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07a 울산강의-출애굽기 30, 31장 : 동결
20140207a 울산강의-출애굽기 30, 31장 : 동결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207a 울산강의-출애굽기 30, 31장 : 동결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30장 37절에 보면,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 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했지요.
2개월 전에 여기서 할 때 끊어진다는 말을 설명을 했습니다. 끊어진다는 것은 일단 모아놓고 잘라내는 거거든요. 너, 아니야. 넌 이곳 천국에 못 와. 그러니까 끊어지는 거지요. 모을 때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준이 있을 거라고 왔는데 막상 토막 내듯이 “너, 아니야. 넌 아니니까 집에 가.” 하는 기준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번 대전수련회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우선이 아니고 법이 먼저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에덴동산에서 사람 위주가 아니고 법 위주였지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이 사람보다 더 귀한 겁니다. 하나님도 참 이상하지요. 나무가 뭔데요? 생명나무가 사람보다 더 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쫓겨나서 생각이 잘못 되니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인간을 귀히 여길 것이라고 오해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귀할 것 같으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도 않았어요. 쫓아낼 때는 다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 쫓아낸 겁니다. 인간보다 더 귀한 것, 인간보다 더 우선되는 것, 그것을 위해서 추방시켰단 말이지요. 그분이 참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참 하나님이라 할 때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그런 오해는 멈춰야 돼요. 그만해야 돼요.
사람보다 법이 먼저입니다. 기준이 먼저고. 그러면 우리는 궁금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 찾아도, “너, 안 돼. 너, 집에 가.” 그 잘라내는 그 기준이 뭔지 우리로서는 상당히 궁금합니다. 기준을 알면 그 기준에 맞추면 되잖아요. 문제 출제 기준에 맞추면 되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준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굉장히 많아요. 그걸 율법이라 합니다. 그냥 법이잖아요. 법이 한두 개가 아니고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365가지인가 하는 많은 개의 법을 줬지만 율법 전체를 하나의 몸통으로 보는 겁니다.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쉬운 문제니까 대번에 알아맞힐 수 있어요. 사자를 화내게 하는데 털을 몇 개 뽑으면 사자가 화를 내겠습니까? 한 육천 개 뽑으면 화내겠습니까? 아니면 한 개만 잡아당기면 화내겠습니까? 사자 몸에 있는 털은 하나든 많든 관계없이 사자 몸통 피부에서 나온 거잖아요. 사자 코털 하나를 잡아당겨도 사자 몸통 잡아당긴 것과 똑같은 거예요. 모든 율법 중에서 하나를 어겨도 다 어긴 게 되는 이유가 몸통과 관련돼있어요. 율법은 뭐냐? 율법은 털이다. 하나를 잡아당기면 피부에 있는 다른 털까지 반응을 나타내지요. 율법은 털인데 어디에 붙어있는 털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털이 바로 율법입니다.
우리가 지금 출애굽기 30장을 보고 있는데 이것이 구약입니다. 구약은 아직 몸통이 다 드러나지 않았어요. 다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눈에 많은 털이 보이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도 잘라낸다고 하지요. “너는 안 돼. 지옥 가야 돼.” 잘라내니까 우리는 그 기준이 궁금하고. 그 기준이라고 제시한 것을 보니까 그게 법이고. 그래서 제 때에 주어지는 법들을 제꺽제꺽 다 지키면 하나님한테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갖게 되지요.
그런데 몸통은 안 보이고 여기서 나온 털, 이게 율법인데, 털만 보인다면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신이 몸통이에요. 삐져나온 율법이라는 털을 볼 때에 이 몸통은 모르니까 자기부터 먼저 챙겨야 되는 거예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먼저인가요, 법이 먼저 인가요? 법이 먼저지요. 벌써 오해했잖아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법이 먼저고 그걸 따먹으니까 너도 나가라고 인간을 추방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도 율법을 주니까 법이 우선이 아니고 법과 연결된 점선들,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점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점선 된 몸통, 이분을 위해서 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라는 몸통을 위해서, 나 잘 되라고 법을 줬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이건 창세기 3장과 2장이 완전히 배치되는 거예요. 생각이 안 맞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는 것은, 나라는 몸통은 잊어버리고 이걸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데려가서 예수 안에서 구원되게 하는 겁니다. 이건 지금 급조한 게 아니고 에베소서 1장 4절에 의하면, 이미 창세전부터 그리스도의 몸통을 위해서 인간이 있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지 않다는 것은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난 겁니다. 이런 게 전제가 되어 오늘 본문 31장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런 전제로 나가게 되면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좀 하다가 다 잊어버려요. 잠시 드라마이야기하고 갈게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서 ‘보고 싶다’는 문제를 보냈어요. 속으로는 보고 싶은데 안 그런 척하고 그동안 지내왔어요. 그런데 여자 주인공은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나중에 깨어날 때 보라고 했는데 남자 주인공이 가만히 생각하다 깨어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자 주인공이 문자가 온 소리를 듣고 보려고 하는 그 순간 그 별에서 온 그대는 시간을 정지시켰어요. 15회 본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세가 나오느냐 하면, 스마트 폰을 손으로 잡으려는 그 순간 동결, 시간의 정지에요. 그런데 별에서 온 그대는, 김수현은 시간을 동결시킨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는 동결이 안 돼요. 병실 문 열고 여자는 마네킹이 되어 있는데 스마트 폰을 빼어서 자기가 보낸 ‘보고 싶다’는 문자를 지우고 난 뒤에 다시 “레드선! 하고 시간을 풀었습니다. 시간이 풀리고 난 뒤에 여자 주인공, 전지현이 보니까 메시지가 안 온 거예요. 시간이 정지되었지요. 시간이 정지되니까 그때까지 행동이 스톱되고 마네킹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이란 털을 통해서 몸통으로 갈 때 여기서 시간을 정지시킵니다. 이번 대전수련회에서는 시간의 역전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우리 심리에는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시간의 왜 역전이 돼요? 안 되지만 하여튼 시간의 역전인데 오늘은 시간의 정지라고 합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몸통을 없애버리고 주의 몸통에 합류하는 순간 우리는 마네킹이 되는 겁니다. 마네킹이 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우리한테 물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면서 제일 큰 스트레스, 마음의 짐이 뭐냐 하면, 내가 잘했을까, 못 했을까? 내가 옳지 않은 짓인가? 미래를 망치는 짓이 아닌가? 아니면 내가 잘한 짓일까? 내가 중앙대를 갈 것인가, 한양대를 가야 되나? 한양대를 선택하는 게 장래를 망치는 짓이 아니냐? 중앙대를 해야 되나? 공납금도 반밖에 안 되는데. 어느 쪽일까? 내가 저 여자와 결혼하면 어땠을까? 저 남자와 결혼하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평생 두고두고 매일같이 스트레스 받는 것이,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가?” 하는 그 스트레스, 사람 죽입니다. 사람 피를 말려요. 이걸 일체 마네킹한테는 묻지를 않는다니까. 주님께서 얼게 만들었기 때문에 잘했다, 못했다 관계없습니다. 지난주 우리교회 낮 설교에 그렇게 했어요. 순종치 아니했다. 로마서 11장에 나와요.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둬뒀다는 거예요.
여러분 젤리 만드는 방법 아세요? 한천에다 상온에서 설탕 세 숟갈 넣고 저으면서 귤 알맹이를 넣으면 젤리가 돼요. 한참 젖다보면 분명히 액체인데 나중에 고체로 바뀌면서 들어간 내용물들이 고대로 있어요. 동결된 거예요. 시간이 정지된 거예요. 주님께서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동결시켜놓은 거예요. 개인적인 우리의 몸통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어요. 과거에서 현재를 통해서 미래로.
“천당 갈까, 지옥 갈까? 고민이다.” 지금 흐르고 있지만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괜히 걱정을 하는 거고, 실제로 구원받는 사람들은 그런 걱정과 아무 상관없이 주께서 마네킹 만들어서 마네킹채로 자기 몸통에 집어넣어서 구원시키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 11장에서는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었다는 거예요. 젤리에 오렌지 넣으면 오렌지 젤리가 되겠지요. 포도 넣으면 포도 젤리가 되겠지요. 팥 넣으면 팥 젤리가 되겠지요.
우리는 어떤 젤리에요?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서 젤리가 된 거예요. 자기 딴에 순종했다고 백날 우겨도 그것은 순종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순종치 않습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순종할 수도 없고 아예 순종이 안 되는 이유가, 순종 안 되도록 했다는 이걸 알아채는 게 복음입니다. 순종하라고 가르치지요. 백 프로 사기꾼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시간의 정지를 못 느끼니까.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시간의 정지를 못 느끼고. 성령 없는 상태에서는, 나중에 31장에 나옵니다.
미리 이야기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은 우리한테 “너, 왜 이렇게 잘못했어? 왜 이 따위로 행동해?”라고 묻지를 않아요. 묻는 건 하나에요.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네가 걱정하느냐고 책망해요. 성령이 와서 책망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살까 하고 쳐다보고 있는 그 자체를 책망해요. 볼 것도 없는 걸 왜 보느냐 이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결혼하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신혼 초에 남자가 볼일 보고 있는데 아내가 와서 문 여니까 남자가 노크 좀 하라고 하면, 여자가 볼 것도 없으면서. 이미 볼 것 다 봤는데 뭘 감추느냐고 하잖아요.
주님이 그렇게 보시는 겁니다. 잘했다고 볼 것 있습니까? 못 했다고 볼 것 있어요? 원래 못 하는데. 성령이 와서 책망하는 게 그거에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왜 자꾸 자신의 행동거지를 쳐다보느냐 말이에요.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안 봐도 되는데. “이번에 보증만 안 섰어도 집하나 샀는데. 보증서서 사기 당했다. 보증을 왜 섰을까?” 주께서는 사기를 당하나, 안 당하나, 집을 날리든 그것과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가 천국 갈 때는 다 놓고 가야 돼요.
부자 청년이 영생 얻으러 왔잖아요. 주께서 요구한 게 뭐였습니까? 다 놓으라고 했지요. 부자 청년으로 오지 말고 부자 떼버리고 가난한 청년도 아니고 주께서 그냥 청년으로 부르려했는데 그 청년은 그냥 청년으로는 죽어도 못 가겠고 부자 청년으로 가겠다는 거예요. 계속 자기 몸통 보는 거예요. 아쉬워하는 거예요.
부자 청년은 자기가 부자 되는 것을 사는 것이라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걸 사는 것으로 보지 않아요. 우리가 산다는 게 무슨 의미에요? 이 상태가 산다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사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거든요. 지금 내가 살잖아요. 이게 나의 일로 여겨지십니까? 그것 잘못된 생각이에요. 하루하루 머리 빠지고 이런 것 다 주의 일입니다.
여러분, 참새가 날개 짓하는 것이 자기 일로 보십니까? 참새가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 하는 것이 자기 일입니까? 성경에 마태복음 10장에 그렇게 돼있던가요? 참새도 주의 뜻이 아니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참새가 나는 것도 참새 일이 아니고 본인에게 맡겨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에요. 왜 내 일도 아닌데 고민을 혼자 늘어지게 하고 한숨을 쉬십니까. 절망, 낙담, 이런 게 떠날 새가 없어요.
사렙다 과부가 밀가루 통을 긁는 꼬라지하고는. 밀가루가 없어. 그 사렙다 과부가 만약에 저한테 와서 “목사님, 가뭄으로 밀가루 떨어졌습니다.”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잘 됐네요. 죽으면 되겠네요.” 이게 제 상담입니다. 이번에 글 쓸 때 그게 있어요. 애가 몸이 아픕니다. 죽으면 되겠네. 그때가 아니면 언제 죽음을 생각합니까? 그 타이밍이 아니면. 항상 우리의 바닥은 죽음이 깔려있는데 깔려있는 죽음을 언제 생각하겠습니까? 민준이가 애 먹이면 같이 죽으면 되는 겁니다.
주님이 산다는 것은 항상 죽음 안에 녹아 나와야 돼요. 피자 판에 치즈가 있잖아요. 오븐에 넣고 구우면 피자가 다 녹아 있지요. 우리 안에 죽음이 스며들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느 순간 마네킹이 되어 시간이 정지되어 스톱이 될 때 비로소 그 죽음이 표면에 떠오릅니다. 주님께서 살리기 위해서 깔아놓은 죽음이에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너는 죽어 마땅해.” 그 죽음을 깔고 죽음 위에서 생명이 결합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언약입니다.
몸통 이야기는 조금 있다 하고 그림으로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에서 이 그림만 알아도 땡 잡은 겁니다. 인간에게 문명이 있어요. 살자는 거지요. 여기에 과학, 철학, 종교, 이런 것들로 인간을 살려내는 거예요. 종교는 중세 때부터 결합입니다. 중세에서 기독교가 무슨 역할을 했느냐 하면, 온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결집력을 양산하는 거예요. 여러분 설날에 만나봤지요. 복음으로 하나 되니까 무슨 꼴이 나는지 목격하셨지요. 기독교도 그런데 다른 종교와 붙어 보세요. 얼른 빠지고 싶은 생각이 들 거예요.
과학은 생산성과 관련돼요. 마르크스가 최초로 정리한 거예요. 인간은 생산성인데 옛날에는 그냥 팔자 좋았어요. 하루치만 있고 내일 가면 또 있었어요. 언제부터 갑자기 내일까지, 모레까지, 한 달까지 비축하는 새로운 생산이 등장했거든요. 그게 왜냐하면 곡식을 개량하고, 종자를 개량하고, 가축을 개량하니까 소모 이상이 생산이 많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는 꼭 도둑놈들이 있게 마련이에요. 그 도둑들을 귀족이라 하는 겁니다.
귀족은 잉여생산물로 전쟁을 발달시켰습니다. 전쟁해서 빼앗는 것을 마르크스는 엘리트층이라 했고, 관료직, 귀족이라 보면 돼요. 영토를 많이 갖고 자기는 놀고 다른 사람들은 일하고. 너만 귀족이냐, 나도 귀족 하겠다는 것이 16,7세기에 근대국가로 발달하면서 귀족이 바로 현재 관료가 되는 겁니다. 왕이지요. 더 발달하면 자본가가 돼요. 처음에는 그냥 먹고, 그냥 살던 시대, 이게 BC6000년경. 드디어 정착했던 시대, 도시국가가 성장하거든요. 세계 4대 문명이 BC3500년경, 메소포타미아는 BC3500년경, 이집트는 BC3000년경, 인더스 갠지스 강은 BC2500년경, 중국이 제일 늦어요. 은나라, 하나라가 BC2000에서 1500년경. 그렇게 돼요.
지금은 자본, 돈 많은 사람이 돈을 버는 시대에요. 이것이 과학과 철학과 종교로 가는 겁니다. 이게 이 세상이거든요. 인간은 탑을 쌓듯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요. 하늘나라를 향하여. 그런데 정작 천국에 계신 분은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언약입니다. 여러분 이 표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만나면서 세상 좋아하는 사람은 그대로 지옥 가고, 이걸 만나는 접점이 언약이거든요.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잖아요. 새 언약은 십자가 사건. 여기에 걸려든 사람이 사도 바울. 십자가 사건부터는 천국은 오직 십자가로 죽은 자인데 주님 주신 사흘 만에 살아나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인하여 천국 가는 거예요. 그 접점 지점이 언약입니다. 지금 여러분, 어디 쯤 가고 있어요? 혹시 떨어지는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비슷하게 가려고 하다고 왔기 때문에 종교인이에요. 더 큰 자본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까지 이용하는 사태고. 성령이 와서 통과해버리면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 동네는 자본의 세계인데 다니엘에서는 짐승의 나라지요.
이 그래프에 의하면 오늘 출애굽기 30장, 31장은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이 안에 누가 섞여 있을까? 이게 대세인데 소수민족이 있어요. 나올 때는 오십만으로 나왔지만 얼마 안 되지요. 성경에도 작은 숫자라고 했으니까. 이 소수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다른 민족은 스스로의 결합력으로 모여서 그 당시 자본가, 왕이 칼 들고 법을 만들고 세금 안 바치면 죽인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 안에 누가 동행하느냐 하면, 미리 당겨서 여호와께서 주가 되셔서 동행하는 겁니다.
그러면 색연필이나 연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깥에서는 심이 안 보여요. 심이 끝에 약간 보이고. 그런데 종이를 까면 심이 계속 나오지요. 종이 푸는 이것, 죄를 지어야 돼요. 죄를 짓게 되면 그 안에 있는 희생하신 분의 공로가 나오게 돼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다른 민족과 차별되게 했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거예요.
그걸 출애굽기 30장 37절에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게 거룩이에요. 그러니까 거룩이란 동행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죄인들을 계속 끌고 가는 위대한 능력, 그걸 다른 말로 거룩한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자기 스스로 살아야 될 운명이라면,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제가 요즘 와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하는데 하나님을 찾으려면 신을 생각하지 말고 이스라엘을 생각하라고 했어요. 그냥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의 투사체가 되어 자기 닮은꼴이 돼요. 그건 가짜거든요. 내가 지어낸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짜입니다. 그런데 진짜 신은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동행했던 하나님. 그래서 그 당시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동행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말고 이쪽에도 자기 딴에 신들이 있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하나님 보시기에 이쪽에 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은 없는 거예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을 만든 인간만 존재하지 신은 없는 거예요. 신이 없는데 신을 만든 이유는 뭐냐 하면, 신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기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가상체로 신을 하나 만들어놓고, 자기가 만든 일종의 거울이지요. 늘 자기 잘남을 스스로 묻고 대답하기 위해서 거울 보는 식으로 만든 게 신이기 때문에 그 신은 사실은 조작된 신이고 이 땅에 신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결론은 신은 없다. 만들면 생기지만 만들기 전에는 없는 거예요.
신은 어디 있는가? 이스라엘 속에만 있고 이방인에게는 신이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다고 오해한 겁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데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뭘 만들어요. 31장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유다 지파 홀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하고”
이것 누구 좋으라고, 뭐 때문에 이 일을 해야 되지요? 이스라엘을 위함입니까, 하나님을 위함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속에 담기기 위한 이스라엘과 언약, 죄악 된 인간과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를 하나님 스스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니까요. 네가 알아서 만들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임해요.
쉬운 예를 들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기관총이라고 보면 되고, 총알은 하나님의 신이 되는 거예요. 총알도 없이 기관총 들고 설치면 이건 애들 장난감입니다. “쏜다, 쏜다.” 하면 뭐라고 합니까? “그래, 쏴라.” 목사들이, “주의 종을 저주하면 저주받는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저주해봐라.” 이렇게 나와야 돼요. 왜? 원래 총알이 없으니까.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성령께서 일하실 때는 우리는 잘했다, 잘못했다는 그 자체조차 생각하지 말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겁니다.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둬둔 거예요. 새순교회 머리 좋은 걸 다 알지만 그래도 제가 못 미더워서 여러 번 순간순간 반복합니다.
전지현이 휴대폰 문자 왔는지 확인해도 소용없어요. 그 순간 오게 되면 이것은 자기 일이 아니고 김수현의 일이에요. 김수현의 여자 친구는 별에서 온 그대에 의한 똘마니고 하나에 마네킹에 지나지 않아요. 별에서 온 그 남자 주인공을 위해서 여자 배우가 그냥 동원된 것뿐이에요. 시간이 동결되면 휴대폰을 보고 싶어도 못 봐요. 스톱돼야 돼요. 그리고 바꿔치기 해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 얼음 됐으니까. 젤리니까.
시간이 다시 흐르고 난 뒤에는 “휴대폰에 뭐가 왔는데 없네. 아까 분명히 소리 났는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원인도 모르고. 난 몰라. 내 할 일만 하지 뭐. 그래요. 우린 내 할 일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갑자기 십자가 생각나면 스톱! 우리 할 일 하다가 성령이 와서 십자가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스톱이 되면서 우리는 오홀리압이 되고 그 순간 브살렐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는 사실을 3초내지 4초라는 아주 짧은 순간 그걸 알게 돼요. 내가 한 평생 사는 것이 내 인생 내가 만든 게 아니구나. 주께서 만들어가는 거라는 것을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내가 별에서 온 남자는 따로 있어요. 사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따로 있어요.
그분이 나와 함께 있을 때 그게 바로 현대판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인데 그 거룩이란 것이 어떤 차별화 때문인데 이스라엘 되지 못한 나라는 자기 몸을 자기가 살려야 돼요. 부지런히 철학과 과학과 모든 학문을 동원해서 경쟁해야 되고 싸워야 되고, 선택을 잘했을까, 못했을까 그것 때문에 노심초사해야 되고 걱정해야 돼요.
실제 이름을 거론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서경수 목사님을 볼 때마다 늘 배우는 게 있어요. 나도 저런 믿음이 있으면 좋겠다. 아무 계획도 없고 아무 목적도 없어요. 나는 저런 믿음 한번 가져보나. 아무 생각 없이 살아요. 별에서 온 그대, 마네킹 됐어. 시간이 정지됐어. 해야 될 소리인지 안 해야 될 소리인지 그런 걸 아예 생각지도 않아요. 오홀리압? 미리 생각하면 걱정하잖아요. 그런데 성령께서 와버리니까 미리 생각도 못하게 만드네. 주위 사람들, 가정이 죽어날 판이야. 아무 계획도 없으니까. 그러나 서 목사님은, “나 같이 믿으면 될 텐데 믿음 없는 게 말이 많나.”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지.
31장에 들어가면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자기 일에 대해서 어떤 책임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보석을 왜 이렇게 깎았어.” 이런 것 없습니다. 지 마음대로 깎는 그것이 똑바로 깎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여기 2절에 봅시다. “우리의 아들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그러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는 모든 일거수일투족 하는 일을 같은 몸통, 같은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평할 수 있습니까? 평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이 누리는 혜택이에요.
여기서 골로새서 2장을 봅시다. 2장 1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네가 남들한테 어떤 욕을 들어먹을 필요도 없는 존재.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너는 안식일을 왜 그렇게 지키는 거야, 절기를 왜 안 지키는 거야. 너는 왜 율법을 안 지켜. 안식일을 왜 안 지키는데.”라고 어느 누구라도 너를 평할 때 “시끄럽다. 됐다.” 이러고 끝나란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어요. 왜? 우리의 몸은 나를 위한 몸이 아니고 주께서 사용하시는 몸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 평가에 마음 둔다는 자체가 그 순간 갑자기 내 몸은 내가 다독거리고 챙겨야 된다는 갑자기 마귀적인 생각이 엄습하면 우리는 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누가 평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선언해버려요. 특히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라고 돼있지요. 다시 오늘 본문 31장 14절에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그런데 방금 보았던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는 안식일을 인하여 네가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고 평들을 필요 없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같은 하나님 말씀인데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됩니까? 둘 다 맞지요. 그러면 어떻게 이걸 융합시킵니까? 융합시킬 필요도 없어요. 안식일을 더럽힌 자는 죽으면 되죠.
지금 출발점이 어떻게 지키려고 하면 우선 내 몸통부터 챙기는 식이 돼요. 안식일 법만 드러난다면 죽어도 좋다는 식이 돼야 되는데 내가 안식을 지켜서 어쨌든 간에 이 한 몸 살리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연 듯 든다면 그 자체가 바로 안식일 위반한 게 됩니다. 안식일보다 내 몸통이 우선이 돼요. 처음에 안식일이란 율법은 털인데 그 털은 예수 그리스도 몸에서 나온 털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털 하나 건드려도 전체를 다 건드린 셈이 된다 했지요.
안식일이 죽으라 하면 우리는 죽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안식을 지키란 그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으로 옵니다. “네가 안식일을 못 지키면 죽는 거야.” “아멘.” 이러면 안식일은 드러나고 나는 죽고. 죽은 인간을 왜 다시 자꾸 꼬집고 만지고 그래요. 안식일도 못 지키고 죽은 인간인데. 죽은 걸 걱정한다는 것은 자기는 안 죽었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온전히 죽었으면 걱정도 하지 말아야지. 죽은 인간 다시 거론해서 죽었느니, 살았느니 걱정을 왜 합니까? 하나의 젤리인데, 동결됐는데.
모든 31장 말씀은 우리를 동결시킨다. 우리의 몸통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쓸 입장이 못 된다. 우리를 순종치 못한 가운데 가둬뒀기 때문에 이래도 순종치 아니한 것이고, 저래도 순종치 아니한 것이고. 순종했다는 말은 아예 하지 마라. 나는 너를 알거든. 뭘 해도 순종한 게 아닌 걸 알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저는 뭘 해도 순종과 관계없다는 것을 그냥 우리 몸에 치즈 들어오듯이 우리 몸이 순종치 않는 몸으로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돼요. 복음이 어렵지 않습니다. 안 믿어서 문제지 사실은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움직임이 없다.] 우리가 울산바닥에 살면서 매일같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하고 공포, 특히 불안과 공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탐심 같은 것.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렇게 설치는 걸 보고 움직임이 없네. 아무 움직임이 없어요. 혼자 꼼지락거리며 뭘 열심히 하는데 가정주부로서 또는 직장생활하면서 부지런히 하고, 차사고 나서 물어주기도 하고, 많은데 주님 보시기에는 미동도 없네. 아무 움직임이 없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탕자가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많이 했잖아요. 돈 갖고 가서 기생과 허랑방탕하게 다 날리고 나중에는 굶주리고 노숙자 생활하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들 기다리는 아버지한테는 뭘 해도 그냥 아들이지요. 언젠가는 돌아올 아들이지요. 움직임이 없어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순종치 아니한 거니까. 네가 생각하는 너의 안목은 하나님은 갖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네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안목은 네가 지어내서 마귀 들려서 혼자 착각한 것이지 주님의 안목은 십자가라는 렌즈로 보면 그냥 순종치 아니함이에요. 순종치 아니함으로 동결된 거예요. 끝났어요.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서 조금도 미동치 않아요. 움직임이 없어요.
바로 그 관점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누가 꾀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누가 네 마음을 흔들어 놓더냐 이 말이거든요. 최선을 다하라. 열심히 구하라. 주실 것이다. 왜 자꾸 마음을 흔들어놓느냐 말이죠. 감사헌금 안 해서 벌 받았다느니, 목사한테 대접해서 병들었다느니, 온갖 걱정, 근심을 자꾸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좋은 질문한 것처럼 겨자씨가 자라서 하늘나라가 됐는데 그 겨자씨가 믿음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겨자씨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이십니다. 만약에 그 겨자씨가 내 믿음이라면 또 내 믿음을 내가 챙겨야 돼요. 그런 해석은 마귀적 해석이고 겨자씨가 주님이 알아서 커지게 하실 거예요. 그 겨자씨 안에 우리도 작은 알맹이로 함께 있는 겁니다. 그게 창세전에서 우리를 예수 안에서 동결시킨 겁니다. 시간의 정지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가 시간을 정지시킨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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