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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동결 140207강의출애굽기

동결 140207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한윤범(IP:14.♡.134.60)

14-02-11 14:10

20140207a 울산강의-출애굽기 30, 31장 : 동결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30장 37절에 보면,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 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했지요.

2개월 전에 여기서 할 때 끊어진다는 말을 설명을 했습니다. 끊어진다는 것은 일단 모아놓고 잘라내는 거거든요. 너, 아니야. 넌 이곳 천국에 못 와. 그러니까 끊어지는 거지요. 모을 때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준이 있을 거라고 왔는데 막상 토막 내듯이 “너, 아니야. 넌 아니니까 집에 가.” 하는 기준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번 대전수련회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우선이 아니고 법이 먼저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에덴동산에서 사람 위주가 아니고 법 위주였지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이 사람보다 더 귀한 겁니다. 하나님도 참 이상하지요. 나무가 뭔데요? 생명나무가 사람보다 더 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쫓겨나서 생각이 잘못 되니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인간을 귀히 여길 것이라고 오해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귀할 것 같으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도 않았어요. 쫓아낼 때는 다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 쫓아낸 겁니다. 인간보다 더 귀한 것, 인간보다 더 우선되는 것, 그것을 위해서 추방시켰단 말이지요. 그분이 참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참 하나님이라 할 때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그런 오해는 멈춰야 돼요. 그만해야 돼요.

사람보다 법이 먼저입니다. 기준이 먼저고. 그러면 우리는 궁금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 찾아도, “너, 안 돼. 너, 집에 가.” 그 잘라내는 그 기준이 뭔지 우리로서는 상당히 궁금합니다. 기준을 알면 그 기준에 맞추면 되잖아요. 문제 출제 기준에 맞추면 되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준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굉장히 많아요. 그걸 율법이라 합니다. 그냥 법이잖아요. 법이 한두 개가 아니고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365가지인가 하는 많은 개의 법을 줬지만 율법 전체를 하나의 몸통으로 보는 겁니다.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쉬운 문제니까 대번에 알아맞힐 수 있어요. 사자를 화내게 하는데 털을 몇 개 뽑으면 사자가 화를 내겠습니까? 한 육천 개 뽑으면 화내겠습니까? 아니면 한 개만 잡아당기면 화내겠습니까? 사자 몸에 있는 털은 하나든 많든 관계없이 사자 몸통 피부에서 나온 거잖아요. 사자 코털 하나를 잡아당겨도 사자 몸통 잡아당긴 것과 똑같은 거예요. 모든 율법 중에서 하나를 어겨도 다 어긴 게 되는 이유가 몸통과 관련돼있어요. 율법은 뭐냐? 율법은 털이다. 하나를 잡아당기면 피부에 있는 다른 털까지 반응을 나타내지요. 율법은 털인데 어디에 붙어있는 털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털이 바로 율법입니다.

우리가 지금 출애굽기 30장을 보고 있는데 이것이 구약입니다. 구약은 아직 몸통이 다 드러나지 않았어요. 다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눈에 많은 털이 보이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도 잘라낸다고 하지요. “너는 안 돼. 지옥 가야 돼.” 잘라내니까 우리는 그 기준이 궁금하고. 그 기준이라고 제시한 것을 보니까 그게 법이고. 그래서 제 때에 주어지는 법들을 제꺽제꺽 다 지키면 하나님한테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갖게 되지요.

그런데 몸통은 안 보이고 여기서 나온 털, 이게 율법인데, 털만 보인다면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신이 몸통이에요. 삐져나온 율법이라는 털을 볼 때에 이 몸통은 모르니까 자기부터 먼저 챙겨야 되는 거예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먼저인가요, 법이 먼저 인가요? 법이 먼저지요. 벌써 오해했잖아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법이 먼저고 그걸 따먹으니까 너도 나가라고 인간을 추방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도 율법을 주니까 법이 우선이 아니고 법과 연결된 점선들,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점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점선 된 몸통, 이분을 위해서 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라는 몸통을 위해서, 나 잘 되라고 법을 줬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이건 창세기 3장과 2장이 완전히 배치되는 거예요. 생각이 안 맞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는 것은, 나라는 몸통은 잊어버리고 이걸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데려가서 예수 안에서 구원되게 하는 겁니다. 이건 지금 급조한 게 아니고 에베소서 1장 4절에 의하면, 이미 창세전부터 그리스도의 몸통을 위해서 인간이 있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지 않다는 것은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난 겁니다. 이런 게 전제가 되어 오늘 본문 31장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런 전제로 나가게 되면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좀 하다가 다 잊어버려요. 잠시 드라마이야기하고 갈게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서 ‘보고 싶다’는 문제를 보냈어요. 속으로는 보고 싶은데 안 그런 척하고 그동안 지내왔어요. 그런데 여자 주인공은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나중에 깨어날 때 보라고 했는데 남자 주인공이 가만히 생각하다 깨어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자 주인공이 문자가 온 소리를 듣고 보려고 하는 그 순간 그 별에서 온 그대는 시간을 정지시켰어요. 15회 본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세가 나오느냐 하면, 스마트 폰을 손으로 잡으려는 그 순간 동결, 시간의 정지에요. 그런데 별에서 온 그대는, 김수현은 시간을 동결시킨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는 동결이 안 돼요. 병실 문 열고 여자는 마네킹이 되어 있는데 스마트 폰을 빼어서 자기가 보낸 ‘보고 싶다’는 문자를 지우고 난 뒤에 다시 “레드선! 하고 시간을 풀었습니다. 시간이 풀리고 난 뒤에 여자 주인공, 전지현이 보니까 메시지가 안 온 거예요. 시간이 정지되었지요. 시간이 정지되니까 그때까지 행동이 스톱되고 마네킹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이란 털을 통해서 몸통으로 갈 때 여기서 시간을 정지시킵니다. 이번 대전수련회에서는 시간의 역전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우리 심리에는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시간의 왜 역전이 돼요? 안 되지만 하여튼 시간의 역전인데 오늘은 시간의 정지라고 합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몸통을 없애버리고 주의 몸통에 합류하는 순간 우리는 마네킹이 되는 겁니다. 마네킹이 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우리한테 물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면서 제일 큰 스트레스, 마음의 짐이 뭐냐 하면, 내가 잘했을까, 못 했을까? 내가 옳지 않은 짓인가? 미래를 망치는 짓이 아닌가? 아니면 내가 잘한 짓일까? 내가 중앙대를 갈 것인가, 한양대를 가야 되나? 한양대를 선택하는 게 장래를 망치는 짓이 아니냐? 중앙대를 해야 되나? 공납금도 반밖에 안 되는데. 어느 쪽일까? 내가 저 여자와 결혼하면 어땠을까? 저 남자와 결혼하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평생 두고두고 매일같이 스트레스 받는 것이,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가?” 하는 그 스트레스, 사람 죽입니다. 사람 피를 말려요. 이걸 일체 마네킹한테는 묻지를 않는다니까. 주님께서 얼게 만들었기 때문에 잘했다, 못했다 관계없습니다. 지난주 우리교회 낮 설교에 그렇게 했어요. 순종치 아니했다. 로마서 11장에 나와요.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둬뒀다는 거예요.

여러분 젤리 만드는 방법 아세요? 한천에다 상온에서 설탕 세 숟갈 넣고 저으면서 귤 알맹이를 넣으면 젤리가 돼요. 한참 젖다보면 분명히 액체인데 나중에 고체로 바뀌면서 들어간 내용물들이 고대로 있어요. 동결된 거예요. 시간이 정지된 거예요. 주님께서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동결시켜놓은 거예요. 개인적인 우리의 몸통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어요. 과거에서 현재를 통해서 미래로.

“천당 갈까, 지옥 갈까? 고민이다.” 지금 흐르고 있지만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괜히 걱정을 하는 거고, 실제로 구원받는 사람들은 그런 걱정과 아무 상관없이 주께서 마네킹 만들어서 마네킹채로 자기 몸통에 집어넣어서 구원시키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 11장에서는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었다는 거예요. 젤리에 오렌지 넣으면 오렌지 젤리가 되겠지요. 포도 넣으면 포도 젤리가 되겠지요. 팥 넣으면 팥 젤리가 되겠지요.

우리는 어떤 젤리에요?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서 젤리가 된 거예요. 자기 딴에 순종했다고 백날 우겨도 그것은 순종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순종치 않습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순종할 수도 없고 아예 순종이 안 되는 이유가, 순종 안 되도록 했다는 이걸 알아채는 게 복음입니다. 순종하라고 가르치지요. 백 프로 사기꾼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시간의 정지를 못 느끼니까.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시간의 정지를 못 느끼고. 성령 없는 상태에서는, 나중에 31장에 나옵니다.

미리 이야기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은 우리한테 “너, 왜 이렇게 잘못했어? 왜 이 따위로 행동해?”라고 묻지를 않아요. 묻는 건 하나에요.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네가 걱정하느냐고 책망해요. 성령이 와서 책망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살까 하고 쳐다보고 있는 그 자체를 책망해요. 볼 것도 없는 걸 왜 보느냐 이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결혼하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신혼 초에 남자가 볼일 보고 있는데 아내가 와서 문 여니까 남자가 노크 좀 하라고 하면, 여자가 볼 것도 없으면서. 이미 볼 것 다 봤는데 뭘 감추느냐고 하잖아요.

주님이 그렇게 보시는 겁니다. 잘했다고 볼 것 있습니까? 못 했다고 볼 것 있어요? 원래 못 하는데. 성령이 와서 책망하는 게 그거에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왜 자꾸 자신의 행동거지를 쳐다보느냐 말이에요.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안 봐도 되는데. “이번에 보증만 안 섰어도 집하나 샀는데. 보증서서 사기 당했다. 보증을 왜 섰을까?” 주께서는 사기를 당하나, 안 당하나, 집을 날리든 그것과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가 천국 갈 때는 다 놓고 가야 돼요.

부자 청년이 영생 얻으러 왔잖아요. 주께서 요구한 게 뭐였습니까? 다 놓으라고 했지요. 부자 청년으로 오지 말고 부자 떼버리고 가난한 청년도 아니고 주께서 그냥 청년으로 부르려했는데 그 청년은 그냥 청년으로는 죽어도 못 가겠고 부자 청년으로 가겠다는 거예요. 계속 자기 몸통 보는 거예요. 아쉬워하는 거예요.

부자 청년은 자기가 부자 되는 것을 사는 것이라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걸 사는 것으로 보지 않아요. 우리가 산다는 게 무슨 의미에요? 이 상태가 산다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사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거든요. 지금 내가 살잖아요. 이게 나의 일로 여겨지십니까? 그것 잘못된 생각이에요. 하루하루 머리 빠지고 이런 것 다 주의 일입니다.

여러분, 참새가 날개 짓하는 것이 자기 일로 보십니까? 참새가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 하는 것이 자기 일입니까? 성경에 마태복음 10장에 그렇게 돼있던가요? 참새도 주의 뜻이 아니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참새가 나는 것도 참새 일이 아니고 본인에게 맡겨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에요. 왜 내 일도 아닌데 고민을 혼자 늘어지게 하고 한숨을 쉬십니까. 절망, 낙담, 이런 게 떠날 새가 없어요.

사렙다 과부가 밀가루 통을 긁는 꼬라지하고는. 밀가루가 없어. 그 사렙다 과부가 만약에 저한테 와서 “목사님, 가뭄으로 밀가루 떨어졌습니다.”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잘 됐네요. 죽으면 되겠네요.” 이게 제 상담입니다. 이번에 글 쓸 때 그게 있어요. 애가 몸이 아픕니다. 죽으면 되겠네. 그때가 아니면 언제 죽음을 생각합니까? 그 타이밍이 아니면. 항상 우리의 바닥은 죽음이 깔려있는데 깔려있는 죽음을 언제 생각하겠습니까? 민준이가 애 먹이면 같이 죽으면 되는 겁니다.

주님이 산다는 것은 항상 죽음 안에 녹아 나와야 돼요. 피자 판에 치즈가 있잖아요. 오븐에 넣고 구우면 피자가 다 녹아 있지요. 우리 안에 죽음이 스며들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느 순간 마네킹이 되어 시간이 정지되어 스톱이 될 때 비로소 그 죽음이 표면에 떠오릅니다. 주님께서 살리기 위해서 깔아놓은 죽음이에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너는 죽어 마땅해.” 그 죽음을 깔고 죽음 위에서 생명이 결합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언약입니다.

몸통 이야기는 조금 있다 하고 그림으로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에서 이 그림만 알아도 땡 잡은 겁니다. 인간에게 문명이 있어요. 살자는 거지요. 여기에 과학, 철학, 종교, 이런 것들로 인간을 살려내는 거예요. 종교는 중세 때부터 결합입니다. 중세에서 기독교가 무슨 역할을 했느냐 하면, 온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결집력을 양산하는 거예요. 여러분 설날에 만나봤지요. 복음으로 하나 되니까 무슨 꼴이 나는지 목격하셨지요. 기독교도 그런데 다른 종교와 붙어 보세요. 얼른 빠지고 싶은 생각이 들 거예요.

과학은 생산성과 관련돼요. 마르크스가 최초로 정리한 거예요. 인간은 생산성인데 옛날에는 그냥 팔자 좋았어요. 하루치만 있고 내일 가면 또 있었어요. 언제부터 갑자기 내일까지, 모레까지, 한 달까지 비축하는 새로운 생산이 등장했거든요. 그게 왜냐하면 곡식을 개량하고, 종자를 개량하고, 가축을 개량하니까 소모 이상이 생산이 많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는 꼭 도둑놈들이 있게 마련이에요. 그 도둑들을 귀족이라 하는 겁니다.

귀족은 잉여생산물로 전쟁을 발달시켰습니다. 전쟁해서 빼앗는 것을 마르크스는 엘리트층이라 했고, 관료직, 귀족이라 보면 돼요. 영토를 많이 갖고 자기는 놀고 다른 사람들은 일하고. 너만 귀족이냐, 나도 귀족 하겠다는 것이 16,7세기에 근대국가로 발달하면서 귀족이 바로 현재 관료가 되는 겁니다. 왕이지요. 더 발달하면 자본가가 돼요. 처음에는 그냥 먹고, 그냥 살던 시대, 이게 BC6000년경. 드디어 정착했던 시대, 도시국가가 성장하거든요. 세계 4대 문명이 BC3500년경, 메소포타미아는 BC3500년경, 이집트는 BC3000년경, 인더스 갠지스 강은 BC2500년경, 중국이 제일 늦어요. 은나라, 하나라가 BC2000에서 1500년경. 그렇게 돼요.

지금은 자본, 돈 많은 사람이 돈을 버는 시대에요. 이것이 과학과 철학과 종교로 가는 겁니다. 이게 이 세상이거든요. 인간은 탑을 쌓듯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요. 하늘나라를 향하여. 그런데 정작 천국에 계신 분은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언약입니다. 여러분 이 표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만나면서 세상 좋아하는 사람은 그대로 지옥 가고, 이걸 만나는 접점이 언약이거든요.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잖아요. 새 언약은 십자가 사건. 여기에 걸려든 사람이 사도 바울. 십자가 사건부터는 천국은 오직 십자가로 죽은 자인데 주님 주신 사흘 만에 살아나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인하여 천국 가는 거예요. 그 접점 지점이 언약입니다. 지금 여러분, 어디 쯤 가고 있어요? 혹시 떨어지는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비슷하게 가려고 하다고 왔기 때문에 종교인이에요. 더 큰 자본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까지 이용하는 사태고. 성령이 와서 통과해버리면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 동네는 자본의 세계인데 다니엘에서는 짐승의 나라지요.

이 그래프에 의하면 오늘 출애굽기 30장, 31장은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이 안에 누가 섞여 있을까? 이게 대세인데 소수민족이 있어요. 나올 때는 오십만으로 나왔지만 얼마 안 되지요. 성경에도 작은 숫자라고 했으니까. 이 소수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다른 민족은 스스로의 결합력으로 모여서 그 당시 자본가, 왕이 칼 들고 법을 만들고 세금 안 바치면 죽인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 안에 누가 동행하느냐 하면, 미리 당겨서 여호와께서 주가 되셔서 동행하는 겁니다.

그러면 색연필이나 연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깥에서는 심이 안 보여요. 심이 끝에 약간 보이고. 그런데 종이를 까면 심이 계속 나오지요. 종이 푸는 이것, 죄를 지어야 돼요. 죄를 짓게 되면 그 안에 있는 희생하신 분의 공로가 나오게 돼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다른 민족과 차별되게 했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거예요.

그걸 출애굽기 30장 37절에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게 거룩이에요. 그러니까 거룩이란 동행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죄인들을 계속 끌고 가는 위대한 능력, 그걸 다른 말로 거룩한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자기 스스로 살아야 될 운명이라면,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제가 요즘 와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하는데 하나님을 찾으려면 신을 생각하지 말고 이스라엘을 생각하라고 했어요. 그냥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의 투사체가 되어 자기 닮은꼴이 돼요. 그건 가짜거든요. 내가 지어낸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짜입니다. 그런데 진짜 신은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동행했던 하나님. 그래서 그 당시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동행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말고 이쪽에도 자기 딴에 신들이 있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하나님 보시기에 이쪽에 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은 없는 거예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을 만든 인간만 존재하지 신은 없는 거예요. 신이 없는데 신을 만든 이유는 뭐냐 하면, 신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기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가상체로 신을 하나 만들어놓고, 자기가 만든 일종의 거울이지요. 늘 자기 잘남을 스스로 묻고 대답하기 위해서 거울 보는 식으로 만든 게 신이기 때문에 그 신은 사실은 조작된 신이고 이 땅에 신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결론은 신은 없다. 만들면 생기지만 만들기 전에는 없는 거예요.

신은 어디 있는가? 이스라엘 속에만 있고 이방인에게는 신이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다고 오해한 겁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데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뭘 만들어요. 31장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유다 지파 홀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하고”

이것 누구 좋으라고, 뭐 때문에 이 일을 해야 되지요? 이스라엘을 위함입니까, 하나님을 위함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속에 담기기 위한 이스라엘과 언약, 죄악 된 인간과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를 하나님 스스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니까요. 네가 알아서 만들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임해요.

쉬운 예를 들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기관총이라고 보면 되고, 총알은 하나님의 신이 되는 거예요. 총알도 없이 기관총 들고 설치면 이건 애들 장난감입니다. “쏜다, 쏜다.” 하면 뭐라고 합니까? “그래, 쏴라.” 목사들이, “주의 종을 저주하면 저주받는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저주해봐라.” 이렇게 나와야 돼요. 왜? 원래 총알이 없으니까.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성령께서 일하실 때는 우리는 잘했다, 잘못했다는 그 자체조차 생각하지 말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겁니다.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둬둔 거예요. 새순교회 머리 좋은 걸 다 알지만 그래도 제가 못 미더워서 여러 번 순간순간 반복합니다.

전지현이 휴대폰 문자 왔는지 확인해도 소용없어요. 그 순간 오게 되면 이것은 자기 일이 아니고 김수현의 일이에요. 김수현의 여자 친구는 별에서 온 그대에 의한 똘마니고 하나에 마네킹에 지나지 않아요. 별에서 온 그 남자 주인공을 위해서 여자 배우가 그냥 동원된 것뿐이에요. 시간이 동결되면 휴대폰을 보고 싶어도 못 봐요. 스톱돼야 돼요. 그리고 바꿔치기 해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 얼음 됐으니까. 젤리니까.

시간이 다시 흐르고 난 뒤에는 “휴대폰에 뭐가 왔는데 없네. 아까 분명히 소리 났는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원인도 모르고. 난 몰라. 내 할 일만 하지 뭐. 그래요. 우린 내 할 일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갑자기 십자가 생각나면 스톱! 우리 할 일 하다가 성령이 와서 십자가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스톱이 되면서 우리는 오홀리압이 되고 그 순간 브살렐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는 사실을 3초내지 4초라는 아주 짧은 순간 그걸 알게 돼요. 내가 한 평생 사는 것이 내 인생 내가 만든 게 아니구나. 주께서 만들어가는 거라는 것을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내가 별에서 온 남자는 따로 있어요. 사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따로 있어요.

그분이 나와 함께 있을 때 그게 바로 현대판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인데 그 거룩이란 것이 어떤 차별화 때문인데 이스라엘 되지 못한 나라는 자기 몸을 자기가 살려야 돼요. 부지런히 철학과 과학과 모든 학문을 동원해서 경쟁해야 되고 싸워야 되고, 선택을 잘했을까, 못했을까 그것 때문에 노심초사해야 되고 걱정해야 돼요.

실제 이름을 거론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서경수 목사님을 볼 때마다 늘 배우는 게 있어요. 나도 저런 믿음이 있으면 좋겠다. 아무 계획도 없고 아무 목적도 없어요. 나는 저런 믿음 한번 가져보나. 아무 생각 없이 살아요. 별에서 온 그대, 마네킹 됐어. 시간이 정지됐어. 해야 될 소리인지 안 해야 될 소리인지 그런 걸 아예 생각지도 않아요. 오홀리압? 미리 생각하면 걱정하잖아요. 그런데 성령께서 와버리니까 미리 생각도 못하게 만드네. 주위 사람들, 가정이 죽어날 판이야. 아무 계획도 없으니까. 그러나 서 목사님은, “나 같이 믿으면 될 텐데 믿음 없는 게 말이 많나.”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지.

31장에 들어가면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자기 일에 대해서 어떤 책임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보석을 왜 이렇게 깎았어.” 이런 것 없습니다. 지 마음대로 깎는 그것이 똑바로 깎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여기 2절에 봅시다. “우리의 아들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그러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는 모든 일거수일투족 하는 일을 같은 몸통, 같은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평할 수 있습니까? 평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이 누리는 혜택이에요.

여기서 골로새서 2장을 봅시다. 2장 1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네가 남들한테 어떤 욕을 들어먹을 필요도 없는 존재.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너는 안식일을 왜 그렇게 지키는 거야, 절기를 왜 안 지키는 거야. 너는 왜 율법을 안 지켜. 안식일을 왜 안 지키는데.”라고 어느 누구라도 너를 평할 때 “시끄럽다. 됐다.” 이러고 끝나란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어요. 왜? 우리의 몸은 나를 위한 몸이 아니고 주께서 사용하시는 몸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 평가에 마음 둔다는 자체가 그 순간 갑자기 내 몸은 내가 다독거리고 챙겨야 된다는 갑자기 마귀적인 생각이 엄습하면 우리는 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누가 평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선언해버려요. 특히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라고 돼있지요. 다시 오늘 본문 31장 14절에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그런데 방금 보았던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는 안식일을 인하여 네가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고 평들을 필요 없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같은 하나님 말씀인데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됩니까? 둘 다 맞지요. 그러면 어떻게 이걸 융합시킵니까? 융합시킬 필요도 없어요. 안식일을 더럽힌 자는 죽으면 되죠.

지금 출발점이 어떻게 지키려고 하면 우선 내 몸통부터 챙기는 식이 돼요. 안식일 법만 드러난다면 죽어도 좋다는 식이 돼야 되는데 내가 안식을 지켜서 어쨌든 간에 이 한 몸 살리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연 듯 든다면 그 자체가 바로 안식일 위반한 게 됩니다. 안식일보다 내 몸통이 우선이 돼요. 처음에 안식일이란 율법은 털인데 그 털은 예수 그리스도 몸에서 나온 털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털 하나 건드려도 전체를 다 건드린 셈이 된다 했지요.

안식일이 죽으라 하면 우리는 죽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안식을 지키란 그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으로 옵니다. “네가 안식일을 못 지키면 죽는 거야.” “아멘.” 이러면 안식일은 드러나고 나는 죽고. 죽은 인간을 왜 다시 자꾸 꼬집고 만지고 그래요. 안식일도 못 지키고 죽은 인간인데. 죽은 걸 걱정한다는 것은 자기는 안 죽었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온전히 죽었으면 걱정도 하지 말아야지. 죽은 인간 다시 거론해서 죽었느니, 살았느니 걱정을 왜 합니까? 하나의 젤리인데, 동결됐는데.

모든 31장 말씀은 우리를 동결시킨다. 우리의 몸통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쓸 입장이 못 된다. 우리를 순종치 못한 가운데 가둬뒀기 때문에 이래도 순종치 아니한 것이고, 저래도 순종치 아니한 것이고. 순종했다는 말은 아예 하지 마라. 나는 너를 알거든. 뭘 해도 순종한 게 아닌 걸 알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저는 뭘 해도 순종과 관계없다는 것을 그냥 우리 몸에 치즈 들어오듯이 우리 몸이 순종치 않는 몸으로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돼요. 복음이 어렵지 않습니다. 안 믿어서 문제지 사실은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움직임이 없다.] 우리가 울산바닥에 살면서 매일같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하고 공포, 특히 불안과 공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탐심 같은 것.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렇게 설치는 걸 보고 움직임이 없네. 아무 움직임이 없어요. 혼자 꼼지락거리며 뭘 열심히 하는데 가정주부로서 또는 직장생활하면서 부지런히 하고, 차사고 나서 물어주기도 하고, 많은데 주님 보시기에는 미동도 없네. 아무 움직임이 없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탕자가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많이 했잖아요. 돈 갖고 가서 기생과 허랑방탕하게 다 날리고 나중에는 굶주리고 노숙자 생활하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들 기다리는 아버지한테는 뭘 해도 그냥 아들이지요. 언젠가는 돌아올 아들이지요. 움직임이 없어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순종치 아니한 거니까. 네가 생각하는 너의 안목은 하나님은 갖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네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안목은 네가 지어내서 마귀 들려서 혼자 착각한 것이지 주님의 안목은 십자가라는 렌즈로 보면 그냥 순종치 아니함이에요. 순종치 아니함으로 동결된 거예요. 끝났어요.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서 조금도 미동치 않아요. 움직임이 없어요.

바로 그 관점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누가 꾀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누가 네 마음을 흔들어 놓더냐 이 말이거든요. 최선을 다하라. 열심히 구하라. 주실 것이다. 왜 자꾸 마음을 흔들어놓느냐 말이죠. 감사헌금 안 해서 벌 받았다느니, 목사한테 대접해서 병들었다느니, 온갖 걱정, 근심을 자꾸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좋은 질문한 것처럼 겨자씨가 자라서 하늘나라가 됐는데 그 겨자씨가 믿음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겨자씨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이십니다. 만약에 그 겨자씨가 내 믿음이라면 또 내 믿음을 내가 챙겨야 돼요. 그런 해석은 마귀적 해석이고 겨자씨가 주님이 알아서 커지게 하실 거예요. 그 겨자씨 안에 우리도 작은 알맹이로 함께 있는 겁니다. 그게 창세전에서 우리를 예수 안에서 동결시킨 겁니다. 시간의 정지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가 시간을 정지시킨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4-02-11 14:10

20140207b 울산강의-출애굽기 31장 : 동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뭘 만든다는 것은, 31장에서 뭘 만들게 하잖아요. 만들게 할 때 우리 생각은 이래요. “하나님 그냥 건져주세요. 만들기도 귀찮고 시키지도 말고 그냥 죄인이니까 우리를 데려가 천국에 가게 해주옵소서.”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천국? 나는 네 속을 파서 그 안에 천국 만들고 싶은데?” 그러면 우리는, “이 몸을 떠나서 저쪽으로 가고 싶은데요.” 저쪽 하늘이 바로 네가 지어낸 거란 말이죠. 이쪽이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의 전략이 뭐냐 하면,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잖아요. 모든 게 저주의 바다잖아요. 살기 힘드니까 자꾸 상상의 샹글리아, 상상의 유토피아를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 지은 데다 또 죄 짓는 게 뭐냐 하면, “죽어서 천국 가야지.”가 또 죄의 일부로서 나오는 거예요. “고통 많은 데서 벗어나서 저쪽에서 편하게 살래.” 누구 마음대로? 그냥 내가 힘드니까 내 몸 하나 잘 챙기고 행복하기 위해서 편하게 사는 곳에 가고 싶다는 것이 만약에 옳을 것 같으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힘든 세상에 보내질 않았습니다. 그냥 생명나무 따먹게 하시지 저주받을 땅에 저주를 유발시키지 않았어요.

창세기 3장의 취지를 잘 아셔야 돼요. 고통이 있으니까 편하게 살고 싶다. 그게 바로 하나님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힘든 것만 생각하니까 바로 마귀가 배후에서 힘들다고 이야기하라고 자꾸 부추기니까 “천국 가는 종교 없을까? 그런 종교 있으면 믿어야지.” 이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속에 구멍 파서 천국을 거기다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31장에서 만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죄 많은 우리 속에 하나님이 들어앉아 아예 살림을 살려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만들라고 한 거예요. 우리를 위해서 만들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화장실 필요해요. 배설해야 되니까. 침대도 필요하고 안방에 보일러도 놔야 되고.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산다면 뭐가 필요한가? 제사 드릴 기구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13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안식일을 지켜야 돼요.

그리고 뭐가 필요하냐 하면,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이게 필요해요.

맥가이버에게 스위스 칼 하나만 주면 안 되는 일 없잖아요. 맥가이버 만능 칼이죠. 우리에게 증거판과 안식일, 제사, 속죄소, 회막, 상, 이런 것들 만들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과 뭐하고 놉니까? 우리의 소원과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아무짝도 소용없지요. 그런데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을 만들라고 하고 거기에 있으란 말은 하나님한테 다 필요한 거예요. 안식일, 제단, 성막, 그 안에 담길 돌판, 하나님한테 꼭 필요한 거예요. 우리한테는 필요치 않아요.

프라다라는 명품 가방이 있는데 이번에 딸 결혼하면서 처음 봤어요. 이게 명품이구나. 전에 이야기했지요. 사돈 되는 분, 그렇게 교회에서 늘 눈물과 기도로서 헌신하던 그 분이 페리가모인가 뭔가 세일하는 것을 사서 줬더니만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을 해요. 성령에 감동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몸이 명품을 기억해요. 그걸 감동하더란 말이죠. 남자한테는 아무리 장인이 한 땀, 한 땀이라고 해도 “이게 뭐야.” 하지만 여자들한테는 명품 가방이 놀라운 거예요. 남자한테는 말 같은 차, 자동차에 남자는 미쳐요. 믿음 좋은 사람한테는 아무 소용없긴 하지만 하여튼.

그러니까 하나님한테는 필요한데 우리한테는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건성건성, 대충대충 제사 드리고, 대충대충 안식일 지켰고, 대충대충 예배드린 겁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의 절기에 안식일에 내가 지겹다, 지겨워. 그런 형식적인 것 그만해라. 많이 묵었다.

이스라엘 인간들이 하나님 시키는 대로는 해요. 하는데 이게 전혀 자기 취미에 안 맞아요. 할 수가 없어요. 맞지도 않는 걸 주님이 시켜놓으니까 완전히 군대 생활하는 것처럼. 남자들 군대 생활 억지로 하잖아요. 사고가 서로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 관경을 계속 해나갑니다.

첫째 시간에 한 그림을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이렇게 사선으로 돼있는데 이방나라들의 문명으로 자기 살림살이를 하는데 모든 사람이 다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나라가 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인데 이방나라에서는 스스로 만든 법에 의해서 스스로 규제를 받아요. 그 법의 핵심은 왕께 무조건 굴복하라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4장에서 라멕이 하는 말이, 내 말 듣지 않으면 이유도 없이 무조건 사표내고 잘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보기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당히 억울해 보이지요. 나라가 되려면 동등하면 안 돼요. 항상 한 단계 위에 있어야 돼요.

그걸 철학, 논리학에서는 메타라 하는데 메타보다 낮은 걸 대상이라 합니다. 이걸 잠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레데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다.” 그레데 섬에 살고 있는 철학자가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자기가 한 말은 거짓말일까요, 거짓말 아닐까요? 그것이 같은 대상에서는 풀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진짜로 이야기한다면 한 사람은 빼놓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전부 다 거짓말쟁이라고 했으니까 자기가 포함이 돼버려요. 그리고 거짓말한다면 실제로 그레데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가 아니어야 돼요. 왜? 거짓말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한 사람은 대상에 벗어나는 따로 한 자리를 마련해줘야 됩니다.

라캉은 이걸 남자라고 합니다. 남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남자는 모든 걸 지배해요. 심지어 자기 상사가 있더라도 “내가 너보다 못나서 떨어진 게 아니고 사실은 내가 이겨. 하지만 내가 참는 거야.” 꼭 이렇게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면서 항상 자기가 최고라고 절대자라는 것을 남자는 갖고 있어요.

그래서 남자에게 여자는 리볼버 권총이라 했지요. 남자는 하나라도 여자는 여러 명 되도 괜찮아요. 능력만 된다면 여럿 여자를 건드려도 나의 남성은 오히려 강화가 되고 더 위대해지게 되지, 어떻게 여자가 여섯 명이나 되느냐? 그게 남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게 아니고 오히려 남자로 하여금 더욱 더 높이게 되는 게 남성의 특징입니다. 여성을 자기 하녀처럼 취급하고.

그런데 그런 남성에게 어떤 여자가, “밥이나 먹여준다면 살림을 해드릴게요.” 이러면 그 여자는 남성의 지배를 받아요. 그런데 어느 날 여자가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면 그 순간 여자를 지배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아는 여자는 다 지배하는데 사랑하면 내가 알던 여자는 없는 거예요. 이것은 점선, 신비에 속하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도 나와요. 지혜롭게 하는 여인은 사람에 속한 게 아니고 여호와께서 보낸 자다.

여호와께서 보낸 자가 남자를 사랑해버리면 이 남자는 비로소 그때 처음으로 사랑을 아는 유일한 남자가 돼요. 그러면 그때부터 지배하겠어요? 지배해봐야 그 여자의 그림자만 지배할 뿐이지 진짜 여자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신비롭고, 신비로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점령을 하지 못해요. 몸은 뺏을 수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은 뺏을 수 없고, 모닥불은 쬐기만 해야 되지 모닥불을 가지고 놀면 안 됩니다. 손 다 타버립니다. 나를 사랑하는 여인은 주변을 맴돌면서 신비롭게 다가올 뿐이지 함부로 접근이 안 돼요.

그래서 여자의 후손을 설명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무리 해도 여자를 장악할 수 없는 것이 남아있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자로 하여금 남편의 지배를 받으면서 남편이 못다 지배하고 여분의 것에서 여자의 후손이 그런 개념으로 아우라처럼, 무지개처럼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밟아 죽이고 뺨 때리고 온갖 모독 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굴복했습니까? 실패로 끝났습니까? 군사들 보내서 무덤을 지켰잖아요. 분명히 다 했는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렸지요. 아우라 같은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 성전에서 분명히 자재 동원해서 만들어놨는데 분명히 그게 전부인데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게 생겨요. 물이 생기지요. 그 물 어디서 나온 거예요?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구원의 능력은 인간이 어떤 종교적인 행위와 노력을 다 해도 그것으로 설명이 안 되는 넘쳐나는 그 무엇. 그래서 사람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사람으로 하여금 지킬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말씀은 우리가 장악할 수 없고 말씀이 우리를 쥐고 있는 식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포크레인으로 딱 집어가듯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게 하나님의 자기 자리입니다. 그걸 언약이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만들지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이게 중요하고, 두 번째 시간에 중요한 게 그 이스라엘이 갈라진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네요.

여러분들 발뒤꿈치에 굳은 살 박히지요. 그래서 따뜻한 물에 불려서 벗겨내고 크림도 바르면 깔끔해지지요. 며칠 지나면 또 끼지요. 하나님께서는 살 깎아내는 것처럼 주께서 이스라엘을 깎아내요. 무를 깎아내면 무 안에 진짜 무 있습니까? 깎이는 자체가 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깎아냅니다. 남는 게 뭐 있습니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 오신 이유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왜 잃어버렸는가? 구약에 보니까 나쁜 목자의 발생으로 인하여 나쁜 목자가 등장하니까 잃어버린 양이 등장한 거예요. 나쁜 목자를 지적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지적하는 그분 눈에만 잃어버린 양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이, “저요, 저요.” 하고 손들면 잃어버린 양입니까?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이 생산되는 것은 진짜 목자가 자기 이름을 불러줄 때 그때 비로소 자기는 잃어버린 양으로 등극되는 거예요.

그러면 관건이 진짜 목자인 걸 어떻게 아느냐?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분이 진짜 목자입니다. 이것까지는 쉬워요. 그 다음이 어려워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면 예수님이 자살하면 되잖아요. 자살을 안 해요. 양한테 도리어 목숨을 빼앗겨요. 그래서 죽은 거예요. 그리고 목숨을 앗아간 그게 잃어버린 양이에요. 그러면 양이 진짜 목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그것이 가짜 목자인 줄 알고 죽여 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복잡해지거든요. 그걸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나오잖아요. 이걸 예를 들면 쉬운데. 이스라엘은 자기가 잃어버린 양이라고 자처했어요.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나름대로 이혼을 해도 증서 써주고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목자 오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아까 원칙에 의하면, 목자는 잃어버린 양에 의해서 오히려 목숨을 잃는 그분이 목자라 했지요. 그런데 양들은 말씀을 잘 지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잖아요. 간음도 안 하고 살인도 안 하고 말이지요.

목자가 와서 슬슬 심사를 긁어놓습니다. “너, 간음했지?” “우린 간음 안 했어요. 바람피운 적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인데.” 그러니까 죽어라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는 착한 양이니까 자기 착함을 동의해줄 진짜 목자를 간곡히 기다렸는데 막상 진짜 목자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는 잘났다, 의롭다, 훌륭하다, 나름대로 완벽하다, 일부러 죄 짓지는 않았다. 이렇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데 우리의 속을 긁어놓네요. 그러니까 안 죽이려야 안 죽일 수가 없어요. 내 몸통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잘 지켜야 천국 가는 몸이 되니까. 내가 죄인 되면 못 가니까. 내가 죄인 되면 지옥 가잖아요. 지옥 가기 싫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몸을 관리를 해야 돼요. 성화되고 날마다 거룩하려고 하는데 거룩으로 오신 주님이 약을 올리네. 사람을 무시해도 아주 개무시하는 거예요.

디모데후서 3장을 읽어볼게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런 짓을 해서 그들이 사도를 대적해서 자기 양들을 빼갔단 말이죠.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이것 지킬까요, 말까요? 아까 분명히 순종치 아니하지요. 우리가 스스로 잘나서 내가 원인이 되어서 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심사를 긁어놓습니다. 성령이 와서 말씀으로 반드시 긁어놓고 십자가 피를 바라볼 때 “주여, 제가 얼마나 못났으면 저 피 없으면 지옥 갈 수밖에 없군요.”라고 깨닫게 하는 식으로 앞의 말씀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긁어댄단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안 온 사람들은 이 말씀을 넘어가버려요. “내가 천사야. 사람인데 못 지키지. 내가 지킬 것만 지키지. 나도 지킬 수 있어. 기도하면.” 그게 바로 성령 못 받은 사람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지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안 데려가는 이유는, 여러분 지옥 보고 싶지요. 지옥을 미리 체험하라고 이 울산 땅에 살게 하신 거예요. 천국이 아닌 지옥을. 그래서 깎아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무로 생각하고 주께서 다 깎아내는 거예요. 새로운 언약을 주어져서 깎아내고, 깎아내고 자꾸 깎아내는 겁니다.

무가 있는데 깎아내고 깎아내면 어떻게 됩니까? 다 떨어지겠지요. 떨어진 무들은 자기가 뭐가 됩니까? 죄인 되겠지요. 죄들을 모아서 여기서 바로 구원과 영생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선배들이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 사람들의 행동이 온전했습니까? 순종했습니까? 순종 정도가 아니에요. 하나님 붙들고 한판 싸웠습니다. “내 것 왜 건드려!” 상당히 민감했어요. 누구든지 자기 것 건드리면 가만두질 않았어요. 그게 야곱이에요. 지금 야곱 천국 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다 이스라엘을 만들어버리고 언약을 통해서 죄인을 구원해버린 겁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그 다음에 순종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오직 긍휼로 불쌍히 여겨서 데려가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말을 타고 동승했고,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고, 그 죄 속에서 긍휼을 입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열두 명이에요.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서 열두 명으로 했는데 열두 명이 한결같이 전부 다 예수님과 생각이 안 맞는 사람이에요.

당신과 나하고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으냐고 할 때 우리가 만약에 선생이라면 예를 들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서로 싸운다고 합시다. 우리라면 베드로가 높지 하잖아요. 주님의 방법은 뭐였습니까? 이걸 하나로 묶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옵니다. 제3의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하늘나라를 받들지 아니하게 되면 천국에 못 가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한 묶음 됐지요. 묶음 된 어른들은 현재 하나님 주신 자리가 어린아이 자리지요. 그러면 일단은 어린아이 자리에 와서 구원받아야 되겠지요.

따라서 이 자리가 그들의 싸울 때는 어린아이 자리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들은 누구 높으냐고 예수님께 직접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은 중간에 어린아이를 집어넣었어요. 오늘날은 어린아이를 집어넣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집어넣습니다. “너희들 싸우지? 내가 너희들 때문에 못 살아. 죽어야 돼.” 이걸 집어넣는다니까. 이게 새 언약이에요. 어린아이가 언약이 아니고. 어린아이는 새 언약을 보여주는 하나에 도구에 불과하고 십자가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둘 다 성도라고 우기는 부부가 싸움을 한다. 니가 잘났어, 내가 잘났다고 싸우다가 성령께서 십자가를 그 가운데 집어넣으면 남편은 십자가를 통해서 아내를 바라봐야 되고, 아내는 십자가를 통해서 남편을 바라봐야 되지요. 그러면 싸움을 더 하겠어요, 멈추겠어요? 더 해야지요. 전에는 싸울 때도 체면 챙기고 나는 상대방보다 덜 죄인이고 더 의롭기 위해서 말도 가려가면서 했는데 십자가 안에서 이제는 본색을 드러내야지. “우리 같이 죽자. 이렇게는 못 산다. 죽자.” 그러면 주님께서 진작 그렇게 싸워야지. 어디서 싸우면서 점잖은 척하고 있어. 뭐가 남편의 체면이고, 아내의 체면이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죄인이니까.

나중에 싸우다가 힘이 빠져서 주저앉지요. 다시 한 번 박수를 칩니다. “주여, 죄인입니다.” 그렇지. 그때 나타나는 게 남편이 하기를 아내를 주 안에서 사랑해라. “나, 너한테 욕할 것 다했다.” 이게 바로 아내에 대한 최고의 사랑입니다. 나도 무슨 말인지 앞뒤 안 맞는 이야기하는데, 욕 실컷 해놓고, “이게 나의 본성이고 이제 짐 싸서 가도 괜찮다. 그동안 살아준 것도 고맙다.” “나도 이것밖에 안 돼.”

그게 바로 가장 부부다운, 착하지도 않으면서 그동안 착한 짓을 해왔던 그 더러움을 십자가를 통해서 부부싸움을 통해서 다 들춰내는 겁니다. 너무 자주 싸우지는 마세요. 돈 나갑니다. 한 번씩은 그렇게 해야 되는데 저희 가정 같은 경우에는 속으로 다 해버립니다. 하나의 요령인데 팁이니까 알려드립니다. 그 과정을 미리 상상을 다해보는 거예요. 다 해놓고 혼자 박수치는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 남는 게 뭡니까? “당신은 나한테 과분한 여인이요.” 그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미 속으로 욕할 것 다 했거든.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바로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다 뜯기고 다 찢긴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주님의 멱살 쥐고 흔들고. 물론 주님이 했지요. 껍데기로 누가 했지요? 선지자를 자꾸 보냈는데 선지자를 얼마나 죽였습니까? 욕 되게 하고. 모세한테 항의하고 다 하게 해요. “더 나올 것 없지, 끝났지.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 창기가, 세리가 구원받는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자기 자리입니다. 공로와 하나님의 은총만이 유지되는 상태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죄가 필요했고 그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갖고 노는 장난감을 인간에게 던져서 너희들 손으로 만들라고 하는 거예요.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면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제사하라고 하는구나.” 마음껏 제사하고 마음껏 말씀 지키면서 그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무가 잘리듯이 잘못 다루었다는 죄목으로 계속 잘리는 거예요.

여기에 14절에 나오는 말씀,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이것은 일종의 칼, 그야말로 만지면 손 베이는 칼. 모이게 힘쓰면 다 손 베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에 베이게 하는 거예요. 직장에서 누구를 만났다. 그 사람 때문에 상처입지요. 그러니까 세상 자체가 상처투성이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께서 만든 배치물, 가시덤불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리 베이고, 저리 베이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지. 그 말씀이 칼날처럼 늘 오는 거예요.

16절 봅시다. 이제부터 약간 어려우니까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무슨 언약입니까? 영원한 언약이지요.

대전에서 강의했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다시 해보겠습니다. 도레미송. 도~ 계속 가요. 도가 레로 변하는 게 아니고 도로 계속 가요. 그 다음에 레가 계속 가고, 미가 계속 가요. 여기에 영원한 언약이에요. 그렇다면 안식일이 도라는 말이 아니고 그전에 창세기 17장에 보면 영원한 언약이 있었어요? 할례언약, 영원한 언약이지요. 영원한 게 왜 그렇게 많아요. 영원한 게 계속 있지요.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이 시점에서 보면 영원하지요. 도착지점에서 보게 되면 끝이 있으면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영원하다고 하잖아요. 뚫고 지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이걸 뺑뺑이 돌려요. 실을 감듯이 감아버려요. 도도 감기고, 레도 감기겠지요. 계속 감기면 뭐가 되느냐 하면, 파리바케트에서 제일 안 팔리는 빵이 롤케잌이잖아요. 감기면 롤이 되지요. 롤을 칼로 자르면 이 안에 구약부터 영원하다는 요소는 다 들어있겠지요. 이 롤 마지막에 와서 끝부분에 다 감게 되면 항상 영원하지요. 이 안에 영원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어렵다 했는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지요. 안식일을 지키라. 이 말은 금요일까지는 일하고 토요일은 일 안 하고 예배드린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식일 지키기거든요. 여기에 녹음기가 있는데 “녹음기를 켜세요.” 하면 이렇게 켜잖아요. “끄세요.” 하면 누르면 꺼지거든요. 알기 쉽잖아요. 진짜 알기 쉬워요. 그런데 이 녹음기가 예수님이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게 매직입니다. 이 매직으로 글자 쓰세요. 그런데 이 매직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게 무슨 생뚱 맞는 소리입니까? 누가 설명해보세요.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요.

방금 했습니다. 안식일, 할례, 그밖에 여러 가지 있어요. 땅도 있고 한데 이 영원한 게 계속 올라가요. 하늘의 신도 영원하니까. 구약에서 영원한 게 한두 개가 아니고 계속 나와요. 이스라엘도 영원하고, 율법도 영원한데 제가 롤처럼 감긴다 했잖아요. 감긴 분이 예수님이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 분명히 안식일 지키기인데 이게 어떻게 예수님이 되냐 말이지요. 매직은 참한 매직, 예쁜 매직이 되는데 예쁜 예수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이죠. 갑자기 매직이 인격체가 되고 인물이 되느냐 말이지요. 논리 전개과정이 왜 그러냐 이 말입니다. 남는 시간에 이것 풀어야 돼요. 내가 찝찝해서 안 돼요.

안식일을 우리가 지키자. 영원한 법이라 지키자. 안식일에 일하면 안 돼. 일하다가도 안식일이 되면 멈춰야 돼. 그런데 예수님도 안식일에 일하다가 멈췄다. 그러면 우리는 이해가 돼요. 예수님도 밭 갈다가 토요일이구나, 놔둬야지.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존경할만한 합니다. 내가 지킨 것처럼 예수님도 지키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지요. 안식일을 지키는 분이 아니고 안식일을 만드신 분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안식일을 지키면,

예를 들어서 내가 매직으로 글자를 쓰는 것이 영원한 규례라고 하면 매직으로 씁니다. 그런데 매직을 누가 만들었지? 이 생각만 하면 매직으로 글자 쓰기를 대신할 수 있고 대체할 수 있습니까? 매직으로 글자 쓰다가 “선생님, 이 매직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네가 숙제하기 싫으니까 엉뚱한 소리하는구나.” 이렇게 책망하면 어떻게 해요? 생각할수록 어렵지요.

그래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제자들이 안식일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주시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안식일을 만들었다고 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우리가 지키는 것과 뭔가 차이가 난다면, 우리가 지키는 것은 일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뜻은 일하지 않는 게 아니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일해야 사는데 우리가 일하는 대신 다른 분이 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식일이란 다른 분이 일해서 그분의 덕분으로 우리가 안식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6일을 일함은 이쪽 7일에 일 아니 함이 되지요. 일함으로 오다가 이 지점에서 언약이 된다. 그러면 인간은 만나는 순간 일 아니함이 되지요. 이 지점에서 일 아니하더라도 안식이 주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역전인데 방향을 6, 5, 4, 이렇게 해봅시다. 결국 카펫을 돌돌 말아보는 거예요. 회수를 하는 거예요. 인간을 일하게 해서 그걸 돌돌 말아서 네게 일을 시킨 것은 일 안 해야 네가 진정한 영원한 규례, 안식일을 영원히 지킨 혜택, 그러니까 영생이지요.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일을 안 해도 되는 수준, 그런 지경에 이를 때 비로소 영생의 맛을 본다는 거예요.

그러면 비교될 게 뭐냐 하면, 여기는 일하는 인간이 되겠고 일해서 그 일함이 이어져야 되고, 주님께서는 홀로 일하신 분이 되는 거예요. 일하다가 안식일에 일 안 해야 되지요. 그러면 진짜 구원받은 사람 같으면, “주님께서 홀로 일 다 하셨네요. 안식일 지키라는 것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주께서 홀로 안식일을 다 지켰네요. 그러니까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내가 한 게 아니고 내가 일 안 해서 누린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게 하셨네요.” 주께서 일하게 하셨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날은 일해야 되고 어떤 날은 일 안 해야 되는 그러한 밑거름 속에 우리를 집어넣었네요. 라고 해야 안식일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안식일에 뭘 했느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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