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0-스코투스, 오컴
201402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0-스코투스, 오컴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2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0-스코투스, 오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윌리엄 오컴에 대해서. 윌리엄 오컴은 신학이나 철학을 전공한 사람한테는 굉장히 인기가 좋습니다. 이 사람 사상은 사실은 둔스 스코투스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80인의 신학자들에 보면 나와 있어요. 112페이지에 보면. 그건 뭐냐 하면, 윌리엄 오컴이 볼 때는 둔스 스코투스는 아직도 초월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를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학하는 우리와 설교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아주 쉽게 말씀드릴게요.
심리적이라는 말을 했는데 하나님이고 예수고 이런 게 보통 사람들은 중요하게 여겨져요. 죽어서 어디 가는지 모르니까 신의 나라에 우선 가야 보험 하나 들어놓은 것처럼 안심이 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인생을 살아보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우리한테 와 닿는 게 아니고 재미나다 또는 즐겁다. 쾌락적이다 또는 슬프다, 외롭다 특히 무섭다. 무슨 요소입니까? 심리적인 요소, 감정적인 요소가 우리를 지배하지요.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애가 갑자기 아프다고 하면 설교 듣다가 몰래 책 들고 집에 가야 되겠지요. 집에 가서 예배드립니까? 다친 애를 데리고 빨리 병원에 가야 되잖아요. 그때 그 감정이 얼른 모든 걸 잊어버리고 정신도 못 차리면서 예배도 못 드리고 집으로 가는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이겠어요? 무섭다, 두렵다, 겁난다, 그리고 불확실성, 이런 것들이 작용하잖아요. 그러면 예배시간에 목사들이 다뤘던 신이 어떠니. 천국이 어떠니, 성령이 어떠니, 예수님이 어떠니 하는 그런 것들은 아무 쓸데없는 장식처럼 다 날아가 버리지요. 실제로 인간은 심리적 존재, 감정의 존재에요.
그렇다면 오컴이 볼 때 신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인간은 이미 심리적으로 자기감정에 휘둘리게 돼있어요. 나중에 자기감정이 더 깊이 나가면 욕구, 욕망이라고 현대철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그때까지는 욕구, 욕망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는 안 해요. 쿠자누스나 신비주의에서는 무의식도 이야기했지만 오컴은 그것까지는 이야기 안 했는데 어쨌든 간에 인간은 감정적인 요소에 휘둘리게 돼있는데 이 감정적인 요소가 도덕과 만나면서 여기서 하나님이 나오는 거죠.
그러면 도덕이 먼저입니까, 감정이 먼저입니까? 여기서 윌리엄 오컴은 인간의 오성과 의지가 만나면서 인간의 의지는 지시하고 명령한다는 겁니다. 둔스 스코투스에서는 신의 의지가 있었지요. 윌리엄 오컴은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로 나타나면 인간의 의지는 자기 도덕적인 의식으로 갖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의 도덕이 신이 되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보면 그전까지는 신을 하늘에 뒀잖아요. 윌리엄 오컴에 와서는 나의 의지가 신의 의지로 얼마든지 작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까 둔스 스코투스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뜻이고 하나님의 의지로 된 거지요. 윌리엄 오컴은, 그럼 나의 의지는 신의 의지가 아닌가요? 말을 계속 이어보자면, 신의 뜻에 의해서 내가 있고 내가 두렵고 떨리고 기쁘고 즐겁고 한다면 이것도 결국 신의 의지에 포함된다.
포함된다면 성경에 나오는 도덕적이고 신의 뜻이라는 것은 결국 신의 의지에서 더 나아가서 나의 의지로 설명이 가능한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의 감정과 인간이 갖고 있는 도덕, 도덕과 감정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율법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철학자들의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요. 성경에 관한 이야기는 통째로 다 날아가 버렸어요. 성경 자체 안에 신의 도덕이 있다고 보고, 신의 도덕에 대해서 신은 자기 의지로써 실현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 속에 있고 교회에서 한다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인간의 감정, 예를 들어서 무섭다, 즐겁다고 할 때 그냥 도덕 없이 무조건 즐겁다, 기쁘다고 하면 인간이 개나 소와 다를 바 없잖아요. 인간이 개와 소와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이 뭔가 내가 생각했던 나의 도덕에 부합할 때 나는 기쁘고 즐겁단 말이지요. 점심 한 턱 낼 때 얼마나 기쁜지 아시지요? 기쁜 거예요. 그것이 나의 의지로 됐다는 것이 더욱 더 기쁘지요.
교회에 청년이 하나 왔다. 교회가 섞었느니, 기존교회에 문제가 있다느니 하면서 자기는 바른 교회에 왔단 말이지요. 그 청년의 생활을 관찰해보세요. 그 청년은 진정 신을 좋아할까요, 하나님을 좋아하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를 좋아해요? 가만히 보면 누구를 합리화시키고 누구를 빛내게 만드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아름답고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얻고 어떤 훈련을 받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온 경향성이 많은 거예요.
방금 제가 예를 들 때 젊은이라 했지요. 그렇다면 대구공부한 걸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제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똑같은 질문을 여러분한테 하겠습니다. 네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걸 네 살 먹은 아이한테 이야기했을 때 그 아이의 느낌이 어떨까요? 문제가 너무 어렵지요. 그럼 지금 암 걸려서 오락가락하는 구십 넘은 할아버지한테 그 이야기를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 평생 동안 세상을 무서워하며 살았는데 이 시점에 내가 더 이상 뭘 무서워하리요. 그저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할 자를 무서워하고 그분을 믿어야지.” 그럴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럼 네 살 먹은 아이는 도대체 두려워한다는 게 뭔지 몰라. 보호를 받기 때문에. 두려워하려면 부모 없을 때, 밤중에 혼자 있을 때 두려워하잖아요. 그 아이는 엄마만 있으면 마태복음 10장 말씀이 없어도 되는 거예요. 참 중요한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아이한테는 엄마만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부모가 돌아가시니까 그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지만. 만약에 엄마가 계속 살아있다면 자기는 계속해서 어린아이로 성장이 멈추는 거예요. 그게 양철북 아닙니까.
제가 광주 김을수 집사한테 엿을 한 박스 받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엿이 끊어져있던 것이 며칠 지나지 않아서 한 덩어리로 붙어버렸어요. 그래서 망치로 깨거든요. 이게 산소가 들어가면 개봉하면 한 덩어리 돼버려요. 어린아이한테 엄마와 아빠가 있다면 이때는 하나님도 필요 없어요. 만족해요. 부모가 하나님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 척하는데 성인이 되어 개봉하니까 마태복음 10장 28절 말씀을 하려면 진짜 이 몸이라는 것은 아무도 자기 몸을 자기 스스로 지킬 수 없다는 사태가 왔을 때 그래서 두려움이 생길 때 비로소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는 걸 알 때 비로소 몸과 영혼을 지옥 멸한 자를 두려워하라는 그 말씀의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스스로 지켜서는 의미 없어요. 스스로 이 몸을 지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자식 둘 밥도 못 먹여서 자살하자고 번개탄 피우고 죽자고 할 그 순간에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더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자기 마누라에게 마귀라고 거울에다 써놓고 자살했다는 그런 목사, 내가 보기에 아직 어린아이인 거예요. 말씀 앞에 모든 게 벌거벗고 드러나야 되는데 아직도 내 아내는 복음을 알아야 되고, 내 아내는 절대로 보석 같은 건 사랑하지 말아야 되고, 보석이 아니고 복음만 사랑해야 되고, 교인들은 나를 복음 아는 목사로 존경해야 되고, 뭔가 스스로 자기의 체계를 갖추고 있을 때 마태복음 10장 28절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지금 윌리엄 오컴이 보통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윌리엄 오컴이 이런 소리해서 도망갔습니다. 완전히 잘렸어요. 결국 페스트에 걸려 죽은 걸로 돼있는데 이 사람이 도발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좀 정직하자. 믿는 척하지 말고. 성경을 자꾸 따오지 말고 나부터 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치 않은 데도 왜 하나님을 거론하느냐부터 따지는 거예요. 돈만 있으면 되는데 하나님이 왜 믿습니까? 눈만 봐도 다 통하는 이야기인데 그걸 애써 아닌 것처럼 감추면서 “신이시여, 말씀대로 하옵소서.”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위장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고 인간은 말씀 따라 존재가 아니고 인간은 감정 따라 사는 심리적인 존재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심리적인 요구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에요. 사람마다 신이 어떤 분이냐 하면, 좋은 엄마가 있으면 엄마 같아. 아버지가 좋으면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 같아. 사람마다 자기가 속한 환경 따라서 신을 대하는 요소가 다 달라져요. 그게 무슨 일관된 신입니까?
윌리엄 오컴은 십자가를 모르는데 하나님은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냐하면 출발이 뭡니까? 존재거든요. 나, 여기 존재 있다. 이 존재는 어디서 생겼을까? 신이 만들었다. 아까 둔스 스코투스처럼 같은 존재란 말을 사용해야 되겠지요. 그럼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의 뜻에 의해서 나란 존재가 등장한 거예요. 어렵지요. 존재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계신데 거기서 하나님의 의지가 나오고 너는 네 모습대로, 나는 내 모습대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안 보이는데 그걸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뭐가 있어야 존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데다 존재를 붙일 수 있어요? 못 붙이지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안 계신 거예요? 그런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면 보이지는 않고 있으려면 안 보이는 신이 나와야 되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뜻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뜻의 열매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겁니다. 창조해서 있잖아. 창조해서 있는 건 아는데 창조주는 안 보이는 거예요.
둔스 스코투스가 여기 내가 있잖아. 있으니까 신은 있다는 거예요. 안셀무스의 존재론을 스코투스가 수용을 해요. 교재에 보면 나와요. 그런데 윌리엄 오컴은 그것보다 더 나가요. 신이 나를 만들어서 내가 있다 할 때에 그러면 있는 하나님을 찾을 때 단서를 어디서 출발해요? 여기 내가 있는데서 출발하자. 그걸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라는 것이 단서가 된다고 보잖아요. 윌리엄 오컴은 존재가 단서가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감정에 휘둘려서 살아가요. 맛있는 것, 예배 끝나고 맛있는 것 먹으면 갑자기 교회에 나오고 싶어요. “오늘은 불고기 파티합니다.” 하면 왠지 예배 마치고 도망가지 않고 싶어요. 사람은 내가 내뱉는 말 말고 내 몸이 말없이 뭔가 요구하는 게 있다고요. 그건 말로 설명 안 되지만 뭔가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어요.
이번에 대전공부하면서 남자, 여자 차이점을 이야기했잖아요. 남자라면 상대방이 이것 해부세요. 남자라면 이게 되는데 여자는 해달라는 말도 안 하고 자꾸 짜증만 내고 타박만 놓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가, “뭘 해달란 말이냐?” 이렇게 하면, 여자가 이것 해달라고 하면 되는데 “이것 해줘?” “아니에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뭔데? 그건 남편인 네가 알아줘야 남편답지. 뭘 어떻게 알아. 내가 이것 해달라고 해버리면 내 뜻에 네가 따라가면 누가 남편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거예요.
진정 당신의 아내라면, 아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남편이 미리 챙겨줘야 아내답다는 거예요. 환장하지. 여자와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냥 밥만 먹고 살면 여자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남자한테 여자는 리볼버 권총 안의 총알이라고. 여럿 총알 막 돌아가요. 이 여자 없어도 괜찮아. 다른 여자가 와도 좋아. 여자는 그게 아니에요. 오직 한 남자가 자기가 모르는 것까지 책임져줄 때 남자고 그게 안 되면 그냥 갈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신비라 해요.
윌리엄 오컴은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전통대로 교회가 가르치는 데로 따르면 돼. 어디 그런 게 있어요.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빙자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인지 따져보잔 말입니다. 윌리엄 오컴이라는 철학이 면도날의 철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은 명제라 했습니다. 실재하지 않는데 명목상 걸쳐서 논리를 전개하는 것뿐이다. 실재하는 게 아니고 어떤 말을 하기 위해서 동원된 그러한 개념들뿐이다. 명제를 아는 것과 실제 사는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지렁이를 밟으면 꿈틀하지요. 지렁이한테 “네가 아플 때 어떤지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라.”고 하면, 지렁이는 그걸 설명할 필요가 없다니까. 그냥 밟으니까 꿈틀할 뿐이지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요.
비트겐슈타인이 발견한 게 이거에요. 세상은 없어요. 세상은 명제의 집합이에요. 이걸 이제부터 설명해드립니다. 여기 물이 있잖아요. 물이 있기에 우리는 물이라고 칭한다고 이렇게 보통 알고 있잖아요. 이게 아닙니다. 이걸 물이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우리에게 필요한 물이 되는 거예요. 이게 비트겐슈타인이고 오컴의 주장입니다. 왜 그런지 설명해드릴게요. 이게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숲 속에 연못이 있다고 합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자생적으로 생긴 연못이에요. 늪이 연못이 된 거예요. 여름 장마에 물이 불어나고 겨울 되면 낙엽지고 하겠지요. 그런데 아무도 이 연못에 안 가봤어요. 그러면 이 연못이 우리한테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안 가봤으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윌리엄 오컴이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우리한테 없으면 진짜 없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우리가 발견 못하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게 많잖아요. 바이러스를 다 발견했습니까? 병균을 전부 다 찾아냈어요? 찾아낸 것만 있지요. 찾아내지 못한 것은 있어도 우리는 모르지요. 그러면 우리가 말하는 세상은 결국 우리가 찾아낸 것, 우리가 있다고 확인된 것의 집합체만 세상이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세상은 우리가 아무리 해도 없는 게 더 많을 수가 있지요.
지금도 물리학에서는 75%를 암흑물질이라 해서 이것은 빛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분석이 안 되서 몰라요. 사과가 떨어지는 걸 뉴턴이 중력으로 설명했잖아요. 뉴턴 이전에는 그냥 떨어진다고 했어요. 그냥이 뭡니까? 뭐시기입니까? 뉴턴은 중력에 의해서 떨어진다는 것이고. 그리고 중력을 수식으로 설명한 거예요. 지금도 중력으로 설명해요.
그러면 이 세상이 전부입니까? 인간이 되어서 세상도 모르는 주제에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논한다고? 말도 안 되지요. 모르기 때문에 성경 본다고 하잖아요. 성경 보는 당사자는 누굽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세상이라고 우기는 그 당사자가 성경에 나오는 문자를 보면서 이것 바로 하나님이라고 우기잖아요. 그게 하나님일까요? 자기 주변도 모르고 세상도 다 모르는 주제에 감히 세상을 만들었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책 문자를 해독하면 알아지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그냥 우리가 내뱉는 명제다. 명제는 하나의 진리를 구축하기 위해서 시작하는 거예요. 임의로 단어를 서로의 약속에 의해서 추출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종에 축구 게임과 같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그림언어로 이야기했다고 게임언어로 이론이 발달하거든요.
게임이란 이겁니다. 여러분, 장기나 체스 알지요. 서양장기를 두는 사람이 체스 판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거기서 더 나갑니다. 장기 두는 사람이 장기판이라고 보는 게 아니고 장기 알이 장기판이라고 했을 때 장기 안에서 이 세상에는 장기판 외에는 없어요. 본인이 그 일부가 되기 때문에.
이왕 이해 못하는 것 어렵게 해봅시다. 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이다.” A, “이런 분이 하나님이다.” B, “이런 분이 하나님이다.” C, 이 셋이 모이면 이게 하나님이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다, 아니다 하는 인간임을 포기하고 밖에 나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느 인간치고 자기가 인간임을 포기하고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없는 인간이에요. 자기가 인간이면서도 일단 인간 아닌 척하고 인간이 어떻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은 없는 인간이에요.
성경의 언어를 알아야 된다고요? 자기가 언어 바깥에 나올 수 있습니까? 자기가 언어를 생산하는데. 방앗간에 고춧가루가 나오면서 방앗간을 언급하면 안 돼요. 방앗간을 만든 주인이 방앗간이 어떻다고 이야기해야지 고춧가루로 갈려나온 주제에 방앗간이 어떠니 해도 자기가 나온 코스밖에 몰라요.
욥기 이야기입니다. 욥의 친구 넷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럴 때 하나님이 등장하잖아요. 제가 아까 한 연못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요.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 생각해도 자기를 벗어나서 출발지점으로 삼을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걸 윌리엄 오컴이 이야기해요.
윌리엄 오컴 시대가 되면 신학이란 명제에 불과해요. 명제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단 말이죠. 와르르 무너지고 그 다음부터는 내 의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면, 내 의지가 곧 신의 의지거든요. 내 의지가 앞으로 뭘 행할 것이며 뭘 탐색할 수 있으면 뭘 뽑아낼 수 있느냐, 뭘 연구할 수 있느냐? 그쪽으로 나가니까 윌리엄 오컴 이후에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꽃이 필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에 신학도 철학도 편승했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데카르트 과학시대 이전에 윌리엄 오컴이 유명세를 떠는 겁니다. 신이 없다는 게 아니에요. 신을 모른다는 이야기지. 신을 없다는 말을 하게 되면, 너는 어디서 나왔는데 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그때그때 자기가 처한 감정에 따라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될 뿐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내 생각이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기가 일방적으로 했던, 말던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기 때문에 그것은 신의 뜻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하지요. 왜냐하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이번에 했잖아요.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맞느냐, 틀리느냐? 성경을 그대로 읽으면 맞는 이야기입니까? 그 말 읽은 뜻은 진짜 주의 뜻이 맞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제 대답은 뭐였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대답이라고 했지요. 창세기 1장 1절을 보고 거기에 대한 해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게 해답이에요.
제가 울산에서 강의할 때 했잖아요. 사자의 털을 몇 개 뽑으면 사자가 화냅니까? 한 오천육백 개 뽑으면 화냅니까? 사자의 털은 몸통에 박혀 있잖아요. 하나의 율법을 어겨도 몸통 자체가 다 반응하게 돼있어요. 털을 열 개 뽑았다고, 천 개 뽑았다고 화 더 내는 것 아니거든요. 그처럼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지금 윌리엄 오컴은 신약에 대해서 잘 몰라요. 선배들의 말이 과연 합당한지 따지는 겁니다. 그럼 철학은 왜 하느냐? 그 당시 신학이 철학이고 철학이 신학이에요. 인간의 정신을 장악해야 되니까. 논리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게 아니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신자로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철학적인 논리나 명제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명제나 논리에 대해서 윌리엄 오컴이 시비 걸고 들어가는 겁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어린아이의 하나님은 바로 부모에요. 하지만 어린아이가 자라나지요. 자라나면서 그때그때마다 변하지요. 변화될 때 인간은 자기감정에 대해서 초월하는 게 아니고 새로운 감정을 수용합니다. 흔들리는 감정이 자리 잡기 위해서 도덕이 주어지거든요. 윌리엄 오컴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도덕이 주어졌다는 이 말은, 성경말씀 전체를 도덕적인 교훈으로 요약을 한 거예요. 맞는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윌리엄 오컴을 공부하면서 알아야 될 것은, 인간이 뭔가 무섭고, 두렵고, 떨릴 때 예를 들어서 사기를 당했다든지, 아이가 갑자가 사고를 당했다든지, 아이가 성적이 내려갈 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뭐예요? “하나님이여, 제가 도덕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형벌을 주십니까?”라는 생각이 떠오르지요. 그게 윌리엄 오컴의 생각이라니까요. 인간의 모든 감정에 있어서 도덕이 동원되고 그 도덕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는 거예요.
그 당시는 복음이 뭔지 몰라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순종하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지가 관건이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속에 있는 도덕에 있고 우리는 감정에 휘말리고. 감정에 휘말리는 것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해서 도덕적으로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감정은 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감정,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윌리엄 오컴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도덕이겠지요. 들어보니까 칸트 생각 안 납니까? 칸트도 마찬가지지요. 여러분, 착하게 사세요. 왜? 이런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칸트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살인하지 마세요. 그러면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조건부로 지키는 게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뜻은 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미처 생각 못한 초월적인 명령인데 곧 그것을 신의 명령으로 본 거예요. 그것이나 윌리엄 오컴이나 생각이 같아요.
그러면 칸트 이야기해봅시다. 칸트가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써 교회에서 성경말씀 가르치는 것이 의미 있다, 없다? 그건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참고로 들을 수는 있겠지요. 성경자체가 도덕적이니까 내가 바르게살기 위해서 신의 명령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 그런 뜻에서 의미는 있는데, 명령은 누가해요? 내 안에 있는 이성이 명령해요. 내 양심이 명령한다니까요. 살인하지 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살인하지 마. 무조건 남을 해코지 하지 마. 왜요? 왜라고 묻지 마. 그것은 네 속에 있는 신의 명령이야. 무슨 신이 필요하고, 성경이 왜 필요합니까? 자기 일상 살면서 나쁜 짓 안 하고 양심대로 신의 명령 따르면 천국 갈 텐데 십자가 예수님 죽으심 왜 필요하고 무슨 의미 있어요.
제가 지금 윌리엄 오컴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 이유는, 윌리엄 오컴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신학자든 철학자든 복음을 몰라요.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윌리엄 오컴이 이런 주장을 할 때 무슨 뜻으로 하는지 그들이 몰라요.
방금 이야기한 윌리엄 오컴의 주장을 경험주의라 합니다. 경험주의라 하면 영국에서 나온 프랜시스 베이컨이 떠오르겠지요. 이 사람은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고 네 가지 우상을 이야기했잖아요. 영국은 경험주의라 하고 독일은 합리주의고. 경험주의가 뭐냐 하면, 진리는 분명히 얻는 게 있어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관찰하는 도구가 좀더 세밀해지고 자세하게 되면 보다 많은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냥 맨 눈으로 보면 목성의 위성이 두 개인지 안 보여요. 그러면 목성의 위성이 없으면 엉터리 천문학이 구성돼요. 그런데 렌즈를 갈아서 망원경을 만들어 자세히 보면 목성의 위성이 두 개 있다는 새로운 정보물이 등장하게 되면 우주의 별들의 움직임에 정확한 접근이 가능하잖아요. 그게 바로 과학의 원리에요. 분석의 원리고 관찰의 원리고. 관찰을 통해서 패턴을 만들고 패턴을 계속 확장시켜서 이미지화하면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하고, 인간의 의지는 신의 의지로 용납을 한 거예요.
신학 그러니까 종교지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드디어 나눠지면서 과학이 진리가 되잖아요. 그러면 철학과 신학은 할 일이 없네? 신학과 철학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도덕과 관련성을 띠어야 돼요. 인간은 감정적으로 살면 동물 돼요. 기분 나쁘다고 사람 찌르면 안 되잖아요. 사람을 찌르면 벌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행정학이 되고 정치학이 되지 종교는 아니란 말이죠.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을 찌르면 벌 받습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질서차원에서 할 문제지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종교와 신학과 철학에서 어떻게 해야 돼요? “당신이 그렇게 하게 되면 당신이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짓을 하게 되면 당신의 감정은 불안해지고 무서워지고 떨면서 마귀의 꾐에 빠진 게 됩니다.”라고 설명을 해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 일을 안 함으로 말미암아 명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그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착함과 도덕적으로 실천하면서 구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요. 그래서 윌리엄 오컴은 신학자에요. 그것도 훌륭하고 위대한.
정리해봅시다. 윌리엄 오컴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간음하게 되면 이러이러한 벌을 받는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아직 간음을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사람과 간음이 뭔지도 모르고 해본 적도 없는 사람, 네 살 먹은 아이들이 간음을 하면 죄라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네 살 먹은 아이가 살인이 나쁘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제가 일부러 약 올리려고 하는 게 아니고 실제 문제 아닙니까. 그들의 답변은 뭔 줄 알아요? 아까 이야기했는데. 내가 나쁜 짓하면 누가 화내요? 엄마가 화내요. 어린애는 엄마가 화내면 엄마가 맛있는 것도 안 해주고 자기는 아파요. 엄마 감정 속에 아이 감정이 예속돼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나이 들고 친구 만나면 내가 나쁜 짓하면 엄마가 싫어하는 게 아니고 친구들이 싫어해요. 친구들이 싫어하면 학교 못 다녀요. 왕따 당해서. 교회 갔는데 담배 피웠다? 그러면 교인들이 싫어해요. 그 교회 나가야 돼요. 그런데 나이 구십이 되어 죽습니다. 내가 나쁜 짓했다. 누가 싫어해요. 하나님이 싫어해요. 하나님이 싫어하니까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결국은 그동안 하나님은 일방적인 명제였다는 겁니다. 이것을 뛰어넘어야 되겠다는 게 윌리엄 오컴의 생각입니다. 내가 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지였다.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한히 깨어지고 깨어질 겹겹이 환경들 속에 쌓여서 그걸 하나둘 깨가면서 진짜 하나님의 의지로 이만큼 살아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때 비로소 도덕이 나의 감정과 맞닿으면서 말씀에 가깝도록 알게 하도록 하셨구나. 그러니까 윌리엄 오컴을 훌륭한 신학자가 되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간음하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간음 안 한다면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간음하라고 할 리가 없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각이고.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왜냐하면 하나님이라 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깨어지지 않는 그런 범주 내에서 도덕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가 알고 도덕을 넘어서서 그 도덕이라는 것마저 깰 때 무슨 소리할 것이냐? 할 말이 없지 않느냐.
실제로 봅시다. 나는 때려죽여도 거짓말 안 한다고 장담했던 것이 일곱 살 때였는데 만약에 학교에 가서 나의 거짓말로 말미암아 온 반이 상처를 입었다고 할 때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잖아요. 하얗든 노랗든 거짓말 해버렸잖아요. 일단 거짓말을 하고 난 뒤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거짓말도 때에 따라서는 해도 된다는 게 나오지요. 그걸 윌리엄 오컴은 하나님의 의지로 본 거예요. 그럼 그전에 거짓말 한 적도 없을 때는 아직도 하나님의 의지를 모르고 자기가 만든 도덕에 매여 살았단 말입니다. 하여튼 신학자들 말 들으면 다 맞는 이야기이라니까.
늘 하나님 앞에 개방하고 내 뜻을 우기지 말고 주의 그 다음의 조치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어놔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감정과 주님의 도덕이 어떻게 만나느냐? 그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하나님의 선한 성품이 피어난다.
윌리엄 오컴에서 뭐가 빠졌지요? 윌리엄 오컴은 결국 자기 구원이에요. 자기 존재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그 이야기에요. 출발은 인간의 감정이 어떻고, 신이 어떻고 했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신으로부터 구원받느냐, 신으로부터 사랑받느냐는 이 감정을 윌리엄 오컴은 떨쳐버릴 수가 없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성령은 십자가 지신 사건을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겁니다.
우리가 신학자들을 살피면서 항상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바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모든 철학자들이 똑똑한 사람들이 어리석게 볼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사실. 그것을 제가 대구공부에서 할 때 벽치기라 했는데 벽에 차를 몰면 바보짓이에요. 벽인데 박으면 죽잖아요. 십자가는 뚫리지 않는 거예요. 그냥 벽치기에요. 그런데 그걸 뚫고 저쪽으로 간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성령 받아야 될 기적에요.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은 기적이거든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니까 이런 철학자들이 한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한 마귀의 파티에요. 전부 다 자기 존재, 자기 구원, 자기 잘됨을 미리 당겨서 어떤 감정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어떤 희망과 기쁨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자기 욕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주제는 우리의 구원에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주시라는 것, 예수님이 주되기 위해서 만물을 만드셨거든요. 골로새서 1장에. 주님 증거하라고 만든 것이지 우리가 행복하라고 구원받아 천당 가라고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설교하면서 본문 보면서 이러한 윌리엄 오컴이라든지 둔스 스코투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 경과시켜야 돼요. “여러분, 이런 생각 갖고 있지요, 이런 생각 갖고 있지요. 그것 다 아니거든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 우리도 그랬을 주장들을 앞서 있는 사람들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점검해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얼굴 돌릴 때 남는 것은 나의 행복밖에 없고 나 잘난 것, 자기 의밖에 안 나오니 다시 한 번 십자가 영이 역사하사 기적이 무엇인가를, 요나의 기적이 무엇인가를, 구원의 기적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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