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선악겹치기)140102-33강a-이 근호 목사
가락-70이레 논문(선악겹치기)140102-33강a-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선악겹치기)140102-33강a-이 근호 목사
250 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일직선분으로 묘사되는 시간관에 비추어보면 한 직선 위에서 ‘완료- 미완료‘ 혹은 ’이미-아직‘이라는 모순관계를 기하학적으로 점을 찍어가도록 만드는데 이 모슨 자체가 시간의 한계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역사적 시간관을 고수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몸을 위한 시간성을 받아들이는 무리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돼 있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시간은 직선입니다. 인간은 폭이 없어요. 그냥 직선 이예요. 시간은 폭이 없습니다. 시간은 면적이 없어요. 전선 위에 기어가는 벌레가 전선 말고 다른 데로 옆으로 샐 수 있습니까? 안 되잖아요. 인간의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 단선으로 가고 있는데 여기 옆길로 높게 뛰어 들어갈 여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거는 인간의 시간관 속에는 면적 개념이 없어요. 1차원 개념이지 2차원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이미-아직, 완료-미완료, 이렇게 되니까 요 직선으로 표현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리델보스나 게…보스는 뭐라 하느냐 하면 면적을 만들어서 하는 말이 여기 십자가 여기 재림하는 걸 해서 그리고 이 지점(재림)에서는 ‘아직‘이라는 거예요. 이 지점(십자가)에서 보면 이미 하늘나라 되었지만 이 지점에서는 ’아직‘이라는 겁니다. 여기를 하늘나라라 봐서 이게 신학교 때 성경 신학 책에 배우거든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 다 있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갑자기 면적이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이런 게 있을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너희 안에 있다.” 할 때 ‘이미‘고 아직 구원 안 됐다 하는 것은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아직 구원의 때가 남아있다. 열심히 하라.”라는 그런 대목이 있으니까 그 두 개를 같이 하다 보니까 이게 시간적으로 다 됐다는 말인지 안 됐다는 말인지, 그럼 이 지점에 와 있다면 이미 구원받았는데 아직 덜 구원받았다. 이게 무슨 이런 이야기가 다 있습니까? 이미 구원받았는데 덜 구원받았다. 성립 안 되죠. 성립이 점을 찍어줘야 열리는데 이런 점 자체가 없어요. 시간은 이런 위의 면적 이런 게 없다 이 말이죠.
이 잘못을 누구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이거는 왜 그런 식이 벌어지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 몸이 갖고 있는 일직선 몸에다가 예수님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그런 성경 말씀을 무리하게 작용하다 보니까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일종의 사기인데 엉터리 아닙니까? 이런 짓을 했다 이 말이죠.
그걸 이렇게 발표했는데 그 발표한 모임이 무슨 모임이냐 하면 ‘한국 개혁주의 신학회’ 모임 이예요. 신학회 모임인데 그 다음 251 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비롯해서 개혁주의적인 성경신학자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 오류는…』해석 오류 했다고 나오니까, 지금 보니까 그 사람들의 인상이 일그러진 이유를 알겠어요. 『‘하나님 나라‘ 인간적 시간관에 준해서 이해해주려고 노력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하나님 나라를 인간적 시간관에 준해서 이해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이해가 된다면 인간의 몸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돼 버리니까 그럼 주님의 몸을 믿으면 안 되고 누구 몸을 믿어야 돼요? 자기 몸을 믿어야 되니까 이거는 종교죠.
이거는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효로 돌리는 거와 똑같습니다. 분명히 아셔야 될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럼 선악과 따먹은 몸이 표현해 내는 종교가 있어요.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어떤 표현해 놓은 신앙이라든지 그걸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선악과 따먹은 채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학을 전개한다면 뭐가 나오겠습니까? 인간이 이미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신이라고 행세하잖아요. 신이라고 행세하면서 어떤 성경책을 다 줄줄 다 외우고 신학을 전개한다면 나올 건 뭐가 나오겠어요? 선악과를 따먹은 걸 긍정하는, 선악과 따먹은 자체를 긍정하는 쪽이 나오겠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선악과 따먹은 입장에서 써버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려고 그렇게 구원하려고 애씁니다. 이렇게 되죠. 그게 선악과 따먹은 종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신앙을 이야기하려면 선악과 따먹고 나오는 이론들이 이러이러한 이론들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죄였습니다.’ 라고 지적할 줄 알아야 그게 진짜 성령에 의한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 어느 신학 책을 봐요. ‘선악과 따먹은 신학은 이겁니다.’ 라는 말을 아무도 안 해요. ‘그저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성을 접촉점으로 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인간의 종교성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고 긍정적으로 어떤 신앙의 발단, 어떤 계기, 좋은 뜻으로 그렇게 그걸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럼 됐습니다. 거기다가 요거만 조금 보태면 됩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선악과 따먹은 것을 긍정하고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생명을 따먹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사람들 말이 맞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따먹었나? 이왕 따먹은 거 소용없고 생명나무 따먹어야 살지.’라고 하나님이 생명나무 따먹으라고 줬다면 선악과 따먹은 바탕에다 생명나무 소식, 복음 소식을 담는 것이 가능한 것이 맞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아요. 선악과 따먹은 그 모든 것 때문에 인간들은 어디 가느냐 하면 저주를 만나야 돼요. 그러니까 인간은 저주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신앙과 그런 종교와 그런 복음과 그런 믿음 그런 모든 신학이 없는 저주를 일으키는 그런 쪽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걸 저와 여러분들이 지적을 해주셔야 돼요.
선악과 따먹었을 때 나올 수 있는 신앙관, 종교관이 뭔지를 아십니까? 도를 아십니까? 이런 거 하지 말고 선악과 따먹었을 때 나오는 거, 종교. 그 대표자가 누구냐? 가인입니다. 가인은 추수 잘 되고 난 뒤에 기분이 업 돼서 이 모든 은혜와 공로는 다 하나님께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귀한 생산물 중에서 일부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죠. 최초로 추수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주 기쁘게 받았습니까? 안 받았죠.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누가 드리느냐? 그건 누가 드리지 못해요.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내십니다. 그게 중요해요. 아벨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낸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요.
그게 뭐냐 하면 절대자 속의 분열과 통일이라는 겁니다. 절대자?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분열을 일으켜요.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마지막 때 이 땅에 보내셨죠. 그때까지는 우리는 분열이 아니라고 봤죠. 왜, 자기 아들을 파견근무 보내는 거예요. 재벌이 자기 아들을 미국 지사로 파견하는 거, 그게 분열입니까? 일을 더 하라는 거잖아요. 삼성그룹이나 현대그룹에서 파견 보내면서 십자가 이야기합니까? 할 필요 없죠.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냈다 하는 말은 ‘아! 일을 더 확대시키려고 보내셨구나.’라고 아는데 막상 아들이 와서 십자가에서 하는 말은 뭐였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게 시편 22편인데 혹시 대전강의 들으신 분 계십니까? 여기 22장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요 대목 나옵니다. 요 대목 외우기 쉬운 게 23장이 시편에서 유명한 시편 이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거보다 한 끗 더 작은 숫자가 22장입니다. 22장 앞에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돼 있거든요. 여기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돼 있어요. “내 아버지여”가 아니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거기는 “내 아버지여” 라고 돼 있어요.
어쨌든 내가 다윗 강의하면서 뭐라 했느냐 하면 골리앗과 다윗 싸움할 때 다윗이 없다고 이야기했죠? 다윗이 없어요. 사울이 보기에는 다윗이 있지만 다윗이 보기에는 본인이 있다고 생각 안 하고 주님이 개입해 버린 거예요. 주님이 개입해 버리면 자기가 있다. 없다. 있음, 나는 있다 할 때 있음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예수님 있음으로 홀라당 다 빼앗기게 돼요. 참 말 어렵죠?
‘내가 있다.’ 할 때 ‘있다.’를 뚝 떼서 있음을, 실제적으로 있음은 그냥 있으면 안 되고 이게 기능적으로 발휘될 때 있음이 되는 거예요. 있음도 하나의 창조고 있음도 하나의 기능이다 말이죠. ‘내가 있다.’ 되려면 내가 있게 해서 있을 때만 ‘내가 있다.’가 되거든요. 이해하십니까? 내가 날마다 ‘숨 쉬라. 숨 쉬라.’ 해서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수면내시경이나 밤에 잘 때 본인이 그때 있습니까? 여러분 꿈속에나 본인이 보이지, 자기가 자는 모습을 자기가 느낍니까? 못 느끼죠. 그러니까 없는 거예요. 있다 할 때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기능적으로 있는 거예요.
다시 해봅시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시스타 노래 중에 나오지만, 있다. 없다. 할 때에 우리는 내가 평소에 살아가니까 ‘내가 여기 있다.’가 의미 있다고 보는데 주님께서 만약에 우리를 있게 하신다면 우리 있음을 종이 가져야 됩니까? 나를 있게 한 주인한테 가져가야 돼요? 주인이 가져가야 되죠.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예수 안에서 우리가 있는 거예요. 예수 안에 없으면 우리는 지옥 갑니다. 십자가 안에 없으면 우리는 지옥 가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놓고 십자가 앞에 ‘있다. 없다.’를 보는 거예요. 우리는 자연적으로 몸둥아리 있는 이상 있다고 보는데 주님은 우리 몸둥아리 있다고 보는 게 아니고 우리 몸을 언약 적으로 보는 겁니다.
언약 적으로 봐서 언약 적으로 있으면 구원받고 천국 가고 언약 적으로 없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뭐로 보느냐 하면 언약을 금속 탐지기로 보면 돼요. 지지직~ 지지직~ 금속 탐지기로 해서 언약 적으로 있기, 없기. 해서 언약 안에 들어 왔으면 구원받고 안 그러면 지옥 가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이예요.
이러니 이걸 설명을 해야 된다니까요. 다윗 때 분명히 다윗은 말하기를 ‘이번 전쟁은 골리앗과 나의 전쟁이 아니고 만군의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할 때는 다윗은 남들의 눈에 보이더라도 ‘없기‘가 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 ’있기‘가 돼서 지금 골리앗은 다윗하고 상대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와 상대했느냐 하면 만군의 하나님을 상대한 겁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들 이스라엘 보기에 소년 다윗의 모습으로 비춰 나온다는 거예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어, 소자 너 민증 까봐라. 혹시 별에서 온 그대인가 보자. 민증 까봐.’ 오로라 끝나니까 엉뚱하게 별에서 온 그대라 해서…
성경 해석을 다윗이 없다 하니까 기가 찰 일이잖아요. 실제로 이게 언약 안에 있는 통용되는 단어가 성경인데 언약 바깥의 이방인들이 이걸 보니까 이게 자기 맘대로 이야기되는 거예요. 마치 엄마가 장난감을 줘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라고 했는데, 은행 놀이하는 장난감, 부엌놀이 하는 장난감, 인형놀이 옷 갈아입는 장난감을 주니까 애가 바보가 돼서 애가 크레용 가지고 장난감 용도도 모르고 색칠하고 낙서를 한다면 아빠 엄마가 어떻겠습니까? 장난감 줄 마음이 듭니까? 안 듭니까? 안 들죠.
이 성경 말씀은 예수 안에, 언약 안에 있을 때만 구원받는다는 걸 알기 위해서 성경을 줬는데 인간들은 철이 없어서 성경 가지고 자기가 선악과 따먹은 것을 정당화하는 데다 이걸 쓰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 말씀이 오히려 바리새인 너희들을 더욱 더 심판케 한다는 거예요. 너희들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모세가, 너희들이 그렇게 신봉하던 율법을 줬던 그 모세가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
구원하려고 준 장난감에다 저들은 자기 옹호하는 쪽으로 색칠을 해서 기도하면 복 받는다. 헌금하면 복 받는다. 온갖 색칠을 하니까 이건 더욱 더 저주가 저주를 불러요. 화를 더 부른다고요.
개혁주의가 바로 뭐냐 하면 완전한 자기의 몸을 없는 존재로 만드는 신학이 아니고 자기 몸을 긍정해서 어떻게 이 몸과 예수님의 몸을 만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연결된 게 개혁주의인데 그 개혁주의의 모든 사고방식은 뭐냐 선악과에서 나온 지성이고 이성이고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개혁주의는 저주가 저주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개혁주의에서 칼빈, 루터, 거기서 나온 모든 교파가 개신교 교파입니다.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할 거 없이.
시편 116편 11절 보면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돼 있죠? 다음에 15절에 보면 “성도의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뭐로 봅니까? 귀중히 보시죠. 그 두 개를 연결하면 “이 거짓말쟁이들아, 죽어라. 죽으면 내가 그건 귀하게 볼게.” ‘모든 사람’에 우리는 포함돼요? 안 돼요? 예수님 빼놓고 다 포함돼요. 이 말씀이 곧 로마서 3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것은 거짓되나 하나님만 참되시다.”
우리는 거짓말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어떻게 지어내는 게 아니고 몸 자체가 ‘내가 있다.’하는 자체가 거짓말이거든요. 언약 없이 보는 거예요. 그게 이방인입니다. 이번 주일 낮 설교가 이스라엘이 구원에 실패한 그건데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으면 있는 게 뭡니까? 육신이 있잖아요. 내 육신에다 뒤에 내가 있다고 붙이는 거예요. 언젠가 설교 했던가 지난주일 낮인데 이 근호가 누구지? 그런 사람 있었나? 그런 예를 든 게 기억납니까? 그게 아무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부터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답변하기가 참 난처한데 어쨌든 질문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래요. 자, 문제낼 테니까 속으로 한번 답변해 보세요. 동영상 보시는 분들도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악을 어떻게 제거 합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선악 자체가 죈데 이 악을 어떻게 제거해요? 많은 책과 많은 철학자들이 악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대해서 답변을 못 내놓고 있어요. 기껏 뭐냐 하면 악이 있는 곳을 피하여 따로 살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악이 제겁니까? 도망친 거예요? 이건 도피한 거예요. 그럼 악이 안 따라 옵니까? 지리산 혼자 가면 거기 악이 없어요? 기도원에 가면 악이 없습니까? 기도원에 수도세 전기세 내려하면 다 싸우고 하는데.
악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이 이 질문보다 더 어려워요. 어떻게 제거하느냐 하면 악에다 선을 겹쳐서 선을 제거하게 되면 악도 같이 제거되는 거예요. 굉장히 쉽죠. 이것을 무슨 방법이라 하느냐, 설거지 방법입니다. 설거지 방법.
파올이란 물리학자가 같은 물리학자하고 스키장에 갔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놀라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고함치면서 뛰쳐나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더러운 그릇을 더러운 물에다 더러운 걸레로 씻어내죠. 자꾸 씻어내니까 물이 더러워질 게 아닙니까? 그걸 보고 그 사람이 뭘 알았느냐 하면 더러운 것을 씻어내게 되면 결국 마지막 남는 것은 씻어도 안 씻기는 것만 남아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전까지는 물리학은 무엇이 옳은가를 실험하고 그것을 논리로 전개해서 진리라고 규정했다면 파올 이 사람은 그렇게 하지 말고 무엇이 엉터리 이론인가를 실험해서 엉터리 됨을 끄집어내면 된다는 거예요. 하나, 하나 수풀 속에 물건이 있으면 나무 하나, 하나 벗겨내면 되는 거예요. 온갖 나쁜 짓을 다 끄집어내면 되죠.
그러면 선과 겹치게 하는 방법 이건 제가 생각한 거예요. 이건 파올이 생각 못 한 것이고, 파울이 만약 생각한다면 불교의 논리에 이런 게 있어요. 거울에 먼지가 끼어 있으면 거울의 먼지를 털어내면 비로서 맑은 것이 보인다. 그게 선 부분, 중국의 불교 부분에 도사들의 불교 철학에 보면 나오는데, 저는 그 방법이 아니고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뭐냐 악에다가 선을 입혀버려서 선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제거해 버리면 거기 붙어있는 악도 같이 제거가 되면서 악도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제 방법이 왜 중요하냐 하면 선과 악이 결합될 때 지금 하나님께서는 악한 나무를 먹지 말라 했습니까? 선악을 아는 나무를 먹지 말라 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제가 알기는 선악 이예요. 악한 나무가 아니고. ‘아담아 동산에 썩은 나무 있는데 잘라내라.’ 하면 대번 잘라내죠.
그런데 동산에 선과 악을 아는 나무에요. 그걸 제거가 아니고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늬앙스가 있느냐 하면 만약에 그걸 따먹었을 때, 선악을 아는 나무를 따먹지 말라 했는데 그걸 따먹으니까 선악 나무는 있으나 마나죠. 그걸 제거해야 되겠죠. 그걸 제거하는데 그걸 제거할 수가 있느냐 말이죠. 제거하는 그것을 선악을 따먹은 인간에게 그것을 제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자기가 좋다고 따먹었는데 자기가 자기 손으로 선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 선악과가 어디 있습니까? 선악과가 자기인데 자기를 죽이는 거잖아요. 이거는 불가능성이죠. 불가능함이죠.
하나님께서 악을 제거할 때 ‘그냥 악을 제거해 줄게.’가 아니라 먼저 뭘 언급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악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언급을 하면서 인간이 언급을 하게 되면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수용을 할까요? 수용 안 할까요? 수용하지 않죠. 왜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악은 제거하고 선 쪽으로 나가고자 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 기껏 아는 한계에요.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이 노는 바탕이 선악밖에 없어요. 악은 버리고 선 쪽으로 나가고.
선악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어요. 선이 없다는 사항을 생각 못한다니까요. 항상 선은 악, 악은 선, 그걸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악을 제거하면 선만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인간의 기껏 생각이지, 선악이 같이 날라 간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게 불가능해요. 악을 제거하는 것도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선악을 함께 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이렇게 불가능하게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선악 자체를 제거하는데 거기에 누가 뛰어드느냐 하면, 바로 선하신 분 예수님이 뛰어들어요.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그 다음에 뭡니까? 죄를 지심으로써 악인이 되면서, 예수님이 악인 됐다는 증거는 십자가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 그 버리시나이까? 하는 사건을 발생시켜 버립니다. 발생시켜 버리면 그 사실에 대해서 그걸 지켜보거나 그것을 바라보거나 그걸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있겠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죠. 왜냐 하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은 항상 자기 위주기 때문에 ‘아! 저런 식으로 내가 하면 용서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구원의 불가능성 원칙에서 위배돼요. 인간은 어떤 식으로 해도 구원이 불가능해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일임했습니까? 예수님께 일임했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관찰이고 뭐고 간에 인간의 구원에서는 그건 떨어져 나간 존재에요. 떨어져 나간 존재가 바라보면서 ‘야, 저래야 구원받는구나.’ 하는 감탄의 소리를 할 인간이 없다 말이죠. 만약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지금 주님의 취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 이예요. ‘주님이 저런 식으로 하니까 내가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저런 조치를 했구나.’ 하는 그 자체가 이게 하나님께서는 설거지 방법에 해당 안 됩니다. 설거지 방법은 뭐냐 하면 모든 움직이는 것이 다 더러운 것이죠. 더러운 것을 씻으시는 분은 인간이 못하고 오직 누가 한다? 예수님이 하죠. 그러면 이 그릇에 묻은 때는 누구이어야 됩니까? 때는 우리자신이잖아요. 그럼 주님이 설거지 하면서 뭐도 날라 가 버려요. ‘나 어떻게 하면 구원되지? 주께서 하는 것 지켜볼까?’ 이러다가 설거지 같은 때로 물에 더럽게 빠진다니까요. 어디 거기서 기다려요?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면서 자기 자신이 예상한 전쟁과 전혀 다른 전쟁에 지금 빠져 들어간다는 걸 알았어요. 그렇다면 다윗은 ‘이번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솔직하게 할 수밖에 없죠. 내가 이런 전쟁을 기다린 게 아니고 자기도 말려들고 모든 공로는 누가 가져갑니까? 주님께 가져가 버리죠.
그런 식으로 뭐가 오느냐 하면 이게 언약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언약 안에서 있음이 있음이지, 그냥 내 몸둥아리 있음은 있음이 아니라고요. 있음이라는 것은 그냥 있다고 있음이 아니고 반드시 뭐 해야 되느냐 하면 반드시 기능으로 작용해야 돼요.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돌이 있습니다. 이 돌에다 종이를 겹칠 수 있을까요? 또 컵이 있는데 요 자리는 뭐가 놓여 있습니까? 컵이 놓여 있죠. 컵이 놓여 있는 요 자리에다 매직이 요 자리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없죠.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한 쪽을 점유해 버리면 그거는 그 사람의 자리가 되고 다른 사람은 못 끼어들어요. 우리네 아는 상식입니다. 분명합니다. 안경을 놓으면 요기는 안경 자리가 되고 안경 자리가 매직이 같이 침범할 수 없어요. 매직 자리는 그 옆에 붙어도 그 옆이 매직 자리지, 안경 자리 그 자리가 매직 자리가 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 합니까? 예수 있는 곳에, 예수 안에 누가 있다? 내가 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 있으면 누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 몸만 있어야 되죠. 거기 우리 몸이 겹쳐 있을 수가 없어요. 우리의 몸은 다른 공간을 점유하기 때문에.
그래서 선악과를 겹쳐서 한다는 요 아이디어는 여러분 이해는 되시죠?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아니까. 문제는 뭐가 문제냐 하면 선과 악이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대해서 우리가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다. 어떻게 선이 악이 되느냐. 그래서 모든 신학자들과 모든 철학자들은 악을 제거하는 방법이 없어요. 왜냐 하면 선과 악을 일치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있다가 ‘철학자님, 그런데 선과 악이 서로 충돌해서 튕겨 나오게 되는데 어떻게 대치되는 선과 악이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니까요.
악이라고 하면 이해돼요. 몽땅 악 이예요. 선이라 하면 이해돼요. 몽땅 선 이예요. 그런데 선과 악을 함께 아는 나무라는 말을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이게 설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자기가 지킬하이드도 아니고. 제가 봐도 어떤 경우에는 선하다가 어떤 경우는 악하다가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있어요. 술 먹고 들어와서 마누라 개 패듯 패고 그 다음날 들어와서 프라다 명품 사주고 그럴 수 있는데 선이 있는 그 자리에 악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럴 경우는 없죠. 컵이 있으면 컵만 점유한 자리지, 컵자리에 다른 게 끼어들 수가 없잖아요. 이게 우리네 상식이고 누가 봐도 반박 못 해요.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너무 쉽게 ‘알았어. 다 알았어. 선과 악, 그냥 넘어 가.’ 넘어갈 때도 옛날에는 넘어갔지만 지금은 넘어가면 안 돼요. 지금은 그렇게 호락호락 자꾸 이것저것 다 빼버리고 차 빼고 포 빼면 장기도 아니고 다른 게임이 돼 버려요.
선과 악을 어떻게 겹치느냐, 한 자리 어떻게 겹치느냐, 이것이 설명돼야 됩니다. 개혁주의는 설명 못해요. 우리가 죄인이잖아요. 죄인에게 어떻게 선과 악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탕자가 일 잘했습니까? 탕자가 모범돼서 탕자처럼 우리가 다 세상 기생한테 다 팔아먹고 이럴까요? 탕자가 분명히 악하죠. 이름도 탕자에요. 그런데 탕자에 대해서 아버지의 조치가 선하죠. 어떻게 악한 자에 대한 조치가 그러하십니까? 소고기 잡고 가락지 끼우고 좋은 옷 입히고 어떻게 악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어떤 신학자, 어떤 철학자는 이걸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아는 신학자 중에서 저희들끼리 최고의 신학자는 뭐냐 하면 도망치는 신학자에요. 에카르트, 부르노, 이런 사람들, 신비주의인데 이거는 ‘무’다 해서 다른 무의 세계로 도망쳐 버려요. 그레비티 영화 같아요. 무중력 상태로 날라 가 버려요. ‘아휴, 귀찮아, 귀찮아.’ 불교에서 뭐라 합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 이래서 도망가 버려요. 해인사로 도망가나 신비주의가 수도원에 들어가나 이건 설명 않기 위해서 도망치면 유명한 신학자 돼 버렸어요.
하지만 성경에는 ‘이 소자에게 준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할 때 그 소자가 도망쳤습니까? 그냥 우리 일상에 만난 사람이 소자에요. 소자라 해서 소자만 모이는 특별한 기도원 따로 있습니까?
이 문제가 해결돼야 돼요.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할 때 힌트가 어디 있느냐?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되겠죠? 십자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난해한 십자가! 같이 겹치지도 못하는 그것을 할 때 사도바울이 썼던 용어들을 한번 봅시다.
예수 안에서 너희가 뭐가 된다 했습니까? “너희가 예수 안에서 의인된다.” 돼 있고, “예수 안에서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었다.”고 이야기했죠. 에베소서 1장 4절~5절, 예수 안에서 의인되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요,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분명히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는 사도바울이 십자가 언급할 때 분명히 십자가 사건 언급하는 걸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시대 사건은 이미 과거사건 이예요. 이미 한물 간 사건 이예요. 어느 사람이 우리보고 ‘네가 죽은 이순신 안에 있습니까?’ 하면 우리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잖아요. ‘네가 이순신 장군 안에 있으니 너는 살았고.’ 하면 무슨 소린지 아시겠습니까? 이순신 장군은 이미 1592년에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은 임진왜란 때 이미 죽은 사람이다 말이죠. 하여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인됐다 할 때에 여기에 동원되는 모든 언어나 이런 이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악 안에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되는데 사도바울이 썼던 모든 성경의 용어는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너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 안 돼.’라는 것을 폭로시키고 그걸 자극시키는 그런 쪽에서 성경 말씀들이 지금 발현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들어야 돼요. 듣고 우리가 무식하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돼요. ‘성경 말씀해도 나는 모르겠어. 기도 안 할 거야.’ 자꾸 도망치면 안 돼요.
구약도 우리가 이해 못하지만 신약 성경은 눈 감고 아무데나 펴보세요. 어떤 말씀을 봐도 우리가 이해 못하게 돼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우리가 이해 못하는 걸 알지만 제가 이야기하기 전에는 전부 다 이해 다 되죠. 전부 다 이해 다 됐다고요. 이해 안 되면 그냥 넘어갔으니까.
그런데 막상 모든 성경 말씀에서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이번 수요일 날 잠간 이야기했어요. 모든 말씀 밑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죽음이 깔려 있어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는데 말씀으로 직접 나간다고요. 직접 나가면 안 되고요. 이 밑에 죽음이 깔려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씀으로 가지 말고 ‘나는 죽었고’라고 해서 이렇게 올라가야 됩니다.
이 죽음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이 계세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죽음과 결합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죽음은 죽음이고 그 다음에 말씀으로 데려가는 것은 부활의 영, 곧 성령이 와서 데려가줘야 말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문자로 푸는 게 아니고 뭐로 푼다 했습니까?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죠.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물으니까 그리스도 영이 있는 곳에는 이상한 소리 했어요. 자유가 있다 했어요. 갑자기 자유는 왜 튀어나옵니까? 이거 오늘 뿌리 뽑아야 돼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돌판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백성들이 쓰는 히브리말 아닙니까? 그러면 그 말씀. 십계명이라면 우리가 읽을 수 있어요? 없어요? 읽을 수 있죠.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말은 곧 이해가 된다 이 말이잖아요. 글쎄 그게 이해가 안 되는 말이라니까요. ‘아니, 그게 왜 이해가 안 돼.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 공경하면 되지 뭐. 살인하지 마라.’ 칼로 찔러 죽이지 말라는 이 뜻이지. 탐내지 마라. 얼마나 쉬워요? 그걸 왜 이해를 못해. 그걸 이해할 것 같으면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쓸 필요가 없어요. 그게 언약이라니까요.
모세 수건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세 수건은 그 당시는 수건으로 보이죠. 이게 진짜로 모든 말씀이 다 개방이 돼 버리면 그건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 이해됐다는 그 자체가 그런 쪽으로 평소에 인간들이 살아왔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그런 되지도 않은 해석 가지고 그것 가지고 자기 정당성을 하면서 자기가 믿는다고 우기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까발리는 쪽으로 모세는 수건을 썼다 이 말이죠.
모세가 수건을 써버리니까 백성들이 ‘어이, 모세 양쪽의 돌 판은 뭐야?’ 라고 묻기도 전에 모세 얼굴도 볼 수 있어요. 볼 수 없어요? 지금 스탠드 이정도 해도 나는 눈이 부신데, 이런 거 천 개 켜 두면 이거 뭐 모세 십계명 보려 해도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해요. 모세가 들고 온 돌 판은 모세에 나타난 그 영광, 영광 때문에 해석도 하지도 못해요. 무슨 해석이 돼요? 들고 온 사람도 만나지를 못하는데. 그러니까 해석을 해야 되겠고 영광을 못 보니까 모세가 뭘 덮어 쓴 겁니까? 수건을 덮어썼죠. 수건을 걸치니까 겨우 백성들과 말씀이 되거든요. 그러면 그들이 이해 한 거예요? 안 한 거예요? 이해 못하죠. 왜냐 하면 수건 때문에 이해가 안 된 거예요. 수건을 벗겨버리면 안 돼요. 수건을 벗겨 버리면 또 영광이 안 되고 수건 덮어씌우고 하니까 이것은 제대로 된 해석이 수건에 의해서 가려워졌죠.
그러니까 이거는 수건이 결국은 뭘 주느냐 하면 말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데 수건을 씀으로써 안 죽게 된 겁니다. 죽지 않게 된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안 죽었다는 것을 가지고 자유케 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참 사도바울도 용어 쓰는 것도 협의해서 쓰는 것도 아니고 자기 맘대로 막 내뱉으니까 감당이 힘든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자유라 하는 것은 행동을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죽었어.’ 이 뜻 이예요.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죽었으면 죽음을 제가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해골이라 합시다. 우리 몸은 뭐냐 하면 해골 이예요. 해골을 품고 사는 게 아니라 아예 자체가 해골,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말씀이 뜨면서 우리로 하여금 해골에서 뭔가 입혀진다면 그것이 말씀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거예요. 뭐냐 죽었는데 말씀 해석하라고 그나마도 살게 했을 때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 영 안에서는 뭐가 있느니라? 자유가 있느니라. 그게 뭐냐 ‘네가 죽어 마땅한데 말씀 제대로 해석하라고 내가 임시로 풀어줄게.‘ 그런 뜻 이예요. ’ 성령 안에서 임시로 풀어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의 해석은 뭡니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죽음을 유발할 수 있는데 내가 살기는 왜 살았는가,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영이 오게 되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사건 안에서 예수님이 존재하게 되면 존재에서 사건이 발생되거든요. 예수님이 여기 퍽~하니 여기 있다. 라고 한다면 더러운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이건 끝까지 이해되기 위해서 들어야 돼요.
내가 여기 있음에 방귀를 뀌지, 내가 없는데 무슨 방귀를 뀝니까? 주님이 여기 계시매 성령이 피어나잖아요. 부활 생명이 있잖아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을 너희에게 신약 성경을 너희에게 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 성경을 받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산 사람이 되죠. 그리고 그 해석은 어떻게 됩니까? 그 해석은 이미 끝나버렸어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죽어 마땅한데 내가 있음이 아니고 누가 있음이다? ‘주님이 여기 있음에 말씀보고 구원받으라고 주께서 선물로 주라고 내가 지금 살아있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게 해석 이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주께서 이미 다 이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혜택을 입은 대상이 되라고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거예요. 이 말씀 외부에 나가서 소자처럼 증거 하라고. 이해되세요?
말씀은 누구 소관입니까? 전부 다 주님 소관 이예요. 우리는 말씀 볼 수도 없어요. 말씀 보기 전에 이미 영혼 보고 나자빠져야 돼요. 하나님 만나면 다 어떻게 된다? 죽는다는 거예요. 죽는데 제자들은 살았잖아요. 그건 뭐 때문에? 바로 언약 때문에, 성령 때문에 살은 거예요. 뭐 하라고? 그냥 살라고? 축구 하고 살라고? 말씀 제대로 해석해서 증거 하라고, 주의 증인 되라고 살게 하신 거라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 안에 있느냐 하면 이미 살려준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맘껏 모든 말씀을 해석할 때 나는 왜 죽어야 되며 주님은 왜 살아나야 되는가를, 지금도 왜 살아 계신가를 보여주는 쪽으로 전부 다 해석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네 마음속에 확신이 있어야 된다. 그게 십자가를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 속에 확신이 있어야 된다. 사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요 긴 이야기를 다윗에게 적용시키면 ‘다윗 언약을 위해서 다윗이 있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돼요. 이제 이해되십니까?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다윗 언약이 추가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고, 다윗 언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다윗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언약이 갖고 있던 그 내용, 그 내용이 메시야 내용이거든요. 그 내용을 위해서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남편 우리야 장군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알고 다윗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뭐 이 기쁨을 뭐로 표현됩니까? 길에서 만 원 주운 것? 어떻게 이걸 표현해요? 내가 그동안 진리를 알려고 했는데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 이예요. 진리는 아는 게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가 와서 우리를 활용할 뿐이지, 우리가 건방지게 진리 알아서 뭐할 건데? 진리 알아서 살려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죠.
그런데 그 자유라 하는 것은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누가 살아있다? 주님이 바로 겹쳐서 이 자리가 주님의 자리로서 겹쳐서 살아있는 거예요. 거기서 나는 날마다 죽이고 주님은 날마다 내 안에서 살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그런 식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 결론이 뭐냐, 그냥 사시라니까요. 그냥 사시되 죄지으면서 사시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죄지으면서 사시면서 내가 왜 자꾸 늙어 죽는지를 알아가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게 기능이기 때문에. 다윗도 간통했고 살인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일부러 간음 안 했다는 거예요. 일부러 살인 안 했다는 사실 이예요. 환경이 그 사람을 그렇게 몰아넣은 거예요.
그렇다면 형제를 미워하는 환경이 곧 무슨 죄가 된다? 살인죄가 되죠. 마음에 음란 품는 것도 간음죄가 되죠. 오른 뺨 때리면 멱살 쥐겠죠? 그리고 오른 손이 한 것은 누가 알아챈다? 대번 왼손이 알아채죠.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건 누가 구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우리 일상이 그거잖아요. 내 죄를 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기쁜지 이거는 돈 주고도 어디서 살 데가 없어요.
‘나는 새 언약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는 다윗 언약의 사람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다윗 언약이 납니다.' 우리는 '새 언약이, 예수님이 나고, 나는 예수님에게 다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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