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의 교만 140212
두로의 교만 140212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두로의 교만(에스겔 28:1-5)
이근호
14-02-12 21:19
두로의 교만
2014년 2월 12일 본문 말씀: 에스겔 28:1-5
(28: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8: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28:3)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28:4)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28:5)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성경을 대하기 전에 사람들은 평소 생활의식처럼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게 마련입니다. 남이나 남의 나라들이 어떤 식으로 망했는지를 자기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고 여깁니다. 단지 “지금 여기 있는 나가 천국에 어떻게 도달될 수 있는가”에 신경쓰면서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두로왕와 두로라는 국가의 관계나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는 요즈음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신약 요한복음 3:5-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들으면 ‘나’라는 개인이 육으로 살다가 폴짝 뛰어 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면 그것으로 구원이 되는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구약에 나오는 구약 이스라엘의 긴긴 역사는 공연한 세월이 될 뿐입니다. 개인에서 출발해서 개인의 자격으로 구원되는 경우는 애초에 있지도 않는 일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나아가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육은 혈육이라는 가정의 굴레에 둘러싸여 저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면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그 혈육은 국가라는 실체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유지한다고 우겨도 이미 그는 그가 소속된 있는 그 국가의 성질의 일부로서 자리잡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구원은 ‘육에 속한 국가의 일원’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서’의 구원입니다. 이 절차와 과정에 있어 인간은 결코 독자적인 자기만의 고유한 사상이나 정신은 성립되지 않고 반드시 그가 소속된 국가종교의 신도임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한 개인으로 살아가고 성장해가면서 듣고, 보고, 느끼고, 그래서 정리된 모든 가치들은 이미 같이 소속된 주변 사람들을 동일한 사상입니다.
인간은 국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신이 소속된 그 국가를 대변해 줄 성질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구원된다는 것은 자기가 속해 있는 그 국가가 마땅히 저주받고 심판받을 그런 종교단체이고 신앙단체임을 인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시는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속한 개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참된 하나님 나라로 등장된다면 이스라엘 외의 모든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이방나라’가 되고 ‘이방나라다운’ 속성을 보이게끔 하게 하십니다. 예레미야 25:15-18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 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니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방백들로 마시게 하였더니 그들이 멸망과 놀램과 치소와 저주를 당함이 오늘날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이방 나라들이 나쁜 짓을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독주를 마시게 되어서 그들은 자신의 본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술주정을 하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6:19-20에 보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개인의 가치를 극대로 높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되면 결국에는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충실한 신도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개인적인 주체는 없고 모두들 신앙생활을 매일같이 하고 살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라는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종교를 가지든지, 아니면 어떤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소속된 그 나라를 충성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분명함으로 폭로되는 것은 인간들의 평범한 삶이 결국에는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의 자리와 비교되면서 규정받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분명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서 비틀거리는 바벨론 제국에서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같은 바벨론 제국 안에서 상이한 신앙생활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니엘의 세 친구는 ‘진노의 잔’을 받은 후유증이 뭔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3:16-18에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노의 잔을 다같이 받는 제국 안에서 도리어 다른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인물이 따로 발생해서 섞여 사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진노와 심판마저 이겨내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마태복음 11:4-5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와 자비의 위력입니다. 세상 힘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일상적인 생활로서 충분하다고 여긴 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인간들이 예상도 못한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일상생활과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일상이 질적으로 확연히 차이남을 보여주게 됩니다.
즉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일상을 살게 됩니다. 세상사람들이 최종적 가치를 두는 그것마저 성도가 받은 용서와 자비를 능가해서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흘린 피가 하나님 나라를 만들 능력임을 우리가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2-13 23:01
78강-에스겔 28장 1-5(두로의 교만)14021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8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9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8: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체 할찌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와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구약성경을 대하는데 오늘날은 구약시대가 아니고 신약시대입니다. 신약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성급해서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는 쪽에 관심사를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앞에 나가 나오고 뒤에 구원이 나오지요. 개인구원관, 개인구원욕구입니다. 개인구원욕구, 사람들의 평소 마음가짐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성경해석, 교회의 모든 설교도 거기에 맞춘다고 분주하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구약부터 창세기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보게 되면 구약에서 개인구원이란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 만들기에 열중하십니다. 이것은 제가 새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당연한 데 이 당연한 이야기가 오늘날 전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누가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버리면, 그것을 세례요한은 “하나니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는데 국가가 되어버리면 그 국가 안에 개인적인 가치, 명예가 함몰되어 버려요. 녹아져 버리는 겁니다.
마치 죽을 끓기 직전에는 팥도 보이고 대추도 보이고 밤도 보이지만 이것이 불길에 심하게 끓어버리면 이것이 다 풀어져서 죽만 멀겋게 보이고 그 안에는 곡식의 각자의 개성들은 사라지잖아요. 그런 식으로 죽이 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녹아져 버리고 그래서 나만의 개성, 나만의 가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평소에 살아가는 자기의 여망과 다르니까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 겁니다.
만약 어떤 영화관이 있다고 합시다. 들어갈 때도 나 개인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들어가서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를 보면서도 자기 개인의 의식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영화 끝나고 나올 때도 개인적으로 나올 때 우리는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돈 주고 극장에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영화관에 영화 보려고 들어갔는데 들어가지 마자 “차렷, 열중 쉬어! 꿇어앉아.” 이렇게 한다면 개인의 개성이나 가치를 말살시켜 버린다면 아무리 그 영화가 재미있다 할지라도 갈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남자들이 군대를 싫어하는 이유가 개성이 사라지는 거예요. 취직하는 것과 다릅니다. 회사는 자기 맘대로 사표를 내고 나올 수가 있지만 군은 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자기 맘대로 못한다는 것이 개인의 가치에 대한 말살, 이것은 어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내 인생을 그렇게 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지요.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천국은 사람들이 이 세상 살아가는 그 평범한 삶으로서는 도저히 천국에 안 맞다고 보면 됩니다. 맞지가 않는 거예요. 개인이 모아지면 국가가 되니까 그 안에 개인의 개성이나 가치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다른 나라도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경솔한 태도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낸 취지를 정리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육이거든요. 에덴동산, 천국은 하늘나라인데 그것을 영적 나라라고 합니다. 육의 나라에서 영적 나라로 갈 때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영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육적인 내가 살기 좋은 데로 가게 되면 그것이 영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육에서 영으로 도약하면서 무엇을 중간에 깔아놓느냐 하면 국가 이스라엘을 깔아놓았거든요. 이것은 말을 제가 하면서도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참 어려운 말인데, 육의 세계가 밑에 있고 영의 세계가 하늘에 있다면 육에서 영으로 폴짝 뛰어 도약하든지 해서 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 우리의 아이디어고 생각인데 그것이 아니고 육에서 영의 세계로 갈 때에 국가형태로 뭉쳐져서 영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어 있어요. 처음 듣지요? 개인이 국가라는 죽속에 들어가서 완전히 묽어지는 거예요. 개인이 사라지고 국가의 이름으로 영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두로 왕이 “나는 신이다. 나는 하나님 자리에 있고 바다 중심에 앉았다.” 고 했는데 이게 설명이 필요한 게, 두로라는 도시국가는 이스라엘 국가와 대조가 되면서 왕뿐만이 아니고 두로 나라 전체가 왕의 생각과 동일한 생각으로 “우리는 신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 두로 왕뿐만이 아니고 모든 백성들이 동조하고 거기에 협조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품성이란 게 그래요. 개인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개인보다 더 센 것이 국가고 그 국가가 지향하는, 그 국가가 생각하는 분위기에 개인이 저항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 반발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은 홀로 개인이 아니고 국가를 대변하는 하나의 세포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오늘날 각 나라들이 있고 소치에서 동계올림픽도 하고 국가 이름으로 명예를 걸고 이상화는 금메달도 따고 했는데 성경에서 보게 되면 이런 모든 나라는 이방나라에요. 이방나라의 특징이 뭐냐? 이스라엘도 다 같은 나라인데 이방니라라고 할 때는 이방나라라고 단어를 쓰는 취지가 뭐냐, 개인은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어요. 국가가 “이놈!” 하면 개인은 “예” 하고 금방 국가의 권력, 힘 앞에 자기자존심이나 가치라 하는 것은 인정을 받지를 못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육에서 영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나야 영인데 우리는 육과 영만 보게 되면 그 중간에 아무것도 없이 육에서 곧바로 폴짝 뛰면 영의 나라, 성령의 나라에 간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만 요한복음일면 벌써 이미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있는 거예요. 그 역사에 보면 폴짝 뛰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국가대 국가로 정리하는 단계를 거쳐서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사람이 거듭나면 구원받잖아요.”라고 반박하고 싶지요. 거듭나면 구원받는 것은 맞는데 거듭났을 때 개인자격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방나라에 속했다가 하나님나라에 속했다는 하나님의 일원으로서의 거듭남이라는 말이지요. 나 개인이 여기 있는데 거듭난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개인이 여기 있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성령 받고 나니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서 거듭나 있는 거예요. 그러면 개인이 거듭나면 하나님나라 일원이 된다는 그 말이 아니고 이미 자기는 개인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개인이 아니고 이 세상 국가
에 점령당한 개인, 소속된 개인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아닌 척 하면서 자꾸 외면하고 있어요. 복잡하더라도 이것을 설명을 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이렇습니다. 보통 종교 같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학교 졸업해서 직장생활 한다고 합시다. 종교가 뭔지 그런 것도 모르는데 이웃집의 어떤 학생이 나중에 학교 졸업해서 군에 다녀와서 취직해서 결혼하고 평온하게 빌라에 산다고 생각합시다.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이 묻지요. “당신의 종교가 뭡니까? 교회나 아니면 절에, 혹은 성당에 나가십니까?” 이렇게 종교가 뭐냐고 묻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저는 신앙생활 안합니다. 저는 종교 같은 것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고 있지를 않다는 거예요. “나는 종교생활 안 해요. 나는 절이나 교회도 안가고 성당도 안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독자적으로 꾸려나갑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인데 성경은 그 말이 현실을 무시한 잘못된 오해라고 보는 거예요. 그 사람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의 보통 생활은 국가를 종교, 자기가 속한 국가라는 종교인으로서 지금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 안 해도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이 두로라는 도시국가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무슨 종교를 믿는가, 우리는 그것에 관심 없어요.
그들은 보통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이에요. 터어키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와 아프가니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같은 이슬람국가입니다. 인도네시아도 있고 말레이시아도 있거든요. 리비아도 있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있어요. 터어키국민의 93퍼센트가 이슬람이라는 겁니다. 우즈베키스탄도 이슬람국가인데 같은 이슬람국가끼리 비교를 해보게 되면 어떤 경우에는 히잡이라고 해서 여성들이 완전히 뒤집어쓰고 가는 것이 있어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자라는 이유로 운전면허가 안 나와요. 여자가 운전하게 되면 바람피울 가능성이 있다고 신의 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운전을 못하게 했어요.
저는 터어키에 가보지 않았지만 테마여행, 이런 식으로 TV에서 방영하는 것을 보게 되면 여자들이 서양여자들처럼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온 인도네시아 아가씨들 보면 일할 때도 머플러 같은 것 쓰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이슬람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보통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그들이 속한 국가가 이미 신앙의 법률과 제도를 국가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제공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평범한 삶, 종교를 떠나서 일상적인 평범한 삶이 전부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나름대로 그 나라에 속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는가 하면, 이방나라는 이방나라의 종교에 맞는 신앙생활이 평범한 모든 일상에 다 스며있고 촉촉하게 녹아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에서 규정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의 모든 평범한 삶은 개인적인 취향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신앙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그 외 모든 나라를 구분지은 겁니다. 자, 이쯤에서 설교 처음에 한 중요한 것을 다시 말씀드릴게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육에서 영으로 폴짝 뛰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뭔가 거치는 것이 있는데 그 거치는 것이 뭐냐, 개인을 어느 특정 국가에 종속시켜서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어느 국가에 소속했다는 이름으로 대기해 있습니다. 대기하고 있으면서 그 대기된 국가와 그리고 주께서 제시한 이스라엘 국가, 국가대 국가로 비교하는 겁니다. “너 어느 소속이야? 너 어디 백성이야? 하늘나라 백성이야, 아니면 세상 나라 백성이야?”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러한 성경의 질문을 거부하고 “나는 국가보다 내가 우선이고 내가 최고다.”라고 “어떤 국가가 강요하는 것과 관계없이 내 일상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이상화 금메달 딸 때 다 같이 울고 태극기 올라가면 울컥 하지요. 사람들이 무척 오해하는 것이 내가 기독교를 믿든 이슬람을 믿든 부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내가 결정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고 “네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신을 믿는 것은 네가 마음이 그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진노의 잔을 먹고 술에 취하듯이 완전히 정신이 몽롱해졌기에 너는 세상 국가를 신봉하게 되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 예레미야 25장입니다. 예레미야 25장 1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니라.”
진노의 잔에는 뭐가 담겨있는가,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저주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나쁜 짓을 했기에 진노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진노의 독주, 아주 도수가 높은 진노의 잔을 모든 나라에 마시게 함으로서 그들은 진노 받을 짓을 한다는 것이 예레미야 25장의 이야기입니다. 방금 했던 이 이야기를 일반 사람들,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이 듣게 되면 그들은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내 인생은 내가 독자적으로 만들지 국가가 시키는 그대로 수용하는 국가종교의 교인, 국가신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당사자가 막상 직접 국가 권력과 접촉이 되는 순간순간이 오게 되면 국가의 힘에 맥도 못 추고 그냥 왕을 섬기듯이 고개 숙이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가 소속된 국가의 힘에서 자유로울 인간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어요. 사람이 개인적으로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하다 보면 서로 동일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게 되어 있고 그 동일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게 되면 그게 어느새 국가의 이상이 돼요. 그것이 자기가 소속된 국가의 목표가 되고. 내 개인적인 이상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소속되어 있는 나라가 부강할 때만이 내 꿈은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서 국가를 신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성경전체가 이스라엘이냐, 이방나라냐, 둘 중 하나에요.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니라도 아니고 나는 단독으로 지리산에 혼자 삽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지리산에 있는 사람도 투표하러 내려와야 돼요. 이미 우리는 국가의 모든 정책이 온 몸에 스며있다니까요. 우리는 ‘독도는 한국 땅이 아니고 일본 땅’이라고 하는 순간에 우리의 심장은 분노로 차 있다니까요? 왜 그런가? 독도가 일본 땅이든 한국 땅이든 그게 하늘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없는데 독도가 다케시마, 일본 땅이라고 하는 순간에 우리 몸이 한국을 기억해요. 우리는 진노의 잔을 마셨어요. 화가 나는 거예요.
포틀랜드라 해서 아르헨티나 제일 밑에 석유가 많이 나는 섬이 있어요. 그 섬이 아르헨티나의 것이 아니고 영국령이에요. 그런데 석유가 나기 때문에 영국은 그 섬을 포기를 못합니다. 대처수상은 그 섬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해서 아르헨티나를 이겼어요. 그래서 아직도 영국영토로 되어 있고 그 섬의 주민들은 투표하면 영국국민이 되겠다고 합니다. 영국하고 거리가 몇 만 킬로이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국가는 아르헨티나에요. 독도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 섬에서 수만 킬로 떨어져 있는 영국이 아직도 그 섬을 갖고 있어요.
우리 개인이 독자적으로 있지만 개인이 그리워하는 이 모든 관심사, 우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모든 관심사는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국가가 우리한테 이미 스며들게 한 것이 그대로 우리의 욕망과 섞여서 다시 되돌려주는 방법으로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아주 적절하게 살고 있고 적응 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 예를 들어서 이쪽이 남한이 아니고 북한이라고 해 봅시다. 북한이라면 김정은 욕 못합니다. 북한이라면 그저 날마다 우리 김정은 지도자동지의 도움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거부감도 없습니다.
이산가족 만났어요? 금강산에서 만났다 칩시다. “아고, 아재요. 잘 계셨습니까? 건강하십니까?” 남쪽 사람이 아버지, 여보, 삼촌, 숙부님, 하니까 그쪽에서 하는 말이 “다 김정은 동지의 은혜로 이렇게 잘 살았습니다.” 왜 이게 나옵니까? 그것은 종교단체거든요. 그런데 이쪽은 종교단체 아닙니까? 덜 드러났다 뿐이지 이쪽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이나 이 모든 것은 생소한 것이 아니고 이미 외부에 있는 공기처럼 깔려 있는 것이 우리 몸이 반응해서 다 내 것으로 스며든 거예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정말 우리한테는 생소한 겁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더 가까워요. 우리 몸은 대한민국을 좋아하지 하늘나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여자 500미터 스피드스케이트에서 금메달 따면 우리가 좋아할까요? 별로 안 좋아해요.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만 믿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다 믿으니까. 하지만 이상화가 금메달 따면 좋아해요. 왜냐하면 이상화는 대한민국의 아가씨니까.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와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두로 왕, 두로라는 나라자체가 하나의 인물화, 인격화되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네가 신이냐? 네가 하나님이냐?” 하고 따지면서 따지는 그 근거를 다니엘보다 지혜롭다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니엘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면 다니엘은 하나님나라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참 이런 것이 어려워요.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나라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미 다니엘 시대는 이스라엘이 망해버렸어요. 이스라엘이 망하고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재료로 해서 하나님나라가 다니엘 이후에 곧장 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이 오시면서 하늘나라가 시작되거든요.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 오시고 하늘나라가 시작되었어요. 하늘나라가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이스라엘은 정신 못 차리고 이스라엘을 고수하고 있고 이방나라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자기 나라 대한민국, 필리핀, 중국, 이런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틈 사이에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것은 “네가 다니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오늘 본문 에스겔 28장 3절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대시는 겁니다. 다니엘은 어느나라 소속이냐 그 말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나라 소속이지요. 하나님께서 다니엘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거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소위 이스라엘이라는 이방나라, 그리고 이방나라라는 이방나라, 모조리 다 진노의 잔, 하나님의 저주 받아야 하기에 진노의 포도주잔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거리를 담아서 “에라, 마셔라.” 마셨더니 정신이 없어서 취해서 비틀거린다고 했지요. 아까 예레미야 언급했지요.
그렇게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하는 소리가 “우리는 신이다. 우리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다니엘보다 더 지혜롭다.” 하는 망발을 쏟아내게 하시는 거예요. 진노의 잔을 먹게 하셔서. 그럴 때 등장한 인물이 다니엘이라는 말이에요, 다니엘. 다니엘이 개인을 위한 다니엘이 아니고 다니엘은 하나님나라가 분명히 있음을 보여주는 그 당시의 대표자로서의 인자, 그 당시의 선지자의 대표자로 등장한 것이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다니엘이냐 너냐, 우리 보기에는 다니엘과 두로를 일대 일로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배후에 다니엘이 말하고 있는 하늘나라를 대표해서 다니엘, 이쪽은 저주와 진노를 받아야 될 이 세상 모든 나라의 대표자로서 두로 왕, 이래서 일대 일로 붙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두로 왕에 속해서 두로 도시국가 시민으로서 “역시 우리 나라는 복 받아서 잘 산다.”라는 데서 다니엘이 소속되어 있는 그 나라로 진입하는 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현대인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그래서 성경 이야기를 하면 ‘나 개인이 독자적으로 어떻게 거듭나서 천국 가서도 어떻게 나답게 나의 개성을 챙기면서 살 수 있느냐?’ 자꾸 생각들이 그런 쪽으로 넘어가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고 있는데 열 번이라도 하고 싶어요. 개인구원은 없어요. 다니엘은 개인구원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소속이 있어요. 하나님나라 소속입니다. 다니엘의 인생은 뭐냐, 세상 나라들이 왜 저주와 진노의 잔을 마셔서 비틀거리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줘버린 거예요. 특히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보세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보게 되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 소속되어 있는 나라인 바벨론이 법을 정했습니다. “누구든지 금 신상에 절 안하면 죽는다. 풀무불속에 넣는다.” 법으로 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 세 친구들을 바벨론의 무서운 권력이 지배하고 있는 그 속에다 파견근무를 시킨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에게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해서 비틀거리게, 횡설수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소리들, “이 금 신상에 절 안하면 불속에 집어넣어 죽인다.”고 지껄이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다니엘 세 친구가 소속되어 있는 나라와 느부갓네살에 소속된 나라의 차이점을 하나님께서는 사건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네가 진정 절 할래 안 할래?” “절 못한다.” “죽는데도?” “내가 죽어도 절 못한다. 주께서 살려줄 것이다. 살려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절 못한다.” “그래? 그러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지.” “들어갈게.”
그래서 불속에 들어갔잖아요. 불속에 들어가니까 거기에 제 4의 인물, 어떤 분, 하나님의 아들 같은 분이 오셔서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게 바로 다니엘 개인이나 다니엘 세 친구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이미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저쪽에는 진노의 잔을 마시지만 이쪽은 구원의 잔을 마신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 죄용서의 잔을 마셨기 때문에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소속된 하늘나라와 이방나라의 마주침을 비교해야 되는 겁니다.
이방나라는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 빼놓고 이방나라가 아니고 그 당시는 이스라엘도 이미 망했으니 이방나라고 진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고 이스라엘마저 눌러버리고 이스라엘마저 지배하고 있는 그 안에서 비로소 진짜 이스라엘 언약의 나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법과 진노의 잔을 능가해서 무서운 심판과 진노마저 극복한 용서의 효과를 보여주는 새로운 나라가 등장하는 겁니다.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소경이 눈을 뜨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새로운 나라.
세례요한이 예수님보고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할 때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이것은 기존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겼던 그것을 뚫고 올라오는 죄 용서함의 놀라운 능력, 부활의 능력이에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다 같이 신앙생활 하는데 그게 바로 하늘나라 신앙생활이고 나머지는 뭐냐, 마귀에게 속한 것, ‘국가가 나의 사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이 악마적인 횡설수설, 진노의 잔을 마셔서 비틀거리고 술 취해서 무슨 소리하는지도 모르는 그 본성대로 갈 수밖에 없는 악마의 세계에서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죽어도 괜찮아, 그런 뜻이거든요. 또는 “네가 살아 있어도 지금 죽었다고 생각해. 왜 그런가? 네 할 일은 죽었다가 사는 것이 네 할 일이 아니고 죽음보다 더 센 힘이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하늘나라인 것을 증거 하라.” 하고 이 땅에 이방나라인 이 땅에 아직도 우리가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그대로 남겨두는 이유는 바로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서 남겨둔다. 하지만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내게, 내 나라에 속했다.”
불속의 네 번째 사나이에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이미 우리는 소속되어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사는 거예요. 그냥 살면 되는 거예요. 신앙생활 한다는 이것이 악마의 노림수입니다. 따로 신앙생활 한다는 것,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 절에 가십니까, 성당에 나가십니까?” 그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늘 용서받고 그 용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개인구원은 없고 하늘나라에 소속되어서 이 세상에 왜 눈에 보이는 세상만 찬양하고 굴복하는지, 그 내막을 증거하고 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