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4. 1. 24) 1강자유게시판마태복음

광주 강의(2014. 1. 24) 1강

이름 : 서경수(IP:121.146.32.194)

광주 강의 (2014. 1. 24) 50-1

에스겔 47장 1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동쪽은 전에 설명했지요? 모세가 세운 성막의 출입구가 어느 쪽입니까? 동쪽이지요. 에덴동산의 가는 길도 동쪽입니다. 아담이 쫓겨난 후 에덴 동편으로 가는 길을 차단했습니다. 동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이 비정상이라는 겁니다.

비정상이지만 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지요. ‘이 세상 외에 별다른 세상 있겠어? 남들 다 그렇게 살잖아!’ 라고.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그것 주의하라고 주님은 넓은 길과 좁은 길을 이야기했습니다.

길이 있다는 것은 떠나라는 의미죠. 이 세상이 전부라면 길이 있을 리가 없지요. 그냥 여기서 살면 되니까요. 여기가 광주인데, 광주에서 태어나서 광주에서 살다가 광주에서 죽으면 그만인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라고 하셨어요. 이 말의 느낌은 ‘우리가 계속 여기에서 살면 안 되잖아!’ 이런 것입니다. ‘이 동네에 계속 살아서는 안 돼. 빨리 떠나!’라는 뜻이란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나는 곧 길이요 --”라고 했기에, ‘예수님 따라가면 되겠다.’고 여기는데, 길이 하나뿐이 아니잖아요. 물론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길이 하나지만 우리들이 보기에는 여러 길이 있잖아요. 마태복음 7장에서 두 가지 길을 말씀했습니다. A길이냐, B길이냐 할 때, 주님은 사다리 타기를 합니다.

사다리 타기의 특징은 끝에 가야 결말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주님이 할 수 있는 것이 뭔가 하면, 마지막을 먼저 얹어요. 길에다가. A길과 B길이 있는데, 둘이 같이 절대 안 모입니다. 꽝 아니면 대박입니다. 한 길은 영생으로 통하고 다른 길은 멸망으로 통합니다. 누구나 영생을 얻고 싶지 지옥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영생과 멸망의 길을 말씀하시는 것은 ‘네가 골라잡기 나름이다.’라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너는 쉬운 길을 골라잡을 것인데 그것은 필히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은 멸망이고, 적게 찾는 길이 영생의 길이다.’ 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뭔가를 선택할 때는 다수의 의견을 진리라고 여기고 따르잖아요. 오늘 처음 공부에 참석하신 분이 계신데 “큰 교회 가고 싶어요, 작은 교회 가고 싶어요?” 질문한 제가 어리석지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것으로 봐서 진리에 가깝다고 판단할 심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가 신학을 공부한 전문가가 아니기에 스스로 판단할 능력은 없고,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 정답일 것이다.” 이렇게 나오면, 주님은 “내가 그걸 줄 알았어.”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가다가 아무도 찾지 않는 쪽으로 간다면-- 가라지가 가는데 알곡이 섞이면 서로 소통이 안 돼요. 본인이 힘들어서 그런 교회에 못 다닙니다. 나와야 돼요. 누가 내쫓는 것도 아닌데 ‘이러다가 내 인생 망칠 수도 있겠다.’ 세상이야 여지가 많기 때문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 있지만, 만약 도착 지점에 가서 결정이 되면 두 번 다시 여지가 없잖아요.

마태복음 7장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이 멸망의 길이다.’라고 했는데, 우리들의 선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 진리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누구한테 했을까요? 1) 유대인 2) 제자 3) 유대인과 제자들. 정답은 3번입니다.

이제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지옥 갈 유대인에게 이 말씀을 주셨는데,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조심을 했겠습니까? “야, 나는 좁은 길로 가야지.”라고 해도 그들은 좁은 길로 갈 수가 없어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로 가지 말아야지.”라고 했지만 결국은 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영생의 길로 갈 자질이 있는 사람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나와요. 많은 목사들이 이 본문으로 설교해요. ‘성전에서 물이 나와서 그 물이 많은 사람을 살린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죄악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해석이 나를 지옥으로 보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요? 없지요. 왜냐하면, 목사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 뿐 아니라 내가 봐도 그런 식의 해석 외에는 다른 해석이 나올 수가 없어요.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멸망의 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47장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은 생명의 물이고, 그 물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면 이 해석에 동참했을 때 그 길은 영생으로 가는 길일까요, 멸망으로 가는 길일까요? 멸망의 길입니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서 이 말씀 잊지 말라고 이벤트를 벌였어요. 오순절 날 호수에서 물을 퍼 와서 성전에서 부었어요. 이렇게 함으로 율법사들은 하나님의 숨은 뜻을 이끌어내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방식을 창안해 내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축제를 즐기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파악한 거예요.

골로새서 2장이나 갈라디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안식일이나 어떤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다는 주장을 믿지 말라고 했어요. 이 말을 오늘 제 강의와 연관시키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구원 받고자 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그런 심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적 이벤트를 벌일 때 우리는 박수를 치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 따라간 무리가 다수를 이루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 47장 이 본문이 나올 때 이것을 안다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여겨 에스겔 47장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이것이 오늘날 신약 교회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십자가를 비켜서 에스겔 47장의 내용을 지키자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돼요. 이걸 빼면 지옥 갑니다.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납득시킨다든지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임이 나타납니다. 왜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인간들이 바로 성경 말씀으로 교육받고 훈련한 자들이었습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많은 생명들을 살립니다. 장차 세워질 성전은 물이 나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물이 나와서 삽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대로 믿고 오실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였어요. 이처럼 인간들이 아는 것으로 행하는데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지요.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을 하면 그들의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이 안 나옵니다. 어쩌면 좋아요?

이제 이 본문에서 어떻게 십자가가 나오는지 집중해 보세요. 십자가를 비껴가면 안 됩니다. 피로 구원받지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십자가만 걷어치우면 “우리도 성전을 기다리자!”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되면 다 같이 멸망 길로 가는 겁니다.

제가 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겔 47장에 성전이 나오지요? 그리고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크게 오해해서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와 이 물이 우리를 살린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누구도 이 물이 우리를 죽인다고 해석한 사람이 없어요. 지금도 주석을 보면 ‘물이 우리를 죽인다.’는 식으로 해석한 책이 없어요. 그러니 이들은 말로는 기독교인이지만 실상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전 개념은 심판 개념입니다. 심판에서 심판이 나오는 겁니다. 이 심판 덩어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이 말을 세례요한이 누구에게 했는가 하면, 에스겔 47장을 믿고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했습니다.

보통 성전은 인간이 만듭니다. 인간이 만든 성전에서는 물이 안 나옵니다. 예를 들어, 여기 고구마가 담긴 냄비가 있는데 강의를 하는 중에 보니까 여기에서 물이 흘러나와요. 이런 광경을 보면 우리는 경악해야 되고, “용서 하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고 합리적인 생각을 합니다. “집사님이 냄비에 고구마를 찌면서 물이 남아 있었고, 그 물이 구멍 난 냄비에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더 추가할 것은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것에 추가를 함으로 우리가 만든 것을 심판하는 것이 공식입니다. 제사장이 양을 잡을 때 그 양은 어디서 나온 양입니까? 그 양은 자기 집에서 키운 양이에요. 그 양에 대해 인간이 추가적인 의미를 보텔 수 있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양을 잡아 드리니까 성막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양을 잡는 행동에 따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과 무관하게 여분의 것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두려워 떨게 됩니다. 사사기에 보면 삼손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삼손은 수염소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 때 불 가운데 천사가 타나났어요. 이 천사는 어디서 등장한 것입니까?

인간이 드린 것은 수염소뿐인데 왜 불 가운데서 천사가 등장해서 불과 함께 하늘로 올라갑니까? “아저씨,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놔라, 나는 기묘자다.”하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에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누구와 씨름을 했지요. 야곱이 놀란 것은 상대방이 강해서 놀란 것이 아니고 그분이 사람이 아니었어요.

사람은 사람끼리 있을 때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사람이 아닌 다른 요소가 왔을 때는 기절을 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놀란 것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왔다는 점입니다. 이건 보통 충격이 아닙니다. ‘내가 신학을 공부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이런 생각은 문젯거리도 안 됩니다.

제일 큰 문제는 나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 속에 왔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라고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거예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추가적 요소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추가적 요소에요. 사도 바울이 외친 것은 추가적인 요소입니다. 이것은 철학자나 과학자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여러 번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어서 별 감각이 없고 잊고 살지만 성령께서는 이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겨울이 되면 늘 독감 예방주사를 맞듯이 주께서는 계속 십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빼앗겼고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런 문제는 문제도 아닙니다.

목사가 마누라 때문에 자살했다고? 그건 문젯거리도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살할 이유도 없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그게 무슨 문젯거리가 돼요? 십자가 때문에 놀라고 경악하기 바쁜데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거기에 신경을 씁니까?

하나님이 ‘성전을 만들어라. 양을 받치라.’고 하셔서 바쳤는데, 바친 것 이상으로 덤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심판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지난 시간에 ‘에덴 사건의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오단 군은 고등학교 시절에 소풍 간 적 있지요? 단양 대흥사에 갔다고? 그럼 매일 대흥사에 갔다 옵니까? 아니지요. 고등학교 소풍 때 갔을 뿐입니다.

우리의 사건은 지나가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에덴동산 사건을 절대로 지나간 사건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현재의 사건으로 만들어요. 에덴동산은 시간이 흐르지를 않아요. 우리는 시간이 흘러서 점점 늙어가고 60년 쯤 살면 몸이 성한 곳이 없는데, 주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시간이 흐르지를 않아요. 시간이 정지되었어요. 에덴동산을 반복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취한 조치에 대해서 너희들이 동감하라는 말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미워하지 말고 내가 따먹어서 저주 받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주받는 그 조치에 대해서 ‘참 잘 하셨습니다.’라고 박수 치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왜 하나님은 인간을 태어나게 해서 고생시킵니까?”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왜 안 믿는 사람을 지옥 보내고, 믿는 사람을 고생시킨 후 천국 보내는가?’ 질문 자체를 바꾸면 답변이 됩니다. “하나님이 저를 더 고생시킬 수 있는데 왜 이정도로 그칩니까?”라고.

갈수록 십자가의 낮아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33살에 죽었어요. 저나 목사님이나 33살 넘었어요. “왜 이렇게 오랫동안 살게 하십니까? 자녀도 잘 성장하게 하고 왜 이런 호사를 누리게 하십니까? 이것은 나의 죄에 비해서 말도 안 되는 은혜입니다. 왜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해야 돼요. 왜? 우리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저주를 덜 받았어요. 분명히 성경 말씀에 따르면 저주 받게 되어 있는데, 무슨 저주가 아들 장성하고 이런 저주가 있어요? 이것은 분명히 추가적인 조치입니다. 내가 하는 짓에 대해서 그것마저 은혜로 바꾸시는 매개되시는 분의 조치, 묵묵히 십자가 지셨던 그 은혜, 그 은혜의 작용 때문에 현재 내가 한 짓에 비하면 너무나 과분한 은총을 지금 받고 있는 거예요.

2040년 2월 8일에 결혼해도 되는데, 왜 2014년 2월 8일(김을수 집사 차녀) 결혼하느냔 말이지요? 결혼식 할 때 “왜 이렇게 좋은 사위를 주십니까? 이것은 과분한 은혜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란 말이지요. 이런 기도를 한다면 이상한 질문은 아예 안 나오겠지요.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가 늘 불평하면서 사는데,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햇볕과 공기를 주시기에 이 모든 것이 과분한 것이라는 겁니다. 신명기 9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바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로 때문에 가나안에 간 것이지,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해서 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저주 받아 마땅한데 이렇게 주시다니’ 이런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 속에 있어야 됩니다. 심판에서 출발하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전15:10).”

창기가 울면서 예수님 발에 향수를 뿌렸을 때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비웃었습니까? 그 때 주님 하신 말씀이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했어요. 이분이 바로 길 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같이 이 길을 가려면 마음가짐이 주가 원하는 마음으로 달라져야겠지요.

에덴동산을 반복한다고 했는데, 그 때 거기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입니다. 또 있었지요. 뱀. 다 조연입니다. 그럼 주연은 누구입니까? 주연은 조연 속에 담긴 채 오는 거예요. ‘나’가 있다면, 나를 만드신 분은 어디 있는가? 보통은 ‘나 밖에 있다’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내 안에 흔적으로 날 만드신 분이 함께 있어요.

그래서 그 흔적이 나를 계속 죄인으로 규정하고,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인정하면서 이런 죄인과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너로 인하여 핍박받는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이지요.

조연의 역할이 있지요. 사람이 있는데 누가 응시하게 되면 사람은 마중을 나갑니다. 저쪽에서 다가오는 시선에 입각해서 내 쪽에서 다가오는 시선에 대해서 뭔가 처리해야 되고 마중을 나가야 되는데, 그 때 한 것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어요.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의 따가운 시선이 초점이라면, 이 평면이 영사기고, 영사기를 쏘아댑니다. 따갑게 응시하게 되면, 이게 뭐냐 하면 스크린입니다. 스크린에 도달된 게 인간들이에요.

이 인간들은 맨몸이 아니고 치마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식한 겁니까? 이 세상에 나 외에 다른 존재가 있고 그 존재를 응시할 때 우리는 숨을 수밖에 없고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부부면서 서로 부끄러워하니까 치마를 입었단 말이지요.

외부의 따가운 시선에 대응하는 방법은 내가 외부를 볼 때 이것이 날 응시하는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이 두 개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된 게 바로 무화과나무 잎 치마입니다. 이것이 원피스나 브라우스가 아닙니다. 치마는 하체를 가리는 겁니다. 사람이 죄 짓고 난 뒤에 부끄러워했는데 머리카락을 부끄러워했습니까, 손을 부끄러워했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뭔가 부끄러운 부분이 발생된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볼 때, 하나님이 바라보고 있다는 그 흔적이 자신의 어느 부위에서 바라봄을 느끼는 거예요? 하체부분에서 바라봄을 느끼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만들어 입은 거예요.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는 말은 지금 무화과나무 잎의 치마를 입었는데 또 가죽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출발할 때, 인간 쪽에서는 ‘내 존재가 정상이 아니야.’라고 부끄러움을 느꼈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기껏 한 짓이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응시로 인한 인간의 부끄러움입니다. 혼자 있다면 치마를 입을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 보고 있기에 부끄러운데, 부끄러운 부위를 치마로 가려야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은 외부의 시선이 나를 응시할 때 나는 숨어야 한다는 본성이 이미 죄가 있고 난 뒤에 발생된 어쩔 수 없는 모습입니다.

교인 중에 수술 후에 한 주 교회에 안 나온 사람이 있어요. 왜냐? 수술해서 눈에 시퍼렇게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부끄럽잖아요. 사람 앞에 나설 때는 타인의 시선을 응시하고, 그 시선에 대항해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대응책을 가지고 마중을 나가는 거예요. 그것이 내 외부에 대한 최선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혔는데, 이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힌 것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의 운명에 동승한 하나님 쪽에 속한 어떤 분, 그분과 하나님 사이에 유일하게 연결된 연결 고리로 가죽옷을 해 입인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해 입혔다는 말은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은 것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거는 옷걸이일 뿐입니다.

가족 옷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절대로 에덴동산을 과거 이야기로 끝낸 것이 아니었고, 대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에덴동산은 반복하면서 ‘정령 죽으리라.’는 죽음의 정체를 폭로하는 작업을 주님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내 인생’이란 것이 있습니까? 내 인생은 없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활용하는 거지요.

그래서 로마서 14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죽의 것이로라.”고 했지요. 죽고 살고는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네 것이 없는데 네가 왜 걱정해?” “이렇게 되면 못 삽니다.” “살고 못살고는 네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나를 통해서 에덴동산 사건이 되풀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지 나 개인이 어떻게 살고, 한 달 소득이 얼마이고 이건 주님 앞에 문젯거리가 아니에요. 사람들이 왜 기도합니까? 자기 살기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그런 기도는 이방인들이 지옥 갈 기도입니다. “주여, 이것이 필요합니다. 이것 주세요. 이런 기도 하지 말라. 필요한 것을 이미 주가 아신다.”

우리는 그냥 주의 것으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에덴동산이 반복된다는 거예요. 에덴동산의 반복이란 ‘선악과 따먹은 것은 죽음이고, 생명나무 따먹어야 산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저주 때문에 죽었고, 부활하신 것은 생명 주시려고 부활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반복해야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속에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시간은 흐르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사건 안에서 시간은 정지되었어요. 계속 사건이 벌어지는 거예요. 주께서 하신 조치만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말려들었고 하나의 조연으로 출연하는 겁니다.

치마로 무엇을 했습니까? 하체를 가렸지요. 출애굽기 28장 42절에 보면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고 했지요. 지금 하나님이 아론을 상대하는 겁니까, 아니면 아론 위에 있는 주님의 흔적을 상대하는 겁니까? 주님의 흔적을 상대하는 거예요.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하체를 가렸지요. 그 사건을 지금 되풀이해서 계속 상기시키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을 일으켰던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에덴동산을 벗어날 생각을 말라는 거지요.

레위기 18장 6-7절에 보면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고 되어 있어요. 어미, 계모, 자매, 손녀, 외손녀, 고모, 이모, 자부, 백수모, 딸, 처제 등등의 하체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연이어 나와요.

이 말씀의 특징은 남자의 하체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자의 하체를 누가 가로막고 있는 거죠. 누가? 그 남편이. 또 딸의 경우는 그 아버지가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가정이란 인간의 부끄러움을 용서하기 위해서 가로막는 체제로 하나님이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조성물로 주님이 사용하시겠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언약이 없는 애굽에서는 상상도 못할 계명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8장에서는 ‘애굽의 풍습을 쫓지 말라.’고 해놓고, 애굽의 풍습과 하나님의 계명이 주어진 이스라엘의 풍습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애굽을 기억하고 힘들고 고생스러우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어요.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면 이것은 추가적인 거지요. 추가적이라는 말은 행동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있는 그대로 있어도 주께서 추가적인 요소를 유발시켜요. 레위기에 보면, 오징어나 돼지고기를 먹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오징어나 돼지고기를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안 죽어요. 그러면 어느 것이 추가적 요소입니까? 돼지고기 먹으면 죽는다는 것이 추가적 요소지요.

모든 추가적 요소는 결국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주 받았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하나님이죠. 성전을 만들었다. 모든 애굽적인 사람들은, ‘성전 만들어서 그곳에서 물이 나오면 그것은 생명의 물이고, 그 물을 마시면 우리는 산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빠졌습니까? ‘우리가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요소가 빠졌지요.

이것이 바로 저주 받아야 될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 날 살려봐라!” 이러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 봐. 그러면 내가 하나님께 박수치고 믿을 줄게.”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런데 창기, 강도, 세리는 어떻습니까? 반대로 나가지요. “주여, 죽어야 마땅한 죄인을 왜 용서하십니까? 저는 지옥가야 되는데 왜 저를 구원합니까?” 이렇게 됩니다. 어떤 드라마를 보면, 하지원이 고려의 왕자와 하룻밤을 동침해서 임신을 했어요. 우리 같으면 젊은 여인을 임신시키고 도망쳤다고 할 텐데, “저 같은 천한 종에게 임신케 하시니 고맙습니다. 고려에 계시는 낭군님 기뻐하세요.” 이렇게 나와요.

이것은 “나는 당신에게 종속되었습니다.” 이런 뜻이지요. 주인이게 종속될 때 비로소 종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주인이면 그렇게 할 수 없지요. “하나님이여, 임신시켜놓고 낭군은 없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이게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에요. 넓은 길의 특징은 자신이 힘들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거예요.

그런 자들을 향해 거짓 목사들이 “여러분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이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저주 받을 이유가 없고, 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복 주십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진짜 목사라면, 남편에게 맞아서 상담하러 온 여인에게 “맞아도 예수 믿으면 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소리 듣고도 교회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은 길로 가는 인간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우리에게 가죽옷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건방진 소리 할 때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좁은 길로 가라.’고 일러주시고 다시 깨닫게 할 때, 말씀은 살아있고 나는 말씀 앞에 늘 죽을 때, 말씀이 나를 죽게 하는 식으로 질질 끌고 말씀의 완성 상태로 우리를 넣어주는 식으로 구원받습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50-1.hwp (64.0K), Down:9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1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4. 1. 24) 1강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4-02-10
13,291 자유게시판 71강-롬 11장 33-36(깊도다)140209-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2-10
13,290 우리교회 유다 족속, 요셉속속 140209 스가랴 최고관리자 14-02-09
13,289 묻고답하기 영적 제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2-09
13,288 우리교회 기름받은 다윗 140209 - 최고관리자 14-02-09
13,287 설교 깊도다(로마서 11:33-36)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2-09
13,286 우리교회 깊도다 140209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2-09
13,285 강의 동결 140207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4-02-07
13,284 자유게시판 안양20140110b-히6장19절(존재의 힘)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4-02-07
13,283 자유게시판 안양20140110a-히6장19절(존재의 힘)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4-02-07
13,282 자유게시판 77강-에스겔 27장 1-4(두로의 운명)140205-이 근호목사 에스겔 최고관리자 14-02-06
13,281 묻고답하기 어떤목사의 답변 - 최고관리자 14-02-06
13,280 우리교회 두로의 운명 140205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4-02-05
13,279 자유게시판 서울 의존교회140110a,b (죄인구원)―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14-02-04
13,278 묻고답하기 목사님, 질문입니다. - 수련회 5강 중에서 !! [수련회] 최고관리자 14-02-04
13,277 자유게시판 가락-70이레 논문(선악겹치기)140102-33강b-이 근호 목사 레위기 최고관리자 14-02-04
13,276 자유게시판 24강-슥10장1-3(우상의 허탈함)140202 스가랴 최고관리자 14-02-03
13,275 자유게시판 70강-롬 11장 28-33(순종치 않음)140202-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2-03
13,274 묻고답하기 목사님..질문 있습니다. - 최고관리자 14-02-03
13,273 우리교회 우상의 허탈함 140202 스가랴 최고관리자 14-02-02
13,272 묻고답하기 깊도다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4-02-02
13,271 우리교회 성전 완공 140202 전도서 최고관리자 14-02-02
13,270 설교 순종치 않음(로마서 11:28-33)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2-02
13,269 우리교회 순종치 않음 140202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2-02
13,268 자유게시판 63강-YouTube강의(인간의 조건)1401027-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4-02-01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