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40123-마15장11절(마음속)48강 - 이 근호 목사
대전140123-마15장11절(마음속)48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대전140123-마15장11절(마음속)48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5장11절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십자가를 염두에 두면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경유해서 이야기하시거든요. 예수님 이 말씀 하실 때 아직 십자가 안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야기할 때 그냥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휘감아 돌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휘감아 돌게 되면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거죠. 그러면 아버지께 버림받아야 구원받는다는 뜻이에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거예요. 버림 안 받으려고 지옥 안 가려고 보통 하나님 믿잖아요. 예수 믿는데. 아버지는 예수님은 반대로 이야기해버려요. “버림받자.” “버림 받으면 혹시 구원해줍니까?” 버림 받으면 끝나버려요. 그걸로 버림받는 것이지 버림받고 뒤끝 생각하는 것은 제대로 버림 받는 척하는 것이지 버림받는 게 아니거든요.
“나와 함께 버림받자.” 왜냐 하면, 버림받으면 구원해줍니까? 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 가치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는 거예요. 깨끗이 미련을 털어 버리자. 아까 질문한 사람이 이 내용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질문내용이 이거였어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들어놓고 고생을 시킵니까?” 거기에 답변은 뭐냐 하면, 바로 고 소리해서 버림받으라고 고 소리한 거예요. “그러니까 고런 식으로 따지냐” “예, 따집니다.” “그럼 버림받자. 그만.” 해답 찾을 필요 없이 그냥 그런 소리가 버림받을 짓이다. 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냥 버림받아버리자. 이 말이에요.
버림 받아버리면 전부다 결국 예수님 죽었을 때 모든 사람이 죽었다 했지요. 예수님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이 죽은 자다.(고후5:14) 죽은 자인데, 그 죽은 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제는 그 가는 길, 너희들은 이제 십자가에 같이 죽자. 그냥 죽자.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말로 하면 뭐냐 하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식으로 죽자는 말을 그렇게 늘여서 하는 거예요. 늘여서.
죽을 때 죽는 이유가 있을 게 아닙니까? 하는 짓거리가 다 죽을 짓만 하는구나! 라고 언급을 하면서 나오는 거예요. 언급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저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그들이 이해하겠습니까? 십자가 이후에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이해 못해요. 이해못하지만, 그들은 그래도 예수님의 무슨 소리 나와도 그냥 예수님만 믿고 가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은 너희가 나를 알아서 나를 믿어서 따르는 게 아니고 그냥 아버지께서 붙여줬기 때문에 못 떨어져서 붙는 거예요. 아버지가 선택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한테 보냈기 때문에 안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점을 그들이 이해했을까요? 못 했을까요? 이해 못한 거예요. 이왕 삼세판인데 갈 데까지 한 번 가보자. 이런 식이에요. 요런 게 어려운데요. 어려운 것부터 다룰게요. 이 사람들이 자기가 알아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생각이 십자가이후에 이게 바뀝니다. 십자가이후에.
에이, 십자가 졌으니까 내가 알아서 믿어야지. 이런 시대는 이제는 십자가이후에는 아니에요. 이제는 도망쳐도 도망 못가는 거예요. 지옥가고 싶어도 지옥은 이제 구경 못합니다. 더 이상 우리가 모든 가는 길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천국 가는 길로 몰아세우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 가고 싶어도 구경하고 싶어도 구경 못해요. 그걸 시편23편에서는 뭐냐 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마지막 엑소시스트라는 영화가 있어요. 이건 실제로 다큐멘터리로 찍은 사진인데 귀신을 실제로 보여주는 영화에요. 그런데 귀신을 쫒아내는 사기꾼 목사가 무슨 대목을 하느냐 하면, 시편23편을 외우는 거예요. 그리고 가르쳐요. 어린애가 귀신 들렸는데 계속 이야기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믿느냐, 믿느냐,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야기하라고 강조를 해요. 목사가 그런 짓하는 자체도 악귀 짓이라는 것을 목사는 몰라요. 자기는 귀신을 쫒아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물어봅시다. 예수님은 귀신을 쫒아내려 왔습니까? 자기 백성을 찾으려 왔습니까? 자기 백성 찾으려고 왔지 사람 찾으려고 왔지, 목욕탕에 보면요, 여기에 대전가에 2645번 있습니까? 광고하는 거 있지요. 사람 찾는 거지, 때 밀려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교회 올 때 귀신 쫓아내면 지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귀신 나가도 구원 못 받아요. 병 고쳐도 구원 못 받아요.
사람들은 자기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 오는데 그건 목사들이 사기를 쳐서 그러는 거예요. 교회는 목사가 원하는 데지 예수님이 원하는 데가 아닙니다. 목사가 덫을 놓은 거예요. 보이스 피싱 하기 위해서 덫을 놓은 거예요. 서로 타입이 맞아서 당기는 거예요. 서로 얻을 게 있겠다 싶어서 당기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한다고 주님이 오시는 게 아니고 따로 원하는 자가 따로 있어요. 따로 찾는 방식이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네가 원해서 나를 믿은 게 아니고 내가 원해서 네가 구원받았느니라. 그게 찾는 방식이에요. 고 이야기가 찾는 방식이에요. 아무도 이 말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왜냐, 평소에 우리가 원인과 시작점이 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이번 결과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작용했느냐 그것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원인이 아닌데 원인은 저쪽에서 원인됐는데 그냥 낚아졌다는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되면 우리는 아주 자존심이 굉장히 상해요. 나는 쪼다구나! 하는데 쪼다 만들어서 구원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쫓아오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툴툴 털어버리는 거예요. 하도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그냥 우리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툴툴 털어버린다. 키를 잡고 알곡과 가라지를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알곡 되고 싶어 하지요.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고 툴툴 털어버리는데 어떻게 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보낸 자는 남고 보내지 않은 자는 툴툴 털어버리는 겁니다. 요게 언약방식입니다. 어렵더라도 집중력을 갖춰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9장 4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시켜 놓고 질문을 다시 만들어서 줍니다. 구원된 자만 알아듣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나한테 구원받기 전에 너희는 이런 생각을 했을 거야. ‘아우, 내가 이렇게 착하니까 이렇게 구원했겠지.‘ 라는 생각을 했지? 했지? 그치. 했지? 이렇게 다구 치는 거예요. “아이구, 그래요. 했어요. 했어요.” “그러니까 너희들을 내가 공짜로 구원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너희와 타협하지 않고 협상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야.” “너하고 의논하지 않고 구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야.”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의 구원한 것은 너희들의 선악이 아니고 이 백성들이 악함을 이야기하면서 그냥 구경꾼으로 있다가 그냥 어부지리로 들어온 거예요. 똑같이 악한자인데. “이상하다? 나는 다 같이 악한자인데 왜 저들은 구원 안하고 우리는 왜 구원해서?” 라고 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주일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믿는다는 현상은 어떤 현상인가 하면, 제가 쌍시옷을 넣으라고 했어요. 욕 비슷한 거죠. 쌍시옷하고 손가락을 몇 개해가지고 뒤통수에 두라고 했지요. “아이~씨,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리 되어야 구원받은 거다. 말이지요. 손가락을 머리 뒤로 하란 말이지요. 긁어야 돼요. 아이~씨, 뒤에는 말을 붙이지 않겠습니다. 아이~씨,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나같이 말씀 안들을 것을 주께서 뻔히 아시면서, 구원받아도 말씀 안 지키는 걸 한 고집한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 구원받아놓고 구원받은 체 행세도 안하는 거 주께서 뻔히 아시면서, 왜이~씨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게 바로 신명기9장4절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천국 갔을 때 모든 공로가 주님만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한번 봅시다. 보면서 아, 이런 구절도 있구나 하고 보시면 됩니다. 3장11절에 보면,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러니 불판위에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전부 다 내 자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것, 예수님이 아닌 것, 지가 다 만들어낸 것은 불에서 다 사라지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3장20절 보세요.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이야기하시고 21절, 그런즉 누구든지 무엇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고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전하는 목사는 교인이 목사의 것입니까? 목사가 교인의 것입니까? 목사가 성도의 것이에요.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누구의 것이라 했습니까? 다 너희의 것이죠. 그러니까 성도가 바울의 것도 아니고 성도가 베드로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도바울이나 베드로가 누구의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것이 되는 거예요. 개인의 것이 아니고 집단구원이니까. 개인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에요.
개인구원, 집단구원 차이점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열왕기하19장 35절에 나와요.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다가 185천명이 죽었지요. 그 185천명이 개인적으로 알던 사이였습니까? 모르는 사이였지요. 185천명 그냥 놔두면 한 사람 각자, 각자 자기 과거의 역사 있고 자기 개성 다 있고 집안 다 틀리고 서로 모르는 사람이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죽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성격이 같지도 않아요. 성품도 같지를 않아요. 학력도 같지 않아요. 예루살렘을 공격했다는 것 때문에 한꺼번에 다 죽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집단으로 보는 거예요. 185천명이 다 개성이 달라도 하나님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하나로 보는 거예요. 그 기준은 어떤 기준입니까? 예루살렘이지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이 계신 곳에 니가 거룩한 곳을 감히 공격하다니, 공격했다는 그 일치점 때문에 하루에 천사가 와서 185천명을 다 죽였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남보다도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기준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건 뭐냐, 십자가에요. 십자가. 그런데 그걸 제자들은 십자가 이전에 몰랐어요. 뭐냐 하면, 누가 더 높으냐 나오지요. 누가 더 착하고, 누가 더 봉사 많이 하고, 누가 교회 청소 열심히 했고, 전도 많이 했고, 싸우잖아요. 그게 바로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은 그게 본성입니다.
그러면 오늘 고린도전서3장23절에 보면, 결국은 집단구원이란 것은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게 보면, 본문 어렵지만 마태복음15장이 이제 풀립니다. 입에서 나오는 게 뭐냐, 입에서 나오는 것이 개인밖에 안 나오지요. 율법의 특징이 바로 집단구원이 아니고 개인구원입니다. 내가 지켰어! 니가 지킨 게 아니고 내가 지켰어! 너가 만약 구원받으려면 나처럼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어! 이리 되는 거예요. 나처럼 하게 되면.
야구장에 들어가는데 내 표 있으면 나만 들어가요. 그런데 주님께서 표 다 끊어주면 공짜로 다 들어갈 수 있지요. 집단입장이 되는 겁니다. 그게 우리는 싫은 거예요. 왜? 이미 우리가 나올 때는 나보다 못한 쪼다가 나와 같이 같은 세계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가 참을 수 없는 나의 모독입니다. 평생 아버지 안 모신 형수가 나와 같이 천국 간다. 아~ 이건 모독입니다.
내가 오랜만에 목사님 모시고 식사를 손수 집에서 만들었는데 같이 따라온 어떤 권사가 음식 솜씨하고는 이 따위 치워라! 할 때 이제는 그 권사는 지옥가야 돼요. 도저히 못 참아. 같이 천국가면 한 모퉁이에서 천국 뒷골목에서 싸울 거예요. 바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은 티입니다. 나를 절대자아라 해요. ‘절대 자아’ 절대자아를 대전수련회 때 언급 한 거 같은데요.
절대자아는요, 숫자로 치면 2가 아니고 1이에요. 그것도 큰 글자 1이에요. 오직 나만 1이에요. 작년 대전수련회 때 했던 거 다시 해볼게요. 이렇게 오렌지가 있습니다. 이걸 사람들은 오렌지가 몇 개 있다고 합니까? 이걸 숫자로 하면 3이죠. 이거 틀렸어요. 이거 틀렸다 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3이라 하는 자체가 반칙입니다. 3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우선 내가 1이에요. “오렌지가 있네.” 하면 내가 1이에요. 내가 1이 있고 그 다음에 나 같은 사람 또 있으니까 그 다음에 2가 되고 3이 되는 거예요. 두 번째 사람은 내가 아니고 세 번째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걸 집단구원이기 때문에 세 개가 아니고 하나에요. 다 같은 오렌지입니다. 왜? 다 같은 오렌지의 자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로 봐요. 아담으로 봅니다. 그러니 제가 한 답변이 뭐였습니까? 아까 답변 읽어봤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들어놓고 고생을 시킵니까?” 여러분들은 생각해 봤습니까? 왜 하나님은 창조해서 고생시킵니까? 왜 하나님은 지옥 보내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까? 나는 천당 가서 좋은데 다른 사람은 지옥 보냅니까? 이런 하나님은 말도 안 되는 하나님입니다. 질문했을 때 답변은 뭐였습니까? 질문을 바꿨어요.
이 따위 소리하는 나를 더 저주해도 되는데 왜 자꾸 나를 이렇게 먹이고 살리고 입히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렇게 모독하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모독하는 사람을 살려주십니까? 그러니까 이 질문은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고요, 정답만 비교시키면 돼요. 왜냐, 그 사람 질문은 그 사람 질문이 아니고 주께서 허락한 질문이거든요. 주께서 허락한 질문과 답변한 질문을 나란히 하는 그 기능을 그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하면 되는 거예요.
사람을 꾀어서 구원받게 하는 게 아니고 그것과 다른 질문을 나란히 두게 하면 된다니까요. 진노의 그릇은 그냥 진노의 그릇을 바꾸면 천국 가는 그릇으로 바꾸면 안 되고 은혜의 그릇이 어떤 소리를 하는가를 나란히 옆에 같이 놔두면 그게 되는 거예요. 지옥 갈 에서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야곱만 옆에 두면 되는 거예요. 그게 어제 수요 설교였어요. 짝을 이루면 되는 거예요. 이제 아시고 수요설교 들어보시면 돼요.
그 다음 하시는 말씀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절대자아, 선악과 따먹은 그 후유증이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너가 따먹으면 뭐가 된다? 신이 된다. 너는 신이야. 신이니까 내가 하는 말은 토 달지 마! 토 달지 말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송강호가 이야기한 거거든요. 넘버3에서 내, 내, 내가 혀, 혀, 현정화라면 혀, 현정화야. 토, 토, 달지 마! 그거는 배, 배 배신이야! 배반…. 라면 먹고 달리기 하는 선수가 임춘애인데, 무식한 조폭이 하는 말이 토 달지 마! 내가 현정화라고 하면 현정화야. 라는 그 대목이 나와요.
자, 그 다음에 보시면, 그러니까 이 말은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지금 분류작업을 하는 거예요. 알곡과 가라지를. 그런데 절대로 이 제자들이 알곡이 아닙니다. 그들은 마찬가지에요. 그냥 덤으로 가만히 있다가 끌려 간 거예요. 가래떡가지고 모가지 감고 끌려가는 것처럼. 개그콘서트에 보면 나와요. ‘안돼요‘하는데 나와요. 가래떡 가지고 무조건 끌고 가는 것처럼 거기서 복음을 느꼈다니까요.
그래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내 천부께서 심지 아니하면 다 어떻게 된다? 다 뽑힌다. 그러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 자체가 알곡 안 될 자는 내 말 이해하려들지 말고 이해 안 되면 이해 안 되는대로 그게 가라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제자들이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제자들도 이해 못하기 마찬가지인데, 이해 못 하는데도 이해 못한 상태에서 구원받아버리면 이건 모든 공로와 은혜를 누구한테 돌리겠어요? 오직 주님, 자기 공로로 돌리니까 그게 천국이다 이 말입니다. 그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어느 인간도 알아채서 구원받는 사람 없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홀로가야 돼요. 숫자로 하면 ‘1’이에요. 우리의 1이 아니고 우리의 선악과 따먹고 나를 절대자아를 만드는 그 1이 아니고 다른 1, 생명나무라는 1, 그 1로 우리의 1을 교체시켜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모든 종교는 자기의 행함, 착한 행함이 거기에 일부 섞이게 되어 있어요. 모든 종교의 특징은 뭐냐, 정성이지요. 교리가 필요 없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으로 하는 거예요. 십일조해도 다리미질해서 봉투에 넣어서 빳빳한 돈 넣어서 주와 함께 드리는 게 정성이잖아요. 교회 올 때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교회오기 30분전에 TV 다 끄고, 연속극도 끄고, 본방사수하지 말고 재방송보고, 이렇게 정결한 마음으로 오게 되면, 만약에 그 때 성만찬이 아다리 되게 되면 성만찬 주의 뜻과 잔을 마셔도 이게 안 죽어요. 안 죽고 변화가 와요. 마음을 돌아보지 않고 성만찬 먹다가는 주일날 먹었잖아요. 그 다음날 월요 날 내지 화요일 날 감기 들릴 수가 있어요. 독감에 감기 걸릴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함부로 죄인처럼 먹어버리면 어떤 사람은 시체가 될 수가 있었고, 어떤 사람은 아플 수가 있다고 고린도전서11장에 나와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목사들이 써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만찬 앞두고는 비상사태에 들어가요. 마음 정결상태에 들어가요. 성만찬 1년에 2번하기 때문에 성만찬 한 번 끝났을 때는 쉬어가야 돼요. 마음 놓고 노래방가고, 성만찬 가까이 왔다 싶으면 다시 정결하게 해야 돼요. 그걸 밀당이라 해요. 밀고 당기는. 그게 바리새인들이 이 짓한 겁니다. 구원 받는데 아무 도움 안돼요. 왜냐 하면, 그게 절대자아,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집단구원이 아니고 나만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사람하고 비교하지 말고 옆에 집사하고 비교하지 말고 신앙은 누구한테 비교해야 돼요? 예수님과 비교해야 돼요.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만드는 그러한 느낌이 와요.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꼭 사람하고 비교하게 되어 있어요. 여자들은 그래요, 아주 사소한 것에서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거든요. 요번에 대전수련회할 때 내가 다이빙대 이야기했지요. 라캉 이론을 언급했습니다. 여자라는 자리는 똑같은 자리는 없고 남자가 먼저 있고 거기서 삐져나왔지요. 여자에게 사랑이란 뭐란 했습니까? 나 홀로 두지 말라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에게 할 것은 뭐냐 하면, ‘나 홀로 두지 말라’ 그러니까 여자의 사랑은 본인이 챙기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에게 일임하는 특징이 있어요. 당신이 나와 결혼했으면 나를 그냥 두면 안 되지. 그건 사랑이 아니야. 뭘 갔다가 안기고 주고 이런 거 하지 말고 당신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하게 되면 나는 비로소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비로소 확인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말을 끝내지 않고 더 이야기했지요. 나를 혼자 두지 말라, 해서 그 말 듣고 나한테 오게 되면 그건 사랑이다? 아니다? 사랑 아니다. 왜? 말을 내부터 먼저 끄집어내게 만들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남자냐 이 말이죠. 내가 말하기 전에 내가 뭘 원하는지 당신이 먼저 챙겨야 당신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이 티가 나는 거예요. 그럴 때 남편들은 뭐라고 합니까? 어쩌라고? 어쩌라고? 하라고 해서 다 했는데 어쩌라고? 그 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니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니가 꿈 꾼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채느냐 말이에요. 니가 내가 아닌데 니가 뭘 생각하는지를 내가 우이 다 아느냐 말이지요. 남편은 답답한 거예요. 해 달라 해서 해줬는데도 또 뭐가 문제냐 말이죠. 그런 여자였어? 흥 말하지 마! 휙 돌아서 버리죠.
그래서 라캉이론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여자의 후손한테 이게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에요. 그거 아니면 여자의 후손 풀리지를 않아요. 여자는 뭐냐, 여자의 자리는 없었으니까 신비의 자리죠. 잠언서에 보면, 슬기로운 아내는 어디로부터 왔다? 촌에서 왔다. 서울에서 왔다. 아니에요. 어디에서 왔다? 여호와께로부터 왔다. 슬기로운 아내는, 여자의 자리는 신비지요.
신비가 남아있으면 여자고, 신비가 없으면 마누라고. 마누라 되면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바로 리볼보 권총이라 했지요. 룰렛 할 때. 마누라 같으면 갈아치워도 괜찮아요. 그런데 여자의 자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지요. 여자는 남편이 자기를 여자로 보기를 원하고 남자들은 귀찮아서 마누라로 보지요. 위자료 넘겨주면 그만이지 그런 식으로.
그래서 이 세상에는 진정한 여성을 만족할 남편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왜 여자를 그렇게 만들어 놨는가, 세상에는 남편 같은 남편은 있다? 없다? 그래서 여자는 결혼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을 실감하게 되는 겁니다. 남자도 마찬가지고.
결국 바리새인들이 뭐냐, 바리새인들을 후처서 키질해서 제거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알곡 안 섞이도록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6장 39절에 뭡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 작업이죠. 그 작업에 대해서 우리가 신뢰를 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모든 스트레스는 완전히 그 순간 날아가 버려요.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다? 없다? 없지요. 구원 안해야 되지요. 왜? 나보다 더 든든한 분이 잃어버리지 않는다는데 왜 어설픈 내가 내 구원에 내가 손길을 발휘합니까. 예수님이 잡채를 잘 만들면 내가 가서 잡채를 손댈 요리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주께서 지금 요리하고 있는데 내가 굳이 장갑 끼고 요리합니까? 내 구원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주님의 소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4장에 보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죽는다고 해서 구원 안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니가 인정하라, 이 말입니다. 주일 오후 설교 때 마지막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죽고 싶다, 했잖아요. 살아있으니까 내가 나한테 손질을 해야 되니까 그게 짜증나는 거예요. 내가. 아, 이렇게 해서 어떻게 살지, 만날 내 손질을 내가 해야 되니까 차라리 죽어버리면 더 이상 나한테 내가 손질할 게 없잖아요. 그게 얼마나 편하겠어요. 재하보고는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애들 감수성 많은데 안 되니까.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아까 제가 이야기한 이 모든 말씀은 분류작업이라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히니까, 그 다음 14절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냥 두어라’ 아! 참, 이 믿음이 필요한데.... 이 믿음이 필요해요. 그냥 두어라. 제발 너 자신에 대해서 제발 좀 너무 닦달내지 마라, 구원의 방해자가 우리 자신입니다.
내 구원의 최고 방해자가 내 자신이에요. 안심을 못해. 뱃살 나와도 구원받거든요. 현미 먹는다고. 가슴살 해먹고. 뿌리 식물 먹고. 온갖 하는데 그거 몇 주 안갑니다. 운동한다고 운동기구사가지고 홈쇼핑해서 사봐야 집에 운동기구만 있고 잘 안하지요.
배웁시다. 그냥 두어라. 배 터져 죽게, 지방 터져 죽게 그런데 특징은 뭐냐 하면, 그냥 두어라 할 때 이 이야기를 바리새인도 듣고 제자들도 들었지요. 둘 다 그냥 두지 않습니다. 왜? 십자가지기 전까지는 그냥 두어라, 라는 말은 꼭 반대로 이해하면 정답이에요. “너희들이 가만 둘 인간이 아니야.” 이런 뜻이에요. 니가 간음하지 마라, 하면 니가 간음하지 않을 인간이 아니고 니가 맹세하지 말라, 하면 아침 눈뜨자마자 맹세로 시작할 하루일과고 돈 꾸어주되 돈 받을 생각하지 말라, 라는 말은 이자까지 챙길 니다, 니 자신이다. 이 말입니다. 사채업자 이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가 바리새인 못지않습니다. 그냥 두어라, 우리는 초조해서 불안해서 가만히 안 있어요. 뭘 하느냐 하면, 기도하게 돼 있어요. 주여, 주여, 무릎 끓고 기도합니다.
14절 봅시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되어있지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빠진다. 이 소경을 누구보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바로 바리새인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과 소통하고 바리새인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가 누구냐, 바로 12제자들입니다.
왜냐,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스승이에요. 랍비였거든요. 성경말씀을 가르치던 자들이었잖아요. 그렇다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것은 바리새인보고 하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도 되는 거예요. 우리는 앞일을 알지 못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는, 제가 주일날 했는데 미래는 무엇의 표절이라 했습니까? 과거의 표절이란 표현을 했지요. 우리의 미래는 과거의 표절이에요. 이미 익히 아는 것을 그냥 편집했을 뿐이지 우리는 전혀 과거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습니다.
잠언서에 보면,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될 줄 알지 못하는데, 우리는 알지 못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계속 미래를 예측하려고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타고난 우리의 본성입니다. 17절에 보니까 설명을 해 달라 하니까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되어 있는데 이걸 설명해볼게요.
지금 마음과 주님께서 입이라는 신체와 주님께서 분리시켰지요. 그러면 신체 안에 뭐가 들어있단 말입니까? 마음이 들어있어요. 그러면 신체는 뭡니까? 마음을 덮는 하나의 포장지죠. 알사탕 있으면 알사탕 덮는 포장지가 껍데기가 신체란 말이죠. 그러니까 신체라 하는 것은 마음을 투과하는, 마음이 발현된 발현 체라 볼 수 있어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데 이 중심은 주님의 하는 모든 일에, 말씀에 반대만이 나오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 자, 제가 질문 던집니다.
이 살인마음과 간음마음과 음란마음과 같습니까? 다른 출처입니까? 같은 출처지요. 그러면 어떤 때는 살인이 되고 어떤 때는 간음이 됩니까? 그건 환경에 의해서 사태가 어떤 사태이냐에 따라서 살인하기도 하고 간음하기도 음란하기도 하고 도적질하기도 하고 거짓증거하기도 합니다. 세월 따라서 나이 따라서 자기가 속해 있는 환경 따라서 주변에서 약을 올리느냐, 안올리느냐 에 따라서 그 때 그때마다 이런 것이 무 작위적으로 자기가 말릴 틈이 없이 오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대전수련회에서 ‘사건’이라 했지요.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의 다발’ ‘사건의 뭉치’ ‘사건의 꽃다발’ 이런 사건에 이게 뽑혀서 반응하고 요런 사건에 요렇게 뽑혀 나오지요. 아부하고 또는 약한 자에게는 큰 소리치고 강한 자에게는 고개 숙이고. 같은 마음에서, 같은 다발에서 리액션이, 반응들이 나타나요. 그래서 사람의 인간됨은 자리가 결정하고 환경이 결정하지 본인 성품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만약에 일본군에 뽑혔다. 일본군이 되어가지고 신입사원 생체실험에 내가 뽑혔다. 그러면 나도 기쁘고 즐겁게 의미나 목적은 찾지 말고 지금 하는 일에 그냥 즐기는 마음으로 하자, 하면 그것이 나중에 피해 입은 국가에서는 잔혹한 전쟁범죄가 되는 거예요. 하지만 지가 가고 싶어 했습니까? 나라가 가라고 했지. 지가 계급장 달고 싶어 했습니까? 지가 골라서 파견했습니까?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연구하라고 해서 갔을 뿐인데 생체실험을 하는 거예요. 월남전쟁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떠밀리는 인생입니다. 그걸 그냥 사건이 월남치마라 했지요. 대전수련회에서.
예수님께서 폭넓은 월남치마 중에서 A라는 B라는 사건들이 인위적으로 푹 푹 터져요. 툭 툭 터지면 우리는 옆에 C, D, E로 있다가 같이 그 사건에 같이 말려들어서 한 통속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그냥 두어라, 이 말이죠. 손을 봐도 내가 보지, 어설픈 니가 고치겠다고 하지 말라,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걸 손을 봅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라도 나름대로 착해보려고. 이런 경우라도 상대적으로라도 더 자기를 우열한 성품자로 만들기 위해서. 고매한 고품 있는 상식 있는 인간으로 행세하려고. 자기가 거기서 착하게 하지요.
라캉이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그게 뭐냐 하면, 타인의 욕망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인체하는 것.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페르소나, 우리말로 가면입니다. 여러 개의 가면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가면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그리스에서 연극할 때요. 그 땐 여자는 연극배우가 될 수 없었어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재수 없다고. 남자들이 연극배우 하는데 남자들이 연극배우 하다보면 여자역할 해야 되잖아요. 그 때는 연극무대가 딱 붙어있는 게 아니고 멀리 떨어져 있어요. 떨어져있기 때문에 떨어져 있어도 조그만 소리를 해도 울려서 그 원형무대를 다 울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유적지에 보면 부채꼴로 돼있지요. 조그마한 소리를 해도 다 들릴 수 있는 구조가 돼있어요. 거기에 말하면서 가면을 쓰면 가면 자체가 로울이에요. 역할이에요. 여자의 역할. 중국의 창극 하듯이. 나중에 가면이 더 발달하게 되면 분장하지요. 분장으로 바뀌다가 19세기 20세기 초에 영화로 바뀌면 직접 인물들의 주름살, 연기력, 그것으로 표현하게 돼 있습니다. 옛날이 더 충격이었어요.
왜냐 하면, 배우와 관객이 떨어져 있으면 배우를 통해서 배우의 감정이 이입되는 것이 아니고 혼자서 관객들이 스스로 상상하니까 본인 상상이 본인 상상 속에 자기의 과거의 아픔이 묻어나오니까 혼자 울고 난리 나는 거예요. 영화드라마는 그 슬픈 거 봐도 아, 저거는 가짜, 저 화장발은 잘못됐네. 조명발이네. 우리는 그 사람을 보지만, 뚝 떨어져서 보게 되면 더 울음이 터지잖아요. 옛날 영화관보세요. 추석 명절 되면 영화관 터지잖아요. 죽는 줄 알았어요. 아주 감동적이에요.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옵니다. 따라서 십자가가 가깝게 느껴지고 십자가가 니 죄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신학공부해보면 멀찍이 떨어져요. 그래서 학문이라 하는 것은 은혜가 안돼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실수했을 때, 내가 죄지었을 때, 더 생생하게 주님 십자가가 우리에게 느껴지게 돼 있어요.
그 당시에는 예수님은 눈으로 봐도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살인자 따로 있고 간음 자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같은 마음에서 환경에 따라서 그 때 그때마다 이런 죄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 손으로 씻어버리면 하나님이 뭐한다? 음식 먹을 때 손을 씻어버리면 하나님께서 옳다, 니가 착하고 거룩하구나! 이렇게 봐줬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건 아니라고 본 겁니다.
자, 그러면 묻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어서 거룩하다고 이야기 했을까요? 우리가 봐도 이건 너무 좀 유치하다고 보여 지는데. 손 씻었다고 하나님이 거룩하게 봤다는 게 너무 유치해 보이는데. 왜 바리새인은 손을 씻음으로서 이걸 결례, 거룩한 어떤 의식, 의식을 행함으로서 거룩하게 된다고 그렇게 했었을까요? 그게 대중들이 구원받기 쉽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집단의 힘이에요.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 왕따 당하면 그 사람은 못 삽니다. 여러분, 뭘 해주기를 원하십니까? 목사의 모든 설교는 이게 포함돼 있어요. 여러분, 오늘은 어떤 소리를 해주기를 원하십니까? 자, 오늘은 어버이주간입니다. 여러분, 제가 설교를 통해서 어떤 설교를 하면 어버이주간에 여러분이 이해되시겠습니까? 자, 어버이에 대해서 본문 뽑겠습니다. 자, 오늘은 결혼식입니다. 여러분들의 하객들, 손님들이 어떤 설교를 원하십니까? 제가 맞춰드려서 주례하겠습니다. 이리 되거든요.
그런데 서 경수 목사님 맞춰서 설교했습니까? 본문이 뭐였습니까? 로마서1장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례하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본적 있습니까? 없지요. 아내 된 자는 남편사랑하기를 이런 소리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이런 게 나오잖아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고 결혼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바로 주례목사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온 거예요. 지금 그 인간과 주례자가 바로 직접 하는 게 아니고 주례자의 마음속과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십자가의 새 언약을 잇기 위해서는 복음으로 들어가서 나올 때는 복음에서 나오는 주례사가 나오기를 원했던 겁니다. 이걸 통과해야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그저 축복이야기 했잖아요. 흔히 하는 기독교 결혼식에서 하는 축복, 이건 뭡니까? 무슨 소리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거 원하죠. 이거 해드릴게요. 그걸 가지고 삯군 목자, 다시 말해서 마귀의 제자라고 하는 겁니다. 마귀의 12제자. 선악과를 통과하면 마귀고, 십자가를 통과하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모든 사건, 결혼 사건을 통해서 거기서 주께서는 십자가만 드러나게 하시잖아요. 그걸 성령 받은 사람은 눈치 채고 못 받은 사람은 그걸 눈치 못 채는 거예요. 그 결혼식장에서 관심사들이 뭐였습니까? 신부엄마 이쁘다. 하여튼 복음 전하기위해서는 뭐든지 다 동원합니다. 관심사가 분명히 그 십자가인데 거기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전부 다. 그런데 한 사람 있었어요. 부산의 정 계향 권사님이. 결혼식 끝나고 전화가 왔어요. 서 경수 목사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왜요? 결혼식 참석해서 너무 은혜 받아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설교를 잘해가지고 고맙다고 전화하기 위해서 전화번호 묻는 거예요.
바로 그겁니다. 현장에 사람들만 있으면 안돼요. 직장에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에요. 오늘도 무슨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려고 나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려고 이렇게 직장에 휘몰아 넣었는가, 그게 지금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겁니다. 두 세 사람도 괜찮아요. 교인 수 몇 명이고 관계없어요. 두 세 사람도 나와 함께 있으면 그게 바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입니다.
천 명 모여야 주님과 함께 있습니까? 만 명 필요 없어요.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게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있으면 그게 교회에요. 정 권사님은 순간 교회로 본 거예요. 결혼식이 아니고 교회다. 목사님을 통해서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니까.
그 다음에 21~22절 봅시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귀신들렸지요. 예수님이 귀신 쫓으려고 왔습니까? 아니지요.
아까 그냥 두어라, 왜 그냥 둡니까? 주께서 심지 아니하면 뽑히지요. 귀신만 나가면 알곡 되는 거 아닙니다. 절차를 우리 쪽에서 필요한 거 만들면 안돼요. 귀신 나가면 구원받을 것이다.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귀신 들린 자를 나갈 수 있어요. 하지만 7귀신 또 들어오면 소용없습니다. 귀신 내보내는 것은 그냥 두어라, 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만 두어야 될 이유는 능력은 누구한테 있다? 주님에게만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귀신 이야기 했을 뿐이에요.
그 다음 이야기는 뭐냐, 귀신 들렸잖아요. 정말 중요한 것은 24절,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 너 같은 여자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고걸 설명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일부러 귀신 들린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겁니다.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의 다발이다. 우리가 존재라고 여겼는데 막상 사건에 부딪히니까 여기서 음란과 간음이란 사건들이 마구 풀어져 나오네요. 우리는 신명기9장 말씀처럼 절대로 선하지 않습니다. 악합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에요. 그런데 못난 존재 만들어서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라는 고백을 통해서 십자가와 연결시키는 거예요. “너 같은 인간도 십자가 피로 구원된다.” 이 말입니다.
알곡이 먼저고 우리는 알곡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후차적으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그 알곡과 우리의 연결고리는 바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의 음란을 통해서 십자가를 만나게 해서 내 마음이 이러니까 주께서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통과하게 해서 나 같은 이렇게 더러운 마음인데 왜 구원하십니까? 하는 찬양을 통해서 알곡 되게 하는 겁니다. 내가 알곡 된 게 아니고 주님의 작품이구나! 하고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귀신들려도 만 귀신 천 귀신 들려도 마땅한데 성령님께서 저희를 구원해 주시니 모든 공로가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의 연속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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