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62강, 63강) 속이지 않기, 인간의 조건 140127
유튜브(62강, 63강) 속이지 않기, 인간의 조건 140127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62강
63강
유일자(IP:116.♡.234.248)
14-02-01 18:20
62강-YouTube강의(속이지 않기)1401027-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많은 충돌이 일어나고, 핍박도 일어나고, 회개하는 것도 일어나는데, 충돌의 그 기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1장10절에 보면,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라 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좋게 하는 것을 같이 병행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주장을 하면서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들은 많은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교회의 이야기들은 만약에 사람을 좋게 하지 않을 경우에 교회가 이 정도로 우후죽순처럼 많이 나타나겠는가? 그리고 그 교회가 주장하는 신학이 정말 사람을 기쁘게 하는 신학인지, 기쁘게 하지 않는 신학인지 우리가 한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만약에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환영을 받게 될 것이고 만약에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면 본인들이 망가집니다. 본인들의 인생이 나락에 빠집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 예수님 하지만 사람들이 제일 질겁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자기가 무너지는 겁니다.
자기가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거예요. 무섭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물론 생계도 보장되지 못하고, 하나의 존재로서 나와서 인간답게 살아야 되는데, 이 사람, 저사람 모든 사람에게 밀침을 당해버리면 이 세상 어디 가서 발붙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사람을 기쁘게 하느냐, 아니면 그 사람들 미움 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선 본인부터 자기 자리를 마련하려면, 그들이 원하는 것에 일차적으로 맞추어 나가야 되는 겁니다. 그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이예요. 그 외에 다른 방식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그 외에 다른 방식이 있다는 거예요.
그 특징이 뭐냐, 성령을 받게 되게 되면,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이야기를 했을때 누가 반박하느냐.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 당시 종교인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같이 더불어 산다고 생각하는 그런 자들에 의해서 상당히 그들은 어떤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을 속이고 헌금하는 대목이 나오죠. 그것도 역시 속이는 자예요. 그 속이는 자가 하루에 두 부부가 다 죽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8장에 보면, 시몬이란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사도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자기도 성령을 받고 싶어 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변사람들이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아 넘어가 주더란 말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나를 대단한 존재로 간주해 주는 겁니다. 제 말은 주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들리는 소리가 ‘너는 너 자신을 속여서라도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해다오.’ 라는 요청인들이 주변에 깔려있다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누가 사람과 사귄다는 것은, 자신을 속여서라도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해 줄 경우에만 내가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시몬이란 사람이 성령 받기를 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돈을 줄테니까 내게 성령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는 거예요. 남들에게 인정받을 경우에만 내가 사는 이유가 생긴다는 겁니다. 오늘날 개신교의 교회의 신학을 간단하게 말하면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거예요. 개혁주의 신학은 딱 하나만 알면, 개혁주의 정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너의 역사가 너를 말해 준다는 겁니다.
역사를 통해서 내가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평가 받겠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예요. 근데 역사를 쪼개보면, 역사라 하는 것은 본인의 역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건전한 역사라고 인정해 줄 경우에만 그걸 옳은 역사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믿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인정하는 역사에 내가 같이 속해 버리면 더불어, 함께 그들에게 인정받으면서 나도 살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고, 그 개혁주의 신학을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걸 듣는 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빙자해서 나만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그 나만의 역사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정해 줄 것이라는 거래와 흥정에 의해서 그들은 사는 보람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신학,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남들이 진리라고 인정해 줄때만 진리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자기 마음에 맞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을 속이는 거예요. 하나님을 속이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사도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사람들의 행진 이예요. 이 말은 다른 말로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너를 속여서라도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제공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도들은 절대로 너희들을 속이지 않겠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들이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못살죠. 그래서 순교의 열전이죠. 죽죠. 사람들이 좋아하고 듣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데 그들을 그들의 공동체 사회에 그들을 수용해 주겠습니까? 안하죠? 배척하죠. 사도행전은 이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배척받는데 그 배척받는 것의 반복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성령 받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진리를 전파했는가, 그것을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그리고 성도들의 성령 받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되풀이 해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내가 온 것은 너희와 타협하러 온 것이 아니고, 너희들과 전쟁을 치르러 왔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옳은지, 너희가 옳은지 너희가 마귀한테 속고 있는지 아니면, 나 예수가 너희를 속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오히려 거짓말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거 했습니다 그 제거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일은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를 속이는 자로 간주했던 그들의 판단이 맞는지 반대로 그들의 정당한 판단이라고 여겼던 그 판단에 의해서 죽어버린 예수님이 정말 그동안 사람들을 속이지 않은 분이였는지.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갈라디아서1장10절에 있는 말씀처럼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목회자가 설교를 할 때에 먼저 사람들이 뭘 좋아 하는지를 간파를 해야 돼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피해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이란, 제발 우리들을 속여서라도 우리의 원하는 바를 해다오. 우리에게 축복해다오. 그들은 간절히 요청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 옵니다.
절대로 그들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 원하는 바를 이야기 했습니까, 예수님은 진리를 이야기 했습니까? 주님은 진리요, 길이고 생명입니다. 바로 그들의 원하는 것을 책망함으로서, 책망 그 자체가 진리가 되는 말씀,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사도들 입에 담아 주신 겁니다.
유일자(IP:116.♡.234.248)
14-02-01 18:32
63강-YouTube강의(인간의 조건)1401027-이 근호 목사
인간의 조건을 전하는데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들이 인간의 조건을 전하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은 숱한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방식이고 윤리학자, 도덕학자, 그리고 종교인들 그리고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지금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행복해지면 고게 오케이 라는 겁니다. 현재 여기 있는 내가 절대로 불행하면 안 되고, 불행하면 나만 손해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무슨 교리, 무슨 종교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행복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가장 품격 있고, 품위 있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에 있는 인간의 활동은 그 목적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그들은 이야기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행복입니다. 행복에서 ‘행’ 자를 하나 빼 보세요. 그럼 뭐냐, 복이예요. 복에 대해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복을 더 많이 확장시키는 방식도 되고, 소극적으로 지금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저주를 떼내면 그것이 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공통점이죠. 보편적인 생각이고, 나의 나됨이 조건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은 예수님의 귀신 쫓아냄을 봤다고 칩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 세상에 내 힘으로 떼내지 못한 귀신을 예수님은 떼냈어? 귀신이 있었을 때는 저주고 불행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떼내면 병도 떠나고 저주도 떠나고 그러면 내가 원래 기대했고 노렸던 복, 행복은 내가 얻을 수 있겠구나. 야 참 그 예수님 좋은 분이네. 그 예수를 안 믿고 누굴 믿겠어. 귀신을 쫓아내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으니까,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니까 그래 예수를 믿어서 내 몸에서 저주와 귀신을 떨어내야지.‘라고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의 귀신 쫓아냄을 보면서 나에게도 믿음으로 떨어져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귀신 떨어진다는 이 말은, 귀신 떨어져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니가 어떤 인간이었기에 그 동안 귀신이 달라붙었는가를 다시 귀신이 붙은 그 자리가 바로 너의 본래의 자리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잠시 귀신을 떼놓는 겁니다. 떼놓은 귀신이 어디 가겠습니까? 친구 일곱 데려와 가지고 다시 그 자리에 오는데요? 그러니까 귀신만 떨어지면 모든 만사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오히려 더 많은 귀신을 유발시키고 부르는 셈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떼내고 병 고치니까 사람들에게 인기 좋았습니다. ‘야, 메시야가 아닌가. 야, 저분은 정말 하나님의 종이다.’ 하고 숱한 대중들이 몰려 왔었어요.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성경 박사들도 왔습니다. 요새 같으면 목회자들이죠. 그리고 그들은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정말 메시야인 것을 뭘로 증명할래.’증명한걸 보면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해주겠다 할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온 것은 병을 고치려 함이 아니고, 내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러 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예수님답게 이해하려면, 우리가 지금 죄 속에 파묻혀 있어서 우리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내가 지금 행복해야 돼. 라고 다들 생각하는 이것도 우리가 뜯어고쳐야 될 죄라는 겁니다. 이거 충격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어린애가 되어서 아무 어떤 사심 없이 자연스럽게 세상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면서 형성된 그 인격이라는 그것이 죄라는 거예요.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어떤 못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정갈하게 자기마음을 깨끗한 유리처럼 늘 깨끗하게 하면서 선한 일을 도모하면서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결국 죄라는 겁니다.
마귀가 원하는 거예요. 귀신이 달라붙는 자리라는 거예요. 이거 어디서 문제 생겼습니까? 제가 이 강의 하면서 제일 먼저 이야기 했죠. 인간의 조건이 두 가지 있다고 했죠? 첫 번째 이야기 할 때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했죠? 다만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20대 젊은 사람 보세요. 내가 어디서 왔는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 있는 나가 어떻게 하면 취업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인간의 조건, 내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행동할 때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되는가? 그것은 취업이다. 건강하고.
취업이 될려면 남들이 용납하고, 남들이 수용할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이 될 때만 취업이 되는 거예요. 돌발적인 사고방식 같으면 들어가도 쫓겨납니다. 그러면 내가 생각했던 인간의 조건 깨져버리고 그 인간의 조건의 끝을 찾아보니까 결국 내가 행복해야 되는데, 그러나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행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원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다가 집어넣습니다. 그 자리에서 피어나오는 것은 온통 저주의 지뢰밭입니다. 저주의 밭입니다. 거기는 마귀와 함께 더불어 살아야 될 그 공간에다 집어넣습니다. 거기서 인간은 살면서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면서 노동의 고통과, 해산의 고통과 그리고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소실되고, 소멸되는 그동안 평생 동안 자기 여기 있다, 있다를 사수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건만 있다는 그 덩어리, 그 덩치. 그 본래의 본체가 원치 않게 날아가 버려요.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립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우리가 있음 이전에 뭐가 있었는가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조건은 우리가 정하는게 아닙니다. 너 있어? 나 있어? 있는 사람 다 모여. 인간조건 형성하자 그렇게 정하는게 아니예요. 인간 빠져요. 남자 빠지고, 여자 빠지고, 할아버지 빠지고, 고조할아버지 빠지고, 증조할아버지 다 빠져요. 아담 빠져버려요. 남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밖에 없어요.
창세전에 정해진 겁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어떤 사람은 사랑 받기로 작정돼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가기로 작정돼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조건입니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이 태어나서 인간들이 관여해서 본인의 운명을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보다 먼저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이야기가 끝난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속성을 위해서 인간은 조건이 붙여졌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그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 인간은 덧붙여진 겁니다. 인간에게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보다 먼저 선행하는 조건을 위해서 인간이 존재하는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창세기 3장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을 위해서 가죽옷을 입힌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요, 가죽옷이 담겨 있는 그 사건의 다발을 앞으로 풀어내기 위해서 인간은 가죽옷을 위한 옷걸이로 그냥 걸치고 있는 거예요.
가죽옷에 담긴 그 내용, 그 내용이 인간이 죽고 살고 태어나고, 죽고 살고 성장하고 소멸하고 해체되는 반복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남긴 복음의 내용을 후대로, 후대로 전달, 전달 해주는 기능으로 인간은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행복요? 그건 마귀도 그런 소리 합니다. 복요? 복은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 때 복이 들어와요.
진정한 죽음, 진정한 저주의 마지막은 지옥의 유황불이예요. 지옥, 우리가 만든게 아니예요. 천국,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든게 아닙니다. 우리가 만들지 않는 천국을 우리가 널름 들어갈라구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지옥을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지옥에 들어갈 수 없고, 못 들어가는게 아닌 것처럼 천국도 우리가 원한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도록 조건 지어진 사람에게만 갑니다. 그 조건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희망과 상관없이 원하는 자도 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도 아니고 오직 불쌍히 여기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구요? 그것은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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