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의 운명 140205
두로의 운명 140205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두로의 운명(에스겔 27:1-4)
이근호
14-02-05 21:30
두로의 운명
2014년 2월 5일 본문 말씀: 에스겔 27:1-4
(27: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7:2) 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애가를 지으라
(27:3) 너는 두로를 향하여 이르기를 바다 어귀에 거하여 여러 섬 백성과 통상하는 자여 주 여호와의 말씀에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
(27:4) 네 지경이 바다 가운데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케 하였도다
두로라는 것은 지명입니다. 특정 인물 이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마치 산 사람을 대하듯이 두로라는 도시를 대하십니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여러 가지로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도시에는 인간들이 거주하기에 인간 집합을 총괄해서 그렇게 상징화시켜서 부르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허상이고 실상은 오직 그 도시 안에서 사는 주민들이라고 여깁니다. 즉 실제로 있는 인간만이 실체이며 그 외의 것은 인간을 대하듯이 대할 수 없는 선입견이 우리 인간에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3:9에서의 세례 요한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평소를 돌을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인간과 동등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돌을 수집하려 다니는 사람이라도 돌을 인격자로 볼 자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요 돌은 돌일 따름입니다. 이처럼 돌과 인간이 같은 부류가 될 수 없다는 이 인식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해석이 틀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겠다는 의도는, 결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그 의도가 같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겁니다. 아무리 성경을 보려고 해도 성경 쪽으로 자신의 뜻을 보이게 하지 아니하면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성경이란 문자를 적어 모아 놓은 책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담겨 있는 뜻을 파악하는 것은 그 성경을 보는 인간 자신들의 자질과 능력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류는 오늘 본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로라는 옛적 도시 국가의 멸망과 관한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어떤 교훈을 뽑아내려고 하면 이런 겁니다. “두로 도시는 망했다. 분명 하나님에게 잘못한 게 있어 멸망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두로 지방은 아주 멋있게, 뛰어나게 조성시켜주었지만 두로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방자하게 굴다가 망했다. 따라서 이 교훈을 본받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방자하게 굴지 말자”는 식입니다.
과연 이런 해석이 합당한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쁜 짓해서 멸망했기에, 만약에 나쁜 짓을 아니했으면 두로 지방은 영원히 번창할 것이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한 것은 나쁜 짓을 해서 멸망했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바로 이런 의식에는 뭐가 깔려있느냐 하면 평소에 자기 자신을 독자적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욥의 친구를 생각해 봅시다. 욥이 고난 받고 있으니 욥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분명 이런 혹독한 벌을 받을 만큼 죄를 지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과연 욥 친구의 이러한 견해가 진정 하나님의 뜻이었던가요 아니면 반대였습니까? 반대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잘못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욥의 고난과 엮여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가질 자유나 권리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데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독자성은 모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왜곡된 견해를 드러냅니다.
두로 도시의 멸망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멸망’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멸망되어야 하기 때문에 멸망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에서 ‘우리들 중에 누가 높으냐’에 관한 문제로 시비가 일어났습니다. 즉 누가 더 착하고 누가 악하냐를 놓고 같은 어른 인간들끼리 논쟁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난데없이 어린아이를 하나를 데리고 나옵니다.
이 의미를 놓치면 아니됩니다. 누가 더 악해서 벌을 더 받고 누가 더 착해서 벌을 적게 받는다고 여기는 그 마음 자체가 성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대로 해석한 결과일 뿐입니다. 두로 지방에 관한 멸망 소식은 정작 두로 지방 사람들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자처럼 간주되는 유다 백성들의 의견을 자극합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이미 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네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망했다는 식으로 자신들을 이해하게 되면, 앞으로 잘하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자기 희망만 발산될 뿐입니다. 유다가 망하는 것은 당연히 망해야 하기 때문에 망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도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실체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입니다. 허망한 존재이며 평생 하나님에게 의미 있는 역할만 당당할 뿐입니다. 로마서 5:14에 보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면 의미없는 존재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탈바꿈되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상 실체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나머지는 결국 다 안개가 되고, 먼지가 되어 서라져야 될 임시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요한복음 10:30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인간들은 이런 말을 하지를 못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아니라 따로따로 분리된 채 각자 독자적인 존재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의 그림자로 보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됩니다.
하나는 멸망해야만 하는 기능과 하나는 구원되어야 될 기능, 말입니다. 마태복음 21:19-20에 보면, 무화과 나무가 졸지에 말라비틀어지는 저주를 받는 대목이 나옵니다. 과수나무나 제철이 아닐 때는 열매맺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 철도 아닌데 과실이 맺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화과 나무를 저주했다면 여기에 어떤 원리가 적용된 겁니까?
만약이 이 원칙이 우리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저주받는 자가 발생한다는 경우가 일어납니다. 자, 이게 과연 불합리합니까? 자기 자신도 그저 그림자임을 아는 자에게는 감사할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존재임을 늘 생각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2-07 00:20
77강-에스겔 27장 1-4(두로의 운명)14020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7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9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7: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애가를 지으라 너는 두로를 향하여 이르기를 바다 어귀에 거하여 여러 섬 백성과 통상하는 자여 주 여호와의 말씀에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 네 지경이 바다 가운데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케 하였도다.”
두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뭐라고 평가하느냐 하면, 두로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했는데 그 아름다운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온전히 아름답다.”라고 했습니다. 두로라는 것이 우리가 알다시피 도시국가고 어떤 한 마을입니다. 그 마을이 온전할 정도로 아름답다? 꼭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을 갖지요. 성경에 지명들이 나오는데 그 지명들 하나하나가 마치 움직이는 사람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경우가 또 있어요. “너희가 아브라함 자손이냐? 하나님께서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자손이 되게 하신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람이고 그 사람 외에는 별로 가치를 주지를 않습니다. ‘돌멩이 저게 뭔데?’ 그렇게 되거든요. 특히 과학이 발달하게 되면 별도 조사하고 해도 조사하고 달도 조사하는데 옛날 과학이 발달되기 전에 달에는 토기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직접 가보니 흙덩어리고 그 안에는 금속이 들어 있지요. 인간보다 못하다, 인간은 살아 있는데 그 나머지는 살아 있지 못하다,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한다는 그 의미, 하나님은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정작 인간들은 거기에 대해서 동의할 생각을 안 합니다.
‘어떻게 돌멩이가 아브라함자손이 될 수 있느냐?’ 예수님의 그 말씀을 모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인간들이 큰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큰 문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모른다고 한다면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 27장의 두로 이야기인데 이 두로의 이야기가 핵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두로 라는 지역을 마치 사람 다루듯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너희들을 온전하게 아름답게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결국은 멸망했다.” 그 이야기입니다.
멸망으로 가는 본보기로서 두로 지방을 하나님께서 채택하신 겁니다. “이렇게 잘났더니만 멸망했잖아. 봐.” 라는 대표로서 두로 지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멸망을 설명하기 위해서, 멸망하는 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기에 멸망하는가, 도대체 그들의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멸망하는가, 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에스겔 27장을 보면서, “두로는 아주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그런데 그 두로가 나중에 멸망했대.” “멸망했다고? 그러면 두로 지방이 뭔가 하나님한테 큰 잘못을 한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 잘못한 것이 있으니 멸망했겠지.” “그런데 그 잘못한 것이 뭐지? 그걸 찾아보자.” “왜 찾는데?” “두로 지방이 잘못한 것이 있기에 멸망했다면 우리는 그 같은 잘못을 안 저지르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니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찾아내자.” 라는 쪽으로 성경해석을 보통 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렇지요? 그렇게 해석하지요?
그 해석이 잘못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기에 멸망한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두로지방이 잘못한 것이 없으면 멸망 안했겠네요? 소돔과 고모라가 제대로 했다면 멸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닙니다. 두로지방이나 소돔과 고모라나 이 세상 모든 것은 멸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뭐가 잘못되어서 멸망하느냐고 나서버리면 어떤 문제점이 있느냐 하면, 잘만 하면 멸망 안 할 수도 있겠다는 여운을 남길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잘못되었고 그렇게 성경해석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두로 지방이 있는데 잘못해서 두로 지방이 망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멸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두로 지방이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멸망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두로 지방이 아무리 착해도 멸망해요. 악해도 멸망하고 착해도 멸망합니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에요. 에스겔 27장에서 두로 지방이 멸망했다는 이야기, 따지고 보면 남의 동네 이야기잖아요. 남의 동네 이야기를 에스겔에서 왜 봐야 되느냐 하는 말이지요. 왜 봐야 되느냐 하면, 두로 지방을 보면서 ‘그들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멸망했는데 우리는 잘못한 게 없어서 멸망 안했다.’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어서 멸망 안하는 겁니까? 우리가 죄지은 것이 없어서 구원을 받은 겁니까? 그것은 아니잖아요. 구원이라는 것이 남보다 죄를 더 적게 지어서 구원받았다는 사고방식은 납득은 되지만 비 성경적입니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봤던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그러면 성경의 이 두로 지방을 언급한 그 이유가 뭐냐, 그들이 잘못한 것이 있기에 멸망한 식이 아니라면 두로 지방을 언급을 한 이유가 뭔지 상당히 궁금하잖아요.
아까 돌멩이 이야기를 했지요. “너희들이 아브라함자손이냐? 이 돌멩이라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손 되게 한다.” 할 때 돌멩이를 거론한 이유,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겠느냐?” 하고 서로 경쟁할 때 어린아이를 앞장세운 이유, 그것은 이렇습니다. 현재 네가 ‘이것이 잘못이고 이런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성경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속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데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끄집어내고 들추어내기 위함입니다.
어린아이를 앞장세운 이유가 뭡니까? 제자들은 말하기를 “누가 더 높습니까?”라고 했어요. “우리 열두 명 가운데서 누가 하늘나라에서 높겠습니까?”라고 다퉜다는 말이지요. 열두 명 가운데서,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두 명 가운데서 뽑는 것이 아니고 제 삼자를 데리고 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내가 옳은가, 네가 옳은가? 네가 옳든지 내가 옳든지 둘 중 하나라.’는 생각만 갖고 있지 둘 다 틀렸다는 생각은 못하는 겁니다. 왜, 인간은 눈에 인간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껏 어떤 진리를 찾아내는데 인간의 보이는 그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내가 보고 내가 보는 그 안에서만 내가 해석을 덧붙이는 식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보이게 하는 책이에요. 이런 이야기가 참 어려운데, 성경을 보고 무슨 해석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성경 자체가 우리의 새로운 면을 보게 하는 겁니다. 두로같은 경우 이렇게 보면 돼요.
두로 사람들이 두로를 생각하는 것과 성경에서 하나님이 ‘나는 두로를 이런 식으로 본다.’ 하는 것, 그 다음에 두로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오늘날 제 삼자 입장인 우리가 두로를 보는 것이 다 달라요. 두로 사람들이 에스겔 27장의 멸망이야기를 들으면 코웃음 칩니다. “우리보고 멸망한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하나님은 누구야? 그 하나님은 죽어야 해.”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두로 사람들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아주 여유만만 합니다. 그게 두로 사람들에게 먹히겠습니까? 지금 너무나 잘나가는데요.
요나서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에요. 이것은 예상도 못한 일입니다. 인간은 당최 회개가 안 되는 존재에요. 선교사들의 제일 큰 문제는 뭐냐 하면, 회개케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다는데 그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인간자체가 회개가 안 되는데 무슨 회개를 시킵니까? 선교사가 해야 될 것은 ‘그들은 잘못이고 우리는 옳다.’는 식으로 할 것이 아니라 복음 전하는 나나 복음 전하는 당신이나 제 삼자 되시는 주님 십자가 앞에서 다 죄인이라는 그것을 전하라고 선교사 해야 되는 거예요.
저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자기 주변에서 이야기하면 됩니다. “당신이나 나나 죄 값으로 죽습니다.” 이게 선교사에요. 이게 전도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릴게요. 제가 메일을 받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질문을 받았어요. “하나님나라에 관한 것인데 신약에서 하나님나라라는 것은 예수 안, 성령 안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데 왜 신학서적이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제도나 조직, 벌어진 일 같은 것을 하나님나라라고 합니까? 아무리 봐도 그것이 틀린 것 같은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오늘 보는 에스겔도 구약인데 “구약의 모든 상황들, 에덴동산 같은 경우나 이스라엘을 두고 하나님나라라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입니다.”라고 했어요. 여기서부터 어려우니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림자인데 이 그림자가 실체로 나타나니 전혀 그림자로 보이지 않는 거예요. 다윗이 그림자입니까? 다윗이 유령이에요? 다윗은 몸무게가 나가고 심장이 뛰고 있고 우리와 똑같은 신체를 가진 거예요. 그게 무슨 그림자입니까? 귀신 아닙니다. 애기 낳았어요. 무슨 귀신이 애를 낳습니까? 실제 몸이 아이를 낳지요.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그림자입니까? 아닙니다. 실제로 무너졌어요. 많은 군대가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다면 그 피가 케첩입니까? 실제 피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그냥 죽는 척을 한 거예요? 연기한 겁니까? 그래픽입니까?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 자국이 피부에 문신을 새긴 겁니까, 실제 창 자국이고 못 자국입니까? 실제로 창자국과 못 자국이잖아요. 그런데 구약에 일어났던 실제 역사들이 전부다 그림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그림자로 못 보는 이유가 뭐냐, 인간 자신이 그림자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나는 분명히 여기 있고 손톱이 아프면 진짜 아픈 것이지 그냥 가짜로 아프고 환상 속에서 아픈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아프고 실제로 피가 나고 날씨가 더울 때는 실제로 덥고 땀이 나고 추우면 실제로 춥고, 이것을 꿈속이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전체가 그림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이 다 허구고 허상인 그림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면, 두로지방이 있을 때 하나님은 두로지방을 그림자로 보는데 우리눈에는 이 두로지방이 실제로 있잖아요.
만약에 예루살렘이 대구라면 두로는 서산이라고 했지요? 실제로 그 동네가 잘 먹고 잘 사니까 내가 대구에 실제로 사는 것처럼 그쪽 서산사람도 실제로 살고 있다. 그것이 실제다, 끝! 저쪽도 이쪽도 양쪽 다 그림자가 될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 중에서 누가 더 높은가, 할 때 “네가 높은가, 내가 높은가?” 정답은 둘 중에 하나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린아이 하나 데려올 줄은 생각도 못한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돌멩이를 가지고 “돌멩이라도 아브라함 자손을 만든다.”고 돌멩이를 거론할 줄이야 상상도 못한 거예요.
돌멩이는 비 생명체이고 자기는 생명체이기에 어느 것이 실제인가? 생명체가 실제지 돌멩이는 아니라고 본 거예요. 돌들로도 아브라함자손이 되게 한다고 하는 그 의미에 대해서, 그들은 돌멩이를 아주 우습게보고 있다고 전제할 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한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입에서나 행동에서 나온 어떤 것이 있더라도 예수님은 그것을 그림자로 보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그림자로. 자, 하나님나라의 그림자인데 하늘나라의 그림자라고 했을 때 또 하나의 오해에 대해서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라고 할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좋다. 그리고 안락하다. 넉넉하다. 행복하다. 오직 빛만 가득하다. 어두움은 조금도 없다.” 이렇게 하늘나라에 대해서 좋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체일 경우에 그런데 이 하늘나라 실체가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언약 중에서 제일 마지막 언약 때 완성됩니다. 그 제일 마지막 언약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그림자이면서도 그림자인줄 모르고 실체로 여길 때는 “내가 여기 있다.” 이렇게 되거든요. 내가 여기 있을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어디에, 언제 있습니까? 예수님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사도행전 1장 6절이죠.
“하나님, 주의 날이 언제 옵니까?” 누가복음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도 있지요. 바리새인이 물었어요.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지요? 여기 있습니까, 저기 있습니까?” 왜 사람들이 하늘나라가 언제 오는가, 이것은 시간이죠? 그 다음에 어디에 옵니까, 라고 하는 그 어디에? 지난 겨울수련회에서 에덴동산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을 했지요? 에덴동산이 어디 있느냐 하면 시간이 역전가운데 있다고 했어요. 시간의 역전 속, 시간의 뒤집힘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 취지는 정확한 장소를 이야기해 달라고 묻는 질문이에요.
왜 그런 질문을 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나는 그림자가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실제로 나는 있다.’고 할 때 항상 ‘나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시간에 있다.’ 시간과 공간, ‘이 시간에 여기 있고 나는 이 자리에 여기 있다. 따라서 여기 있는 사람은 바로 나고 이 시간에 있는 것도 나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하늘나라는 언제 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런 물음, 언제 그리고 어디에 오느냐고 하는 것 전체가 그림자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두로라고 이야기한 것은 두로가 어디에 있습니까, 언제입니까, 가 아니라 두로는 멸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멸망을 설명하기 위해서 두로라는 그림자 같은 도시국가를 거론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두로를 볼 때는 그림자로 보지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막상 두로 지방에 사는 왕이나 신하들이나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 에스겔 27장의 이야기가 먹히겠느냐는 말입니다. “너희들 얼마 안가서 멸망한단다.” “누가 그러더냐?”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멸망시킨단다.” 할 때 그들이 거기에 대해서 먹히겠습니까?
전혀 안 먹힐 거예요. 정작 두로 사람들은 그게 안 먹히지요. 왜? 두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자기 일이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지요. 행여 멸망할까, 행여 무너질까, 행여 이 도시가 황폐할까, 다른 쪽에서 신경 쓰는 것보다 더 신경 썼습니다. 그래서 멸망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지요. 멸망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두로에서 두로를 보는 것과 하나님이 두로를 보는 것은 이렇게 다릅니다. 우리는 제 삼자라고 보고 아까 한 이야기를 다시 해 봅니다. 두로 지방은 멸망한다. 두로 지방은 멸망한다는 그 소식을 에스겔 26장, 27장, 28장에서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어떤 오류에 빠지는가? 아까 한 이야기를 그대로 하겠습니다.
‘두로 지방이 뭐가 잘못한 것이 있기에 멸망할까? 하나님 보기에 두로 지방이 이런 잘못으로 인해서 망했구나. 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지. 그러면 우리는 멸망하지 않을 테니.’라고 성경을 해석해 가는 거예요. 모든 성경주석이나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합니다. 저는 그것이 틀렸다고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두로 지방 사람들이 아니고 제 삼자 입장에서 볼 때 “두로 사람들아, 멸망하니 빨리 회개하라.”라고 지적을 하는 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고난 받지 않은 욥의 친구가 욥이 고난 받고 있으니까 “욥아, 네가 고난 받는 것은 죄 지은 것이 있기에 고난 받는 거야. 그러니 빨리 고난주신 하나님께 회개하란 말이야.”
욥의 친구가 제 삼자입장에서 보니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줬습니다. 욥은 고난을 받습니다. 제 삼자인 욥의 친구가 뭣도 모르는 주제에 아는 척을 하는 겁니다. 욥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 고난을 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의 해석에 동의했습니까, 아니면 틀렸다고 했습니까? 그게 틀린 거지요. 똑같은 잘못을 우리가 저지르고 있습니다. 두로 지방의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벌을 받는가, 똑같은 잘못된 시선으로 에스겔 27장의 두로에 관한 해석을 시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가 하면, 두로 지방이 아무 이유도 없이 멸망하기 위해서 멸망한다고 했을 때, 다시 말해서 두로 지방에서 구태여 멸망 받을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고 그냥 멸망했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누구 편을 드느냐 하면, 두로 사람들의 편을 들고 그냥 두로 사람을 멸망하기 위해서 두로 사람을 만들고 번창케 했던 그 하나님의 모든 일에 대해서 도리어 원망하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두로 지방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기에.
이렇게 이야기해도 제가 무슨 취지로 말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실 거예요. 그러면 하나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하고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 무화과나무를 봤어요. 무화과나무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냥 무화과나무인데 5월이 되어야 열매를 맺히는데 3월쯤 되어서 예수님께서 시장한 차에 열매를 찾으니까 아직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어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들으라는 식으로 한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내가 시장할 때 왜 열매가 없는가? 내가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다.” 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어요.
나중에 보니 무화과나무가 바짝 말라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제자들이 뭘 느꼈겠습니까? 아마 섬뜩했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다루는 방식과 예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 방식과 동일하게 다룬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무화과나무를 아무리 봐도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을 짓을 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결국 뭐냐? 저주를 받고 늙어 죽어가면서 여전히 인간은 자기 쪽에서 ‘왜 나는 저주받는가, 왜 나는 죄인인가, 왜 나는 지옥 가는가, 나는 왜 심판받아야 하는가?’를 찾아낼 수 없는 식으로 평소에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를 살피고 도를 닦아도 ‘나는 왜 저주받아야 마땅하며 잘 하고 잘못하고와 아무 상관없이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살아간다.’ 하는 것을 동의할 수 없는 마음을 이미 지니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우리는 그저 그림자라는 거예요. 실체는 예수님이고. 마치 아담이 실체고 우리가 아담의 후손인 것처럼 예수님이 실체고 아담은 예수님의 형상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표상이 되는 겁니다. 그림그릴 때 스케치 있잖아요. 스케치 먼저 하고 난 뒤에 물감 칠해서 수채화 그리잖아요.
그림 다 그려보면 스케치 한 것은 잘 안보입니다. 왜, 그것은 밑그림이거든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냥 대충 그려놓는 데생 같은, 뭔가 색을 입히기 전에 미리 해 놓는 보조기능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고 마귀의 꾐에 빠져서 나 있음으로 이미 독자적으로 완료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이제는 손대지 마세요.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려면, 어디에, 언제 하늘나라가 오는지 알려주면 우리가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독자적이니까, 나 자체로 완성이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균열되어 버려요. 본문에 해답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나와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하나가 아니고 갈라져 있어요. 갈라져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그림자라고 한 거예요.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를 갈라놓고 자기 쪽에서 가인의 제사처럼 드려서 그 간격을 메우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따라 붙이겠습니다. 영광 돌리고 찬송하고 섬기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게 하나가 아니에요. 항상 간격이 있어요.
그 간격 때문에 인간은 무섭고, 두렵고, 떨리고, 공포스럽고, 염려되고, 걱정되고, 근심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자기 안에 아버지가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나만 일해요. 사실은 마귀가 일하지만. 내 안에 나밖에 모르는 채로 하니까 하나님보시기에 “너는 아담과 같이 그림자라. 오실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버림받아야 될 이유를 지금 역할극으로 보여주고 있다. 네가 그 짓 하니 예수님께서 버림받은 것이다. 더 쉽게 말해서 버림받았으니 그 짓을 하지 네가 그 짓의 정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에서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지만 너희들은 그냥 버림받았어.”
그냥 버림받으면 저주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가 있는 곳에 은혜를 더 넘치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표상으로 만들어요. “너는 나의 긴 그림자다.” 하고 십자가의 그림자로 봐서 “버림받았지? 그런데 버림받은 자도 내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버림받은 너를 나중에 나처럼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한다면 지금 네가 하는 것은 그림자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그림자가 두 가지의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두로처럼 왜 멸망되어야 하는가? 또 하나는 왜 구원되어야 하는가?
멸망된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이상스러운 일이 뭐냐 하면, 왜 멸망되어야 되는데 왜 구원이 되지, 라는 것을 오히려 굉장히 영광스럽고도 신기하면서도 감사하게 되지요. 그런데 멸망되어야 됨을 당연시 안하게 되면 ‘하나님이 독자적인 나를 한 번 건져내 보시지? 나를 천국에 넣어보시지? 넣어보시면 나는 당신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이렇게 흥정조로, 거래조로 나와 버려요. 왜냐하면 독자적으로 자기는 자기가 지킨다고 본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두로 지방은 멸망받기 위해서 그 두로가 생겼어요. 그런데 멸망받기 위해서 두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볼 때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두로 백성이나 같은 우리 인간들 보기에는 ‘두로가 뭘 잘못해서 그렇게도 좋게 지어진 도성이 멸망당했나, 무엇이 잘못되었나, 교만한가, 아니면 너무 잘되니 까불다가 그렇게 되었나? 그렇다면 우리는 까불지 말고 겸손해야지.’ 사람이 겸손하면 멸망 안 당합니까? 겸손하면 멸망 안당해요?
우리는 두로지방을 그림자로 볼 줄 알아야 돼요. 나의 멸망당할 이유로서 두로지방은 나의 그림자에요. 두로지방이 당한 이 모든 모양새는 내가 그 모습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두로 사람들은 자기를 그림자로 보지 않고 실체로 보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우리는 나를 그림자로 보지 않고 지금 실체로 보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멸망의 이유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림자로 보는데 우리는 그것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만지면 만져지고 피가 나오는데 이게 왜 그림자입니까? 이게 물감이 아니고 케첩이 아닌데, 이가 아프면 잠이 안 오는데요.
이게 간격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는데 우리는 하나님 따로 우리 따로에요. 따로니까 그 ‘따로’에서 새로 출발하는 겁니다. ‘나는 실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합류하고 통합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먼저 두로에게 배워라. 먼저 멸망을 배워라. 멸망이 있어야 해.” 멸망받기 위해서 내가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구원은 그 속에서부터 피어납니다. “주여, 우리는 멸망 받아도 괜찮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멸망이라면 그림자는 마땅히 멸망의 그림자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 그림자속의 다른 면,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기능도 우리 안에 같이 활동하게 되는 겁니다.
“그림자 같은 나, 멸망 받아 마땅한데 십자가의 은혜로, 이렇게 실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실체가 되게 하셨군요.” 바로 이것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두로 지방은 잘 먹고 잘 살다가 졸지에 멸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하나 되지 못한 그 자체가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하고 초조하고 두렵고 모든 것이 걱정되고 염려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지, 그러나 내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주의 그림자요 주의 것인 것을 저희들은 다시 한 번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