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07b 울산강의-출애굽기 31장 : 동결
20140207b 울산강의-출애굽기 31장 : 동결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207b 울산강의-출애굽기 31장 : 동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뭘 만든다는 것은, 31장에서 뭘 만들게 하잖아요. 만들게 할 때 우리 생각은 이래요. “하나님 그냥 건져주세요. 만들기도 귀찮고 시키지도 말고 그냥 죄인이니까 우리를 데려가 천국에 가게 해주옵소서.”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천국? 나는 네 속을 파서 그 안에 천국 만들고 싶은데?” 그러면 우리는, “이 몸을 떠나서 저쪽으로 가고 싶은데요.” 저쪽 하늘이 바로 네가 지어낸 거란 말이죠. 이쪽이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의 전략이 뭐냐 하면,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잖아요. 모든 게 저주의 바다잖아요. 살기 힘드니까 자꾸 상상의 샹글리아, 상상의 유토피아를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 지은 데다 또 죄 짓는 게 뭐냐 하면, “죽어서 천국 가야지.”가 또 죄의 일부로서 나오는 거예요. “고통 많은 데서 벗어나서 저쪽에서 편하게 살래.” 누구 마음대로? 그냥 내가 힘드니까 내 몸 하나 잘 챙기고 행복하기 위해서 편하게 사는 곳에 가고 싶다는 것이 만약에 옳을 것 같으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힘든 세상에 보내질 않았습니다. 그냥 생명나무 따먹게 하시지 저주받을 땅에 저주를 유발시키지 않았어요.
창세기 3장의 취지를 잘 아셔야 돼요. 고통이 있으니까 편하게 살고 싶다. 그게 바로 하나님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힘든 것만 생각하니까 바로 마귀가 배후에서 힘들다고 이야기하라고 자꾸 부추기니까 “천국 가는 종교 없을까? 그런 종교 있으면 믿어야지.” 이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속에 구멍 파서 천국을 거기다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31장에서 만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죄 많은 우리 속에 하나님이 들어앉아 아예 살림을 살려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만들라고 한 거예요. 우리를 위해서 만들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화장실 필요해요. 배설해야 되니까. 침대도 필요하고 안방에 보일러도 놔야 되고.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산다면 뭐가 필요한가? 제사 드릴 기구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13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안식일을 지켜야 돼요.
그리고 뭐가 필요하냐 하면,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이게 필요해요.
맥가이버에게 스위스 칼 하나만 주면 안 되는 일 없잖아요. 맥가이버 만능 칼이죠. 우리에게 증거판과 안식일, 제사, 속죄소, 회막, 상, 이런 것들 만들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과 뭐하고 놉니까? 우리의 소원과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아무짝도 소용없지요. 그런데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을 만들라고 하고 거기에 있으란 말은 하나님한테 다 필요한 거예요. 안식일, 제단, 성막, 그 안에 담길 돌판, 하나님한테 꼭 필요한 거예요. 우리한테는 필요치 않아요.
프라다라는 명품 가방이 있는데 이번에 딸 결혼하면서 처음 봤어요. 이게 명품이구나. 전에 이야기했지요. 사돈 되는 분, 그렇게 교회에서 늘 눈물과 기도로서 헌신하던 그 분이 페리가모인가 뭔가 세일하는 것을 사서 줬더니만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을 해요. 성령에 감동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몸이 명품을 기억해요. 그걸 감동하더란 말이죠. 남자한테는 아무리 장인이 한 땀, 한 땀이라고 해도 “이게 뭐야.” 하지만 여자들한테는 명품 가방이 놀라운 거예요. 남자한테는 말 같은 차, 자동차에 남자는 미쳐요. 믿음 좋은 사람한테는 아무 소용없긴 하지만 하여튼.
그러니까 하나님한테는 필요한데 우리한테는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건성건성, 대충대충 제사 드리고, 대충대충 안식일 지켰고, 대충대충 예배드린 겁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의 절기에 안식일에 내가 지겹다, 지겨워. 그런 형식적인 것 그만해라. 많이 묵었다.
이스라엘 인간들이 하나님 시키는 대로는 해요. 하는데 이게 전혀 자기 취미에 안 맞아요. 할 수가 없어요. 맞지도 않는 걸 주님이 시켜놓으니까 완전히 군대 생활하는 것처럼. 남자들 군대 생활 억지로 하잖아요. 사고가 서로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 관경을 계속 해나갑니다.
첫째 시간에 한 그림을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이렇게 사선으로 돼있는데 이방나라들의 문명으로 자기 살림살이를 하는데 모든 사람이 다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나라가 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인데 이방나라에서는 스스로 만든 법에 의해서 스스로 규제를 받아요. 그 법의 핵심은 왕께 무조건 굴복하라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4장에서 라멕이 하는 말이, 내 말 듣지 않으면 이유도 없이 무조건 사표내고 잘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보기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당히 억울해 보이지요. 나라가 되려면 동등하면 안 돼요. 항상 한 단계 위에 있어야 돼요.
그걸 철학, 논리학에서는 메타라 하는데 메타보다 낮은 걸 대상이라 합니다. 이걸 잠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레데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다.” 그레데 섬에 살고 있는 철학자가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자기가 한 말은 거짓말일까요, 거짓말 아닐까요? 그것이 같은 대상에서는 풀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진짜로 이야기한다면 한 사람은 빼놓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전부 다 거짓말쟁이라고 했으니까 자기가 포함이 돼버려요. 그리고 거짓말한다면 실제로 그레데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가 아니어야 돼요. 왜? 거짓말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한 사람은 대상에 벗어나는 따로 한 자리를 마련해줘야 됩니다.
라캉은 이걸 남자라고 합니다. 남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남자는 모든 걸 지배해요. 심지어 자기 상사가 있더라도 “내가 너보다 못나서 떨어진 게 아니고 사실은 내가 이겨. 하지만 내가 참는 거야.” 꼭 이렇게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면서 항상 자기가 최고라고 절대자라는 것을 남자는 갖고 있어요.
그래서 남자에게 여자는 리볼버 권총이라 했지요. 남자는 하나라도 여자는 여러 명 되도 괜찮아요. 능력만 된다면 여럿 여자를 건드려도 나의 남성은 오히려 강화가 되고 더 위대해지게 되지, 어떻게 여자가 여섯 명이나 되느냐? 그게 남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게 아니고 오히려 남자로 하여금 더욱 더 높이게 되는 게 남성의 특징입니다. 여성을 자기 하녀처럼 취급하고.
그런데 그런 남성에게 어떤 여자가, “밥이나 먹여준다면 살림을 해드릴게요.” 이러면 그 여자는 남성의 지배를 받아요. 그런데 어느 날 여자가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면 그 순간 여자를 지배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아는 여자는 다 지배하는데 사랑하면 내가 알던 여자는 없는 거예요. 이것은 점선, 신비에 속하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도 나와요. 지혜롭게 하는 여인은 사람에 속한 게 아니고 여호와께서 보낸 자다.
여호와께서 보낸 자가 남자를 사랑해버리면 이 남자는 비로소 그때 처음으로 사랑을 아는 유일한 남자가 돼요. 그러면 그때부터 지배하겠어요? 지배해봐야 그 여자의 그림자만 지배할 뿐이지 진짜 여자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신비롭고, 신비로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점령을 하지 못해요. 몸은 뺏을 수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은 뺏을 수 없고, 모닥불은 쬐기만 해야 되지 모닥불을 가지고 놀면 안 됩니다. 손 다 타버립니다. 나를 사랑하는 여인은 주변을 맴돌면서 신비롭게 다가올 뿐이지 함부로 접근이 안 돼요.
그래서 여자의 후손을 설명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무리 해도 여자를 장악할 수 없는 것이 남아있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자로 하여금 남편의 지배를 받으면서 남편이 못다 지배하고 여분의 것에서 여자의 후손이 그런 개념으로 아우라처럼, 무지개처럼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밟아 죽이고 뺨 때리고 온갖 모독 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굴복했습니까? 실패로 끝났습니까? 군사들 보내서 무덤을 지켰잖아요. 분명히 다 했는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렸지요. 아우라 같은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 성전에서 분명히 자재 동원해서 만들어놨는데 분명히 그게 전부인데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게 생겨요. 물이 생기지요. 그 물 어디서 나온 거예요?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구원의 능력은 인간이 어떤 종교적인 행위와 노력을 다 해도 그것으로 설명이 안 되는 넘쳐나는 그 무엇. 그래서 사람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사람으로 하여금 지킬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말씀은 우리가 장악할 수 없고 말씀이 우리를 쥐고 있는 식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포크레인으로 딱 집어가듯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게 하나님의 자기 자리입니다. 그걸 언약이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만들지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이게 중요하고, 두 번째 시간에 중요한 게 그 이스라엘이 갈라진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네요.
여러분들 발뒤꿈치에 굳은 살 박히지요. 그래서 따뜻한 물에 불려서 벗겨내고 크림도 바르면 깔끔해지지요. 며칠 지나면 또 끼지요. 하나님께서는 살 깎아내는 것처럼 주께서 이스라엘을 깎아내요. 무를 깎아내면 무 안에 진짜 무 있습니까? 깎이는 자체가 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깎아냅니다. 남는 게 뭐 있습니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 오신 이유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왜 잃어버렸는가? 구약에 보니까 나쁜 목자의 발생으로 인하여 나쁜 목자가 등장하니까 잃어버린 양이 등장한 거예요. 나쁜 목자를 지적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지적하는 그분 눈에만 잃어버린 양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이, “저요, 저요.” 하고 손들면 잃어버린 양입니까?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이 생산되는 것은 진짜 목자가 자기 이름을 불러줄 때 그때 비로소 자기는 잃어버린 양으로 등극되는 거예요.
그러면 관건이 진짜 목자인 걸 어떻게 아느냐?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분이 진짜 목자입니다. 이것까지는 쉬워요. 그 다음이 어려워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면 예수님이 자살하면 되잖아요. 자살을 안 해요. 양한테 도리어 목숨을 빼앗겨요. 그래서 죽은 거예요. 그리고 목숨을 앗아간 그게 잃어버린 양이에요. 그러면 양이 진짜 목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그것이 가짜 목자인 줄 알고 죽여 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복잡해지거든요. 그걸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나오잖아요. 이걸 예를 들면 쉬운데. 이스라엘은 자기가 잃어버린 양이라고 자처했어요.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나름대로 이혼을 해도 증서 써주고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목자 오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아까 원칙에 의하면, 목자는 잃어버린 양에 의해서 오히려 목숨을 잃는 그분이 목자라 했지요. 그런데 양들은 말씀을 잘 지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잖아요. 간음도 안 하고 살인도 안 하고 말이지요.
목자가 와서 슬슬 심사를 긁어놓습니다. “너, 간음했지?” “우린 간음 안 했어요. 바람피운 적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인데.” 그러니까 죽어라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는 착한 양이니까 자기 착함을 동의해줄 진짜 목자를 간곡히 기다렸는데 막상 진짜 목자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는 잘났다, 의롭다, 훌륭하다, 나름대로 완벽하다, 일부러 죄 짓지는 않았다. 이렇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데 우리의 속을 긁어놓네요. 그러니까 안 죽이려야 안 죽일 수가 없어요. 내 몸통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잘 지켜야 천국 가는 몸이 되니까. 내가 죄인 되면 못 가니까. 내가 죄인 되면 지옥 가잖아요. 지옥 가기 싫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몸을 관리를 해야 돼요. 성화되고 날마다 거룩하려고 하는데 거룩으로 오신 주님이 약을 올리네. 사람을 무시해도 아주 개무시하는 거예요.
디모데후서 3장을 읽어볼게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런 짓을 해서 그들이 사도를 대적해서 자기 양들을 빼갔단 말이죠.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이것 지킬까요, 말까요? 아까 분명히 순종치 아니하지요. 우리가 스스로 잘나서 내가 원인이 되어서 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심사를 긁어놓습니다. 성령이 와서 말씀으로 반드시 긁어놓고 십자가 피를 바라볼 때 “주여, 제가 얼마나 못났으면 저 피 없으면 지옥 갈 수밖에 없군요.”라고 깨닫게 하는 식으로 앞의 말씀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긁어댄단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안 온 사람들은 이 말씀을 넘어가버려요. “내가 천사야. 사람인데 못 지키지. 내가 지킬 것만 지키지. 나도 지킬 수 있어. 기도하면.” 그게 바로 성령 못 받은 사람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지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안 데려가는 이유는, 여러분 지옥 보고 싶지요. 지옥을 미리 체험하라고 이 울산 땅에 살게 하신 거예요. 천국이 아닌 지옥을. 그래서 깎아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무로 생각하고 주께서 다 깎아내는 거예요. 새로운 언약을 주어져서 깎아내고, 깎아내고 자꾸 깎아내는 겁니다.
무가 있는데 깎아내고 깎아내면 어떻게 됩니까? 다 떨어지겠지요. 떨어진 무들은 자기가 뭐가 됩니까? 죄인 되겠지요. 죄들을 모아서 여기서 바로 구원과 영생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선배들이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 사람들의 행동이 온전했습니까? 순종했습니까? 순종 정도가 아니에요. 하나님 붙들고 한판 싸웠습니다. “내 것 왜 건드려!” 상당히 민감했어요. 누구든지 자기 것 건드리면 가만두질 않았어요. 그게 야곱이에요. 지금 야곱 천국 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다 이스라엘을 만들어버리고 언약을 통해서 죄인을 구원해버린 겁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그 다음에 순종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오직 긍휼로 불쌍히 여겨서 데려가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말을 타고 동승했고,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고, 그 죄 속에서 긍휼을 입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열두 명이에요.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서 열두 명으로 했는데 열두 명이 한결같이 전부 다 예수님과 생각이 안 맞는 사람이에요.
당신과 나하고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으냐고 할 때 우리가 만약에 선생이라면 예를 들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서로 싸운다고 합시다. 우리라면 베드로가 높지 하잖아요. 주님의 방법은 뭐였습니까? 이걸 하나로 묶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옵니다. 제3의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하늘나라를 받들지 아니하게 되면 천국에 못 가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한 묶음 됐지요. 묶음 된 어른들은 현재 하나님 주신 자리가 어린아이 자리지요. 그러면 일단은 어린아이 자리에 와서 구원받아야 되겠지요.
따라서 이 자리가 그들의 싸울 때는 어린아이 자리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들은 누구 높으냐고 예수님께 직접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은 중간에 어린아이를 집어넣었어요. 오늘날은 어린아이를 집어넣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집어넣습니다. “너희들 싸우지? 내가 너희들 때문에 못 살아. 죽어야 돼.” 이걸 집어넣는다니까. 이게 새 언약이에요. 어린아이가 언약이 아니고. 어린아이는 새 언약을 보여주는 하나에 도구에 불과하고 십자가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둘 다 성도라고 우기는 부부가 싸움을 한다. 니가 잘났어, 내가 잘났다고 싸우다가 성령께서 십자가를 그 가운데 집어넣으면 남편은 십자가를 통해서 아내를 바라봐야 되고, 아내는 십자가를 통해서 남편을 바라봐야 되지요. 그러면 싸움을 더 하겠어요, 멈추겠어요? 더 해야지요. 전에는 싸울 때도 체면 챙기고 나는 상대방보다 덜 죄인이고 더 의롭기 위해서 말도 가려가면서 했는데 십자가 안에서 이제는 본색을 드러내야지. “우리 같이 죽자. 이렇게는 못 산다. 죽자.” 그러면 주님께서 진작 그렇게 싸워야지. 어디서 싸우면서 점잖은 척하고 있어. 뭐가 남편의 체면이고, 아내의 체면이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죄인이니까.
나중에 싸우다가 힘이 빠져서 주저앉지요. 다시 한 번 박수를 칩니다. “주여, 죄인입니다.” 그렇지. 그때 나타나는 게 남편이 하기를 아내를 주 안에서 사랑해라. “나, 너한테 욕할 것 다했다.” 이게 바로 아내에 대한 최고의 사랑입니다. 나도 무슨 말인지 앞뒤 안 맞는 이야기하는데, 욕 실컷 해놓고, “이게 나의 본성이고 이제 짐 싸서 가도 괜찮다. 그동안 살아준 것도 고맙다.” “나도 이것밖에 안 돼.”
그게 바로 가장 부부다운, 착하지도 않으면서 그동안 착한 짓을 해왔던 그 더러움을 십자가를 통해서 부부싸움을 통해서 다 들춰내는 겁니다. 너무 자주 싸우지는 마세요. 돈 나갑니다. 한 번씩은 그렇게 해야 되는데 저희 가정 같은 경우에는 속으로 다 해버립니다. 하나의 요령인데 팁이니까 알려드립니다. 그 과정을 미리 상상을 다해보는 거예요. 다 해놓고 혼자 박수치는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 남는 게 뭡니까? “당신은 나한테 과분한 여인이요.” 그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미 속으로 욕할 것 다 했거든.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바로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다 뜯기고 다 찢긴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주님의 멱살 쥐고 흔들고. 물론 주님이 했지요. 껍데기로 누가 했지요? 선지자를 자꾸 보냈는데 선지자를 얼마나 죽였습니까? 욕 되게 하고. 모세한테 항의하고 다 하게 해요. “더 나올 것 없지, 끝났지.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 창기가, 세리가 구원받는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자기 자리입니다. 공로와 하나님의 은총만이 유지되는 상태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죄가 필요했고 그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갖고 노는 장난감을 인간에게 던져서 너희들 손으로 만들라고 하는 거예요.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면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제사하라고 하는구나.” 마음껏 제사하고 마음껏 말씀 지키면서 그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무가 잘리듯이 잘못 다루었다는 죄목으로 계속 잘리는 거예요.
여기에 14절에 나오는 말씀,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이것은 일종의 칼, 그야말로 만지면 손 베이는 칼. 모이게 힘쓰면 다 손 베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에 베이게 하는 거예요. 직장에서 누구를 만났다. 그 사람 때문에 상처입지요. 그러니까 세상 자체가 상처투성이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께서 만든 배치물, 가시덤불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리 베이고, 저리 베이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지. 그 말씀이 칼날처럼 늘 오는 거예요.
16절 봅시다. 이제부터 약간 어려우니까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무슨 언약입니까? 영원한 언약이지요.
대전에서 강의했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다시 해보겠습니다. 도레미송. 도~ 계속 가요. 도가 레로 변하는 게 아니고 도로 계속 가요. 그 다음에 레가 계속 가고, 미가 계속 가요. 여기에 영원한 언약이에요. 그렇다면 안식일이 도라는 말이 아니고 그전에 창세기 17장에 보면 영원한 언약이 있었어요? 할례언약, 영원한 언약이지요. 영원한 게 왜 그렇게 많아요. 영원한 게 계속 있지요.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이 시점에서 보면 영원하지요. 도착지점에서 보게 되면 끝이 있으면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영원하다고 하잖아요. 뚫고 지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이걸 뺑뺑이 돌려요. 실을 감듯이 감아버려요. 도도 감기고, 레도 감기겠지요. 계속 감기면 뭐가 되느냐 하면, 파리바케트에서 제일 안 팔리는 빵이 롤케잌이잖아요. 감기면 롤이 되지요. 롤을 칼로 자르면 이 안에 구약부터 영원하다는 요소는 다 들어있겠지요. 이 롤 마지막에 와서 끝부분에 다 감게 되면 항상 영원하지요. 이 안에 영원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어렵다 했는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지요. 안식일을 지키라. 이 말은 금요일까지는 일하고 토요일은 일 안 하고 예배드린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식일 지키기거든요. 여기에 녹음기가 있는데 “녹음기를 켜세요.” 하면 이렇게 켜잖아요. “끄세요.” 하면 누르면 꺼지거든요. 알기 쉽잖아요. 진짜 알기 쉬워요. 그런데 이 녹음기가 예수님이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게 매직입니다. 이 매직으로 글자 쓰세요. 그런데 이 매직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게 무슨 생뚱 맞는 소리입니까? 누가 설명해보세요.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요.
방금 했습니다. 안식일, 할례, 그밖에 여러 가지 있어요. 땅도 있고 한데 이 영원한 게 계속 올라가요. 하늘의 신도 영원하니까. 구약에서 영원한 게 한두 개가 아니고 계속 나와요. 이스라엘도 영원하고, 율법도 영원한데 제가 롤처럼 감긴다 했잖아요. 감긴 분이 예수님이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 분명히 안식일 지키기인데 이게 어떻게 예수님이 되냐 말이지요. 매직은 참한 매직, 예쁜 매직이 되는데 예쁜 예수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이죠. 갑자기 매직이 인격체가 되고 인물이 되느냐 말이지요. 논리 전개과정이 왜 그러냐 이 말입니다. 남는 시간에 이것 풀어야 돼요. 내가 찝찝해서 안 돼요.
안식일을 우리가 지키자. 영원한 법이라 지키자. 안식일에 일하면 안 돼. 일하다가도 안식일이 되면 멈춰야 돼. 그런데 예수님도 안식일에 일하다가 멈췄다. 그러면 우리는 이해가 돼요. 예수님도 밭 갈다가 토요일이구나, 놔둬야지.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존경할만한 합니다. 내가 지킨 것처럼 예수님도 지키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지요. 안식일을 지키는 분이 아니고 안식일을 만드신 분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안식일을 지키면,
예를 들어서 내가 매직으로 글자를 쓰는 것이 영원한 규례라고 하면 매직으로 씁니다. 그런데 매직을 누가 만들었지? 이 생각만 하면 매직으로 글자 쓰기를 대신할 수 있고 대체할 수 있습니까? 매직으로 글자 쓰다가 “선생님, 이 매직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네가 숙제하기 싫으니까 엉뚱한 소리하는구나.” 이렇게 책망하면 어떻게 해요? 생각할수록 어렵지요.
그래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제자들이 안식일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주시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안식일을 만들었다고 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우리가 지키는 것과 뭔가 차이가 난다면, 우리가 지키는 것은 일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뜻은 일하지 않는 게 아니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일해야 사는데 우리가 일하는 대신 다른 분이 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식일이란 다른 분이 일해서 그분의 덕분으로 우리가 안식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6일을 일함은 이쪽 7일에 일 아니 함이 되지요. 일함으로 오다가 이 지점에서 언약이 된다. 그러면 인간은 만나는 순간 일 아니함이 되지요. 이 지점에서 일 아니하더라도 안식이 주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역전인데 방향을 6, 5, 4, 이렇게 해봅시다. 결국 카펫을 돌돌 말아보는 거예요. 회수를 하는 거예요. 인간을 일하게 해서 그걸 돌돌 말아서 네게 일을 시킨 것은 일 안 해야 네가 진정한 영원한 규례, 안식일을 영원히 지킨 혜택, 그러니까 영생이지요.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일을 안 해도 되는 수준, 그런 지경에 이를 때 비로소 영생의 맛을 본다는 거예요.
그러면 비교될 게 뭐냐 하면, 여기는 일하는 인간이 되겠고 일해서 그 일함이 이어져야 되고, 주님께서는 홀로 일하신 분이 되는 거예요. 일하다가 안식일에 일 안 해야 되지요. 그러면 진짜 구원받은 사람 같으면, “주님께서 홀로 일 다 하셨네요. 안식일 지키라는 것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주께서 홀로 안식일을 다 지켰네요. 그러니까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내가 한 게 아니고 내가 일 안 해서 누린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게 하셨네요.” 주께서 일하게 하셨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날은 일해야 되고 어떤 날은 일 안 해야 되는 그러한 밑거름 속에 우리를 집어넣었네요. 라고 해야 안식일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안식일에 뭘 했느냐 하면, 이쪽에서 안식일 안 지켰다고 하는 걸 차버려요. “누구보고 안식일을 지키라, 마라 해.” 구덩이에 빠진 양을, 손 마른 사람을 살려줬잖아요. 그러니까 안식일에 일하신 거예요. 결국은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날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하는 일이 안 보였다는 말은, 못 믿었다는 말은 인간들이 자기가 하는 일로 인하여 내가 살겠다는 그 생각 때문에 주의 하신 일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착한 일도 안 해, 믿지도 않아. 그런데 어떻게 구원받지. 그게 돌돌 말린 카펫에 얹혀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카펫에 얹혀있는 사람 예를 들어볼게요.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데 안나란 여자와 시므온이지요. 시므온 선지자에게 성령에 임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29절)
도대체 아기 예수를 통해서 뭘 편히 쉬게 하는 겁니까? 그동안 우리로 하여금 영생이 뭔가를 알도록 밑에 주님께 있던 카펫을 깔아놓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일을 시켰다는 겁니다. 같은 일을 할 때 밥이나 먹고 살라고 일하라는 게 아니고 주님과 관련된 일을 했다는 것을 나중에 주님 만나고 알고 소급해서 과거를 돌아보면 과거의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었다는 것을 소급해서 파악한 사람이 시므온이었습니다.
강도가 구원받았잖아요. 자기가 강도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소급해서 주께서 낙원에 가라고 강도하게 하신 거예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닭을 삼만오천 마리 키우는데 자기 농장은 조류독감에 안 걸렸어요. 문제는 온 천지에 조류독감이 돌아서 사람들이 닭을 안 사먹으니까 판로가 막히고 매일같이 사료는 먹여야 되고 이미 사료 값이 벌써 오천 만원 나갔답니다. 해결책이 뭡니까? 닭 삼만오천 마리 키우고 조류독감 걸리게 하신 것이 누굽니까? 나로 하여금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길을 가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자살하면 안 되지요. 자살한다는 것은, 나는 누가 살린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가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안식일에 몰래 나무하다 걸린 사람 있지요. 그 사람은 미래에서 안식일을 줬다고 생각 안 하고, “내가 안식일을 지켜서 잘하면 복 주겠지.”라고 생각해서 안식일 지키는 거예요. 요새 주일성수하면 복 주겠지 하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안식일의 주인이 오게 되면 안식일뿐만 아니고 율법도 마찬가지에요. 마지막 꼭 알아야 할 건데, 안식일을 영원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나머지 모든 율법은 다 어디로 지향합니까? 안식일의 주인이 올 날을 기다리게 하는 거예요. 안식일 예배가 제일 크고. 다른 건 어겨도 안식일은 어겨서는 안 된다고 못 박은 것은 안식일과 안식일 접촉지점에 안식일의 주인이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손 마른 사람을 낫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게 안식일의 완성입니까? 그 사람 나았지만 늙어 죽는데요. 마르다 오빠 나사로를 살렸는데 또 죽지요. 그러면 제대로 된 영생이 아니잖아요. 안식일 주인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죽음이라는 커튼 뒤로 사라져야 되죠. 저분은 안식일 지킨다고 따라다녔는데 어느 시점에서 갈라지죠. 그 갈라지는 시점이 십자가 사건이지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닭 좇던 개가 되서 저분이 안식일의 주인인데, 물 위를 걸었는데. 물 위를 걸으면 뭐 합니까? 그분 혼자 가버렸는데. 고기나 잡으러 가자. 돌돌 마리가 안 된다니까.
이제 마지막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지 말고 돌돌 말은 그 지점으로 가게 되면, “안식일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죽으라고 하는 이야기구나.” 딩동댕. 정답입니다. 전도사님에게 민준이 키우라는 것은 죽으라는 겁니다. 사모님 학교 가는 것은 교사로 죽으라는 겁니다. 어차피 영생은 죽음 뒤에 있기 때문에. 누구와 부부생활 하는 것은 같이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면 안식일을 위반해야 돼요. 그래서 부부싸움 할 때 “죽여라, 죽여라.” 하잖아요. “너 죽고 나 죽자.” 그 말도 맞아요. 하나님께서 부부싸움 하게 하셔서 복음이 튀어나오게 만들어버려요.
우리가 울산바닥에 사는 것은 죽으라고 사는 겁니다. 이미 누려! 우리는 마네킹이기 때문에 영생으로 말미암아 동결된 영생의 젤리가 되어 영생의 위력, 십자가 피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아무 움직임이 없어요. 미동도 안 해. 그냥 마네킹처럼 까딱까딱할 뿐인데 그 채로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한 것처럼 그대로 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시는 일을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오해했습니다. 우리는 못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죽어 마땅한데 따라서 그런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실, 그 안에 천국이 있고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든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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