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 신학 140211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 신학 140211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한윤범(IP:14.♡.134.60)
14-02-14 11:46
20140211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0-스코투스, 오캄
(강의:이근호 목사)
둔스 스코투스와 그 다음 뒤에 나오는 윌리엄 오컴이라는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둘 다 영국 사람인데 이 당시의 사상을 배운다는 것은 요새 한국에서 뜨는 강신주라든지, 진중권이라든지 사회에 이슈를 제공하고 새로운 사상을 될만한 유행되는 그런 쪽의 분위기를 이런 사람들이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고리타분한 것에서 벗어나고 뭔가 세상을 읽는 새로운 사상이 없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식이 아닌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획기적인, 참신한 그런 사상이 없을까? 했을 때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컴이 등장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이 시대를 지났기 때문에 참신하다는 걸 못 느끼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13,4세기인데 그 당시 사회분위기가 효용가치 위주로 사회가 재편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상인계급이 무역을 해서 갑자기 돈을 많이 벌게 되면서 상인계급이 뜨면서 몰락하는 계급이 있었어요. 기사계급, 하급귀족. 봉건사회에서 하급귀족은 자기 땅이 없는 거예요. 권력 있는 양반이 아니고 시시한 양반, 그런 사람들이 서서히 주저앉는데 그들 가운데 신부들이 있어요. 신부들도 부익부빈익빈이 굉장히 심했어요. 권력과 결탁된 신부들은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었고 귀족출신이 신부 되면 여전히 그 권력이 유지되고, 가난한 사람이 신부되면 평생 어디 발도 못 붙이고 가난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몰락하고 상인들이 돈을 벎으로써 사람이 사는 가치가 하나님의 영광과 특히 명상이 아니고 이윤이다. 벌써 이 시대에 명상하는 것은 칩거하면서 신의 음성, 신의 계시, 신의 순수함을 나의 순수함으로 바꾸는 것에 인간이 사는 의미, 존재에 의미가 있다고 하잖아요. 인간이 사는 의미는 그게 아니고 얼마나 많은 돈을 모으느냐가 인간의 가치에요. 보석이나 이런 것. 내가 가진 소유가 얼마나 늘었느냐에 효용가치를 따지는 시대로 변하고 말았어요.
이 그림을 보게 되면 제가 말하는 게 뭔 뜻인지 아실 거예요. 신이 있고 밑에 땅이 있으면 중간에 인간이 있고, 인간은 계급으로 돼있어요. 신에 가까운 사람은 명상을 많이 한 사람, 신에서 멀어진 사람은 개, 돼지처럼 먹는 것, 입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 이런 것이 정립이 돼있는데 이것이 흔들리지요. 사다리가 흔들리면 중간이 배불러져서 터져버리죠. 그러니까 이쪽은 높다, 이쪽은 낮다. 높낮이가 있던 것이 배불러지게 되면 주저앉게 되지요. 얼마나 많이 갖느냐, 얼마나 효용가치가 많으냐, 아니면 얼마나 공평하냐에 따라 수평적으로 양이 인간이 사는 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그림 하나로 바뀐 변화에 대해서 아시겠지요. 수직적으로 신도 아니고. 이게 터져야 되는데 빵꾸나야 벌어지거든요. 사람들은 이런 시대, 신과 인간 사이에 성화와 거룩의 수위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결정돼있고, 고정돼있다고 여겼던 시대에는 신으로 인한 모든 의미가 사다리 계급에 다 녹아져 있겠지요. 다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특히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하게 되면 이 계단에 온 거예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 할 수 있어요. 돈 벌 수 있어요. 하지만 같이 따라오는 게 뭐냐 하면, 신에 대한 확고한 진리성에 의하면 돈 버는 것은 개다. 사람으로 할 짓이 아니다. 이윤을 본다는 것이 뭐냐 하면, 시간은 하나님께 속하는데 하나님께 속한 시간에 어떻게 돈벌이할 생각을 다 하느냐 말이죠. 시간 지났으니까 이자 달라. 시간이 누구 것인데 이자 달라고 합니까? 하나님 것인데 자기가 왜 받아쳐먹어요.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지금은 당연하지만 옛날 신학의 기준으로 생각해보세요.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의 기준으로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것인데 내가 그 사람한테 백만 원 빌렸다. 분명히 백만 원 빌렸기 때문에 백만 원 갚으면 되는 거예요. 전부 다 하나님의 시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뭐가 이상하냐 하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백만 원 가치가 백이십만 원 됐다고 한 20% 더 있다는 생각 자체가 확정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는 성립 안 되는 겁니다.
작년에 복음 알았는데 올해 복음 알았다. 복음의 가치가 더 증가한 거예요? 그때는 십자가 아니었습니까? 올해만 십자가에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작년에 십자가 알았으니까 헌금을 만원 했는데 올해는 더 알았으니까 만이천 원 하는 겁니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묵시적 사건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지 않습니까. 그게 보수적 신학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우리는 살 뿐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시간 따라 돈 번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불경한, 아주 거룩하지 못한 오만하기 짝이 없는. 돈도 왜 지한테 내느냐 말이죠. 자기가 시간을 주관하는 것도 아닌데.
제가 이런 강의하면서 늘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그때 그 당시의 사람들이 우리 보기에는 우습지만 그때는 진리였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진리가 아니고 그것은 다 구닥다리고 요즘이 진리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진리라고 알아서 진리가 아니고 우리를 그렇게 만든 사회적분위기 환경에 대해서 우리는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닌지를 생각해야 돼요.
군에 가기 전에는 사람들이 다 점잖아요. 친구가 6개월 먼저 군에 가서 조교가 되고 난 뒤에는 나중에 온 친구한테 박세게 굴었단 말이죠. 도대체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갑자기 친구가 아니고 상관됐단 말이죠. 그리고 제대하고 난 뒤에는 그때는 미안했다. 누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느냐 말이죠.
진리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결국은 어느 환경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진리가 그때그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리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어요. 내가 진리라고 한 것은 내가 배부른 상태에서 진리냐? 아니면 배고플 때도 진리냐? 그걸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이 말이죠.
좀 더 어려운 것 해봅시다. 그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 진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산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세 모든 계급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기 때문에 이 섭리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모든 세속을 버리고 명상에 잠겨서 신의 성품을 닮는 것, 이 가치를 절대로 건드리면 안 돼요.
그런데 뭔가 빵꾸가 났지요? 그때 우리가 궁금한 게 뭐냐? 분명히 하나님은 모든 계급에 일상에 녹아있다고 했는데 펑크는 왜 났느냐? 펑크가 나서 돈 많은 상인들이 새로운 신흥계급으로 등장했을 때 그 당시 녹아져 있던 신의 모든 뜻과 계시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지 않겠어요?
맹장 수술할 때 맹장이 안 터져야 되는데 터져버렸다. 그러면 의사가 무엇을 수습해야 됩니까? 터진 맹장을 처리해야 되고 꿰매야 되고 수습해야 되겠지요. 맹장과 다른 장기들과 하나로 연결돼있단 말이죠. 신의 뜻이 다른 것과 연결돼있는데 도중에 터져버렸으니까 신의 뜻부터 처리가 돼야 되겠지요. 여기서 새로운 신학이 나와야 되겠지요.
그 새로운 신학은 뭘 용납하는 거예요? 새로운 신학은 세속에는 관여하면 안 되지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새로운 신학이 관여를 하게 되면 돈 버는 게 나쁜 짓이 되는데. 돈 버는 세대 자체가 효용가치에요. 효용가치를 긍정하려면 신은 왔다가 도로 신의 자리고 가고, 이쪽은 될 수 있는 대로 간섭을 안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교단에서 목사 안수 받고 난 뒤에 교인 두세 명 놓고 개척 교회할 때는 시찰회에서 보조금 받습니다. 그때는 누구 눈치 봐야 돼요? 노회 눈치를 봐야 되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 목사가 설교 잘한다고 소문나서 오백 명이 되었다. 보통 교회에서 6개월 후에 학습, 또 6개월 돼야 세례 주는데 그 목사가 계속해서 사람을 키우다보니까 6개월 기다리는 게 짜증난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 한 달도 안 지나서 세례를 막 줄 때 노회에서 “우리 노회법에 1년 지나야 세례를 줘야 되는데 네가 뭔데 한 달도 안 됐는데 왜 주느냐?” 할 때 그 목사가, “내 교회 내 마음대로 인데 네가 왜?” 했단 말이죠. 이 예가 적절하네.
그러면 이게 터져버린 거죠. 힘이 세니까. 그러면 노회에서 나가라는 소리를 못해요. 상회비가 다른 교회보다 많으니까. 이게 사랑의교회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이 어떻게 해야 되지요? 성령이 역사해서 예수 믿게 되면 세례는 하나의 형식, 구비서류에 불과하니까 1년 지나서 세례 주라는 것도 성경에 없잖아. 그러니까 목사 봐서 믿음 있다면 1개월이라도 세례 줘도 된다. 이렇게 새로운 법으로 신학이 바뀌게 된다 말이지요. 그럼 그 시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컴이. 그들의 뭐라고 주장했는지는 조금 있다 이야기하고.
어쨌든 분위기가 실용가치에요. 그리고 명상이라든지 신학을 한다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돼. 이것은 실용가치가 떨어져요.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게 되면 그것도 하나님의 축복이고 돈 벌고 힘 센 쪽이 새로운 신흥귀족으로 부르주아로 등장하는 입장에서 그런 사람들을 교회가 내치면 실리가 없는 거예요. 그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전에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철회를 하는데 그게 철회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자연적으로 사람들이 콧방귀 뀌면 신학이 펑크나는 겁니다. 신은 신대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모든 효용가치도 인정하는, 긍정이 되는 새로운 신학을 기다리게 되지요.
우리가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컴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만 보거든요. 종교개혁은 그렇게 성사되는 게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 욕망을 그전에는 죄라고 규정됐던 것이 지금은 정당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될 때만 대중들이 새로운 종교개혁에 대해서 호응을 하게 돼있어요. 종교개혁이라는 게 긍정적인 하나님의 뜻, 계시 아닙니다. 종교개혁이 만약에 진짜 하나님의 개혁이라면 종교개혁도 사도행전 29장, 30장으로 붙여야 돼요. 성경에 더 보태야 됩니다. 사도행전은 28장밖에 없거든요. 29장, 30장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5장 없거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그 시대의 분위기가 다시 재정립하게 돼있어요. 따라서 지금 남들 다 진리라고 하니까 같이 진리라고 동의한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진리일 턱이 없습니다. 절대 진리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그 일에 대해서 인정받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둔스 스코투스라는 사람이 무슨 소리를 했기에 그렇게 새로운 사상이라고 환영을 받았는가? 새롭다는 것, 새로운 사상이 있다는 것은 기존과 반대되는 사상을 이야기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게 논리에 있어서 헤겔의 정반합이라는 겁니다. 기존에 진리라고 정의돼있으면 반드시 반이 나오게 돼있고 정반합이 모아져서가 아닙니다. 정도 부정되고 부정도 부정되어 새로운 합이라는 게 나온다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정과 반이 합해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것은 헤겔의 주장이 아니고 칼 포퍼의 주장입니다. 칼 포퍼는 인류문명의 발달은 항상 시행착오를 통해서 점검해서 뭐가 문제며 뭐가 모자라며 뭘 고쳐야 되는지를 알아서 보태게 되면 전보다 더 발전된 진리에 접근된 새로운 진리관이 정립된다. 이것이 과학의 발달과정이라고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날 공장의 모든 현장에서 품질관리라는 이름으로 실시되고 있는 거예요. 품질관리가 뭡니까? 공장 다니는 사람은 알아요. 도표가 있어요. 목표를 정해놓고 해보고 안 되면 수정해서 다시 새로운 목표로 들어가고. 심지어 여공들까지 품질관리 교육 다 시켜요. 그것은 합리적인 발전 방법
헤겔은 그게 아니고 모든 게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림자까지 수용이 되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할 때 그것이 합이 되는 거예요. “나에게 이런 어두움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수용하는 거예요. 헤겔의 이야기를 더 해보면, 사람이 있으면 반, 부정은 어디서 나오는가? 성육신에서 나와요. 인간은 높아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낮아졌지요. 여기서 인간은 아무리 뭘 해도 신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방향 맞춰서 낮아지니까 어떤 일을 해도 반드시 내가 전보다 이 일로 인하여 높아지고 더 가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그런 소리할 때 뭘 놓치느냐 하면, 오히려 하나님은 낮아진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는 거예요.
그 놓치게 된 것을 아는 순간이 왔을 때 합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짓거리가 하나님이 낮추는 것과 반대되는구나. 그래서 나는 결코 신이 아니구나. 나는 문제 있구나.”라고 할 때 합이 되는 거예요. 그럴 때 또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그걸 깨달은 만큼 우수한 존재가 되겠지요. 그게 바로 정이 되는 거예요. 발전하는 게 아니고. 절대로 오해하면 안 돼요. 발전개념은 헬라철학에서 나왔고 헤겔은 성육신을 기준으로, 신이 인간이 됐다는 걸 기준으로 하는 거예요.
헤겔의 문제점은 성육신에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중심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철학이 그렇습니다만, 인간이 약하다는 것은 강한 분이 있다는 것이고, 강한 분은 신이고, 인간은 유한하지만 신은 무한하지요. 그래서 모든 철학과 과학은 무한과 유한, 유한과 무한의 구조를 만드는 거예요. 틀을 잡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지요.
둔스 스코투스 앞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는데 그는 도미니크 학파에요.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컴은 프란치스코 학파에요. 둘이 달라요. 도미니크 학파의 특징은 한 마디로 세상의 모두는 비유 또는 유비다. 세상의 모든 것은 허상이고 허깨비다. 얼른 그림자라고 보면 돼요. 따라서 신의 조명, 신의 계시를 받아야 진리에 이른다.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봅시다. 신이 있고 제일 밑바닥에 개 같이 살아가는 유대인들, 백정들, 그냥 동물수준, 농노들. 아침에 일어나서 농사짓고, 밥 먹고, 의미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문자도 모르고 글도 모르고 무식하고 육신이 당기는 대로 애 낳고 술 먹고 싶으면 술 퍼먹고. 어떻게 살지 모르는 자들을 밑바닥에 놓고 그 위에 착함 또는 고상함, 경건함, 교양, 양심의 서열에 따라서 줄줄이 수능 점수처럼 서열이 매겨져요.
그리고 제일 위가 무엇이겠습니까? 너무나 세속적이고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욕정, 욕구, 충동으로 사는 사람이 밑바닥이라면 이 사람들은 밥도 조금만 먹고, 잠도 거의 자지 않고 명상, 타인에 대한 희생과 봉사, 있는 것 다 내놓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 그게 바로 신에 거룩함과 착함과 고상함, 밥까지 퍼주는 이것으로 완전히 체계가 잡혀있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유비고 비유고 하나의 그림자인데 명상에 있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아래쪽 사람들보다 보다 많이 확보한 사람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이 사람은 이 땅에서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기존에 보수적인 신학입니다. 그리고 그 훌륭한 사람을 만나려면 성당에 가면 돼요. 성당에 유니폼 입은 사람들 있지요. 관 쓰고. 교황 보세요. 어떤 의식을 치를 때 뾰족한 관 쓰고 긴 가운 입고 있지요. 그게 보통 무게가 아니거든요. 무게가 많이 나가요. 나니아연대기나 반지의 제왕이라든지 해리포터 아닙니까. 이 시대의 구약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금 나타나면 가운 입고 후드 걸치고 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왜 천주교가 오늘날 그걸 하느냐 하면, 그런 것은 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그냥 상징이라니까. 교황이 나는 거룩하다고 하는 그런 교황은 별로 없어요. 옛날에 독재라면 몰라도 요새는 없다고. 굉장히 사상도 자유분방하고. 김수환 추기경도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김수희의 애모잖아요. 그걸 왜 이야기합니까? 사상이 그렇게 고리타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젊은 사람도 포용한다는 겁니다. 그러다 뭘 할 때는 거창하지요. 슬리퍼 신고 난닝구차림은 아니잖아요.
아랫사람, 신의 고상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훈도하고 인도하는 목자적인 기능 때문에 상징성을 걸쳐야 된다는 것, 어차피 상징이니까. 그래서 그 당시에도 과학자도 있었고 재산가, 돈 많은 사람도, 귀족들, 왕도 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이 있는 그 당시 교회나 주교급들은 절대로 자존심을 포기한 적 없어요. 실체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신부들이고.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 보기에 최고지 돈 좀 있고, 권력 있고, 칼싸움 잘한다고 촐삭거리는 자들은 수준이 낮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배가 터져버렸단 말이죠. 여기에 따라서 신학도 바뀔 필요가 있지요. 윌리엄 오컴 같은 사람은 전쟁할 때 왕 편에 섰다고 쫓겨났는지 그럴 거예요. 이제 관건은 신학을 어떻게 바꾸느냐 입니다. 이발사가 있고 신부가 있습니다. 누가 더 신의 모습을 닮았느냐는 거죠. 둔스 스코투스에 오면 이걸 끊어버리는 거예요. 신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신의 계시에 의해서 진리를 안다?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하는 일에서 그 안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둔스 스코투스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잖아요. 캘빈의 소명론이 뭐예요? 꼭 목사만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니고 각자 자기 일이 하나님 소명을 받은 일이라 할 거란 말이죠. 개신교 분위기에선 진리인데. 그러나 개신교는 15세기나 돼야 되고 13,4세기 분위기에서는 엄청나게 새로운 참신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둔스 스코투스가 굉장히 유명하게 된 거예요.
뭘 끊는다 했습니까? 신의 조명과 신의 계시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아야 진리를 아는 게 아니고 네가 하는 일도 하나님이 주신 일이 되는 거예요. 명상을 하려면 하나님을 봐야 되지만 둔스 스코투스는 관찰하고 탐색하고 연구하란 말이죠. 하나님의 뜻이 거기서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둔스 스코투스의 이론은, 그 당시 농민들이 너무 압제를 받아서 농민반란이 일어났어요. 여러 군데에서. 농민들이 신부들이 명상한다니까 우리도 명상한다고 했거든요. 분위기 자체가 이미 신부보다 아래쪽에 있다는 것을 수평적으로 바꾸자는 혁명적인 분위기가 각처에서 형성되기 시작했어요. 물론 도시에서는 상인들, 돈 많은 부르주아들이 이미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성경에 정통한 사람, 뭔가 신학자 쪽에서 부르주아 말이 맞는다고 맞짱구 쳐주고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정립이 안 된 시대지요. 그때 둔스 스코투스가 나타난 거예요.
둔스 스코투스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보편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개별적이다. 아비센나라는 이슬람 쪽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의 이론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용했는데 아비센나의 이론이 뭐냐 하면, 사물 전, 사물 속, 사물 후라고 이야기했어요. 세상의 모든 사물 다른 말로 사실, 사실은 사건과 관련돼있고, 사물은 물체. 어쨌든 간에 전, 속, 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한 겁니다.
이걸 토마스 아퀴나스가 동의를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 사물 전에 하나님이 계시다. 맞지요. 하나님이 먼저 있고 사물이 생성 되잖아요. 사물을 볼 때 물체 이전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사물 속은 사물과 함께 있는 것, 이걸 세상으로 본 거고. 맞잖아요. 하여튼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해보면 하는 이야기가 다 맞아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온 학자가 반박한 그것도 맞아요. 그리고 그 다음에 학자가 반박한 그것을 반박한 것도 맞아요.
사물 후는 뭐냐? 하나님이 계시고, 천지를 만드시고 세상이 있고 끝인데 사물 후라는 게 왜 있느냐? 인간 속에 있는 오성, 깨달음이에요. 그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말은 하나님이 먼저 있고 하나님께서 나중에 깨닫게 해주실 때 비로소 진리를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둔스 스코투스가 사물 전과 사물 후를 지워버렸어요. 그러면 세상만 남지요. 세상에서부터 출발하게 되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도 세상이 만들어내지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걸 누가 이야기해요? 바로 세상 사람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있어야 그 다음에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걸 형태주의라고 하는데 둔스 스코투스를 형태주의자라고 해요. 윌리엄 오컴을 유명론자라 하고.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간다. 개별자지요. 그 사람이 길을 간다고 할 때 한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고 할 때 같은 사람이란 말을 썼지만 이건 한 사람이 아니고 보편 개념입니다. 개별이 아니고 보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같은 사람인데 같이 쓸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는 보편의 내용을 갖고 있고, 하나는 개별의 사람이기 때문에 단어를 같이 써도 같지 않다는 거지요. 글자를 ‘ㅅ+ㅏ’한다고 같은 말이 아니란 거죠. 같은 말이 아니라면 어느 쪽이 더 근본이 돼야 되겠지요.
모든 사람이 근본이고 그 중에 하나가 개별자라고 본 것은 둔스 스코투스 이전의 신학이고,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컴은 한 사람이 먼저 있고 똑같은 사람이 모여서 전체를 하나의 사람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로스 칼리누스도 그전에 이야기했지만 본격적으로 한 것은 둔스 스코투스에요.
방금 이 논리와 농민들 반란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전에 농사지을 때는 성당에서 종 치면 모여서 예배를 드렸잖아요. 지금 무역하고 장사하기 바쁜데 예배 참석을 못한다고요. 그러면 누가 잔소리해요? 그 당시 신부들이 하나님 영광 안 돌리고 돼지 같이 돈만 번다고 나무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삐져서 헌금을 안 한다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을 포용을 하면서 신학적인 뒷받침이 돼야 되는데 그 뒷받침이 보편자가 먼저 있는 게 아니고 개별자가 먼저 있다는 거예요.
신이 존재한다는 그 진리는 인간인 내가 여기 있는 것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거예요. 아까 사물 전, 사물 속, 사물 후라고 아비센나, 토마스 아퀴나스 이야기하니까 우리는 고개 끄덕이며 맞는다고 하다가 둔스 스코투스가 비판하고 들어오니까 이게 더 맞는 말 같지 않습니까.
실제 목회 세계에 들어가면, 어떤 부자가 갑자기 하나님을 믿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어떤 교단인지 묻지도 않고 십자가 보이니까 가까운 교회 새벽기도에 나왔습니다. 돈은 많은데 완전 초짜에요.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이 없이 살아온 것을 생각해보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그 시점에 그 사람에 대해서 목사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오게 된 것은 당신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뜻입니다.”라고 할 때 그 말이 틀려요, 맞아요? 맞잖아요. 하나님, 보편적인 게 먼저라니까요. 사람이 구원받는 건 나중이고.
그런데 부자가 와서 봉사도 하고 설교도 듣고 자기 나름대로 성경도 보고 하더니만 그 다음부터 교회에서 자기가 헌금도 제일 많이 하고 봉사도 제일 많이 하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믿음 없어 보이고 자기는 믿어 보인단 말이죠.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목사도 자기 똘마니처럼 갖고 노는 거예요. 사사기의 미가처럼. 그래서 나중에는 장로까지 됐고 교회를 좌지우지했을 때 그 사람은 보편자에서 개별자로 바꾼 거예요. 내가 하는 짓을 옳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둔스 스코투스나 윌리엄 오컴은 그걸 간파한 겁니다. 하나님, 진리, 십자가, 언약, 교회 등 온갖 고상한 이야기를 다 해도 그 밑바닥에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 깔려있다. 나머지는 명목상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아. 그것 안 했다고 진리 아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하라고 하면 살인해야 돼.” 이렇게 이야기해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들으면 기가 막힐 노릇이에요.
하나님의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계명으로만 나타나는 거지요. 그게 성경 아닙니까.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계명을 갖고 인간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되겠지요. 맞잖아요. 그런데 이게 아까 보편원리에 의해서 이 세상은 하나의 그림자고 망상이며 진짜 절대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란 말이죠. 그게 사물 전, 사물 속, 사물 후 이론잖아요.
그런데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컴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지켰다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지킨 게 아니고 네가 스스로 법을 지켰다고 우기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께서 탐내라는 지시에 너는 따를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자신이 탐내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에게 탐내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까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 당시의 법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채찍 들고 성전에서 난리를 쳤지요.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성만찬할 때 이 떡은 하나님의 몸이요, 이 잔은 하나님께서 흘린 피라고 다들 알고 있는데 “성만찬 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고 휘저을 수 있는 이것도 신의 지시인 것은 네가 믿을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둔스 스코투스에요. 윌리엄 오컴입니다. 얼마나 도발적이고 대담한 발상입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아니다. 왜 아니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다른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자기 존재를 절대화시키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힘 있는 쪽이 진리가 되고 힘이 없는 쪽은 아무리 진리라도 진리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 당시 힘 있는 쪽이 성당, 교회지요. 힘없는 쪽은 농민들이잖아요. 농민들이 아무리 양심적으로 해도 신부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돼버려요. 그러나 세상이 효용가치 분위기로 바뀌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신학도 바뀔 수밖에 없는 그런 지경이 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것 지켰습니다, 이것 안 지켰습니다. 이게 아니고 “지금 내가 난 된 것은 하나님의 의지였습니다. 뜻이었습니다.” 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거죠. 이걸 둔스 스코투스의 의지주의에요. 인간이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움직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둔스 스코투스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반박하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신이 존재한다. 이 말이 맞느냐고 따져요. 신이 존재한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존재의 개념은 틀리다는 쪽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같은 말을 썼는데 틀리게 된다면, 신의 존재하는 말 자체도 못 알아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계명과 신의 조명과 성령이 임해야 알아본다고 했거든요. 이렇게 신을 증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둔스 스코투스의 이야기입니다.
존재가 동일하게 끄집어내야 된다는 거예요. 끄집어내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보어란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는 뜻이 불완전할 경우, 그 서술어의 설명이 부족함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109쪽)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런 뜻이에요. [예를 들면 ‘물이 얼음이 되고’라든지, 혹은 ‘그는 천재가 아니다’에서 ‘얼음이’나 ‘천재가’라는 단어는 ‘된다’, ‘아니다’라는 서술어의 보어가 된다.]
물이 얼음이 되고, 그는 천재가 된다. 또는 아니라고 할 때 중간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물이라는 존재가 얼음이 되고, 존재를 여기다 집어넣어야 돼요. 존재가 우선이고 물, 얼음이라는 단어는 존재를 설명해주는 보어적인 역할을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게 아니라 계신 것 중에서 한분이 하나님이 된다는 겁니다. 존재의 계심 중에서 최고의 계심이 하나님이다. 이렇게 다가가게 되면 지상에서 인간이 사용하는 존재나, 하나님의 사용하는 존재가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신의 계시나 신의 조명이 필요 없이 우리가 쓰는 모든 것 속에서도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직관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은. 새로운 조명을 받으려면 우리는 명상에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일반 생활을 하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신부가 갖고 있는 특권은 하나의 권력으로 행사할 수 없는 신에 대한 새로운 분위기가 유행되기 시작하고 이슈를 낳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4-02-14 11:48
201402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0-스코투스, 오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윌리엄 오컴에 대해서. 윌리엄 오컴은 신학이나 철학을 전공한 사람한테는 굉장히 인기가 좋습니다. 이 사람 사상은 사실은 둔스 스코투스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80인의 신학자들에 보면 나와 있어요. 112페이지에 보면. 그건 뭐냐 하면, 윌리엄 오컴이 볼 때는 둔스 스코투스는 아직도 초월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를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학하는 우리와 설교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아주 쉽게 말씀드릴게요.
심리적이라는 말을 했는데 하나님이고 예수고 이런 게 보통 사람들은 중요하게 여겨져요. 죽어서 어디 가는지 모르니까 신의 나라에 우선 가야 보험 하나 들어놓은 것처럼 안심이 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인생을 살아보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우리한테 와 닿는 게 아니고 재미나다 또는 즐겁다. 쾌락적이다 또는 슬프다, 외롭다 특히 무섭다. 무슨 요소입니까? 심리적인 요소, 감정적인 요소가 우리를 지배하지요.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애가 갑자기 아프다고 하면 설교 듣다가 몰래 책 들고 집에 가야 되겠지요. 집에 가서 예배드립니까? 다친 애를 데리고 빨리 병원에 가야 되잖아요. 그때 그 감정이 얼른 모든 걸 잊어버리고 정신도 못 차리면서 예배도 못 드리고 집으로 가는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이겠어요? 무섭다, 두렵다, 겁난다, 그리고 불확실성, 이런 것들이 작용하잖아요. 그러면 예배시간에 목사들이 다뤘던 신이 어떠니. 천국이 어떠니, 성령이 어떠니, 예수님이 어떠니 하는 그런 것들은 아무 쓸데없는 장식처럼 다 날아가 버리지요. 실제로 인간은 심리적 존재, 감정의 존재에요.
그렇다면 오컴이 볼 때 신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인간은 이미 심리적으로 자기감정에 휘둘리게 돼있어요. 나중에 자기감정이 더 깊이 나가면 욕구, 욕망이라고 현대철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그때까지는 욕구, 욕망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는 안 해요. 쿠자누스나 신비주의에서는 무의식도 이야기했지만 오컴은 그것까지는 이야기 안 했는데 어쨌든 간에 인간은 감정적인 요소에 휘둘리게 돼있는데 이 감정적인 요소가 도덕과 만나면서 여기서 하나님이 나오는 거죠.
그러면 도덕이 먼저입니까, 감정이 먼저입니까? 여기서 윌리엄 오컴은 인간의 오성과 의지가 만나면서 인간의 의지는 지시하고 명령한다는 겁니다. 둔스 스코투스에서는 신의 의지가 있었지요. 윌리엄 오컴은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로 나타나면 인간의 의지는 자기 도덕적인 의식으로 갖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의 도덕이 신이 되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보면 그전까지는 신을 하늘에 뒀잖아요. 윌리엄 오컴에 와서는 나의 의지가 신의 의지로 얼마든지 작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까 둔스 스코투스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뜻이고 하나님의 의지로 된 거지요. 윌리엄 오컴은, 그럼 나의 의지는 신의 의지가 아닌가요? 말을 계속 이어보자면, 신의 뜻에 의해서 내가 있고 내가 두렵고 떨리고 기쁘고 즐겁고 한다면 이것도 결국 신의 의지에 포함된다.
포함된다면 성경에 나오는 도덕적이고 신의 뜻이라는 것은 결국 신의 의지에서 더 나아가서 나의 의지로 설명이 가능한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의 감정과 인간이 갖고 있는 도덕, 도덕과 감정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율법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철학자들의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요. 성경에 관한 이야기는 통째로 다 날아가 버렸어요. 성경 자체 안에 신의 도덕이 있다고 보고, 신의 도덕에 대해서 신은 자기 의지로써 실현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 속에 있고 교회에서 한다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인간의 감정, 예를 들어서 무섭다, 즐겁다고 할 때 그냥 도덕 없이 무조건 즐겁다, 기쁘다고 하면 인간이 개나 소와 다를 바 없잖아요. 인간이 개와 소와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이 뭔가 내가 생각했던 나의 도덕에 부합할 때 나는 기쁘고 즐겁단 말이지요. 점심 한 턱 낼 때 얼마나 기쁜지 아시지요? 기쁜 거예요. 그것이 나의 의지로 됐다는 것이 더욱 더 기쁘지요.
교회에 청년이 하나 왔다. 교회가 섞었느니, 기존교회에 문제가 있다느니 하면서 자기는 바른 교회에 왔단 말이지요. 그 청년의 생활을 관찰해보세요. 그 청년은 진정 신을 좋아할까요, 하나님을 좋아하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를 좋아해요? 가만히 보면 누구를 합리화시키고 누구를 빛내게 만드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아름답고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얻고 어떤 훈련을 받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온 경향성이 많은 거예요.
방금 제가 예를 들 때 젊은이라 했지요. 그렇다면 대구공부한 걸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제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똑같은 질문을 여러분한테 하겠습니다. 네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걸 네 살 먹은 아이한테 이야기했을 때 그 아이의 느낌이 어떨까요? 문제가 너무 어렵지요. 그럼 지금 암 걸려서 오락가락하는 구십 넘은 할아버지한테 그 이야기를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 평생 동안 세상을 무서워하며 살았는데 이 시점에 내가 더 이상 뭘 무서워하리요. 그저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할 자를 무서워하고 그분을 믿어야지.” 그럴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럼 네 살 먹은 아이는 도대체 두려워한다는 게 뭔지 몰라. 보호를 받기 때문에. 두려워하려면 부모 없을 때, 밤중에 혼자 있을 때 두려워하잖아요. 그 아이는 엄마만 있으면 마태복음 10장 말씀이 없어도 되는 거예요. 참 중요한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아이한테는 엄마만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부모가 돌아가시니까 그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지만. 만약에 엄마가 계속 살아있다면 자기는 계속해서 어린아이로 성장이 멈추는 거예요. 그게 양철북 아닙니까.
제가 광주 김을수 집사한테 엿을 한 박스 받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엿이 끊어져있던 것이 며칠 지나지 않아서 한 덩어리로 붙어버렸어요. 그래서 망치로 깨거든요. 이게 산소가 들어가면 개봉하면 한 덩어리 돼버려요. 어린아이한테 엄마와 아빠가 있다면 이때는 하나님도 필요 없어요. 만족해요. 부모가 하나님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 척하는데 성인이 되어 개봉하니까 마태복음 10장 28절 말씀을 하려면 진짜 이 몸이라는 것은 아무도 자기 몸을 자기 스스로 지킬 수 없다는 사태가 왔을 때 그래서 두려움이 생길 때 비로소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는 걸 알 때 비로소 몸과 영혼을 지옥 멸한 자를 두려워하라는 그 말씀의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스스로 지켜서는 의미 없어요. 스스로 이 몸을 지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자식 둘 밥도 못 먹여서 자살하자고 번개탄 피우고 죽자고 할 그 순간에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더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자기 마누라에게 마귀라고 거울에다 써놓고 자살했다는 그런 목사, 내가 보기에 아직 어린아이인 거예요. 말씀 앞에 모든 게 벌거벗고 드러나야 되는데 아직도 내 아내는 복음을 알아야 되고, 내 아내는 절대로 보석 같은 건 사랑하지 말아야 되고, 보석이 아니고 복음만 사랑해야 되고, 교인들은 나를 복음 아는 목사로 존경해야 되고, 뭔가 스스로 자기의 체계를 갖추고 있을 때 마태복음 10장 28절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지금 윌리엄 오컴이 보통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윌리엄 오컴이 이런 소리해서 도망갔습니다. 완전히 잘렸어요. 결국 페스트에 걸려 죽은 걸로 돼있는데 이 사람이 도발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좀 정직하자. 믿는 척하지 말고. 성경을 자꾸 따오지 말고 나부터 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치 않은 데도 왜 하나님을 거론하느냐부터 따지는 거예요. 돈만 있으면 되는데 하나님이 왜 믿습니까? 눈만 봐도 다 통하는 이야기인데 그걸 애써 아닌 것처럼 감추면서 “신이시여, 말씀대로 하옵소서.”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위장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고 인간은 말씀 따라 존재가 아니고 인간은 감정 따라 사는 심리적인 존재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심리적인 요구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에요. 사람마다 신이 어떤 분이냐 하면, 좋은 엄마가 있으면 엄마 같아. 아버지가 좋으면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 같아. 사람마다 자기가 속한 환경 따라서 신을 대하는 요소가 다 달라져요. 그게 무슨 일관된 신입니까?
윌리엄 오컴은 십자가를 모르는데 하나님은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냐하면 출발이 뭡니까? 존재거든요. 나, 여기 존재 있다. 이 존재는 어디서 생겼을까? 신이 만들었다. 아까 둔스 스코투스처럼 같은 존재란 말을 사용해야 되겠지요. 그럼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의 뜻에 의해서 나란 존재가 등장한 거예요. 어렵지요. 존재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계신데 거기서 하나님의 의지가 나오고 너는 네 모습대로, 나는 내 모습대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안 보이는데 그걸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뭐가 있어야 존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데다 존재를 붙일 수 있어요? 못 붙이지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안 계신 거예요? 그런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면 보이지는 않고 있으려면 안 보이는 신이 나와야 되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뜻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뜻의 열매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겁니다. 창조해서 있잖아. 창조해서 있는 건 아는데 창조주는 안 보이는 거예요.
둔스 스코투스가 여기 내가 있잖아. 있으니까 신은 있다는 거예요. 안셀무스의 존재론을 스코투스가 수용을 해요. 교재에 보면 나와요. 그런데 윌리엄 오컴은 그것보다 더 나가요. 신이 나를 만들어서 내가 있다 할 때에 그러면 있는 하나님을 찾을 때 단서를 어디서 출발해요? 여기 내가 있는데서 출발하자. 그걸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라는 것이 단서가 된다고 보잖아요. 윌리엄 오컴은 존재가 단서가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감정에 휘둘려서 살아가요. 맛있는 것, 예배 끝나고 맛있는 것 먹으면 갑자기 교회에 나오고 싶어요. “오늘은 불고기 파티합니다.” 하면 왠지 예배 마치고 도망가지 않고 싶어요. 사람은 내가 내뱉는 말 말고 내 몸이 말없이 뭔가 요구하는 게 있다고요. 그건 말로 설명 안 되지만 뭔가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어요.
이번에 대전공부하면서 남자, 여자 차이점을 이야기했잖아요. 남자라면 상대방이 이것 해부세요. 남자라면 이게 되는데 여자는 해달라는 말도 안 하고 자꾸 짜증만 내고 타박만 놓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가, “뭘 해달란 말이냐?” 이렇게 하면, 여자가 이것 해달라고 하면 되는데 “이것 해줘?” “아니에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뭔데? 그건 남편인 네가 알아줘야 남편답지. 뭘 어떻게 알아. 내가 이것 해달라고 해버리면 내 뜻에 네가 따라가면 누가 남편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거예요.
진정 당신의 아내라면, 아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남편이 미리 챙겨줘야 아내답다는 거예요. 환장하지. 여자와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냥 밥만 먹고 살면 여자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남자한테 여자는 리볼버 권총 안의 총알이라고. 여럿 총알 막 돌아가요. 이 여자 없어도 괜찮아. 다른 여자가 와도 좋아. 여자는 그게 아니에요. 오직 한 남자가 자기가 모르는 것까지 책임져줄 때 남자고 그게 안 되면 그냥 갈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신비라 해요.
윌리엄 오컴은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전통대로 교회가 가르치는 데로 따르면 돼. 어디 그런 게 있어요.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빙자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인지 따져보잔 말입니다. 윌리엄 오컴이라는 철학이 면도날의 철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은 명제라 했습니다. 실재하지 않는데 명목상 걸쳐서 논리를 전개하는 것뿐이다. 실재하는 게 아니고 어떤 말을 하기 위해서 동원된 그러한 개념들뿐이다. 명제를 아는 것과 실제 사는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지렁이를 밟으면 꿈틀하지요. 지렁이한테 “네가 아플 때 어떤지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라.”고 하면, 지렁이는 그걸 설명할 필요가 없다니까. 그냥 밟으니까 꿈틀할 뿐이지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요.
비트겐슈타인이 발견한 게 이거에요. 세상은 없어요. 세상은 명제의 집합이에요. 이걸 이제부터 설명해드립니다. 여기 물이 있잖아요. 물이 있기에 우리는 물이라고 칭한다고 이렇게 보통 알고 있잖아요. 이게 아닙니다. 이걸 물이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우리에게 필요한 물이 되는 거예요. 이게 비트겐슈타인이고 오컴의 주장입니다. 왜 그런지 설명해드릴게요. 이게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숲 속에 연못이 있다고 합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자생적으로 생긴 연못이에요. 늪이 연못이 된 거예요. 여름 장마에 물이 불어나고 겨울 되면 낙엽지고 하겠지요. 그런데 아무도 이 연못에 안 가봤어요. 그러면 이 연못이 우리한테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안 가봤으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윌리엄 오컴이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우리한테 없으면 진짜 없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우리가 발견 못하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게 많잖아요. 바이러스를 다 발견했습니까? 병균을 전부 다 찾아냈어요? 찾아낸 것만 있지요. 찾아내지 못한 것은 있어도 우리는 모르지요. 그러면 우리가 말하는 세상은 결국 우리가 찾아낸 것, 우리가 있다고 확인된 것의 집합체만 세상이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세상은 우리가 아무리 해도 없는 게 더 많을 수가 있지요.
지금도 물리학에서는 75%를 암흑물질이라 해서 이것은 빛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분석이 안 되서 몰라요. 사과가 떨어지는 걸 뉴턴이 중력으로 설명했잖아요. 뉴턴 이전에는 그냥 떨어진다고 했어요. 그냥이 뭡니까? 뭐시기입니까? 뉴턴은 중력에 의해서 떨어진다는 것이고. 그리고 중력을 수식으로 설명한 거예요. 지금도 중력으로 설명해요.
그러면 이 세상이 전부입니까? 인간이 되어서 세상도 모르는 주제에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논한다고? 말도 안 되지요. 모르기 때문에 성경 본다고 하잖아요. 성경 보는 당사자는 누굽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세상이라고 우기는 그 당사자가 성경에 나오는 문자를 보면서 이것 바로 하나님이라고 우기잖아요. 그게 하나님일까요? 자기 주변도 모르고 세상도 다 모르는 주제에 감히 세상을 만들었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책 문자를 해독하면 알아지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그냥 우리가 내뱉는 명제다. 명제는 하나의 진리를 구축하기 위해서 시작하는 거예요. 임의로 단어를 서로의 약속에 의해서 추출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종에 축구 게임과 같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그림언어로 이야기했다고 게임언어로 이론이 발달하거든요.
게임이란 이겁니다. 여러분, 장기나 체스 알지요. 서양장기를 두는 사람이 체스 판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거기서 더 나갑니다. 장기 두는 사람이 장기판이라고 보는 게 아니고 장기 알이 장기판이라고 했을 때 장기 안에서 이 세상에는 장기판 외에는 없어요. 본인이 그 일부가 되기 때문에.
이왕 이해 못하는 것 어렵게 해봅시다. 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이다.” A, “이런 분이 하나님이다.” B, “이런 분이 하나님이다.” C, 이 셋이 모이면 이게 하나님이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다, 아니다 하는 인간임을 포기하고 밖에 나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느 인간치고 자기가 인간임을 포기하고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없는 인간이에요. 자기가 인간이면서도 일단 인간 아닌 척하고 인간이 어떻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은 없는 인간이에요.
성경의 언어를 알아야 된다고요? 자기가 언어 바깥에 나올 수 있습니까? 자기가 언어를 생산하는데. 방앗간에 고춧가루가 나오면서 방앗간을 언급하면 안 돼요. 방앗간을 만든 주인이 방앗간이 어떻다고 이야기해야지 고춧가루로 갈려나온 주제에 방앗간이 어떠니 해도 자기가 나온 코스밖에 몰라요.
욥기 이야기입니다. 욥의 친구 넷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럴 때 하나님이 등장하잖아요. 제가 아까 한 연못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요.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 생각해도 자기를 벗어나서 출발지점으로 삼을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걸 윌리엄 오컴이 이야기해요.
윌리엄 오컴 시대가 되면 신학이란 명제에 불과해요. 명제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단 말이죠. 와르르 무너지고 그 다음부터는 내 의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면, 내 의지가 곧 신의 의지거든요. 내 의지가 앞으로 뭘 행할 것이며 뭘 탐색할 수 있으면 뭘 뽑아낼 수 있느냐, 뭘 연구할 수 있느냐? 그쪽으로 나가니까 윌리엄 오컴 이후에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꽃이 필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에 신학도 철학도 편승했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데카르트 과학시대 이전에 윌리엄 오컴이 유명세를 떠는 겁니다. 신이 없다는 게 아니에요. 신을 모른다는 이야기지. 신을 없다는 말을 하게 되면, 너는 어디서 나왔는데 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그때그때 자기가 처한 감정에 따라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될 뿐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내 생각이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기가 일방적으로 했던, 말던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기 때문에 그것은 신의 뜻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하지요. 왜냐하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이번에 했잖아요.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맞느냐, 틀리느냐? 성경을 그대로 읽으면 맞는 이야기입니까? 그 말 읽은 뜻은 진짜 주의 뜻이 맞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제 대답은 뭐였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대답이라고 했지요. 창세기 1장 1절을 보고 거기에 대한 해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게 해답이에요.
제가 울산에서 강의할 때 했잖아요. 사자의 털을 몇 개 뽑으면 사자가 화냅니까? 한 오천육백 개 뽑으면 화냅니까? 사자의 털은 몸통에 박혀 있잖아요. 하나의 율법을 어겨도 몸통 자체가 다 반응하게 돼있어요. 털을 열 개 뽑았다고, 천 개 뽑았다고 화 더 내는 것 아니거든요. 그처럼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지금 윌리엄 오컴은 신약에 대해서 잘 몰라요. 선배들의 말이 과연 합당한지 따지는 겁니다. 그럼 철학은 왜 하느냐? 그 당시 신학이 철학이고 철학이 신학이에요. 인간의 정신을 장악해야 되니까. 논리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게 아니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신자로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철학적인 논리나 명제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명제나 논리에 대해서 윌리엄 오컴이 시비 걸고 들어가는 겁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어린아이의 하나님은 바로 부모에요. 하지만 어린아이가 자라나지요. 자라나면서 그때그때마다 변하지요. 변화될 때 인간은 자기감정에 대해서 초월하는 게 아니고 새로운 감정을 수용합니다. 흔들리는 감정이 자리 잡기 위해서 도덕이 주어지거든요. 윌리엄 오컴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도덕이 주어졌다는 이 말은, 성경말씀 전체를 도덕적인 교훈으로 요약을 한 거예요. 맞는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윌리엄 오컴을 공부하면서 알아야 될 것은, 인간이 뭔가 무섭고, 두렵고, 떨릴 때 예를 들어서 사기를 당했다든지, 아이가 갑자가 사고를 당했다든지, 아이가 성적이 내려갈 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뭐예요? “하나님이여, 제가 도덕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형벌을 주십니까?”라는 생각이 떠오르지요. 그게 윌리엄 오컴의 생각이라니까요. 인간의 모든 감정에 있어서 도덕이 동원되고 그 도덕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는 거예요.
그 당시는 복음이 뭔지 몰라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순종하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지가 관건이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속에 있는 도덕에 있고 우리는 감정에 휘말리고. 감정에 휘말리는 것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해서 도덕적으로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감정은 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감정,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윌리엄 오컴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도덕이겠지요. 들어보니까 칸트 생각 안 납니까? 칸트도 마찬가지지요. 여러분, 착하게 사세요. 왜? 이런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칸트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살인하지 마세요. 그러면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조건부로 지키는 게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뜻은 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미처 생각 못한 초월적인 명령인데 곧 그것을 신의 명령으로 본 거예요. 그것이나 윌리엄 오컴이나 생각이 같아요.
그러면 칸트 이야기해봅시다. 칸트가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써 교회에서 성경말씀 가르치는 것이 의미 있다, 없다? 그건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참고로 들을 수는 있겠지요. 성경자체가 도덕적이니까 내가 바르게살기 위해서 신의 명령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 그런 뜻에서 의미는 있는데, 명령은 누가해요? 내 안에 있는 이성이 명령해요. 내 양심이 명령한다니까요. 살인하지 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살인하지 마. 무조건 남을 해코지 하지 마. 왜요? 왜라고 묻지 마. 그것은 네 속에 있는 신의 명령이야. 무슨 신이 필요하고, 성경이 왜 필요합니까? 자기 일상 살면서 나쁜 짓 안 하고 양심대로 신의 명령 따르면 천국 갈 텐데 십자가 예수님 죽으심 왜 필요하고 무슨 의미 있어요.
제가 지금 윌리엄 오컴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 이유는, 윌리엄 오컴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신학자든 철학자든 복음을 몰라요.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윌리엄 오컴이 이런 주장을 할 때 무슨 뜻으로 하는지 그들이 몰라요.
방금 이야기한 윌리엄 오컴의 주장을 경험주의라 합니다. 경험주의라 하면 영국에서 나온 프랜시스 베이컨이 떠오르겠지요. 이 사람은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고 네 가지 우상을 이야기했잖아요. 영국은 경험주의라 하고 독일은 합리주의고. 경험주의가 뭐냐 하면, 진리는 분명히 얻는 게 있어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관찰하는 도구가 좀더 세밀해지고 자세하게 되면 보다 많은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냥 맨 눈으로 보면 목성의 위성이 두 개인지 안 보여요. 그러면 목성의 위성이 없으면 엉터리 천문학이 구성돼요. 그런데 렌즈를 갈아서 망원경을 만들어 자세히 보면 목성의 위성이 두 개 있다는 새로운 정보물이 등장하게 되면 우주의 별들의 움직임에 정확한 접근이 가능하잖아요. 그게 바로 과학의 원리에요. 분석의 원리고 관찰의 원리고. 관찰을 통해서 패턴을 만들고 패턴을 계속 확장시켜서 이미지화하면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하고, 인간의 의지는 신의 의지로 용납을 한 거예요.
신학 그러니까 종교지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드디어 나눠지면서 과학이 진리가 되잖아요. 그러면 철학과 신학은 할 일이 없네? 신학과 철학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도덕과 관련성을 띠어야 돼요. 인간은 감정적으로 살면 동물 돼요. 기분 나쁘다고 사람 찌르면 안 되잖아요. 사람을 찌르면 벌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행정학이 되고 정치학이 되지 종교는 아니란 말이죠.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을 찌르면 벌 받습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질서차원에서 할 문제지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종교와 신학과 철학에서 어떻게 해야 돼요? “당신이 그렇게 하게 되면 당신이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짓을 하게 되면 당신의 감정은 불안해지고 무서워지고 떨면서 마귀의 꾐에 빠진 게 됩니다.”라고 설명을 해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 일을 안 함으로 말미암아 명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그 하나님의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