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110a-히6장19절(존재의 힘) - 이 근호 목사
안양20140110a-히6장19절(존재의 힘)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안양20140110a-히6장19절(존재의 힘)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6장19절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이리 되어 있지요. 히브리서6장19절 이야기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왜냐 하면, 뭔가 닻을 걸으려면 단단한 어떤 디딤돌이 있어야 거는데 여기서 건다는 것은 히브리서에서는 약속에다가 장치를 한다는 뜻이거든요. 약속에다가.
약속이라 하는 것은 자체가 이 세상에서 붕 떠 있는 겁니다. 옷 벗을 때 옷걸이 있잖아요. 옷 걸 때 아무것도 없는데 걸면 떨어지잖아요. 그렇지요? 이 약속이 지상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붕 떠 있는 거예요. 거기다가 만약에 옷을 건다면 다시 지상으로 도로 떨어지게 돼 있지요.
그래서 여기서 소망을 둔다 할 때, 소망을 어디다가 소망을 둘 것이냐, 하는 그 문제에 있어서의 실제 바탕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소망을 어디다가 두는가 하면, 교회 부흥에 두는 거예요. 왜? 교회라는 게 부동산 아닙니까? 지적도 나오잖아요. 그게 교인수가 많아서 확장되면, 부동산이 늘어나겠지요. 건물도 늘어나고.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돈이 현금으로 직결되고 눈에 보이니까 그게 목회에 소망처럼 여겨지잖아요.
신년1월1일 설교할 때나 송년 예배할 때 항상 그 소망이 무슨 소망입니까? 약속에다가 소망두지 않지요. 보이는 곳에 교회에 부흥되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교회부흥과 더불어서 여러분 가정에 잘 되기를 바라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가정이 뭐냐 하면, 이 세상과 결합돼 있다 말이지요. 우리들 가정이 약속이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지 처음오신 분이 있어서 이해가 안 되는데, 나의 가정이 구약에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이 근호 가정이 구약에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럼 누가 어떤 사람보고 “아이고, 목사님 가정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하면 그거 성경에 없는 소리를 왜 하느냐 말이죠. 성경에 없는 것은 약속이 구축하는데, 약속을 모으는데, 거기에 재료가 될 수 없어요.
왜 나의 가정이 천국에 가야 됩니까? 천국은 약속의 구현인데, 약속에는 약속되지 않은 것은 천국에 직결이 안 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빼내어서 약속된 것만 오게 되어 있어요. 약속된 것만 모으기 때문에 약속 안 된 것은 다른 말로 성경에 아닌 것은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다시 처음으로 할게요. 약속은 뭔가 소망이라 하는 것은 뭘 걸어야 되는데, 걸어야 될 그 소망은 지상에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지상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여러분 가정이 잘되고 교회가 잘되고 전부다 이것은 지금 성경 없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것은 소망해서는 안 될 겁니다.
예를 들면, 거지 나사로가 신년 예배 참석했을 때 소망이 뭐겠습니까? 빨리 몸 죽어서 어디 가는 겁니까? 죽는 거잖아요. 낙원에 가는 거잖아요. 그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앞집에 사는 부자가 만약에 신년 예배에 참석했다면 돈 많은데 미쳤다고 죽습니까? 돈이 많은데. 마저 쓰고 가야지요. 아마 부자가 지옥을 가서 그러는데 지옥가기 전에 오늘도 내 동생 다섯 명이 있는데 어쨌든 간에 불구덩이 피는 이 지옥은 오지 말아야지. 라고 살아생전에 자기가 소망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안 하지요. 그러니까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소망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다? ‘소망의 기초는 약속이다’ 이거 하나 초반부터 다잡고 갑시다. 소망의 기초는 약속입니다. 약속이 약속답게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그거 해야 돼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걸 해야 되지 땅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뜻이 하늘에 도달되면 안 돼요. 그건 약속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소망의 기초가 약속인데 약속은 여기 히브리서 1장 15절~18절 보면, 그 소망, 그 약속을 누가 짊어지고 있지요. 누가 짊어지었는가, 아브라함이 짊어지고 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 받는다. 이리 되어 있거든요. 창세기 12장3절에. 만약에 아브라함을 보고 시큰둥하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뭐가 오게 돼 있습니까? 저주가 오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다가 저주받는 거예요. 굳이 아브라함 안 찾아갔는데 저주받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지정하기를 참으로 말이 어려워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약속이라 하는 게 이 세상에서 구체화하게 되면 움직이는 어떤 인물, 인물에다가 약속을 담아 실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리아카를 끌고 간다고 보면 돼요. 요새로 하면 1톤 트럭 운전하는 걸로 보면 돼요. 좀 더 크다 하면 컨테이너 운전사. 여기에 약속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일 때, 아브라함을 주의 깊게 보고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거기에 있다고 인정한 사람만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원 안 받는 정도가 아니고 저주를 받는다니까요. 제가 지난 수요일 날 이야기했지요. 십일조를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하는 게 죄가 된다고 했지요.
주일 성수를 하게 되면 죄가 돼요. 주일 성수를 안 해도 된다는 게 아니고 주일 성수를 하면 안돼요. 하게 되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주일 성수하고 싶어 해요. 왜? 신앙인 티를 내려고. 집구석에 있으면 신앙인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이것은 죽을 때까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가만히 집에 앉아 있으면 몸살 나. 가야 되겠어. 가까운 교회라도.
그러니까 스스로 신앙인 아니면서도 신앙인 티를 내는 걸로 신앙생활을 대체하려하는 그런 시도가 있지요. 이게 아브라함에게 복과 저주가 독점돼 있으니까 아브라함에게 뭐가 실렸다 했습니까? 약속이 실려가지고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이니까 사람이 자기 일도 바쁜데 아브라함 일까지 신경 쓸 수 없잖아요.
그런데 아비멜렉 집에는 아예 아브라함 가정이 일부러 찾아들어요. 찾아들어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관심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분들이 찾아 들음으로 말미암아 아비멜렉 가정에 임신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때 아브라함의 위상을 새롭게 알았지요. “야, 보통 분이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각각 자기 살기에 바빴어요.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에 아브라함의 조카가 투입되면서 거기에 조카를 보면서 기도를 열 번씩이나 기도하면서 뭔가 아브라함의 요소가 집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브라함의 위력을 실감하는 사건이 벌어지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졌다. 이 대목이 창세기 19장2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 엎으시는 중에 내어보냈지요. 이것은 우리네 상식과 다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롯이 구원받은 것은 롯 본인의 개인적인 믿음이잖아요. 우리가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아브라함이 천사를 영접한 게 아니고 누가 영접했습니까? 롯이 영접했고 롯이 천사 말을 들었고 롯이 불량배를 내쫒았고 그리고 롯에 의해서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지만 두 딸은 시인했고 따라와서 구원받았고, 모든 일이 롯이 알아서 한 걸로 되어 있는데 창세기 19장 29절에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엎으시는 중에 내어보낸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성경이 우리의 성급함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본인의 선한 행동, 바른 경건 된 행동, 신앙적 행동이 본인을 구원했습니다. 라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 생각을 엎어버리는 거예요.
자, 박 집사님 천국 가게 될 때에 앞에 수위천사가 묻습니다. “어떻게 여기에 오시게 되었습니까? 묻는다면 뭐라 해야 돼요? ”제가 신앙생활 잘 했습니다.”하게 되면 이것은 창세기 19장 29절과 안 맞지요. 미리 연습합시다. 누구를 생각하사 우리를 구원한다고요? 아브라함은 옛날 언약이고, 새 언약에서는 예수님을 생각하사 (아무개)를 이 세상에서 구원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연습만해서 되는 게 아니고 이 세상 살아가면서 실제적으로 그러한 교체가 일어나도록 사태가 일어납니다. 계속 사태가 일어나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다윗이 골리앗을 붙을 때,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 이건 어린아이도 다 알잖아요. 그런데 다윗 본인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뭐냐 하면, 이 골리앗 앞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은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에 그 베드로와 요한은 자꾸 다른 분이 부활해 계시다고 이야기해요. 우리는 목격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목격자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분보다 더 있는 존재로 삼았을 때는 목격자가 돼요.
남들 보기에 보이지 않는 분인데 그 분이 모든 사태를 다 시나리오를 짜고 일부러 사태를 유발시킨 거예요. 안 가려고 했는데 베드로를 밀어서 가라고 했고 그 애보고 지시하라고 했고 베드로가 지시한대로 나사렛 예수 이름대로 하고 눈치 봤고, 베드로와 요한은 항상 주님 눈치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으로 이 사람을 병 낫게 했다. 아, 병 낫는 은사를 가졌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했다는 거죠.
오늘 소망, 약속 언급하면서 반드시 생각해야 될 텐데, 부활했다는 말은 두 가지 절차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두 번째가 어려워요. 두 번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지식으로는 알고 있거든요. 부활?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다 아는데.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살아 있다가 예수님에게 속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죽어 있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가 부활의 의미의 되풀이, 반복입니다. 부활은 누가 살아있어서 살아있는 우리에게 합류하는 게 부활이 아니고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손에 의해서 죽임당한 분이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온 자가 우리한테 임하므로 우리는 살아있어도 이것은 살수 없는 스스로는 살 수 없는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의미로 예수님이 부활한 거예요.
부활했으면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기능이 나오거든요. 이 기능이 뭐냐, 부활의 기능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마을에서 이 풍호라는 분이 질문을 했지요. 마지막 답변이 그거였어요. 에녹과 우리의 예수 안에서 어떻게 연결됩니까? 했을 때, 이렇게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11절 이야기했지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되어 있어요. 성령의 안목에서 보면, 우리는 완전히 죽을 존재에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성령께서 이렇게 안경 쓰고 보실 때, 요걸 언제 살려내지? 요렇게 보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있다고 여길 때, 성령님이여, 살아있는 나에게 복을 주옵소서. 성령이여,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자꾸 살아있다고 착오를 벌이는 겁니다. 성령은 우리를 죽은 자로 보고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있는 성령을 마음에 모시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로마서8장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부활이 중요한 것은 반복한다는 게 중요해요. 반복할 때 실제적으로 우리의 모든 사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죽어있는데 오늘도 이렇게 눈뜨고 있는 것은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심장은 뛰고 아직도 몸은 부지해야 될 그러한 힘든 숙제를 안고 있는 겁니다.
이 시간 죽으면 참 좋겠는데, 그러한 혜택은 우리한테는 안 주고 그냥 자식 낳고 딸 결혼 시키고 죽어도 되는데 그러한 혜택은 주께서 허락을 안 하시고 계속 못 죽도록 살려내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그걸 알고 내 소원이 있는데 이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했어요. 제대를 하는데 병장 달고 오래 갈 수도 있어요. 북한이 내려오면 제대 보류, 연기할 수가 있어요.
자,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쉬운 거고요, 지금부터 어려운 거 합시다. 뭐가 어려운가하면, 어떻게 세상과 결합되지 않는 약속이 거기다가 소망에 갈고리를 걸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 것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스로 내가 내 소망을 내가 스스로 그걸 거두어버리고 거기다가 약속이라는 소망을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느냐, 턱도 없는 소리지요.
애를 둘 낳고 나이 한 50돼서 별 할 일 없으면 늦둥이 한 번 볼까, 그 정도로 우리는 세상 적으로 소망하는데, 늦둥이도 이쁘다던데, 그럼 늦둥이 낳고 미운7살 되면 또 임신해가지고 하나 더 낳아? 하는 식으로 자꾸 뭔가 우리의 몸이 세상적인 것을 소망하다보니까 하나가 뭔가 완료가 되면 완성이 되면 또 세상적인 것에서 소망거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가 너무 허전해 해요. 우리 마음이 허전해져요. 우울증 걸리고. 등산 다니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관절 안 좋으면 다니지도 못하고.
그래서 지금 숙제가 뭐냐 하면, 히브리서에서는 약속에다가 소망을 걸으라고 했는데 말씀은 우리한테 무책임하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고 우리는 그냥 세상만 바라보는데 성경에서는 약속에다가 소망을 걸으라, 이렇게 되어있다 말이죠. 그 소망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고 추적해보니까 소망은 한 자리에 있으면 우리가 찾아가겠는데 이게 아브라함과 이동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에 하나님의 약속이 묻혀서 그 약속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변화시켰다고 지난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약속이 사람을 바꿔요.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옷 맞춰놨으면 그 다음에 가봉해야 된다고 했지요. 가봉. 오랜만에 듣는 소리 아닙니까. 가봉한다는 말은 옷을 입을 때 맞추잖아요. 천국의 맞춤. 천국에 합당한 인간되기 위해서 이 땅에서 가봉 작업을 하는 겁니다. 바늘로 꼽아서 피팅 작업을 하는 거예요. 맞춰야 하니까. 이 몸 가지고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는 거예요. 피팅작업을 해야 되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런 식으로 그 나라에 갔다면 우리라도 예외가 아닌 거예요. 베드로가 자기가 뭘 좀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했잖아요. 그걸로 끝났습니까? 다시 성령이 찾아오셔서 피팅작업을 해가지고 베드로로 하여금 원치 않는 길로 가서 기어이 천국에 가게 해내시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런 작업들이 오늘날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부터 제가 강의하겠습니다.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먼저 깔아놔야 돼요. 다 같이 열왕기상11장 1절,3절 찾아봅시다. “솔로몬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3절,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되어 있지요.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어떻게 했습니까? 돌이켰다고 되어 있지요. 약속에다가 닻을 걸어라, 우리 같으면 아이고, 믿지 뭐, 굉장히 쉬운 거 같은데 하나님께서 이 구약에 또 솔로몬 왕을 이렇게 사건을 제시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육신으로부터 약속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던지 마음을 거기다가 돌린다는 것이 어느 정도 어려운 가를 아주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이 육신이 얼마나 안 떠나려고 꽉 쥐고 있다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낱낱이 보여줍니다. 욥이란 사람은 대단한 신앙인이잖아요. 그런데 자식 죽을 때도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재산 날아갈 때도 이렇게 했는데 몸이 아플 때는 기어이 반항하잖아요. 끈질기게 마지막 반항.
심지어 예수님도 쓴잔을 마시라 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그냥 넘어가게 하옵소서. 그러니 우리에게 히브리서6장에서 약속을 믿으라고 굉장히 쉬운 말로 약속의 소망 걸으라, 너무나 간편하게 툭! 던지듯이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우리한테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불가능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은 우리보고 약속을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이 말씀 들을 때에 갑자기 마음에 빗장을 걸어버리고 빼꼼히 얼굴 뵈면서 지금도 내가 약속을 믿습니다, 하고 잠시 내뱉고 쏙 다시 들어가는 절대로 남한테 안 빼앗기려는 자기만의 본부를 아주 다지고 다지면서 자기 사수와 방어에 더 굳세게 나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빼앗으려고 훅 달려들면 우리는 후후후 안돼요. 하고 움찔거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교회 다니면 다닐수록 우리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을 더욱 깊숙한 곳에다가 금고에다가 하루에 비밀번호 12번도 바꿔가지고 하나님도 비밀을 못 풀도록 우리는 숨어들어가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솔로몬처럼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솔로몬 이야기 나왔을 때, 남자가 돼가지고 평생을 한 여자만 사귄다는 것이 도대체 이게 남자인가! 천명까지는 아니어도 세 명 정도는 아, 진짜 미치겠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세 명되어 보세요. 세 명 해봐, 열 명 정도는 돼봐야겠다. 이건 남자뿐만이 아니고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갱년기 해가지고 보기만 봐도 꼴 보기 싫고 등짝 때리고 싶은 그런 남편보다도 이 50나이에 한번 다시 청춘을 낭만을 한 번 불태워 봐! 그러고 싶은 거예요. 그것도 단 한명만. 그런데 단 한 명만 해보세요. 이제 한명 안돼요. 남편이 다섯이 있고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는 6번째입니다. 요한복음4장에 나온다니까요. 사마리아 여인 될 수 있어요. 사마리아 여인 돼도 괜찮아요. 구원받으면 됐지.
이게 윤리 도덕이라는 것은 자아를 느낄 때는 반드시 마귀가 그렇게 시켜요. 윤리 도덕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일까? 할 때 갑자기 마귀가 윤리 도덕으로 확 덮치게 돼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딴 인식을 가지고 덮치기 때문에 이러한 포위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다섯 번째 남자 사귀고 지금 여섯 번째 사귀고 있습니다. 하는 이게 주님 귀에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착하지 마시고 착하다, 나쁘다가 의미 없어야 돼요.
의미 없으려면 방법 하나밖에 없어요. 알려드릴게요. 오늘 잘 오셨습니다. 내가 안 사라지면 윤리도덕이 찾아오고 내가 사라지면 윤리도덕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래서 진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있으면서 착하게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너무 작아져서 먼지가 되는 거예요. 작다, 작다, 해도 너무 작아가지고 나중에 부셔져가지고 후 불면 날아갈 정도로 하나의 가루가 될 때, 가루가 착한일 한들 바람을 피운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욥기에 나와요.
주여, 연약한 인간이 선하게 살고 악하게 산들 주님보시기에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대로 욥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 말이 맞아요. 욥의 잘못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 자기가 하나님 저를 의롭게 봐 달라, 하는 그게 잘못이었어요. 성경을 그만큼 봐도 욥의 잘못을 모르겠지요? 이제는 아시기 바랍니다.
욥은 의미 없는데 내가 착하다는 그 문장을 놓치기 싫어서 그걸 금고에 넣어놓고 나는 착해.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의로워. 그거 하나 안 다치려고 마지막 버티는 거예요. “주여, 저 의롭잖아요. 의로운데 왜 고난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니가 있다고 여기니까 의로 우냐, 안의로 우냐, 계속 문제거리가 돼버려요. 말썽꾸러기가 돼버려요. 결국은 욥이 믿는 것은 하나님, 하나님 하다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의롭다는 그것을 마치 약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오인한 거예요.
나는 약속에서 뺍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게 약속이거든요. 약속은 내가 죽고 나는 의미 없이 죽고 내가 의미 있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그것만이 의미 있다는 그것이 약속이다 말이죠. 그게 갈라디아서2장20절이잖아요. 그러니 18절,19절 뭐냐 하면, 왜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 구원받고자 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먼저 깔아요.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율법 앞에서 다음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내가 지킬게요. 하고 나와요. 그러니 반드시 율법에서는 “내가 지킬게요.” 라고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글씨를 써서 바리새인들을 간음한 여인 앞에 다 쫒아 낼 때에 뭐라 했습니까? 죄 없는 너희는 남고 죄 있는 너희는 나가라는 뜻이거든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그 ‘죄 없는 자’가 날아오는 표창 같은 거예요. 주님께서 중국영화에 나오는 표창 같아서 던지니까 다 꼽히는 것처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도망가면 안돼요. 바리새인들이 그 소리를 들을 때 “나, 없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를 도망가 버린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구원할 때 주님만 있고 나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를 뽑아 세운 겁니다. 참, 이 말 하는데 오랜 세월 걸려요. 이 말 알아듣는데. 주님한테 이렇게 멱살을 쥐어야 돼요. 여러분, 정육점에 가면 불쌍한 모습 있지요. 고기 덩어리가 S자로 만든 고리에 걸려가지고 턱~ 늘어져 있잖아요. 이게 주께 매인바 된 존재입니다. 이게. 예수 안에 매인바 된 존재에요. 베드로가 이 꼴 됐습니다. 원치 않는 길로 가면서 이런 식으로 질질 끌려갔어요.
우리가 그 모습을 제가 이야기한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아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집에 찾아왔다고 했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면서 일이 벌어져요.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대적하려고 해요. 마르다 같아. 자꾸 주님 맛있는 거 대접하면서 도망치고 있는 거예요. 요거 받으시고 요거는 손대지 마시고.
그럼 주님께서는 대접받고 더 깊숙이 안방까지 쳐들어오십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더 이상 물러설 때도 없고 완전히 난감하지요. 나중에는 이리 되지요. 요나처럼 차라리 물에다가 집어넣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리 되지요. 요나의 일은 요나가 고국에 있을 때 일한 것이 아니고 요나가 도망쳐야 돼요. 도망쳐서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추격자인 하나님에 의해서 붙잡혀서 바닷물에 빠지는 거, 빠졌다가 고래배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있다가 나오는 거, 이 모든 것이 요나가 기획한 게 아닙니다. 요나가 상상한 게 아니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 다시 돌아봅시다. 소망한다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기대한 소망은 소망이 아니지요. 소망이라는 하나의 흔적만 남고 소망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이것은 주께서 찾아와서 어떻게 나를 가지고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 그것은 주님 손에 달린 문제지, 우리가 미리 상상하지 맙시다.
‘아, 이따가 내가 강의하다가 암에 걸렸는데, 내가 죽게 되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갑자기 암이 나아가지고’ 자꾸 이렇게 상상하지 마세요. 그것도 어디서 들은바 간증집회에서 들은 바를 가지고 자꾸 멋있게 포장하는데 그래서 간증집회가 나쁜 게 있어요. 고난 받는 것도 자꾸 조작이 돼요. 흉내나 모방을 한다고요. 고난 받는 것을 흉내내가지고 고난 받는데서 오는 쾌락 같은 거. 마조히즘 심리학이라 하는데. 얻어맞는데서 오는 어떤 쾌락 같은 거.
예수 복음으로 고난 받으면서 자기는 즐거워하고 있어요. “주여, 지금 이 아픔 주께서 주신 아픔이지요?” 주께서 “놀고 있네. 어디서 상상하고 있어.” 자꾸 테레사 수녀, 한 경직 목사 자꾸 그런 걸 모방하지 마세요. 지금도 신사참배 일이 벌어져가지고 다른 사람은 다 천황한테 절하는데 혼자 절 안하는 이 멋드러진 모습을 막 상상하고 그러지 마세요. 멋있게 살려고 하지 마세요. 전혀 멋있지 않습니다.
열왕기상11장5절에 보면, 이제부터 본격적입니다.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밀곰이 어디서 서식하는 곰입니까? 곰 아닙니다. 그냥 발음대로 밀곰이에요. 그 다음에 7절에 보면, 그모스 나오지요.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 암몬족속의 가증한 몰록 신 나오고. 자, 열왕기상11장에 나오는 내용은 이겁니다.
솔로몬이 여자들 때문에 마음을 돌이켰지요. 돌이켜서 그 다음부터는 뭘 섬겼다 했습니까? 아스다롯을 섬기고, 밀곰, 그모스, 몰록 라는 신들이 나와요. 그모스와 몰록과 밀곰과 아스다롯의 각자 차이는 뭐냐, 이것은 의미 없어요. 뭐냐 하면, 우상의 특징이 뭐냐, 하나로 묶을 수가 있어요. 언약이 없습니다.
우상의 특징은 인간이 우상을 제조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길 때의 그 소망은 그 내용은 어디서 만들어 내느냐 하면, 본인이 마음속에서 품고 있던 욕망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모스, 아스다롯, 밀곰, 이것을 요즘말로 하면 점치기, 점보기, 궁합보기, 사주팔자보기, 이런 겁니다. 요새로 더 말할 것 같으면, 교회 다니기도 포함되지요.
왜냐 하면,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의 희망과 소망 없이 교회 다니는 사람 있겠습니까? 없지요. 그저 교회 안 나오는 우리 남편도 나와 같이 성경책 갖고 같이 출석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렇게 소망하는데. 얼마 전에 기사한 번 받는데요. 시립대 부총장하다가 퇴직한 사람인데 마누라를 개패듯해가지고 고소당한 거 했어요. 짧은 기사에 보니까 남자가 괴팍해가지고 술만 먹으면 아내를 베개 해놓고 때리고 그 중에 기사가 재미있는 게 교회 갈 때도 아내가 늦장 부린다고 시계재서 다시 집에 갔다가 선착순 뱅뱅이 시켰다는 거예요. 교회 갈 때도. 도대체 이 사람이 교회를 어떻게 믿으면 마누라를 그렇게 구박하면서 교회 갈 때 아내를 그렇게 훈련시키는가, 무슨 교회신앙이 그런 신앙이 다 있는가 아주 신기했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 올 때, 남편과 같이 교회 온다는 게 굉장히 소망이 되지만, 그것은 밀곰이나 아스다롯, 그모스, 몰록, 이런 것들을 섬길 때 특징은 다 나의 소망의 구체화란 말이죠. 나의 소망의 구체화. 나의 욕망의 구체화. 솔로몬은 하나님 나라가 와야 되기를 원치 않았어요. 그게 잘못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되잖아요. 솔로몬은 어느새 이스라엘이 누구 나라가 됐습니까? 자기 나라된 거예요.
사울이 다윗을 구박할 때, 구박한 이유가 뭐냐, 이 이스라엘은 누구나라여야 한다? 바로 사울, 내 나라이어야 한다. 구약에서 그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뭘 시사하는 겁니까?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믿어도 자기 나라가 무너지고 붕괴되지 않는 이상은 반드시 자기 나라를 위해서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구약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약속 위에다가 뭘 담아라? 소망을 담아라, 그 이야기하면서 계속 지금 솔로몬 이야기하고 있지요. 우리는 약속 위에 소망하라, “약속 믿지 뭐” 그거 아니에요. 약속 믿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뭔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집을 찾아오듯이 주께서 그냥 부활만 하시면 안 되고 부활한 주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해줘야 돼요. 이거 아니면 우리 실패합니다. 우리는 구원에 성공할 수 없어요.
그러면 나의 소망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소망 가운데 우리가 포함되어야 우리가 구원되는 거예요. “너, 구원되어야 돼!” 라는 것이 내 숙제가 아니고 주님의 숙제고 내 소망이 아니고 주님의 소망이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하다, 이 말은 소망도 수입해야 돼요. 소망도 국산은 안돼요. 프라다 쯤 되어야 돼. 명품, 이태리에서 와야 돼요. 구찌. 이런 명품들처럼 명품이 명품답게 명품은 일련번호가 있어요. 딱 그 번호가 유지해야 돼요. 괜히 명품에다가 재봉틀해서 실밥 더 박으면 이거 완전히 명품 가치 날아가 버립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명품입니다. 우리가 만든 믿음, 소망, 사랑은 가품이 돼가지고 재봉틀로 하던지 작두로 잘라내던지 조치를 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아깝다고 내 믿음, 소망, 사랑을 절대로 안 자르지요.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하면, ‘나를 혼자 두지 않는 것’ 이게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누가 보디가드처럼 지켜줘야 되지요. 나를 지켜달라는 거예요. 여자가 결혼하는 이유가 뭔데요? 나를 그냥 놔두면 안 돼! 그게 약속이에요. 결혼식 때 머리가 파뿌리 되기까지 그거 다 쓸데없는 소리에요. 혼자 둘 거야, 말거야, 출장가면 전화 할 거야, 말거야, 하여튼 지금까지는 나 혼자 살았지만 당신 만난 이후는 당신이 어디 있더라도 나를 지켜줘야 돼! 그것보고 여자는 남자보고 “당신, 나 사랑해?”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알아들을 남자는 없습니다. 빨래 잘 해야 돼, 맛있게 요리해야 돼, 그렇게 이해하지 여자의 마음을 헤아릴 것 같으면 남자가 아니지. 그건 타락된 남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나를 혼자 두지 말라는 거고, 천국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나를 혼자 두지 말라고 앙앙거리고 앵앵거리는 그 인간을 제거하는 게 사랑입니다. 죽여 버립니다. 내가 안 죽고 번데기처럼 계속 살아있으면 구더기처럼 살아있으면 구더기가 발악을 해요. 앙앙거리면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내 남편으로 여겼는데 내가 하나님을 믿고 제가 얻은 게 뭡니까?” 앙앙거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죽여 버려야 돼요.
십자가가 그겁니다.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거예요. 십자가가 분명히 예수님 혼자 달렸다고 생각하는 그 십자가가 나중에 사도바울은 같이 죽은 십자가라고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세례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혼자 죽은 십자가가 아니데이. 요게 바로 세례라는 거예요. 참, 어렵지요. 연합해야 된다는 것. 아무리 십자가 봐도 누가 연합한 적이 없었거든요. 이 십자가는 나 혼자 죽은 것이 아니고 살 사람을 연합해서 죽었던 십자가고 그것이 사건이다.
그러면 그 십자가는 한 사건에서 있으면 안 되고 십자가가 쭉 쭉 늘어나야 되겠지요. 그림으로 그리면 바짝 야윈 십자가인데 로마서6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갑자기 뚱뚱해진 십자가, 쭉쭉 늘어난 십자가, 택한 백성을 전부 다 거두어서 집어넣을 수 있는 십자가, 그리고 이 십자가가 되려면 이것은 물리적 크기로는 안 되겠지요. 십자가를 예수님 키 재서 해야 되니까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사물의 십자가, 나무덩어리인 십자가를 ‘사건’으로 바꿉니다.
그러면 말씀이 뭐로 바뀌느냐, 모든 말씀의 해석은 반복 가능한 사건으로 바뀌어야 되지요. 솔로몬이 섬겼던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면 나를 위하여, 나의 욕망을 위하여, 내 소망을 위해서 교회 가서 기도하는 것 그게 바로 우상숭배로 사건화 되는 겁니다.
구약은 솔로몬 살아있어요. 지금도 살아있고 솔로몬의 오류도 우리와 함께 살아있고 말씀은 이처럼 늘 살아있어야 돼요. 그래서 하이데거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말하지 말고 말이 나를 가지고 말을 상대방에게 건네야 된다. 이런 말 했어요. 말이 말하게 해야 된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했어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가지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나를 통해서 내질러져야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가 하면, 철학적으로 보면 이게 가능해요. 뭐냐 하면, 누가 나에게 저녁때가 됐는데도 아무도 나에게 식사를 안 해줄 때 애가 그럴 때, 엄마한테 “엄마, 언제 오는데?” 무슨 뜻입니까? 배고프니까 밥 해 달라 했지요. 그러면 엄마가 제때 오지 않은 그 상황이 나를 통해서는 말이라는 것 “엄마, 언제 집에 오는데?” 라는 말로 바뀌어 진 거예요.
그 상황이 말로 표현된 것뿐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엄마 언제 오는데”를 말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상황이 그렇게 몰아친 거예요. 멀쩡한데 “아, 왜 이리 아프지.” 이런 사람 없어요. 누가 발로 차면“왜? 아이고, 아파” 그러잖아요. 아프게 하는 상황이 우선이고 나는 그 상황에 말려들었고 따라서 내 입에서 나는 아파, 이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서로 서로가 말을 건네고 서로 건네는 그러한 상황이 세상 내에 존재라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 나와 있어요. 제가 시민대학 강의할 때 보면 거기에 나와 있어요. 철학가들도 그걸 알아요. 짐작을 해요. 그래서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하이데거의 철학자의 말을 따가지고 그렇다! 해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설명을 했어요. 불트만도 대단한 신학자입니다.
방금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했지요. 그러면 그걸 그대로 요한복음1장에 적용시키면 태초에 뭐가 있었다?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잠시 있다가는 풀의 꽃 같고 우리는 풀의 꽃같이 다 지지만, 무엇은 영원히 서리라?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사야40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하이데거 철학을 이용해서 그렇게 설명한 거예요. 하이데거 나오니까 갑자기 철학가는 왜 하시는가 하지만, 그게 다 일리가 있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약속이라 하는 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반복된다. 무엇으로? 사건으로. 그러면 우리가 그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약속을 믿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이, 그 약속이, 우리를 쳐들어오게 되면 나는 말씀의 폭풍에 휘말리게 되고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 가운데서 이건 내가 원하지 않는 소망인데 주님의 원하는 소망인데 그게 우리의 소망으로 나를 통해서 등장되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때 그게 바로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말씀이 말씀화 되는 그런 일인 것입니다. 정리 되었지요.
그래서 발걸음을 그냥 걷는 것도 되지만, 지금 발걸음을 세시는 분이 내가 아니고 주님께서 발걸음을 지금 걷도록 해주신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거지 나사로가 사는 삶과 같은 삶이 되겠어요. 아니 발걸음을 세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었습니까? 아 맞춰야 되는데. 오늘 저기까지 256걸음 맞춰야 되는데. 그걸 소망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거지 나사로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오락가락할지 모른다면, 지금 내가 걷는 것도 누구의 은혜다? 주님의 주신 힘으로 걷는 것이다. 이게 바로 거지 나사로의 삶이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지나가면 부자가 놀리지요. “부자는 몰라, 니는 몰라” 부자는 왜 모르느냐 하면, 본인 자기가 있잖아요. 솔로몬처럼. 자기가 있으니까 자기가 부자 된 것은 다 누구 덕입니까? 자기가 자기 덕이 되는 거예요.
스피노자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생을 만드는 것은 내가 만든다. 했어요.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일리 있어가지고 멍하지요. 내 인생은 누가 만든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이게 기본이고 그럼 내가 교회 가는 것도 내가 교회가야 내가 잘되겠다하는 누가 그걸 기획하고 누가 그 작전을 꾸민 거예요? 내가 꾸며서 교회 갔고 내가 알아서 예수 믿고 천국가고 천국 가는 모든 공로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가는 그 업적으로서 나중에 구원받는 셈이 되어 버려요.
거기에 대해서 목사가 칭찬을 늘어지게 해버리면 우리는 교회 가서 드디어 존재의 의미를 알고 칭찬받는 재미로 교회 간다니까요. 교회에 사람들이 왜 오는 줄 알아요? 누가 자기를 인정해주고 자랑해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거예요. 알아주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노아가 설교를 어떻게 했습니까? 잘했지요. 교인 수 몇 명이었습니까? 자기 식구 빼놓고 없어요. 제로. 자기 식구 빼놓고 한 명도 없어요.
노아는 단 한 명에게도 전도 못한 그것이 전도에요. 노아의 전도에요. 노아가 만약에 한 명 전도했으면 노아는 지옥 갈 뻔했어요. 제대로 안전했다고. 천국 오지도 말아야 될 인간을 같이 데리고 왔느냐고 아마도 꾸중 들었을 거예요. 노아가 제대로 전도했기 때문에 아무도 전도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달랑 자기 식구들밖에 없었고 자기 식구들도 다 믿었습니까? 함은 나중에 이상한 소리하지요. 그게 바로 주의 소망입니다. 방주에 8명 이외에는 절대로 타서는 안 되느니라, 하는 소망을 노아는 몰랐어요. 퉁탕 퉁탕 지으면서 장충체육관 넓게 지으니까 수천 명 들어올 줄 알았지.
퉁탕 지을 때, 처음부터 자기 식구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짓지를 않았을 거예요. 소망을 몰라요. 주께서 이끌어주실 때 우리는 나의 소망은 철저하게 묵살되고 주의 소망만 철저하게 살아나는 그것을 증언하는 그걸 나의 소망과 어긋나는 소망을 주신 것에 대한 그 고백과 찬미와 영광을 돌리려고 우리로 하여금 허접스러운 우리를 오늘도 우리를 가지고 다루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40110a-히6장19절(존재의 힘) - 이 근호 목사.hwp (33.0K), Dow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