌든 유다 지파와 맞설 수 있는 지파가 요셉 지파입니다. 실제로 영토도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가 비슷합니다. 여하간 중심이 두 개가 됩니다. 유다 지파의 건너편에 요셉 지파(에브라임, 므낫세)를 배치하고, 여기에 남아있는 정실 부인의 자식 베냐민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남은 종의 자식 갓을 남쪽에 배치합니다.

결국 이 구조는 유다 지파가 주도권을 쥐고, 뒤따라오는 것이 요셉 지파고, 나머지 정실부인의 자식은 유다를 따르고, 종의 자식들은 요셉을 따르는 이런 구조로 해서 영토 분할도 이와 유사하게 배치가 됩니다. 여하간 민수기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48장에 보면 성읍의 출입구가 나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도 나와요. 어쨌든 에스겔 48장 30절을 보면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렇게 나오는데, 그 출입구가 제가 나눠드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겠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되어 있고, 아까 유다 지파가 동쪽에 있었지요. 그것은 진행 방향입니다. 민수기 성막은 계속 움직이는데 에스겔 성전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유다가 어디 있느냐? 유다 문은 위쪽에 있어요. 이미 북쪽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유다 지파에 의한 유다 나라는 에스겔 48장에 의하면 완성이 되었어요. 완성 되었기에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뼈대가 마련됩니다. 유다 지파의 양쪽에 있는 르우벤과 레위, 건너편에 스불론, 잇사갈, 시므온. 이 모든 것은 전부 정실부인의 자식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12지파를 분류할 때 첫 순위가 정실부인의 자식이냐, 종의 자식이냐? 두 번째는 라헬의 자식이냐, 레아의 자식이냐? 이렇게 나눠요.

그런데 완성이 되면 그 모든 것은 유다로 모아져요. 그러면 12라는 수가 유다 하나로 모아져요. 그러면 요셉 지파는 그동안 뭘 했는가? 하나인 것 같지만 하나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가,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나라가 나눠지지요.

솔로몬은 세상의 거대한 유혹에 이끌려 정략결혼을 했고, 부인들이 자기 나라의 종교를 가지고 솔로몬은 부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신당을 지어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집권할 때에 여로보암이 등장해서 나라가 둘로 나눠집니다. 르호보암은 남쪽을 차지하고, 여로보암은 북쪽을 차지했는데, 두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가 북쪽으로 따라갔어요. 안 따라간 두 지파는 유다와 베냐민뿐입니다.

제가 나눠드린 그림, 에스겔 48장 이야기 있지요. 유다 지역과 베냐민 지역 사이에 성전이 있는데 이것을 저는 개마고원이라고 했지요. 높은 자리가 있고 나머지 모든 지파는 이것을 경유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접촉이 안 돼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있는 성전을 통해서만 됩니다. 이 성전이 에스겔 48장에 나오는데 이것은 완성된 성전이기에 계속 생명의 물이 나옵니다. 천국을 그 당시의 지도로 설명하는 거예요.

성전이 완성 되었을 때 정실부인의 자식들을 이렇게 배치합니다. 그러면 요셉 지파가 남아요. 유다 지파가 완성된 입장에서 요셉 지파의 역할은 정실부인 자식과 종의 자식의 차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주보게 합니다. 이쪽에 있는 납달리, 아셀, 갓은 전부 종의 자식이고, 요셉과 베냐민은 정실부인 자식인데 한 자리가 남으니까 단을 집어넣은 겁니다.

전체적인 취지가 뭐냐 하면, 유다로 인하여 완성된 상태에서는 이동할 필요가 없으니까 유다 지파에 의해 모든 해택은 주어지고, 정실부인과 종의 차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취지가 피어오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민수기 2장에서는 성소가 이동하는 중이고 동쪽으로 이동한다고 했지요. 동쪽에는 유다 지파가 있으면서 유다 지파 쪽에는 정실부인의 자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요셉 지파인데, 요셉이 둘로 나눠져서 에브라임, 므낫세가 됩니다. 그 다음에 성전은 유다 쪽에서 갈라서는 겁니다. 그리고 위쪽에는 종의 자식들이 배치되지요.

이러했던 것이 에스겔 48장에서는 유다 지파로 인하여 아래위 전부 정실부인의 자식이고, 이쪽은 요셉 지파가 등장하면서 종의 자식이 배치되면서 전체적으로 정실부인 자식과 종의 자식을 구분시킵니다.

[교회를 넘어서] 263페이지를 봅시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신 성읍에는 사방으로 총 12개의 문이 있는데 그 문마다 지파의 이름이 붙는다. 그런데 그 이름이 붙여진 구조를 사방으로 살펴보면, ‘라헬측과 레아측’이라는 큰 구조의 틀 아래서 세부적으로 각각 ‘여주인과 종’이라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즉 북쪽과 남쪽은 모두 레아 소생의 지파들만 구성되어 있는데 복쪽은 정실 소생으로 짜여져 있고 남쪽은 여종 소생이 주종을 이룬다. 반면에 동쪽과 서쪽은 라헬측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동쪽은 모두 라헬이라는 본부인의 소생이 주종을 이루며 서쪽은 여종의 소생과 그리고 레아의 여종인 실바 소생의 지파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이다(겔48:30-34). 그리고 문 방향을 소개하면서도 일상적인 동쪽 문부터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민수기 2장에서는 ‘동→남→서→북’ 형태가 되는데 이러한 바향 순서는 바로 정실측부터 먼저 거론하고(북과 동) 그 다음에 여종측(남과 서)을 제시하므로써 여전히 정실과 여종의 대립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265페이지에 에스겔 마지막이 나오는데, 그 성읍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은 ‘여호와 삼마’라고 해서,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입니다.

자, 이제 결론을 맺을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아까 에베소서 4장 8절에 의해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 선물을 나눠 준다고 했지요. 이것은 전쟁을 통해서입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12지파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에 나서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은 가만히 있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지요.

신자, 불신자 관계없이 설쳐야 됩니다. 열심히 움직여도 세상에서 밥 먹고 살기 힘든데 가만히 있으면 되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가만히 있는데 그 땅을 차지했습니까? 전쟁을 치렀지요. 그런데 그들은 전쟁을 하는 중에 무엇을 느꼈습니까? 자신들의 무능함을 느끼고 패배의 불안감이 들고 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승리를 했습니다. 승리를 했는데 그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하면, ‘붙이시는 전쟁’입니다. 전쟁이 이상하지요? 붙여주시는 전쟁입니다. 어떻게 붙여 주시는가? 힘도 없는 나에게 강자가 와서 패하는 모습을 보라가 붙여주는 전쟁입니다. 나중에 결과를 보면 신나는데 막상 강자가 올 때는 겁에 질리고 승리하기 위해서 죽도록 싸워야 합니다.

죽도록 싸우는데 그 싸움의 결과는 자신들의 노력과 실력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 이상한 분입니다. 승리를 주시려면 그냥 주시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약을 올려가면서 주십니다. 그런 전쟁을 치르면서 땅을 차지했는데, 나중에는 그 땅을 다 빼앗깁니다.

그러면 빼앗기는 과정에서 뭐가 문제가 되는가 하면, 12지파 전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간의 전쟁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그들과 동행하시는 여호와 이름과 동행 받는 백성들과의 전쟁인 것을 선지자들의 투입으로 알려 주시지요.

선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하나님만 알게 되면 육신의 문제는 신경 쓸 것 없다. 왜? 우리가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얻는가, 잃는가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누가 주셨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를 어떻게 합니까? 배척하고 죽이면서 선지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지요. 그래서 희생이 발생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를 실컷 얻어맞도록 하기 위해 보낸 겁니다. 그런데 정작 구원 받아야 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자기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자기 땅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누가 억울하게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이 죽지요. 그래서 성전과 제사마저도 사라집니다.

선지자 중에 끝이 에스겔입니다. 에스겔 본문에서. 이 에스겔 선지자가 와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가 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12지파가 땅을 나눠 가진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셨지만 그 주신 것을 스스로 회수해 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회수해 버리면 언약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 회수하는 과정 속에서 희생이 발생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과정에서 희생이 발생됩니다. 이 희생 속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완성하는데, 12지파에 속한 모든 것들은 다 무엇을 품게 되어 있습니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우리는 죄 때문에 마땅히 멸망해야 된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우리 죄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자식들에게 축복할 때 ‘홀이 유다 지파를 떠나지 아니한다(창49:10)’고 했어요.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오지요. 그런데 유다 지파도 망해야 되잖아요. 유다 지파가 망하기 직전에 망하는 의도 안에서 다윗 자손을 언급했고, 다윗 자손이 망하면서 희생자로써의 다윗이 새롭게 부각이 되면서, 죄와 희생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약속대로 유다 자손에서 왕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까 보신 그림대로 되는 것입니다. 온 땅은 왕의 소유이고, 어느 누구도 자기의 땅이라고 할 사람이 없어요. 왕은 유다 지파이고, 이 땅의 왕의 소유, 다윗 자손의 땅인데 너희들이 살게 될 때는 왕 되시는 분의 희생으로 공짜로 누리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지파의 배치도도 달라집니다. 옛날의 배치도를 보면 자기들의 땅이 좋다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고 않고(요단강을 건너지도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 해서 머물러 있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다른 지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것이 전부 나중에는 예루살렘과 베냐민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재편성 되면서 전부 이 품안에서 같이 살게 됩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지도를 보면 그렇습니다.

에스겔에 모든 지파의 유지가 나오는 것은, 어느 것도 베냐민과 유다 사이에 있는 성전의 혜택을 입지 않은 지파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이 지파는 어느 지파입니까? 그것은 기존의 유다 지파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망한 후에 새롭게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자손이 누구냐가 에스겔 전체의 관건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자손으로 왕이 오면 그 왕이 에스겔에 예언된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에스겔 37장 24절에 보면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목자마저도 이제 유다 지파에 소속돼요. 전에는 요셉 지파였지만.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 이 모든 약속은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실제로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해요. 하지만 다윗의 자손이 이미 육신으로 있던 시절은 떠났잖아요. 이 세상을 떠나서 승천하셨어요. 그리고는 부활하신 몸으로 오셨잖아요. 부활체는 보통 우리의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도 나중에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겁니다. 지금 이 모습이 아니고. 흙에 속한 것은 흙으로 끝이 납니다. 하늘에 속한 것을 흙에 속한 육체로 묘사하면 이렇게 되지요. 하지만 12지파에게 주신 언약은 이제 다윗 왕이 다 결정하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한 에베소서 4장 8절 말씀처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데, 그 선물이 뭐냐 하면, 성령이란 선물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성전에서 물이 나옵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가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4:14).”라고 이야기를 했죠. 이 말의 뜻은 에스겔 말씀을 염두에 두고 “내가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온 자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그것을 우리는 반복해야 돼요. 우리는 이 땅에 무엇 때문에 사는가?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사세요. 그야말로 막 사세요. 그렇게 살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돼요. 유다와 이스라엘이 전부 망했잖아요. 우리는 이 몸 때문에 망해야 됩니다. 망하고 난 뒤에 망하는 그것이 죄와 하나님의 희생(십자가)과 결합되면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됩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십자가를 골라잡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주셔서 미리 죄로 죽은 자로 살아가게 만들어서 알게 하고, 나를 죄인 되게 하신 것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죄인이 된 거예요.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을 통감할 때 우리는 주와 결합된 자입니다.

성령이 임해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때, 이런 사람이 바로 천국에 가는 자이고, 이것을 에스겔을 통해서 알려주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정실부인의 자식과 종의 자식을 구분하시고, 약속대로 유다 지파를 통해서 다윗의 자손이 태어나게 하시고, 모든 계획이 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진 것처럼 예수님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다고 하셨고,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왔던 주님의 모든 계획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 우리가 죄인 됨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것이 십자가의 승리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4. 10. 21:4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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